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콜리 번-존스Sir Edward Coley Burne-Jones(1833-98)>





성직자가 되려고 했으나 1855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윌리엄 모리스를 만나 미술에 흥미를 갖게 된 에드워드 콜리 번-존스Sir Edward Coley Burne-Jones(1833-98)는 로제티를 만난 뒤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대학을 중퇴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후 모리스와 런던에 정착하여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지도를 받으며 함께 작업했다.
성직자의 삶을 포기한 그는 회화와 사랑에 빠졌다.
토머스 콤브Thomas Combe가 소장하고 있던 라파엘전파의 작품을 보고 매료되었다.
무엇보다도 로제티의 <베아트리체의 머리를 그리고 있는 단테>와 <엘핀-미어의 처녀들>이 그를 감동시켰다.
그는 교회의 의식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 예술의 반복적인 계율과 중세주의에 매력을 느꼈는데, 로제티의 이런 작품들은 그의 취향에 대한 답을 제공해주었다.
번-존스는 런던으로 이주했을 때 대부분의 라파엘전파 구성원들을 만났으며, 밀레이의 최근 작품들을 보았다.
회화 미숙했던 이 시기에 그는 때때로 라파엘전파의 자연주의적인 양식을 따르는 회화를 시도했다.


화가로서의 번-존스의 경력은 로제티를 열렬히 추종하고 그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라파엘전파에 속하는 화가는 아니었다.
두 작품 <클라라 폰 보르크 Clara von Bork>와 <시도니아 폰 보르크 Sidonia von Bork>(1860)에서 번-존스는 로제티가 가장 좋아하는 책인 빌헬름 마인홀트Wilhelm Meinhold(1797-1851)의 소설 『시도니아 마법사 Sidonia the Sorceress』(1847)를 그림으로 그린 로제티의 양식을 베꼈다.
번-존스는 옥스퍼드 유니온의 벽에 그림을 그리는 동안 고급 피지에 펜과 잉크로 아서 왕을 주제로 <아름다운 숄을 두른 알리체 Alice la Belle Pelerine>, <전쟁터로 가다 Going to the Battle>, <갤러해드 경 Sir Galahad>과 같은 작은 드로잉을 그렸다.
이것들 가운데 가장 잘된 드로잉은 <전쟁터로 가다 Going to the Battle>로 좀 더 조용하고 덜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로제티의 목판화 삽화와 유사하다.
관람자를 향해 등을 보이는 두 여인과 옆모습의 여인이 궁전의 정원에서 전쟁터로 떠나는 기사들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다.
전경, 중경, 후경으로 공간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여기서는 세 구획으로 변형되었다.
로제티의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대로 지평선을 향해 후퇴하는 느낌을 찾을 수 없으며, 성벽을 중심으로 가까이 있는 사물은 모여 있고 먼 곳에 있는 사물은 흩어진 느낌을 받게 된다.
사실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화면의 빛줄기는 빛 체계의 일부이자 드레스의 무늬로 나타나 있다.
열십자무늬를 가까이서 보면 격자 울타리에서도 작은 크기로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운데 구획에 창들이 갑자기 연달아 나타나고, 임무를 수행하러 혹은 전쟁터로 가려고 성을 떠나는 기사의 차분한 얼굴이 보인다.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죽는 것 모두 번-존스의 회화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날 법 하지 않은데, 그의 화면은 실제 세계와는 다르고 모든 것이 정지하고 일체의 동요도 없이 조용하기 때문이다.


번-존스의 색채는 종종 노란빛을 띠지만 결코 빛나는 법이 없으며, 초기에는 따뜻한 대비와 상당히 강한 색채를 사용했지만, 그것은 로제티의 작품을 모방한 결과였을 뿐이다.
이와 유사하게 번-존스의 화면에는 대기가 존재하지 않고 그 어느 것도 강조되어 있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얼굴 표정은 없고 팔은 무기력하게 달려 있다.
거기에는 어떤 긴장감도 없는데 자신이 아는 것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서 그의 회화에는 발전이 없다.


