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존스의 <잠자는 미녀 The Sleeping Beauty>





번-존스는 화가로 활동하던 내내 연작을 그렸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잠자는 미녀의 이야기에 근거한 들장미 연작으로 1871년부터 1890년까지 그렸다.
이 작품들은 파링던 경Lord Faringdon이 구입하여 버크셔Berkshire의 버스콧 파크Buscot Park에 있는 자신의 응접실에 걸어놓았다.
번-존스는 계속해서 새로운 패널을 추가로 제작했다.
벽난로 위에 있는 패널인 <찔레장미 연작 Panel from Briar Rose Series> 중에서 <잠자는 미녀 The Sleeping Beauty>는 걸작들 중 하나이다.
이 작품에서 소녀들은 그의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면, 즉 잠을 자고 있는데 그 위로 드리워진 격렬한 휘장의 주름이 이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유연하게 조용히 뻗어나가며 공간을 폐쇄시키는 날카로운 찔레나무를 그린 <찔레장미 연작> 중에서 <찔레나무 The Briar Wood>는 전형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동요 없고 정적인 인물들 뒤에서 길게 끌리는 선, 때때로 휘감기는 듯한 선을 그려 넣는 것을 좋아했다.
<레바논의 신부 Sponsa de Libano>의 옷 주름, <현혹된 멀린>과 <폐허에서 싹튼 사랑 Love among the Ruins>의 엉켜있는 나무덩굴, <님프의 정원에 있는 페르세우스 Perseus in the Garden of the Nymphs>의 산 형태, 특히 <바다뱀을 물리치는 페르세우스 Perseus Slaying the Sea Serpent>의 둘둘 감겨 대담한 리듬의 효과를 내는 뱀의 형태가 그 예이다.

<바다뱀을 물리치는 페르세우스>는 페르세우스 연작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보수당의 아서 발푸르Arthur Balfour가 계획한 정부의 장식 사업을 위해 그린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양식화된 바위풍경을 배경으로 나약하고 여성적인 영웅과 나른하게 구불거리고 있는 뱀과 싸우는 장면 어디에도 사실적인 요소가 없다.
오로지 여성의 누드만 사실적이다. 여기에는 남성의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는 번-존스 회화의 한 측면이 있는데, 그가 은밀하고 관음증적인 누드를 그렸을지라도 빅토리아 시대 중기에 지속된 누드의 동면기를 종료시켰기 때문이다.
라파엘전파의 시기에는 불행하게도 누드화가 사라졌는데 그의 작품에서 누드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가 누드를 그린 시기는 역사적으로 자연주의가 이상주의와 결합할 수 있던 때였다.
그의 작품에서 라파엘전파주의가 하락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본다.
라파엘전파주의가 세부에 대한 관심, 자연, 근대성, 다양성을 표현하려는 태도, 따뜻한 정서 등과 같은 사실주의 원칙에 집중한 시절에서 멀어졌음을 본다.
더 이상 작품에서 생기를 발견할 수 없으며, 1850년대 라파엘전파의 주요 특징이었던 미술과 관람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번-존스의 상상의 세계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해주는 작품이 <플루톤과 프로세르피나 Pluto and Proserpine>로 신화의 한 장면을 그린 드로잉으로 관람자의 눈은 끊임없는 리듬을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여기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며, 플루톤은 지하세계의 왕 하데스Hades를 가리키고 프로세르피나는 페르세포네를 가리킨다.
사자 세계의 지배자인 동시에 지하의 부富를 인간에게 가져다준다고 해서 플루톤富者이라고 했다.
플루톤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아들로 제우스, 포세이돈과는 형제지간이며 그들은 크로노스와 그 일족을 정복한 뒤 제우스는 하늘, 포세이돈은 바다, 플루톤(하데스)은 명계의 지배권을 차지했다.
플루톤은 테메테르의 딸 프로세르피나를 아내로 삼았다.
그가 지배하는 사자의 나라는 지하에 있으며 그 경계는 스틱스Styx 혹은 아케론Acheron이라는 강이 있어 나룻배 사공 카론charon이 사자를 건네준다.
입구에는 사자가 명계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케르베로스Cerberos라는 개가 감시하고 있다.
플루톤의 모습은 제우스 포세이돈을 닮아서 당당해 보이지만 머리카락이 이마까지 내려온 어두운 표정이며, 손에는 명계의 왕을 상징하는 홀笏을 들고 있다.
때로는 케르베로스와 함께 표현되기도 한다. <플루톤과 프로세르피나>는 네덜란드 화가 얀 토로프Jan Toorop(1858-1928)의 뛰어난 상징주의와 아르누보 작품인 <세 신부 The Three Brides>와 매우 유사하다.
1887년에 브뤼셀의 화가들 그룹 뱅(20인회)에 가입한 얀 토로프는 유럽 북부에서 유행한 아르누보의 중요한 인물이다.

