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무 노구치 

 

미국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1904~88)는 1904년 11월 17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일본인 시인 요네지로 노구치Yonejiro (Yone) Noguchi와 미국인 작가 레오니 길무어Leonie Gilmour 사이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가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고 1918년 14살 때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경험이 훗날 그의 작품에 나타났다.
그는 아버지의 유업을 받들어 동양 문화 특히 일본 문화를 서양에 알리는 데 주력했다.
1922년 여름 짧은 기간 동안 컨네티커트 주에 거주하던 조각가 굿존 보글럼Gutzon Borglum으로부터 수학했고 1922~4년 컬럼비아 대학 예비 의과 과정을 수료한 후 어머니의 권유로 뉴욕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술학교의 교장인 오노리오 루오톨로Onorio Ruotolo의 조수가 되었으며 루오톨로는 노구치의 재능을 인정하고 3개월 후 첫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이때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노구치는 1926년 뉴욕의 브럼머 화랑Brummer Gallery에서 열린 콘스탄틴 브란쿠시 전시회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1927년 존 시몬 구겐하임 재단 연구지원금을 받아 3월 30일 파리에 도착한 후 브란쿠시에게로 가서 그의 조수가 되어 6개월 동안 지도를 받았으며 밤에는 미술 아카데미에 가서 드로잉을 배웠다.
브란쿠시로부터 배운 것은 장인 정신에 의한 자연적 물질의 특성을 부각시키는 것과 유기적 추상으로 이는 그의 조각에 결정적인 영향이었다.
런던과 아시아를 여행한 후 연구지원금이 더 이상 제공되지 않자 1929년 뉴욕으로 돌아왔고 금속판으로 추상 작업을 하기 시작하여 1940년까지 지속했는데, 브란쿠시의 영향으로 유기적 형상을 주로 제작했다.
그는 카네기 홀에 작업실을 정하고 초상 조각을 제작하여 생활했으며 1930년 파리로 갔고 모스크바를 거쳐 북경으로 가 몇 달 체류하면서 먹으로 인물화를 그리는 방법을 배웠다.
1931년에는 일본으로 갔으며 처음으로 선불교 정원을 보고 감동했으며 유명한 도예가 진맛수 우노Jinmatsu Uno로부터 도기 만드는 법을 배워 동경에서 도기조각을 전시했다.
1932년 그는 북경에서 먹으로 그린 그림과 도자기 조각을 두 화랑에서 전시했다.
1930년대에는 연방 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1935~36년 멕시코시티에서 몇 달 체류하면서 채색 시멘트를 이용한 커다란 벽면 조각 <멕시코 역사 History Mexico>를 제작했는데 첫 환경조형물이다.

노구치의 작품에 나타난 유기적 형상은 브란쿠시의 영향 외에도 아르프와 미로의 영향이었으며 이를 1945년작 <쿠로스 Kouros>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체 내부의 기관을 닮았기 때문에 유기적 형상이라고 말하지만 실재의 형태를 유추할 수 없는 추상이다.
여기서 우리는 추상이 어떻게 시작되어 진전되어 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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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미술


설치미술Installation art이란 회화를 벽에 걸거나 조각을 배치하는 등 전시회에서 사물들을 배열하는 것에 매우 폭넓게 적용될 수 있으나, 보다 구체적으로 화랑과 같은 특정한 실내 공간을 위해서 만들어지고, 그 장소를 채우기 위해 고안되며, 종종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아상블라주assemblage와 같은 일회성 작품을 일컫는 용어이다.

아상블라주는 1953년 뒤비페가 종이로 콜라주한 판에서 찍어낸 일련의 석판화에 붙인 명칭으로 그는 1954년 이 명칭을 풀 먹인 딱딱한 종이, 나무토막, 스펀지 등의 여러 파편으로 작은 형상을 만드는 기법에도 확대 적용시켰다.
그는 ‘콜라주’라는 용어는 1912년부터 1920년경까지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에 피카소와 브라크가 풀로 붙여 만든 그림들에만 따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상블라주라는 용어는 1961년 뉴욕의 모마가 개최한 ‘아상블라주 미술’전에서 채택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이 소개되자 아상블라주라는 용어가 공통된 특징이 거의 없는 별개의 다양한 오브제 작품들에 적용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이 용어의 유용성이 감소되었다.
이 전시회 이후 이 용어는 점차 다양한 오브제들을 모아 상자 같은 것에 담아 놓은 작품에만 보다 엄격하게 제한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도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는데, 단적인 한 예가 슈비터스의 콜라주 개념을 3차원으로 확장시킨 라우셴버그의 ‘콤바인 회화’이고 다른 한 예는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을 확장시킨 아르망의 집적 작품이다.

