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리얼리즘



1960년대 후반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유행한 회화양식으로 사물을 세부까지 섬세하고 비개성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인 수퍼리얼리즘Superrealism에는 조각까지 포함된다. 극사실주의, 또는 포토리얼리즘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런 양식으로 작업하는 예술가 중에는 실제로 사진을 재료로 사용하고 때때로 캔버스에 컬러 슬라이드를 비추면서 작업하는 사람들도 있다. 의도적으로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과 유사한 효과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세부까지 정확하게 묘사하며 그 규모는 종종 크게 확장된다.
수퍼리얼리즘의 직접적인 선조는 팝아트이다. 두 사조 모두 소비사회의 진부한 이미지들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수퍼리얼리즘이란 명칭을 만들어낸 맬컴 몰리, 그리고 멜 레이모스 같은 예술가들은 두 분야 모두에 걸쳐 있다. 그러나 수퍼리얼리즘에서는 팝아트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유머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차갑고 비개성적인 경향을 띤다. 작품의 소재도 다수의 반사광을 갖는 사물처럼 단지 기술적으로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팝아트와 마찬가지로 수퍼리얼리즘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수퍼리얼리즘>(1979)에서 적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수퍼리얼리즘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눈부신 성공을 거둔 유일한 혁신적 양식이었다. 뉴욕의 미술계에 처음 선보이자마자 미술품 수집가들 사이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평론가와 미술 관련 기관들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좀더 나중의 일이었다.”
미국의 선도적인 수퍼리얼리즘 화가는 척 클로스Chuck Close(1940~)이다. 예일 대학을 1964년에 졸업한 척 클로스는 초기에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렸지만 곧 수퍼리얼리즘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거대한 여권사진처럼 얼굴 정면을 그린 초상화가로 유명하다. 미니애폴리스의 워커 아트센터에 소장되어 있는 거의 3m 높이의 <자화상>(1968)이 그런 예이다. 본래 검정색과 흰색만 사용하여 그렸지만 1970년경에 색채를 도입했다. 클로스는 사진을 격자무늬의 구획으로 분할하고 이를 다시 캔버스에 옮겨 작업했다. 후기의 몇몇 작품에서는 의도적으로 격자무늬를 강조하여 마치 서리로 덮인 창문을 통해 얼굴을 바라보거나 컴퓨터 스캔 화면을 보는 듯한 ‘낮은 선명도’의 이미지를 그렸다. 클로스의 초상화 대부분은 친구를 모델로 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이미지를 “진부한 인본주의적 관념”을 위한 매체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정보의 근원”으로 보았다. 1988년 척추 혈관의 손상으로 인해 몸이 거의 마비되었지만 붓을 테이프로 팔에 고정하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1965~69년 하와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1969~70년 산타 바버라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공부한 돈 에디Don Eddy(1944~)는 1972년부터 뉴욕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자동차나 자동차의 광택나는 세부를 집중적으로 그렸지만 1971년 이후에는 주로 상점의 유리창을 묘사했는데, 이런 작품에서 유리창에 반사된 거리의 모습은 판매되는 상품만큼 매우 자세히 묘사되었다.
