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리얼리즘



1960년대 후반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유행한 회화양식으로 사물을 세부까지 섬세하고 비개성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인 수퍼리얼리즘Superrealism에는 조각까지 포함된다. 극사실주의, 또는 포토리얼리즘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런 양식으로 작업하는 예술가 중에는 실제로 사진을 재료로 사용하고 때때로 캔버스에 컬러 슬라이드를 비추면서 작업하는 사람들도 있다. 의도적으로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과 유사한 효과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세부까지 정확하게 묘사하며 그 규모는 종종 크게 확장된다.
수퍼리얼리즘의 직접적인 선조는 팝아트이다. 두 사조 모두 소비사회의 진부한 이미지들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수퍼리얼리즘이란 명칭을 만들어낸 맬컴 몰리, 그리고 멜 레이모스 같은 예술가들은 두 분야 모두에 걸쳐 있다. 그러나 수퍼리얼리즘에서는 팝아트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유머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차갑고 비개성적인 경향을 띤다. 작품의 소재도 다수의 반사광을 갖는 사물처럼 단지 기술적으로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팝아트와 마찬가지로 수퍼리얼리즘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수퍼리얼리즘>(1979)에서 적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수퍼리얼리즘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눈부신 성공을 거둔 유일한 혁신적 양식이었다. 뉴욕의 미술계에 처음 선보이자마자 미술품 수집가들 사이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평론가와 미술 관련 기관들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좀더 나중의 일이었다.”
미국의 선도적인 수퍼리얼리즘 화가는 척 클로스Chuck Close(1940~)이다. 예일 대학을 1964년에 졸업한 척 클로스는 초기에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렸지만 곧 수퍼리얼리즘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거대한 여권사진처럼 얼굴 정면을 그린 초상화가로 유명하다. 미니애폴리스의 워커 아트센터에 소장되어 있는 거의 3m 높이의 <자화상>(1968)이 그런 예이다. 본래 검정색과 흰색만 사용하여 그렸지만 1970년경에 색채를 도입했다. 클로스는 사진을 격자무늬의 구획으로 분할하고 이를 다시 캔버스에 옮겨 작업했다. 후기의 몇몇 작품에서는 의도적으로 격자무늬를 강조하여 마치 서리로 덮인 창문을 통해 얼굴을 바라보거나 컴퓨터 스캔 화면을 보는 듯한 ‘낮은 선명도’의 이미지를 그렸다. 클로스의 초상화 대부분은 친구를 모델로 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이미지를 “진부한 인본주의적 관념”을 위한 매체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정보의 근원”으로 보았다. 1988년 척추 혈관의 손상으로 인해 몸이 거의 마비되었지만 붓을 테이프로 팔에 고정하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1965~69년 하와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1969~70년 산타 바버라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공부한 돈 에디Don Eddy(1944~)는 1972년부터 뉴욕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자동차나 자동차의 광택나는 세부를 집중적으로 그렸지만 1971년 이후에는 주로 상점의 유리창을 묘사했는데, 이런 작품에서 유리창에 반사된 거리의 모습은 판매되는 상품만큼 매우 자세히 묘사되었다.
수퍼리얼리즘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 리처드 에스티스Richard Estes(1936~)는 1952~56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하고 1959년 뉴욕에 정착했다. 몇 년 동안 판화를 제작하다가 1966년이 되어서야 전업 화가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1968년 뉴욕의 앨런 스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60년대 말에는 수퍼리얼리즘 분야에서 선도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에스티스는 작품에서 도시의 풍경만을 다뤘다. 초기의 작업에서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1967년경부터는 건물이 주제가 되었다. 특별한 특징이 없는 전형적인 거리풍경의 단편을 묘사했는데, 유일하게 잘 알려진 건물을 그린 작품으로는 주문을 받아 제작한 솔로몬 R. 구겐하임 뮤지엄을 그린 것이 있다. 에스티스는 한 장면에 대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은 후 느낌이 맞을 때까지 사진의 조각들을 여러 번 결합하는 장식으로 작업했다. 많은 수퍼리얼리즘 화가들과 달리 그는 에어브러시보다는 전통적인 붓으로 작업했다.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며 명확한 초점을 그려내기 위해 마무리 단계에서는 유화물감을 사용했다. 그는 도시를 볼거리로 제시하면서 밝은 빛 가운데 그려내어 그의 작품에서는 심지어 쓰레기조차도 광택이 난다. 에스티스는 매우 공들인 정교한 스크린프린팅screenprinting 기법을 이용한 판화도 제작했다. 스크린프린팅은 스텐실에 기초한 판화 기법으로 원래는 상업 디자인에 사용되었던 것인데 1960년대 이후 화가들이 독창적인 판화 작업을 위해 애용했다. 이 기법의 기본 원리는 나무틀에 가는 망으로 된 스크린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씌우고, 이것을 종이 위에 올려놓고 스퀴지라고 불리는 고무롤러를 사용하여 물감이 망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보통 이 스크린이 실크로 되어 있어 실크스크린 판화라는 명칭이 생겼는데, 이는 미국에서 주로 사용되는 명칭이며, 스크린이 면이나 나일론 또는 금속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게 때문에 보다 포괄적인 명칭이 필요하다.
종교적 상징이나 허영심과 죽음의 이미지를 그린 정물화에서 감정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노린 오드리 플랙Audrey Flack(1931~)이 있고,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사용하거나 형상을 잘라낸 다음 배경에 붙이는 작업을 한 하워드 카노비츠Howard Kanovitz(1929~)가 있다. 수퍼리얼리즘 화가로 불리지만 작품에 상상적 요소를 첨가하는 화가들 중에 잭 빌, 앨프리드 레슬리, 필립 펄스타인 등이 있다.
