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폴록, “결국 나는 자유로워졌어”



리는 무척 괴로워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을 만나면 잭슨 폴록과 이혼해야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는데 이제 그녀는 “잭슨과 이혼해주지 않겠다”며 태도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조금 늦었지만 폴록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한 리는 폴록에게 유럽으로 함께 여행가서 페기 구겐하임도 만나고 베니스 비엔날레에도 참석하자고 권했으나 폴록은 거절했다.
폴록은 매주 화요일에 만나는 의사 클라인을 오래도록 못 보아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는데 실은 그는 요즘 클라인을 만나는 날짜를 늦추는 등 치료받는 것도 게을리 하고 있었다.

6월에 루스는 색 하버로 이주했는데 그곳은 스프링스에서 불과 12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이 폴록의 집에서 그렇게 가까운 곳인 줄 몰랐다고 천연덕스럽게 주장했다.
실은 그녀는 숨어사는 것에 진력을 내고 있었고 더 이상 애인 행세를 하려 하지 않았다.
리는 이혼하려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고 폴록은 어정쩡하게 리와 자신을 모두 곁에 두려고 했으므로 그녀는 정면으로 돌파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폴록은 그녀를 에름나무 술집에서 만나기도 했는데 그 술집은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때부터 폴록은 일주일에 두세 번 그녀에게 갔으며, 동네 근처 아무데서나 그녀와 동행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이 팔짱을 끼고 다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는 이웃에 살던 로드에게 그녀를 소개하기도 했다.
폴록은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모르는 채 술을 더욱 많이 마시고 있었다.
그는 의사 클라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클라인은 “당신은 어떠한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그저 “왜 루스와 살지 않죠?”라고 물었다.
클라인은 동료의사들과 폴록에 관해 의논했는데 그들의 결론은 “빌어먹을 폴록의 경우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잭슨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루스가 폴록에게 결혼을 요구하면 폴록은 자신이 리에게 빚이 있다고 말하면서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보자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폴록의 의지의 문제인 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나서서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며칠 후 루스의 판단이 폴록의 입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루스가 임신했다.”

폴록은 그린버그와 벤 헬러, 다른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자랑하면서 자신은 원래 무정자가 아니었다며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임신할 수 있었던 거라고 좋아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서 폴록은 그녀의 임신이 리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데 문제가 됨을 알게 되었다.
“잭슨은 얼마나 리를 두려워했었던지 아이가 출산될 터인데도 리와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루스가 말했다.

폴록은 술을 마시면서 자신이 두 여자를 공유하는 방법으로 루스가 집으로 들어오고 리가 뒤켠에 있는 그의 헛간 화실로 옮기면 되지 않을까를 궁리했다.
폴록은 회화에서는 천재였지만 통속 드라마 같은 인생에서는 천치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는 루스에게 함께 리에게 가서 그녀의 이해를 구하자고 말하면서 리가 너를 좋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폴록에게 화를 내면서 그가 용기도 없고 의지도 약하다고 나무랐다.
추상표현주의의 간판스타 잭슨 폴록은 이렇게 루스에게는 의지가 약한 사내가 되고 리에게는 비정한 사내가 되어버렸다.

7월 어느 날 폴록은 루스를 화실로 데리고 와서 술을 마시고 깔깔거리며 밤을 보냈다.
그때 리는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이 화실에서 빠져나가려고 할 때 뒷문에 리가 가운 차림으로 서 있었다.
리는 얼굴이 하얘지도록 화가 나 있었다.
리의 얼굴은 이그러져 있었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루스를 응시하다가 “경찰을 부르기 전에 저 여자를 내 집에서 쫓아내!”하고 고함을 쳤다.

폴록이 루스를 데려다주고 돌아왔을 때 리는 “그 여자를 만나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떠나마”라고 선언했다.
폴록은 리에게 “꺼져!”라고 마주 고함을 쳤다.
이러한 싸움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다. 대개 폴록이 만취되어 집에 돌아오면 그랬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리는 폴록이 자신에게 사과하기를 은근히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폴록과 이혼해주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울 게 없다고 판단한 리는 가족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유럽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려고 결심했다.

이때 리는 위궤양과 대장염을 앓고 있었다. 폴록이 리를 죽이고 있었다.
리는 숨이 막힐 것 같아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어디론가 간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산소를 공급받는 것과 같았다. 폴록은 유럽으로 가는 배표를 사가지고 왔다.
리는 유럽으로 떠나기 전에 이혼수속을 해놓고 가야겠다며 친구들과 의논했는데 테드 드래곤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만류했다.
테드는 그녀에게 “넌 멀리 가서 이 모든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렌 시겔은 리에게 이혼보다는 먼저 별거를 해보라고 권했다.
폴록은 의사 클라인에게 상황을 알렸고, 클라인은 “리가 유럽에 가게 해라”고 조언했다.

