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식이 김은호(1892~1979)에게 말했다






1912년 어느 날 안중식은 스물한 살의 김은호(1892~1979)에게 말했다.

“덕수궁에서 자네에게 특별한 하명이 있었네.
자네가 천재란 소문이 궁중에까지 들어갔나 보이.
덕수궁 이태왕전하께서 자네가 정말 어용을 그릴 수 있나 솜씨를 시험하실 모양이니 천운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정성껏 그려보게.
일이 잘 되면 어용화사가 되는 거야.”


김은호는 문사 김교성의 소개로 1912년 8월 안중식의 제자가 되었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지 21일만에 스승으로부터 ‘화가로서 최고의 영광’인 어용화사가 될 수 있는 말을 들었다.


김은호는 1892년 음력 6월 24일 안천시 관교동에서 부유한 농가의 2대 독자로 태어났고 열다섯 살 때 인천의 관립일어학교에 입학했으나 집안의 몰락으로 중단했다.
집안 인척의 한 사람이 불법으로 사주전私鑄錢을 만들다가 붙잡혔고 김은호의 아버지가 돈을 댔다는 혐의로 연루되어 재산이 거의 몰수되었다.
김은호는 집안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천의 사립인흥학교 측량과에 입학했고 같은 해 12월에 단기과정을 수료했다.
아버지는 무고한 옥살이를 6개월 동안 한 후 폭음을 일삼다가 이듬해 3월에 쓰러졌다.
김은호는 남은 가산을 처분한 후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14살 때 결혼한 아내를 친정으로 보내고 누이동생은 출가한 누님에게 보낸 뒤 할아버지와 어머니만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오막집 셋방에서 새출발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일했는데 1912년 여름까지 이발소 잡부, 인쇄소 제판 견습공, 도장포의 도장 새기기, 제화 견습공, 축량기사의 조수 등으로 일했다.
이런 고난의 체험이 평생 그로 하여금 검소한 생활을 하게 했다.


김은호는 어려서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갔고 고난을 신앙으로 이겨냈다.
그가 서울에서 다니던 안동교회 이주완 장로가 전농동에서 영풍서관이라는 고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일거리를 얻으려고 그 장로를 찾아갔는데 마침 그곳에 들렸던 김교성이 김은호의 글솜씨가 좋고 그림에 뜻이 있음을 알고 서화미술회에 소개하여 화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김은호는 김교성이 써준 소개장을 들고 당시 백목다리(현재 신문로 초입에 있던 방교) 근처의 큰 한옥을 빌려 강습소로 사용하던 서화미술회로 안중식 선생을 찾아갔다.
안중식은 그에게 『고금명인화보 古今名人畵譜』의 <당미안도 唐美人圖>를 모사하게 한 후 “재주가 있군!” 하고 말한 뒤 화과 2기생반에 편입시켰다.
3년 과정의 서화미술회 강습소는 재정적으로 왕실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학생들에게 무료로 가르쳤다.
화과에서는 수묵기법 및 채색기법의 산수, 인물, 화조, 문인화 등을 전통 화법으로 가르쳤다.
김은호의 모사가 뛰어나 창덕궁 왕실의 한 측근자가 그로 하여금 이왕 전하(순종)의 사진을 모사하게 하여 궁정에 소개했다.


김은호는 1915년 5월에 서회미술회 화과를 졸업하고 창덕궁 측으로부터 이왕 전하의 어용 제작을 의뢰받았다.
조선 최후의 어용화가가 된 영예였다. 이때도 사진에 의존했지만 전하를 직접 대할 기회도 허락받았다.
최대 영광의 어용 봉사奉寫는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마련된 특별 제작실에서 처음 만져보는 최고급 중국제 필묵채색으로 착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하가 장모상을 입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가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어용 봉사는 김은호에게 전통적인 어진 제작의 법식을 정통으로 경험하게 한 소중한 기회였다.
두꺼운 장지壯紙에 생강즙을 먹인 유지油紙에 묵선으로 정확한 소묘의 밑그림을 그려 합평合評에서 통과된 후, 그것을 회견繪絹 쟁틀 밑에 붙여 위로 내비치게 하고, 정본正本 제작에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1902년에 어진 봉사를 함께 한 적이 있는 안중식과 조석진이 법식과 기법을 가르쳐주었다.
1916년 7월 이왕 전하의 어용초상이 완성되었을 때 『매일신보』는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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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





