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반 오우바테르와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



네덜란드 화가 알베르트 반 오우바테르Albert van Ouwater는 하를렘에서 태어났고
1440~65년에 활동했으며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의 스승으로 알려졌다.
반 만데르의 『화가의 책 Schilderboek』(1604)에는 풍경화에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것으로 확인된 유일한 작품 <라자로의 부활 The Raising of Lazarus>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앱스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얀 반 에이크의 작품 <대성당 참사회 의원 반 데르 파엘레와 마돈나 Madonna with Canon van der Paele>를 상기하게 한다.
당시 하를렘의 회화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반 오우바테르의 작품은 그가 얀 반 에이크나 로히르 반 데르 베이덴과 같은 거장들에 관해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남부를 여행했거나 하를렘을 떠나 루뱅으로 이주한 디리크 보우츠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고향 출신의 보우츠와 반 오우바테르는 인물에 대한 표현 양식에서도 비슷하며 구도에서도 정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반 오우바테르의 그림 속 인물들은 아직 개성화되지는 않았더라도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이라고 하는 과거 그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신선함을 지니고 있다.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


네덜란드 화가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Geertgen tot Sint Jans는 레이덴에서 태어나 1475~95년 하를렘에서 활동했다.
그는 알베르트 반 오우바테르의 제자로 알려졌다.
그의 이름은 그가 활동한 하를렘의 종교단체에서 따온 것으로 '성 요한 기사단의 작은 게라르트 little Gerard of Sint Jans'를 의미한다.
그는 이 교단의 수도원 교회를 위해 기록에 남아 있는 제단화 <십자가 처형 Crucifixion>을 그렸다.
그 가운데 대형 패널화 두 점은 빈 미술사 뮤지엄Vienna Kunsthist Museum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의 애도 Lamentation of Christ>와 <세례 요한 St. John the Baptist>이며 이것들은 원래 오른쪽 날개 부분의 양면이었는데 분리되었다.
두 작품 모두 깊이감이 있는 풍경 속에 강렬한 색채로 인물을 개성적으로 묘사한 게르트겐의 재능을 보여준다.
작품 전체가 조절된 빛으로 통일감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애도>의 여성 인물은 가냘프고 인형처럼 보이는데,
이는 게르트겐의 양식 중 가장 잘 알려진 특징으로 소품 <마돈나 Madonna>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그가 1490~95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베를린 소재 <광야의 세례 요한 Saint John the Baptist in the Wilderness>를 보면 화면을 단순하게 구성했고 자연에 대한 관찰로 풍경을 원근 있게 묘사했는데,
이런 점이 후기 네덜란드 회화의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예와 그 밖의 몇몇 작품의 경우 정확한 기록은 없더라도 빈 미술사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십자가 처형>과의 유사한 점을 꼽아 그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열다섯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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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에 유행한 유형과 상통한 보스의 양식


게르트겐과 동시대의 인물인 보스는 플랑드르파와 네덜란드파 양파 모두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화가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았으므로 고립되어 있었고
따라서 독자성은 주제에서뿐만 아니라 양식에서도 두드러진다.
그가 1470년경부터 1485년까지 제작한 초기 작품들은 네덜란드 회화의 큰 틀에서 보면 사본장식화에 가깝다.
초기 작품들의 특징은 단순한 구성에 전통의 유형을 따른 것으로 <동방박사의 경배>, <이 사람을 보라>, <십자가를 운반하는 그리스도>, <기증자가 있는 십자가 처형>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십자가 처형 장면을 몇 점 그렸지만 성자를 모델로 그렸으며 성녀를 모델로 그린 적은 단 한 번 뿐이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순교자 Crucified Martyr>가 그것인데 의뢰를 받아 그린 것이다.
보스는 여자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의 작품에 나타난 여자들은 지옥과 유혹의 장면에 등장하는 창녀, 뚜쟁이, 더러운 여자, 심술궂은 노파, 요부 등이다.
그가 그린 십자가에 처형당한 성녀가 역사적으로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초기 양식의 예로 브뤼셀 소재 <기증자가 있는 십자가 처형 Crucifixion with Donor>과 마드리드 프라도 뮤지엄과 미국 필라델피아 뮤지엄에 각각 소장되어 있는 두 유형의 <동방박사의 경배>가 있다.
그는 갖가지 주제를 다뤄 네덜란드 회화에 공헌했지만 작품의 반 이상이 기독교를 주제로 삼았음을 유의해야 한다.
그의 종교화는 대부분 관례를 따른 것들로 수세대에 걸쳐 북유럽에 유행한 유형과 상통한다.
1477년경 혹은 그 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브뤼셀 소재 <기증자가 있는 십자가 처형>을 예로 들면
디리크 보우츠와 추종자들 제라르 다비트Gerard David와 퀸텐 메치즈Quinten Metsys(마사이스Massys라고도 한다)를 포함한 그 밖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반 에이크의 작품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도 보스의 특징은 발견되는데,
전통적으로 원경에 묘사되던 이스라엘의 이국적 풍경을 회색과 연보라의 대기에 싸인 네덜란드의 도시 특히 스헤르토겐보스로 보이는 장면으로 변형시킨 점이 그러하다.
기증자는 베드로 앞 십자가 아래에서 동정녀와 요한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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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신세계 사보에 기고한 것입니다.


