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유학생들




고희동에 이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김관호(1880~1959), 김찬영, 나혜석, 이종우, 도상봉 등이 있다.
서양화는 일본에서 유학한 사람들에 의해 소개되었으므로 우리나라의 서양화는 파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던 유럽 회화에 대한 일본인들의 이해를 받아들인 것에 불과했다.
목탄으로 데생을 하고 캔버스에 유화물감을 칠하는 서양 재료 사용법과 그 효과는 배울 수 있었지만, 서양미술사의 흐름이라든가 파리를 중심으로 급변하는 새로운 양식들을 알 수 없었다.
일본으로 유학한 사람들은 일본에 인상주의 회화를 소개한 구로다와 구메 게이치로를 통해 인상주의 양식을 배웠지만, 일본인들도 그 양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자연히 왜곡된 양식을 배우게 되었다.


인상주의는 공식적으로 1874년 4월 15일 사진작가 펠렉스 투르나숑 나다르Felix Tournachon Nadar(1820~1910)의 2층 작업실에서 개최된 그룹전으로 시작되어 1886년 제8회 그룹전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
우리나라 화가들이 일본에 유학할 때인 20세기 초에는 인상주의는 이미 유행이 지난 양식이었고 후기인상주의의 다양한 양식들에 대한 실험의 시기를 거쳐 야수주의를 포함한 표현주의와 입체주의가 체계적인 미술운동으로 그리고 새로운 양식으로 부상할 때였다.
그러므로 유행이 지난 인상주의 양식을 일본인들을 통해 왜곡된 양식으로 배워 우리나라에 이식한 것은 가뜩이나 서양화에 대한 이해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던 때에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동경 유학생들이 인상주의를 왜곡된 양식으로 배웠다는 것은 현존하는 몇몇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인상주의는 과학적 사실주의로서 대상을 좀 더 치밀하게 관찰하여 묘사하는 양식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풍경화를 그릴 때 빛이 사물에 닿아 굴절하는 것까지도 묘사하기 위해 붓질을 짧게 사용했으며 굴절된 빛이 대기에 주는 변화까지도 표현하기 위해 공간의 깊이를 측정해내었다.
빛의 역할을 중요시했으므로 같은 장소에서 그린 풍경이라도 오전과 오후의 장면이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상주의 양식의 특징은 붓질이 짧고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다.
동경 유학생들의 작품에서 이런 양식이 발견되지 않아 왜곡된 양식으로 배웠다고 보여지는데 일본인들의 인상주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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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호




우리나라 두 번째 서양화가는 김관호이다.
그도 고희동과 마찬가지로 총독부 장학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므로 두 사람 모두 서양화를 전폭적으로 후원한 일본 메이지 정부의 정책 수혜자였다.
김관호는 1890년 평양의 부호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서울에서 다니고, 고희동이 도일하던 1909년에 따로 동경에 건너가 처음에는 공업을 전공할 뜻으로 메이지 학원에 들어가 2년 동안 다니던 중 집안에서 공업 전공을 반대하고, 그가 달리 관심이 있던 서양화 전공은 허락하여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으며, 고희동이 졸업한 이듬해인 1916년 같은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의 졸업 작품 <해질녘>이 졸업하던 해 관전官展으로 불린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우리나라에서 이 사실이 보도되었지만 작품은 소개되지 못했다.
『매일신보』는 독자들에게 이 점에 양해를 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전람회에 진열된 김군의 그림은 사진이 동경으로부터 도착하였으나 벌거벗은 그림인 고로 사진으로 게재하지 못함.”


