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여자미술학교




동경여자미술학교는 관립으로 1901년에 설립되었다.
해방 전 우리나라 여성이 이 학교에서 졸업했거나 졸업하지는 않았더라도 일정 기간 재학한 수는 132명이 넘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 서양화가로 네 번째 동경에 유학한 나혜석이 이 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학교는 알려졌지만 그 밖에 그곳으로 진학한 여류화가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숙종, 백남순(1904~94), 천경자, 박내현, 월북한 정온녀와 리혜경 등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남학생들이 진학한 동경미술학교와 제국미술학교에 비해 수적으로 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백 명 이상의 유학생들이 이 학교에서 저수를 공부했기 때문이다.
선전에서 동양화, 서양화, 자수에서 입선한 여성 대부분이 이 학교 출신이었다.
자수 전공자들은 교육에 힘썼는데 전국 각지의 여학교에서 자수와 미술과목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그리고 해방 후에는 이화여대와 숙명여대 미술대학의 자수과 창립 등 여성 미술교육에 이바지했다.


정온녀는 해방 후 1949년에 동화화랑에서 7월 16일~22일에 열린 ‘여류화가 5인전’에 출품했는데, 이 전람회에 이현옥, 배정례, 박내현, 천경자 등이 참여했고 서양화가로는 정온녀가 유일했다.
그녀는 8점을 출품하여 가장 많이 소개했다. <두 명의 나부>는 해방 후의 작품으로 이 시기의 양식으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단발머리의 두 여인이 서 있는 모습을 연필로 외곽 형태뿐 아니라 명암가지 그려놓고 나무 바탕의 색으로 인체의 주조색을 이루게 했다.
인체는 엷은 색으로 칠해 담채화 같은 느낌이 나게 했으며 유채를 드로잉하듯 사용한 부분 보인다.
여인들의 시선 방향이나 얼굴 표정 그리고 팔을 벌린 자세와 위치를 볼 때 실제 모델 앞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누드 크로키를 해두었던 것을 재구성했거나 상상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서양화를 소개한 초기 화가들은 동경 유학파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작품이 대부분 현존하지 않아 그들의 활약상은 물론 서양 양식에 대한 이해와 어떤 방법으로 양식에 변화를 주었는지 밝혀내기가 어렵다.
동경의 여러 전람회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무슨 작품을 출품했는지도 알 수 없다.
몇몇 화가들의 기록과 주변 사람들의 부정확할 수 있는 증언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일본에서 발간된 미술잡지들이 있어 그것들을 통해 우리나라 화가들의 활약상과 소수이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을 알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우리나라 화가들이 가장 많이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건 1930년대였다.
1930년대의 동경 유학생의 증가는 서양화에 대한 인식이 10년 만에 크게 증가했음을 의미하며 또한 이들의 활약에 따라서 우리나라 화단의 구성과 변화가 예고되었다는 것이다.
그 실례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가 1922년 개최되었을 때 서양화부에는 한 사람이 두 점까지 모두 114점이 응모되었고 79점이 입선되었는데 입선자 57명 가운데 우리나라 화가는 고희동, 정규익, 나혜석 3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10년 후 1932년에 개최된 제11회 선전의 경우 입선자 137명 중 우리나라 화가의 수가 무려 86명으로 늘었다.
입선하지 못한 화가와 선전을 배척한 화가들까지 합한다면 10년 전에 비해 서양화에 대한 인기가 크게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우리나라 화가들의 활약상을 둘로 분류하면 제전과 문전(혹은 관전)에 주로 출품한 동경미술학교가 추구한 인상주의 양식을 받아들인 김인승, 심형구, 이봉상, 김재선 등이 있고, 이들과는 달리 인상주의 이후의 유럽 양식들을 받아들인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1916~2002), 문학수 등은 관전을 외면하고 자유미술가협회, 미술문화협회, 백만회白蠻會 등의 그룹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관전의 심사제도에 불만을 품고 ‘반관전 反官展’의 기치를 높이 들고 출범한 단체가 1914년에 시작된 이과전二科展이다.
이과전은 관전이 열리는 가을에 우에노上野에서 동시에 개최함으로써 관전에 대항하는 재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과전은 인상주의의 양식에서 벗어나 후기인상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등 새로운 유럽 양식들을 받아들인 진취적인 화가들을 배출했는데, 이과전에 출품한 화가들로 구본웅, 김환기, 이쾌대, 김종찬, 박상옥(1915~68), 최재덕(1916~?) 등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최재덕