제목: 자연을 탐험한 다 빈치와 영혼을 새긴 미켈란젤로


르네상스의 두 대가

레오나르도는 정신보다 물질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유물론자이며 미래가 밝다고 전망한 낙천주의자인 반면 이상주의자 미켈란젤로는 물질을 하찮게 여기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형상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했다.
정신만을 고귀하게 여겼으므로 진지하며 고독한 사람이었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경멸했다.
미켈란젤로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체를 통해 순수하고 영원한 영혼의 형상을 보여주기를 바란 데 반해 레오나르도는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함으로써 여러 종류의 인간이 사는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레오나르도는 멋진 옷을 입고 오늘날 고급 스포츠카에 해당하는 값비싼 말을 탔으며, 손수 악기를 만들고 작곡과 연주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랐고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을 만끽했다.
그와 달리 중세 도덕관이 몸에 벤 미켈란젤로는 명성이 드높아지고 많은 돈을 벌었지만 물질의 풍요로움을 탐닉하는 것을 죄로 알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레오나르도는 상류사회에 접근하여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미켈란젤로는 현세의 안락보다는 내세의 영생을 소망했기에 일찍이 자신이 속한 상류사회를 벗어났고,
거의 아흔 해를 사는 장수의 복을 누렸지만 인생이 길어지는 것을 오히려 더 많은 죄를 짓게 되는 요인으로 보고 스스로 염세주의의 짐을 졌다.
그의 삶은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과 같았다.

레오나르도의 언행에는 경박함이 있었지만 유쾌한 사람이었고 비관적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다.
인체를 기계에 비유하며 사용하지 않을 경우 녹이 슨다고 생각했으므로 늙어서도 끊임없이 드로잉하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반면 과거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사상에 심취한 미켈란젤로는 언행에 신중을 기했으며 많은 작품을 피하고 자신이 맡은 작품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전력을 투구했다.
고상한 생각을 정해놓고 작업했으므로 그는 늘 자신의 작품에 불만이었다.
따라서 근심이 많고 우울했으며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을 신뢰한 그가 나중에 신비주의에 빠지고 만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두 사람 모두 독신으로 생을 마쳤고 동성연애자로 알려졌다.
동성애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폭넓게 이뤄졌다.
발랄한 성격의 레오나르도는 동성애로 기소당한 적이 있고 잘생긴 젊은이들이 주변에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여행하기를 즐겨했다.
행동에 앞서 생각하는 기질의 미켈란젤로도 동성애자로 알려졌지만 확증될 만한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그의 삶은 닫혀 있었고 가문과 자신에 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
레오나르도는 엄청난 양의 글을 남겼으며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며 열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많은 편지와 시를 남겼어도 대부분 철학적 내용이라서 그의 정신세계를 엿보는 데는 훌륭한 자료가 되지만 구체적 생활상은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 사람들에게 궁금증으로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가 현실주의자라면 미켈란젤로는 환영에 사로잡힌 현실도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레오나르도에게는 사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었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있었던 데 비해 철학과 문학의 요람에서 교육을 받은 미켈란젤로는 당시에도 난해한 단테의 『신곡』을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박식했지만,
오늘날의 지성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학문에 치우친 협소한 시각을 가졌다.
하루는 레오나르도가 친구 화가와 함께 스피니 궁전 앞 산타 트리니타 광장을 걷고 있었다.
벤치에서 잡담하던 사람들이 레로나르도를 불러 세우고는 단테의 글에서 난해한 부분을 지적하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때 마침 미켈란젤로의 모습이 광장에 나타나자 레오나르도가 말했다.
“여기 미켈란젤로가 오고 있군. 그가 자네들에게 말해줄 걸세.”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벌컥 화를 내면서 레오나르도에게 말했다.
“선생님 스스로 대답하세요. 선생님은 말을 모델로 만들었지만, 청동으로는 뜨지 않고 포기했다는 걸 부끄러운 줄 아세요.”
미켈란젤로는 발걸음을 돌렸고 레오나르도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뒤돌아 선 채 다시 말했다.
“밀라노인은 어리석었기 때문에 선생님을 믿었던 거에요.”

