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신세계 사보에 기고한 것입니다.


제목: 자연을 탐험한 다 빈치와 영혼을 새긴 미켈란젤로


르네상스의 두 대가

레오나르도는 정신보다 물질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유물론자이며 미래가 밝다고 전망한 낙천주의자인 반면 이상주의자 미켈란젤로는 물질을 하찮게 여기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형상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했다.
정신만을 고귀하게 여겼으므로 진지하며 고독한 사람이었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경멸했다.
미켈란젤로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체를 통해 순수하고 영원한 영혼의 형상을 보여주기를 바란 데 반해 레오나르도는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함으로써 여러 종류의 인간이 사는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레오나르도는 멋진 옷을 입고 오늘날 고급 스포츠카에 해당하는 값비싼 말을 탔으며, 손수 악기를 만들고 작곡과 연주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랐고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을 만끽했다.
그와 달리 중세 도덕관이 몸에 벤 미켈란젤로는 명성이 드높아지고 많은 돈을 벌었지만 물질의 풍요로움을 탐닉하는 것을 죄로 알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레오나르도는 상류사회에 접근하여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미켈란젤로는 현세의 안락보다는 내세의 영생을 소망했기에 일찍이 자신이 속한 상류사회를 벗어났고,
거의 아흔 해를 사는 장수의 복을 누렸지만 인생이 길어지는 것을 오히려 더 많은 죄를 짓게 되는 요인으로 보고 스스로 염세주의의 짐을 졌다.
그의 삶은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과 같았다.

레오나르도의 언행에는 경박함이 있었지만 유쾌한 사람이었고 비관적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다.
인체를 기계에 비유하며 사용하지 않을 경우 녹이 슨다고 생각했으므로 늙어서도 끊임없이 드로잉하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반면 과거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사상에 심취한 미켈란젤로는 언행에 신중을 기했으며 많은 작품을 피하고 자신이 맡은 작품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전력을 투구했다.
고상한 생각을 정해놓고 작업했으므로 그는 늘 자신의 작품에 불만이었다.
따라서 근심이 많고 우울했으며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을 신뢰한 그가 나중에 신비주의에 빠지고 만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두 사람 모두 독신으로 생을 마쳤고 동성연애자로 알려졌다.
동성애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폭넓게 이뤄졌다.
발랄한 성격의 레오나르도는 동성애로 기소당한 적이 있고 잘생긴 젊은이들이 주변에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여행하기를 즐겨했다.
행동에 앞서 생각하는 기질의 미켈란젤로도 동성애자로 알려졌지만 확증될 만한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그의 삶은 닫혀 있었고 가문과 자신에 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
레오나르도는 엄청난 양의 글을 남겼으며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며 열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많은 편지와 시를 남겼어도 대부분 철학적 내용이라서 그의 정신세계를 엿보는 데는 훌륭한 자료가 되지만 구체적 생활상은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 사람들에게 궁금증으로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가 현실주의자라면 미켈란젤로는 환영에 사로잡힌 현실도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레오나르도에게는 사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었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있었던 데 비해 철학과 문학의 요람에서 교육을 받은 미켈란젤로는 당시에도 난해한 단테의 『신곡』을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박식했지만,
오늘날의 지성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학문에 치우친 협소한 시각을 가졌다.
하루는 레오나르도가 친구 화가와 함께 스피니 궁전 앞 산타 트리니타 광장을 걷고 있었다.
벤치에서 잡담하던 사람들이 레로나르도를 불러 세우고는 단테의 글에서 난해한 부분을 지적하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때 마침 미켈란젤로의 모습이 광장에 나타나자 레오나르도가 말했다.
“여기 미켈란젤로가 오고 있군. 그가 자네들에게 말해줄 걸세.”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벌컥 화를 내면서 레오나르도에게 말했다.
“선생님 스스로 대답하세요. 선생님은 말을 모델로 만들었지만, 청동으로는 뜨지 않고 포기했다는 걸 부끄러운 줄 아세요.”
미켈란젤로는 발걸음을 돌렸고 레오나르도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뒤돌아 선 채 다시 말했다.
“밀라노인은 어리석었기 때문에 선생님을 믿었던 거에요.”