윌리엄 메리 칼리지와 버지니아 주의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 및 시카고 아트 이스티튜트에서 공부한 잭 빌Jack Beal(1931~)은 인디애나 대학과 퍼듀 대학, 위스콘신 대학 및 쿠퍼 유니언에서 잠시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빌은 1960년대 말 치밀한 구성의 자연주의 화풍으로 돌아간 화가들 중 하나였다. 빌이 그린 매혹적인 누드화는 밝은 색채의 현란한 세부와 알록달록한 가구 부속물에 통합되어 인간적 속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앨프리드 레슬리Alfred Leslie(1927~)는 1956~57년 토니 스미스, 윌리엄 배지오티스 및 뉴욕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예술가들과 함께 뉴욕 대학에서 공부했다. 레슬리는 1950년대 중반부터 드 쿠닝을 모범으로 삼은 제2세대 추상표현주의를 따르는 예술가들에 포함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뉴 리얼리즘의 범주에 속하는 양식으로 전환하여 크기로 관람자를 압도하는 대형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그렸다. 현재 휘트니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자화상 <앨프리드 레슬리>(1966~67)가 그 예인데 가로 세로 2.7m 1.8m에 달한다.
피츠버그 태생으로 뉴욕에 정착한 필립 펄스타인Philip Pearlstein(1924~)은 1960년대 초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인간 형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뉴 리얼리즘에 속한다. 뉴 리얼리즘New Realism은 1960년대 초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으로 대중 매체들에서 평범하고 사실적 이미지를 차용하고 대량생산된 일상의 소비상품을 비롯한 실제 사물을 아상블라주로 만들거나 회화 면에 부착시켰던 경향을 말한다. 영어권 지역에서는 누보 레알리슴의 번역어로서 뉴 리얼리즘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매우 포괄적으로 사용되어 펄스타인의 작품처럼 추상표현주의와 타시즘에 대한 반발로 새로이 부활한 자연주의적 구상과 객관성이라는 새로운 정신이 결합된 경우나, 수퍼리얼리즘으로 더 잘 설명되는 양식도 포함한다. 또한 팝아트의 동의어로 혼동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있어서 1964~65년 영국 팝아트 전시회는 ‘뉴 리얼리즘’이란 명칭으로 헤이그, 빈, 베를린을 순회했다. 그러나 1976년 함부르크, 뮌헨, 요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하게 ‘영국의 팝아트’라고 했다.
배리 슈워츠는 <새로운 인본주의 The New Humanism>(1974)에서 펄스타인에 관해 적었다. “이러한 새로운 구상(수퍼리얼리즘)는 자연 그대로의 장면을 취할 것을 주장한다. 예술가들의 태도는 눈에 띄게 냉정하고 무심하며 중립적이다. 필립 펄스타인 같은 사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예술은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으며 시각 이외의 어떠한 인간적인 것과도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펄스타인은 암시적인 의미를 모두 배제하고자 인간 주제, 혹은 인간 존재를 세밀한 시지각을 통해 해부학적 대상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자신에게는 모델이나 모델이 앉아 있는 의자나 전혀 차이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1975년 런던의 김펠 피스 화랑에서 있었던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에 펄스타인은 적었다.
“나는 20세기 회화의 인본주의에 공헌했다. 나는 표현주의 예술가들, 입체주의적 해부자들, 인간을 왜곡시키는 자들에 의해 고통 받고 있던 인간의 형상을 구조해냈기 때문이다. 또 한편 나는 성적 암시를 위해 인간 형상을 손쉽게 이용하는 포르노그래피 제작자들로부터 인간의 모습을 보호했다. 나는 자연의 여러 형태 중 하나로서 존엄성을 부여받은 인간 형상 그 자체를 표현하여 왔다.”
펄스타인은 발이나 이마처럼 신체의 끝부분을 절단하는 방법 이외에는 아무런 기교 없이 그렸다. 따라서 그의 인물화는 캔버스의 한계를 뛰어넘는 듯한 기념비적인 느낌을 준다.
수퍼리얼리즘 조각가로 두에인 핸슨과 존 디 앤드리아가 있다. 미시간 주의 크랜브룩 미술아카데미를 1951년에 졸업한 두에인 핸슨Duane Hanson(1925~96)은 1953~60년 독일에 거주하면서 여러 미술학교에서 강의했고 1965년 마이애미로 이주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유리섬유로 실제 사람의 형상을 떠서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옷을 입혀 버팀목으로 받친 인물상을 만들고 이것을 극적으로 배열한 거대한 작업으로 관심을 끌었다. 핸슨은 대부분 감정적이거나 격렬한 주제를 택했는데, 주로 베트남 전쟁이나 인종 폭동과 같은 정치적 문제를 다뤘다. 그러나 1970년에 그 자신이 표현주의적이라고 말한 이런 작업을 그만두고 평범한 인물을 주재로 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쇠약한 사람, 쇼핑에 지친 사람, 그리고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관광객>(1970)처럼 살찌고, 늙고,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을 한 관광객 부부를 표현한 작품을 통해 미국의 일상적인 삶이 지니는 울적하고 무미건조한 면모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핸슨은 말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미국 중하류 계층의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그들 존재가 지닌 체념, 공허함, 외로움은 이 계층 사람들의 삶의 진정한 현실을 포착해낸 것이다. 따라서 사실주의자인 나는 인간의 형상에는 관심이 없고 ... 대신 마치 비바람에 상한 풍경처럼 시간이 부식시킨 고통을 겪는 얼굴이나 신체에 더욱 관심이 있다. 삶의 이런 면을 묘사하면서 나는 우리 시대의 매우 흥미로운 특징을 말하는 일종의 강력한 사실주의를 구현하고 싶다.”
콜로라도 주 덴버 태생으로 줄곧 덴버에서 활동한 존 디 앤드리아John De Andrea(1941~)는 1961~65년 볼더에 있는 콜로라도 대학에서 공부했고, 1970년 뉴욕의 O. K. 해리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그는 수퍼리얼리즘 조각에서 두에인 핸슨 다음가는 2인자로서 명성을 굳혔다. 핸슨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디 앤드리아의 인물 조각은 실물로부터 주조되고 세부까지 완벽한 사실적인 것이지만 그가 주로 다룬 모티프는 헨슨의 모티프와는 다르다. 그는 누드의 인물을 집중적으로 다뤘는데, 그의 모델들은 <휴식을 취하는 모델>(1981)에서와 같이 활기는 없으나 젊고 매력적이다. 그는 말했다. “나는 늘 어떤 미의 관념을 향해 작업한다. 이런 작업의 결과 아무 소득을 거두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아름다운 인물을 만들어낼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 나는 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이는 무척 평화로운 세계이다. 적어도 내 조각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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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저승사자와 보낸 잭슨 폴록의 주말