수퍼리얼리즘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 리처드 에스티스Richard Estes(1936~)는 1952~56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하고 1959년 뉴욕에 정착했다. 몇 년 동안 판화를 제작하다가 1966년이 되어서야 전업 화가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1968년 뉴욕의 앨런 스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60년대 말에는 수퍼리얼리즘 분야에서 선도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에스티스는 작품에서 도시의 풍경만을 다뤘다. 초기의 작업에서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1967년경부터는 건물이 주제가 되었다. 특별한 특징이 없는 전형적인 거리풍경의 단편을 묘사했는데, 유일하게 잘 알려진 건물을 그린 작품으로는 주문을 받아 제작한 솔로몬 R. 구겐하임 뮤지엄을 그린 것이 있다. 에스티스는 한 장면에 대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은 후 느낌이 맞을 때까지 사진의 조각들을 여러 번 결합하는 장식으로 작업했다. 많은 수퍼리얼리즘 화가들과 달리 그는 에어브러시보다는 전통적인 붓으로 작업했다.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며 명확한 초점을 그려내기 위해 마무리 단계에서는 유화물감을 사용했다. 그는 도시를 볼거리로 제시하면서 밝은 빛 가운데 그려내어 그의 작품에서는 심지어 쓰레기조차도 광택이 난다. 에스티스는 매우 공들인 정교한 스크린프린팅screenprinting 기법을 이용한 판화도 제작했다. 스크린프린팅은 스텐실에 기초한 판화 기법으로 원래는 상업 디자인에 사용되었던 것인데 1960년대 이후 화가들이 독창적인 판화 작업을 위해 애용했다. 이 기법의 기본 원리는 나무틀에 가는 망으로 된 스크린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씌우고, 이것을 종이 위에 올려놓고 스퀴지라고 불리는 고무롤러를 사용하여 물감이 망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보통 이 스크린이 실크로 되어 있어 실크스크린 판화라는 명칭이 생겼는데, 이는 미국에서 주로 사용되는 명칭이며, 스크린이 면이나 나일론 또는 금속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게 때문에 보다 포괄적인 명칭이 필요하다.
종교적 상징이나 허영심과 죽음의 이미지를 그린 정물화에서 감정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노린 오드리 플랙Audrey Flack(1931~)이 있고,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사용하거나 형상을 잘라낸 다음 배경에 붙이는 작업을 한 하워드 카노비츠Howard Kanovitz(1929~)가 있다. 수퍼리얼리즘 화가로 불리지만 작품에 상상적 요소를 첨가하는 화가들 중에 잭 빌, 앨프리드 레슬리, 필립 펄스타인 등이 있다.
윌리엄 메리 칼리지와 버지니아 주의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 및 시카고 아트 이스티튜트에서 공부한 잭 빌Jack Beal(1931~)은 인디애나 대학과 퍼듀 대학, 위스콘신 대학 및 쿠퍼 유니언에서 잠시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빌은 1960년대 말 치밀한 구성의 자연주의 화풍으로 돌아간 화가들 중 하나였다. 빌이 그린 매혹적인 누드화는 밝은 색채의 현란한 세부와 알록달록한 가구 부속물에 통합되어 인간적 속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앨프리드 레슬리Alfred Leslie(1927~)는 1956~57년 토니 스미스, 윌리엄 배지오티스 및 뉴욕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예술가들과 함께 뉴욕 대학에서 공부했다. 레슬리는 1950년대 중반부터 드 쿠닝을 모범으로 삼은 제2세대 추상표현주의를 따르는 예술가들에 포함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뉴 리얼리즘의 범주에 속하는 양식으로 전환하여 크기로 관람자를 압도하는 대형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그렸다. 현재 휘트니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자화상 <앨프리드 레슬리>(1966~67)가 그 예인데 가로 세로 2.7m 1.8m에 달한다.
피츠버그 태생으로 뉴욕에 정착한 필립 펄스타인Philip Pearlstein(1924~)은 1960년대 초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인간 형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뉴 리얼리즘에 속한다. 뉴 리얼리즘New Realism은 1960년대 초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으로 대중 매체들에서 평범하고 사실적 이미지를 차용하고 대량생산된 일상의 소비상품을 비롯한 실제 사물을 아상블라주로 만들거나 회화 면에 부착시켰던 경향을 말한다. 영어권 지역에서는 누보 레알리슴의 번역어로서 뉴 리얼리즘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매우 포괄적으로 사용되어 펄스타인의 작품처럼 추상표현주의와 타시즘에 대한 반발로 새로이 부활한 자연주의적 구상과 객관성이라는 새로운 정신이 결합된 경우나, 수퍼리얼리즘으로 더 잘 설명되는 양식도 포함한다. 또한 팝아트의 동의어로 혼동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있어서 1964~65년 영국 팝아트 전시회는 ‘뉴 리얼리즘’이란 명칭으로 헤이그, 빈, 베를린을 순회했다. 그러나 1976년 함부르크, 뮌헨, 요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하게 ‘영국의 팝아트’라고 했다.
