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생에게 

 

우선 <예술의 종말 이후>를 열심히 읽는다니 반가워요.
몇 사람에게서 듣는 이야기지만 책이 어렵다고 합니다.
인터넷으로 교보문고에 들어가니 그래도 이 책이 미술 이론서 중에는 최고 베스트셀러이더군요.
늦은 감이 있지만 예술의 종말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 고무됩니다.
번역자로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after service 차원에서 설명해야겠지요.
지난 번 뉴욕에 가서 단토를 직접 만나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분 에이전트로부터 e-mai 주소를 받았지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어 연락을 못하고 서울에 돌아와 연락했습니다.
그분의 답글은 매우 따뜻하며 맘씨좋은 이웃 아저씨의 다정한 글이었습니다.
그나마 e-mail로 연락이 가능하여 다행하게 여깁니다.
난 그분의 이론을 우리나라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앞장서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그만 각설하고 ...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내러티브란 말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데 특별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글자 그대로 이야기란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객관적인 역사관을 피력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시도가 있어 왔지만 결국은 각각 개인의 견해를 밝힌 것에 불과하고 그래서 그 사람의 이야기 혹은 내러티브이다라고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자리의 내러티브', '그린버그의 내러티브' 등의 말은 그 사람들의 주장이 과거에 매우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는 개인적인 견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토가 내러티브란 말을 사용하는 것인데 이 말은 또한 예술의 종말을 주장하는 아더 단토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끊임없는 내러티브의 연속이라 하겠지요.

본론으로 들어가서

제6장에서 '역사의 경계' 혹은 '역사의 울타리'란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동일한 뜻으로 누군가가 역사를 주류와 비주류로 구분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며,
오늘날 다원주의에서 경계 혹은 울타리가 모두 무너졌음을 볼 때 과거 경계와 울타리를 운운하며 비주류를 배척한 오류를 단토는 지적하여 바로 잡으려고 합니다.
얼마 전 석방된 송두율 교수가 스스로를 경계인이라고 정체성을 밝혔듯이 역사의 울타리 속에 스스로를 갇히게 하지 않고 울타리를 넘나들며 울타리 안과 밖을 공평하게 바라보겠다는 태도입니다.
매우 진전된 태도로 진보적인 생각이지요.

단토는 '모더니즘의 이론'을 확립한 클레멘트 그린버그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단토는 그린버그가 울타리를 만들고 미술을 주류와 비주류로 제맘대로 분류했음을 비평합니다.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의 특징으로 회화의 본질인 2차원의 세계를 인정하고 2차원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3차원의 사물 나무를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입체감을 느끼게 그린 후 명암으로
'환영'을 창조하여 실재하는 나무처럼 보이게
그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특징으로 모더니즘의 시기에는 용인할 수 없는 점으로 꼽았습니다.
그가 잭슨 폴록을 미국 최고의 화가로서 유럽 화가들의 대명사 피카소와 겨룰 만한 예술가로 꼽은 이유는 폴록이 3차원으로 보이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2차원의 예술인 회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물감을 뿌리거나 칠해 회화가 "물감으로 구성된 물리적 사물의 창조"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린버그의 많은 평론을 통하여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찾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모더니즘의 물질주의적 명령을 너무 열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추상표현주의는 다른 예술이나 매체의 권한까지도 행사했는데, 예를 들면 물감을 두텁게 칠하여 조각적인 효과를 냄으로써 조각의 영역 속으로 넘쳐흘렀습니다.
그린버그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각각의 예술과 매체는 다른 예술과 매체의 영역을 넘보지 않는 것을 그린버그는 모더니즘 미술사의 추동원리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린버그는 추상표현주의를 비판하게 되었고 폴록과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는 그린버그에게 반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린버그는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회화적임 painterliness'으로 보고 찬양했는데 지나친 물감의 남용이 3차원적으로 보여지게 되었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린버그는 추상표현주의 회화에서의 공간은 "또 다시 눈속임 그림의 환영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 그것은 '읽히는 것'이라기보다는 더 촉각적인 것, 즉각적인 지각의 대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단토는 그린버그의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단토는 "물감이 3차원적으로 됨에 따라 조각의 정체성을 띠게 되었으며, 공간이 또 다시 환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물감이 실재real가 된 것은 아님을 지적했습니다.
한편 그린버그는 추상표현주의를 버리고 '탈회화적 추상 post-painterly abstraction'을 주장했는데 이런 그의 주장에 일치한 회화가 바로 '컬러필드 color-field'로서 물감을 뿌리거나 덧찰하여 두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감을 수채처럼 연하게 그리고 평면을 넓게 칠하는 그림을 말합니다.
물감이 캔버스에 은은하게 적셔지고 퍼지는 추상 그림을 그린버그는 컬러필드라고 부르고 이를 찬양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런 류의 회화를 추구한 화가들이 바로 헬렌 프랭켄탈러, 모리스 루이스, 케네스 놀랜드 등으로 그린버그는 이들을 미술 발전의 투사들로 보고 전시회를 열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단토는 그린버그가 찬양했던 추상표현주의와 이제 태도를 바꿔 찬양하기 시작한 컬러필드 모두를 "바자리적 회화와는 대조적으로 삶으로부터 더욱 더 단절되었고, 미술계 안에 더욱 더 격리된 상태로 존재"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한편 추상표현주의 이후의 세대 화가들은 현실 및 삶과의 접촉 속으로 미술을 되돌려놓고자 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1960대를 풍미한 팝아트 화가들입니다.
이들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앤디 워홀이지요.
팝아트는 과연 시각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린버그는 여태까지 자신이 주장한 이론에 근거해서 팝아트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팝아트를 일시적인 일탈 현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린버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팝아트를 격하시켰습니다.

