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식의 제자 이도영




안중식의 제자 이도영(1884~1933)은 스승과 함께 1911년에 설립된 미술교육기관 경성서화미술원의 조교수로 활약했다.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그는 1908년 3월에 학부 명의로 발간한 『도화임본 圖畵臨本』의 본을 그린 장본인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921년 조선총독부 인가 교과용 도서 일람표에도 『연필화임본』의 저자로 이도영이 적혀 있다.
그렇다면 그는 근대 계몽기에 미술 인식의 정착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대한민보』에 연재된 목판의 동양화적인 시사만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림을 계몽과 현실 비판의 한 방편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도 예술가로서의 그의 활동은 매우 혁신적이었다.
그는 미술을 문명을 이끄는 힘으로 인식하고 이를 서화로 실천했다.


이도영은 경성서화미술원에서 오일영, 이용우, 김은호, 박승무, 이상범, 노수현, 최우석, 변관식 등을 가르쳤으며 2년 연하인 고희동과 함께 13명 중 한 명으로 서화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에 대한 초기 비평으로 김용준이 쓴 것이 있다.
김용준은 “산수와 절지 기명은 오원吾園의 여풍餘風을 받은 작가요 단아한 면목이 보이나 오원 같은 패기나 방일放逸한 점은 멀리 떨어지며”(『조선미술대요』(1949))라고 적고, “새로운 우리의 미를 지시해준 작가”가 못된다면서 “전대의 여류餘流로 그 기법을 그대로 지켜온 몇몇 작가의 하나”로 꼽았다.
이도영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지만 조석진과 안중식이 보여준 조석진의 조부 조정규(1791~?)와 장승업(1843~97), 안건영(1841~76)의 유풍과 함께 당시 유행했던 양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정평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안중식 이후 가장 저명한 화가로 꼽힌다.


이도영은 1884년 3월 7일 서울에서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근 군수를 지냈고,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증조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안중식으로부터 회화를 수학했는데 안중식은 1902년 혹은 1903년에 왕가의 초상을 그린 공으로 군수가 되었다.
안중식은 스무 살 때인 1881년 조석진과 함께 무기제조기술을 배우기 위해 중국에 파견된 연수집단에 제도사로 선출되어 1년 동안 수학하던 중 임오군란이 발발하여 귀국했다.
그는 장승업으로부터 회화를 배웠으며 1884년에는 우정국 주사로 재직했고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도망갔다.
1885년 귀국한 그는 1891년 출국하여 중국과 일본에 2, 3년 체류했다.
1902년 왕가의 초상을 그린 후 군수직을 얻었고 이 시기에 이도영을 처음으로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 이도영은 공업 전습소에서 기수技手로 발령받았고 그곳에서 스승 안중식의 절친한 친구 조석진으로부터 회화에 영향을 받았다.


이도영의 초기 작품은 <화조도>로 1904년 가을에 그린 것인데 왕가의 주문으로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작품은 장승업, 안중식, 조석진 등의 경향을 따른 것으로 현재 창덕궁에 보관되어 있다.
스무 살 때 왕가의 주문을 받은 데서 그의 재능이 일찍이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으며 그는 서예에도 능했다.
그러나 당대의 사회적 명성에 비하면 그의 작품은 대체로 관념적이며 전통을 따른 것으로 뚜렷한 내면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그는 신선도 부류의 인물화와 화조화를 더러 그렸지만 주로 꽃과 기명절지器皿折枝를 다루었는데, 필법에서 안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본다.
이도영은 기명절지화에서도 탁월했다. 기명절지화는 서양의 정물화와 같은 장르로 우의화의 일종이다.
주로 꽃이 등장하며 꽃이 지닌 의미에 따라서 그림의 의미가 정해지는데 세속적인 복을 기원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이 장르를 장승업에 이어 안중식이 많이 그렸고 이도영도 여러 점 그렸다.
가장 초기의 것은 고희동과 합작한 것으로 부채에 그린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기명절지 器皿折枝>(금성 조석진 49)는 1920년 전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매우 세련된 화면구도와 장미꽃 절지 및 과일의 현실적 색상은 근대적 표현임을 알 수 있으며, 수묵과 담채를 혼용한 탁자와 전통적 필격이 독특하다.
이 작품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종래의 관념적 형식이던 중국의 청동기 소재 대신에 우리의 고대 토기를 민족문화 재인식의 심의心意로 사용한 점이다.
탁자 위 책에는 납작한 세발토기가 올려져 있고 탁자 뒤의 지면에는 모과와 석류를 담은 손잡이 달린 고배高杯가 배치되어 있다.
토기는 사실적 음양표현으로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기다란 탁자 다리 아래에는 흰빛의 죽순과 이름 모를 까만 열매가 그림을 더욱 정감 있게 해준다.
‘정가루주인 靜嘉樓主人’으로 낙관되어 있을 뿐 이름을 서명하지 않아 여러 폭으로 연작되었던 병풍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안중식 서풍을 따른 제시는 장미에 대한 것 같은데 내용이 다음과 같다.


모란이 자못 빼어나나 춘풍에 시들어버리고
노국은 쓸쓸히 늦가을에 핌이 원망스럽다.
어떻게 이 꽃의 끝없이 번성하고 한없이 요염하여
사시사철 길이길이 천심淺深의 붉은 꽃 피워냄과 같을 수 있으랴.


1906년 4월 구한말의 대표적인 애국계몽 운동단체들 중 하나인 대한자강회가 창립되었고 이도영은 안중식과 함께 가담했다.
대한자강회를 주도한 것은 윤효정이 이끄는 정치 성향이 짙은 헌정연구회였다.
대한자강회는 1907년 8월에 해산되었고 주요 회원들은 천도교 일파와 함께 대한협회를 설립했다.
이 협회에 안중식은 참여하지 않았고 이도영만 참여하여 교육부원으로 활동했다.
대한협회는 일제의 보호 하에 교육계몽운동에 치중했으며 교육부는 의무교육의 보급을 위해 활동한 산하부서로서 회장에 남궁억, 부회장에 오세창, 교육부장에 여병현, 간사장에 신소설 작가로 유명한 이해조가 선출되었다.
이도영은 1908년 3월에 학부 명의로 발간된 4권으로 된 미술 교과서 『도화임본』과 2년 후에 발간된 『연필화임본』에 그림을 그렸다.
그는 대한협회가 1909년 6월 2일부터 발행한 『대한민보』의 시사만화를 창간호부터 그리기도 했다.
만화는 ‘삽화’란 명칭으로 연재되었고 나중에는 명칭 없이 그 날 그 날의 테마에 따라 제명과 등장인물이 그려졌는데 오늘날 시사만평에 해당했다.
그는 정치·사회·교육 등 전반적인 문제를 만화로 비평했으며, 친일인사 조중응, 고영희, 윤덕영, 이용구, 이병무, 민영휘, 이완용 등과 일진회, 은행, 중추원, 법원 같은 식민지기관을 풍자했고, 외국 자본가, 국내 지주, 관료들의 반민족적 행위, 퇴폐적 현상 등을 비판했다.
그의 만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사만화였다.
이도영이 시사만화를 그리게 된 것은 오세창의 권유에 의해서였으며 오세창은 그의 만화에 풍자적인 글을 직접 써 넣기도 했다.
이도영은 이때부터 오세창과 친밀한 교분을 쌓았고 그와 함께 서화협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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