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를 유명하게 해준 '뭉크 스캔들'
앞서 언급한 대로 노르웨이는 문화적으로 변방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노르웨이 화가는 뭉크 한 사람이고 작가로는 당대 활약했던 입센 한 사람뿐이지 않습니까?
뭉크는 29살 때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여는 행운을 갖게 됩니다.
베를린의 보수적인 그룹 ‘예술가 연합’의 디렉터로 있던 노르웨인 사람 노만이 그를 베를린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뭉크가 베를린에서 55점이나 소개한 것으로 봐도 그가 이 개인전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를린 대부분의 언론이 뭉크의 그림을 비난했습니다.
비난은 예술가 연합 내에서 먼저 일어났는데, 연합의 총재이며 아카데미 부속 미술학교 교장으로 있던 궁정화가 폰 베르나는 전시장을 휙 둘러보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런 오물을 당장 철거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어느 비평가는 “습작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아주 졸작들이다”라고 혹평했습니다.
이는 훗날 ‘뭉크 스캔들’로 불리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스캔들로 뭉크는 일약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전이 열린 지 일주일만에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원총회가 열리고 개인전을 계속 열게 할 것인가에 대한 찬반을 표결에 붙였습니다.
개인전을 폐쇄해야 한다는 찬성표가 120표 반대가 105표가 나와 전시는 8일만에 중단되었습니다.
‘뭉크 스캔들’은 예술가 연합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예술가 연합을 탈퇴한 이들은 막스 리베르만을 중심으로 새로운 연합을 형성했는데, 이것이 ‘베를린 분리파’입니다.
연합이 둘로 갈라진 것은 뭉크의 승리라기보다는 독일에서의 인상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데, 노화가들이 파리에서 불어닥친 새로운 경향인 인상주의에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뭉크는 젊은 화가들에게 새로운 경향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심어주었습니다.
뭉크는 딜러 슐테의 호의로 쾰른과 뒤셀도르프에서 순회전을 가졌으며 1892년 12월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고 베를린에서 여러 점을 팔았습니다.
1년 뒤 다시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는 언론의 반발이 없었습니다.
베를린은 1년만에 엄청난 변화를 수용한 셈이 되었으며 뭉크는 이후 베를린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