번-존스는 1859년에 이탈리아로 갔으며, 1862년에는 베네치아와 밀라노에서 러스킨과 함께 활동했다.
1877년 이전에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 후 곧 명성을 얻었으며 외국에서도 많은 추종자가 생겼다.
그는 형태와 표현양식의 순수성 그리고 중세 미술의 고양된 도덕성을 회복하려고 했다.
주제를 성서와 고금의 문학작품에서 취하고 유려한 선묘, 단정한 구도, 풍요로운 색채로 신비적이고 낭만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 일어난 유일한 변화라면 자신을 로제티에게서 해방시킨 것이었다.
로제티가 번-존스에게 끼친 영향은 1862년 혹은 1863년경부터 점차 줄었고, 그때부터 번-존스는 독자적 양식을 발전시켰다.
번-존스는 좁고 폐쇄된 상상력을 화면에 펼쳐놓았고 큰 규모로 작업하면서 등장인물들에게 더 큰 공간을 제공했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감에 따라 한 주제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를 안 러스킨은 번-존스가 북유럽과 그리스 신화 전부를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켰으며 폭넓은 공감으로 이를 기독교 전설의 전통과 조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옥스퍼드에 있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번-존스는 그리스 신화, 북유럽 신화, 기독교 신화가 관념과 감정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차별하지 않고 동일한 톤으로 약화시켜버렸다.
그의 회화는 신화의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화에 대한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그가 신화를 그대로 옮겨놓았으므로 인간의 세계가 아닌 세계로 관람자들을 이끌었다.
이는 그의 이상주의의 함정으로서 허위의 구체성으로 나아갔다.
이런 사실은 그의 누드화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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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존스의 <방앗간 The Mill>





번-존스는 자연스럽게 윌리엄 모리스에게 가까이 갔고, 신화를 사용하는 방법이 모리스의 것과 유사해졌다.
그는 모리스에게서 <목신과 프시케 Pan and Psyche>의 주제를 따오기도 했다.
프시케는 아프로디테의 사악함 때문에 고통을 받아 물에 빠져 자살하려고 한다.
그러나 강은 프시케를 살며시 강가로 밀어 올렸으며 그곳에 앉아 있는 목신이 그녀를 위로한다.
목신은 헤르메스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목인牧人과 암염소 사이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허리에서 위쪽은 사람의 모습이고 염소의 다리와 뿔을 가지고 있으며, 산과 들에 살면서 가축을 지킨다고 여겨져 왔다.
춤과 음악을 좋아하는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인 동시에 잠든 인간에게 악몽을 불어넣기도 하고, 나그네에게 갑자기 공포를 주기도 한다고 믿어져 ‘당황’, ‘공황’을 의미하는 패닉panic이란 말이 이 신에서 유래했다.
목신은 로마 신화의 파우누스Gaunus에 해당한다. <목신과 프시케>는 번-존스가 초기 이탈리아 작품에서 무엇을 어떻게 끌어냈는지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런던 국립미술관에 있는 피에로 디 코시모Piero di Cosimo(1462-1521)의 <프로크리스의 죽음 Death of Procris>(1510)을 고쳐서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번-존스는 준準 인간의 감정, 즉 때때로 개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리고 목신이나 그와 유사한 것을 그린 작품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에 대한 놀랄 만한 느낌을 재현했다.
그는 신화의 동떨어진 세계에 대한 느낌을 매우 섬세하게 묘사했지만 이런 효과를 자주 창출해내지는 못했다.