8월 9일 루스가 폴록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주말을 친구와 함께 그곳에서 보내려고 하는데 토요일 아침에 기차역으로 마중나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폴록과 함께 저승으로 갈 친구를 데려오겠다니 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운명인가.
다음날 폴록은 제프리 포터에게 가서 연장들을 빌려왔고, 루스가 주말에 올 것을 대비해서 맥주를 네 상자나 샀다.
세리와 로드가 폴록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왔을 때 폴록은 취해 있었다.

그들이 돌아간 후 폴록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뒤척이다가 콘라드 마카-랠리를 찾아갔다.
폴록이 밤하늘을 쳐다보며 읊조린 이 시적인 말이 랠리가 들은 폴록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폴록은 천성이 예술가였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시를 쓴 시인이었다.

인생이 아름답고, 나무들이 아름다우며, 하늘이 아름답다. 왜 나는 고작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하는가?

운명의 날이 밝았다.
1956년 월 11일, 토요일 오전 아홉시에 루스는 친구 에디스 맷저와 함께 기차에서 내리면서 마중나온 폴록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발견했다.
폴록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고 루스가 나중에 전했다.
루스가 그에게 친구를 소개하려고 하자 폴록은 저만치 가버렸다.
루스는 폴록이 그렇게 행동했던 것에 대해서 아주 실망했다고 회상했다.

루스는 집으로 곧장 가기를 바랐지만 폴록은 그들을 태우고 술집으로 갔다.
폴록은 에디스를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스물다섯 살의 예쁜 처녀로서 겁이 많은 커다란 눈에 커다란 입술,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나치로부터 도망쳐 나왔던 독일의 유태인 가족에게서 태어나 루스처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여인이었다.

