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꼽히는 사람은 고희동(1886~1965)이다.
고희동은 1886년 3월 11일(음력) 서울의 권세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기를 보냈다.
삼형제 중 막내인 그는 9살 때 아버지 고영철이 경상도 봉화 군수로 부임하게 되어 가족과 함께 따라가서 약 4년 동안 시골을 체험하고, 이어서 아버지가 함경도 고원 군수로 전임하자 약 1년 동안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1899년 9월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와 살게 된 고희동은 14세의 소년으로 한성법어학교에 입학하여 프랑스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서양문화의 경이로움에 눈뜨기 시작했고, 프랑스에서 보내온 교과서와 그림책을 통한 서양화의 현실감이 그를 매료시켰다.
1903년 6월 한성법어학교 4년 과정을 졸업한 고희동은 집안의 뜻에 따라 일단 관직의 길로 들어갔다.
1908년까지 그는 광화국 주사, 궁내부 주사, 궁내부 대신방 서기랑, 예식원 주사를 지냈다.
그 후 회화에 대한 취미를 살리려고 당대의 쌍벽을 이루는 두 대가 안중식과 조석진으로부터 동양화를 배웠다.
그는 전통 묵필기법을 배우고 중국 고전화보를 보고 고법을 모방하는 따분한 가르침을 받자 서양 문화를 배우고 서양화의 합리성에 공명했던 그는 그런 회화공부에 실망했다.
그는 1954년 2월 『신천지』에 기고한 ‘나와 서화협회시대’란 제목의 글에서 당시를 술회했다.
“신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 두 분 선생님 문하에를 나갔다.
관제 이도영씨는 벌써 5년 전부터 심전 선생님께 다니며 연구를 하여서 성가를 하였다.
그러한데 얼마 동안을 다니며 보니 그 당시에 그리는 그림들은 모두가 중국인의 고금화보를 펴놓고 모방하여 가며 어느 분수에 근사하면 제법 성가하였다고 하는 것이며, 타인의 소청을 받아서 수응酬應하는 것이다.
인물을 그린다 하면 중국 고대의 문장·명필 등으로 명성이 후세에 이르기까지 높이 날리는 사람들이니, 예를 들면 명필에 왕휘지라든가, 문장에 도연명이라든지, 이태백, 소동파 등등인데, 그것도 또한 중국 화가들이 이미 그려서 전해오는 것을 옮겨 그리는 것뿐이었다.
풍경도 그러하였고 건축물이며 기타 화병, 과실 등까지도 중국 화보에서 보고 옮기는 것이었다.
창작이라는 것은 명칭도 모르고 그저 중국 것만이 용하고 장하다는 것이며, 그 범위 바깥을 나가보려는 생각조차 없었다.
중국이라는 굴레를 잔뜩 쓰고 벗을 줄을 몰랐다.
그리는 사람, 즉 화가들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요구하는 사람들까지도 중국의 그림을 그려주어야 좋아하고 “허어 이태백이를 그렸군” 하며 자기가 유식층의 인사인 것을 자인하고 만족하게 여기었다.
그 외에 태백인지 동파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림과 하등의 관계가 없고 아무런 감흥을 가지지 아니하였다.”
고희동이 말한 대로 당대 대가들은 중국 회화 기법으로 그렸고 제자들에게 중국 유명 그림을 모방하게 했다.
고희동이 주로 본 화보는 산수, 풍경, 인물, 화조 등 여러 가지 그림을 여러 시대별로 모아놓은 『개자원화보 芥子園畵譜』, 『점석제총보 點石齊叢譜』, 『사산춘화보 沙山春畵譜』, 『해상명인화보 海上名人畵譜』 등이었다.
당시에는 창조정신이 고갈된 전습傳習과 되풀이가 전통의 존중이라는 미명하에 아무런 회의 없이 행해졌으며 사적 습득이 기술연마라는 핑계 속에 횡행하여 그들은 여전히 화보를 숭상하고 화폭을 모방, 모사했다.
당대 대가들에게는 선대 화가들의 기교만 전수되었을 뿐 사의寫意와 소양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