유럽으로 떠날 날이 다가오자 리는 마음이 약해져서 폴록에게 자신과 함께 가자고 애원했다.
리의 애원은 폴록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지 않으려는 만류이기도 했는데 폴록은 리의 애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간은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유럽으로 떠나기 전날 리는 폴록이 죽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폴록은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었고 그의 손은 형판들로 가려져 있었다.

리가 떠나던 날인 7월 12일 뉴먼과 그의 아내 애널리가 리를 부두까지 환송했고, 리는 르 아브르로 떠나는 퀸 엘리자베스 호에 승선했다.
뉴먼은 “잭슨이 리를 내쫓았다”고 회상했다.
리는 부두로 가는 도중에 “난 가기 싫어. 잭슨에겐 내가 필요해”하고 소리치면서 울었고, 폴록에게 전화를 걸어 여권을 집에 두고 왔다는 거짓말도 했다.
그녀는 폴록이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하기를 기대했는데 그러한 낌새가 보이지 않자 “아, 여권이 여기에 있었군!”이라고 말한 후 수화기를 던졌다.

리는 떠났고, 화요일에 오소리오가 폴록을 데리러 맨해턴의 기차역으로 갔다.
폴록은 클라인이 휴가를 가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잭슨은 제대로 걷지 못했다. 그는 아주 우울해 있었으며 병색이 뚜렷했고 얼굴은 붉게 얼룩져 있었다”고 오소리오가 전했다.
폴록은 오소리오에게 희미한 목소리로 “의사는 휴가중이고 리는 떠났다.
결국 나는 자유로워졌어”라고 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보티시즘