집으로 오자 루스는 부엌 설겆이통에 쌓여 있는 그릇들을 모두 씻은 후 점심식사를 준비했으며, 폴록은 진을 한 병 꺼내왔다.
식사를 마친 루스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폴록에게 바닷가로 가자고 졸랐다.
그는 그녀와 함께 뒷마당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때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수영복 차림의 루스가 요염하게 자신의 오른발을 바위 위에 앉아 있던 폴록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폴록은 그녀의 허벅지를 붙들고 있다.

폴록은 차를 몰고 몽탁 바닷가로 가는 대신에 제임스와 샤롯 브룩스를 방문했다.
샤롯은 “잭슨은 술에 취해 있었고 슬퍼 보였으며 루스에 대한 느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빨리 바닷가로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재촉했다”고 말했다.
폴록이 다시 차를 몰았다.
그녀는 바닷가로 가는 줄만 알았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와서는 루스와 에디스만 거실에 남겨두고 침대로 가서 잠이 들었다.
지쳐 있던 폴록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저녁에 폴록은 스테이크를 구웠으며 진을 또 마셨고 그녀가 커피를 권했지만 입에도 대지 않았다.

루스는 주말을 즐기러 왔기 때문에 밤이 되자 폴록에게 대규모로 열리는 파티에 가자고 졸랐다.
폴록은 한 사람에게 3달러가 든다고 투덜거리면서 그린버그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는데 그린버그는 “과거에는 잭슨이 돈에 관해서 말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이상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루스가 하도 조르는 바람에 세 사람은 옷을 차려입고 파티장으로 향했다.
폴록은 이미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종일 진을 마셨던 데다 지난 밤에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지쳐 있었다.
그러한 증세가 운전에서 나타났는데 그는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는 갑자기 속력을 줄이는 등 자신이 차를 운전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에디스는 “루스, 잭슨이 취했어.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폴록은 도저히 운전에 자신이 없었는지 차를 길옆에 세웠다.
순찰 경찰관이 그에게 와서 “안녕하십니까, 미스터 폴록.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얘기하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폴록이 그에게 말했다.

경찰관은 그곳을 떠났고, 로저 윌콕스가 차를 타고 오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차를 폴록의 차 옆에 세웠다.
그는 아홉 시에 시작하는 음악회에 가던 중이었다.
“헤이, 잭슨, 거기서 무엇하는 거야? 자네 음악회에 가는 거 아냐?”하고 물었다.
원래 폴록은 음악회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음, 몸이 좋지 않아서 잠시 쉬고 있어”라고 그는 힘없이 말했다.
“난 병이 난 것 같아. 기분도 안 좋구. 파티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라고 폴록이 말했다.
윌콕스는 루스와 에디스가 그를 보더니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았다.
루스는 그때 폴록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으면 음악회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텔레비전이나 보려고 에디스와 함께 이스트 햄프턴까지 왔던 것은 아니었다.

폴록은 다시 운전해서 술집 근처에 차를 세우더니 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크릭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오소리오가 피아니스트를 사람들에게 막 소개하고 있을 때 하녀가 전화를 받았는데 그녀는 “미스터 폴록이 조금 늦을 거랍니다”라는 메시지를 주인에게 전했다.

폴록이 차에 막 탔는데 에디스가 그의 차에 타지 않겠다고 성화를 부렸다.
“난 택시를 부를 테야. 이대로는 안 되겠어”라고 그녀는 루스에게 말했다.
폴록은 이 여자의 고집이 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두 여자가 말다툼하는 동안 폴록은 잠시 잠이 들었는데 잠 속에서 그는 리의 목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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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면 회화



