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하우스와 칸딘스키



발터 그로피우스(뒤샹 235)가 1919년 바이마르에 세운 미술과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는 그로피우스가 ‘집을 짓다’란 의미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시켜 바우하우스란 말로 만든 것으로 이 학교를 국립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라고 명명했다. 베를린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그로피우스는 1907년 페터 베렌스의 건축설계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부소장이 되었다.
그는 1918년에 작센 대공의 공예학교와 바이마르 조형예술대학을 통합하여 바우하우스를 설립하고 처음에는 바이마르에서, 1925~28년에는 데사우에서 교장으로 재직했다. 1924년 지방선거에서 우익집단이 세력을 장악하면서 지원금이 끊어지자 1925년 그로피우스가 디자인한 데사우의 새로운 건물로 이전했다.(뒤샹 233) 그때부터 바우하우스는 디자인 대학이 되었고 교사들은 교수로 불렸다. 그로피우스의 창립 선언에 의하면 바우하우스의 목적은 건축을 구심점으로 모든 예술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즉 윌리엄 모리스가 주창한 대로 모든 예술은 공예처럼 실용적이어야만 하고, 건축물과 그 내부의 모든 것을 통칭하는 게잠트쿤스트베르크Gesamtkunstwerk, 즉 총체예술작품에 기여해야만 한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그는 1923년에 하우하우스의 중심 이론이 된 산업적 대량생산에 있어서 장인-미술가-디자이너의 중요성에 대한 개념을 추가하여 바우하우스의 작업실을 기계로 생산되는 제품의 기본 디자인을 개발하는 연구소로 만들었다. 바우하우스만의 독특한 양식은 특정한 개인의 감정을 배제하며 기능적이다. 또한 사용될 용도에 적당한지 여부에 엄격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재료의 속성을 깊이 연구하여 선과 형태를 정밀하게 다듬었다. 바우하우스는 1932년에 베를린으로 이전했고 이듬해에 나치에 의해 폐교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음에도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였으며 디자인과 산업기술 사이의 관계를 확립하고,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차별한 이전의 위계질서를 붕괴시키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로피우스는 뛰어난 교사들을 바우하우스로 불러모았다. 최초의 기초과정 책임자는 요하네스 이텐이었고, 1923년 그가 떠나자 라슬로 모흘리-나기가 그 뒤를 이어 그로피우스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모흘리-나기는 이텐의 형이상학적 접근을 엄격하게 이성적인 방법으로 바꾸었다. 포름마이스터로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를 비롯하여 몇몇의 유명한 화가들이 참여했다. 그로피우스가 1928년 개인적인 작업에 매진하기 위해 갑자기 퇴직하면서 하네스 마이어를 교장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많은 불평과 비난이 나타났는데 마르크스주의자인 마이어가 사회주의를 도입하고 정치학을 중요한 교과과정으로 택하여 학교의 전체 경향을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모흘리-나기가 즉시 사임했다. 마이어는 바우하우스가 “사치품 대신 일용품”을 공급하기를 원했고, 대량생산품을 생산하는 공방을 장려했다. 마이어는 이런 접근법으로 상당한 지원금을 벌어들였지만 선전이 지배하는 미학 개념을 거부하던 대부분의 교수진은 매우 실망했다. 1930년 마이어는 사임할 수밖에 없었으며, 20세기 가장 위대한 건축가 중 한 명인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새로운 교장에 취임했다.
미스의 주요 과제는 바우하우스를 정치적인 제휴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 나치당이 독일 전역에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던 상황에서 우익의 반대자들은 쉽사리 바우하우스를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학교에는 적극적인 좌익 학생들이 상당수 있었고, 그들의 소란스러운 집회는 거의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미스는 제적방침을 세워두고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했지만, 1932년 데사우 의회는 학교를 폐쇄했다. 미스는 베를린의 사용되지 않는 공장을 임대하여 사설교육기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으나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인 1933년 4월 바우하우스는 나치에 의해 폐쇄되었다.