번-존스 작품의 핵심은 우아함이다. <방앗간 The Mill>은 유미주의적 특성이 강하게 나타난 작품으로 자연주의를 배제하고 색조와 색채를 미묘하게 조화시킨 그림이다.
오른편에 세모꼴의 현이 달린 타악기의 일종으로 해머로 연주하는 덜시머dulcimar를 연주하는 꿈결 같은 인물은 미술과 음악의 관계를 보여준다.
구성이 우아하고 장식적이며 이탈리아 회화의 영향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색채의 처리가 유미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한 성기 르네상스의 베네치아 화가 조르조네Giorgione(1477?-1510)의 양식과 유사하고 왼편의 풍경에서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양식이 발견된다.
프리즈 형태는 번-존스가 사우스 켄싱턴 미술관South Kensington Museum(현재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본 이탈리아의 혼례용 서랍장 앞면에 채색된 부분을 참고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멀리 물방아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작은 인물들은 그가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고 극찬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1439?-92)의 <그리스도의 세례 The Baptism of Christ>(1450-55)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번-존스가 이탈리아 회화에서 찾으려고 한 특징은 초기 라파엘전파의 구성원들이 닮고자 한 명확함과 자연에 대한 충실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차가운 빛보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색의 변화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음영법인 스푸마토sfumato 같은 부드러운 빛과 깊은 그림자를 좋아했다.


수수께끼 같은 작품 <방앗간> 전경의 아름다운 세 여인은 이 작품의 구매자인 콘스탄틴 알렉산더 이오니데스Constantine Alexander Ionides의 딸 애그랄리아 코로니오Aglaria Coronio와 메리 잠바코Mary Zambaco, 마리 스파르탈리Marie Spartali를 모델로 한 것이다.
세 여인 모두 그리스 태생으로 런던의 부유한 그리스인 동호회에서 ‘삼미신三美神’으로 알려진 여성들로 작품에서도 삼미신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세 여신의 발은 땅 위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균형, 좌우대칭, 제스처는 솜씨 있게 표현되었지만 여신들은 육중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춤이라면 그들은 매우 느린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번-존스의 개인적인 사연도 들어 있는데, 그는 1867년에 메리 잠바코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 그녀는 남편과 헤어진 여자 상속인이자 여류조각가였다.
잠바코의 연애행각은 스캔들이 되었고 번-존스의 결혼생활도 평탄치 못했다.


<비너스의 칭송 Laus Veneris>은 번-존스의 작품세계가 성숙단계에 이른 작품이다.
수평적인 면들을 이용하여 공간감을 주고 색채를 대담하게 사용한 것은 1850년대 로제티의 수채화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된 것이다.
이 작품은 미술과 음악과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번-존스가 흠모한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1813-83)는 1861년 파리에서 3막으로 된 낭만적 오페라 <탄호이저 Tannhauser>를 처음 공연했을 때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1876년 런던의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에서 재연했을 때는 관중들의 갈채를 받았다.
독일 시인 탄호이저(1200?-70)의 이름이 전해 내려오는 참회의 노래로 민승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탄호이저는 바이에른 지방의 기사 출신으로 전해오는데 경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각지를 편력하고 십자군에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온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1797-1856)의 시에서 다루어지고 바그너의 낭만적 오페라로 유명해졌다.
바그너의 <탄호이저>에서 방랑기사 탄호이저는 자신의 타락을 후회하면서 교황에게 사면을 청원하게 되는데 번-존스는 <비너스의 칭송>에서 그가 타락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탄호이저는 열린 창문 너머로 에로틱한 비너스와 시녀들을 훔쳐보고 있다.
비너스의 집Venusberg 내부는 육체적 쾌락에 싫증이 난 듯 나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비너스가 손으로 무심히 머리를 쓸어내는 포즈는 로제티 후기 여인상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작품은 비너스의 모습이 메리 잠바코와 유사한 점에서 번-존스의 개인적인 사연과 관련지울 수 있다.
화면의 대부분이 장식적이며 표면이 태피스트리 같다.
실제로 비너스의 집안 가구들은 모리스 상사가 번-존스의 디자인으로 생산해낸 제품들과 비슷하다.
작품 자체가 수공예 정신의 모범적인 예가 되었다.
비너스가 입고 있는 의상의 무늬는 색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도장을 일일이 찍어 만든 것으로 14세기 이탈리아의 방식을 좇은 것이다.
<비너스의 칭송>는 그로스베너 화랑Grosvenor Gallery에서 열린 두 번째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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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구분되어야 합니다.