색면 회화Color Field는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이 직접 스며들게 하는 방법에 의한 것으로 1951년 잭슨 폴록이 시작했다. 이런 방법을 헬렌 프랭컨탤러Helen Frankenthaler(1928~)가 받아들였다. 뉴욕 태생으로 1949년 버몬트의 베닝턴 칼리지를 졸업한 프랭컨탤러는 아슐리 고르키와 잭슨 폴록의 영향 아래 추상표현주의를 자신의 방식으로 전개했다. 특히 새로운 색채 배합 방법의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1950년경 캔버스의 넓은 면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부분적으로 추상적인 색만을 칠한 양식으로 주목받았다. 1950년대 초에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을 부어 염색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폴록으로부터 이어받았으며 이를 통해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회화적인 붓자국을 없앨 수 있었다. 1952년작 <산과 바다>는 모리스 루이스와 케니스 놀런드의 주목을 끌었으며 이후 이들의 양식 전개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프랭컨탤러는 추상표현주의에서 색면 회화로 연결되는 비약적인 발전의 중요한 선구자라 할 수 있다. 1962년경부터 주로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여 색채는 더욱 강렬해졌으나 염색 기법을 고수하여 그려진 이미지와 캔버스의 표면이 완전히 일치하도록 했다. 프랭컨탤러는 1958년 로버트 머더웰과 결혼했고, 1968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예일 대학 캘훈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에 선정되었다. 1973년에는 스미스 칼리지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대형이며 그룹전과 개인전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프랭컨탤러는 형상-바탕의 환영적인 대비와 전경과 배경의 구분을 없애고 색채를 순전히 시각적인 현상으로 서정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염색 기법과 뿌리기 기법은 이전에 개인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온 회화적이고 촉각적인 표면 효과를 없앴다. 이 기법을 받아들인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1912~62)는 이전보다 더욱 순수한 시각적 색채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메릴랜드 주의 볼티모어 태생의 루이스 아버지는 러시아 이민자였다. 그는 1939년경부터 화가로서 루이스라는 성을 사용했다. 1929~33년 볼티모어 순수응용미술학교에 다닌 뒤 1936년 뉴욕으로 가서 연방 예술 프로젝트의 이젤화 부문에 참여했고, 당시 두코 에나멜 물감을 사용하여 기법적인 실험을 하던 멕시코 화가 시케이로스와 다른 화가들의 작업실에 합류했다. 1940년 볼티모어로 돌아와 개인 지도를 했으며 1948년부터 마그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4년 케니스 놀런드와 함께 뉴욕의 쿠츠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 시기에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루이스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다.
1954년 루이스는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여 회화 양식을 완전히 바꾸었는데, 이는 프랭컨탤러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그녀의 작품 <산과 바다>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데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때부터 루이스는 묽은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으며, 두꺼운 면포에 초벌칠을 하지 않거나 때로는 부분적으로 풀을 먹이고 그 위에 물감을 부었다. 결과적으로 물감은 캔버스 위에 층을 이루는 대신에 염색용 염료처럼 스며들었다. 루이스는 캔버스 자체를 움직이거나 캔버스를 살짝 고정하고 있는 틀을 움직여 물감의 흐름을 조정했다. 1954년과 1957~60년에 제작한 <베일> 연작에서는 캔버스 위에 부은 물감의 반투명한 색들이 부분적으로 겹쳐 줄무늬를 형성했다. 물감을 붓는 기법으로 인해 루이스는 작품에 개성이 개입될 여지를 없앴으며 액션 페인팅의 제스처적인 성격을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이 기법으로 추상적 이미지가 사라져 구상의 마지막 흔적도 제거되었다. 따라서 이 염색 기법은 최종적으로 물감을 칠한 회화의 표면에서 항상 느낄 수 있기 마련인 촉감을 차단하여 색채가 지닌 순수한 시각적 효과만을 보여주었다. 이 기법은 특별히 정밀한 실행을 요구하여 일단 제작된 뒤에는 수정이나 변경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루이스는 1955년에 제작한 작품 대부분을 폐기했으며 1957년 뉴욕의 마사 잭슨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출품했으나 팔리지 않은 작품 대부분도 폐기했다.