보티시즘이란 명칭은 1913년 말 에즈라 파운드가 혁신적인 이론들의 혼란 속에서 모든 긍정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새로운 종합으로 끌어내고 결집시키는, 소용돌이치는 회오리 같은 힘의 개념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는 또한 모든 예술적 창조는 감정적인 돌풍의 상태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미래주의자 보초니의 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명칭에 의해 암시되는 시각적 이미지는 거칠고 각지며 사선을 향하는 새로운 작업의 양식과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혼란스럽고 불화가 잦으며 과장된 보티시즘Vorticism의 근원은 미술 운동의 출현에 있어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며 다다,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보티시즘의 본래 목표는 미래주의의 역동적 스피드와 입체주의의 정적인 기념비적 특성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프랑스 예술가들이 선호한 실내의 작업실 모티프를 단호히 거부하고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열정적으로 묘사한 기계 이미지를 매우 냉정하고 고전적 방식으로 다루어 독창적인 종합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보티시즘 초기에 혼란스럽게 대립되는 경향 하에서도 유지되었던 일관성과 지침은 더 이상 발전해나가지 못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 운동은 사실상 소멸되었으며, 그것을 되살리려던 이질적인 모임인 그룹 X의 시도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보티시즘의 중요성은 나중에 가서야 드러났다. 1974년 리처드 코크는 적었다. “지금에서야 보티시즘이 1930년대 영국의 두 번째 추상 운동을 자극한 선례라고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감탄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자기만족에 빠져 있고 침체된 섬나라의 진취적이지 못한 성향을 비난한 사도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보티시즘Vorticism은 격렬하고 격정적인 ‘반란자 rebel’ 그룹이 주창한 이념에 붙여진 명칭으로 이 그룹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 미술에서 최초로 추상을 지향하는 조직적인 운동이 되기를 열망했다. 이 운동은 로저 프라이의 오메가 공방에 속한 예술가들 사시의 불화로 시작된 것으로 프라이와 윈덤 루이스의 개인적인 다툼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런던 태생으로 화가이며 평론가 로저 엘리엇 프라이Roger Eliot Fry(1866~1934)는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서 이학 학위를 받은 뒤 1891년 이탈리아, 이듬해에는 파리의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프라이의 비평은 당시의 기호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면서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1901년 <디 애시니엄 The Athenaeum> 지의 평론가였고, 1905~10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관장을 역임했으며, 1910~19년 <벌링턴 매거진> 편집자로 활약했다. 1906년 폴 세잔을 발굴하면서 현대 프랑스 회화 유파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으며, 이들을 후기 인상주의라는 이름 아래 영국에 소개했다. 프라이는 프랑스 화가들 쇠라, 시냐크 등의 신인상주의자들과 구별하기 위해 후기 인상주의란 명칭을 만들어냈다. 당시 표현주의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나 그는 독일적 취향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기 인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913년 프라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겉치레의 ‘지나치게 꾸민’ 인공물 대신 매일 사용하는 잘 디자인된 물건들을 생산하기 위해 오메가 공방을 만들었다. 그의 목적은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하는 진보적인 예술가 그룹을 주변에 모이게 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 기호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프라이는 윈덤 루이스와의 개인적인 불화로 루이스 및 그의 동료들과 결별했고, 이들은 레벨 아트센터를 설립하여 보티시즘 운동을 발전시켰다. 후에 프라이는 런던 그룹이 캠던 타운 그룹에서 파생되었을 때 이 그룹에 가입했다. 화가로서 프라이는 블룸즈버리 그룹 사이에서 유행하던 일반적인 양식과 조화를 이루면서 꼼꼼하지만 평범한 자연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영국 화가, 소설가, 평론가 퍼시 윈덤 루이스Percy Wyndham Lewis(1882~1957)의 아버지는 미국인이고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을 조상으로 둔 영국인이다. 1898~1901년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뮌헨, 네덜란드, 스페인, 파리를 여행했고, 그 중 6개월 동안을 뮌헨의 하이만 아카데미에서 작업했다. 1909년 영국에 정착하여 1911년 캠던 타운 그룹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회부터 3회까지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1913년 7월 연합예술가협회 살롱에 출품했으며 같은 시기에 로저 프라이의 오메가 공방에 참여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 해 10월 프라이와 의견 충돌을 빚은 뒤 프레더릭 에철스Frederick Etchells(1886~1973), 에드워드 워즈워스Edward Wadsworth(1889~1949), 커스버트,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1922~)과 함께 오메가 공방을 떠났으며 스스로를 ‘반란자’라고 부르면서 마리네티를 숭배하는 네빈슨이 그를 기념하여 주최한 공적인 저녁 만찬에서 자신들이 미래주의의 선동자 마리네티를 지지한다고 밝힘으로써 반항심을 드러냈다. 이들의 분열이 프라이의 후기 인상주의 미학과 그들이 열정적으로 추구한 추상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반감을 나타낸 것이 분명하다.
