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면 회화



색면 회화Color Field는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이 직접 스며들게 하는 방법에 의한 것으로 1951년 잭슨 폴록이 시작했다. 이런 방법을 헬렌 프랭컨탤러Helen Frankenthaler(1928~)가 받아들였다. 뉴욕 태생으로 1949년 버몬트의 베닝턴 칼리지를 졸업한 프랭컨탤러는 아슐리 고르키와 잭슨 폴록의 영향 아래 추상표현주의를 자신의 방식으로 전개했다. 특히 새로운 색채 배합 방법의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1950년경 캔버스의 넓은 면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부분적으로 추상적인 색만을 칠한 양식으로 주목받았다. 1950년대 초에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을 부어 염색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폴록으로부터 이어받았으며 이를 통해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회화적인 붓자국을 없앨 수 있었다. 1952년작 <산과 바다>는 모리스 루이스와 케니스 놀런드의 주목을 끌었으며 이후 이들의 양식 전개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프랭컨탤러는 추상표현주의에서 색면 회화로 연결되는 비약적인 발전의 중요한 선구자라 할 수 있다. 1962년경부터 주로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여 색채는 더욱 강렬해졌으나 염색 기법을 고수하여 그려진 이미지와 캔버스의 표면이 완전히 일치하도록 했다. 프랭컨탤러는 1958년 로버트 머더웰과 결혼했고, 1968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예일 대학 캘훈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에 선정되었다. 1973년에는 스미스 칼리지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대형이며 그룹전과 개인전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프랭컨탤러는 형상-바탕의 환영적인 대비와 전경과 배경의 구분을 없애고 색채를 순전히 시각적인 현상으로 서정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염색 기법과 뿌리기 기법은 이전에 개인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온 회화적이고 촉각적인 표면 효과를 없앴다. 이 기법을 받아들인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1912~62)는 이전보다 더욱 순수한 시각적 색채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메릴랜드 주의 볼티모어 태생의 루이스 아버지는 러시아 이민자였다. 그는 1939년경부터 화가로서 루이스라는 성을 사용했다. 1929~33년 볼티모어 순수응용미술학교에 다닌 뒤 1936년 뉴욕으로 가서 연방 예술 프로젝트의 이젤화 부문에 참여했고, 당시 두코 에나멜 물감을 사용하여 기법적인 실험을 하던 멕시코 화가 시케이로스와 다른 화가들의 작업실에 합류했다. 1940년 볼티모어로 돌아와 개인 지도를 했으며 1948년부터 마그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4년 케니스 놀런드와 함께 뉴욕의 쿠츠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 시기에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루이스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다.
1954년 루이스는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여 회화 양식을 완전히 바꾸었는데, 이는 프랭컨탤러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그녀의 작품 <산과 바다>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데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때부터 루이스는 묽은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으며, 두꺼운 면포에 초벌칠을 하지 않거나 때로는 부분적으로 풀을 먹이고 그 위에 물감을 부었다. 결과적으로 물감은 캔버스 위에 층을 이루는 대신에 염색용 염료처럼 스며들었다. 루이스는 캔버스 자체를 움직이거나 캔버스를 살짝 고정하고 있는 틀을 움직여 물감의 흐름을 조정했다. 1954년과 1957~60년에 제작한 <베일> 연작에서는 캔버스 위에 부은 물감의 반투명한 색들이 부분적으로 겹쳐 줄무늬를 형성했다. 물감을 붓는 기법으로 인해 루이스는 작품에 개성이 개입될 여지를 없앴으며 액션 페인팅의 제스처적인 성격을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이 기법으로 추상적 이미지가 사라져 구상의 마지막 흔적도 제거되었다. 따라서 이 염색 기법은 최종적으로 물감을 칠한 회화의 표면에서 항상 느낄 수 있기 마련인 촉감을 차단하여 색채가 지닌 순수한 시각적 효과만을 보여주었다. 이 기법은 특별히 정밀한 실행을 요구하여 일단 제작된 뒤에는 수정이나 변경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루이스는 1955년에 제작한 작품 대부분을 폐기했으며 1957년 뉴욕의 마사 잭슨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출품했으나 팔리지 않은 작품 대부분도 폐기했다.