청기사 그룹의 예술가들에게 미학과 미술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키고 그들의 과격한 조형주의 창작을 북돋은 바실리 칸딘스키는 1866년 12월 4일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86년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 경제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1892년에 사촌 안자 치미아킨을 아내로 맞았으며, 1893년 모교 법대에서 강사로 재직했다. 칸딘스키는 실력 있는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는 1895년에 모스크바에 있는 인쇄공장의 예술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마담 블라바스키의 신지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신지학은 오늘날 병든 이성주의로 인식되지만 당시에는 지성적인 분야로 알려졌다.
그의 인생에 변화가 생긴 것은 1895년이었다. 그해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전을 관람하고 크게 영향을 받아 1896년 에스토니아의 도르파르트 대학에서 제의한 강사직을 거절하고 이듬해 회화를 배우기 위해 뮌헨으로 갔다. 그는 인상주의전에서 모네의 <건초더미>(모네 406, 407) 시리즈에 매료되었다. 칸딘스키는 훗날 말했다. “난 모네의 <건초더미>에 대한 인상을 끝내 지울 수 없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처음으로 사물이 그림에 필요한 요소인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그가 뮌헨으로 갔을 때는 서른 살이었다. 그는 안톤 아츠베와 후에 뮌헨 아카데미의 교수이자 뮌헨 분리파의 창립회원이 되는 프란츠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았다. 이 시기 뮌헨의 중요한 아방가르드 미술은 아르 누보, 즉 독일어로는 유겐트슈틸Jugendstil이었고, 이 양식에 정통한 칸딘스키는 1901년 팔랑크스라는 아방가르드 전시협회를 창립했다. 그가 파울 클레를 만난 것은 1900년 슈투크의 화실에서 수학할 때였으며 그후 평생 우정을 나눴다. 칸딘스키는 직관에 의존하여 추상화를 추구하면서 색질을 강조했고, 상징주의와 야수주의 예술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색의 서정시적 내용과 유연한 선을 최대한으로 이용했으며, 그림에 긴장감을 창조하면서 그림이 “사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분위기의 판화적인 재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뒤샹 70, 234)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예술가들로 세잔, 마티스, 피카소를 꼽았다.
칸딘스키는 1910년과 1914년 사이 추상에 몰두했다. 밝은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제목을 <구성>, <즉흥>, <서정> 등으로 붙이면서 음악에서 제목을 구했다. 그는 1910년에 <추상 수채화>를 그렸는데 완전추상이었다. 회화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사물을 전혀 모방하지 않은 그림을 그렸으며 이는 어느 누구도 과거에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추상이란 개념은 사물을 덜 모방하면서부터 생긴 개념이었고, 그가 처음으로 사물의 묘사를 완전히 그림에서 배제했다. 1910년에 그가 체험한 것을 직접 청취함으로써 추상에 대한 그의 이해를 구할 수 있다.
“난 그림 그리기를 마치고 깊은 생각에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와 화실 문을 열었다. 그때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아름다운 작품 한 폭이 시야를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선 채로 불꽃이 작품에서 튀는 것을 보았다. 그 작품은 모든 주제를 상실했으며, 아예 사물도 알아볼 수 없고, 온전히 밝은 색덩어리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좀더 가까이서 그것을 보려고 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이젤 위에 세워둔 나의 작품이었다. 한 가지 내게 분명해진 것은 사물의 형상은 내 작품에서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으며 오히려 작품을 망친다는 것이다.”
칸딘스키가 말한 작품은 뮌헨 근교에서 그린 풍경화 중 하나였다. 그가 유채로 그린 <즉흥>은 1913~14년에 완성되었는데, 자연을 추상한 나머지 형상을 완전히 말소시킨 것이며, 오로지 선과 색으로만 그린 것으로 신지학의 유토피아 미학의 영향이 농후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서 추방되었다가 1921년 12월에 독일로 돌아왔다. 이듬해 발터 그로피우스의 초빙으로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교수가 되었다. 그와 클레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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