때때로 마법의 세계로 이탈하는 번-존스의 세계는 영국인에게는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아마도 어린 시절에 들은 요정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라파엘전파가 영국인의 의식에 깊이 파고든 이유들 중 하나이다.
물속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일을 묘사한 <깊은 바다 속 The Depths of the Sea>은 뱃사람들의 전설을 토대로 제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이는 그의 어떤 작품과도 유사한 데가 없다.
포로의 허리를 팔로 휘감으며 관람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인어 얼굴의 매력은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이탈 이후에 유토피아는 친숙한 영역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윌리엄 모리스의 사회주의적 로맨스 <존 볼의 꿈과 왕의 교훈 A Dream of John Ball and a King's Lesson>에 대한 목판 삽화(는 번-존스도 때때로 훌륭한 디자인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목판화 작품은 월터 크레인Walter Crane(1845-1915)과 같은 화가들의 작품과, 미술가조합Art Workers' Guild, 미술공예전시협회Arts and Crafts Exhibition Society와 같은 조직의 생산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제티와 번-존스의 작품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었던 라파엘전파의 흐릿한 윤곽선 처리, 비현세적인 유형을 많은 화가들이 따라 하게 되었다.
윌리엄 홀먼 헌트조차 이런 경향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1850년에 그린 <샬롯의 귀부인 The Lady of Shalott>이라는 초기드로잉에서부터, 목슨이 출간한 테니슨 시집의 삽화, 그리고 후에 유화로 변화한 결과를 살펴보면 잘 나타난다.
<샬롯의 귀부인>은 오히려 앤서니 프레더릭 샌디스Anthony Frederick Sandys(1829-1904)의 <요정 모건 Morgan le Fay>과 유사하다.
주로 독학으로 화가가 된 프레더릭 샌디스(전파 176)는 1857년에 로제티를 만나 라파엘전파에 가담했다.
1860년대에 그는 잡지 <원스 어 위크 Once a Week>에 실린 목판화를 제작했으며, 그중 <늙은 차티스트 운동가 The Old Chartist>는 뛰어난 예이다.

라파엘전파의 후기단계에서 나타나 자신만의 뚜렷한 양식을 발전시킨 오브리 빈센트 비어즐리Aubrey Vincent Beardsley(1872-98)의 작품에는 번-존스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브라이턴Brighton 출신의 비어즐리는 어린 시절 신동이었다.
그는 병적일 정도로 독서에 집착했으며, 이 같은 열광적인 지식욕은 결핵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비어즐리는 번-존스를 숭배했으며, 그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번-존스의 충고 때문이었다.
그는 번-존스의 격려에 힘입어 1891년부터 <아서 왕의 죽음>에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서와 이상한 망토 Arthur and the Strange Mantle>와 같은 초기작품에서는 라파엘전파의 영향이 뚜렷하며 이는 번-존스 드로잉의 선형주의Linearism와 윌리엄 모리스의 책 디자인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비어즐리는 비록 모리스의 공예품 제작 이론에는 반대했지만 라파엘전파와 모리스의 후예라 할 수 있는데, 미술에 가장 근대적인 인쇄기술을 활용하고 보급시킴으로써 공허한 복고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번-존스는 모리스와 함께 모리스상회를 위한 태피스트리와 스테인드글라스도 디자인했다.
그가 디자인한 창문은 옥스퍼드에 소재하는 그리스도 교회와 버밍엄 성당을 포함하여 영국의 많은 교회에서 볼 수 있다.
화가이면서 공예가라는 이상을 되살린 선구자로서 그가 미친 영향은 오래 지속되었으며 특히 20세기의 산업디자인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1894년에 준남작 작위를 받았다. 타계한 뒤 그림보다는 장식디자인, 특히 교회 장식용 스테인드글라스의 디자인 분야에서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금속, 석고, 타일 등으로 부조를 제작했으며 피아노와 오르간을 장식했다.
그는 모리스가 경영하는 권위 있는 켐스콧 프레스에서 펴낸 책들에 삽화를 그리는 한편, 1896년에는 켐스콧 프레스에서 펴낸 <제프리 초서 Geoffrey Chaucer>에 87점의 도안을 그렸으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