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미술가협회
동경 유학생들이 그룹으로 활동했음을 1938년 4월 15일자 『동아일보』에서 알 수 있다.
“도쿄에서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화가들과 도쿄 각 미술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연합하여 오는 4월 23일부터 27일까지 경성 화신갤러리에서 제1회 동경미술학교 종합전을 개최하기로 하였는데, 출품은 서양화를 중심으로 동양화, 조각, 자수, 각 부문의 90여 점에 출품인원 30여 명을 넘으며, 그 중에는 동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한 여류화가도 4명 있고, 이런 모임은 도쿄 유학생이 생긴 이후 조선 화단에 처음 있는 일로서 봄을 맞이한 조선 화단의 한 성사를 이룬 것이라 한다.
참여작가는 김만형, 이쾌대, 최재덕, 주경, 윤중식, 김종하, 고석, 홍일표 … ”
근대미술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은 1935년을 전후로 아방가르드 그룹인 자유미술가협회, 미술문화협회, 그리고 백만회이다.
1937년에 결성된 자유미술가협회는 명칭이 시사하듯 어떤 사조를 추구하기보다는 자유롭게 창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그룹은 원래 ‘신시대양화전’에서 활동하던 하세가와 사브로長谷川三郞(1906~57), 오오츠다 마사도요大津田正豊, 쓰다 세이슈津田正周, 무라이 마사나리村井正誠(1905~), 야마구치 가오르山口 薰(1907~68), 야바시 로크로矢橋六郞(1905~)가 중심이 되고 그 밖에 ‘포럼’, ‘흑색양화전’에서 활약하던 화가들 오노사토 도시노부小野里利信(1912~86) 그리고 평론가 13명을 고문으로 추대하여 1937년에 결성했다.
자유미술가협회전에 구상 작품도 많이 출품되었지만 회원들 대부분은 순수조형의 기하적 추상 작품을 전람회를 통해 소개했다.
기하적 추상을 유럽 유학파가 1930년대 초에 귀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소개했고 이 협회 회원들이 폭넓게 작품을 제작했다.
이들에 의해 초상회화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기할 점은 자유미술가협회전은 기존의 단체전과는 달리 유화, 수채화, 판화, 소묘, 콜라주, 오브제, 사진 등 7종목을 둔 것이다.
특히 에이 큐瑛九(1911~60)가 사진을 출품하고 대담한 여러 오브제 작업을 소개했다.
창립 때부터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참여한 우리나라 화가는 김환기였다.
김환기는 스물네 살 때 회우로서 1937년 7월 10일~19일 우에노에 있는 일본미술협회 전시장에서 개최된 창립전에 참여한 이래 1942년 회우를 사퇴할 때가지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김환기 외에도 문학수, 유영국, 이중섭, 주현, 박생광, 이규상, 조우식, 안기풍, 송혜수, 배동신 등이 참여했으며, 문학수와 유영국은 1938년 5월 22일~31일에 열린 전람회에서 협회상을 수상하고 회우로 추대되었고, 이중섭은 1941년 4월 10일~21일에 열린 전람회에서 회우로 추대되고 1943년 3월 25일~4월 2일에 열린 전람회에서는 태양상을 수상했다.
자유미술가협회가 2월에 결성될 때 김환기는 일본대학 예술학원 연수과에 재학 중이었고, 3월에 졸업한 그는 4월에 귀국했다.
자유미술가협회 창립전이 7월에 열렸으므로 김환기가 고향 기좌도에서 작품을 동경으로 발송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에도 기좌도와 서울을 오가며 작품을 발송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가 1939년에 조선 지부장에 임명되었을 것이다.
이중섭은 제2회전부터 참여하여 그 후 미술창작가협회로 명칭이 바뀐 후에도 계속 출품하여 주목을 받았다.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은 제2회전의 작품에 대해 다키구치 슈조는 “환각적인 신화를 묘사하고 있다.
소품이지만 큰 배경을 느끼게 한다. 옛 신비 속에서 생생한 악마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했으며, 하세가와 사브로는 1938년 7월 『미의 국』에 기고한 글에서 “이중섭 씨의 여러 작품도 훌륭하다. 아주 작은 화면에 가득 찬 영웅적이고 모뉴멘탈한 구도는 대개의 대전람회가 대작주의인 데 대한 당당한 항의이다”라고 호평했다.
김환기도 1940년 12월 『문장』 제2권 10호에 기고한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에서 호평했다.
“작품 거의 전부가 소를 취재했는데 침착한 색채의 계조, 정확한 데포름, 솔직한 이매주, 소박한 환희, 좋은 소양을 가진 작가이다.
쏘쳐오는 소, 왜치는 소, 세기의 운향을 듣는 것 같았다.
응시하는 소의 눈동자, 아름다운 애린이었다.
씨는 이 한 해에 있어 우리 화단에 일등으로 빛나는 존재였다.
정진을 바란다.”
흥미로운 점은 김환기, 문학수, 유영국, 주현 등은 창립전부터 참여하면서 추상회화를 제작했는데, 김환기의 작품은 <항공표지>(1937), <론도>(1938), <아리아>(1938), <백구 白鷗>(1938), <향 響>(1939) 등 추상의 대상을 밝힌 데 반해 유영국은 <작품 B>(1937), <작품 R2>(1938), <작품 R3>(1938), <작품 E1>(1938) 등으로, 주현은 <작품 4>(1937), <작품 6>(1937), <작품 1>(1938), <작품 2>(1938), <작품 3>(1938) 등으로 대상을 밝히지 않은 순수추상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김환기 작품의 특징은 원, 원에 가까운 둥근 형태, 유연한 곡선, 면과 면의 겹침 등으로 리드미컬한 요소와 감성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것이다.
리드미컬한 요소는 작품 제목 <론도>, <아리아>, <향> 등이 시사하듯 음악을 기하적 추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1939년 제3회전에 출품한 이규상(1918~64)의 작품 <작품>이 전시회 직후 정현웅이 1939년 6월 2일 『조선일보』에 기고한 ‘추상주의 회화’라는 글과 함께 실렸다. 원과 곡선으로 구성된 <작품>에 대해 정현웅은 “추상주의는 조형예술이 가진 순수성, 즉 선, 색, 색채, 면의 비례균형, 조화 이러한 엣센스를 엣센스만으로서 표현하고 그 이외의 모든 잡음을 배격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무엇을 그린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라고 추상에 대한 이해를 적었다.
동양화가 박생광(1904~85)은 『야성 김정주 회갑 기념문집』에 기고한 ‘회고 60년’에서 자신도 “나는 일본에서 적어도 1930년대 동양화 재료로서 추상 화풍을 시도한 효시로 자부한다”고 밝혔다.
자유미술가협회는 1940년 10월 12일부터 16일가지 부민회관에서 조선인 작가들 대부분 참가한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을 개최했으며 삿포로에서도 비슷한 전람회를 열었다.
경성전의 전람회 목록에는 일본인 화가 12명의 작품을 포함하여 모두 60점이 소개되었으며 무라이 마사나리 등이 이 전람회 때문에 서울을 방문했다.
이 전람회는 유영국, 조우식, 이중섭 등의 노력으로 우여곡절 끝에 부민회관 3층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