이 에피소드를 통해 23살 연하의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를 업신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화풍을 비교하면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를 상당히 닮아 내면에서는 그에게 존경을 표했음을 알 수 있다.
“말을 모델로 만들었지만, 청동으로는 뜨지 않고 포기했다는 걸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고 핀잔했지만,
미켈란젤로도 해낼 수 없었음을 그 자신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밀라노의 통치자 루도비코가 공화국을 건설한 아버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기념하는 기마상을 레오나르도에게 의뢰한 것을 꼬집은 말인데, 막강한 부를 가진 루도비코는 실재 말보다 서너 배 크고 장려한 형상으로 제작하기를 원했고 레오나르도는 앞다리를 든 말을 청동으로 제작하려고 했다.
수 톤에 이르는 말의 무게를 뒷다리로만 지탱하게 하는 것은 당시 기술로서는 가능하지 않았으며 앞다리가 하나 더 있어야 가능했다.
기마상은 실현되지 않았고 과연 레오나르도에게 제작할 능력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미켈란젤로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사람들은 제작되지 못한 책임을 레오나르도에게 돌렸다.
그러나 작품의 미완성은 당시의 상황과 직접 관련이 있었는데, 나폴리, 프랑스와의 전쟁 위기 속에서 그만한 청동을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200년이 지난 후 프랑스 조각가 프랑수아 지라르동이 루이 14세의 동상을 높이 6,82미터로 제작했는데, 레오나르도가 고안한 청동뜨는 법과 거의 유사한 방법으로 했다.
이 동상은 프랑스 혁명 때 파괴되어 현존하지 않지만 당시의 기록에는 레오나르도가 실험한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적혀 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의 기술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위급한 상황으로 인해 청동을 구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네브라 데 벤치 vs. 바쿠스

레오나르도가 1476년경에 나무패널에 그린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은 <모나리자>를 예고하는 작품이다.
여인의 이름이 지네브라임을 배경의 로덴나무 숲에서 알 수 있는데, 로뎀나무가 이탈리아어로 지네브라이기 때문이다.
로뎀나무는 야인의 고상한 인격을 나타내는 데 적절했다.
레오나르도는 인격을 시각화하는 데 충실하면서 말했다.

“인물을 그릴 때는 성격이 겉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칭찬받을 수 없다.”

