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창 오세창




위창 오세창(1864~1956)은 개화론자인 역관 오경석(1831~79)의 장남으로 스무 살 때 역관이 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돌아와 1886년에 박문국博文局 주사主事를 겸하고 농상부 참의, 체신국장 등도 역임했다.
1897년에는 일본 문부성 초청으로 동경 외국어 학교에서 조선어 교사로 1년 동안 재직했다.
그는 1902년 개화당파 사건으로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그곳에서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에 입교하여 만세보, 대한민보 사장으로 일했다.
손병희는 1898년에 동학의 교주가 된 후 근대화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활동방식을 바꾸었다.


오세창은 서화, 전각의 감식과 보학譜學에도 조예가 깊었고 전서, 예서를 잘 썼을 뿐 아니라 전각의 대가였다.
일본에서는 1864년에 이미 시사만화가 신문에 소개되었고 1874년에는 만화잡지까지 등장했으므로 오세창은 일본 신문과 잡지에서 유행한 만화의 효과에 관해 익히 알고 있었다. 중국에서 만화가 신문에 등장한 건 1884년이었다.
고희동에 의하면 1884년 상해에서 발간된 중국의 그림신문 『점석재화보 點石齋畵報』 가 국내에 유입되어 화가들이 교재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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