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주의
상징주의는 1885~1910년경에 성행한 문학과 미술 운동으로 결속력은 크지 않았으나 직접적이면서 사실에 충실한 재현을 거부하고 환기와 암시의 방법을 선호했다. 상징주의는 19세기 말 폭넓은 반물질주의, 반합리주의 조류의 한 부분이었고, 특히 인상주의의 자연주의 목표에 대한 폭넓은 반동이었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감정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는데, 시인 장 모레아스가 1886년 9월 18일자 <르 피가로> 지에 기고한 ‘상징주의 선언’에서 밝혔듯이 “관념에 감각적인 형태의 옷을 입히려고 한” 것이다. 상징주의 시인들이 자신들이 사용한 단어의 발음, 운율과 그 의미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상징주의 화가들도 색채와 선 자체만으로도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상징주의 평론가들은 예술 간의 유사성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했는데, 예를 들면 오딜롱 르동의 회화는 샤를 보들레르 혹은 에드거 앨런 포의 시, 클로드 드뷔시의 음악에 비유되었다.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인물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1916)은 고향 보르도에서 지내다가 1870년부터 파리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50대가 될 때까지 색채를 사용하지 않고 거의 흑백으로만 석판화와 목탄화 작업을 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글에서 영향을 받아 기이한 아메바 같은 생물, 곤충, 그리고 인간의 머리를 한 식물 같은 독특한 주제를 발전시켰다. 1884년 J. K. 위스망스는 유명한 소설 <거꾸로 A Rebours>가 출판되기 전에는 사실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데카당스 문학의 고전인 이 소설에서 내면의 기형적인 즐거움의 세계에서 깨어난 소설의 주인공은 르동의 소묘를 수집한다. 이 때문에 르동은 데카당스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890년대에 회화로 방향을 바꾸어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던 색채주의자로서의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유화와 파스텔화 양쪽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1900년 이후에는 수많은 장식작업을 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르동을 자신들의 선구자 중 하나로 꼽았다.
많은 화가들이 상징주의 작가와 같은 종류의 이미지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상징주의는 강렬하고 신비적인 종교적 감정을 특징으로 하지만, 상징주의자들은 에로틱한 주제와 병적인 주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죽음, 질병, 죄는 그들이 즐겨 다룬 주제였다. 양식상으로 상징주의 예술가들은 주제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 이국적인 세부 묘사를 보여주는 경우부터 원시적인 단순성을 강조하는 경우, 형태를 명확한 윤곽선으로 그리는 것에서부터 안개처럼 모호하게 묘사하는 경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후기 인상주의와 맥락을 같이 하여 평면화된 형태와 넓은 색면을 지향하는 경향을 보였다.
상징주의는 주로 프랑스를 기반으로 전개되었지만, 국제적으로 널리 퍼졌으며 호들러와 뭉크 등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예술가들이 넓은 의미에서 상징주의 화가로 간주된다. 베른 태생의 스위스 화가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1853~1918)는 처음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풍경화를 그렸고, 1872년부터 제네바 에콜 데 보자르에서 코로와 친구인 바르텔르미 망의 지도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홀바인의 작품을 연구했다. 1890년대에는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 종교적인 그림을 그렸고, 취리히 역사박물관의 벽화작품과 같이 과장된 역사화를 그렸다. 1904년 빈 분리파와 함께 개인전을 열었으며 제네바에 정착했다.
고대 북유럽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독일 표현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1863~1944)는 어린 시절 오슬로에서 수학한 후 1908년 심각한 정신병에 걸릴 때까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두루 여행했으며 여생을 노르웨이에서 보냈다. 뭉크는 현대 노르웨이 예술가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며, 특히 스칸디나비아와 독일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들에게 뭉크와 반 고흐는 표현주의 회화에 주요한 근거를 제공한 두 명의 예술가였다. 뭉크의 영향은 양식적인 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훨씬 포괄적인 것이었다. 작품에 표현된 현대 상황에 대한 환멸감과 인간의 소외감, 갈등과 신경증과 긴장을 강조하여 스스로 “현대의 영적인 삶”이라 지칭한 것의 도상을 그리려는 열망, 색채와 왜곡된 형태를 통해 정신적인 고뇌를 강렬하게 상징하고 전달한 점, 이 모든 것은 더욱 고통 받았던 독일 표현주의 주창자들의 원동력이 되었다.
호들러의 종교화와 뭉크의 작품에 나타난 정신분석적 주제들은 표현적이면서 동시에 반물질주의, 반합리주의에 근거했다. 이런 점에서 두 사람은 상징주의로도 분류된다. 상징주의 조각가로는 벨기에의 게오르흐 미네와 노르웨이의 구스타브 비겔란이 있다. 겐트 아카데미에서 건축을 공부하다가 회화와 조각으로 전공을 바꾼 게오르흐 미네Georg Minne(1866~1941)는 처음에는 아카데미적인 자연주의 양식으로 작업했으나 1880년대 후반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후기 고딕 양식과 라파엘 전파의 중세주의 경향을 보여주는 양식으로 상징주의 시의 삽화를 그렸다. 미네는 점차 조각으로 관심을 돌려 조각에서 상징주의와 유사한 양식을 찾으려고 했다. 종교적 성향이 주를 이루면서 고딕적인 동시에 아르 누보의 특징을 보이던 이 시기의 미네의 조각은 독일 조각가 빌헬름 렘브루크Wilhelm Lehmbruck(1881~1919)를 포함한 후배 조각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미네는 관람자가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동일한 인물을 반복하여 사용하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이는 같은 사상을 여러 시각으로 조명해보는 상징주의 방식과 유사했다. 이미 상징주의적인 세계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던 때인 1908년경 미네는 같은 나라 예술가 콩스탕탱 뫼니에Constantin Meunier(1831~1904)와 유사하고 이전보다 자연주의적이며 사회적인 양식으로 전환했다. 노동의 신성함을 찬양하는 사회-사실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작업한 조각가이며 화가 뫼니에는 낭만적인 아카데미 양식으로 작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젊은 예술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오슬로와 코펜하겐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1892~95년 파리와 이탈리아에서도 공부한 구스타브 비겔란Gustav Vigeland(1869~1943)은 로댕과 함께 몇 달 동안 작업하면서 영향을 받았고, 청동과 화강암, 두 재료에서 뛰어난 기술을 발휘하여 기념비적 리얼리즘을 실현했다. 노르웨이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겔란은 40여 년 이상 오슬로의 프롱네르 공원에 있는 분수의 군상 조각에 전념했다. 150개 이상의 인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부속건물 비겔란 미술관과 함께 시의 재정 후원을 받은 프로젝트였다. 혼란스럽고 불명확한 상징주의로 표현된 이 은유적 인물들은 거대한 크기로 감각을 강요하고, 부적절한 리얼리즘이 주는 단조로운 무미건조함으로 감각을 압도한다.
조지 허드 해밀턴은 말했다. “상징주의자들은 고갱이 말한 ‘개연성이라는 굴레’로부터 회화를 해방시켰으며, 더욱 20세기 회화다운 실질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문제들을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