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은 1919년 3·1운동 때에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의 명문집안에서 5남매 중 차녀로 태어났고, 서울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입학했다.
그녀에 앞서 동경 유학 중인 둘째 오빠 나경석이 이끌어준 것이었다.
중도에 사정으로 1년 휴학하고 1918년에 4년 과정의 서양화부 고등사범과를 졸업하여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고,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에 이은 서양화 개척의 네 번째 선구자가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가정 파탄으로 비극적인 파멸에 접어들던 1930년대 중엽까지 뚜렷한 작품을 남겼다는 점에서 서양화 개척의 세 남자 선배를 능가한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미술학도이기보다는 문필가, 사회운동가라고 할 만큼 사회참여 성향이 농후했다.


나혜석은 1919년 3·1운동 때에 서울의 대표적인 지식인 김마리아, 박인덕, 김활란 등과 여성들의 동참을 위한 비밀집회를 갖다가 체포되어 약 5개원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홍일점 여류화가로서의 나혜석의 부각은 1921년 3월에 가진 개인전의 대성황과 언론의 경합 보도 및 격려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서울에서 조선인 서양화가의 개인전은 그것이 처음이었으므로 신문들이 다투어 보도했다.
경성일보사 구내의 내청각에서 열린 개인전에는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 등 70여 점이 소개되었다. 전시기간은 불과 이틀이었지만 첫 개인전이어서 첫날 관람자의 수가 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나혜석은 1922년부터 선전에 출품하기 시작했으며 입선과 수상을 거듭 했다.
그녀는 당대의 저명한 계몽주의자이자 소설가 이광수의 영향을 받아 문필가로 활동하면서 서구 인문학에 눈을 뜨기도 했는데, 이 무렵 1922년 이광수는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자유와 평등사상을 고취했다.
그의 유명한 소설 『무정 無情』, 『흙』 등은 나혜석의 인생 역정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동경시절의 나혜석과 이광수와의 관계에 관해서는 많은 풍문이 구전되고 있으며 나혜석은 미모와 재기로 남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나혜석은 1920년 경도제국대학 법과 출신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는데, 10년 연상의 김우영은 전처와 사별한 기혼자로 나혜석이 3·1운동 때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법정 변론을 맡은 적이 있었다.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의 정책적으로 임용한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함에 따라 그녀는 수년 동안 만주에서 생활했다.
이 시기에 그린 안동, 봉황성, 봉천 등지에서 그린 풍경화를 선전에 출품했다.
그녀는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 것은 1927년 6월이었다.
일본 정부가 부영사 김우영에게 베풀어준 부부동반의 위로출장이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서양화의 본고장 파리에 머물면서 당시 유행하던 회화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야수주의 화풍에 매료되었고 그녀의 생애에 숙명을 이루게 되는 최린을 만났다.


최린은 민족대표 33인 중에서도 가장 맹렬한 운동을 전개했던 3·1운동의 행동책이었는데 당시에는 천도교가 마련해준 자금으로 세계일주여행 중 파리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 무렵 파리에 체류하고 있던 화가 이종우의 회고에 의하면 최린과 나혜석은 이종우가 마련한 최린 환영파티에서 첫 대면을 이루었고, 그 후 나혜석은 최린의 연인으로 소문이 났다.
파리에서의 소문은 귀국 후 김우영에게 알려졌으며 이들 부부는 이혼했다.
1934년 나혜석은 장문의 <이혼고백서>를 발표하여 선풍적인 구설에 올랐는데, <이혼고백서>는 당시의 인습과 남성우위의 사회를 공격하는 치열한 선전포고문으로 그녀가 여기서 드러내보인 ‘정조’를 둘러싼 남녀 간의 사회 세력적 갈등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조선 남성 심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
여자의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 아닌가.”


나혜석은 1935년 2월호 『삼천리』에 ‘신생활에 들면서’란 제목의 글에서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취미다”라고 주장했다.
이혼 후 나혜석은 일정한 곳에 안착하지 못하고 떠돌았다. 선전에 출품하고 여성해방을 절규하는 글도 수없이 발표했지만, 날이 갈수록 깊어가는 울분과 고독이 그녀를 병들게 했다.
그녀는 41세에 중풍환자로 서울의 종로구 청운 양로원에 무의탁자로 수용되었다. 반신불수의 몸은 더욱 그녀의 만년을 비참하게 했다.
그녀의 말년 10년 동안의 행적은 추적하기 불가능하다. 나혜석의 임종에는 아무도 입회하지 않았다.
1949년 3월 14일의 관보는 1948년 12월 10일 서울 시립자제원(현재의 시립남부병원)에서 나혜석이라는 이름의 53세가량의 여자 행려병환자가 소지품이 전무한 가운데 병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25년 평양에서 결성된 삭성회에는 회원으로 김관호, 김찬영, 김윤보, 김광식 등이 있었으며 강습소도 열었다.
극단 토월에 소속된 토월미술연구회에는 김복진, 안석주, 윤상열, 이제창, 이승만, 권우전 등이 참여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 사이에 출현한 그룹들의 특징은 동경미술학교 동문이거나 동경 유학파들을 회원으로 한 것들로 녹향회, 동미회, 재동경미술협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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