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바쿠스>
미켈란젤로가 처음 로마로 간 것은 1496년 6월 25일로 처음이었다.
그는 로렌초가 써준 소개장을 추기경 상 조르조San Giorgio(본명은 라파엘레 리아리오Raffaele Riario(1460~1521)이다)에게 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교황청의 부고문vice-chancellor of the Curia으로 교황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으며 재력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도착할 무렵 리아리오는 새로운 궁전 칸셀레러리아를 건립했다.
이 궁전에는 상 조르조에게 딸린 식구 250명가량이 함께 살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잠시 그의 식구가 되어 그의 궁전에 묵었다.
상 조르조는 골동품을 아주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므로 미켈란젤로는 그것들을 보고 고대 미술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가 생겼다.
콘디비와 바사리는 상 조르조가 미켈란젤로에게 어떤 일감도 주지 않았다고 적었다.
미켈란젤로는 1497년 7월 1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나는 추기경으로부터 어떤 일도 의뢰받지 못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로마를 떠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콘디비와 바사리는 상 조르조 궁전 이웃에 살던 은행가 야코포 갈리Jacopo Galli가 미켈란젤로에게 <에로스 Eros>와 <바쿠스 Bacchus>를 주문했다고 적으면서 본래 둘 중 한 점을 모던한 고전주의 작품에 관심이 없는 추기경에게 주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에로스>는 현존하지 않고 <바쿠스>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갈리의 정원에 로마 고대 조각과 유물들과 함께 장식되었다.
<바쿠스>는 실재 사람의 크기보다 컸다.
미켈란젤로는 지난 8년 동안 대여섯 점밖에 제작하지 않았고 그것들 모두 작은 것들이었으므로 <바쿠스>는 조각다운 작품으로는 최초로 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20살을 조금 넘긴 그에게는 패기와 더불어 대리석을 다룰 수 있는 기술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바쿠스는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중성처럼 보이며 성기가 잘려나갔는지 일부러 생략했는지 성기가 없어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바쿠스>는 22살의 미켈란젤로에게는 야심을 갖고 제작한 작품으로 대리석을 다루는 솜씨가 탁월함을 시위하기에 충분했다.
고대의 영웅화하고 이상화하는 형식을 살려낸 당대의 감각으로 보면 새로운 영감에 의한 고전적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리아리오, 갈리, 미래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될 지울리아노 델라 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 그리고 그 밖의 후원자들이 소장한 고대 미술품들을 보고 고대에 매료되었으며 많은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고대 조각을 단지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하듯 새롭게 변형시켰다.
그가 <바쿠스>를 제작할 당시인 1496년에만 해도 그가 제작한 것의 원형이 될 만한 고대 조각은 알려져 있지 않았으므로 그가 고대의 조각을 좋아했더라도 고스란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고대에 어울릴 만하게 창조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멀리서 보면 그의 조각이 그리스 조각을 빼어 닮은 것처럼 보여 고대 그리스 조각들과 나란히 놓을 경우 그리스인의 작품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강렬한 그의 표현적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 작품과 <다윗>에서 15세기 피렌체 자연주의 최후의 표현을 볼 수 있다.
바쿠스를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묘사하겠다는 생각은 아직도 도나텔로의 발상에 머문 것이다.
고대 포도주의 신 바쿠스는 오른손으로 잔을 높이 들고 있고 왼손 가까이에는 반인반수 사티로스satyr가 포도를 훔쳐 먹으면서 관람자를 향해 미소 짓는다.
콘디비의 말로는 왼손에 든 것은 그에게 바쳐진 동물 호랑이의 가죽으로 미켈란젤로는 동물보다는 가죽을 묘사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술꾼이 발이 떨리고 가득 채워진 술잔을 높이 쳐든 채 게슴츠레한 눈길로 어린 사티로스에게 의지하고 있는 순간을 포착했다.
숲의 신 사티로스는 말의 귀와 꼬리를 가졌고 술과 여자를 좋아해 호색가로 알려졌다.
사티로스가 훔쳐 먹는 포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쿠스에게는 포도가 얼마든지 있고 그의 머리는 아예 포도송이 모양이다.
미켈란젤로는 통통한 사티로스를 모델로 삼아 가장 큰 기쁨으로 개인의 특성과 거의 여자처럼 부드러운 신체를 만들어냈다.
사티로스의 발 아래 사자 생가죽이 있는데 이것과 포도송이를 미켈란젤로는 드릴을 사용해 제작했다.
환상적인 효과를 위해 드릴을 사용했는데, 미켈란젤로 이전에도 로마인들은 드릴을 사용했고 미켈란젤로 이후에도 17세기를 대표할 만한 조각가 베르니니Bernini가 드릴을 즐겨 사용했다.
최초의 매너리스트 작품으로 알려진 <바쿠스>에서 미켈란젤로의 고전주의 요소뿐 아니라 자연주의의 요소도 발견된다.
이 작품이 콰트로첸토(15세기) 거장들의 작품보다 더욱 더 자유스럽고 명쾌한 이유는 그가 고전주의의 요소 외에도 과거 세대가 이루어놓은 자연주의적 성과를 계승 발전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회화에서도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이전 화가들의 작품은 두 사람의 작품에 비해 딱딱하고 어색한 느낌을 준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 와서야 회화와 조각은 고전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워졌다.
15세기의 자연주의적 노력은 16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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