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미술관
헹크 판 오스 지음, 반성완 옮김 / 미술문화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열린 미술관


<열린 미술관>은 추천할 만한 신간입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뮤지엄이 소장하고 있는 잘 알려진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를 모은 책입니다.
저자 헹크 판 오스Henk van Os는 얼마 전까지 암스테르담 릭스 뮤지엄 관장으로 활동하였고 현재는 암스테르담 대학의 미술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번역자는 반성완으로 서울 물리대학,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독문학과 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서양문예이론과 미학에 관한 다수의 논문과 번역서를 발표했으며 현재 한양대학교 인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번역하는 사람이 드문데 반 선생님은 번역에 뛰어난 분입니다.

이 책은 네덜란드에서 성황리에 방영되고 있는 미술 분야 TV 시리즈의 대본으로 쓰여진 여러 글들 가운데서 뽑은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미술의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특징입니다.

네덜란드는 우리와는 매우 친숙한 나라입니다.
네덜란드Netherland, The Netherlands는 '낮은 땅' 혹은 '저지대'라는 뜻을 지녔으며 실제로 전 국토의 27%가 바다보다 낮은 지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네덜란드를 지칭하는 또 하나의 이름인 홀란드Holland는 본래 북부에 있는 주의 이름이지만 이 주와 이 주의 수도였던 암스테르담이 이 나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홀란드 혹은 화란으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식명칭은 어디까지나 네덜란드입니다.
그리고 더치Dutch라는 이름은 네덜란드의 또 다른 영어식 표기입니다.

벨기에는 1830년 네덜란드에서 떨어져나와 독립했습니다.
옛날에 벨기에 지역은 남부 네덜란드로 불리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플랑드르, 브라반트, 안트베르펜 등은 모두 옛날 남부 네덜란드의 주나 도시들이었습니다.
루벤스가 주로 활동했던 남부 네덜란드는 지리적 역사적으로 프랑스 문화와 가톨릭 교회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렘브란트의 무대였던 북부 네덜란드는 대체로 독일 문화와 신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구분짓는 언어적 문화적 차이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 책은 33가지 미술의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가격은 15,000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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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를 유명하게 해준 '뭉크 스캔들'


앞서 언급한 대로 노르웨이는 문화적으로 변방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노르웨이 화가는 뭉크 한 사람이고 작가로는 당대 활약했던 입센 한 사람뿐이지 않습니까?

뭉크는 29살 때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여는 행운을 갖게 됩니다.
베를린의 보수적인 그룹 ‘예술가 연합’의 디렉터로 있던 노르웨인 사람 노만이 그를 베를린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뭉크가 베를린에서 55점이나 소개한 것으로 봐도 그가 이 개인전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를린 대부분의 언론이 뭉크의 그림을 비난했습니다.

비난은 예술가 연합 내에서 먼저 일어났는데, 연합의 총재이며 아카데미 부속 미술학교 교장으로 있던 궁정화가 폰 베르나는 전시장을 휙 둘러보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런 오물을 당장 철거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어느 비평가는 “습작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아주 졸작들이다”라고 혹평했습니다.
이는 훗날 ‘뭉크 스캔들’로 불리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스캔들로 뭉크는 일약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전이 열린 지 일주일만에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원총회가 열리고 개인전을 계속 열게 할 것인가에 대한 찬반을 표결에 붙였습니다.
개인전을 폐쇄해야 한다는 찬성표가 120표 반대가 105표가 나와 전시는 8일만에 중단되었습니다.
‘뭉크 스캔들’은 예술가 연합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예술가 연합을 탈퇴한 이들은 막스 리베르만을 중심으로 새로운 연합을 형성했는데, 이것이 ‘베를린 분리파’입니다.
연합이 둘로 갈라진 것은 뭉크의 승리라기보다는 독일에서의 인상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데, 노화가들이 파리에서 불어닥친 새로운 경향인 인상주의에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뭉크는 젊은 화가들에게 새로운 경향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심어주었습니다.

뭉크는 딜러 슐테의 호의로 쾰른과 뒤셀도르프에서 순회전을 가졌으며 1892년 12월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고 베를린에서 여러 점을 팔았습니다.
1년 뒤 다시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는 언론의 반발이 없었습니다.
베를린은 1년만에 엄청난 변화를 수용한 셈이 되었으며 뭉크는 이후 베를린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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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미술의 만남
고위공 지음 / 미술문화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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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미술의 만남


<문학과 미술의 만남>은 홍익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고위공의 저서입니다.
책을 읽다가 추천할 만하여 소개합니다.
저자는 서울대학 물리과 독문학과와 동대학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표현주의 시인 트라클의 서정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현재 홍익대학 독문학과와 대학원 미학과에서 독일시, 문예학, 해석학, 비교예술론 등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1999년 영국 International Biographical Center에서 "20세기 세계 학술연구업적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문학과 미술은 오래 전부터 만났습니다.
그리고 현재에도 이런 만남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문인과 예술가들은 옛날부터 가까웠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문인이 예술론을 전개하여 미술에 큰 혜택을 주었습니다.
19세기말의 상징주의와 20세기의 중요한 미술운동 입체주의, 미래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등 이런 운동의 이면에는 문인들의 충고와 이론적 후원이 있었습니다.


