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꼬리가 올라간 사람은 허영심이 많고 헛된 망상을 잘 한다

 

 

“머리가 심하게 아프면서, 마치 텅 빈 것같이 느낌이 아주 이상해요. 또 머리가 아프면 막 어지럽고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요. 헛구역질도 하구요.”

10년 동안 신경성 위장병으로 약을 먹고 있는 남씨가 호소한 증세입니다. 요즘 들어 머리가 너무 아파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면서 남씨는 조금만 신경을 쓰면 목이 뻣뻣하게 굳어서 제대로 목을 돌리지 못할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목을 주무른다고 했습니다.

남씨의 머리는 몸집에 비해 큰 편이었습니다. 한의학에서는 큰 곳에 병이 잘 온다고 합니다. 머리가 크면 머리병이 오고 옆구리가 길면 옆구리에 병이 오기 쉽습니다. 큰 부분은 기능이 실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새 자꾸 써먹게 되고, 그러면 쉽게 병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생긴 대로 병이 온다>의 저자 조성태가 복진하니 명치 부위에 통증이 느껴진다고 했고, 배꼽 위를 눌러 보니 그곳도 아프다고 했습니다. 소화도 잘 안 되고 신경을 쓰면 명치 부위가 답답해지지 않느냐고 물으니 “예, 소화도 안 되고 신경만 쓰면 아프고 답답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남씨의 얼굴은 붉은 편이었고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으며 코끝이 뾰족하여 신경이 예민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조성태는 병명을 담화두통痰火頭痛이라고 했습니다. 담화痰火가 치솟아 뒤흔듦으로써 발생한 두통이란 말입니다. <의초유편醫鈔類編> ‘두통문頭痛門’에서 "담화로 인한 경우는 담이 열을 생성하고 열이 풍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담화가 치솟아 숨길을 막고 풍으로 화하면 자연히 소리가 난다. 가벼우면 매미울음소리 같고 심하면 천둥소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남씨에게 담화두통에 처방하는 가미이진탕을 복용하게 했습니다. 이 약을 몇 제 복용한 후 남씨는 두통도 치료되었을 뿐만 아니라 뱃속도 편해졌다고 말했습니다.

조성태는 눈꼬리가 올라가 있고 코도 위로 들려 있는 사람을 태양형으로 분류합니다. 여기서의 태양형은 사상체질에서 말하는 태양형과는 다릅니다. 양명, 궐음, 태양, 소양, 소음 등 육근이 인식할 수 있는 대상 경계인 육경六境에 의해 분류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육근六根이 인식할 수 있는 대상 경계를 이르는 말이입니다. 불교에서는 눈·귀·코·혀·몸의 다섯 감각기관과 이를 통솔하는 의근意根을 육근이라 하는데, 이에 대응하는 인식대상이 육경六境입니다. 즉 눈으로 보는 것은 색경色境, 귀로 듣는 것은 성경聲境, 코로 냄새를 맡는 것은 향경香境, 입으로 맛을 아는 것은 미경味境, 몸으로 느끼는 것은 촉경觸境, 마음으로 아는 것은 법경法境입니다.

<생긴 대로 병이 온다>의 저자 조성태는 태양형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예민하고 섬세하다는 인상을 준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의미로도 감정의 변화를 걷잡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금방 좋아졌다 금방 싫어졌다 하는 등 마음의 갈피를 못 잡으며 허영심이 많고 헛된 망상을 잘 합니다. 한 마디로 현실감이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감성이 풍부하고 상상력도 뛰어나기 때문에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 방면에서 남다른 재능을 나타냅니다.

눈꼬리가 올라간 사람은 예민한 성격대로 신경성 질환이 잘 찾아옵니다. 기가 제대로 운행하지 못하고 울체되어 가슴답답증이 오기도 하고, 뒷목이 뻣뻣하면서 목에 뭔가가 걸린 듯 불편을 호소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증상은 대부분 심화心火에서 비롯합니다. 또 관절이 약해 무릎, 어깨, 허리 등이 늘 시원찮고 손발이 자주 저리며 항상 피곤해합니다. 아울러 발열오한이나 코막힘, 두통 같은 것도 이들을 괴롭히는 주요 증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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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과 오행의 관계

 

 