“경성 원동에 거하는 김은호 씨는 천성의 필법이 특이한 바, 서화미술회의 졸업생으로 산수, 인물, 기타 각종 화법이 우미운아優美韻雅한 일취逸趣가 유하여, 다수 명사의 초상을 모사하여 찬상讚賞을 득하였는데, 지반에 창덕궁 이왕 전하 어진을 봉사함에 정력을 필주하여 차차 공을 준하였으므로, 일작에 봉정하였더니, 이왕 전하께서 십분 득진得眞함을 가장嘉奬하옵심으로, 김씨는 분외의 영광을 황공감득한다더라.”


대원수군복의 정면반신상으로 그려진 이왕 전하의 초상은 왕비 윤씨의 정전이던 창덕궁 대조전에 걸렸다가 1년 후 1917년에 발생한 화재 때 전소했으며 유지초본만 현존한다.
당시 정부는 신식군대 편성 후 고종 32년(1895) 4월에 육군복장규칙을 정하고 복장을 신식군복으로 개혁했으며, 그 해 11월 15일는 단발령을 내렸다.
단발령과 복식개편에 따라 고종과 순종은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자르고 육군 복식을 착용한 초상을 그리게 했고 또한 사진을 촬영하게 했다.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 G. Underwood에 의해 창간된 『그리스도 신문』은 고종의 사진을 석판으로 인쇄·발행하여 고종의 모습을 신문 구독의 매수 증가에 이용했다.


<순종 초상 純宗 肖像>은 20대 전반기 김은호의 데생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왕실 재정 사정으로 중단되었다가 1916년 말에 완성되었으나 이듬해 화재로 소실된 이 작품은 사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지초본에 보이는 순종의 용안은 사진을 보는 듯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군복과 훈장들은 묵선으로 간략하게 초만 잡혀 있다.
김은호는 자신이 어진을 제작할 때 순종화제가 하루에 한 번씩 들러 모습을 보였지만 어진을 그리는 과정에서 주로 사진을 활용했다고 훗날 술회했다.
순종황제를 촬영한 초상사진 중 대원수군복을 착용하고 탁자에 군모를 얹어둔 채 서양식 의자에 앉아 있는 사진이 김은호의 유지초본에 그려진 순종의 모습과 일치한다.
그가 사진을 토대로 했음은 순종의 얼굴에 보이는 명암 표현으로 알 수 있다.
사진 속의 순종은 좌측 안면은 밝고 상대적으로 우측 안면에는 그림자가 져 있고 김은호 역시 사진에서 보이는 명암을 유지초본에 그대로 묘사했다.
명암의 효과는 다소 절제되어 있지만 순종의 좌측 얼굴은 밝게 처리된 반면 콧날을 중심으로 하여 우측 안면은 상대적으로 어둡게 묘사되었다.


김은호는 1928년에는 군복차림이 아닌 곤룡포를 입은 순종을 그리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몇 차례 어진御眞 이모移模에 참여했다.
그는 이왕 전하의 장인인 윤택영과 민영휘를 비롯하여 여러 귀족과 명사의 초상화도 그렸다.
1918년에는 <이준공상李埈公像>도 그렸는데 유지초본만 현존한다.
한편 1915년에는 동학의 분파 시천교侍天敎의 대도주大道主 김연국이 김은호에게 교조敎祖 최제우와 2세 교주 최시형의 영정 및 자신의 초상을 동일한 크기의 전신좌상으로 그리게 했다.
그는 24살 때인 1915년 순종 어진 제작이 잠시 중지되었을 때 시천교侍天敎의 대례사大禮師 김연국의 청으로 <최제우 초상 崔濟愚 肖像>과 <김연국 초상 金演局 肖像>을 동일한 크기로 그렸다.
동학東學의 창시자 최제우(1824~64)는 20세가 되기까지 유교 경전 등 학문 연구에 전념했으며 그 후 10년 이상 여행과 수행을 통해 유불선儒佛仙과 민간신앙, 기독교까지 융합한 종교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조선 말기 정치적·경제적 혼란으로 어려움을 격는 일반 백성에게 큰 호응을 받았지만 41세의 젊은 나이로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명으로 처형당했다.
1907년에 신원伸寃되었다.