루이스는 1960년 여름부터 이듬해 봄 사이에 120점의 <펼쳐짐 Unfurleds> 연작을 그렸다. 이 연작에서는 캔버스의 오른편과 왼편에 대각선 색띠를 넣어 각기 피라미드 반쪽 형태를 만들었는데, 피라미드의 나머지 반쪽은 화면 밖에 위치하는 것이 되므로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캔버스의 넓은 중앙 부분은 신기하게도 여백이 아닌 적극적인 성격을 지닌 영역이 된다. 또한 <펼쳐짐> 연작에서는 색띠의 윤곽선이 더욱 명확해졌으며 색채도 겹쳐짐 없이 순수한 상태로 나타난다. 1961년 봄 루이스는 <펼쳐짐> 연작을 중단하고 그의 마지막 연작이 된 <띠> 연작을 시작했다. 이 연작에서는 수직 색띠 다발이 빈 캔버스 공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여기에서 겹쳐짐은 거의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단일한 순색으로 이루어진 수직 띠들의 윤곽선은 매우 명확하고 단지 색채 조화와 대비를 위해 부분적으로 조금 번져 있다. 색띠의 너비도 색채 고유의 색감 정도나 체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
루이스가 이루어낸 색채의 비물질화로부터 그의 계승자들은 미술작품의 비물질화까지 끌어냈다. 이런 예로 순수하게 시각적인 색 안개와 같은 줄스 올리츠키의 모노크롬 스프레이 회화와 물감이 흠뻑 스며든 색면 위에 찍힌 래리 푼스의 진동하는 다원형 점, 로버트 어윈의 구부러진 색 원반을 들 수 있다.
러시아계 미국 화가 줄스 올리츠키Jules Olitski(1922~)는 1939~42년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 1940~47년 뉴욕의 보자르 디자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한 후 자드킨 조각학교와, 1949~50년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공부했다. 1954년 뉴욕 대학에서 미술 교육으로 학위를 받고, 1956~63년 롱아일랜드의 포스트 칼리지, 1963~67년까지 베닝턴 칼리지에서 교수직을 역임했다. 올리츠키는 추상표현주의에 반발하여 프랭컨탤러와 루이스가 시작한 염색 기법을 채택하여 발전시켰다. 1960년대 초의 이른바 ‘중심핵’ 그림들은 놀런드의 동심원과 루이스의 <펼쳐짐>을 연상하게 하는 육중한 윤곽선을 결합한 것이다. 1964년에는 스프레이를 사용하여 제작하는 올오버 회화를 시작했다. 윤곽선이 없어진 그의 작품들은 1960년대 후반 단색 물감을 스프레이로 뿌려 제작하는 색면 회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그는 주로 이것으로 유명해졌다. 이런 작품에서 올리츠키는 형태나 물감의 물리적 영향에서 벗어나 신비로운 색감이 만드는 순수한 시각적 장을 창출하려고 했다. 또한 염색 기법과 그 이후의 스프레이 뿌리기 기법을 결합함으로써 유사한 톤의 색띠들이 이루는 미묘한 대비와 함께 신비롭게 떠다니는 색채 안개로 밝고 현란한 색채 효과를 만들어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형태나 원근법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색채만으로 환영적 공간을 창조했다. 1970년대에는 색채의 범위를 줄여 회색과 갈색의 미묘한 변화를 주로 다루었으며, 간혹 아크릴 물감을 물에 풀어 사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 화면에 도입된 표현적인 표면 효과는 새로운 주목을 받았다. 그는 모노크롬에 가까운 색면을 구사한 화가들 중에서도 가장 개성 있는 방식을 전개했다.
도쿄 태생 미국 화가 래리 푼스Larry Poons(1937~)는 뉴잉글랜드 음악학교와 뉴욕의 신사회 과학원에서 작곡가 존 케이지의 지도를 받은 뒤 1958년 보스턴 미술관 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푼스는 프랭컨탤러와 루이스와 더불어 색면 회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졌지만, 그의 개인적인 양식은 색면 회화와 차이가 있다. 푼스는 강렬한 색채 위에 계란형의 점들을 그렸는데 이는 시지각의 작용에 의해 후퇴하는 듯이 보이며 신기한 잔상을 만든다. 이처럼 독특한 시각 경험을 야기하기 때문에 그는 한때 옵 아트 화가들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1960년대 말 그의 작품은 좀더 회화적이 되어 색채는 더욱 엄격해지고 점은 박테리아를 현미경으로 확대시킨 것과 유사한 줄무늬들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그림에 깊이감과 공간감이 생겼으나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색채의 시각적 경험이었다.
미국 화가 로버트 어윈Robert Irwin(1928~)은 지각 심리학 분야의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고, 1966년부터는 작품을 통해 지각적 조작과 공간 변경을 위한 조작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구성 요소들의 수적인 측면이나 복합적인 측면에서 볼 때 끊임없이 단순성을 향해 나아갔다. 그가 1968~69년에 제작한 ‘원반 회화’ 연작은 유명한데 이는 원반 형태를 벽에 걸고 주의 깊게 빛을 비춰 굴절시킨 것으로 정확한 형태라든가 정해진 위치 없이도 독립적으로 지각되는 색채를 만들어냈다. 1970년대 초에는 조심스럽게 자르고 광택 처리하여 프리즘처럼 무지개 빛이 나는 아크릴 수지를 재료로 원주를 제작했으며, 캘리포니아 주 노스리지 시의 의뢰를 받아 10m 높이의 조각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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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주의 