음양과 오행은 모두 기(氣)의 분화다. 기의 가도에서 보면 음양은 두 기운이고 오행은 다섯 기운으로, 오행은 음양을 세분화한 것이다. 기가 음양을 낳고 음양이 오행을 낳는다. 『주역周易』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역(易)에는 태극(太極)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는다.” 태극(氣)이 양의(陰陽)를 낳는 것이 첫 단계의 분화이며, 음양이 사상(太陽, 太陰, 少陽, 少陰)을 낳는 것이 두 번째 단계의 분화이며, 사상이 팔괘를 낳는 것이 세 번째 단계의 분화이다. 여기서 오행을 말하고 있지 않지만, 실제로 사상팔괘(四象八卦)는 오행(五行)이다. 사상을 사행(四行)으로 볼 수 있으니 곧, 水火木金이며, 팔괘는 水火木(陰木과 陽木)金(陰金과 陽金)土로 볼 수 있다.

음양과 오행에는 호환의 관계가 있다. 오행은 음양이 화생한 것이고, 오행은 두 쌍의 음양에 중앙 土 하나를 더한 것이다. 음양은 오행을 간략화한 것이며, 오행은 음양을 세분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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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크면 겁이 많다

 

 

흔히 눈이 크면 겁이 많다고 하는데, 이는 한의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말입니다. 눈이 큰 사람은 대체로 간담肝膽이 허한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간담은 간과 쓸개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며, 속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간담이 허하면 겁이 많아 무서움을 잘 타고,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처럼 괜히 불안해합니다. 무서움이 많기 때문에 혼자 있기를 싫어하고 밤에 잠을 잘 때에도 불을 켜놓곤 합니다.

간담이 허하기 때문에 눈이 큰 사람은 목에서 가래가 잘 끓고 편도도 자주 붓습니다. 그래서 감기에 걸렸다 하면 열이 많이 나는데, 목 안과 코의 뒷부분에 위치하는 편도tonsil가 부울 때 반드시 열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편도는 5세 전후까지 점점 커지다가, 그 이후에는 점차 작아집니다. 손톱이 얇으면서 잘 부러지는데, 손톱이 간담의 영화榮華를 반영하는 데서 연유합니다. 간담의 기능이 좋으면 손톱이 단단하고 빛깔도 투명하며 건강합니다. 그리고 눈이 큰 사람은 두통 증상도 자주 겪습니다.

따라서 눈이 큰 사람은 간담의 기를 보해주는 모과나 밀, 총백(파의 잔뿌리가 달린 부분과 파의 흰 부분. 부리 끝에서 위로 10cm 정도가 됨), 부추 등을 많이 먹으면 좋습니다. 더덕을 달여 먹거나 나물을 만들어 먹어도 간기를 보호해줄 수 있습니다.

눈 자체만 놓고 보면 무엇보다도 화火에 의한 눈병이 가장 많습니다. 누구든 심하게 화를 내거나 과도하게 신경을 썼을 때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면서 눈앞이 아득해지고 침침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럴 대 마음의 울화를 풀어주는 억청명목탕抑靑明目湯을 복용하면 눈이 밝아지는데, 눈병이 화에서 비롯했음을 증명합니다. 억청명목탕은 화를 많이 내서 간肝을 상傷하게 하여 눈이 어두워지고 구름이나 안개 속에서 보고 있는 듯한 것을 치료하는 약입니다.

몸에 화열이 많이 쌓이면 갑자기 눈이 벌겋게 붓고 눈이 부시면서 깔깔한 느낌이 듭니다. 또 눈물이 멎지 않으면서 별안간 한기가 돌고 눈앞이 흐릿해집니다. 이때에는 심장과 간에 열이 올라 눈이 아픈 것이므로 통증 부위인 눈만 치료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심장과 간에 있는 열을 내리고 기와 혈이 잘 순환되도록 치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눈병은 저절로 낫습니다.

<생긴 대로 병이 온다>의 저자 조성태는 눈곱으로도 건강을 진단할 수 있다면서 눈곱이 많이 끼면서 단단하거나 진득진득하면 폐가 실한 것이고, 눈곱이 묽으면 폐가 허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눈병이 들어 아픈데도 눈곱이 끼지 않는 것은 몸의 원기가 쇠약해져있음을 의미합니다.