김관호가 수석으로 졸업하고 문부성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문부성전람회는 1907년 일본 문부성 주최로 열렸고 1917년부터 제국미술원에서 경영했다.
이때부터 제전으로 불리었으며 1937년에는 신문전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1944년까지 이어졌다.
문전과 제전은 일본의 관전으로 전쟁 후에는 관전제도가 폐지되고 문전에 관계했던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사단법인 일본미술전람회(약칭 일전)가 열리고 있다.
<해질녘 혹은 석모>은 누드화로 두 여인의 뒷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그가 고향 평양 능라도 부근 대동강을 배경으로 물에서 미역을 감고 올라온 여인들의 모습이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크고 영예로운 전람회는 관전이었고 관전은 1940년경까지 일본 화단의 주류였다.
따라서 관전에 입선되는 것은 영예로운 일로 여겨졌으며 특선을 할 경우 정부가 작품을 매입하는 등 특혜가 주어졌다.
관전은 1907년에 시작된 문부성미술전람회로 문전으로 불리었으나 곧 문전보다는 관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문전은 1919년 주관처가 제국미술원으로 넘어가면서 제전帝展으로 명칭이 달라졌으며 1935년 개혁과 더불어 다시금 문부성 주관의 문전으로 되돌아갔고 그 때부터 초기 문전과 구별하기 위해 신문전新文展으로 불리었다.
1922년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선전鮮展은 일본이 문전을 모델로 만든 것이다.
문전은 2차 세계대전 후 재단법인인 민간단체로 이전되었으며 일전으로 불리게 되었고 매년 가을에 전람회가 열리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관전 심사위원들 대부분은 동경미술학교 교수들이었다.
그러므로 동경미술학교에서 강조하던 인상주의 양식의 작품이 주로 입선되었고 동경미술학교 재학생 작품 중 교수들이 만족해하는 작품을 출품하면 입선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많은 평론가들이 <해질녘>을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라고 하지만 인상주의 양식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작품이다.
김관호가 인상주의 양식을 배웠고 그런 양식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면 동경미술학교 교수들의 인상주의에 대한 이해에 큰 오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이 학교의 미술교육에 관해 알 수 없지만, 김관호의 양식은 인상주의가 출현하기 전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낭만주의 양식에 가깝다.
김관호가 이런 양식들에 관해 알고 있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해지는 풍경을 배경으로 여인의 두 누드를 캔버스에 가득 차게 그린 것만으로도 심사위원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을 만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남자와 여자의 누드가 조각과 그림으로 묘사되었지만, 동양에서는 그런 발상이 쉽게 용인되지 않던 때였다.
실내에서 그린 누드모델의 모습을 고향 풍경화에 삽입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오른편 여인의 응덩이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두 다리를 붙인 채 몸의 균형을 잡는 어색함이 있지만, 서양화가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되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크게 한 발작을 내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1923년에 개최된 제2회 조선미전에 누드화 <호수>를 출품했으나 이때도 신문은 그의 작품을 게재하지 않았다.
누드화는 용인하면서도 신문에 게재하는 것이 윤리적인 문제로 인식되던 때였다.


고희동이 귀국 후 10년만에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서양화에서 멀어진 것과 같이 김관호도 제2회 조선미전에 작품을 출품한 후 활동을 거의 중단했다.
그의 작품 활동 기록으로는 1917년에 『매일신보』에 소개된 <조선 처녀>와 1922년 제2회 선전에 출품한 <호수> 등이 전부이다.
<호수>는 잔잔한 호수와 바위언덕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앉은 젊은 여인의 나상을 치밀한 사실적 수법으로 그린 것이었다.
그는 정상적인 작품 활동을 스스로 저버림으로써 고희동과 마찬가지로 좌절자가 되었다.
게다가 그는 고희동처럼 전통화가로 전향하지도 않았다.


서양화가 정착되기에 우리나라의 토양은 아직 개간되지 못했다.
서양화에 대한 일반인의 몰이해와 서양미술의 흐름을 파악할 수 없는 환경 그리고 재료 구입의 어려움이 활동을 제약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관호에 이어 세 번째로 일본에 유학한 김찬영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수학했지만 화가로서보다는 문필가로 활동했다.
김찬영은 1925년에 김관호와 함께 평양에 소성회화연구소塑星繪畵硏究所를 개설하고 그림에 재능과 뜻이 있는 학생들에게 서양화를 지도했으며, 동양화부도 두어 김윤보와 김도식이 전통적 묵화를 가르쳤다.
이 연구소는 1930년경까지 지속되었으며 박영선이 이곳의 연구생이었다.
서양화를 우리나라에 이식시키려고 노력한 첫 세대 화가들 모두 중도에 포기했는데, 이는 우리 문화가 서양화를 받아들일 만큼 여유가 없었던 데에 주된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들의 선구적 정신의 바탕이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회화의 세계를 탐험하는 선구적 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회화에 대한 사상적 신념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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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영