해프닝Happening과 이벤트Event 모두 사건임에는 분명합니다.
홈에버Homever에 가면 시식코너가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집어먹습니다.
이는 해프닝에 비유할 수 있지요.
해프닝을 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고 그들을 자신의 행위에 끌어들입니다.
내가 잘게 썰어놓은 소시지를 집어먹었다면, 나는 그 사람의 해프닝에 참여한 것이지요.
이벤트라고 주변 사람들을 참여시키지 말란 법은 없으나 구태어 구분하자면, 해프닝은 지방뉴스라면 이벤트는 전국뉴스라고 할까?
스케일이 더 크면 이벤트가 됩니다.
홈에버에서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여럿 시위를 할 때 주변에 있던 경찰관들이 다려들어 그 사람들을 끌어내어 버스에 태우면, 주변사람들이 참여한 것인데, 이는 해프닝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이벤트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면 스케일이 커졌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해프닝은 작은 사건, 이벤트는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의적으로 구어적으로 이벤트는 좀더 큰 사건에 사용됩니다.
암튼 해프닝과 이벤트는 같습니다.

그러나 퍼포먼스는 다르지요.
가령 가수가 노래를 부르다말고 객석에 내려와 객석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한 구절 노래를 따라부르게 해서 그 사람을 참여시킬 수는 있더라도 그것은 분명 퍼포먼스입니다.
퍼포먼스는 해프닝과 달리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미리 준비한 각본대로 하는 것입니다.
약간의 해프닝적인 요소를 첨가시킬 수는 있습니다.
요즘 탈장르시대라서 다른 장르의 형식을 조금은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된 것은 가수가 원래의 악보대로 노래를 불렀다면 그것은 퍼포먼스이지요.
재즈에 즉흥연주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애매한데, 해프닝이라고 말할 수 있더라도 주변 사람이 함께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면, 연주자 혼자 건반을 두드렸다면 파포먼스로 보아야 합니다.
퍼포먼스는 그러니까 미리 준비한 것을 장소와 상관없이 진행하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해프닝이나 이벤트는 장소에 따라서 그 형식을 달리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연'의 요소를 받아들이며 '즉흥성'입니다.
따라서 해프닝은 장소에 따라서 주변의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서 다르게 진행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제맛이 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 몸을 매개로 삼아 하는 행위는 바디아트Body art로 따로 구분해야 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무대 위에서 오줌이나 똥을 눈다던가, 자위행위를 한다던가(비토 어콘치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하는 것은 바디아트입니다.
제 몸에 색을 칠하든가 몸을 일그러뜨린다던다, 햇볕에 붉게 태운다든가(오펜하임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하는 것은 바디아트입니다.
어느 젊은 여성 아티스트가 유난히 몸의 노출을 드러내며(미니스커트를 입고) 자신의 선정적인 모습(풍만한 젖가슴을 볼륨 있게 하고)을 부각시키던데, 이런 경우는 바디아트도 아니고 해프닝도 아니며 그저 또라이의 행위라고 보면 됩니다.
또라이의 행위라고 말하는 이유는 예술과는 전혀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결론으로 말하면 해프닝(혹은 스케일에 따라서 이벤트), 퍼포먼스, 바디아트 그리고 또라이의 행위를 확실하게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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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존스의 <행운의 수레바퀴 The Wheel of Fortune>





