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방자로서의 죽음

죽음이라는 현실을 잘못된 믿음으로 감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죽음이라는 최후를 보편적이거나 한참 뒤에 일어날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우리 자신에게 일어날 매우 특정하고 구체적인 죽음으로 반드시 먼 미래에만 일어나는 종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은 해방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두개골이나 손의 뼈를 만져 보면 다른 죽어가는 생명체처럼 우리도 뼈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뼈만 남을 것이며 시간이 더 지나면 그 뼈마저도 사라지리라는 사실을 언젠가는 직접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사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믿음은 죽음에 대한 거부일 뿐이며 계속해서 얻으려고 안달하고 애쓰는 행동을 정당화한다. 불교 승려들은 자신이 늙고 병들어 죽으면 모든 것이 무상하고, 결국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므로 남는 것은 우리의 행동(업業)밖에 없다는 사실을 매일 되새긴다. 미래로 나아가는 에너지의 유형과 흐름을 결정하는 것이 우리 행동이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마라. 이것은 절망을 부추기는 부정적인 수행이 아니다. 망상에서 빠져나와 살아 있게 하는 우리를 해방하는 수행이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나서야 우리는 완전히 살아 있을 수 있다. 죽음을 알게 되면 삶을 낭비하지 않는 지혜가 생긴다. 죽음은 자신이 상상하는 미래에 이르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지나쳐버리지 않고, 삶을 인식하며 매 순간 깨어 있게 한다. 또한 우리를 현재에 살도록 해주며 지금이야말로 살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결코 오지 않을 내일에만 매달려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사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노선사의 지혜와 솔직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기에 노선사는 알 수 없는 일을 추측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삶에 충실하라고 가르친다. 조용히 죽음을 인정하면 무엇이 두려울까? 특별해지기 위해 안달할 필요가 없다.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경이롭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숨을 쉬고 미소를 짓게 되고, 매 순간 어떤 환경에서도 좋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어 우리 인생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상대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죽음은 우리의 존재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관한 엄연한 사실이다. 위대한 영적 지도자의 죽음, 환생, 전생 퇴행 요법이나 우리 자신의 경험과 통찰로 궁극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불멸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될는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들이 다른 차원에서는 죽음이 실제로 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왜곡하는 데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죽음을 잊는 것은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법을 잊는 것과 같다.
슬퍼하는 유가족에게 고인께서는 “좋은 곳으로 가셨습니다” 하고 유사한 말로 위로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을 것이다. 때로 유가족은 그런 말을 선의로 받아들이고 기운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유가족은 이런 상투적인 말을 들으면 더욱 혼자라고 느끼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얼마나 슬픈지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궁극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죽음은 단순히 끝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통찰은 죽음을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 누군가 죽으면 반드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무엇인가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