김찬영(1893~1960)은 1893년 평양의 부호 지주집안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16살 때 어린 나이로 동경 유학을 떠날 만큼 유복했다.
그는 동경에서 김관호도 한때 다닌 메이지 학원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쳤고, 1911년 봄에 동경미술학교 서영화과에 입학하여 1917년에 졸업했다.
고희동, 김관호에 이어 조선인으로 세 번째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1세대 서양화가들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의 김관호 1년 후배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 서양화가로서의 활동이 전혀 없음이 처음부터 선구자의 위치를 포기한 존재였다.
그가 남긴 그림이라고는 미술학교 졸업 때 제출한 <자화상> 하나뿐이다.


그는 동경의 조선인 유학생 사회에서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유학생들 모임이 만든 잡지 『학지광學之光』에 삽화와 시를 게재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그는 『폐허』, 『창조』, 『영대』의 동인으로 삽화를 발표하는 한편 비평적인 글을 쓰며 문필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1925년에 김관호, 김윤보, 김관식 등과 함께 평양에서 삭성회朔星會를 조직하고 삭성회 회화연구소를 통해 후학을 양성했다.
이 연구소에서는 전통회화부도 두어 당시 평양 지역의 저명한 서화가였던 김윤보와 김도식이 수묵화를 가르쳤다.
이 연구소는 1928년까지 연구생작품전도 갖는 등 매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다가 중단되었다.
김찬영은 1920년대 후반에 평양에서 서울로 이주한 후 우리나라 옛 도자기를 비롯해 그림과 글씨를 수집하여 고미술 소장가로도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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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유학파




고희동의 노력으로 1918년에 출범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는 이듬해 일어난 민족봉기 3.1운동과 안중식, 조석진 두 사람의 잇단 타계로 1921년 4월 1일에야 창립전을 개최했다.
언론은 이 전람회를 주목했다. 『동아일보』는 4월 2일자 지면에 기사를 적었다.


“꿈속에 있던 조선 서화계의 깨우는 첫 소리 … 서화협회의 첫번 서화 전람회는 예명과 같이 일일 오전부터 계동 일번지 중앙학교에서 첫날을 열었다.
침쇄 하기 거의 극한에 이르렀다 할 우리의 서화계로부터 다시 일어나는 첫걸음을 걸으려 하는 이 새 운동이 과연 어떠한 성적을 보일는지 이 전람회의 성공과 실패는 조선 서화계에 대하여 중대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1920년대 초에 단체들이 생겨났지만 동인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소규모 그룹들이었다.
1923년에 결성된 고려미술회는 창작을 발표하고 강습소를 운영하는 단체였다.
이 단체의 회원은 박영래, 강진구, 정규익, 김석영, 김명화, 나혜석, 이병직, 이재순 등이었고 이들은 후진을 양성하는 강습소 교수로 김복진과 김은호를 초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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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1919년 3·1운동 때에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의 명문집안에서 5남매 중 차녀로 태어났고, 서울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입학했다.
그녀에 앞서 동경 유학 중인 둘째 오빠 나경석이 이끌어준 것이었다.
중도에 사정으로 1년 휴학하고 1918년에 4년 과정의 서양화부 고등사범과를 졸업하여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고,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에 이은 서양화 개척의 네 번째 선구자가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가정 파탄으로 비극적인 파멸에 접어들던 1930년대 중엽까지 뚜렷한 작품을 남겼다는 점에서 서양화 개척의 세 남자 선배를 능가한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미술학도이기보다는 문필가, 사회운동가라고 할 만큼 사회참여 성향이 농후했다.


