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존스의 <행운의 수레바퀴 The Wheel of Fortune>





번-존스는 시간을 오래 두고 작업하기를 좋아했는데, <행운의 수레바퀴 The Wheel of Fortune>는 1871년에 구상하여 1875년에 그리기 시작했으며 1883년에야 완성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1475-1564)에게서 따온 주제이다.
피에로 디 코시모와 <목신과 프시케>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거장과 번-존스의 관계는 늘 쉽지 않았는데, 그는 그들에게서 얼마만큼을 어떤 방법으로 가져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때때로 그는 거장들의 예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으나, 특히 미켈란젤로의 경우는 번-존스가 늘 유지해온 양식적, 감정적 냉담함을 파괴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18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번-존스가 전시한 작품의 주제들은 고전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신화에 관심이 많은 그는 점차 서예 같은 선들이 서로 휘감겨 있는 화면 구성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현혹된 멀린 The Beguiling of Merlin>은 그가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아서 왕 전설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작품의 인물들은 1850년대 로제티의 수채화에서 물려받은 고딕식의 양식화된 인체와 전혀 다르고 오히려 그가 고전조각을 연구했음을 보여준다.
번-존스의 후기작품에서 휘감기는 선과 전전 더 단색조로 변해가는 미묘한 색채의 조화로 이루어진 장식적 특징은 유럽에서 크게 인정받아 세기말 아르누보 양식의 선조가 되었다.


번-존스가 65세에 제작한 후기작품들 가운데 하나인 <수녀원장의 이야기 The Prioress's Tale>는 제프리 초서의 <수녀원장의 이야기>를 옷장에 장식한 것으로 학교에서 찬송가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Alma Redemptoris>를 배우던 한 기독교 소년이 분개한 유대교도에 의해 살해당하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소년의 혀에 밀알을 떨어뜨려 다시 노래를 부르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내용이다.
고딕양식으로 그린 이 작품에서 번-존스는 40년 전 레드 라이언 광장Red Lion Square 한 공동주택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구성을 반복하고 있다.
전에는 풍경이었던 부분을 초기 이탈리아풍의 도시로 바뀌었다는 점이 유일한 예외이다.
공간은 위로도 올라가고 뒤로도 물러난다.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 있는 곳에서 세 계단을 올라가면 그림의 중앙 부분으로 이어지며, 다시 올라가면 배경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벽에 이르게 된다.
그 뒤로는 가파르게 한쪽은 계단으로, 중앙은 기둥의 꼭대기로 이어진다.
이는 번-존스의 다른 많은 수직적인 작품에서 사용한 것과 동일한 공간, 동일한 구성이다.


<수녀원장의 이야기>에서처럼 계단을 이용한 수직적인 작품들로 <루시퍼의 추락 The Fall of Lucifer>, <코페투아 왕과 거지소녀>, <황금계단>이 있는데, 이런 일련의 계단은 오직 깊이만 지니고 있을 뿐 길이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화가들로부터 찬미를 받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1510)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세 기사의 이야기를 다룬 <코페투아 왕과 거지소녀 King Cophetua and the Beggar Maid>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의 중세적이고도 몽상적인 특징은 현실도피의 한 형태였으며 산업주의의 병폐에 대한 반발은 아니었다.
이 작품은 로제티의 삽화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가 구체화한 꿈의 세계는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필리피노 리피Filippino Lippi(1457?-1504)와 보티첼리의 우울하고 희미하게 표현된 인물에서 영감을 끌어낸 것이어서 이런 인물은 낭만적 신비주의의 분위기에 싸여 있다.


<코페투아 왕과 거지소녀>는 여성에 대한 관심이 없어 평생 결혼을 하지 않으려던 흑인 왕이 유연이 보게 된 순수한 거지소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은 시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의 민요인 리처드 존슨Richard Johnson의 <거지와 왕의 노래 A Song of a Beggar and a King>(1612)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 노래는 이후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에 의해 <거지소녀 the Beggar Maid>라는 시로 쓰였다.
옛날 아프리카에 코페투아라는 왕이 있었다.
코페투아 왕은 평소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거리를 지나던 예쁜 거지소녀를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되었다.
왕이 거지소녀와 사랑에 빠지자 궁전에서는 반발이 일어나고 왕은 거지소녀와 왕좌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왕은 사랑을 택했다.
젊은 시절부터 이 이야기에 매료된 번-존스는 코페투아 왕의 아름다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세로로 긴 그림의 중앙에 청순한 모습의 거지소녀가 앉아 있다.
남루한 옷을 걸쳤지만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가지고 있으며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얼굴과 가슴, 팔과 발은 우유 빛으로 빛나며 오른손에 아네모네 꽃을 들고 있다.
갑옷을 입은 왕은 그 앞에 앉아 소녀를 바라본다.
손에 왕관을 들고 있는데, 소녀에 대한 경의의 표시인 동시에 그가 버리게 될 왕좌를 시사한다.


<황금계단 The Golden Stairs>에는 독특한 선묘가 주는 신비로움이 있다.
화면 속의 계단은 반원을 그리며 둥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그 위를 거니는 18명의 소녀들은 다양한 포즈와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은 움직이고 있지만 번-존스의 특유의 정지한 모습이다.
이는 사람과 사물을 철저하게 장식적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8명의 소녀를 그리면서 그는 자신이 아끼는 모델 안토니아 카이바 한 사람만을 썼다.
다양한 동작이 비슷하게 보이는 이유는 모든 동작이 한 모델에게서 나온 탓이다.
얼굴은 친지들의 것들에서 따왔다.
<황금계단>이란 제목은 단테의 시구에서 따왔지만, 이 작품은 계단과 관련된 특정한 이야기나 신화, 전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단지 그가 이런 시각적 상황을 묘사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에 불과하다.


번-존스의 작품에 나타난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긴 행렬, 특히 여성들의 행렬과 같은 선의 사용이다.
이는 단지 그의 특징만은 아니다.
19세기 후반에 많은 화가들이 사용했다.
이런 방법의 창시자는 1857년에 <사과 꽃 Apple Blossoms>을 그린 밀레이이다.
이런 방법이 사용된 번-존스의 작품으로는 <성 바르바라 St. Barbara>, <성 도로테아와 성 아그네스 St. Dorothea and St. Agnes>, <녹색의 여름 Green Summer>, <시간 The Hours>, <예수의 무덤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 Mary Magdalene at the Sepulchre>, <왕과 양치기 King and Shepherd> 등이다.
그러나 이것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은 <방앗간>과 <비너스의 거울 The Mirror of Venus>이며, 두 작품에서 그의 회화적 중요한 특징인 우아함이 드러난다.
이는 곡선의 묘미를 구사하여 장식적 구도 속에 시적 세계를 표현하는 독자적인 화풍을 창안해낸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1510) 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보티첼리는 반쯤 미끄러지는 듯한, 반쯤은 총총 걸음을 걷는 듯한 움직임을 묘사했는데 이는 서양미술사에서 차분한 여성의 움직임을 가장 가볍고 경쾌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는 <성 삼위일체 Holy Trinity>의 아래에 있는 천사들과 <토비트 Tobias> 서에 등장하는 작은 인물들에서, 그리고 <풍요 Abundance>의 드로잉에서 나타난다.
번-존스는 이런 특징에 감동을 받았으나 자신의 작품에서는 살리지 못했다.
그는 우아함을 육중함에 이를 정도로까지 밀고 나갔다.
<비너스의 거울>에서는 모든 동작이 멈췄다. 모두 닮아 보이는 소녀들은 일렬로 늘어선 채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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