최재덕(1916~)은 경상남도 산청의 큰 지주 집안 태생으로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다닌 후 동경으로 가서 서양화 전문의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을 수료한 후 1936년 4월 제국미술학교 본과 서양화과에 입학했지만 그 해 6월에 중퇴했다.
1940년을 전후하여 동경에서 수학하는 동안 이쾌대 등과 함께 서양화 전람회에 수차례 입선했고 이 시기에 서울의 선전에도 출품하여 입선했다.
그가 이과전에 입선한 것에 대해 1939년 9월 7일자 『조선일보』는 보도했다.


“도쿄화단 가을의 ‘씨츤’인 두頭에서 열린 이과전은 3일부터 공개되었는데, 그림은 총 반입수 3,790점에서 입선작품 429점의 대성황이었다고 한다.
그림과 조각을 통한 신입선 97점 중에는 조선 화가로는 최재덕 씨의 이름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작년에 초입선한 이쾌대 씨(일본미술학교 출신)는 금년에도 연해 입선의 영광을 얻었다 한다.”


그는 1941년에 조선신미술가협회에 창립회원으로 적극 참여했으며, 해방 후에는 미술동맹의 간부로 활약했고, 정부 수립 후 이쾌대, 김만형 등과 함께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이념을 버린 듯이 보였으며, 세 사람 모두 1949년 제1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참여하면서 <산>을 출품했다.
세 사람을 포함하여 다수의 작가들이 6·25동란 후 공산군 점령 하에 서울에 등장한 조선미술가동맹에 가담하게 되었고 결국 월북하게 되었다.
월북 후의 그의 활동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구성주의Constructivism




구성주의는 많은 현대 미술 용어와 마찬가지로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용어의 사용도 일원화되어 있지 않다.
구성주의와 구성주의적Constructive이라는 용어는 1900년대와 1910년대에는 충동적이고 즉흥적이지 않으며 치밀하게 구성된 미술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구성주의로 분류된 작품이 모두 현재에 구성주의로 일컬어지는 범주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1920년대에는 목적과 관념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운동이 동시에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며, 다른 하나는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났다.
현재는 후자를 국제적 구성주의 또는 유럽 구성주의라고 명명하여 러시아 구성주의와 구별한다.


러시아 구성주의가 매우 구체적인 명칭인 반면 유럽 구성주의는 의미가 모호하며 점차 비재현적, 또는 비표현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광범위한 화파와 양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동일한 명칭 때문에 두 운동은 근본적으로 하나인 이론의 두 가지 갈래인 것처럼 논의되었으며 이로 인해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스티븐 맨은 1974년 구성주의 관련 자료 모음집인 『구성주의 전통 The Tradition of Constructivism』에서 러시아 화가, 조각가, 그래픽 디자이너 엘 리시츠키El Lissitzky(1890~1941)가 구성주의와 ‘새로운 인간 New Man’을 동일시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적었다.


“구성주의에 대해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것은 구성주의가 인간의 감정과 외부 세계 사이의 수동적으로 부여된 조화를 배격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구성주의는 인간을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세계 속에서 스스로 질서를 창조하는 자로 보며, 예술가는 이런 질서의 유형을 결정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주요 유럽 구성주의 화파 중 러시아 구성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을 수용한 화파는 전혀 없다.
오히려 유럽 구성주의의 목적과 작품은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이 선언문을 통해 ‘순수 미술’이라고 비판한 종류의 것이었다.


