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티시즘



보티시즘이란 명칭은 1913년 말 에즈라 파운드가 혁신적인 이론들의 혼란 속에서 모든 긍정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새로운 종합으로 끌어내고 결집시키는, 소용돌이치는 회오리 같은 힘의 개념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는 또한 모든 예술적 창조는 감정적인 돌풍의 상태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미래주의자 보초니의 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명칭에 의해 암시되는 시각적 이미지는 거칠고 각지며 사선을 향하는 새로운 작업의 양식과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혼란스럽고 불화가 잦으며 과장된 보티시즘Vorticism의 근원은 미술 운동의 출현에 있어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며 다다,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보티시즘의 본래 목표는 미래주의의 역동적 스피드와 입체주의의 정적인 기념비적 특성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프랑스 예술가들이 선호한 실내의 작업실 모티프를 단호히 거부하고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열정적으로 묘사한 기계 이미지를 매우 냉정하고 고전적 방식으로 다루어 독창적인 종합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보티시즘 초기에 혼란스럽게 대립되는 경향 하에서도 유지되었던 일관성과 지침은 더 이상 발전해나가지 못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 운동은 사실상 소멸되었으며, 그것을 되살리려던 이질적인 모임인 그룹 X의 시도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보티시즘의 중요성은 나중에 가서야 드러났다. 1974년 리처드 코크는 적었다. “지금에서야 보티시즘이 1930년대 영국의 두 번째 추상 운동을 자극한 선례라고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감탄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자기만족에 빠져 있고 침체된 섬나라의 진취적이지 못한 성향을 비난한 사도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보티시즘Vorticism은 격렬하고 격정적인 ‘반란자 rebel’ 그룹이 주창한 이념에 붙여진 명칭으로 이 그룹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 미술에서 최초로 추상을 지향하는 조직적인 운동이 되기를 열망했다. 이 운동은 로저 프라이의 오메가 공방에 속한 예술가들 사시의 불화로 시작된 것으로 프라이와 윈덤 루이스의 개인적인 다툼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런던 태생으로 화가이며 평론가 로저 엘리엇 프라이Roger Eliot Fry(1866~1934)는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서 이학 학위를 받은 뒤 1891년 이탈리아, 이듬해에는 파리의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프라이의 비평은 당시의 기호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면서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1901년 <디 애시니엄 The Athenaeum> 지의 평론가였고, 1905~10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관장을 역임했으며, 1910~19년 <벌링턴 매거진> 편집자로 활약했다. 1906년 폴 세잔을 발굴하면서 현대 프랑스 회화 유파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으며, 이들을 후기 인상주의라는 이름 아래 영국에 소개했다. 프라이는 프랑스 화가들 쇠라, 시냐크 등의 신인상주의자들과 구별하기 위해 후기 인상주의란 명칭을 만들어냈다. 당시 표현주의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나 그는 독일적 취향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기 인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913년 프라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겉치레의 ‘지나치게 꾸민’ 인공물 대신 매일 사용하는 잘 디자인된 물건들을 생산하기 위해 오메가 공방을 만들었다. 그의 목적은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하는 진보적인 예술가 그룹을 주변에 모이게 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 기호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프라이는 윈덤 루이스와의 개인적인 불화로 루이스 및 그의 동료들과 결별했고, 이들은 레벨 아트센터를 설립하여 보티시즘 운동을 발전시켰다. 후에 프라이는 런던 그룹이 캠던 타운 그룹에서 파생되었을 때 이 그룹에 가입했다. 화가로서 프라이는 블룸즈버리 그룹 사이에서 유행하던 일반적인 양식과 조화를 이루면서 꼼꼼하지만 평범한 자연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영국 화가, 소설가, 평론가 퍼시 윈덤 루이스Percy Wyndham Lewis(1882~1957)의 아버지는 미국인이고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을 조상으로 둔 영국인이다. 1898~1901년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뮌헨, 네덜란드, 스페인, 파리를 여행했고, 그 중 6개월 동안을 뮌헨의 하이만 아카데미에서 작업했다. 1909년 영국에 정착하여 1911년 캠던 타운 그룹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회부터 3회까지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1913년 7월 연합예술가협회 살롱에 출품했으며 같은 시기에 로저 프라이의 오메가 공방에 참여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 해 10월 프라이와 의견 충돌을 빚은 뒤 프레더릭 에철스Frederick Etchells(1886~1973), 에드워드 워즈워스Edward Wadsworth(1889~1949), 커스버트,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1922~)과 함께 오메가 공방을 떠났으며 스스로를 ‘반란자’라고 부르면서 마리네티를 숭배하는 네빈슨이 그를 기념하여 주최한 공적인 저녁 만찬에서 자신들이 미래주의의 선동자 마리네티를 지지한다고 밝힘으로써 반항심을 드러냈다. 이들의 분열이 프라이의 후기 인상주의 미학과 그들이 열정적으로 추구한 추상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반감을 나타낸 것이 분명하다.