1913년 12월~1914년 1월 퍼시 러터의 기획으로 브라이턴에서 여러 경향의 작품들이 출품된 ‘캠던 타운 그룹과 그 외의 예술가들’ 전시회는 모든 다른 양식과 그룹이 공통적인 기반을 찾아야 한다는 의도를 지닌 포괄적인 성격의 런던 그룹의 형성과 연결되었다. 루이스는 전시회에 포함된 입체주의 전시실의 도록에 도전적인 서문을 썼고 이 글은 런던 그룹 탄생의 기원이 되었다. 반란자 그룹은 ‘입체주의 전시실’이라는 분리된 장소에서 전시했으며 루이스는 그 전시회를 위해 미래주의와 블룸즈버리 그룹의 미학에 반대하는 새로운 운동의 탄생을 주장하는 글을 썼다. 이 전시회에서 데이비드 봄버그라는 젊고 명석한 화가가 그룹에 가담했다. 그들은 1914년 3월 공식적인 제1회 런던 그룹 전시회에 참여하여 정통적인 평론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 조각가 엡스타인과 저술가 에즈라 파운드, T. E. 흄이 그룹에 가담했다. 루이스는 이 그룹 전시회에 창립 회원으로 참가했으며 같은 시기에 레벨 아트센터를 설립했는데, 여기에서 보티시즘 운동이 시작되었다.
피혁업에 종사한 폴란드계 이민자의 아들 데이비드 봄버그David Bomberg(1890~1957)는 석판화가의 도제로 일하면서 시티 앤드 길즈 인스티튜트의 야간반에서 월터 베이스에게 배웠고 1911~13년에는 유태인 교육 자선회의 도움으로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봄버그는 루이스의 보티시즘 운동에 동조했으며 1914년 봄 화이트 채플 미술관이 기획한 ‘20세기 미술’ 전시회의 개최를 도왔고 자신도 그 전시회에 출품했다. 같은 해 런던 그룹을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봄버그는 1915년 보티시즘 전시회에 초대되어 작품을 전시했다.
미국계 영국 조각가 제이컴 엡스타인 경Sir Jacob Epstein(1880~1959)은 러시아 유태인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1년 낮에는 청동공장에서 일하면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야간 소묘 강좌를 수강한 후 조지 그레이 버너드의 조수로 일했다. 1902~05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와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공부했으며, 이 기간 동안 루브르 뮤지엄을 드나들며 고대 및 원시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관심은 엡스타인의 생애 내내 계속되었으며 작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엡스타인은 1905년 런던에 정착하고 2년 후 영국 시민이 되었다. 1912년 피카소, 브란쿠시, 모딜리아니를 만났으며 이는 향후 5년 동안 그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볼티모어 뮤지엄과 예일 대학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두 점의 <비너스>는 단순한 기하 형상을 취하고 있는데 윈덤 루이스와 그의 그룹이 주장한 기계문화 개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명하고 독특한 작품 <착암기>는 보티시즘 그룹이 표방하는 바에 더욱 근접했다. 1913년 영국으로 돌아와 ‘캠던 타운 그룹과 그 외의 예술가들’ 전시회의 ‘입체주의 전시실’에 출품했다. 1914년 런던 그룹 전시회에 그룹의 창립 회원으로 참가했으며, 화이트 채플 미술관에서 열린 ‘20세기 미술’ 전시회에도 출품했다. 그는 레벨 아트센터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잠시 보티시즘 예술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그는 1954년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1914년 3월 오메가 공방에 대항하여 레벨 아트센터가 그레이트 오먼드 가 38번지에 세워졌다. 제시카 디스모어Jessica Dismorr(1885~1939), 로렌스 앳킨스Lawrence Atkinson(1873~1931), 윌리엄 로버츠William Roberts(1895~1980), 프랑스 조각가 앙리 고디에-브제스카Henri Gaudier-Brzeska(1891~1915) 등이 반란자 그룹에 가담했다. 레벨 아트센터는 흄과 루이스 사이의 불화로 인해 곧 분열되었고, 그러는 동안 봄버그는 이런 상황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서 1914년 7월 셔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엡스타인도 이런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네빈슨의 지지를 받던 마리네티파가 무분별할 정도로 강하게 밀고나와 어느 정도 단결이 회복되었다. 1913년 6월 콜리세움에서 ‘위대한 미래주의 소음 음악회’가 열렸으며, 마리네티의 연극적인 태도는 이 음악회에서 절정에 달했고, 그는 그런 태도를 통해 미래주의가 런던에서 가장 최신의 유행이며 관심의 대상임을 증명했다. 그는 네빈슨과 함께 6월 7일 <옵서버> 지에 “생명이 넘치는 영국 미술의 진보적임 힘과 위대한 미래주의 화가들 및 선구자들의 천재성을 지지하고 보호하며 찬양할 것을 영국 대중에게” 요구하고 ‘반란자들’의 이름으로 서명한 미래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것은 모두의 비난을 받았다. 7월 2일 루이스 편집한 <블라스트 Blast> 창간호에 보티시즘의 선언문이 실렸다. 1914년 6월과 1915년 7월에 발행된 두 권의 편집을 루이스가 맡았다. <블라스트> 제2호는 이듬해에 간행되었으며, 1915년 6월 보티시즘 전시회가 도레 화랑에서 개최되었다. 1917년 1월 미국 소장가 존 퀸이 파운드의 권유로 보티시즘의 뉴욕 전시회를 기획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랑에 빠진 잭슨 폴록



