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원고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선구자 클림트와 쉴레>란 제목으로 신세계 잡지에 기고한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

에곤 쉴레가 비엔나의 어느 카페에서 45살의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났을 때 17살이었다.
술을 좋아하고 당구를 좋아하던 쉴레가 카페에서 평소 존경하던 클림트를 만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는 쉴레에게만 감동이었던 것이 아니라 클림트에게도 사건이었다.
클림트의 화실을 처음 방문하던 날 쉴레는 드로잉 몇 점을 갖고 가서 대가의 고견을 듣고 싶어 했다.
클림트는 “음, 좋아, 매우 좋아!”라고 칭찬했다.
과분한 칭찬에 부끄러워하며 쉴레가 자신의 드로잉 몇 점을 줄테니 클림트의 드로잉 한 점을 달라고 제의하자 클림트는 “왜 내 것과 바꾸려고 하느냐? 네가 나보다 더 잘 그리면서 ...”라고 하며 기꺼이 드로잉을 교환했다.

두 사람 모두 누드를 많이 그렸는데, 클림트에게 누드는 성적 대상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의 작품에 상징주의 요소가 농후한 건 인체를 표현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다.
인생을 표현하는 고상한 상징물로 본 그에게 누드는 자유와 평화의 여신을 의미했으며 무엇보다도 에로스 자체였다.
이에 반해 쉴레는 누드를 억압된 성적 충동을 병적으로 나타내는 도구로 보았으므로 인간의 동물성을 강조했다.
그는 표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드로잉이 만화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밝은 면 못지않게 어두운 면도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클림트는 여자를, 남자를 자극하는 매혹적인 육체를 가진 아름다운 이성으로 보았다.
처녀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꿈과 환상에 도취된 감성적으로 민감한 존재인 동시에, 요염한 제스처로 남자의 정신에 깊이 파고드는 동물적 감각이 농후한 존재로 나타났다.
그는 성적 충동을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는 여인을 그렸고 자위행위에 가까운 노골적으로 선정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런 점은 쉴레에게서도 발견하며 그는 여자를 성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존재, 섹스를 갈망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두 사람의 여자관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희망> 연작

클림트는 오랜 관계를 유지했던 여인이 자신의 아들을 낳았으나 곧 사망하자 이 시기부터 임산부를 다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겪으면서 인생의 본질에 관해 탐구하면서 <희망 I>에서 임산부와 함께 죽음의 이미지를 병치시켰다.
새 생명의 잉태는 희망이지만 그것은 곧 죽음의 위협을 받고 죽음과 연결된다는 직접적인 경험을 표현한 것이다.
죽은 아들 오토 짐머만의 얼굴을 그린 스케치가 남아 있어 그의 슬픔을 느끼게 한다.

클림트는 헤르마라는 여자를 모델로 고용하려고 했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모델이 되는 것이 수치스러워 거절했지만 클림트의 집요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모델이란 직업은 천하게 여겨지고 있었지만 클림트는 모델들을 각별하게 대했다.
모델 가족의 장례비를 주기도 하고 집세를 대신 내주기도 해서 모델들은 클림트를 좋아했다.

클림트는 4년 후인 1907~8년에 <희망 II>를 그리면서 양식과 상징의 형태를 달리 했다.
여기서는 죽음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고 여인의 뒤로 숨어 얼굴만 빼꼼 드러내고 있다.
모호한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 보다 장식적으로 그렸으며 젖가슴을 드러낸 임산부를 아름다운 의상을 한 모습으로 이상화했다.

죽음과 삶에 대한 집착은 1903년작 <망자들의 행렬>에서 여실히 나타났고, 1916년에 그린 <죽음과 삶>에는 좀더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는 인류 전체를 상징하는 무리와 해골로 상징되는 죽음을 병렬하여 죽음이 삶 가까이에 있음을 지적했다.
클림트의 회화는 전통이나 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숨김 없이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 이성에 대한 사랑이든 학문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은 여하튼 실망하게 되고, 행복도 지식도 안겨주지 못하며, 운명은 필히 존재하고 인간의 운명을 피할 도리가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행복과 지식을 추구하며 운명을 피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솔직하고 자유로운 사고와 표현이 당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특징으로 쉴레에게 계승되었다.