고위공은 문학과 미술이라는 광범위한 주제를 다양한 방법으로 조명했는데,
특히 다음 세 가지를 주목하여 이론을 폅니다.

1. 작품의 제재나 주제,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나 신 구약성서는 고대 및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두 예술에 공통된 소재를 제공한다.
중세 성화나 르네상스 문학과 예술이 대표적이다.
또 어떤 자연풍경, 역사적 사건, 사회현상은 시인과 화가 모두에게 서술대상이 된다.
한 작가가 인접 예술의 작품에서 창작의 영감을 얻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상상력이란 모든 예술에 공통된 창조의 원류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불후의 명화는 후세의 많은 시인들에게 시를 창작하는 동기가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예술 상호간의 영향과 수용의 관계를 형성한다.

2. 표현방식과 매체사용에 있어
문학과 미술은 실제의 질료선택이나 제작기법에 있어 차이가 있으나 대상의 예술적 서술이라는 점에서 연관성이 있다.
모방Mimesis의 개념으로 환원하는 시학 원리는 고대 이후 두 예술의 공통성을 설명하는 기초가 된다.
물론 여기에서도 형식과 장르의 차이에 따른 구체적 매체사용의 이질성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3. 예술작품의 해석과 수용에 있어서
문학과 미술은 비록 외형의 현상형식이 다르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추구하는 심미적 목표, 기능, 영향은 동일하게 파악될 수 있다.
시인과 화가가 사회와 여론에 대처하는 입장과 태도는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이 점이 고유한 특성을 지닌 예술과 미술가를 통일된 조망에서 바라보게 하는 요인이다.

고위공 교수가 약간 어려운 말을 구사하기 때문에 문장이 난해해보이지만,
내용은 쉽습니다.
쉽다기보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주 오래된 문학과 미술의 관계를 풀어나간 것은 저자가 코코슈카와 친분이 있는 트라클에 관한 박사학위논문을 썼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문학과 관련이 있는 미술품을 꼽으라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상이한 두 예술의 서로 주고받은 영향을 일목요연하게 논리적으로 언급한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고위공 교수에게 큰 박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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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 1 The Great Couples 5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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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의 식구가 된 미켈란젤로


메디치가는 먼 친척과 가문의 사람들에 의해 태어난 사생아들을 포함해서 작가, 음악가, 예술가들을 수백명 거느린 대식구였다.
메디치가의 경제적 후원이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메디치 후원 하에 있는 많은 당대의 지성인들과 교류하게 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논리적으로 대화하는 방법과 글쓰기를 배웠다.
그가 그곳에서 수학한 것은 2년 이상이었다.
메디치가에는 당대의 지성인들이 많았고 그들 중에는 르네상스 철학의 중요한 인물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있었으며 로렌초 자녀들의 가정교사 폴리지아노Poliziano도 있었다.
메디치가를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는 베르길리우스Virgil과 단테의 작품에 능통한 크리스토포로 란디노Cristoforo Landino도 있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정통한 인문학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도 있었는데, 피코는 플라톤 철학과 성서를 연관지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어렸지만 그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영향은 훗날 그의 미학과 시에 반영되었다.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메디치의 정원에 가고부터 기를란다요의 작업장에는 가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끝내 라틴어에 능통하지 못해 고전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으며 이탈리아어로 쓴 저작들을 읽었는데, 단테, 페트라르크, 보카치오의 저작들을 읽었으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오비드, 세네카, 시세로 등의 고전도 읽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지성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고상한 사상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고 편지와 시를 많이 썼다.
그의 어린 시절과 초기의 활약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의 글을 통해서이며 또한 그와 교류했던 아스카니오와 조지오 바사리를 통해서이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의 식구 Medici man'가 되었는데, 이는 메디치가의 정치적 위상과 변화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걸 말한다.

당시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유럽의 여느 나라 예술가들에 비해 나은 환경에 있었으며 이는 이탈리아의 도시생활이 더욱 더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군주 혹은 독재자들이 유럽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보다 예술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유효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는 유럽 다른 나라의 예술가들에 비해 훨씬 많은 일감이 있었다.
북유럽에서는 예술가가 한 도시에 묶여 있어야 했지만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이 궁정에서 저 궁정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닐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지역적 길드의 규정이 완화될 수 있었다.
길드의 제약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다니며 작업할 수 없다.
예술가들은 발주자의 보호를 받았으며 궁정화가들은 처음부터 길드의 권한 밖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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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의 <바쿠스>

 

 