잭슨 폴록은 자신도 모르게 루스에게 영웅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60년대와 70년대 초에 많은 소녀들이 비틀즈나 멍키즈, 비치 보이즈를 환호하며 반겼던 것과 비슷했다.
1956년 2월 어느 날 루스는 용기를 내어 직접 스프링스로 폴록을 찾았다.
“처음 그를 마주보았을 때 난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도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는 그녀의 주장과 달랐다.
그날 리와 폴록은 모두 술에 취해 있었고, 폴록이 루스에게 전화를 하마고 했지만 그녀는 일주일 이상을 기다려도 폴록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시다로 자주 전화를 걸었으며, 그녀가 폴록과 통화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폴록은 만취상태여서 전화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했고 루스라는 이름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루스는 그가 기억할 수 있도록 “검은 머리의 소녀이며 시다에서 만난 적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과격하고 고집이 황소 같았다고 한다.
폴록을 만난 지 두 달 후 어느 날 밤 그녀는 만취한 폴록을 16번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가서 성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폴록은 생각해보니 자신이 성관계를 가졌던 것 같았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게 쉬워졌다.
폴록이 그녀와 함께 시다에 나타났을 때 그 여자는 은빛 여우털 칼라가 달린 진홍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술에 약간 취해 있었다.

드 쿠닝은 “왜 하필이면 잭슨이냐?”며 못내 서운해 했다.
폴록은 드 쿠닝에게 “넌 여자친구가 있니?”라고 물으면서 “이 여자한테 손댈 생각은 아예 말아라!”고 경고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드 쿠닝이 두 사람을 따라가면서 “내가 다시 그 여자를 볼 수 있어? 다시 그 여자를 볼 수 있겠냐구?”라고 거듭 소리쳤다.

폴록은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스프링스에 있는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돌렸다.
폴록은 사진을 친구에게 보여주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폴록과의 관계를 “마론 브란도와 마릴린 먼로”의 관계처럼 생각했다.
사랑에 빠진 여느 사내들처럼 폴록도 전과 달리 아주 생기 있고 명랑했으며 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엘 치코 나이트클럽과 에디 콘돈 레스토랑에 갔고 브로드웨이 쇼를 관람했다.
그곳을 들어가고 나오는 자신들이“스타 같았다”고 루스는 적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 앞에서 절을 했고 … 우리는 키가 컸다”고도 했다.

