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와 초상화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신의 귓불을 자르는 소동을 벌인 후 반 고흐는 생폴 드 모솔 요양원에 1년 동안 입원해야 했다. 그는 입원 중 네 차례의 발작을 일으켰다. 당시 요양원에는 서른 개의 병실이 비어 있었으므로 그 중 하나를 아틀리에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작업할 때 환자들이 괴성을 지르며 벽을 두드리고 발광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환자들의 계속되는 광적인 고함소리, 곰팡이 냄새, 보잘 것 없는 음식 등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환청과 환각증세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품 때문에 낙담하기도 했는데 “그림이 원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을 때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닥터 페이롱은 테오에게 보낸 1889년 5월 26일자 편지에서 반 고흐가 처음에는 고통스러운 악몽을 꾸고 몹시 성을 냈지만 이제 많이 나아졌다고 보고했으며, 페이롱은 6월 5일 반 고흐에게 요양원 바깥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했다.
반 고흐는 9월 초 테오에게 다른 환자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작업실에 들어앉아 있으며 다만 간병인들 가운데 책임자인 트라부만 정기적으로 만난다고 했다. 9월 3일자인 듯한 이 편지에서 트라부에 관해 언급했다. 트라부는 환갑에 가까운 나이였고 1896년 9월 25일 생레미에서 사망했다.
“어제 간병인 중 책임자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의 아내의 초상도 그리게 될지 모르는데 이들 부부는 요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작은 집에 살고 있다. 트라부의 얼굴은 아주 흥미 있게 생겼으며 ...”
반 고흐는 트라부의 얼굴을 르그로의 <스페인 최고 귀족>(고흐 552)에 비유했다. 그는 트라부가 콜레라가 빠르게 확산될 무렵 두 차례에 걸쳐 마르세유의 병원에 근무하면서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을 지켜봤기에 그의 얼굴에는 차분함이 있다고 적었다. 그는 트라부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귀조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는데, 귀조는 제임스 드롬골 린턴이 1872년에 그린 <프랑스의 두 베테랑 정치가: 티에르와 귀조>(고흐 553)에서의 키 작은 사람을 말한다. 그는 이런 얼굴은 평범한 사람의 대표적인 얼굴이라고 했다. 트라부의 초상은 자신의 얼굴과 비교된다면서 반 고흐는 그의 초상을 그리기 전날 <자화상>(고흐 554)을 그렸다.
반 고흐는 닷새 동안 트라부의 초상을 두 점 그렸는데 한 점은 트라부가 의자에 앉은 실제 모습을 그린 것으로 현존하지 않고 테오를 위해 복제한 것만 남아 있다. 빠르게 복제하면서 배경을 청록색과 핑크색으로 대충 칠했다. 그는 자화상을 그린 지 닷새 후 <트라부 부인의 초상>(고흐 555)도 그렸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부인의 모습도 의자에 앉은 실제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것 또한 현존하지 않고 복제한 것만 남아 있다.
트라부 부부의 초상화는 생레미에서 반 고흐가 성취한 수준 높은 작품이다. 환자들을 돌보는 트라부의 깡마른 얼굴을 묘사하면서 줄무늬 옷이 그의 성격을 나타낼 수 있도록 상징적 요소로 부각시켰다. 사실적 방법으로 묘사한 얼굴과 상징적 옷이 한데 어울려 트라부는 극중 인물처럼 나타났다.
