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도(1630~1707년 이후)





석도의 본명은 주약극朱若極이다.
아버지 주형가가 감국監國을 자칭한 죄로 복주에서 처형당하자 태감太監이 어린 그를 데리고 도주했고 그는 후에 승려가 되었다.
그는 청초의 승려화가로 창조를 주장하고 옛 것을 모방하는 데 반대한 산수화의 대가가 되었다.
그는 저서 『화어록 畵語錄』에서 “일一로서 만萬을 다스리고 만으로써 일을 다스린다”고 했는데, 개별과 일반, 보편과 특수의 관계로서 그의 변증법적 사상을 표현한 말이다.
그는 『화어록』에서 일획이란 말과 이와 동의어인 36개의 일一자를 사용했다.
대부분의 석도 연구자들은 일획은 곧 일필일획 혹은 “붓을 일으키거나 붓을 대는 것(起筆落筆)”이라 하여 일一이 서수序數라고 본다.
석도는 당시의 복고주의에 반대하여 말했다.


“비록 어떤 화가를 핍진하게 닮았다 하더라도 또한 어떤 화가가 먹다 남은 국을 먹는 것일 뿐이다.

예전 사람의 수염과 눈썹은 나의 얼굴에 날 수 없고 예전 사람의 폐와 내장은 나의 배와 창자에 들여놓을 수 없다.

내가 예전에 대하여 어찌 배우기만 하고 변화시키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필묵의 기교에 관해서는 “먹은 정도正道를 닦지 않으면 정기精氣가 없고 필은 생활生活이 없으면 신묘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필과 먹이 마땅히 시대를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수현




변관식과 동갑 노수현(1899~1978)은 다복한 인생을 살았다.
해방 후 국전이 신설되자 심사위원으로 받들어졌고,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문화훈장 등 많은 상을 수상했고, 80세의 장수를 누렸다.
노수현은 황해도 곡산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15살 때 서울 보성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곧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하여 이상범과 최우석과 함께 4기생으로 조석진과 안중식으로부터 전통 동양화를 수학했다.
그는 1918년 19살 때 서화미술원을 졸업한 후 안중식의 사저 경묵당耕墨堂에 기거하며 계속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호 심산의 심자는 안중식의 아호 심산에서 심자를 받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노수현은 1920년 21살 때 창덕궁 대조전 벽화를 이상범과 함께 산수화로 장식했으며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삽화와 만화를 그렸으며 그 해 협전이 개최되자 창립전부터 출품하기 시작하여 1936년 제15회로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출품했다.
1922년 선전 창립전에 <고산유수 高山流水>와 <성재수간 聲在樹間>을 출품했으며 이듬해 10월에는 이상범과 함께 서울 보성학교에서 산수화 1백여 점을 전시한 2인전을 열었다.
이 전람회는 동연사 그룹의 활동 중 하나로 추진되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2인전으로 변경된 것이다.
당시 보도에서 26살의 이상범과 24살의 노수현은 화백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을 받았다.
언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백여 폭의 산수인물은 보는 이의 마음을 끌었다. 당일의 입장자는 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출품점 수의 10분의 9가 매약이 된 것만 보아도 당일의 성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해 그는 직장을 조선일보로 옮겨 삽화와 만화를 그렸고 제2회 선전에 <귀초>를 출품하여 3등상을 수상했다.


이상범은 선전에서 연속 특선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노수현은 제5회 선전에서 <고사영춘 古舍迎春>으로 특선을 받았을 뿐 이상범에 비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두 사람의 회화는 달랐는데, 이상범은 실경에 입각한 평범한 산야를 즐겨 그린 데 비해 그의 그림은 이상경으로서 정신미를 추구한 관념 산수화였다.
그는 선전 제1회부터 제11회까지 제10회전에서 출품작이 누락된 것을 빼면 열 차례에 걸쳐 모두 13점을 발표했지만 한 번의 특선과 한 번의 3등상으로 별로 성과를 얻지 못하자 그 후 선전에 출품하지 않았다.
특기할 만 한 점은 제4회전에 출품한 <일난 日暖>으로 전형적인 산수화를 그린 그가 당시의 서민상을 그린 것이다.
고목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 여인과 소년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화면이 가득 차게 그린 것이다.
한복 차림의 여인은 바구니를 앞에 놓고 앉은 채 치마에 쏟아놓은 나물을 다듬고 있고 그 옆 소년은 짐을 진 지게를 눕혀 놓은 채 팔베개를 하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삶의 현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그는 1940년에 심산화숙心汕畵塾을 설립하여 1948년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해방 후 1945년 조선문화건설본부 동양화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에는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과에 출강하면서 이듬해 제1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이래 제9회 때까지 계속 참가했다.
그는 1955년에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고, 그 해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으며, 이듬해에 예술원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1961년 국전기구 개편에 따라 고문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수장했다.
1964년 제13회 국전부터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여 제16회전까지 출품했다.
1971년 서울신문 주최 동양화 6대가전에 출품했으며 1978년 9월 6일 제주도에서 타계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안중식의 제자 이도영