번-존스는 시간을 오래 두고 작업하기를 좋아했는데, <행운의 수레바퀴 The Wheel of Fortune>는 1871년에 구상하여 1875년에 그리기 시작했으며 1883년에야 완성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1475-1564)에게서 따온 주제이다.
피에로 디 코시모와 <목신과 프시케>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거장과 번-존스의 관계는 늘 쉽지 않았는데, 그는 그들에게서 얼마만큼을 어떤 방법으로 가져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때때로 그는 거장들의 예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으나, 특히 미켈란젤로의 경우는 번-존스가 늘 유지해온 양식적, 감정적 냉담함을 파괴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18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번-존스가 전시한 작품의 주제들은 고전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신화에 관심이 많은 그는 점차 서예 같은 선들이 서로 휘감겨 있는 화면 구성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현혹된 멀린 The Beguiling of Merlin>은 그가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아서 왕 전설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작품의 인물들은 1850년대 로제티의 수채화에서 물려받은 고딕식의 양식화된 인체와 전혀 다르고 오히려 그가 고전조각을 연구했음을 보여준다.
번-존스의 후기작품에서 휘감기는 선과 전전 더 단색조로 변해가는 미묘한 색채의 조화로 이루어진 장식적 특징은 유럽에서 크게 인정받아 세기말 아르누보 양식의 선조가 되었다.


번-존스가 65세에 제작한 후기작품들 가운데 하나인 <수녀원장의 이야기 The Prioress's Tale>는 제프리 초서의 <수녀원장의 이야기>를 옷장에 장식한 것으로 학교에서 찬송가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Alma Redemptoris>를 배우던 한 기독교 소년이 분개한 유대교도에 의해 살해당하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소년의 혀에 밀알을 떨어뜨려 다시 노래를 부르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내용이다.
고딕양식으로 그린 이 작품에서 번-존스는 40년 전 레드 라이언 광장Red Lion Square 한 공동주택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구성을 반복하고 있다.
전에는 풍경이었던 부분을 초기 이탈리아풍의 도시로 바뀌었다는 점이 유일한 예외이다.
공간은 위로도 올라가고 뒤로도 물러난다.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 있는 곳에서 세 계단을 올라가면 그림의 중앙 부분으로 이어지며, 다시 올라가면 배경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벽에 이르게 된다.
그 뒤로는 가파르게 한쪽은 계단으로, 중앙은 기둥의 꼭대기로 이어진다.
이는 번-존스의 다른 많은 수직적인 작품에서 사용한 것과 동일한 공간, 동일한 구성이다.


<수녀원장의 이야기>에서처럼 계단을 이용한 수직적인 작품들로 <루시퍼의 추락 The Fall of Lucifer>, <코페투아 왕과 거지소녀>, <황금계단>이 있는데, 이런 일련의 계단은 오직 깊이만 지니고 있을 뿐 길이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화가들로부터 찬미를 받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1510)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세 기사의 이야기를 다룬 <코페투아 왕과 거지소녀 King Cophetua and the Beggar Maid>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의 중세적이고도 몽상적인 특징은 현실도피의 한 형태였으며 산업주의의 병폐에 대한 반발은 아니었다.
이 작품은 로제티의 삽화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가 구체화한 꿈의 세계는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필리피노 리피Filippino Lippi(1457?-1504)와 보티첼리의 우울하고 희미하게 표현된 인물에서 영감을 끌어낸 것이어서 이런 인물은 낭만적 신비주의의 분위기에 싸여 있다.


<코페투아 왕과 거지소녀>는 여성에 대한 관심이 없어 평생 결혼을 하지 않으려던 흑인 왕이 유연이 보게 된 순수한 거지소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은 시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의 민요인 리처드 존슨Richard Johnson의 <거지와 왕의 노래 A Song of a Beggar and a King>(1612)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 노래는 이후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에 의해 <거지소녀 the Beggar Maid>라는 시로 쓰였다.
옛날 아프리카에 코페투아라는 왕이 있었다.
코페투아 왕은 평소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거리를 지나던 예쁜 거지소녀를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되었다.
왕이 거지소녀와 사랑에 빠지자 궁전에서는 반발이 일어나고 왕은 거지소녀와 왕좌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왕은 사랑을 택했다.
젊은 시절부터 이 이야기에 매료된 번-존스는 코페투아 왕의 아름다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세로로 긴 그림의 중앙에 청순한 모습의 거지소녀가 앉아 있다.
남루한 옷을 걸쳤지만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가지고 있으며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얼굴과 가슴, 팔과 발은 우유 빛으로 빛나며 오른손에 아네모네 꽃을 들고 있다.
갑옷을 입은 왕은 그 앞에 앉아 소녀를 바라본다.
손에 왕관을 들고 있는데, 소녀에 대한 경의의 표시인 동시에 그가 버리게 될 왕좌를 시사한다.


