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음악에 대한 재능과 관심
레오나르도는 30살 때 밀라노로 향했다.
자신의 재능을 로렌초가 알아주지 않자 잠시라도 피렌체를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간 해를 1476년이라고 기술했지만 실제로는 1481년 겨울로 그 이전에 그가 피렌체를 떠나기는 불가능했다.
레오나르도는 친구 아탈란테 미글리오로티와 함께 밀라노로 향하면서 밀라노 최고 권력자 공작에게 선사할 악기를 소지했다.
바사리는 그 악기를 레오나르도가 직접 고안 제작한 것으로 류트와 유사하며 주로 은으로 제작되었다면서 ꡒ말 머리 형상을 한 이 낯선 악기는 강력한 하모니와 완전한 음을 냈다ꡓ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서 개최된 음악경연대회에서 이 악기를 연주한 것 같으며 그때 모든 음악가들을 물리치고 음악을 사랑하는 로렌초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당시 피렌체에는 다양한 악기가 있었고 레오나르도가 사용한 동물 머리 형상의 현악기 류트와 칠현금 리라 다 브라치오lira da braccio도 주로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반주로 사용되었다.
리라 다 브라치오는 벨리니, 카르파치오Carpaccio, 라파엘로, 만테냐의 그림에서 천사가 사용하는 악기로 등장한다.
음악경연대회는 실제로 열렸던 것 같으며 15년 후 레오나르도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ꡒ니콜라이오 델 투르코의 아들 타데오는 1497년 9월 28일 미카엘마스 이브Michaelmas Eve에 9살이었다. 아이는 그 날 밀라노로 가서 류트를 연주했으며 이탈리아 최고 연주자들 중 하나라는 판정을 받았다.ꡓ
레오나르도가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것에 대한 확신은 그의 노트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는 자신이 발명한 악기는 물론 어쿠스틱acoustic 악기들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비올라 오르가니스타viola organista, 그릴산도와 녹음기, 북과 키보드가 있는 종을 발명했으며 바이올린도 발명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악보를 읽을 줄 알았고 쓸 줄도 알았으며 악보를 ꡒ보이지 않는 것들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설명했다.
그가 쓴 악보는 현존하지 않는데, 그는 즉흥적 작곡가였다.
그는 종종 보표와 음표를 이합체와 수수께끼 가운데 사용하여 창조적으로 곡을 만들었다.
그가 몇 페이지에 걸쳐 쓴 악보를 보면 음자리표 다음에 보표를 낚시바늘(이탈리아어로 아모amo)로 그린 후 라레rare란 글자를 적고 레re 솔sol 라la 미mi 파fa 레re 미mi를 적었으며, 길게 선을 그은 후 라 솔 미 파 솔을 표기하고 글자 레치타lecita를 적었다.
이는 ꡐ아모레 솔 라 미 파 레미라레 라 솔미 파 솔레치타 Amore sol la mi fa remirare, la solmi fa sollecitaꡑ가 되고 번역하면 ꡐ오직 사랑만이 나의 심장을 휘저음을 기억하게 만든다ꡑ가 된다.
또 다른 가사는 ꡐ사랑이 내게 즐거움을 준다ꡑ라고 적혀 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음악가 서클에 곧 알려졌다.
그가 밀라노에서 처음 그린 초상화는 밀라노 공작이 아니라 음악가였다.
이 초상화는 1905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는데, 앉은 사람이 악보를 들고 있고 악보에는 보표와 함께 ꡐ칸트 앙 Cant. Ang.ꡑ이라고 적혀 있다.
ꡐ칸트 앙ꡑ은 ꡐ칸티쿰 안젤리쿰 Canticum angelicumꡑ을 의미하고 이는 밀라노 대성당의 합창단장 가푸리우스Gafurius로 알려진 프랑치노 가푸리오Franchino Gaffurio의 작곡명이다.
따라서 초상화에 앉아 있는 사람은 가푸리우스로 짐작된다.
레오나르도는 가푸리우스의 이론서 『실용적 음악 Practica musicae』에 관한 삽화를 그린 것으로도 알려졌으며 하모니의 관념을 분석한 최초의 논문이다.
레오나르도는 파비아 사람 로렌초 구나스코Lorenzo Gugnasco도 알게 되었는데, 악기를 생산하고 매매하는 사람으로 오르간, 합시코드, 류트, 비올viol(중세 현악기로 바이올린 종류의 전신) 등 다양한 악기들을 취급했으며 밀라노, 페라라, 만투아 등지의 궁정에 납품했다.
레오나르도는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작업장에서 다양한 악기들을 제작 실험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또 자기보다 10살 어린 아탈란테 미글리오로티Atalante Migliorotti를 알게 되어 제자로 삼아 가르치면서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아탈렌테는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사생아였다.
레오나르도는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아탈렌테가 밀라노에서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수이면서 수금을 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491년 만투아에서 폴리지아노Poliziano의 작품 <파볼라 도르페오 Favola dꡑOrfeo>에서 주인공역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그와 헤어졌고 1513년 로마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때 아탈렌테는 막강한 후원자를 배경으로 가수로 왕성하게 활약했다.
레오나르도는 은으로 악기를 만들어 직접 밀라노 공작에게 바쳤으며 아탈렌테와 더불어 악기들을 연주하면서 밀라노 음악가들과 어울렸지만 음악가로 성공하겠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더이상 아탈렌테와 함께 활동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