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현




변관식과 동갑 노수현(1899~1978)은 다복한 인생을 살았다.
해방 후 국전이 신설되자 심사위원으로 받들어졌고,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문화훈장 등 많은 상을 수상했고, 80세의 장수를 누렸다.
노수현은 황해도 곡산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15살 때 서울 보성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곧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하여 이상범과 최우석과 함께 4기생으로 조석진과 안중식으로부터 전통 동양화를 수학했다.
그는 1918년 19살 때 서화미술원을 졸업한 후 안중식의 사저 경묵당耕墨堂에 기거하며 계속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호 심산의 심자는 안중식의 아호 심산에서 심자를 받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노수현은 1920년 21살 때 창덕궁 대조전 벽화를 이상범과 함께 산수화로 장식했으며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삽화와 만화를 그렸으며 그 해 협전이 개최되자 창립전부터 출품하기 시작하여 1936년 제15회로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출품했다.
1922년 선전 창립전에 <고산유수 高山流水>와 <성재수간 聲在樹間>을 출품했으며 이듬해 10월에는 이상범과 함께 서울 보성학교에서 산수화 1백여 점을 전시한 2인전을 열었다.
이 전람회는 동연사 그룹의 활동 중 하나로 추진되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2인전으로 변경된 것이다.
당시 보도에서 26살의 이상범과 24살의 노수현은 화백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을 받았다.
언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백여 폭의 산수인물은 보는 이의 마음을 끌었다. 당일의 입장자는 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출품점 수의 10분의 9가 매약이 된 것만 보아도 당일의 성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해 그는 직장을 조선일보로 옮겨 삽화와 만화를 그렸고 제2회 선전에 <귀초>를 출품하여 3등상을 수상했다.


이상범은 선전에서 연속 특선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노수현은 제5회 선전에서 <고사영춘 古舍迎春>으로 특선을 받았을 뿐 이상범에 비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두 사람의 회화는 달랐는데, 이상범은 실경에 입각한 평범한 산야를 즐겨 그린 데 비해 그의 그림은 이상경으로서 정신미를 추구한 관념 산수화였다.
그는 선전 제1회부터 제11회까지 제10회전에서 출품작이 누락된 것을 빼면 열 차례에 걸쳐 모두 13점을 발표했지만 한 번의 특선과 한 번의 3등상으로 별로 성과를 얻지 못하자 그 후 선전에 출품하지 않았다.
특기할 만 한 점은 제4회전에 출품한 <일난 日暖>으로 전형적인 산수화를 그린 그가 당시의 서민상을 그린 것이다.
고목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 여인과 소년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화면이 가득 차게 그린 것이다.
한복 차림의 여인은 바구니를 앞에 놓고 앉은 채 치마에 쏟아놓은 나물을 다듬고 있고 그 옆 소년은 짐을 진 지게를 눕혀 놓은 채 팔베개를 하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삶의 현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그는 1940년에 심산화숙心汕畵塾을 설립하여 1948년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해방 후 1945년 조선문화건설본부 동양화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에는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과에 출강하면서 이듬해 제1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이래 제9회 때까지 계속 참가했다.
그는 1955년에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고, 그 해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으며, 이듬해에 예술원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1961년 국전기구 개편에 따라 고문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수장했다.
1964년 제13회 국전부터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여 제16회전까지 출품했다.
1971년 서울신문 주최 동양화 6대가전에 출품했으며 1978년 9월 6일 제주도에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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