<황금계단 The Golden Stairs>에는 독특한 선묘가 주는 신비로움이 있다.
화면 속의 계단은 반원을 그리며 둥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그 위를 거니는 18명의 소녀들은 다양한 포즈와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은 움직이고 있지만 번-존스의 특유의 정지한 모습이다.
이는 사람과 사물을 철저하게 장식적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8명의 소녀를 그리면서 그는 자신이 아끼는 모델 안토니아 카이바 한 사람만을 썼다.
다양한 동작이 비슷하게 보이는 이유는 모든 동작이 한 모델에게서 나온 탓이다.
얼굴은 친지들의 것들에서 따왔다.
<황금계단>이란 제목은 단테의 시구에서 따왔지만, 이 작품은 계단과 관련된 특정한 이야기나 신화, 전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단지 그가 이런 시각적 상황을 묘사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에 불과하다.


번-존스의 작품에 나타난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긴 행렬, 특히 여성들의 행렬과 같은 선의 사용이다.
이는 단지 그의 특징만은 아니다.
19세기 후반에 많은 화가들이 사용했다.
이런 방법의 창시자는 1857년에 <사과 꽃 Apple Blossoms>을 그린 밀레이이다.
이런 방법이 사용된 번-존스의 작품으로는 <성 바르바라 St. Barbara>, <성 도로테아와 성 아그네스 St. Dorothea and St. Agnes>, <녹색의 여름 Green Summer>, <시간 The Hours>, <예수의 무덤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 Mary Magdalene at the Sepulchre>, <왕과 양치기 King and Shepherd> 등이다.
그러나 이것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은 <방앗간>과 <비너스의 거울 The Mirror of Venus>이며, 두 작품에서 그의 회화적 중요한 특징인 우아함이 드러난다.
이는 곡선의 묘미를 구사하여 장식적 구도 속에 시적 세계를 표현하는 독자적인 화풍을 창안해낸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1510) 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보티첼리는 반쯤 미끄러지는 듯한, 반쯤은 총총 걸음을 걷는 듯한 움직임을 묘사했는데 이는 서양미술사에서 차분한 여성의 움직임을 가장 가볍고 경쾌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는 <성 삼위일체 Holy Trinity>의 아래에 있는 천사들과 <토비트 Tobias> 서에 등장하는 작은 인물들에서, 그리고 <풍요 Abundance>의 드로잉에서 나타난다.
번-존스는 이런 특징에 감동을 받았으나 자신의 작품에서는 살리지 못했다.
그는 우아함을 육중함에 이를 정도로까지 밀고 나갔다.
<비너스의 거울>에서는 모든 동작이 멈췄다. 모두 닮아 보이는 소녀들은 일렬로 늘어선 채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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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존스의 <잠자는 미녀 The Sleeping Beauty>





번-존스는 화가로 활동하던 내내 연작을 그렸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잠자는 미녀의 이야기에 근거한 들장미 연작으로 1871년부터 1890년까지 그렸다.
이 작품들은 파링던 경Lord Faringdon이 구입하여 버크셔Berkshire의 버스콧 파크Buscot Park에 있는 자신의 응접실에 걸어놓았다.
번-존스는 계속해서 새로운 패널을 추가로 제작했다.
벽난로 위에 있는 패널인 <찔레장미 연작 Panel from Briar Rose Series> 중에서 <잠자는 미녀 The Sleeping Beauty>는 걸작들 중 하나이다.
이 작품에서 소녀들은 그의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면, 즉 잠을 자고 있는데 그 위로 드리워진 격렬한 휘장의 주름이 이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유연하게 조용히 뻗어나가며 공간을 폐쇄시키는 날카로운 찔레나무를 그린 <찔레장미 연작> 중에서 <찔레나무 The Briar Wood>는 전형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동요 없고 정적인 인물들 뒤에서 길게 끌리는 선, 때때로 휘감기는 듯한 선을 그려 넣는 것을 좋아했다.
<레바논의 신부 Sponsa de Libano>의 옷 주름, <현혹된 멀린>과 <폐허에서 싹튼 사랑 Love among the Ruins>의 엉켜있는 나무덩굴, <님프의 정원에 있는 페르세우스 Perseus in the Garden of the Nymphs>의 산 형태, 특히 <바다뱀을 물리치는 페르세우스 Perseus Slaying the Sea Serpent>의 둘둘 감겨 대담한 리듬의 효과를 내는 뱀의 형태가 그 예이다.