폴록은 그녀를 택시로 모셨고 루스는 “이것이 여성들이 남자들로부터 받아야 할 대접이지”라고 말했다.
폴록은 그녀에게 선물도 사주었으며 그녀가 여배우로 착각할 수 있도록 드레스도 사주었다.
폴록에게는 그림을 판돈이 두둑히 있었으므로 그녀에게 아주 잘 썼다.
루스는 폴록에게 여행도 가고 파크 애비뉴에 아파트도 한 채 사자고 졸랐다.
폴록의 팔에 안겨 애인처럼 교태를 부리면서 두 사람만의 세계에 머물도록 했다.

어느 날 밤 폴록이 딴 여자와 춤을 추었는데 루스도 딴 남자와 춤을 추었다.
폴록이 그녀의 뺨을 때리자 그녀는 기절했다.
“잭슨은 리타 벤턴에 관해 많은 말을 했다. 잭슨은 내게 ‘너를 보면 그 여자가 생각난다’고 말했고, 나는 ‘그 여자는 늙었다’고 말했다”고 루스는 회상했다.

루스를 만났을 때 그녀는 처녀였다고 폴록은 주장했는데 그녀는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루스가 사람들이 많은 데서 “당신을 사랑해요, 잭슨”이라고 말하면 폴록 또한 “사랑해, 루스”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두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았다고 했다.
섹스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었는데 그녀는 “최고의 섹스는 비유적이다”라고 하면서 그 외의 것들은 환상을 감소시킨다고 단정했다.

