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영
김찬영(1893~1960)은 1893년 평양의 부호 지주집안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16살 때 어린 나이로 동경 유학을 떠날 만큼 유복했다.
그는 동경에서 김관호도 한때 다닌 메이지 학원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쳤고, 1911년 봄에 동경미술학교 서영화과에 입학하여 1917년에 졸업했다.
고희동, 김관호에 이어 조선인으로 세 번째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1세대 서양화가들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의 김관호 1년 후배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 서양화가로서의 활동이 전혀 없음이 처음부터 선구자의 위치를 포기한 존재였다.
그가 남긴 그림이라고는 미술학교 졸업 때 제출한 <자화상> 하나뿐이다.
그는 동경의 조선인 유학생 사회에서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유학생들 모임이 만든 잡지 『학지광學之光』에 삽화와 시를 게재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그는 『폐허』, 『창조』, 『영대』의 동인으로 삽화를 발표하는 한편 비평적인 글을 쓰며 문필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1925년에 김관호, 김윤보, 김관식 등과 함께 평양에서 삭성회朔星會를 조직하고 삭성회 회화연구소를 통해 후학을 양성했다.
이 연구소에서는 전통회화부도 두어 당시 평양 지역의 저명한 서화가였던 김윤보와 김도식이 수묵화를 가르쳤다.
이 연구소는 1928년까지 연구생작품전도 갖는 등 매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다가 중단되었다.
김찬영은 1920년대 후반에 평양에서 서울로 이주한 후 우리나라 옛 도자기를 비롯해 그림과 글씨를 수집하여 고미술 소장가로도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