지네브라는 부유한 은행가의 딸로 17살의 나이에 결혼했다.
당시 시인들이 그녀의 미모에 매료되어 여러 편의 시를 썼으며 이 초상화는 회화의 언어로 찬양한 레오나르도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초상화가 낯설게 보이는 까닭은 젖가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체가 짧기 때문이다.
<모나리자>처럼 원작의 상체가 배꼽까지 묘사되었지만 아랫부분이 상해 12~15센티미터나 잘라냈다.
작품 뒤에 “아름다움이 덕을 꾸민다”고 적혀 있다.
지네브라의 눈썹이 조금밖에 없고 이마가 아주 넓은 것은 당시의 유행을 따른 것으로 미의 규준이었다.
나중에 그린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고 이마가 넓은데, 눈썹을 밀어버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모나리자>가 그려진 이후 곧 유행이 달라져 이마가 도로 내려왔고 얼굴을 강력하게 분할해주는 눈썹이 있는 것이 훨씬 아름답게 여겨졌다.
이 초상화를 워싱턴 갤러리가 1967년에 백만 달러 이상을 주고 구입했으며, 미국 내에 유일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13살 때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고 조각다운 조각을 처음 제작한 건 22살 때 완성한 <바쿠스>이다.
포도주의 신 바쿠스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술에 취해 오른손으로 잔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으로 바쿠스를 묘사하면서 뒤에 반인반수이면서 호색가인 사티로스가 포도를 훔쳐 먹으며 관람자를 향해 미소짓게 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술꾼이 발이 떨리고 가득 채워진 술잔을 높이 쳐든 채 게슴츠레한 눈길로 어린 사티로스에게 의지하는 순간을 포착했다.
사티로스가 훔쳐 먹는 포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포도주의 신 바쿠스에게는 포도가 얼마든지 있고 그의 머리조차 포도송이로 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통통한 사티로스를 모델로 삼아 개인적 특성과 거의 여자처럼 부드러운 신체를 만들어냈다.
또한 환상적인 효과를 위해 드릴을 사용해 사티로스 발 아래의 사자 생가죽과 포도송이를 제작했다.
성기가 잘려나갔는지 일부러 생략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기가 없는 바쿠스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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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 2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다음은 Booksetong 1월호에 실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에 관한 서양미술사학자 노성두 씨의 서평입니다.
노성두 씨는 제목을 '황금빛 광채를 닦아낸 르네상스의 맨얼굴'이라고 붙였습니다.
내 책에 호평해주신 노성두 씨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예술가의 경쟁, 또는 라이벌 예술가들의 생산적인 긴장 관계에 관한 기록은 미술의 역사에 차고 넘칠 정도로 풍부하다.
오만 가지 흥미진진한 일화의 가지가 시대와 역사를 넘어 조형예술의 모든 장르마다 뻗어 있어서, 무성한 숲 그늘이 가히 장관을 이루고 있다.
사정이 그런데도 이런 노다지 주제가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그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은 바로 수천 년 동안 미술의 역사가 가려웠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책이다.
지금까지, 유명 작가의 모노그래피나 '명화 감상 100장면' 같은 식의 뻔한 책들이 코흘리개 미술 왕초보들을 겨냥한 수박 겉핥기 기획이라면,
이 책은 그야말로 잘 드는 칼로 수박을 턱 쪼개서 시원한 과육을 한 입 버석 씹어먹는 본격 미술사를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회에 쪼잔한 기획들이 싹 자취를 감추고, 좀 성숙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글쓴이는 하인리히 뵐플린이 일찍이 르네상스의 3대 거장이라고 이름붙인 이탈리아 미술의 최고봉 가운데 맏형뻘 되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를 한 코에 엮어서 비교한다.
칸도 크다는 생각이 든다.
괴테와 단테 또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묶어서 한 입에 땡치려는 심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작품, 또는 두 작가를 묶어서 나란히 비교하는 비교 시각의 방법론은 서양미술사에서 하인리히 뵐플린이 처음 소개한 것이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피렌체의 산토 스피리토 교회와 바로크의 얼굴마담 격인 로마의 산타 사비나 교회의 건축 조형적 해결을 비교하면 어떤 것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어서 여간 신통하지 않다.
글쓴이는 짖궂은 친구들이 아무리 장난을 걸어도 결코 한 눈을 팔지 않는 모범생처럼 뵐플린의 방법론을 방점 하나 빠드리지 않고 충실하게 따른다.

건축, 조각, 회화의 다방면에 걸쳐 두 거장이 두루 남긴 작품들의 비교는 물론이고,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두 거장의 집안 내력과 어린 시절, 도제시절에 구박받던 일, 예술적 창의와 자연에 대한 입장, 미술 이론과 사상에 이르기까지 마치 르네상스의 두 천재에 홀딱 반한 양다리 스토커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혹시 전생에 풍산개가 아니었을까 의심스럽다.

경쟁하는 예술가의 소재를 지교 시각의 방법론에 섞었을 때 나타나는 화학 작용이 어느 정도의 폭발력을 지니는지 불안한 사람은 이 책을 넘길 자격이 없다.
적어도 3도 화상은 각오해야 한다.
내상은 더욱 치명적일 수 있어서, 미술사학의 웬만한 초절정 내공이 아니라면 골치 아픈 논의들은 접어두고 그냥 책에 실린 그림만 감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책은 그림들이 꽤 근사하다.
지구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관련 이미지 자료는 거의 망라한 것 같다.
글쓴이의 수고도 박수를 받을 만하지만, "다 퍼 줄게" 식의 막무가내 철학을 한사코 고집하는 출판사의 후덕한 엉덩이 뒷심도 부럽기만 하다.