그녀는 “난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받기를 바랐는데 잭슨과 함께 있게 되면 그러했다”고 말했다.
폴록은 매력적인 여자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폴록은 루스의 기대에 부응하여 노골적으로 그녀와 함께 다녔고 스프링스에서도 거의 매일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서 몇 시간씩 통화했는데 리에게는 여간 꼴불견이 아니었다.
폴록은 모든 것을 놀라운 사건으로 생각했다.
그의 꿈은 루스와 리 두 사람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린애 같았다.
폴록의 태도는 오히려 리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빈센트 반 고흐와 초상화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신의 귓불을 자르는 소동을 벌인 후 반 고흐는 생폴 드 모솔 요양원에 1년 동안 입원해야 했다. 그는 입원 중 네 차례의 발작을 일으켰다. 당시 요양원에는 서른 개의 병실이 비어 있었으므로 그 중 하나를 아틀리에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작업할 때 환자들이 괴성을 지르며 벽을 두드리고 발광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환자들의 계속되는 광적인 고함소리, 곰팡이 냄새, 보잘 것 없는 음식 등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환청과 환각증세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품 때문에 낙담하기도 했는데 “그림이 원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을 때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닥터 페이롱은 테오에게 보낸 1889년 5월 26일자 편지에서 반 고흐가 처음에는 고통스러운 악몽을 꾸고 몹시 성을 냈지만 이제 많이 나아졌다고 보고했으며, 페이롱은 6월 5일 반 고흐에게 요양원 바깥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했다.
반 고흐는 9월 초 테오에게 다른 환자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작업실에 들어앉아 있으며 다만 간병인들 가운데 책임자인 트라부만 정기적으로 만난다고 했다. 9월 3일자인 듯한 이 편지에서 트라부에 관해 언급했다. 트라부는 환갑에 가까운 나이였고 1896년 9월 25일 생레미에서 사망했다.
“어제 간병인 중 책임자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의 아내의 초상도 그리게 될지 모르는데 이들 부부는 요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작은 집에 살고 있다. 트라부의 얼굴은 아주 흥미 있게 생겼으며 ...”
반 고흐는 트라부의 얼굴을 르그로의 <스페인 최고 귀족>(고흐 552)에 비유했다. 그는 트라부가 콜레라가 빠르게 확산될 무렵 두 차례에 걸쳐 마르세유의 병원에 근무하면서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을 지켜봤기에 그의 얼굴에는 차분함이 있다고 적었다. 그는 트라부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귀조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는데, 귀조는 제임스 드롬골 린턴이 1872년에 그린 <프랑스의 두 베테랑 정치가: 티에르와 귀조>(고흐 553)에서의 키 작은 사람을 말한다. 그는 이런 얼굴은 평범한 사람의 대표적인 얼굴이라고 했다. 트라부의 초상은 자신의 얼굴과 비교된다면서 반 고흐는 그의 초상을 그리기 전날 <자화상>(고흐 554)을 그렸다.
반 고흐는 닷새 동안 트라부의 초상을 두 점 그렸는데 한 점은 트라부가 의자에 앉은 실제 모습을 그린 것으로 현존하지 않고 테오를 위해 복제한 것만 남아 있다. 빠르게 복제하면서 배경을 청록색과 핑크색으로 대충 칠했다. 그는 자화상을 그린 지 닷새 후 <트라부 부인의 초상>(고흐 555)도 그렸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부인의 모습도 의자에 앉은 실제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것 또한 현존하지 않고 복제한 것만 남아 있다.
트라부 부부의 초상화는 생레미에서 반 고흐가 성취한 수준 높은 작품이다. 환자들을 돌보는 트라부의 깡마른 얼굴을 묘사하면서 줄무늬 옷이 그의 성격을 나타낼 수 있도록 상징적 요소로 부각시켰다. 사실적 방법으로 묘사한 얼굴과 상징적 옷이 한데 어울려 트라부는 극중 인물처럼 나타났다.
후기 인상주의의 주요 인물로 세잔, 고갱, 반 고흐를 꼽을 수 있다. 이들 세 명은 인상주의에 대해 매우 다양하게 반응했는데, “인상주의를 미술관 속의 그림처럼 단단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한 세잔은 회화의 구조에 몰두했으며, 고갱은 “자연주의의 지독한 결점”을 버리고 색채와 선의 상징적 사용을 탐구했다. 반 고흐의 자유로운 감정의 폭발은 표현주의의 원천이 되었다. 후기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로저 프라이가 1910~11년 런던의 그래프턴 화랑에서 자신의 기획으로 열린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전’의 명칭으로 1880년경부터 1905년경 인상주의로부터 발전된 혹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발생한 다양한 회화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반 고흐가 1890년 7월 29일 자살로 37해의 생을 마감한 후 20년 동안 그의 영향은 프랑스 표현주의 혹은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매우 컸으며 특히 반 고흐의 초상화가 그들에게 표현을 위한 장르로 즐겨 사용되었다. 1905년 야수주의를 이끈 앙리 마티스가 그린 <마티스 부인의 초상>(고흐 913)은 반 고흐의 표현적인 채색의 영향이었고, 물감을 짧게 끊어서 사용한 것 외에도 색을 표현의 언어로 사용한 것 또한 반 고흐의 영향이었다. 마티스는 이런 표현적인 색의 언어를 풍경화에도 적용했다. 색이 좀더 밝아진 것은 마티스의 개성에 의한 것이지만 색의 문법은 반 고흐의 것을 그대로 따른 결과이다. 마티스의 밝은 색 사용은 그를 따른 젊은 화가들에 의해서 확산되었으며 앙드레 드랭과 모리스 블라맹크도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색을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두 사람이 그린 상대방의 초상과 자화상에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고흐 914, 915, 916)
반 고흐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1905년 파리에서 개최된 반 고흐의 회고전을 통해서였다. 45점의 유화와 드로잉이 함께 소개된 이 회고전은 파리의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의 계기가 되었다. 회고전을 보고 충격을 받은 블라맹크는 “난 반 고흐를 나의 아버지보다 더 사랑한다”고 했다. 마티스는 베른하임 화랑에서 반 고흐의 작품을 보았는데 그곳에서 블라맹크와 드랭을 만났다. 세 사람 모두 반 고흐를 자신들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마티스는 새로운 회화가 들라크루아로부터 반 고흐와 고갱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폴 세잔이 최종적으로 볼륨 있는 색을 선보였다면서, 이들로부터 색을 감성적 힘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반 고흐의 영향은 독일 화가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896년 독일 뮌헨으로 이주해온 러시아 화가 알렉세이 야블렌스키는 파리의 회화 경향에 정통했으며 프랑스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반 고흐의 강렬한 감성을 나타내는 색의 사용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1905년에 그린 <곱추>(고흐 917)에서 반 고흐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반 고흐를 자신의 선구자로 삼고 다리 그룹을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독일 표현주의를 표방한 독일 화가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에리히 헥켈, 칼 슈미트-로틀루프였다. 세 사람 모두의 <자화상>은 반 고흐의 영향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고흐 918, 919, 920) 가브리엘 뮌터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함께 조금 늦게 새로운 미술운동 청기사 그룹에 속했으며 그녀도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고흐 921) 20세기 표현주의는 공교롭게도 같은 해인 1905년 마티스를 중심으로 야수주의 화가들과 키르히너를 중심으로 한 다리 그룹 화가들에 의해 프랑스와 독일에서 동시에 미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표현주의는 양식이 아니라 미술운동이었다.
1912년 드레스덴과 뮌헨에서 반 고흐의 작품 125점이 소개된 후 그의 영향은 독일 화가들에게 매우 크게 작용했다. 야블렌스키가 1912년에 그린 <자화상>(고흐 922)에서는 독일의 어느 화가보다도 반 고흐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때 받은 영향이 야블렌스키로 하여금 향후 표현주의 화가가 되게 했다. 반 고흐의 영향은 북유럽 화가들에게 크게 작용했으며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도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평생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는 1907년에 <자화상>(고흐 923)을 그렸는데 반 고흐의 자화상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그리면서 자신 특유의 각이 진 입체주의 방법을 혼용했다. 피카소는 영화에서 클로즈업하듯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서 조명한 것처럼 묘사하면서 반 고흐와 마찬가지로 단번에 그렸다.
1913년 리투아니아에서 파리로 온 러시아 화가 샤임 수틴은 반 고흐, 아프리카 조각, 세잔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초상화에서 반 고흐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그의 <모이세 키슬링의 초상>(고흐 925)은 반 고흐의 <요제프 룰랭의 초상>(고흐 343)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파리 보헤미아 화가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수틴은 야수주의와는 별도로 밝은 색을 사용하는 표현주의 회화를 추구했으며 색을 거의 추상적으로 사용했지만, 붓질을 짧게 그리고 거칠게 사용하는 것은 반 고흐의 영향이었다. 이후 수틴이 그린 초상화에서 감동을 주는 표현적인 색채는 반 고흐의 영향을 나름대로 추상적인 색으로 진전시킨 것이다.
클림트, 쉴레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오스카 코코슈카도 일찍이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현대인의 정신분열을 모티프로 즐겨 삼은 코코슈카에게 반 고흐의 강렬한 색채의 사용은 관심 밖일 수 없었다. 그가 1907년에 그린 <늙은 히르시그>(고흐 926)는 그가 아직 색을 거칠게 사용하기 전의 작품으로 조심스럽게 반 고흐의 채색법을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반 고흐의 다양한 색의 효과를 응용하여 자신의 모티프를 강렬한 이미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바우하우스와 칸딘스키