눈병이 생기면 닭고기나 생선, 국수, 술, 찹쌀, 뜨거운 음식, 기름진 것, 짠 것, 신 것 등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자극성 음식 대신 채소나 과일 위주로 담백하게 신단을 짜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성생활도 되도록 자제하고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도록 심리적인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눈병은 소금만으로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습니다. 소금은 피가 몰린 것을 잘 풀어주기 때문에 눈이 흐릿하게 보이지 않거나 충혈되었을 때 소금물을 끓여 눈을 씻으면 매우 좋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소금 끓인 물로 양치를 하거나 눈을 씻으면 눈이 밝아지고 치아가 튼튼해지는 데 좋은 효과가 있습니다. 눈알이 까닭 없이 부으면서 앞으로 돌출되는 것 같을 때에는 눈에 맑은 물을 자주 넣어주면 절로 낫습니다. 이 물에 맥문동, 뽕나무뿌리껍질, 산치자를 달여서 복용해도 좋습니다.

눈을 너무 혹사시키면 간이 피곤해지는데, 이를 한의학에서는 간로肝勞라 합니다. 이때에는 눈을 똑바로 떴다가 감고 감았다가 다시 드는 식으로 눈 운동을 자주하면 좋습니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간로에 의해 생긴 눈병은 “3년 동안 눈을 감고 있지 않으면 치료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손바닥을 뜨거워지도록 비빈 다음 두 눈에 갖다 대고 여러 번 꾹꾹 누르면 눈다래끼도 생기지 않고 눈이 밝아집니다. 손가락으로 양쪽 눈썹 끝에 작은 구명이 있는 곳을 누르고, 손바닥이나 손가락으로 광대뼈 부분을 비빕니다. 귀를 손으로 40번 정도 잡아당기면서 비벼 약간 따뜻해지면 곧 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립니다. 이렇게 여러 번 한 후에 침을 몇 번 삼킵니다. 장기간 매일 이렇게 하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큰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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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자로서의 죽음

 

 

 

죽음이라는 현실을 잘못된 믿음으로 감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죽음이라는 최후를 보편적이거나 한참 뒤에 일어날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우리 자신에게 일어날 매우 특정하고 구체적인 죽음으로 반드시 먼 미래에만 일어나는 종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은 해방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두개골이나 손의 뼈를 만져 보면 다른 죽어가는 생명체처럼 우리도 뼈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뼈만 남을 것이며 시간이 더 지나면 그 뼈마저도 사라지리라는 사실을 언젠가는 직접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사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믿음은 죽음에 대한 거부일 뿐이며 계속해서 얻으려고 안달하고 애쓰는 행동을 정당화한다. 불교 승려들은 자신이 늙고 병들어 죽으면 모든 것이 무상하고, 결국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므로 남는 것은 우리의 행동(업業)밖에 없다는 사실을 매일 되새긴다. 미래로 나아가는 에너지의 유형과 흐름을 결정하는 것이 우리 행동이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마라. 이것은 절망을 부추기는 부정적인 수행이 아니다. 망상에서 빠져나와 살아 있게 하는 우리를 해방하는 수행이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나서야 우리는 완전히 살아 있을 수 있다. 죽음을 알게 되면 삶을 낭비하지 않는 지혜가 생긴다. 죽음은 자신이 상상하는 미래에 이르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지나쳐버리지 않고, 삶을 인식하며 매 순간 깨어 있게 한다. 또한 우리를 현재에 살도록 해주며 지금이야말로 살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결코 오지 않을 내일에만 매달려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사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노선사의 지혜와 솔직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기에 노선사는 알 수 없는 일을 추측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삶에 충실하라고 가르친다. 조용히 죽음을 인정하면 무엇이 두려울까? 특별해지기 위해 안달할 필요가 없다.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경이롭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숨을 쉬고 미소를 짓게 되고, 매 순간 어떤 환경에서도 좋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어 우리 인생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상대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죽음은 우리의 존재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관한 엄연한 사실이다. 위대한 영적 지도자의 죽음, 환생, 전생 퇴행 요법이나 우리 자신의 경험과 통찰로 궁극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불멸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될는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들이 다른 차원에서는 죽음이 실제로 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왜곡하는 데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죽음을 잊는 것은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법을 잊는 것과 같다.
슬퍼하는 유가족에게 고인께서는 “좋은 곳으로 가셨습니다” 하고 유사한 말로 위로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을 것이다. 때로 유가족은 그런 말을 선의로 받아들이고 기운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유가족은 이런 상투적인 말을 들으면 더욱 혼자라고 느끼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얼마나 슬픈지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궁극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죽음은 단순히 끝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통찰은 죽음을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 누군가 죽으면 반드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무엇인가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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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의 이슬람주의 이데올로기

 

 

 

 