르네상스는 서양미술의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모두 신성한 예술가의 칭호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황금빛 광채를 닦아낸 맨얼굴 그대로의 르네상스와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은 더없이 성실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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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선구자 클림트와 쉴레>란 제목으로 신세계 잡지에 기고한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

에곤 쉴레가 비엔나의 어느 카페에서 45살의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났을 때 17살이었다.
술을 좋아하고 당구를 좋아하던 쉴레가 카페에서 평소 존경하던 클림트를 만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는 쉴레에게만 감동이었던 것이 아니라 클림트에게도 사건이었다.
클림트의 화실을 처음 방문하던 날 쉴레는 드로잉 몇 점을 갖고 가서 대가의 고견을 듣고 싶어 했다.
클림트는 “음, 좋아, 매우 좋아!”라고 칭찬했다.
과분한 칭찬에 부끄러워하며 쉴레가 자신의 드로잉 몇 점을 줄테니 클림트의 드로잉 한 점을 달라고 제의하자 클림트는 “왜 내 것과 바꾸려고 하느냐? 네가 나보다 더 잘 그리면서 ...”라고 하며 기꺼이 드로잉을 교환했다.

두 사람 모두 누드를 많이 그렸는데, 클림트에게 누드는 성적 대상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의 작품에 상징주의 요소가 농후한 건 인체를 표현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다.
인생을 표현하는 고상한 상징물로 본 그에게 누드는 자유와 평화의 여신을 의미했으며 무엇보다도 에로스 자체였다.
이에 반해 쉴레는 누드를 억압된 성적 충동을 병적으로 나타내는 도구로 보았으므로 인간의 동물성을 강조했다.
그는 표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드로잉이 만화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밝은 면 못지않게 어두운 면도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클림트는 여자를, 남자를 자극하는 매혹적인 육체를 가진 아름다운 이성으로 보았다.
처녀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꿈과 환상에 도취된 감성적으로 민감한 존재인 동시에, 요염한 제스처로 남자의 정신에 깊이 파고드는 동물적 감각이 농후한 존재로 나타났다.
그는 성적 충동을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는 여인을 그렸고 자위행위에 가까운 노골적으로 선정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런 점은 쉴레에게서도 발견하며 그는 여자를 성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존재, 섹스를 갈망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두 사람의 여자관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희망> 연작

클림트는 오랜 관계를 유지했던 여인이 자신의 아들을 낳았으나 곧 사망하자 이 시기부터 임산부를 다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겪으면서 인생의 본질에 관해 탐구하면서 <희망 I>에서 임산부와 함께 죽음의 이미지를 병치시켰다.
새 생명의 잉태는 희망이지만 그것은 곧 죽음의 위협을 받고 죽음과 연결된다는 직접적인 경험을 표현한 것이다.
죽은 아들 오토 짐머만의 얼굴을 그린 스케치가 남아 있어 그의 슬픔을 느끼게 한다.

클림트는 헤르마라는 여자를 모델로 고용하려고 했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모델이 되는 것이 수치스러워 거절했지만 클림트의 집요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모델이란 직업은 천하게 여겨지고 있었지만 클림트는 모델들을 각별하게 대했다.
모델 가족의 장례비를 주기도 하고 집세를 대신 내주기도 해서 모델들은 클림트를 좋아했다.

클림트는 4년 후인 1907~8년에 <희망 II>를 그리면서 양식과 상징의 형태를 달리 했다.
여기서는 죽음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고 여인의 뒤로 숨어 얼굴만 빼꼼 드러내고 있다.
모호한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 보다 장식적으로 그렸으며 젖가슴을 드러낸 임산부를 아름다운 의상을 한 모습으로 이상화했다.

죽음과 삶에 대한 집착은 1903년작 <망자들의 행렬>에서 여실히 나타났고, 1916년에 그린 <죽음과 삶>에는 좀더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는 인류 전체를 상징하는 무리와 해골로 상징되는 죽음을 병렬하여 죽음이 삶 가까이에 있음을 지적했다.
클림트의 회화는 전통이나 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숨김 없이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 이성에 대한 사랑이든 학문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은 여하튼 실망하게 되고, 행복도 지식도 안겨주지 못하며, 운명은 필히 존재하고 인간의 운명을 피할 도리가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행복과 지식을 추구하며 운명을 피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솔직하고 자유로운 사고와 표현이 당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특징으로 쉴레에게 계승되었다.