후기 인상주의의 주요 인물로 세잔, 고갱, 반 고흐를 꼽을 수 있다. 이들 세 명은 인상주의에 대해 매우 다양하게 반응했는데, “인상주의를 미술관 속의 그림처럼 단단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한 세잔은 회화의 구조에 몰두했으며, 고갱은 “자연주의의 지독한 결점”을 버리고 색채와 선의 상징적 사용을 탐구했다. 반 고흐의 자유로운 감정의 폭발은 표현주의의 원천이 되었다. 후기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로저 프라이가 1910~11년 런던의 그래프턴 화랑에서 자신의 기획으로 열린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전’의 명칭으로 1880년경부터 1905년경 인상주의로부터 발전된 혹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발생한 다양한 회화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반 고흐가 1890년 7월 29일 자살로 37해의 생을 마감한 후 20년 동안 그의 영향은 프랑스 표현주의 혹은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매우 컸으며 특히 반 고흐의 초상화가 그들에게 표현을 위한 장르로 즐겨 사용되었다. 1905년 야수주의를 이끈 앙리 마티스가 그린 <마티스 부인의 초상>(고흐 913)은 반 고흐의 표현적인 채색의 영향이었고, 물감을 짧게 끊어서 사용한 것 외에도 색을 표현의 언어로 사용한 것 또한 반 고흐의 영향이었다. 마티스는 이런 표현적인 색의 언어를 풍경화에도 적용했다. 색이 좀더 밝아진 것은 마티스의 개성에 의한 것이지만 색의 문법은 반 고흐의 것을 그대로 따른 결과이다. 마티스의 밝은 색 사용은 그를 따른 젊은 화가들에 의해서 확산되었으며 앙드레 드랭과 모리스 블라맹크도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색을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두 사람이 그린 상대방의 초상과 자화상에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고흐 914, 915, 916)
반 고흐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1905년 파리에서 개최된 반 고흐의 회고전을 통해서였다. 45점의 유화와 드로잉이 함께 소개된 이 회고전은 파리의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의 계기가 되었다. 회고전을 보고 충격을 받은 블라맹크는 “난 반 고흐를 나의 아버지보다 더 사랑한다”고 했다. 마티스는 베른하임 화랑에서 반 고흐의 작품을 보았는데 그곳에서 블라맹크와 드랭을 만났다. 세 사람 모두 반 고흐를 자신들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마티스는 새로운 회화가 들라크루아로부터 반 고흐와 고갱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폴 세잔이 최종적으로 볼륨 있는 색을 선보였다면서, 이들로부터 색을 감성적 힘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반 고흐의 영향은 독일 화가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896년 독일 뮌헨으로 이주해온 러시아 화가 알렉세이 야블렌스키는 파리의 회화 경향에 정통했으며 프랑스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반 고흐의 강렬한 감성을 나타내는 색의 사용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1905년에 그린 <곱추>(고흐 917)에서 반 고흐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반 고흐를 자신의 선구자로 삼고 다리 그룹을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독일 표현주의를 표방한 독일 화가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에리히 헥켈, 칼 슈미트-로틀루프였다. 세 사람 모두의 <자화상>은 반 고흐의 영향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고흐 918, 919, 920) 가브리엘 뮌터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함께 조금 늦게 새로운 미술운동 청기사 그룹에 속했으며 그녀도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고흐 921) 20세기 표현주의는 공교롭게도 같은 해인 1905년 마티스를 중심으로 야수주의 화가들과 키르히너를 중심으로 한 다리 그룹 화가들에 의해 프랑스와 독일에서 동시에 미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표현주의는 양식이 아니라 미술운동이었다.
1912년 드레스덴과 뮌헨에서 반 고흐의 작품 125점이 소개된 후 그의 영향은 독일 화가들에게 매우 크게 작용했다. 야블렌스키가 1912년에 그린 <자화상>(고흐 922)에서는 독일의 어느 화가보다도 반 고흐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때 받은 영향이 야블렌스키로 하여금 향후 표현주의 화가가 되게 했다. 반 고흐의 영향은 북유럽 화가들에게 크게 작용했으며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도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평생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는 1907년에 <자화상>(고흐 923)을 그렸는데 반 고흐의 자화상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그리면서 자신 특유의 각이 진 입체주의 방법을 혼용했다. 피카소는 영화에서 클로즈업하듯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서 조명한 것처럼 묘사하면서 반 고흐와 마찬가지로 단번에 그렸다.
1913년 리투아니아에서 파리로 온 러시아 화가 샤임 수틴은 반 고흐, 아프리카 조각, 세잔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초상화에서 반 고흐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그의 <모이세 키슬링의 초상>(고흐 925)은 반 고흐의 <요제프 룰랭의 초상>(고흐 343)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파리 보헤미아 화가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수틴은 야수주의와는 별도로 밝은 색을 사용하는 표현주의 회화를 추구했으며 색을 거의 추상적으로 사용했지만, 붓질을 짧게 그리고 거칠게 사용하는 것은 반 고흐의 영향이었다. 이후 수틴이 그린 초상화에서 감동을 주는 표현적인 색채는 반 고흐의 영향을 나름대로 추상적인 색으로 진전시킨 것이다.
클림트, 쉴레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오스카 코코슈카도 일찍이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현대인의 정신분열을 모티프로 즐겨 삼은 코코슈카에게 반 고흐의 강렬한 색채의 사용은 관심 밖일 수 없었다. 그가 1907년에 그린 <늙은 히르시그>(고흐 926)는 그가 아직 색을 거칠게 사용하기 전의 작품으로 조심스럽게 반 고흐의 채색법을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반 고흐의 다양한 색의 효과를 응용하여 자신의 모티프를 강렬한 이미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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