설치의 선례를 찾는다면 ‘장소 특수적 site-specific’인 작품의 전통으로 선사시대의 동굴벽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설치의 개념에 적합한 것은 1930년대의 초현실주의 전시회, 쿠르트 슈비터스의 방안을 가득 채운 <메르츠> 구성물, 1958년 <공백>이라는 제목으로 된 이브 클랭의 빈 방 전시이다.
클랭의 작품은 오늘날의 설치 개념에서 최초의 선례로 간주되고 있다.
설치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으며 몇몇 작가들이 설치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설치 미술’이라는 분야가 확고한 장르가 된 것은 1980년대에 와서였다.
설치 작가들은 “설치 미술이 오늘날의 여러 미술 형식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활발하며 창의성이 풍부한 미술”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의 설치는 일반적으로 비영속적이었으며 이는 당시 수집 가능한 미술품이 유행하던 것에 대한 저항의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많은 설치 작업이 영속적인 전시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고 소장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작품들조차 소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1990년에는 설치 미술 미술관이 런던에 문을 열었다.
설치미술을 이해하기 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미를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는 곧 동시대의 특징을 아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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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 

 

레오나르도가 야코포 살타렐리와 남색을 벌인 것으로 기소되기 전에 그린 그림으로 추정되는 것은 <수태고지 Annuciation>이다.
이 작품은 1470~73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작품은 1867년 피렌체의 우피치 뮤지엄에 소장되기 전까지 몬테 올리베토수도원에 걸려 있었으며 기를란다요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부 평론가들은 베로키오의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러스킨만이 이 작품을 레오나르도의 초기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레오나르도가 펜과 잉크로 수태를 알리는 천사 가브리엘의 소매를 그린 드로잉은 1907년에야 출간되었고 이때부터 사람들이 <수태고지>가 레오나르도의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을 베로키오가 그린 작품에 삽입한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천사와 비교하면 레오나르도의 회화방법에 얼마만큼의 진전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음을 보는데, 동정녀의 기다란 손가락과 가슴의 장식적 요소가 그러하다.
서툰 솜씨도 보이며 특히 동정녀의 팔과 연사용 탁자가 원근법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작품이 전체적으로 호감을 느끼게 하고 조화로우며 깊이가 있고 밝으며 공간이 있다.
이런 요소들은 당시 새로운 점들로 레오나르도의 고유한 창조성을 충분히 알게 해준다.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의 과학적 관망이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데, 화면 앞의 꽃밭 외에도 천사의 날개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실재 새의 날개를 부착한 점이다.
레오나르도 이전에 그려진 천사를 보면 날개를 지나치게 꾸미고 어색하게 부착시켰으며 그의 날개는 자연에서 관망한 것이다.
인체와 동물의 몸에 관해 충분한 지식이 있는 그는 날개가 어깨로부터 자란 것처럼 자연스럽게 부착했다.
과거 화가들이 도상적으로 날개를 어깨 조금 아랫부분에 형식적으로 단 것과는 다르다.
그의 면밀한 사실주의와 공상적인 날개를 하고 있는 프라 안젤리코 리피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천사를 비교하면 레오나르도의 자연주의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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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베노이스 마돈나> 


 

남색사건으로 기소되었다가 중지된 지 몇 달 후 1477년 대가 베로키오가 조수들을 이끌고 피렌체에서 약 40km 떨어진 피스토이아로 왔다.
그는 추기경 니콜로 포르테구에리를 기념하는 대리석 조각을 제작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가 피스토이아에까지 오게 된 기회를 이용해서 지방 집정부는 그에게 제단화 <동정녀와 아이 Virgin and Child>를 의뢰했다.
레오나르도도 이 팀에 가세했는데 아마 불미스러운 사건이 종결되자 잠시 피렌체를 떠나고 싶어서 베로키오 팀에 가세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얼마나 그곳에 머물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래 머문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작업에 참여한 것은 작업장에서 조그만 부분을 그린 것이 전부이다.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테라코타 모델이 레오나르도가 한 것으로 천사가 그리스도와 동정녀에게 문안드리는 장면이다.
이것은 그가 베로키오의 작업에 기여한 마지막 작품이다.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은 것은 1478년 1월 1일로 그가 25살 때였다.
그는 서면으로 시그노리아(시위원회)로부터 성 베르나르드 예배당에 제단화를 그릴 것을 주문받았다.
그는 3월 16일 선불로 25플로린을 받았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이 작품에 대한 계약을 파기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피에로 폴라이우올로가 주문한 것인데, 레오나르도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기를란다요에게 주문했고 그도 약속을 지키지 않자 필리포 리피의 몫이 되었으며 그가 7년 후에 완성했다.