이 에피소드를 통해 23살 연하의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를 업신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화풍을 비교하면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를 상당히 닮아 내면에서는 그에게 존경을 표했음을 알 수 있다.
“말을 모델로 만들었지만, 청동으로는 뜨지 않고 포기했다는 걸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고 핀잔했지만,
미켈란젤로도 해낼 수 없었음을 그 자신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밀라노의 통치자 루도비코가 공화국을 건설한 아버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기념하는 기마상을 레오나르도에게 의뢰한 것을 꼬집은 말인데, 막강한 부를 가진 루도비코는 실재 말보다 서너 배 크고 장려한 형상으로 제작하기를 원했고 레오나르도는 앞다리를 든 말을 청동으로 제작하려고 했다.
수 톤에 이르는 말의 무게를 뒷다리로만 지탱하게 하는 것은 당시 기술로서는 가능하지 않았으며 앞다리가 하나 더 있어야 가능했다.
기마상은 실현되지 않았고 과연 레오나르도에게 제작할 능력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미켈란젤로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사람들은 제작되지 못한 책임을 레오나르도에게 돌렸다.
그러나 작품의 미완성은 당시의 상황과 직접 관련이 있었는데, 나폴리, 프랑스와의 전쟁 위기 속에서 그만한 청동을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200년이 지난 후 프랑스 조각가 프랑수아 지라르동이 루이 14세의 동상을 높이 6,82미터로 제작했는데, 레오나르도가 고안한 청동뜨는 법과 거의 유사한 방법으로 했다.
이 동상은 프랑스 혁명 때 파괴되어 현존하지 않지만 당시의 기록에는 레오나르도가 실험한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적혀 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의 기술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위급한 상황으로 인해 청동을 구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네브라 데 벤치 vs. 바쿠스

레오나르도가 1476년경에 나무패널에 그린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은 <모나리자>를 예고하는 작품이다.
여인의 이름이 지네브라임을 배경의 로덴나무 숲에서 알 수 있는데, 로뎀나무가 이탈리아어로 지네브라이기 때문이다.
로뎀나무는 야인의 고상한 인격을 나타내는 데 적절했다.
레오나르도는 인격을 시각화하는 데 충실하면서 말했다.

“인물을 그릴 때는 성격이 겉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칭찬받을 수 없다.”

지네브라는 부유한 은행가의 딸로 17살의 나이에 결혼했다.
당시 시인들이 그녀의 미모에 매료되어 여러 편의 시를 썼으며 이 초상화는 회화의 언어로 찬양한 레오나르도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초상화가 낯설게 보이는 까닭은 젖가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체가 짧기 때문이다.
<모나리자>처럼 원작의 상체가 배꼽까지 묘사되었지만 아랫부분이 상해 12~15센티미터나 잘라냈다.
작품 뒤에 “아름다움이 덕을 꾸민다”고 적혀 있다.
지네브라의 눈썹이 조금밖에 없고 이마가 아주 넓은 것은 당시의 유행을 따른 것으로 미의 규준이었다.
나중에 그린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고 이마가 넓은데, 눈썹을 밀어버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모나리자>가 그려진 이후 곧 유행이 달라져 이마가 도로 내려왔고 얼굴을 강력하게 분할해주는 눈썹이 있는 것이 훨씬 아름답게 여겨졌다.
이 초상화를 워싱턴 갤러리가 1967년에 백만 달러 이상을 주고 구입했으며, 미국 내에 유일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13살 때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고 조각다운 조각을 처음 제작한 건 22살 때 완성한 <바쿠스>이다.
포도주의 신 바쿠스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술에 취해 오른손으로 잔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으로 바쿠스를 묘사하면서 뒤에 반인반수이면서 호색가인 사티로스가 포도를 훔쳐 먹으며 관람자를 향해 미소짓게 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술꾼이 발이 떨리고 가득 채워진 술잔을 높이 쳐든 채 게슴츠레한 눈길로 어린 사티로스에게 의지하는 순간을 포착했다.
사티로스가 훔쳐 먹는 포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포도주의 신 바쿠스에게는 포도가 얼마든지 있고 그의 머리조차 포도송이로 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통통한 사티로스를 모델로 삼아 개인적 특성과 거의 여자처럼 부드러운 신체를 만들어냈다.
또한 환상적인 효과를 위해 드릴을 사용해 사티로스 발 아래의 사자 생가죽과 포도송이를 제작했다.
성기가 잘려나갔는지 일부러 생략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기가 없는 바쿠스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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