<최제우 초상>은 실물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최제후 사후 반세기 후 김연국의 구술만으로 추정하여 그린 것이지만, 최제우의 딸이 이 그림을 보고 아버지와 꼭 같다고 통곡했다는 사실이 전해온다.
안면 처리에 있어 분명한 음영 처리와 특히 가죽신 아래 그림자를 묘사한 것은 전통 초상과는 구별되는 요소로 서양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공신도상功臣圖像 형식의 전신좌상이지만 흉배가 없고 각대가 아닌 광다회를 했으며 천의 문양 등은 전혀 생경한 것들로, 인물의 성격상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고증을 등한시 했다.
머리의 관도 의상과는 맞지 않으며 특히 돗자리 문양은 파격에 가까운 것으로 화가 자신이 의도적으로 삽입한 창작적인 요소이다.


20대 중반에 어용화가가 된 김은호는 전통 초상화에서 일인자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도 병행하여 그렸다.
조선총독부의 시정始政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미술전람회가 1915년 10월 경복궁에서 열렸을 때 그는 세필채색화 <조선의 가정>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바느질하는 방안의 젊은 여인과 옆에서 부채질해주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묘사한 풍속적 현실경의 인물화였다.
이 전람회에 안중식, 조석진, 김응원 등 서화미술회 선생들과 독자적으로 1915년에 서화연구회를 운영하던 김규진 등도 출품했다.
김은호는 같은 해 정동의 프랑스 공사관 자리에서 개최된 전람회에 여인상의 <승무>를 출품했다.
김은호의 세필채색화는 형사形似에 충실했던 북종화北宗畵의 계승이 아니라 근대의 사실주의 양식에 의한 채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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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연구회





서화연구회가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15년 5월이었다.
이것은 해강 김규진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것으로 그의 지도이념은 전통 서화의 올바른 계승에 있었다.
그러나 이 회를 뒷받침한 사람들은 서화를 즐기던 친일 귀족들이었다.
서화연구회 회장에 친일 귀족인 자작 김윤식이 추대되었고 부회장에는 이완용과 조중응이 담당했다.
고문에는 이왕직, 차관이던 고미야小宮을 추대했다.
김규진의 서화연구회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서화는 문명을 대표하는 것이요, 문명은 국가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화가 발전하는 것이 국력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말로서는 다 나타낼 수 없는 것은 글씨로 이를 나타내며 글씨로서 다 나타낼 수 없는 것은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글씨는 문체를 묘사하는 용한 기술이며 그림이란 정신을 전달하는 살아 있는 방법이다.
옛 사람이 정신을 수양하거나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서화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런즉 이는 급히 서둘러 열어야 되며 조금이라도 허술히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김규진이 서화연구회를 설립한 것은 화단의 주도세력인 안중식과 조석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있다.
왜냐면 그의 취지가 서화협회의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가난한 젊은이가 장차 화가가 되기 위해 가는 곳이기보다는 선비와 한량들이 기技를 닦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정치적으로 몸을 망친 친일 귀족들은 다소나마 생의 의미를 서화의 세계에서 찾고자 했다.
이곳에서는 문인화와 사군자를 가르쳤다.
이곳 출신으로 이승직과 김진우는 사군자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1920년 창덕궁 왕실은 3년 전에 불탄 대조전·희정당·경훈각의 복원에 따른 내벽 장식화 제작을 김은호를 비롯하여 오일영, 이용우(1902~52), 이상범, 노수현 등 서화미술회 출신 신진들과 안중식과 조석진의 타계 후 화단의 원로가 된 김규진에게 위촉했다.
그 때 대조전 안의 서벽을 위해 김은호가 그린 월경月景은 <백학>이었고 이와 조화시킨 동벽의 일경日景은 오일영과 이용우가 합작한 <봉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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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로 명성을 날린 김규진