발터 그로피우스(뒤샹 235)가 1919년 바이마르에 세운 미술과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는 그로피우스가 ‘집을 짓다’란 의미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시켜 바우하우스란 말로 만든 것으로 이 학교를 국립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라고 명명했다. 베를린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그로피우스는 1907년 페터 베렌스의 건축설계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부소장이 되었다.
그는 1918년에 작센 대공의 공예학교와 바이마르 조형예술대학을 통합하여 바우하우스를 설립하고 처음에는 바이마르에서, 1925~28년에는 데사우에서 교장으로 재직했다. 1924년 지방선거에서 우익집단이 세력을 장악하면서 지원금이 끊어지자 1925년 그로피우스가 디자인한 데사우의 새로운 건물로 이전했다.(뒤샹 233) 그때부터 바우하우스는 디자인 대학이 되었고 교사들은 교수로 불렸다. 그로피우스의 창립 선언에 의하면 바우하우스의 목적은 건축을 구심점으로 모든 예술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즉 윌리엄 모리스가 주창한 대로 모든 예술은 공예처럼 실용적이어야만 하고, 건축물과 그 내부의 모든 것을 통칭하는 게잠트쿤스트베르크Gesamtkunstwerk, 즉 총체예술작품에 기여해야만 한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그는 1923년에 하우하우스의 중심 이론이 된 산업적 대량생산에 있어서 장인-미술가-디자이너의 중요성에 대한 개념을 추가하여 바우하우스의 작업실을 기계로 생산되는 제품의 기본 디자인을 개발하는 연구소로 만들었다. 바우하우스만의 독특한 양식은 특정한 개인의 감정을 배제하며 기능적이다. 또한 사용될 용도에 적당한지 여부에 엄격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재료의 속성을 깊이 연구하여 선과 형태를 정밀하게 다듬었다. 바우하우스는 1932년에 베를린으로 이전했고 이듬해에 나치에 의해 폐교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음에도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였으며 디자인과 산업기술 사이의 관계를 확립하고,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차별한 이전의 위계질서를 붕괴시키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로피우스는 뛰어난 교사들을 바우하우스로 불러모았다. 최초의 기초과정 책임자는 요하네스 이텐이었고, 1923년 그가 떠나자 라슬로 모흘리-나기가 그 뒤를 이어 그로피우스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모흘리-나기는 이텐의 형이상학적 접근을 엄격하게 이성적인 방법으로 바꾸었다. 포름마이스터로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를 비롯하여 몇몇의 유명한 화가들이 참여했다. 그로피우스가 1928년 개인적인 작업에 매진하기 위해 갑자기 퇴직하면서 하네스 마이어를 교장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많은 불평과 비난이 나타났는데 마르크스주의자인 마이어가 사회주의를 도입하고 정치학을 중요한 교과과정으로 택하여 학교의 전체 경향을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모흘리-나기가 즉시 사임했다. 마이어는 바우하우스가 “사치품 대신 일용품”을 공급하기를 원했고, 대량생산품을 생산하는 공방을 장려했다. 마이어는 이런 접근법으로 상당한 지원금을 벌어들였지만 선전이 지배하는 미학 개념을 거부하던 대부분의 교수진은 매우 실망했다. 1930년 마이어는 사임할 수밖에 없었으며, 20세기 가장 위대한 건축가 중 한 명인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새로운 교장에 취임했다.
미스의 주요 과제는 바우하우스를 정치적인 제휴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 나치당이 독일 전역에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던 상황에서 우익의 반대자들은 쉽사리 바우하우스를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학교에는 적극적인 좌익 학생들이 상당수 있었고, 그들의 소란스러운 집회는 거의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미스는 제적방침을 세워두고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했지만, 1932년 데사우 의회는 학교를 폐쇄했다. 미스는 베를린의 사용되지 않는 공장을 임대하여 사설교육기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으나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인 1933년 4월 바우하우스는 나치에 의해 폐쇄되었다.
청기사 그룹의 예술가들에게 미학과 미술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키고 그들의 과격한 조형주의 창작을 북돋은 바실리 칸딘스키는 1866년 12월 4일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86년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 경제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1892년에 사촌 안자 치미아킨을 아내로 맞았으며, 1893년 모교 법대에서 강사로 재직했다. 칸딘스키는 실력 있는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는 1895년에 모스크바에 있는 인쇄공장의 예술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마담 블라바스키의 신지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신지학은 오늘날 병든 이성주의로 인식되지만 당시에는 지성적인 분야로 알려졌다.
그의 인생에 변화가 생긴 것은 1895년이었다. 그해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전을 관람하고 크게 영향을 받아 1896년 에스토니아의 도르파르트 대학에서 제의한 강사직을 거절하고 이듬해 회화를 배우기 위해 뮌헨으로 갔다. 그는 인상주의전에서 모네의 <건초더미>(모네 406, 407) 시리즈에 매료되었다. 칸딘스키는 훗날 말했다. “난 모네의 <건초더미>에 대한 인상을 끝내 지울 수 없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처음으로 사물이 그림에 필요한 요소인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그가 뮌헨으로 갔을 때는 서른 살이었다. 그는 안톤 아츠베와 후에 뮌헨 아카데미의 교수이자 뮌헨 분리파의 창립회원이 되는 프란츠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았다. 이 시기 뮌헨의 중요한 아방가르드 미술은 아르 누보, 즉 독일어로는 유겐트슈틸Jugendstil이었고, 이 양식에 정통한 칸딘스키는 1901년 팔랑크스라는 아방가르드 전시협회를 창립했다. 그가 파울 클레를 만난 것은 1900년 슈투크의 화실에서 수학할 때였으며 그후 평생 우정을 나눴다. 칸딘스키는 직관에 의존하여 추상화를 추구하면서 색질을 강조했고, 상징주의와 야수주의 예술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색의 서정시적 내용과 유연한 선을 최대한으로 이용했으며, 그림에 긴장감을 창조하면서 그림이 “사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분위기의 판화적인 재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뒤샹 70, 234)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예술가들로 세잔, 마티스, 피카소를 꼽았다.
칸딘스키는 1910년과 1914년 사이 추상에 몰두했다. 밝은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제목을 <구성>, <즉흥>, <서정> 등으로 붙이면서 음악에서 제목을 구했다. 그는 1910년에 <추상 수채화>를 그렸는데 완전추상이었다. 회화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사물을 전혀 모방하지 않은 그림을 그렸으며 이는 어느 누구도 과거에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추상이란 개념은 사물을 덜 모방하면서부터 생긴 개념이었고, 그가 처음으로 사물의 묘사를 완전히 그림에서 배제했다. 1910년에 그가 체험한 것을 직접 청취함으로써 추상에 대한 그의 이해를 구할 수 있다.
“난 그림 그리기를 마치고 깊은 생각에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와 화실 문을 열었다. 그때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아름다운 작품 한 폭이 시야를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선 채로 불꽃이 작품에서 튀는 것을 보았다. 그 작품은 모든 주제를 상실했으며, 아예 사물도 알아볼 수 없고, 온전히 밝은 색덩어리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좀더 가까이서 그것을 보려고 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이젤 위에 세워둔 나의 작품이었다. 한 가지 내게 분명해진 것은 사물의 형상은 내 작품에서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으며 오히려 작품을 망친다는 것이다.”
칸딘스키가 말한 작품은 뮌헨 근교에서 그린 풍경화 중 하나였다. 그가 유채로 그린 <즉흥>은 1913~14년에 완성되었는데, 자연을 추상한 나머지 형상을 완전히 말소시킨 것이며, 오로지 선과 색으로만 그린 것으로 신지학의 유토피아 미학의 영향이 농후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서 추방되었다가 1921년 12월에 독일로 돌아왔다. 이듬해 발터 그로피우스의 초빙으로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교수가 되었다. 그와 클레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