유럽 구성주의는 전통 미술의 근본적 토대를 무분별하게 공격한 다다이즘, 그리고 무의식적인 창조와 자동주의라는 초현실주의 강령에서 지침을 찾은 충동적이고 직관적인 구성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되었다.
구성주의는 다다이즘 그리고 초현실주의와는 달리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미적 원리와 일치하는 의식적이고 신중한 구성을 지지했다.
유럽 구성주의 예술가 단체의 최초의 공식 선언은 1922년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국제 진보예술가대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테오 반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1883~1931), 리시츠키와 한스 리히터Hans Richter(1888~1976)는 국제 구성주의 분파의 이름으로 연합 시위를 벌였다.
1920년대에는 공식적인 조직은 형성되지 않았지만 구성주의 원리를 문학, 건축, 영화에 확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1930년대 후반 많은 구성주의 예술가들이 2차세계대전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하여 런던에 정착했다.
러시아계 미국 조각가 나움 가보Naum Gabo(1890~1977), 나움 가보의 형 러시아계 프랑스 조각가 앙투안 페브스네르Antoine Pevsner(1886~1962), 항가리계 미국 화가이며 조각가 라슬로 모흘리-나기Laszlo Moholy-Nagy(1895~1946), 독일 건축가로 바우하우스의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 네덜란드 화가 피트 몬드리안 등이 영국으로 피신했다.
이들은 데임 바바라 헵워스Dame Barbara Hepworth(1903~75), 벤 니컬슨Ben Nicholson(1894~1982), 헨리 무어Henry Moore(1898~1986), 비평가 허버트 리드Sir Herbert Read(1893~1968)와 교류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 미국으로 이주했으므로 1950년대까지 영국에서는 독자적인 구성주의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1937년 가보는 벤 니컬슨, 젊은 건축가 J. L. 마틴과 공동으로 ‘구성주의 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고찰’이라는 부제가 붙은 자료 모음집인 『서클』을 편집했다.
가보는 여기에 ‘미술에 있어서의 구성주의적 이념’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가보는 ‘구성주의적 이념’을 확장시켜 이를 과학, 예술 또는 기타 영역에서의 ‘뛰어난 창의력’과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입체주의가 자연주의적 미술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입체주의 이후 미술계에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다.”

자연주의적 미술을 복원시킬 토대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적었다.


“대상 세계의 외관을 재현하지 않는 미술이라는 것은 예전에는 결코 생각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입체주의 이후 미술의 회생은 매우 힘들었다.
구성주의 이념은 선, 색채, 형태와 같은 시각예술 요소는 외부 세계와 무관한 독자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한다.
즉 이러한 요소들의 생명과 활동은 이간의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으면서 스스로 조절되는 심리적 현상이다.
이는 단어와 숫자처럼 공리적인 이유 때문에 관습적으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며, 단순한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즉각적이고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법칙이 드러나면서 미술의 영역이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그 동안 간과되었던 인간의 충동과 감정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요소들은 문학이나 시 등으로도 가능한 이미지의 연상을 위해 잘못 사용되어 왔다.”


가보의 주장은 구성주의의 의미를 확대시켜 표현적 추상을 비롯한 모든 비재현적인 추상 미술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었다.
이는 칸딘스키의 생각과 유사하며 일반적으로 정서적 표현이 배제된 것으로 여겨지는 구성주의보다는 표현적 추상에 적합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자유미술가협회




동경 유학생들이 그룹으로 활동했음을 1938년 4월 15일자 『동아일보』에서 알 수 있다.

“도쿄에서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화가들과 도쿄 각 미술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연합하여 오는 4월 23일부터 27일까지 경성 화신갤러리에서 제1회 동경미술학교 종합전을 개최하기로 하였는데, 출품은 서양화를 중심으로 동양화, 조각, 자수, 각 부문의 90여 점에 출품인원 30여 명을 넘으며, 그 중에는 동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한 여류화가도 4명 있고, 이런 모임은 도쿄 유학생이 생긴 이후 조선 화단에 처음 있는 일로서 봄을 맞이한 조선 화단의 한 성사를 이룬 것이라 한다.
참여작가는 김만형, 이쾌대, 최재덕, 주경, 윤중식, 김종하, 고석, 홍일표 … ”


근대미술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은 1935년을 전후로 아방가르드 그룹인 자유미술가협회, 미술문화협회, 그리고 백만회이다.
1937년에 결성된 자유미술가협회는 명칭이 시사하듯 어떤 사조를 추구하기보다는 자유롭게 창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그룹은 원래 ‘신시대양화전’에서 활동하던 하세가와 사브로長谷川三郞(1906~57), 오오츠다 마사도요大津田正豊, 쓰다 세이슈津田正周, 무라이 마사나리村井正誠(1905~), 야마구치 가오르山口 薰(1907~68), 야바시 로크로矢橋六郞(1905~)가 중심이 되고 그 밖에 ‘포럼’, ‘흑색양화전’에서 활약하던 화가들 오노사토 도시노부小野里利信(1912~86) 그리고 평론가 13명을 고문으로 추대하여 1937년에 결성했다.


