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순은 김은호가 머리의 화가가 아니라
조선 시대 전통 인물화가 선의 묘사를 중요시한 데 비해 일본화의 영향으로 선보다는 채색으로 색면이 두드러지고 인물의 개성이나 인품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인물화가 등장했다.
일본화의 유행을 경계하면서 고희동은 1930년 10월 9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경고했다.
“우리의 동양화는 심각한 상태에 있다.
많은 그림들이 당나라 화풍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일본화의 모방이 되고 있다.
일본화를 배운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화를 소화한 다음에는 자신의 양식으로 그려야 할 것이다.”
김은호의 일본화의 영향은 동경으로 유학을 가기 전부터 나타났는데, 1923년 제3회 협전을 평한 잡지 『개벽』의 관전기에 이런 지적이 있다.
“김은호의 <우후 雨後>라 제題한 그림은 폭포 흐르는 바위에 베푼 색채는 일본 신화新畵에 가까와 드는 것 같다.
최우석의 <해학海鶴>과 <월하비안 月下飛雁>은 너무나 일본인 석화席畵와 같다.
좀 조선의 기분이 있었으면 좋겠다.”
제5회 협전에 대한 비평에서 어떤 논객은 1925년 3월 29일 『매일신보』 ‘개방란’에 기고한 글에서 이한복에 대한 일본화를 베끼는 버릇이 있음을 비판하면서 그다지도 창조 정신이 없느냐고 꾸짖었으며, 김복진은 3월 30일자 『조선일보』에 ‘협전 5회 평’에서 이한복의 <금강전경>과 <비 온 뒤>를 지적하여 직수입한 소화되지 않은 기교를 고집하여 늘어놓은 데 지나지 않음을 나무랬다.
윤희순은 김은호가 머리의 화가(想의 人)가 아니라 손의 화가(技의 人)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