안중식의 제자 이도영(1884~1933)은 스승과 함께 1911년에 설립된 미술교육기관 경성서화미술원의 조교수로 활약했다.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그는 1908년 3월에 학부 명의로 발간한 『도화임본 圖畵臨本』의 본을 그린 장본인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921년 조선총독부 인가 교과용 도서 일람표에도 『연필화임본』의 저자로 이도영이 적혀 있다.
그렇다면 그는 근대 계몽기에 미술 인식의 정착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대한민보』에 연재된 목판의 동양화적인 시사만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림을 계몽과 현실 비판의 한 방편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도 예술가로서의 그의 활동은 매우 혁신적이었다.
그는 미술을 문명을 이끄는 힘으로 인식하고 이를 서화로 실천했다.


이도영은 경성서화미술원에서 오일영, 이용우, 김은호, 박승무, 이상범, 노수현, 최우석, 변관식 등을 가르쳤으며 2년 연하인 고희동과 함께 13명 중 한 명으로 서화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에 대한 초기 비평으로 김용준이 쓴 것이 있다.
김용준은 “산수와 절지 기명은 오원吾園의 여풍餘風을 받은 작가요 단아한 면목이 보이나 오원 같은 패기나 방일放逸한 점은 멀리 떨어지며”(『조선미술대요』(1949))라고 적고, “새로운 우리의 미를 지시해준 작가”가 못된다면서 “전대의 여류餘流로 그 기법을 그대로 지켜온 몇몇 작가의 하나”로 꼽았다.
이도영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지만 조석진과 안중식이 보여준 조석진의 조부 조정규(1791~?)와 장승업(1843~97), 안건영(1841~76)의 유풍과 함께 당시 유행했던 양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정평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안중식 이후 가장 저명한 화가로 꼽힌다.


이도영은 1884년 3월 7일 서울에서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근 군수를 지냈고,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증조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안중식으로부터 회화를 수학했는데 안중식은 1902년 혹은 1903년에 왕가의 초상을 그린 공으로 군수가 되었다.
안중식은 스무 살 때인 1881년 조석진과 함께 무기제조기술을 배우기 위해 중국에 파견된 연수집단에 제도사로 선출되어 1년 동안 수학하던 중 임오군란이 발발하여 귀국했다.
그는 장승업으로부터 회화를 배웠으며 1884년에는 우정국 주사로 재직했고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도망갔다.
1885년 귀국한 그는 1891년 출국하여 중국과 일본에 2, 3년 체류했다.
1902년 왕가의 초상을 그린 후 군수직을 얻었고 이 시기에 이도영을 처음으로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 이도영은 공업 전습소에서 기수技手로 발령받았고 그곳에서 스승 안중식의 절친한 친구 조석진으로부터 회화에 영향을 받았다.


