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호





“경성 원동에 거하는 김은호 씨는 천성의 필법이 특이한 바, 서화미술회의 졸업생으로 산수, 인물, 기타 각종 화법이 우미운아優美韻雅한 일취逸趣가 유하여, 다수 명사의 초상을 모사하여 찬상讚賞을 득하였는데, 지반에 창덕궁 이왕 전하 어진을 봉사함에 정력을 필주하여 차차 공을 준하였으므로, 일작에 봉정하였더니, 이왕 전하께서 십분 득진得眞함을 가장嘉奬하옵심으로, 김씨는 분외의 영광을 황공감득한다더라.”


대원수군복의 정면반신상으로 그려진 이왕 전하의 초상은 왕비 윤씨의 정전이던 창덕궁 대조전에 걸렸다가 1년 후 1917년에 발생한 화재 때 전소했으며 유지초본만 현존한다.
당시 정부는 신식군대 편성 후 고종 32년(1895) 4월에 육군복장규칙을 정하고 복장을 신식군복으로 개혁했으며, 그 해 11월 15일는 단발령을 내렸다.
단발령과 복식개편에 따라 고종과 순종은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자르고 육군 복식을 착용한 초상을 그리게 했고 또한 사진을 촬영하게 했다.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 G. Underwood에 의해 창간된 『그리스도 신문』은 고종의 사진을 석판으로 인쇄·발행하여 고종의 모습을 신문 구독의 매수 증가에 이용했다.


<순종 초상 純宗 肖像>은 20대 전반기 김은호의 데생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왕실 재정 사정으로 중단되었다가 1916년 말에 완성되었으나 이듬해 화재로 소실된 이 작품은 사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지초본에 보이는 순종의 용안은 사진을 보는 듯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군복과 훈장들은 묵선으로 간략하게 초만 잡혀 있다.
김은호는 자신이 어진을 제작할 때 순종화제가 하루에 한 번씩 들러 모습을 보였지만 어진을 그리는 과정에서 주로 사진을 활용했다고 훗날 술회했다.
순종황제를 촬영한 초상사진 중 대원수군복을 착용하고 탁자에 군모를 얹어둔 채 서양식 의자에 앉아 있는 사진이 김은호의 유지초본에 그려진 순종의 모습과 일치한다.
그가 사진을 토대로 했음은 순종의 얼굴에 보이는 명암 표현으로 알 수 있다.
사진 속의 순종은 좌측 안면은 밝고 상대적으로 우측 안면에는 그림자가 져 있고 김은호 역시 사진에서 보이는 명암을 유지초본에 그대로 묘사했다.
명암의 효과는 다소 절제되어 있지만 순종의 좌측 얼굴은 밝게 처리된 반면 콧날을 중심으로 하여 우측 안면은 상대적으로 어둡게 묘사되었다.


김은호는 1928년에는 군복차림이 아닌 곤룡포를 입은 순종을 그리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몇 차례 어진御眞 이모移模에 참여했다.
그는 이왕 전하의 장인인 윤택영과 민영휘를 비롯하여 여러 귀족과 명사의 초상화도 그렸다.
1918년에는 <이준공상李埈公像>도 그렸는데 유지초본만 현존한다.
한편 1915년에는 동학의 분파 시천교侍天敎의 대도주大道主 김연국이 김은호에게 교조敎祖 최제우와 2세 교주 최시형의 영정 및 자신의 초상을 동일한 크기의 전신좌상으로 그리게 했다.
그는 24살 때인 1915년 순종 어진 제작이 잠시 중지되었을 때 시천교侍天敎의 대례사大禮師 김연국의 청으로 <최제우 초상 崔濟愚 肖像>과 <김연국 초상 金演局 肖像>을 동일한 크기로 그렸다.
동학東學의 창시자 최제우(1824~64)는 20세가 되기까지 유교 경전 등 학문 연구에 전념했으며 그 후 10년 이상 여행과 수행을 통해 유불선儒佛仙과 민간신앙, 기독교까지 융합한 종교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조선 말기 정치적·경제적 혼란으로 어려움을 격는 일반 백성에게 큰 호응을 받았지만 41세의 젊은 나이로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명으로 처형당했다.
1907년에 신원伸寃되었다.


<최제우 초상>은 실물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최제후 사후 반세기 후 김연국의 구술만으로 추정하여 그린 것이지만, 최제우의 딸이 이 그림을 보고 아버지와 꼭 같다고 통곡했다는 사실이 전해온다.
안면 처리에 있어 분명한 음영 처리와 특히 가죽신 아래 그림자를 묘사한 것은 전통 초상과는 구별되는 요소로 서양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공신도상功臣圖像 형식의 전신좌상이지만 흉배가 없고 각대가 아닌 광다회를 했으며 천의 문양 등은 전혀 생경한 것들로, 인물의 성격상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고증을 등한시 했다.
머리의 관도 의상과는 맞지 않으며 특히 돗자리 문양은 파격에 가까운 것으로 화가 자신이 의도적으로 삽입한 창작적인 요소이다.


20대 중반에 어용화가가 된 김은호는 전통 초상화에서 일인자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도 병행하여 그렸다.
조선총독부의 시정始政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미술전람회가 1915년 10월 경복궁에서 열렸을 때 그는 세필채색화 <조선의 가정>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바느질하는 방안의 젊은 여인과 옆에서 부채질해주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묘사한 풍속적 현실경의 인물화였다.
이 전람회에 안중식, 조석진, 김응원 등 서화미술회 선생들과 독자적으로 1915년에 서화연구회를 운영하던 김규진 등도 출품했다.
김은호는 같은 해 정동의 프랑스 공사관 자리에서 개최된 전람회에 여인상의 <승무>를 출품했다.
김은호의 세필채색화는 형사形似에 충실했던 북종화北宗畵의 계승이 아니라 근대의 사실주의 양식에 의한 채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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