나혜석은 1919년 3·1운동 때에 서울의 대표적인 지식인 김마리아, 박인덕, 김활란 등과 여성들의 동참을 위한 비밀집회를 갖다가 체포되어 약 5개원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홍일점 여류화가로서의 나혜석의 부각은 1921년 3월에 가진 개인전의 대성황과 언론의 경합 보도 및 격려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서울에서 조선인 서양화가의 개인전은 그것이 처음이었으므로 신문들이 다투어 보도했다.
경성일보사 구내의 내청각에서 열린 개인전에는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 등 70여 점이 소개되었다. 전시기간은 불과 이틀이었지만 첫 개인전이어서 첫날 관람자의 수가 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나혜석은 1922년부터 선전에 출품하기 시작했으며 입선과 수상을 거듭 했다.
그녀는 당대의 저명한 계몽주의자이자 소설가 이광수의 영향을 받아 문필가로 활동하면서 서구 인문학에 눈을 뜨기도 했는데, 이 무렵 1922년 이광수는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자유와 평등사상을 고취했다.
그의 유명한 소설 『무정 無情』, 『흙』 등은 나혜석의 인생 역정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동경시절의 나혜석과 이광수와의 관계에 관해서는 많은 풍문이 구전되고 있으며 나혜석은 미모와 재기로 남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나혜석은 1920년 경도제국대학 법과 출신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는데, 10년 연상의 김우영은 전처와 사별한 기혼자로 나혜석이 3·1운동 때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법정 변론을 맡은 적이 있었다.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의 정책적으로 임용한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함에 따라 그녀는 수년 동안 만주에서 생활했다.
이 시기에 그린 안동, 봉황성, 봉천 등지에서 그린 풍경화를 선전에 출품했다.
그녀는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 것은 1927년 6월이었다.
일본 정부가 부영사 김우영에게 베풀어준 부부동반의 위로출장이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서양화의 본고장 파리에 머물면서 당시 유행하던 회화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야수주의 화풍에 매료되었고 그녀의 생애에 숙명을 이루게 되는 최린을 만났다.


최린은 민족대표 33인 중에서도 가장 맹렬한 운동을 전개했던 3·1운동의 행동책이었는데 당시에는 천도교가 마련해준 자금으로 세계일주여행 중 파리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 무렵 파리에 체류하고 있던 화가 이종우의 회고에 의하면 최린과 나혜석은 이종우가 마련한 최린 환영파티에서 첫 대면을 이루었고, 그 후 나혜석은 최린의 연인으로 소문이 났다.
파리에서의 소문은 귀국 후 김우영에게 알려졌으며 이들 부부는 이혼했다.
1934년 나혜석은 장문의 <이혼고백서>를 발표하여 선풍적인 구설에 올랐는데, <이혼고백서>는 당시의 인습과 남성우위의 사회를 공격하는 치열한 선전포고문으로 그녀가 여기서 드러내보인 ‘정조’를 둘러싼 남녀 간의 사회 세력적 갈등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조선 남성 심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
여자의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 아닌가.”


나혜석은 1935년 2월호 『삼천리』에 ‘신생활에 들면서’란 제목의 글에서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취미다”라고 주장했다.
이혼 후 나혜석은 일정한 곳에 안착하지 못하고 떠돌았다. 선전에 출품하고 여성해방을 절규하는 글도 수없이 발표했지만, 날이 갈수록 깊어가는 울분과 고독이 그녀를 병들게 했다.
그녀는 41세에 중풍환자로 서울의 종로구 청운 양로원에 무의탁자로 수용되었다. 반신불수의 몸은 더욱 그녀의 만년을 비참하게 했다.
그녀의 말년 10년 동안의 행적은 추적하기 불가능하다. 나혜석의 임종에는 아무도 입회하지 않았다.
1949년 3월 14일의 관보는 1948년 12월 10일 서울 시립자제원(현재의 시립남부병원)에서 나혜석이라는 이름의 53세가량의 여자 행려병환자가 소지품이 전무한 가운데 병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25년 평양에서 결성된 삭성회에는 회원으로 김관호, 김찬영, 김윤보, 김광식 등이 있었으며 강습소도 열었다.
극단 토월에 소속된 토월미술연구회에는 김복진, 안석주, 윤상열, 이제창, 이승만, 권우전 등이 참여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 사이에 출현한 그룹들의 특징은 동경미술학교 동문이거나 동경 유학파들을 회원으로 한 것들로 녹향회, 동미회, 재동경미술협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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