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의 식구가 된 미켈란젤로
메디치가는 먼 친척과 가문의 사람들에 의해 태어난 사생아들을 포함해서 작가, 음악가, 예술가들을 수백명 거느린 대식구였다.
메디치가의 경제적 후원이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메디치 후원 하에 있는 많은 당대의 지성인들과 교류하게 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논리적으로 대화하는 방법과 글쓰기를 배웠다.
그가 그곳에서 수학한 것은 2년 이상이었다.
메디치가에는 당대의 지성인들이 많았고 그들 중에는 르네상스 철학의 중요한 인물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있었으며 로렌초 자녀들의 가정교사 폴리지아노Poliziano도 있었다.
메디치가를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는 베르길리우스Virgil과 단테의 작품에 능통한 크리스토포로 란디노Cristoforo Landino도 있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정통한 인문학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도 있었는데, 피코는 플라톤 철학과 성서를 연관지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어렸지만 그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영향은 훗날 그의 미학과 시에 반영되었다.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메디치의 정원에 가고부터 기를란다요의 작업장에는 가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끝내 라틴어에 능통하지 못해 고전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으며 이탈리아어로 쓴 저작들을 읽었는데, 단테, 페트라르크, 보카치오의 저작들을 읽었으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오비드, 세네카, 시세로 등의 고전도 읽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지성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고상한 사상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고 편지와 시를 많이 썼다.
그의 어린 시절과 초기의 활약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의 글을 통해서이며 또한 그와 교류했던 아스카니오와 조지오 바사리를 통해서이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의 식구 Medici man'가 되었는데, 이는 메디치가의 정치적 위상과 변화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걸 말한다.
당시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유럽의 여느 나라 예술가들에 비해 나은 환경에 있었으며 이는 이탈리아의 도시생활이 더욱 더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군주 혹은 독재자들이 유럽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보다 예술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유효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는 유럽 다른 나라의 예술가들에 비해 훨씬 많은 일감이 있었다.
북유럽에서는 예술가가 한 도시에 묶여 있어야 했지만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이 궁정에서 저 궁정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닐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지역적 길드의 규정이 완화될 수 있었다.
길드의 제약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다니며 작업할 수 없다.
예술가들은 발주자의 보호를 받았으며 궁정화가들은 처음부터 길드의 권한 밖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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