<바다뱀을 물리치는 페르세우스>는 페르세우스 연작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보수당의 아서 발푸르Arthur Balfour가 계획한 정부의 장식 사업을 위해 그린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양식화된 바위풍경을 배경으로 나약하고 여성적인 영웅과 나른하게 구불거리고 있는 뱀과 싸우는 장면 어디에도 사실적인 요소가 없다.
오로지 여성의 누드만 사실적이다. 여기에는 남성의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는 번-존스 회화의 한 측면이 있는데, 그가 은밀하고 관음증적인 누드를 그렸을지라도 빅토리아 시대 중기에 지속된 누드의 동면기를 종료시켰기 때문이다.
라파엘전파의 시기에는 불행하게도 누드화가 사라졌는데 그의 작품에서 누드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가 누드를 그린 시기는 역사적으로 자연주의가 이상주의와 결합할 수 있던 때였다.
그의 작품에서 라파엘전파주의가 하락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본다.
라파엘전파주의가 세부에 대한 관심, 자연, 근대성, 다양성을 표현하려는 태도, 따뜻한 정서 등과 같은 사실주의 원칙에 집중한 시절에서 멀어졌음을 본다.
더 이상 작품에서 생기를 발견할 수 없으며, 1850년대 라파엘전파의 주요 특징이었던 미술과 관람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번-존스의 상상의 세계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해주는 작품이 <플루톤과 프로세르피나 Pluto and Proserpine>로 신화의 한 장면을 그린 드로잉으로 관람자의 눈은 끊임없는 리듬을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여기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며, 플루톤은 지하세계의 왕 하데스Hades를 가리키고 프로세르피나는 페르세포네를 가리킨다.
사자 세계의 지배자인 동시에 지하의 부富를 인간에게 가져다준다고 해서 플루톤富者이라고 했다.
플루톤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아들로 제우스, 포세이돈과는 형제지간이며 그들은 크로노스와 그 일족을 정복한 뒤 제우스는 하늘, 포세이돈은 바다, 플루톤(하데스)은 명계의 지배권을 차지했다.
플루톤은 테메테르의 딸 프로세르피나를 아내로 삼았다.
그가 지배하는 사자의 나라는 지하에 있으며 그 경계는 스틱스Styx 혹은 아케론Acheron이라는 강이 있어 나룻배 사공 카론charon이 사자를 건네준다.
입구에는 사자가 명계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케르베로스Cerberos라는 개가 감시하고 있다.
플루톤의 모습은 제우스 포세이돈을 닮아서 당당해 보이지만 머리카락이 이마까지 내려온 어두운 표정이며, 손에는 명계의 왕을 상징하는 홀笏을 들고 있다.
때로는 케르베로스와 함께 표현되기도 한다. <플루톤과 프로세르피나>는 네덜란드 화가 얀 토로프Jan Toorop(1858-1928)의 뛰어난 상징주의와 아르누보 작품인 <세 신부 The Three Brides>와 매우 유사하다.
1887년에 브뤼셀의 화가들 그룹 뱅(20인회)에 가입한 얀 토로프는 유럽 북부에서 유행한 아르누보의 중요한 인물이다.