배리 슈워츠는 <새로운 인본주의 The New Humanism>(1974)에서 펄스타인에 관해 적었다. “이러한 새로운 구상(수퍼리얼리즘)는 자연 그대로의 장면을 취할 것을 주장한다. 예술가들의 태도는 눈에 띄게 냉정하고 무심하며 중립적이다. 필립 펄스타인 같은 사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예술은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으며 시각 이외의 어떠한 인간적인 것과도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펄스타인은 암시적인 의미를 모두 배제하고자 인간 주제, 혹은 인간 존재를 세밀한 시지각을 통해 해부학적 대상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자신에게는 모델이나 모델이 앉아 있는 의자나 전혀 차이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1975년 런던의 김펠 피스 화랑에서 있었던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에 펄스타인은 적었다.
“나는 20세기 회화의 인본주의에 공헌했다. 나는 표현주의 예술가들, 입체주의적 해부자들, 인간을 왜곡시키는 자들에 의해 고통 받고 있던 인간의 형상을 구조해냈기 때문이다. 또 한편 나는 성적 암시를 위해 인간 형상을 손쉽게 이용하는 포르노그래피 제작자들로부터 인간의 모습을 보호했다. 나는 자연의 여러 형태 중 하나로서 존엄성을 부여받은 인간 형상 그 자체를 표현하여 왔다.”
펄스타인은 발이나 이마처럼 신체의 끝부분을 절단하는 방법 이외에는 아무런 기교 없이 그렸다. 따라서 그의 인물화는 캔버스의 한계를 뛰어넘는 듯한 기념비적인 느낌을 준다.
수퍼리얼리즘 조각가로 두에인 핸슨과 존 디 앤드리아가 있다. 미시간 주의 크랜브룩 미술아카데미를 1951년에 졸업한 두에인 핸슨Duane Hanson(1925~96)은 1953~60년 독일에 거주하면서 여러 미술학교에서 강의했고 1965년 마이애미로 이주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유리섬유로 실제 사람의 형상을 떠서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옷을 입혀 버팀목으로 받친 인물상을 만들고 이것을 극적으로 배열한 거대한 작업으로 관심을 끌었다. 핸슨은 대부분 감정적이거나 격렬한 주제를 택했는데, 주로 베트남 전쟁이나 인종 폭동과 같은 정치적 문제를 다뤘다. 그러나 1970년에 그 자신이 표현주의적이라고 말한 이런 작업을 그만두고 평범한 인물을 주재로 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쇠약한 사람, 쇼핑에 지친 사람, 그리고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관광객>(1970)처럼 살찌고, 늙고,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을 한 관광객 부부를 표현한 작품을 통해 미국의 일상적인 삶이 지니는 울적하고 무미건조한 면모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핸슨은 말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미국 중하류 계층의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그들 존재가 지닌 체념, 공허함, 외로움은 이 계층 사람들의 삶의 진정한 현실을 포착해낸 것이다. 따라서 사실주의자인 나는 인간의 형상에는 관심이 없고 ... 대신 마치 비바람에 상한 풍경처럼 시간이 부식시킨 고통을 겪는 얼굴이나 신체에 더욱 관심이 있다. 삶의 이런 면을 묘사하면서 나는 우리 시대의 매우 흥미로운 특징을 말하는 일종의 강력한 사실주의를 구현하고 싶다.”
콜로라도 주 덴버 태생으로 줄곧 덴버에서 활동한 존 디 앤드리아John De Andrea(1941~)는 1961~65년 볼더에 있는 콜로라도 대학에서 공부했고, 1970년 뉴욕의 O. K. 해리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그는 수퍼리얼리즘 조각에서 두에인 핸슨 다음가는 2인자로서 명성을 굳혔다. 핸슨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디 앤드리아의 인물 조각은 실물로부터 주조되고 세부까지 완벽한 사실적인 것이지만 그가 주로 다룬 모티프는 헨슨의 모티프와는 다르다. 그는 누드의 인물을 집중적으로 다뤘는데, 그의 모델들은 <휴식을 취하는 모델>(1981)에서와 같이 활기는 없으나 젊고 매력적이다. 그는 말했다. “나는 늘 어떤 미의 관념을 향해 작업한다. 이런 작업의 결과 아무 소득을 거두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아름다운 인물을 만들어낼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 나는 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이는 무척 평화로운 세계이다. 적어도 내 조각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