이도영의 초기 작품은 <화조도>로 1904년 가을에 그린 것인데 왕가의 주문으로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작품은 장승업, 안중식, 조석진 등의 경향을 따른 것으로 현재 창덕궁에 보관되어 있다.
스무 살 때 왕가의 주문을 받은 데서 그의 재능이 일찍이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으며 그는 서예에도 능했다.
그러나 당대의 사회적 명성에 비하면 그의 작품은 대체로 관념적이며 전통을 따른 것으로 뚜렷한 내면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그는 신선도 부류의 인물화와 화조화를 더러 그렸지만 주로 꽃과 기명절지器皿折枝를 다루었는데, 필법에서 안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본다.
이도영은 기명절지화에서도 탁월했다. 기명절지화는 서양의 정물화와 같은 장르로 우의화의 일종이다.
주로 꽃이 등장하며 꽃이 지닌 의미에 따라서 그림의 의미가 정해지는데 세속적인 복을 기원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이 장르를 장승업에 이어 안중식이 많이 그렸고 이도영도 여러 점 그렸다.
가장 초기의 것은 고희동과 합작한 것으로 부채에 그린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기명절지 器皿折枝>(금성 조석진 49)는 1920년 전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매우 세련된 화면구도와 장미꽃 절지 및 과일의 현실적 색상은 근대적 표현임을 알 수 있으며, 수묵과 담채를 혼용한 탁자와 전통적 필격이 독특하다.
이 작품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종래의 관념적 형식이던 중국의 청동기 소재 대신에 우리의 고대 토기를 민족문화 재인식의 심의心意로 사용한 점이다.
탁자 위 책에는 납작한 세발토기가 올려져 있고 탁자 뒤의 지면에는 모과와 석류를 담은 손잡이 달린 고배高杯가 배치되어 있다.
토기는 사실적 음양표현으로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기다란 탁자 다리 아래에는 흰빛의 죽순과 이름 모를 까만 열매가 그림을 더욱 정감 있게 해준다.
‘정가루주인 靜嘉樓主人’으로 낙관되어 있을 뿐 이름을 서명하지 않아 여러 폭으로 연작되었던 병풍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안중식 서풍을 따른 제시는 장미에 대한 것 같은데 내용이 다음과 같다.


모란이 자못 빼어나나 춘풍에 시들어버리고
노국은 쓸쓸히 늦가을에 핌이 원망스럽다.
어떻게 이 꽃의 끝없이 번성하고 한없이 요염하여
사시사철 길이길이 천심淺深의 붉은 꽃 피워냄과 같을 수 있으랴.


1906년 4월 구한말의 대표적인 애국계몽 운동단체들 중 하나인 대한자강회가 창립되었고 이도영은 안중식과 함께 가담했다.
대한자강회를 주도한 것은 윤효정이 이끄는 정치 성향이 짙은 헌정연구회였다.
대한자강회는 1907년 8월에 해산되었고 주요 회원들은 천도교 일파와 함께 대한협회를 설립했다.
이 협회에 안중식은 참여하지 않았고 이도영만 참여하여 교육부원으로 활동했다.
대한협회는 일제의 보호 하에 교육계몽운동에 치중했으며 교육부는 의무교육의 보급을 위해 활동한 산하부서로서 회장에 남궁억, 부회장에 오세창, 교육부장에 여병현, 간사장에 신소설 작가로 유명한 이해조가 선출되었다.
이도영은 1908년 3월에 학부 명의로 발간된 4권으로 된 미술 교과서 『도화임본』과 2년 후에 발간된 『연필화임본』에 그림을 그렸다.
그는 대한협회가 1909년 6월 2일부터 발행한 『대한민보』의 시사만화를 창간호부터 그리기도 했다.
만화는 ‘삽화’란 명칭으로 연재되었고 나중에는 명칭 없이 그 날 그 날의 테마에 따라 제명과 등장인물이 그려졌는데 오늘날 시사만평에 해당했다.
그는 정치·사회·교육 등 전반적인 문제를 만화로 비평했으며, 친일인사 조중응, 고영희, 윤덕영, 이용구, 이병무, 민영휘, 이완용 등과 일진회, 은행, 중추원, 법원 같은 식민지기관을 풍자했고, 외국 자본가, 국내 지주, 관료들의 반민족적 행위, 퇴폐적 현상 등을 비판했다.
그의 만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사만화였다.
이도영이 시사만화를 그리게 된 것은 오세창의 권유에 의해서였으며 오세창은 그의 만화에 풍자적인 글을 직접 써 넣기도 했다.
이도영은 이때부터 오세창과 친밀한 교분을 쌓았고 그와 함께 서화협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위창 오세창




위창 오세창(1864~1956)은 개화론자인 역관 오경석(1831~79)의 장남으로 스무 살 때 역관이 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돌아와 1886년에 박문국博文局 주사主事를 겸하고 농상부 참의, 체신국장 등도 역임했다.
1897년에는 일본 문부성 초청으로 동경 외국어 학교에서 조선어 교사로 1년 동안 재직했다.
그는 1902년 개화당파 사건으로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그곳에서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에 입교하여 만세보, 대한민보 사장으로 일했다.
손병희는 1898년에 동학의 교주가 된 후 근대화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활동방식을 바꾸었다.