미켈란젤로가 처음 로마로 간 것은 1496년 6월 25일로 처음이었다.
그는 로렌초가 써준 소개장을 추기경 상 조르조San Giorgio(본명은 라파엘레 리아리오Raffaele Riario(1460~1521)이다)에게 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교황청의 부고문vice-chancellor of the Curia으로 교황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으며 재력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도착할 무렵 리아리오는 새로운 궁전 칸셀레러리아를 건립했다.
이 궁전에는 상 조르조에게 딸린 식구 250명가량이 함께 살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잠시 그의 식구가 되어 그의 궁전에 묵었다.
상 조르조는 골동품을 아주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므로 미켈란젤로는 그것들을 보고 고대 미술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가 생겼다.
콘디비와 바사리는 상 조르조가 미켈란젤로에게 어떤 일감도 주지 않았다고 적었다.
미켈란젤로는 1497년 7월 1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나는 추기경으로부터 어떤 일도 의뢰받지 못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로마를 떠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콘디비와 바사리는 상 조르조 궁전 이웃에 살던 은행가 야코포 갈리Jacopo Galli가 미켈란젤로에게 <에로스 Eros>와 <바쿠스 Bacchus>를 주문했다고 적으면서 본래 둘 중 한 점을 모던한 고전주의 작품에 관심이 없는 추기경에게 주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에로스>는 현존하지 않고 <바쿠스>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갈리의 정원에 로마 고대 조각과 유물들과 함께 장식되었다.

<바쿠스>는 실재 사람의 크기보다 컸다.
미켈란젤로는 지난 8년 동안 대여섯 점밖에 제작하지 않았고 그것들 모두 작은 것들이었으므로 <바쿠스>는 조각다운 작품으로는 최초로 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20살을 조금 넘긴 그에게는 패기와 더불어 대리석을 다룰 수 있는 기술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바쿠스는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중성처럼 보이며 성기가 잘려나갔는지 일부러 생략했는지 성기가 없어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바쿠스>는 22살의 미켈란젤로에게는 야심을 갖고 제작한 작품으로 대리석을 다루는 솜씨가 탁월함을 시위하기에 충분했다.
고대의 영웅화하고 이상화하는 형식을 살려낸 당대의 감각으로 보면 새로운 영감에 의한 고전적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리아리오, 갈리, 미래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될 지울리아노 델라 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 그리고 그 밖의 후원자들이 소장한 고대 미술품들을 보고 고대에 매료되었으며 많은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고대 조각을 단지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하듯 새롭게 변형시켰다.
그가 <바쿠스>를 제작할 당시인 1496년에만 해도 그가 제작한 것의 원형이 될 만한 고대 조각은 알려져 있지 않았으므로 그가 고대의 조각을 좋아했더라도 고스란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고대에 어울릴 만하게 창조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멀리서 보면 그의 조각이 그리스 조각을 빼어 닮은 것처럼 보여 고대 그리스 조각들과 나란히 놓을 경우 그리스인의 작품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강렬한 그의 표현적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 작품과 <다윗>에서 15세기 피렌체 자연주의 최후의 표현을 볼 수 있다.
바쿠스를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묘사하겠다는 생각은 아직도 도나텔로의 발상에 머문 것이다.
고대 포도주의 신 바쿠스는 오른손으로 잔을 높이 들고 있고 왼손 가까이에는 반인반수 사티로스satyr가 포도를 훔쳐 먹으면서 관람자를 향해 미소 짓는다.
콘디비의 말로는 왼손에 든 것은 그에게 바쳐진 동물 호랑이의 가죽으로 미켈란젤로는 동물보다는 가죽을 묘사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술꾼이 발이 떨리고 가득 채워진 술잔을 높이 쳐든 채 게슴츠레한 눈길로 어린 사티로스에게 의지하고 있는 순간을 포착했다.
숲의 신 사티로스는 말의 귀와 꼬리를 가졌고 술과 여자를 좋아해 호색가로 알려졌다.
사티로스가 훔쳐 먹는 포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쿠스에게는 포도가 얼마든지 있고 그의 머리는 아예 포도송이 모양이다.
미켈란젤로는 통통한 사티로스를 모델로 삼아 가장 큰 기쁨으로 개인의 특성과 거의 여자처럼 부드러운 신체를 만들어냈다.
사티로스의 발 아래 사자 생가죽이 있는데 이것과 포도송이를 미켈란젤로는 드릴을 사용해 제작했다.
환상적인 효과를 위해 드릴을 사용했는데, 미켈란젤로 이전에도 로마인들은 드릴을 사용했고 미켈란젤로 이후에도 17세기를 대표할 만한 조각가 베르니니Bernini가 드릴을 즐겨 사용했다.

최초의 매너리스트 작품으로 알려진 <바쿠스>에서 미켈란젤로의 고전주의 요소뿐 아니라 자연주의의 요소도 발견된다.
이 작품이 콰트로첸토(15세기) 거장들의 작품보다 더욱 더 자유스럽고 명쾌한 이유는 그가 고전주의의 요소 외에도 과거 세대가 이루어놓은 자연주의적 성과를 계승 발전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회화에서도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이전 화가들의 작품은 두 사람의 작품에 비해 딱딱하고 어색한 느낌을 준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 와서야 회화와 조각은 고전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워졌다.
15세기의 자연주의적 노력은 16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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