세계 곳곳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지역적 조직은 잊은 채, 대규모 조직을 세계화의 관점에서만 보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사실, 이슬람 전통은 공통분모가 있는, 다양한 지역적 전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슬람주의는 혁명적 국제주의 운동가의 모습을 띤 기동성 세력의 방어 문화가 표출된 것이다. 현지의 전통 동향과 범세계적 이슬람주의 조직은 서로 소통하고 있다. 종교는 사회적 현실에 내재되어 있긴 하나 이를 반영하면서도 독자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단순히 “정치적 이슬람교”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연관성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종종 그렇듯, 이슬람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이슬람답지 못하다” 고 치부하는 건 타당하지 않다. 사실, 이슬람주의란 이슬람교의 원리주의 이데올로기를 가리킨다.
이슬람주의의 정치적 아젠다는 57개국과 세계에서 다수 및 소수 민족으로 사는 17억 무슬림을 동원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무슬림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아니다. 비이슬람주의 무슬림에게는 이슬람교의 무슬림 공동체에 든다는 것이 “신앙인 공동체” 의 일원이라는 이야기와 별반 차이가 없다. 1장에서 나는 이슬람주의의 움마사상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상상의 공동체” 를 언급했는데, 이슬람주의의 세계관은 전 인류와 구별되는 총체적인 “우리” 개념을 장려하기 위해 움마를 정치에 합류시킨다. 이 정체성 정가 이슬람주의를 조성하고 현지와 지역적, 세계적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슬람주의가 종교를 정체성의 표식으로 이용하는 것은 단일 이슬람교가 있다는 주장을 연상하게 한다. 이는 이슬람교를 제외한 세계에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이슬람주의의 정체성 정치는 화합이 아닌 분열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이 꾸며낸 전통 중 일부는, 인류를 이슬람교의 세계질서로 유도하는 단일 조직으로 전 무슬림 공동체를 통합하기 위한 노력에서 읽을 수 있다. 이 비전의 원류는 사이드 쿠틉의 저작에서 비롯된다19. 66년에 처형된 쿠틉은 살아생전 자신의 비전이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비전을 구현하는 데 도입될 수단을 두고 이슬람주의 내에서 논쟁이 일고 있다. 그러나 기성종교와 이슬람 급진주의자들Salafists(살라피스트들)은 지하디스트들을 비난할 때 세계관은 배제한 채, 관행에만 반대했다. 존 켈세이는 최근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주창한 무력적인 비전은 그를 비판한 자들의 비전이기도 하다. …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수단은… 잘못되었으나… 해결책이 이슬람 지도부를 확립한다는 데 있다는 판단에는 상충하지 않는다. … 무력의 문제는 단순히 전술에 있다기보다는 이슬람 지도부의 개념에 있다.
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주의에도 견해의 일치와 충돌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슬람교의 정치화와 이슬람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연구할 때에는 “다양성 내에서의 통일” 을 거론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것들의 공통분모는 이슬람 지도부 개념이고, 최근 불거진 이견은 폭력과 관계가 깊다. 이슬람주의를 창시한 하산 알반나는 폭력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다. 그는 고전 지하드를 지하드운동으로 변모시켰으나, 정치적 이슬람교의 정신적 지주인 사이드 쿠틉은 지하드를 이슬람교의 세계질
이슬람주의와 정치질서를 이룩하기 위한, “이슬람의 세계 혁명” 으로 처음 해석했다. 혁명의 첫 단계인 “이슬람국가” 개념은 기존의 평화의 집dar al-Islam(다르 알이슬람)이라는 영토에 국한되지 않고, 세속주의에 도전하는 가운데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
에까지 확대된다. 이슬람주의자들의 발상에 따르면, 유럽은 이슬람 영토권dar al-shahadah(다르 알샤하다)으로 간주된다. 샤하다란 이슬람교의 신앙고백으로, 알라 신
께 순복하고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일컬으며,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 중 첫 번째에 해당하고, 정치적 논쟁이 아닌 이슬람교의 신앙과 관계가 깊다. 다르 알이슬람을 다르 알샤하다로 수정한 인물이 타리크 라마단이다. 이 개념은 이슬람교의 확장을 가리키며 이슬람주의 프로젝트의 일환28으로 유럽을 재편하려는 야심을 담고 있다. 라마단은 이슬람 영토권을 유럽에 적용29함으로써 2,300만 무슬림 이민자를 위해 이슬람교의 “반체제 문화” 를 제안했다. 이는 무슬림 이민자들을 유럽 시민에 통합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들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슬람교도들의 종족화를 염두에 둔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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