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호
우리나라 두 번째 서양화가는 김관호이다.
그도 고희동과 마찬가지로 총독부 장학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므로 두 사람 모두 서양화를 전폭적으로 후원한 일본 메이지 정부의 정책 수혜자였다.
김관호는 1890년 평양의 부호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서울에서 다니고, 고희동이 도일하던 1909년에 따로 동경에 건너가 처음에는 공업을 전공할 뜻으로 메이지 학원에 들어가 2년 동안 다니던 중 집안에서 공업 전공을 반대하고, 그가 달리 관심이 있던 서양화 전공은 허락하여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으며, 고희동이 졸업한 이듬해인 1916년 같은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의 졸업 작품 <해질녘>이 졸업하던 해 관전官展으로 불린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우리나라에서 이 사실이 보도되었지만 작품은 소개되지 못했다.
『매일신보』는 독자들에게 이 점에 양해를 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전람회에 진열된 김군의 그림은 사진이 동경으로부터 도착하였으나 벌거벗은 그림인 고로 사진으로 게재하지 못함.”
김관호가 수석으로 졸업하고 문부성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문부성전람회는 1907년 일본 문부성 주최로 열렸고 1917년부터 제국미술원에서 경영했다.
이때부터 제전으로 불리었으며 1937년에는 신문전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1944년까지 이어졌다.
문전과 제전은 일본의 관전으로 전쟁 후에는 관전제도가 폐지되고 문전에 관계했던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사단법인 일본미술전람회(약칭 일전)가 열리고 있다.
<해질녘 혹은 석모>은 누드화로 두 여인의 뒷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그가 고향 평양 능라도 부근 대동강을 배경으로 물에서 미역을 감고 올라온 여인들의 모습이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크고 영예로운 전람회는 관전이었고 관전은 1940년경까지 일본 화단의 주류였다.
따라서 관전에 입선되는 것은 영예로운 일로 여겨졌으며 특선을 할 경우 정부가 작품을 매입하는 등 특혜가 주어졌다.
관전은 1907년에 시작된 문부성미술전람회로 문전으로 불리었으나 곧 문전보다는 관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문전은 1919년 주관처가 제국미술원으로 넘어가면서 제전帝展으로 명칭이 달라졌으며 1935년 개혁과 더불어 다시금 문부성 주관의 문전으로 되돌아갔고 그 때부터 초기 문전과 구별하기 위해 신문전新文展으로 불리었다.
1922년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선전鮮展은 일본이 문전을 모델로 만든 것이다.
문전은 2차 세계대전 후 재단법인인 민간단체로 이전되었으며 일전으로 불리게 되었고 매년 가을에 전람회가 열리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관전 심사위원들 대부분은 동경미술학교 교수들이었다.
그러므로 동경미술학교에서 강조하던 인상주의 양식의 작품이 주로 입선되었고 동경미술학교 재학생 작품 중 교수들이 만족해하는 작품을 출품하면 입선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많은 평론가들이 <해질녘>을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라고 하지만 인상주의 양식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작품이다.
김관호가 인상주의 양식을 배웠고 그런 양식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면 동경미술학교 교수들의 인상주의에 대한 이해에 큰 오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이 학교의 미술교육에 관해 알 수 없지만, 김관호의 양식은 인상주의가 출현하기 전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낭만주의 양식에 가깝다.
김관호가 이런 양식들에 관해 알고 있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해지는 풍경을 배경으로 여인의 두 누드를 캔버스에 가득 차게 그린 것만으로도 심사위원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을 만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남자와 여자의 누드가 조각과 그림으로 묘사되었지만, 동양에서는 그런 발상이 쉽게 용인되지 않던 때였다.
실내에서 그린 누드모델의 모습을 고향 풍경화에 삽입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오른편 여인의 응덩이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두 다리를 붙인 채 몸의 균형을 잡는 어색함이 있지만, 서양화가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되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크게 한 발작을 내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1923년에 개최된 제2회 조선미전에 누드화 <호수>를 출품했으나 이때도 신문은 그의 작품을 게재하지 않았다.
누드화는 용인하면서도 신문에 게재하는 것이 윤리적인 문제로 인식되던 때였다.
고희동이 귀국 후 10년만에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서양화에서 멀어진 것과 같이 김관호도 제2회 조선미전에 작품을 출품한 후 활동을 거의 중단했다.
그의 작품 활동 기록으로는 1917년에 『매일신보』에 소개된 <조선 처녀>와 1922년 제2회 선전에 출품한 <호수> 등이 전부이다.
<호수>는 잔잔한 호수와 바위언덕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앉은 젊은 여인의 나상을 치밀한 사실적 수법으로 그린 것이었다.
그는 정상적인 작품 활동을 스스로 저버림으로써 고희동과 마찬가지로 좌절자가 되었다.
게다가 그는 고희동처럼 전통화가로 전향하지도 않았다.
서양화가 정착되기에 우리나라의 토양은 아직 개간되지 못했다.
서양화에 대한 일반인의 몰이해와 서양미술의 흐름을 파악할 수 없는 환경 그리고 재료 구입의 어려움이 활동을 제약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관호에 이어 세 번째로 일본에 유학한 김찬영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수학했지만 화가로서보다는 문필가로 활동했다.
김찬영은 1925년에 김관호와 함께 평양에 소성회화연구소塑星繪畵硏究所를 개설하고 그림에 재능과 뜻이 있는 학생들에게 서양화를 지도했으며, 동양화부도 두어 김윤보와 김도식이 전통적 묵화를 가르쳤다.
이 연구소는 1930년경까지 지속되었으며 박영선이 이곳의 연구생이었다.
서양화를 우리나라에 이식시키려고 노력한 첫 세대 화가들 모두 중도에 포기했는데, 이는 우리 문화가 서양화를 받아들일 만큼 여유가 없었던 데에 주된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들의 선구적 정신의 바탕이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회화의 세계를 탐험하는 선구적 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회화에 대한 사상적 신념이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