나르시즘적 자화상

클림트의 작품에 나타난 인생의 어두운 면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화가가 쉴레이다.
클림트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지만 쉴레가 그린 기괴한 형태의 자화상에서 클림트의 영향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클림트는 모델의 다양한 제스처와 장식적 요소를 혼용하여 그리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카메라의 발명은 초상화에 변혁을 초래했고, 화가들은 모델의 내면의 힘이나 특징을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당시 입센과 스트린드베르크의 작품이 비엔나에서도 애독되었는데, 두 사람의 작품에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없는 내용이 있어 비이성적인 것 혹은 잠재의식으로 여겨졌다.
이런 요소가 쉴레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화가로서 불과 10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을 산 쉴레는 인생의 어두운 곳들만 찾아 헤맨 예술가였다.
그는 100점도 더 되는 자화상을 그렸는데 기괴한 모습들이 많아 거울 앞에서 얼마나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나르시즘에 빠졌는지 짐작된다.
<오른쪽 팔꿈치를 들어올린 자화상>은 쉴레가 아니면 취하기 어려운 제스처이며 <팔을 올린 자화상>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제스처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그의 나르시즘은 어릴 적부터 나타났는데 거의 모든 드로잉에 사인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종종 사인을 다른 스타일로 바꾸기도 했으며 자신을 알리는 일에 여간 관심이 많지 않았다.
초상화는 그의 주요 장르가 되었고 자화상을 많이 그림으로써 자신이 회화의 중요한 주제임을 알렸다.

쉴레는 다양한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1910년에 그린 출판업자 <에두아르 코스맥>은 에드바르트 뭉크가 1894년에 그린 <사춘기>에서 포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1909년 벨기에, 프랑스 화가 외에도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작품이 포함된 전시회가 비엔나에서 열렸고 쉴레는 전시회에 가서 뭉크의 작품으로부터 감동을 받았다.
현재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춘기>는 1894년에 그린 것이지만, 이를 처음 유화로 그린 것은 1886년이고 1890년에 소실되자 다시 그린 것이다.
원래의 작품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이 작품이 가장 우수하며 뭉크의 표현주의 회화를 대표할 만하다.
벗은 몸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소녀는 양팔을 앞으로 모으고 관람자를 향해 눈을 크게 뜨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다.
뒤로 드리워진 불분명한 커다란 그림자는 소녀의 기대와 불안을 상징한다.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사춘기 소녀가 느끼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뭉크 특유의 포즈와 배경의 어두운 그림자로 표현했다.


풍경화

클림트의 풍경화는 방을 품위 있게 장식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는 인공적 자연을 만들어 관람자의 즐거움을 증가시켰다.
빼어난 자연주의 묘사 기술과 섬세한 색상 그리고 장식적 요소는 관람자가 풍경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그의 작품에는 눈에 즐거운 것이 마음에 즐거운 것이라는 쾌락주의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극도로 이상화된 그의 풍경화를 보노라면 인공적 자연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는 그가 원하는 자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자연에서 장식적 소재를 찾아 회화를 위해 자신의 것으로 바꾸었다.

쉴레의 풍경화에서는 그의 누드화에서 보았던 이그러진 비정형적인 요소와 장식적인 요소가 있다.
고독한 사람의 눈에 비치는 쓸쓸한 자연이 보이는데 이는 자신의 우울한 마음을 담은 풍경화이다.
<수령초가 있는 가을 나무>는 회화의 주제로 삼기에는 기형적인 불구의 나무처럼 보인다.
클림트가 숲을 선호한 데 비해 쉴레는 자신의 고독한 마음을 상징하는 앙상하고 야윈 불구의 나무를 선택했다.
<죽은 동네>는 동네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가 죽은 동네로 바라본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흑사병과 같이 무서운 속도로 전 유럽을 강타한 스페인 독감이 비엔나에도 번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유럽에서 독감으로 죽은 사람의 수가 1차 세계대전 때 희생된 사람의 수보다 더 많았다.
그해 1월 11일 뇌졸증으로 쓰러져 투병하던 클림트도 독감에 걸려 2월 6일 세상을 떠났다.
10월 28일에는 쉴레의 아내 에디스가 독감으로 죽었는데 결혼 한 지 3년이 조금 지난 그녀는 임신 6개월 중이었다.
쉴레도 독감에 걸렸고 사흘 후 아내의 뒤를 따랐는데 그의 나이 겨우 28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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