자유미술가협회전에 구상 작품도 많이 출품되었지만 회원들 대부분은 순수조형의 기하적 추상 작품을 전람회를 통해 소개했다.
기하적 추상을 유럽 유학파가 1930년대 초에 귀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소개했고 이 협회 회원들이 폭넓게 작품을 제작했다.
이들에 의해 초상회화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기할 점은 자유미술가협회전은 기존의 단체전과는 달리 유화, 수채화, 판화, 소묘, 콜라주, 오브제, 사진 등 7종목을 둔 것이다.
특히 에이 큐瑛九(1911~60)가 사진을 출품하고 대담한 여러 오브제 작업을 소개했다.


창립 때부터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참여한 우리나라 화가는 김환기였다.
김환기는 스물네 살 때 회우로서 1937년 7월 10일~19일 우에노에 있는 일본미술협회 전시장에서 개최된 창립전에 참여한 이래 1942년 회우를 사퇴할 때가지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김환기 외에도 문학수, 유영국, 이중섭, 주현, 박생광, 이규상, 조우식, 안기풍, 송혜수, 배동신 등이 참여했으며, 문학수와 유영국은 1938년 5월 22일~31일에 열린 전람회에서 협회상을 수상하고 회우로 추대되었고, 이중섭은 1941년 4월 10일~21일에 열린 전람회에서 회우로 추대되고 1943년 3월 25일~4월 2일에 열린 전람회에서는 태양상을 수상했다.
자유미술가협회가 2월에 결성될 때 김환기는 일본대학 예술학원 연수과에 재학 중이었고, 3월에 졸업한 그는 4월에 귀국했다.
자유미술가협회 창립전이 7월에 열렸으므로 김환기가 고향 기좌도에서 작품을 동경으로 발송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에도 기좌도와 서울을 오가며 작품을 발송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가 1939년에 조선 지부장에 임명되었을 것이다.


이중섭은 제2회전부터 참여하여 그 후 미술창작가협회로 명칭이 바뀐 후에도 계속 출품하여 주목을 받았다.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은 제2회전의 작품에 대해 다키구치 슈조는 “환각적인 신화를 묘사하고 있다.
소품이지만 큰 배경을 느끼게 한다. 옛 신비 속에서 생생한 악마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했으며, 하세가와 사브로는 1938년 7월 『미의 국』에 기고한 글에서 “이중섭 씨의 여러 작품도 훌륭하다. 아주 작은 화면에 가득 찬 영웅적이고 모뉴멘탈한 구도는 대개의 대전람회가 대작주의인 데 대한 당당한 항의이다”라고 호평했다.
김환기도 1940년 12월 『문장』 제2권 10호에 기고한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에서 호평했다.


“작품 거의 전부가 소를 취재했는데 침착한 색채의 계조, 정확한 데포름, 솔직한 이매주, 소박한 환희, 좋은 소양을 가진 작가이다.
쏘쳐오는 소, 왜치는 소, 세기의 운향을 듣는 것 같았다.
응시하는 소의 눈동자, 아름다운 애린이었다.
씨는 이 한 해에 있어 우리 화단에 일등으로 빛나는 존재였다.
정진을 바란다.”