루이스는 1960년 여름부터 이듬해 봄 사이에 120점의 <펼쳐짐 Unfurleds> 연작을 그렸다. 이 연작에서는 캔버스의 오른편과 왼편에 대각선 색띠를 넣어 각기 피라미드 반쪽 형태를 만들었는데, 피라미드의 나머지 반쪽은 화면 밖에 위치하는 것이 되므로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캔버스의 넓은 중앙 부분은 신기하게도 여백이 아닌 적극적인 성격을 지닌 영역이 된다. 또한 <펼쳐짐> 연작에서는 색띠의 윤곽선이 더욱 명확해졌으며 색채도 겹쳐짐 없이 순수한 상태로 나타난다. 1961년 봄 루이스는 <펼쳐짐> 연작을 중단하고 그의 마지막 연작이 된 <띠> 연작을 시작했다. 이 연작에서는 수직 색띠 다발이 빈 캔버스 공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여기에서 겹쳐짐은 거의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단일한 순색으로 이루어진 수직 띠들의 윤곽선은 매우 명확하고 단지 색채 조화와 대비를 위해 부분적으로 조금 번져 있다. 색띠의 너비도 색채 고유의 색감 정도나 체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
루이스가 이루어낸 색채의 비물질화로부터 그의 계승자들은 미술작품의 비물질화까지 끌어냈다. 이런 예로 순수하게 시각적인 색 안개와 같은 줄스 올리츠키의 모노크롬 스프레이 회화와 물감이 흠뻑 스며든 색면 위에 찍힌 래리 푼스의 진동하는 다원형 점, 로버트 어윈의 구부러진 색 원반을 들 수 있다.
러시아계 미국 화가 줄스 올리츠키Jules Olitski(1922~)는 1939~42년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 1940~47년 뉴욕의 보자르 디자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한 후 자드킨 조각학교와, 1949~50년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공부했다. 1954년 뉴욕 대학에서 미술 교육으로 학위를 받고, 1956~63년 롱아일랜드의 포스트 칼리지, 1963~67년까지 베닝턴 칼리지에서 교수직을 역임했다. 올리츠키는 추상표현주의에 반발하여 프랭컨탤러와 루이스가 시작한 염색 기법을 채택하여 발전시켰다. 1960년대 초의 이른바 ‘중심핵’ 그림들은 놀런드의 동심원과 루이스의 <펼쳐짐>을 연상하게 하는 육중한 윤곽선을 결합한 것이다. 1964년에는 스프레이를 사용하여 제작하는 올오버 회화를 시작했다. 윤곽선이 없어진 그의 작품들은 1960년대 후반 단색 물감을 스프레이로 뿌려 제작하는 색면 회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그는 주로 이것으로 유명해졌다. 이런 작품에서 올리츠키는 형태나 물감의 물리적 영향에서 벗어나 신비로운 색감이 만드는 순수한 시각적 장을 창출하려고 했다. 또한 염색 기법과 그 이후의 스프레이 뿌리기 기법을 결합함으로써 유사한 톤의 색띠들이 이루는 미묘한 대비와 함께 신비롭게 떠다니는 색채 안개로 밝고 현란한 색채 효과를 만들어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형태나 원근법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색채만으로 환영적 공간을 창조했다. 1970년대에는 색채의 범위를 줄여 회색과 갈색의 미묘한 변화를 주로 다루었으며, 간혹 아크릴 물감을 물에 풀어 사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 화면에 도입된 표현적인 표면 효과는 새로운 주목을 받았다. 그는 모노크롬에 가까운 색면을 구사한 화가들 중에서도 가장 개성 있는 방식을 전개했다.
도쿄 태생 미국 화가 래리 푼스Larry Poons(1937~)는 뉴잉글랜드 음악학교와 뉴욕의 신사회 과학원에서 작곡가 존 케이지의 지도를 받은 뒤 1958년 보스턴 미술관 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푼스는 프랭컨탤러와 루이스와 더불어 색면 회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졌지만, 그의 개인적인 양식은 색면 회화와 차이가 있다. 푼스는 강렬한 색채 위에 계란형의 점들을 그렸는데 이는 시지각의 작용에 의해 후퇴하는 듯이 보이며 신기한 잔상을 만든다. 이처럼 독특한 시각 경험을 야기하기 때문에 그는 한때 옵 아트 화가들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1960년대 말 그의 작품은 좀더 회화적이 되어 색채는 더욱 엄격해지고 점은 박테리아를 현미경으로 확대시킨 것과 유사한 줄무늬들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그림에 깊이감과 공간감이 생겼으나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색채의 시각적 경험이었다.
미국 화가 로버트 어윈Robert Irwin(1928~)은 지각 심리학 분야의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고, 1966년부터는 작품을 통해 지각적 조작과 공간 변경을 위한 조작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구성 요소들의 수적인 측면이나 복합적인 측면에서 볼 때 끊임없이 단순성을 향해 나아갔다. 그가 1968~69년에 제작한 ‘원반 회화’ 연작은 유명한데 이는 원반 형태를 벽에 걸고 주의 깊게 빛을 비춰 굴절시킨 것으로 정확한 형태라든가 정해진 위치 없이도 독립적으로 지각되는 색채를 만들어냈다. 1970년대 초에는 조심스럽게 자르고 광택 처리하여 프리즘처럼 무지개 빛이 나는 아크릴 수지를 재료로 원주를 제작했으며, 캘리포니아 주 노스리지 시의 의뢰를 받아 10m 높이의 조각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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