나르시즘적 자화상

클림트의 작품에 나타난 인생의 어두운 면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화가가 쉴레이다.
클림트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지만 쉴레가 그린 기괴한 형태의 자화상에서 클림트의 영향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클림트는 모델의 다양한 제스처와 장식적 요소를 혼용하여 그리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카메라의 발명은 초상화에 변혁을 초래했고, 화가들은 모델의 내면의 힘이나 특징을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당시 입센과 스트린드베르크의 작품이 비엔나에서도 애독되었는데, 두 사람의 작품에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없는 내용이 있어 비이성적인 것 혹은 잠재의식으로 여겨졌다.
이런 요소가 쉴레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화가로서 불과 10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을 산 쉴레는 인생의 어두운 곳들만 찾아 헤맨 예술가였다.
그는 100점도 더 되는 자화상을 그렸는데 기괴한 모습들이 많아 거울 앞에서 얼마나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나르시즘에 빠졌는지 짐작된다.
<오른쪽 팔꿈치를 들어올린 자화상>은 쉴레가 아니면 취하기 어려운 제스처이며 <팔을 올린 자화상>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제스처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그의 나르시즘은 어릴 적부터 나타났는데 거의 모든 드로잉에 사인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종종 사인을 다른 스타일로 바꾸기도 했으며 자신을 알리는 일에 여간 관심이 많지 않았다.
초상화는 그의 주요 장르가 되었고 자화상을 많이 그림으로써 자신이 회화의 중요한 주제임을 알렸다.

쉴레는 다양한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1910년에 그린 출판업자 <에두아르 코스맥>은 에드바르트 뭉크가 1894년에 그린 <사춘기>에서 포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1909년 벨기에, 프랑스 화가 외에도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작품이 포함된 전시회가 비엔나에서 열렸고 쉴레는 전시회에 가서 뭉크의 작품으로부터 감동을 받았다.
현재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춘기>는 1894년에 그린 것이지만, 이를 처음 유화로 그린 것은 1886년이고 1890년에 소실되자 다시 그린 것이다.
원래의 작품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이 작품이 가장 우수하며 뭉크의 표현주의 회화를 대표할 만하다.
벗은 몸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소녀는 양팔을 앞으로 모으고 관람자를 향해 눈을 크게 뜨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다.
뒤로 드리워진 불분명한 커다란 그림자는 소녀의 기대와 불안을 상징한다.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사춘기 소녀가 느끼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뭉크 특유의 포즈와 배경의 어두운 그림자로 표현했다.


풍경화

클림트의 풍경화는 방을 품위 있게 장식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는 인공적 자연을 만들어 관람자의 즐거움을 증가시켰다.
빼어난 자연주의 묘사 기술과 섬세한 색상 그리고 장식적 요소는 관람자가 풍경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그의 작품에는 눈에 즐거운 것이 마음에 즐거운 것이라는 쾌락주의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극도로 이상화된 그의 풍경화를 보노라면 인공적 자연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는 그가 원하는 자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자연에서 장식적 소재를 찾아 회화를 위해 자신의 것으로 바꾸었다.

쉴레의 풍경화에서는 그의 누드화에서 보았던 이그러진 비정형적인 요소와 장식적인 요소가 있다.
고독한 사람의 눈에 비치는 쓸쓸한 자연이 보이는데 이는 자신의 우울한 마음을 담은 풍경화이다.
<수령초가 있는 가을 나무>는 회화의 주제로 삼기에는 기형적인 불구의 나무처럼 보인다.
클림트가 숲을 선호한 데 비해 쉴레는 자신의 고독한 마음을 상징하는 앙상하고 야윈 불구의 나무를 선택했다.
<죽은 동네>는 동네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가 죽은 동네로 바라본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흑사병과 같이 무서운 속도로 전 유럽을 강타한 스페인 독감이 비엔나에도 번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유럽에서 독감으로 죽은 사람의 수가 1차 세계대전 때 희생된 사람의 수보다 더 많았다.
그해 1월 11일 뇌졸증으로 쓰러져 투병하던 클림트도 독감에 걸려 2월 6일 세상을 떠났다.
10월 28일에는 쉴레의 아내 에디스가 독감으로 죽었는데 결혼 한 지 3년이 조금 지난 그녀는 임신 6개월 중이었다.
쉴레도 독감에 걸렸고 사흘 후 아내의 뒤를 따랐는데 그의 나이 겨우 28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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