김규진(1868~1933)은 1868년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흑우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18살 때 청나라로 가서 8년 동안 체류하며 글씨와 그림을 배워 대륙기질의 서화가가 되었다.
그는 북경에서 중국인 진씨의 도움을 받아 서화를 배우며 북경 화가들과 교류했고 명가의 방문과 지도를 받게 되었다.
1893년 가을에 귀국한 고향에서 활동하다가 1896년 29살 때에 서울로 진출했다.
그는 청국어에 능통했으므로 상경 즉시 궁내부 주사 관직을 얻었고 그 후 1907년까지 궁내부 부서였던 내장사 주사, 예식원 문서과장, 비서관, 시종원 시종 등을 거쳐 경리원 기사직을 지냈다.
그는 1901년부터 어린 왕세자였던 영친왕(이근)의 서사書師선생)로서 왕실에 접근해 있었다.
궁내부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왕세자의 글씨 선생으로 시어侍御라는 직함도 받아 수시로 궁중을 출입하면서 서예가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화가로서도 활동했다.
그가 1920년 창덕궁 희정당 내부에 그린 벽화는 <금강산 만물초 승경 金剛山萬物肖勝景>과 <해금강 총석정 절경 海金剛叢石亭絶景>이었다.


그는 글씨에서 행서, 초서, 대필서에서 특출한 필력을 발휘했고 그림은 분방한 용필의 묵죽을 위주로 하여 묵란, 묵국 등 사군자 범주의 묵화에 치중했다.
그러나 산수화와 화조화도 종종 그렸으며 말을 그리기도 했다.
1914년에 그린 <유하백마 柳下白馬>는 소품이지만 그의 역량과 자유로운 표현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수묵필치로 대범하게 표현한 고목 버드나무의 형상, 강한 바람에 의해 온통 오른편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버들가지의 소란스러운 움직임, 청록색 담채의 신선한 생동감이 현대 화가의 참신한 표현주의를 방불케 한다.
버드나무를 배경으로 엷은 황록색 담채의 풀언덕에 뛰어든 백마의 사실주의 묘사에서 보이는 명쾌한 묵선과 선명한 흰색 표상미도 더할 나위 없는 표현기량을 엿보게 한다.
심하게 바람을 탄 버들가지의 움직임과 반대 방향으로 백마를 달리게 함으로써 시각적인 속도감을 더하여 준다.
버들가지의 투명한 청록색조와 백마의 흰색이 상쾌한 대비를 이루는 것도 지적할 만하다.
언덕 너머 공간에도 전면 푸른 색조로 깊이감이 생기게 담채를 부여해 근대적 화면을 창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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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은 김은호가 머리의 화가가 아니라





조선 시대 전통 인물화가 선의 묘사를 중요시한 데 비해 일본화의 영향으로 선보다는 채색으로 색면이 두드러지고 인물의 개성이나 인품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인물화가 등장했다.
일본화의 유행을 경계하면서 고희동은 1930년 10월 9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경고했다.

“우리의 동양화는 심각한 상태에 있다.
많은 그림들이 당나라 화풍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일본화의 모방이 되고 있다.
일본화를 배운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화를 소화한 다음에는 자신의 양식으로 그려야 할 것이다.”


김은호의 일본화의 영향은 동경으로 유학을 가기 전부터 나타났는데, 1923년 제3회 협전을 평한 잡지 『개벽』의 관전기에 이런 지적이 있다.

“김은호의 <우후 雨後>라 제題한 그림은 폭포 흐르는 바위에 베푼 색채는 일본 신화新畵에 가까와 드는 것 같다.
최우석의 <해학海鶴>과 <월하비안 月下飛雁>은 너무나 일본인 석화席畵와 같다.
좀 조선의 기분이 있었으면 좋겠다.”


제5회 협전에 대한 비평에서 어떤 논객은 1925년 3월 29일 『매일신보』 ‘개방란’에 기고한 글에서 이한복에 대한 일본화를 베끼는 버릇이 있음을 비판하면서 그다지도 창조 정신이 없느냐고 꾸짖었으며, 김복진은 3월 30일자 『조선일보』에 ‘협전 5회 평’에서 이한복의 <금강전경>과 <비 온 뒤>를 지적하여 직수입한 소화되지 않은 기교를 고집하여 늘어놓은 데 지나지 않음을 나무랬다.
윤희순은 김은호가 머리의 화가(想의 人)가 아니라 손의 화가(技의 人)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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