상징주의는 1885~1910년경에 성행한 문학과 미술 운동으로 결속력은 크지 않았으나 직접적이면서 사실에 충실한 재현을 거부하고 환기와 암시의 방법을 선호했다. 상징주의는 19세기 말 폭넓은 반물질주의, 반합리주의 조류의 한 부분이었고, 특히 인상주의의 자연주의 목표에 대한 폭넓은 반동이었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감정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는데, 시인 장 모레아스가 1886년 9월 18일자 <르 피가로> 지에 기고한 ‘상징주의 선언’에서 밝혔듯이 “관념에 감각적인 형태의 옷을 입히려고 한” 것이다. 상징주의 시인들이 자신들이 사용한 단어의 발음, 운율과 그 의미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상징주의 화가들도 색채와 선 자체만으로도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상징주의 평론가들은 예술 간의 유사성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했는데, 예를 들면 오딜롱 르동의 회화는 샤를 보들레르 혹은 에드거 앨런 포의 시, 클로드 드뷔시의 음악에 비유되었다.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인물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1916)은 고향 보르도에서 지내다가 1870년부터 파리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50대가 될 때까지 색채를 사용하지 않고 거의 흑백으로만 석판화와 목탄화 작업을 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글에서 영향을 받아 기이한 아메바 같은 생물, 곤충, 그리고 인간의 머리를 한 식물 같은 독특한 주제를 발전시켰다. 1884년 J. K. 위스망스는 유명한 소설 <거꾸로 A Rebours>가 출판되기 전에는 사실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데카당스 문학의 고전인 이 소설에서 내면의 기형적인 즐거움의 세계에서 깨어난 소설의 주인공은 르동의 소묘를 수집한다. 이 때문에 르동은 데카당스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890년대에 회화로 방향을 바꾸어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던 색채주의자로서의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유화와 파스텔화 양쪽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1900년 이후에는 수많은 장식작업을 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르동을 자신들의 선구자 중 하나로 꼽았다.
많은 화가들이 상징주의 작가와 같은 종류의 이미지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상징주의는 강렬하고 신비적인 종교적 감정을 특징으로 하지만, 상징주의자들은 에로틱한 주제와 병적인 주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죽음, 질병, 죄는 그들이 즐겨 다룬 주제였다. 양식상으로 상징주의 예술가들은 주제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 이국적인 세부 묘사를 보여주는 경우부터 원시적인 단순성을 강조하는 경우, 형태를 명확한 윤곽선으로 그리는 것에서부터 안개처럼 모호하게 묘사하는 경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후기 인상주의와 맥락을 같이 하여 평면화된 형태와 넓은 색면을 지향하는 경향을 보였다.
상징주의는 주로 프랑스를 기반으로 전개되었지만, 국제적으로 널리 퍼졌으며 호들러와 뭉크 등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예술가들이 넓은 의미에서 상징주의 화가로 간주된다. 베른 태생의 스위스 화가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1853~1918)는 처음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풍경화를 그렸고, 1872년부터 제네바 에콜 데 보자르에서 코로와 친구인 바르텔르미 망의 지도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홀바인의 작품을 연구했다. 1890년대에는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 종교적인 그림을 그렸고, 취리히 역사박물관의 벽화작품과 같이 과장된 역사화를 그렸다. 1904년 빈 분리파와 함께 개인전을 열었으며 제네바에 정착했다.
고대 북유럽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독일 표현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1863~1944)는 어린 시절 오슬로에서 수학한 후 1908년 심각한 정신병에 걸릴 때까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두루 여행했으며 여생을 노르웨이에서 보냈다. 뭉크는 현대 노르웨이 예술가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며, 특히 스칸디나비아와 독일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들에게 뭉크와 반 고흐는 표현주의 회화에 주요한 근거를 제공한 두 명의 예술가였다. 뭉크의 영향은 양식적인 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훨씬 포괄적인 것이었다. 작품에 표현된 현대 상황에 대한 환멸감과 인간의 소외감, 갈등과 신경증과 긴장을 강조하여 스스로 “현대의 영적인 삶”이라 지칭한 것의 도상을 그리려는 열망, 색채와 왜곡된 형태를 통해 정신적인 고뇌를 강렬하게 상징하고 전달한 점, 이 모든 것은 더욱 고통 받았던 독일 표현주의 주창자들의 원동력이 되었다.
호들러의 종교화와 뭉크의 작품에 나타난 정신분석적 주제들은 표현적이면서 동시에 반물질주의, 반합리주의에 근거했다. 이런 점에서 두 사람은 상징주의로도 분류된다. 상징주의 조각가로는 벨기에의 게오르흐 미네와 노르웨이의 구스타브 비겔란이 있다. 겐트 아카데미에서 건축을 공부하다가 회화와 조각으로 전공을 바꾼 게오르흐 미네Georg Minne(1866~1941)는 처음에는 아카데미적인 자연주의 양식으로 작업했으나 1880년대 후반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후기 고딕 양식과 라파엘 전파의 중세주의 경향을 보여주는 양식으로 상징주의 시의 삽화를 그렸다. 미네는 점차 조각으로 관심을 돌려 조각에서 상징주의와 유사한 양식을 찾으려고 했다. 종교적 성향이 주를 이루면서 고딕적인 동시에 아르 누보의 특징을 보이던 이 시기의 미네의 조각은 독일 조각가 빌헬름 렘브루크Wilhelm Lehmbruck(1881~1919)를 포함한 후배 조각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미네는 관람자가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동일한 인물을 반복하여 사용하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이는 같은 사상을 여러 시각으로 조명해보는 상징주의 방식과 유사했다. 이미 상징주의적인 세계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던 때인 1908년경 미네는 같은 나라 예술가 콩스탕탱 뫼니에Constantin Meunier(1831~1904)와 유사하고 이전보다 자연주의적이며 사회적인 양식으로 전환했다. 노동의 신성함을 찬양하는 사회-사실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작업한 조각가이며 화가 뫼니에는 낭만적인 아카데미 양식으로 작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젊은 예술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오슬로와 코펜하겐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1892~95년 파리와 이탈리아에서도 공부한 구스타브 비겔란Gustav Vigeland(1869~1943)은 로댕과 함께 몇 달 동안 작업하면서 영향을 받았고, 청동과 화강암, 두 재료에서 뛰어난 기술을 발휘하여 기념비적 리얼리즘을 실현했다. 노르웨이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겔란은 40여 년 이상 오슬로의 프롱네르 공원에 있는 분수의 군상 조각에 전념했다. 150개 이상의 인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부속건물 비겔란 미술관과 함께 시의 재정 후원을 받은 프로젝트였다. 혼란스럽고 불명확한 상징주의로 표현된 이 은유적 인물들은 거대한 크기로 감각을 강요하고, 부적절한 리얼리즘이 주는 단조로운 무미건조함으로 감각을 압도한다.
조지 허드 해밀턴은 말했다. “상징주의자들은 고갱이 말한 ‘개연성이라는 굴레’로부터 회화를 해방시켰으며, 더욱 20세기 회화다운 실질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문제들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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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 “리가 돌아오기를 바란다”