1478년 12월 피렌체에는 홍수와 전염병의 재앙이 내려졌다.
레오나르도는 무슨 일이고 해야 했으며 그의 노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는 두 점의 동정녀 마리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떤 형식의 그림인지 또 누구를 위해 그렸는지에 관해서는 적지 않았다.
두 점 가운데 하나는 <베노이스 마돈나 Benois Madonna>인 것 같다.
당시의 전통은 대가가 역사와 전통을 좇아 그리게 되고 차세대 화가들은 대가의 작품을 보거나 의도를 파악하거나 책을 통해서 혹은 여행을 통해서 알고 역사와 범주 내에서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면 그런 점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마돈나가 아기 예수와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장면을 그린 화가가 과거에 없었다.
레오나르도는 보통 어머니가 아기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19세기 초 이탈리아 음악가가 타르타리의 아스트라칸에서 이 작품을 러시아인 사포지니코브에게 팔았는데 그가 어디서 이것을 구해 러시아인에게 팔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작품을 사포지니코브의 손녀딸이 유증받았다.
그녀는 러시아 화가 레온 베노이스Leon Benois의 미망인이었고 그녀는 1914년에 세인트 페테르스부르그의 헤르미타지Hermitage 뮤지엄에 기증했다.
이 작품은 베노이스의 이름을 따서 <베노이스 마돈나>로 불리우게 되었다.
이것은 캔버스로 재현되었지만 레오나르도는 패널에 그렸다.
캔버스로 재현된 것은 아무래도 원화와는 같을 수 없는 데다 서툰 솜씨로 보수되어 원화와는 거리가 아주 멀어지게 되었다.
마돈나의 앞이마는 벗겨졌고 볼은 볼록하고 눈은 침침하며 목은 주름져 있다.
이빨은 색에 덮여 보이지 않고 피부도 보수하는 과정에서 매끈하지 않아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는 더이상 원화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레오나르도가 도상적 전통을 무시하고 그렸기 때문이다.
과거 마돈나의 그림은 그녀를 숭고한 모습으로 표현하느라 딱딱하고 몸을 꼿꼿하게 세운 모습으로 마치 사진을 찍을 때 긴장하고 몸을 유연하게 하지 않고 얼어붙은 것처럼 포즈를 취하는 것과 같았다.
후기 15세기 화가들도 그런 식으로 그렸기 때문에 레오나르도의 이 작품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신비한 신성을 단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표현하면서 일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했다.
아기 예수는 꽃에 매료되어 잡으려고 한다.
마돈나는 아기가 꽃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한다.
어머니와 아기 모두 관람자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두고 놀이를 하고 있다.
15세기 관람자들이 과연 이 작품을 만족해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베로키오의 수석 조수가 된 로렌초 디 크레디로부터 라파엘로까지 레오나르도의 마돈나는 새로운 이미지로 전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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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음악에 대한 재능과 관심 

 

레오나르도는 30살 때 밀라노로 향했다.
자신의 재능을 로렌초가 알아주지 않자 잠시라도 피렌체를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간 해를 1476년이라고 기술했지만 실제로는 1481년 겨울로 그 이전에 그가 피렌체를 떠나기는 불가능했다.
레오나르도는 친구 아탈란테 미글리오로티와 함께 밀라노로 향하면서 밀라노 최고 권력자 공작에게 선사할 악기를 소지했다.
바사리는 그 악기를 레오나르도가 직접 고안 제작한 것으로 류트와 유사하며 주로 은으로 제작되었다면서 ꡒ말 머리 형상을 한 이 낯선 악기는 강력한 하모니와 완전한 음을 냈다ꡓ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서 개최된 음악경연대회에서 이 악기를 연주한 것 같으며 그때 모든 음악가들을 물리치고 음악을 사랑하는 로렌초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당시 피렌체에는 다양한 악기가 있었고 레오나르도가 사용한 동물 머리 형상의 현악기 류트와 칠현금 리라 다 브라치오lira da braccio도 주로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반주로 사용되었다.
리라 다 브라치오는 벨리니, 카르파치오Carpaccio, 라파엘로, 만테냐의 그림에서 천사가 사용하는 악기로 등장한다.