"지금까지 팝아트는 취미의 역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에피소드에 해당하긴 하나 현대 미술의 진화과정에 나타난 진정으로 새로운 에피소드에 이르지는 않았다."

단토는 그린버그가 팝아트를 옵아트와 미니멀리즘과 더불어서 '진기한 미술 novelty art'의 범주 속으로 좌천시켰다면서, 그린버그가 진기한 미술을 비열하게도 골동품 가게에서 팔리는 진기한 물건이라고 하는 케케묵은 의미로 사용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린버그는 자신의 이론에 근거해서 탈회화적 추상 이후의 모든 미술을 진지하게 다룰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의 비평적 산출이 거의 멈춰버린 것은 당연했지요.
그린버그의 내러티브의 한계가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1992년 여름 그린버그는 한 소집단에서의 강연을 통해 지난 30년의 미술을 회고하면서 미술이 "이렇게 천천히 움직였던" 적은 없었다는 말로 지난 3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인양 말했습니다.
청중 중에 어떤 사람이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느냐고 묻자 그린버그는 "데카당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린버그는 미술의 역사가 회화에서의 발명을 통해서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단토는 이런 그의 생각이 터무니 없음을 지적합니다.

단토는 그린버그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그린버그는 미술을 바자리 시대에는 모종의 재현주의와 동일시되었다가 19세기 후반의 어떤 시점에 와서 이런 잘못된 동일시로부터 벗어나 적어도 회화의 경우 자신의 물질적 매개체인 물감과 캔버스와 표면과 형상과 동일시되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도식에 맞지 않은 많은 미술이 역사의 경계 밖에 놓여졌음을 지적합니다.
그린버그식의 견해는 미술사를 진보의 과정으로 보는 것으로 단토는 이를 부정합니다.
진보의 개념이 그린버그에게는 중요했으므로 그는 초현실주의를 역사적 퇴행으로 간주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반형식적이고 반미학적인 니힐리즘은 - 온갖 억지스러운 넌센스를 초래한 다다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 결국, 현대 미술의 금욕주의에 의해 쫒겨난 들뜬 부자들과 국외추방자들과 미적 게으름뱅이에게 주어진 축복임이 입증되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 특히 살바도르 달리의 경우 자연주의적 재현의 그림을 그린 것을 그린버그는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린버그는 초현실주의를 역사의 경계 밖에 놓았습니다.

단토의 크게는 예술의 종말 작게는 미술사의 종말은 이러한 그린버그식의 울타리 만들기가 무용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진보로 보고 진보에 일익을 담당하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무가치하게 처리하는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단토는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미술론은 취미에 의해 규정된 미술이며, 본질적으로 취미를 가진 사람들, 특히 비평가들을 위해 만들어진 미술임을 지적합니다.
그린버그는 한 논문에서 "예술이 되고자 하는 것들은 취미를 통해 경험되기까지는 예술로 가능한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했는데, 이 말은 공감됩니다.
그러나 그는 취미의 권역을 벗어나기는 하지만 미술의 맥락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작품을 간과했습니다.
예를 들어 마르셀 뒤샹의 변기는 취미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성공을 거둔 작품입니다.
단토는 뒤샹을 포함하여 팝아트 예술가들이 미술의 본질적 특질들을 우연한 특질로부터 구별하고, 미술을 재현이나 환영 따위의 오염물질로부터 정화한 사건을 꼽아 과거 내러티브들 바자리와 그린버그를 포함한 영향력 있는 미술사학자와 비평가들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이를 그는 역사의 울타리 혹은 경계가 무너지는 새로운 국면으로 이해합니다.

뒤샹의 변기는 상점의 변기와 똑같습니다.
워홀의 브릴로상자는 슈퍼마켓의 브릴로상자와 겉으로는 똑같습니다.
"예술과 실재의 관계라고 하는 철학적 문제를 풀기 위해 비평가들은 지각적 식별불가능성의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는 차이점들이 전혀 없을 정도로 실재와 너무 닮은 유형의 미술을 분석하는 일에 착수해야" 했습니다.
워홀의 브릴로상자와 슈퍼마켓의 브릴로상자를 무엇이 구별해주는지 비평가들은 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이 6장의 요지입니다.
다음 기회에 7장 8장 등 순서적으로 요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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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
 