흥미로운 점은 김환기, 문학수, 유영국, 주현 등은 창립전부터 참여하면서 추상회화를 제작했는데, 김환기의 작품은 <항공표지>(1937), <론도>(1938), <아리아>(1938), <백구 白鷗>(1938), <향 響>(1939) 등 추상의 대상을 밝힌 데 반해 유영국은 <작품 B>(1937), <작품 R2>(1938), <작품 R3>(1938), <작품 E1>(1938) 등으로, 주현은 <작품 4>(1937), <작품 6>(1937), <작품 1>(1938), <작품 2>(1938), <작품 3>(1938) 등으로 대상을 밝히지 않은 순수추상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김환기 작품의 특징은 원, 원에 가까운 둥근 형태, 유연한 곡선, 면과 면의 겹침 등으로 리드미컬한 요소와 감성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것이다.
리드미컬한 요소는 작품 제목 <론도>, <아리아>, <향> 등이 시사하듯 음악을 기하적 추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1939년 제3회전에 출품한 이규상(1918~64)의 작품 <작품>이 전시회 직후 정현웅이 1939년 6월 2일 『조선일보』에 기고한 ‘추상주의 회화’라는 글과 함께 실렸다. 원과 곡선으로 구성된 <작품>에 대해 정현웅은 “추상주의는 조형예술이 가진 순수성, 즉 선, 색, 색채, 면의 비례균형, 조화 이러한 엣센스를 엣센스만으로서 표현하고 그 이외의 모든 잡음을 배격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무엇을 그린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라고 추상에 대한 이해를 적었다.
동양화가 박생광(1904~85)은 『야성 김정주 회갑 기념문집』에 기고한 ‘회고 60년’에서 자신도 “나는 일본에서 적어도 1930년대 동양화 재료로서 추상 화풍을 시도한 효시로 자부한다”고 밝혔다.


자유미술가협회는 1940년 10월 12일부터 16일가지 부민회관에서 조선인 작가들 대부분 참가한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을 개최했으며 삿포로에서도 비슷한 전람회를 열었다.
경성전의 전람회 목록에는 일본인 화가 12명의 작품을 포함하여 모두 60점이 소개되었으며 무라이 마사나리 등이 이 전람회 때문에 서울을 방문했다.
이 전람회는 유영국, 조우식, 이중섭 등의 노력으로 우여곡절 끝에 부민회관 3층에서 열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미술문화협회




1939년에 결성된 미술문화협회의 중심인물은 일본에 초현실주의를 유행시킨 후쿠자와 이치로였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1924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문’이 일본에 유입된 것은 1925년 문학에 의해서였으며 1930년을 전후로 초현실주의 작품이 이과전에서 하나둘씩 소개되었다.
후쿠자와 이치로福澤一郞가 1931년 파리에서 귀국하면서 조르조 데 키리코, 막스 에른스트 등의 영향이 나타난 초현실주의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이 이념이 유행했다.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1888~1978)


그리스 볼로 태생의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는 형이상학적 회화의 창시자이다.
1906~09년 뮌헨에 머무는 동안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에 흥미를 가졌고, 1909`~10년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수수께끼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들은 움직임이 없는 빈 공간, 비논리적인 그림자, 예기치 못한 원근법으로 인해 설명할 수 없이 이상하고 불편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사물의 일반적 관계를 무력화하고, 새롭고 신비로운 관계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일상적인 사물 뒤에 있는 숨겨져 있는 현실을 볼 수 있게 하는 ‘형이상학적 통찰력’에 대한 정교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키리코는 사물들이 본래 지니고 있는 정서적 의미를 없애기 위해 1914년부터 인간의 모습 대신 재봉용 마네킹을 그렸으며, 그 외에도 조상, 석고 두상, 고무장갑 등을 그렸다.
또 사물의 병치와 회화 공간의 형식적 특성을 이용하여 불안한 분위기를 창출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초현실주의의 한 특징을 예견했다.
비록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 기법을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키리코 작품에서 보이는 반쯤은 꿈같고 반쯤은 병리학적인 효과를 지닌 신비스러움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목표로 한 정서적인 효과와 유사했다.
또한 초현실주의 운동은 “미술 작품에는 상식과 논리가 들어올 자리가 없으며 훌륭한 작품은 꿈이나 어린이의 정신 상태와 매우 가깝다”는 키리코의 믿음과 전적으로 일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그림은 더욱 철저한 묘사와 엄격한 기법을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의미는 결여되어 있었다.


막스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독일계 프랑스 화가 막스 에른스트는 1908~14년 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해지만 회화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정신질환자의 그림에 매료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1919년 쾰른의 다다 그룹을 이끌었으며 ‘다다막스’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또한 콜라주와 포토몽타주 기법을 초현실주의에 접목시켰다.
1922년 파리에 정착하여 이런 기법들을 퍼뜨렸으며 1924년 초현실주의 운동의 형성에 참여했다.
에른스트의 작품은 종잡을 수 없고 풍부한 상상력을 보여주며 항상 실험적이었다.
전성기에 제작한 작품들은 초현실주의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