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연구회
서화연구회가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15년 5월이었다.
이것은 해강 김규진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것으로 그의 지도이념은 전통 서화의 올바른 계승에 있었다.
그러나 이 회를 뒷받침한 사람들은 서화를 즐기던 친일 귀족들이었다.
서화연구회 회장에 친일 귀족인 자작 김윤식이 추대되었고 부회장에는 이완용과 조중응이 담당했다.
고문에는 이왕직, 차관이던 고미야小宮을 추대했다.
김규진의 서화연구회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서화는 문명을 대표하는 것이요, 문명은 국가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화가 발전하는 것이 국력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말로서는 다 나타낼 수 없는 것은 글씨로 이를 나타내며 글씨로서 다 나타낼 수 없는 것은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글씨는 문체를 묘사하는 용한 기술이며 그림이란 정신을 전달하는 살아 있는 방법이다.
옛 사람이 정신을 수양하거나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서화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런즉 이는 급히 서둘러 열어야 되며 조금이라도 허술히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김규진이 서화연구회를 설립한 것은 화단의 주도세력인 안중식과 조석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있다.
왜냐면 그의 취지가 서화협회의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가난한 젊은이가 장차 화가가 되기 위해 가는 곳이기보다는 선비와 한량들이 기技를 닦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정치적으로 몸을 망친 친일 귀족들은 다소나마 생의 의미를 서화의 세계에서 찾고자 했다.
이곳에서는 문인화와 사군자를 가르쳤다.
이곳 출신으로 이승직과 김진우는 사군자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1920년 창덕궁 왕실은 3년 전에 불탄 대조전·희정당·경훈각의 복원에 따른 내벽 장식화 제작을 김은호를 비롯하여 오일영, 이용우(1902~52), 이상범, 노수현 등 서화미술회 출신 신진들과 안중식과 조석진의 타계 후 화단의 원로가 된 김규진에게 위촉했다.
그 때 대조전 안의 서벽을 위해 김은호가 그린 월경月景은 <백학>이었고 이와 조화시킨 동벽의 일경日景은 오일영과 이용우가 합작한 <봉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