오세창은 서화, 전각의 감식과 보학譜學에도 조예가 깊었고 전서, 예서를 잘 썼을 뿐 아니라 전각의 대가였다.
일본에서는 1864년에 이미 시사만화가 신문에 소개되었고 1874년에는 만화잡지까지 등장했으므로 오세창은 일본 신문과 잡지에서 유행한 만화의 효과에 관해 익히 알고 있었다. 중국에서 만화가 신문에 등장한 건 1884년이었다.
고희동에 의하면 1884년 상해에서 발간된 중국의 그림신문 『점석재화보 點石齋畵報』 가 국내에 유입되어 화가들이 교재로 사용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꼽히는 사람은 고희동(1886~1965)이다.
고희동은 1886년 3월 11일(음력) 서울의 권세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기를 보냈다.
삼형제 중 막내인 그는 9살 때 아버지 고영철이 경상도 봉화 군수로 부임하게 되어 가족과 함께 따라가서 약 4년 동안 시골을 체험하고, 이어서 아버지가 함경도 고원 군수로 전임하자 약 1년 동안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1899년 9월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와 살게 된 고희동은 14세의 소년으로 한성법어학교에 입학하여 프랑스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서양문화의 경이로움에 눈뜨기 시작했고, 프랑스에서 보내온 교과서와 그림책을 통한 서양화의 현실감이 그를 매료시켰다.
1903년 6월 한성법어학교 4년 과정을 졸업한 고희동은 집안의 뜻에 따라 일단 관직의 길로 들어갔다.
1908년까지 그는 광화국 주사, 궁내부 주사, 궁내부 대신방 서기랑, 예식원 주사를 지냈다.
그 후 회화에 대한 취미를 살리려고 당대의 쌍벽을 이루는 두 대가 안중식과 조석진으로부터 동양화를 배웠다.
그는 전통 묵필기법을 배우고 중국 고전화보를 보고 고법을 모방하는 따분한 가르침을 받자 서양 문화를 배우고 서양화의 합리성에 공명했던 그는 그런 회화공부에 실망했다.
그는 1954년 2월 『신천지』에 기고한 ‘나와 서화협회시대’란 제목의 글에서 당시를 술회했다.


“신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 두 분 선생님 문하에를 나갔다.
관제 이도영씨는 벌써 5년 전부터 심전 선생님께 다니며 연구를 하여서 성가를 하였다.
그러한데 얼마 동안을 다니며 보니 그 당시에 그리는 그림들은 모두가 중국인의 고금화보를 펴놓고 모방하여 가며 어느 분수에 근사하면 제법 성가하였다고 하는 것이며, 타인의 소청을 받아서 수응酬應하는 것이다.
인물을 그린다 하면 중국 고대의 문장·명필 등으로 명성이 후세에 이르기까지 높이 날리는 사람들이니, 예를 들면 명필에 왕휘지라든가, 문장에 도연명이라든지, 이태백, 소동파 등등인데, 그것도 또한 중국 화가들이 이미 그려서 전해오는 것을 옮겨 그리는 것뿐이었다.
풍경도 그러하였고 건축물이며 기타 화병, 과실 등까지도 중국 화보에서 보고 옮기는 것이었다.
창작이라는 것은 명칭도 모르고 그저 중국 것만이 용하고 장하다는 것이며, 그 범위 바깥을 나가보려는 생각조차 없었다.
중국이라는 굴레를 잔뜩 쓰고 벗을 줄을 몰랐다.
그리는 사람, 즉 화가들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요구하는 사람들까지도 중국의 그림을 그려주어야 좋아하고 “허어 이태백이를 그렸군” 하며 자기가 유식층의 인사인 것을 자인하고 만족하게 여기었다.
그 외에 태백인지 동파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림과 하등의 관계가 없고 아무런 감흥을 가지지 아니하였다.”


고희동이 말한 대로 당대 대가들은 중국 회화 기법으로 그렸고 제자들에게 중국 유명 그림을 모방하게 했다.
고희동이 주로 본 화보는 산수, 풍경, 인물, 화조 등 여러 가지 그림을 여러 시대별로 모아놓은 『개자원화보 芥子園畵譜』, 『점석제총보 點石齊叢譜』, 『사산춘화보 沙山春畵譜』, 『해상명인화보 海上名人畵譜』 등이었다.
당시에는 창조정신이 고갈된 전습傳習과 되풀이가 전통의 존중이라는 미명하에 아무런 회의 없이 행해졌으며 사적 습득이 기술연마라는 핑계 속에 횡행하여 그들은 여전히 화보를 숭상하고 화폭을 모방, 모사했다.
당대 대가들에게는 선대 화가들의 기교만 전수되었을 뿐 사의寫意와 소양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