음악경연대회는 실제로 열렸던 것 같으며 15년 후 레오나르도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ꡒ니콜라이오 델 투르코의 아들 타데오는 1497년 9월 28일 미카엘마스 이브Michaelmas Eve에 9살이었다. 아이는 그 날 밀라노로 가서 류트를 연주했으며 이탈리아 최고 연주자들 중 하나라는 판정을 받았다.ꡓ

레오나르도가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것에 대한 확신은 그의 노트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는 자신이 발명한 악기는 물론 어쿠스틱acoustic 악기들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비올라 오르가니스타viola organista, 그릴산도와 녹음기, 북과 키보드가 있는 종을 발명했으며 바이올린도 발명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악보를 읽을 줄 알았고 쓸 줄도 알았으며 악보를 ꡒ보이지 않는 것들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설명했다.
그가 쓴 악보는 현존하지 않는데, 그는 즉흥적 작곡가였다.
그는 종종 보표와 음표를 이합체와 수수께끼 가운데 사용하여 창조적으로 곡을 만들었다.
그가 몇 페이지에 걸쳐 쓴 악보를 보면 음자리표 다음에 보표를 낚시바늘(이탈리아어로 아모amo)로 그린 후 라레rare란 글자를 적고 레re 솔sol 라la 미mi 파fa 레re 미mi를 적었으며, 길게 선을 그은 후 라 솔 미 파 솔을 표기하고 글자 레치타lecita를 적었다.
이는 ꡐ아모레 솔 라 미 파 레미라레 라 솔미 파 솔레치타 Amore sol la mi fa remirare, la solmi fa sollecitaꡑ가 되고 번역하면 ꡐ오직 사랑만이 나의 심장을 휘저음을 기억하게 만든다ꡑ가 된다.
또 다른 가사는 ꡐ사랑이 내게 즐거움을 준다ꡑ라고 적혀 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음악가 서클에 곧 알려졌다.
그가 밀라노에서 처음 그린 초상화는 밀라노 공작이 아니라 음악가였다.
이 초상화는 1905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는데, 앉은 사람이 악보를 들고 있고 악보에는 보표와 함께 ꡐ칸트 앙 Cant. Ang.ꡑ이라고 적혀 있다.
ꡐ칸트 앙ꡑ은 ꡐ칸티쿰 안젤리쿰 Canticum angelicumꡑ을 의미하고 이는 밀라노 대성당의 합창단장 가푸리우스Gafurius로 알려진 프랑치노 가푸리오Franchino Gaffurio의 작곡명이다.
따라서 초상화에 앉아 있는 사람은 가푸리우스로 짐작된다.
레오나르도는 가푸리우스의 이론서 『실용적 음악 Practica musicae』에 관한 삽화를 그린 것으로도 알려졌으며 하모니의 관념을 분석한 최초의 논문이다.

레오나르도는 파비아 사람 로렌초 구나스코Lorenzo Gugnasco도 알게 되었는데, 악기를 생산하고 매매하는 사람으로 오르간, 합시코드, 류트, 비올viol(중세 현악기로 바이올린 종류의 전신) 등 다양한 악기들을 취급했으며 밀라노, 페라라, 만투아 등지의 궁정에 납품했다.
레오나르도는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작업장에서 다양한 악기들을 제작 실험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또 자기보다 10살 어린 아탈란테 미글리오로티Atalante Migliorotti를 알게 되어 제자로 삼아 가르치면서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아탈렌테는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사생아였다.
레오나르도는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아탈렌테가 밀라노에서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수이면서 수금을 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491년 만투아에서 폴리지아노Poliziano의 작품 <파볼라 도르페오 Favola dꡑOrfeo>에서 주인공역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그와 헤어졌고 1513년 로마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때 아탈렌테는 막강한 후원자를 배경으로 가수로 왕성하게 활약했다.
레오나르도는 은으로 악기를 만들어 직접 밀라노 공작에게 바쳤으며 아탈렌테와 더불어 악기들을 연주하면서 밀라노 음악가들과 어울렸지만 음악가로 성공하겠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더이상 아탈렌테와 함께 활동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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