잭슨 폴록이 혼자가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바닷가를 어슬렁거렸고, 차를 타고 아무 곳이고 낯익은 집 앞에 가서도 문을 두드릴 용기를 내지 못했다. “잭슨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최악의 시간들이었다. 난 그가 그처럼 우울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고 카론이 말했다. 폴록은 밤에 아무에게라도 전화를 걸어서는 몇 시간씩 말하려고 했다.

루스가 떠난 후 폴록은 그의 화실 주변을 배회하는 길 잃은 개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그 개를 화실에 들여놓았는데 그 개도 사라져버렸다. 오후에 폴록이 몽탁 바닷가를 산책할 때 그는 그 개가 차에 치여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개를 차에 싣고 동물병원으로 가서 카론에게 전화를 걸었다. “잭슨은 아주 아름다운 개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그 개가 살아난다면 기르지 않겠느냐고 물었으며, 난 그에게 그러마고 대답했다”고 카론이 말했다. 이틀 후 폴록이 카론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가 걷는 모습은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그는 카론에게 “개가 죽었어. 난 집에 가야겠다”고 말했는데 잭슨은 알지도 못하는 개의 죽음을 대단히 슬퍼하면서 말도 제대로 못했다고 카론은 전한다.

폴록은 자신이 정작 잃어버린 것은 리이며 리에게 잘못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때는 늦어 있었다. 루스가 떠나고 카론이 폴록을 위로하려고 방문했을 때 폴록은 자신과 루스의 관계는 “개똥같았다”고 말하면서 “나는 리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리가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폴록은 유럽으로 가서 그녀와 함께 뉴욕으로 돌아오려고 파리로 전화를 했다. 하지만 운명의 시나리오에는 극적인 어긋남이 있게 마련이어서, 그때 리는 남프랑스로 떠나고 없었다. 리는 미디에 있는 김펠 부부의 집에서 일 주일간 머물면서 세잔느의 전람회와 반 고흐가 마지막으로 그린 풍경화를 관람하고 베니스에 있는 페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페기는 리를 초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베니스에 있는 호텔을 예약해달라는 청도 거절했다. 리는 파리로 돌아와 폴 젠킨스의 아파트에서 머물면서 호텔을 예약하려고 했다.

이 시기에 폴록은 그린버그의 별장으로 갔다. 그곳에 있던 낸시 스미스의 말에 의하면 폴록은 대단히 우울해 보였다. 그녀가 “잭슨, 왜 그래?”라고 물었더니 그는 “리가 항상 내 손톱을 깎아주었는데 그녀가 가버렸다”고 말했다. 폴록이 그렇게 우울해 보였던 것은 그의 손톱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손톱을 깎을 줄 몰랐고 그에게는 리가 필요했다. 그녀는 폴록에게 “그 손톱이 너를 괴롭힌다면 내가 깎아주마”라고 말하고 그의 손톱을 깎아주었다. 그때 폴록은 울고 있었다.

폴록은 부엌으로 가서 스틸이 전에 그에게 보냈던 편지를 꺼냈다. 그 편지는 그가 너무 감동해서 서랍 속에 넣어두고 이따금 꺼내어 읽는 것이었다. 지난 해 재니스 화랑에서의 전람회에 폴록은 스틸을 초대하지 않았는데 스틸은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의 편지는 폴록의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했었다. 그후 그는 그의 편지를 읽고 또 읽고 백번도 더 읽었으리라.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자네는 자네의 전람회를 부끄러워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이 자네를 통해 예술가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경멸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는가?
그것은 대단한 값을 지불하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나?”

폴록은 카론에게 전화를 걸어 그에게 와달라고 졸랐다. 카론의 눈에는 그가 아주 황폐해 보였다.
“잭슨은 스틸의 편지를 읽고서는 아주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스틸의 편지는 그의 심장을 뚫었고 … 난 그가 그렇게 울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고 카론이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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