<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Joseph Maria Olbrich(1867-1908)>





폴란드와의 국경 근처 오파바Opava(독일어로는 트로파우Troppau) 강이 흐르는 평야 중심에 위치한 오파바 태생의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1867-1908)는 1882년부터 1886년까지 빈의 주립상업학교를 다녔고 그 뒤 4년 동안 고향에서 건축가와 현장감독으로 일했다.
1890년 이후 그는 빈의 조형예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893년 로마상을 수상한 그는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북아프리카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올브리히는 1897년에 빈 분리파의 창립멤버가 되었으며 그가 1897년에 디자인한 빈 분리파 건물이 이듬해에 개관되자 분리파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구조물 장식에서 분리파가 응용미술에 역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부터 오토 바그너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2년 뒤 수석조수가 된 올브리히에게 최초의 공적인 아르누보 설계가 맡겨진 것이다.
빈의 세기말 건축에서 차지하는 고전주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엄격한 입방체 형태의 이 건물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프랑크푸르트와 비스바덴을 품고 있는 헤센Hessen의 에른스트 루트비히 폰Ernst Ludwig von 대공의 마음에도 들었다.
빅토리아 여왕(1837-1901년 재위)의 손자인 대공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영국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으며,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의 저서를 읽고 영국에서 일어난 공예부흥에 큰 감명을 받았다.
대공이 다른 것들에서 느낄 수 없는 감흥을 주는 건물이라고 극찬한 이 건물은 분리파 미술가들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설계되었다.
흰색으로 채색된 기하학적인 건물은 양식화된 상징적 장식으로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소용돌이 형태의 잎 장식으로 얽힌 둥근 금동지붕이 올려졌다.
클림트의 스케치가 남아 있어 그의 아이디어가 건물에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민들은 익숙지 않은 분리파 건물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사실 그 건물은 고전주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올브리히에 의하면 이 건물은 “미술애호가에게 조용하고 세련된 피난처를 제공하는 미술의 사원”으로 디자인되었다.
돔 모양의 둥근 지붕과 간결한 기하학적 정면은 신고전주의적인 사원이나 영묘Mausoleum, 혹은 18세기 영국 귀족이 조경 정원에 꾸며놓은 웅장한 은신처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이런 효과는 장식패널로 천장을 꾸민 높은 현관, 육중한 계단식 프리즈, 그리고 둥근 지붕 주위의 석재기부基部에 있는 세로로 홈이 파인 패널로 인해 강조되었다.
1899년 11월 건물 개관과 함께 제2회 빈 분리파전이 이 건물에서 열렸다.
빈 분리파는 클림트의 지휘 하에 젊고 재능 있는 화가들을 발굴하여 전시기회를 제공하고 빈 모던아트의 선두집단이 되었다.

올브리히는 1899년 헤센의 대공의 부름을 받고 19세기 조용한 요새에서 화학, 공학 그리고 제조업을 갖춘 도시로 발전한 다름슈타트Darmstadt로 가서 예술가 마을에 일련의 주택, 스튜디오, 갤러리 등을 디자인했으며, 마틸덴회어Mathildenhohe의 전시관 대부분을 건축했다.
예술가 마을이 건설된 뒤 6년 만에 올브리히는 눈에 띄는 높은 건물 ‘결혼 기념탑’을 디자인했는데, 다름슈타트 도시기금으로 엘레오노레 폰 졸름스 호헨졸름스 리히와 대공의 두 번째 결혼에 즈음해서 설립한 것이며 중세 후기고딕의 성문을 연상시킨다.
성곽의 다섯 개 흉벽은 선서하는 오른손처럼 마틸덴 언덕 위에 솟아올라 있다.
중심에 있는 ‘에른스트 루트비히 하우스’로 명명된 갤러리 건물은 블록 형태의 기능적인 건물로서 대공이 칭찬한 정교함, 가벼움, 취향이라는 덕목들을 결합한 것이다.
갤러리와 주변에 띄엄띄엄 정렬된 일곱 채의 예술가 주택 대부분이 올브리히에 의해서 설계되었다.
예술가 마을은 대공이 1899년에 세운 것이다. 대공은 1897년에 찰스 로버트 애슈비와 켄트Kent 태생의 맥케이 휴 베일리-스콧Mackay Hugh Baillie-Scott(1865-1945)에게 다름슈타트에 있는 자신의 궁전의 방들을 장식할 것을 의뢰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한 후원은 2년 후에 설립한 예술가 마을이었다.
올브리히를 포함하여 대공이 초대한 일곱 명의 미술가들에게는 3년 동안 연금이 지급되었다.
예술가 마을은 올브리히가 설계한 작업실 주변에 세워졌다.
작업실은 거대한 입구 측면에 서로를 응시하듯 서 있는 기념비적 인물상으로 인해 지나치게 웅장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인물상은 1901년 루트비히 하비흐Ludwig Habich가 힘strength과 미beauty를 상징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대공의 실현 불가능한 미적 환상은 1904년 두 번째 다름슈타트 전시회를 위해 올브리히가 설계한 세 채의 집에서 나타났다.
이는 대공의 주문에 따라 “적당한 재산을 가진 시민을 위한 개인주택의 예”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블루하우스와 그레이하우스는 왕실의 교회 목사를 위한 관저로 설계되었으며 근대 양식의 변덕스러움을 보여준다.
전시회가 끝난 뒤 매물로 나온 블루하우스와 핀란드 건축의 낭만적 소박함을 보여준 코너하우스는 “적당한 재산을 가진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블루하우스는 상업고문관의 아내인 뇌켈 부인Frau Knockel이 구입했고, 코너하우스는 대공 휘하의 뷔딩겐 백작Court Budingen에게 팔렸다.

올브리히가 다름슈타트에 지은 전시관(1905-08)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는 수많은 공공건물, 교외의 빌라를 비롯한 주거건물, 철도역, 현대적인 뒤셀도르프 백화점(1907-08)을 남겼는데, 이런 건물들은 우아한 장식에서 좀 더 기능적인 양식으로 변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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