때때로 마법의 세계로 이탈하는 번-존스의 세계는 영국인에게는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아마도 어린 시절에 들은 요정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라파엘전파가 영국인의 의식에 깊이 파고든 이유들 중 하나이다.
물속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일을 묘사한 <깊은 바다 속 The Depths of the Sea>은 뱃사람들의 전설을 토대로 제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이는 그의 어떤 작품과도 유사한 데가 없다.
포로의 허리를 팔로 휘감으며 관람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인어 얼굴의 매력은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이탈 이후에 유토피아는 친숙한 영역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윌리엄 모리스의 사회주의적 로맨스 <존 볼의 꿈과 왕의 교훈 A Dream of John Ball and a King's Lesson>에 대한 목판 삽화(는 번-존스도 때때로 훌륭한 디자인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목판화 작품은 월터 크레인Walter Crane(1845-1915)과 같은 화가들의 작품과, 미술가조합Art Workers' Guild, 미술공예전시협회Arts and Crafts Exhibition Society와 같은 조직의 생산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제티와 번-존스의 작품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었던 라파엘전파의 흐릿한 윤곽선 처리, 비현세적인 유형을 많은 화가들이 따라 하게 되었다.
윌리엄 홀먼 헌트조차 이런 경향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1850년에 그린 <샬롯의 귀부인 The Lady of Shalott>이라는 초기드로잉에서부터, 목슨이 출간한 테니슨 시집의 삽화, 그리고 후에 유화로 변화한 결과를 살펴보면 잘 나타난다.
<샬롯의 귀부인>은 오히려 앤서니 프레더릭 샌디스Anthony Frederick Sandys(1829-1904)의 <요정 모건 Morgan le Fay>과 유사하다.
주로 독학으로 화가가 된 프레더릭 샌디스(전파 176)는 1857년에 로제티를 만나 라파엘전파에 가담했다.
1860년대에 그는 잡지 <원스 어 위크 Once a Week>에 실린 목판화를 제작했으며, 그중 <늙은 차티스트 운동가 The Old Chartist>는 뛰어난 예이다.

라파엘전파의 후기단계에서 나타나 자신만의 뚜렷한 양식을 발전시킨 오브리 빈센트 비어즐리Aubrey Vincent Beardsley(1872-98)의 작품에는 번-존스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브라이턴Brighton 출신의 비어즐리는 어린 시절 신동이었다.
그는 병적일 정도로 독서에 집착했으며, 이 같은 열광적인 지식욕은 결핵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비어즐리는 번-존스를 숭배했으며, 그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번-존스의 충고 때문이었다.
그는 번-존스의 격려에 힘입어 1891년부터 <아서 왕의 죽음>에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서와 이상한 망토 Arthur and the Strange Mantle>와 같은 초기작품에서는 라파엘전파의 영향이 뚜렷하며 이는 번-존스 드로잉의 선형주의Linearism와 윌리엄 모리스의 책 디자인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비어즐리는 비록 모리스의 공예품 제작 이론에는 반대했지만 라파엘전파와 모리스의 후예라 할 수 있는데, 미술에 가장 근대적인 인쇄기술을 활용하고 보급시킴으로써 공허한 복고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번-존스는 모리스와 함께 모리스상회를 위한 태피스트리와 스테인드글라스도 디자인했다.
그가 디자인한 창문은 옥스퍼드에 소재하는 그리스도 교회와 버밍엄 성당을 포함하여 영국의 많은 교회에서 볼 수 있다.
화가이면서 공예가라는 이상을 되살린 선구자로서 그가 미친 영향은 오래 지속되었으며 특히 20세기의 산업디자인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1894년에 준남작 작위를 받았다. 타계한 뒤 그림보다는 장식디자인, 특히 교회 장식용 스테인드글라스의 디자인 분야에서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금속, 석고, 타일 등으로 부조를 제작했으며 피아노와 오르간을 장식했다.
그는 모리스가 경영하는 권위 있는 켐스콧 프레스에서 펴낸 책들에 삽화를 그리는 한편, 1896년에는 켐스콧 프레스에서 펴낸 <제프리 초서 Geoffrey Chaucer>에 87점의 도안을 그렸으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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