1913년 12월~1914년 1월 퍼시 러터의 기획으로 브라이턴에서 여러 경향의 작품들이 출품된 ‘캠던 타운 그룹과 그 외의 예술가들’ 전시회는 모든 다른 양식과 그룹이 공통적인 기반을 찾아야 한다는 의도를 지닌 포괄적인 성격의 런던 그룹의 형성과 연결되었다. 루이스는 전시회에 포함된 입체주의 전시실의 도록에 도전적인 서문을 썼고 이 글은 런던 그룹 탄생의 기원이 되었다. 반란자 그룹은 ‘입체주의 전시실’이라는 분리된 장소에서 전시했으며 루이스는 그 전시회를 위해 미래주의와 블룸즈버리 그룹의 미학에 반대하는 새로운 운동의 탄생을 주장하는 글을 썼다. 이 전시회에서 데이비드 봄버그라는 젊고 명석한 화가가 그룹에 가담했다. 그들은 1914년 3월 공식적인 제1회 런던 그룹 전시회에 참여하여 정통적인 평론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 조각가 엡스타인과 저술가 에즈라 파운드, T. E. 흄이 그룹에 가담했다. 루이스는 이 그룹 전시회에 창립 회원으로 참가했으며 같은 시기에 레벨 아트센터를 설립했는데, 여기에서 보티시즘 운동이 시작되었다.
피혁업에 종사한 폴란드계 이민자의 아들 데이비드 봄버그David Bomberg(1890~1957)는 석판화가의 도제로 일하면서 시티 앤드 길즈 인스티튜트의 야간반에서 월터 베이스에게 배웠고 1911~13년에는 유태인 교육 자선회의 도움으로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봄버그는 루이스의 보티시즘 운동에 동조했으며 1914년 봄 화이트 채플 미술관이 기획한 ‘20세기 미술’ 전시회의 개최를 도왔고 자신도 그 전시회에 출품했다. 같은 해 런던 그룹을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봄버그는 1915년 보티시즘 전시회에 초대되어 작품을 전시했다.
미국계 영국 조각가 제이컴 엡스타인 경Sir Jacob Epstein(1880~1959)은 러시아 유태인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1년 낮에는 청동공장에서 일하면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야간 소묘 강좌를 수강한 후 조지 그레이 버너드의 조수로 일했다. 1902~05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와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공부했으며, 이 기간 동안 루브르 뮤지엄을 드나들며 고대 및 원시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관심은 엡스타인의 생애 내내 계속되었으며 작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엡스타인은 1905년 런던에 정착하고 2년 후 영국 시민이 되었다. 1912년 피카소, 브란쿠시, 모딜리아니를 만났으며 이는 향후 5년 동안 그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볼티모어 뮤지엄과 예일 대학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두 점의 <비너스>는 단순한 기하 형상을 취하고 있는데 윈덤 루이스와 그의 그룹이 주장한 기계문화 개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명하고 독특한 작품 <착암기>는 보티시즘 그룹이 표방하는 바에 더욱 근접했다. 1913년 영국으로 돌아와 ‘캠던 타운 그룹과 그 외의 예술가들’ 전시회의 ‘입체주의 전시실’에 출품했다. 1914년 런던 그룹 전시회에 그룹의 창립 회원으로 참가했으며, 화이트 채플 미술관에서 열린 ‘20세기 미술’ 전시회에도 출품했다. 그는 레벨 아트센터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잠시 보티시즘 예술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그는 1954년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1914년 3월 오메가 공방에 대항하여 레벨 아트센터가 그레이트 오먼드 가 38번지에 세워졌다. 제시카 디스모어Jessica Dismorr(1885~1939), 로렌스 앳킨스Lawrence Atkinson(1873~1931), 윌리엄 로버츠William Roberts(1895~1980), 프랑스 조각가 앙리 고디에-브제스카Henri Gaudier-Brzeska(1891~1915) 등이 반란자 그룹에 가담했다. 레벨 아트센터는 흄과 루이스 사이의 불화로 인해 곧 분열되었고, 그러는 동안 봄버그는 이런 상황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서 1914년 7월 셔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엡스타인도 이런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네빈슨의 지지를 받던 마리네티파가 무분별할 정도로 강하게 밀고나와 어느 정도 단결이 회복되었다. 1913년 6월 콜리세움에서 ‘위대한 미래주의 소음 음악회’가 열렸으며, 마리네티의 연극적인 태도는 이 음악회에서 절정에 달했고, 그는 그런 태도를 통해 미래주의가 런던에서 가장 최신의 유행이며 관심의 대상임을 증명했다. 그는 네빈슨과 함께 6월 7일 <옵서버> 지에 “생명이 넘치는 영국 미술의 진보적임 힘과 위대한 미래주의 화가들 및 선구자들의 천재성을 지지하고 보호하며 찬양할 것을 영국 대중에게” 요구하고 ‘반란자들’의 이름으로 서명한 미래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것은 모두의 비난을 받았다. 7월 2일 루이스 편집한 <블라스트 Blast> 창간호에 보티시즘의 선언문이 실렸다. 1914년 6월과 1915년 7월에 발행된 두 권의 편집을 루이스가 맡았다. <블라스트> 제2호는 이듬해에 간행되었으며, 1915년 6월 보티시즘 전시회가 도레 화랑에서 개최되었다. 1917년 1월 미국 소장가 존 퀸이 파운드의 권유로 보티시즘의 뉴욕 전시회를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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