  얼마 후 레오나르도는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 Portrait of Ginevra de? Benci>를 그렸다.
이 작품을 1967년 미국 워싱턴의 국립화랑은 백만 달러 이상을 주고 구입했고 미국 내에 있는 레오나르도의 유일한 작품이 되었다.
패널에 그려진 이 작품은 아랫부분이 약 12~15cm 잘려나갔으므로 초상화로서 낯선 느낌을 준다.
잘려진 부분에는 그녀의 팔과 손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이 패널 뒤에는 종려와 월계수로 만든 화관에 에워싸인 로뎀나무 가지들이 그려져 있고 '아름다움은 덕을 꾸민다 Virtutem forma decorat'라고 적혀 있다.
화관의 아랫부분은 사라진 상태인데 전통적 사이즈라면 세로 가로 3cm 4cm였을 것이다.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그가 습작한 드로잉이 핑크색 종에에 은색으로 그려져 있어 사라진 부분을 알 수 있다.
습작 드로잉을 보면 오른팔 손가락이 코르셋 레이스를 만지락거리는 걸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모나리자 Mona Lisa>를 예고하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실재에 충실했으며 그는 "인물을 그릴 때는 성격이 겉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칭찬을 받을 수 없다"고 적었다.
지네브라Ginevra란 이름은 배경의 어두운 색의 로뎀나무 숲에서 알 수 있는데, 로뎀나무juniper는 이탈리아어로 지네프로ginepro이다.
로뎀나무는 지네브라의 고상한 인격을 나타내는 데 매우 적절했다.
지네브라는 1481년에 타계한 부유한 은행가 아메리고 데 벤치의 딸로 1474년 1월 15일 17살의 나이로 루이지 디 베르나르도 디 라포 니콜리니란 남자와 결혼했다.
시인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했으며 로렌초 데 메디치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소네트를 두 점 썼다.
시인들이 찬양한 그녀의 미모를 레오나르도는 손의 언어로 찬양했다.
지네브라는 1521년경에 타계했다.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는 『예술의 심리학 La Psychologie de l'art』에서 레오나르도가 "과거 유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을 창조했으며 그것은 인물을 그려넣기 위한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특성과 관객 모두가 빠질 수 있는 무한한 공간이다"라고 적었다.
이런 공간은 <모나리자>에서 다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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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명단에 빠져 있었다
 

  1481년에 변화가 일어났다.
로렌초 데 메디치에 대한 살해 음모가 있었고 사전에 이를 안 그는 음모의 손에서 벗어났다.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비아 델라 프레스탄자의 집으로부터 비아 기벨리나의 보다 큰 아파트로 가차를 옮겼다.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를 동행하여 베네치아와 로마에 가기를 바랐는데, 베로키오는 말 탄 콜레오니Colleoni의 조상을 베네치아에 건립할 것을 의뢰받았고 또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부름을 받았다.
교황은 로렌초에게 화해의 제스처로 이제 막 완공한 자신의 이름을 딴 시스티나 예배당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기 위해 피렌체의 최고 화가 몇 명을 보내줄 것을 청했다.

로렌초는 일종의 문화적 프로파간다cultural propaganda 정책을 펴고 있었으며 나폴리 왕에게 건축가 줄리아노 다 마이아노Giuliano da Maiano를 보냈고 또 베로키오로 하여금 피스토이아로 보내 추기경 니콜로 포르테구에리를 기념하는 대리석 조상을 제작하게 했다.
교황이 시스티나 예배당 장식을 위해 로렌초에게 예술가들을 보내달라고 청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피렌체 예술가들은 열광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바티칸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건물이기 때문이다.
피렌체에서는 그만한 큰 작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역시 매우 들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감을 맛보았는데, 보티첼리, 시그노렐리, 기를란다요, 페루지노는 선발되어 로마로 향했지만 그의 이름은 명단에 빠져 있었다.

레오나르도의 이름이 제외된 것은 로렌초가 그를 피렌체 최고 화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 다른 일감을 주기 위해 뺀 것일 수 있다.
로렌초와 레오나르도는 거의 동갑내기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가 로렌초와 연관된 일을 한 것이 없으므로 로렌초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로렌초는 아버지 코시모에 비해 예술가들의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이 부족했다.
코시모는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마사초, 브루넬레스키, 필립포 리피 등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적극 후원했지만 그 밖의 예술가들에게는 적극적이지 못했으며 의뢰한 작품의 수도 얼마 안 되었다.
그는 주로 청동 장식, 치장 벽토 장식가, 메달 잉그레이버, 상감 세공가들에게 주문했다.
그가 선호한 것들은 서적, 골동품, 값비싼 화병, 호기심을 갖게 하는 물건 예를 들면 카메오와 음각한 보석 등으로 음각한 보석의 경우 무려 5, 6천 점이나 수집했다.
그는 별장도 몇 채 안 지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도 말년에 지었다.
그는 화가들을 고용하기보다는 대사처럼 외교적 수단으로 국외로 보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예술가는 피에로의 형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였다.
안토니오는 로렌초의 명을 받고 보티첼리와 함께 로마로 갔는데, 두 사람 모두 인문주의자들이었으며 신화에 관심이 많아 모두 신화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다.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Antonio Pollaiuolo(1432년경~98)는 동생 피에로와 함께 피렌체에 작업장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화가, 조각가, 금세공가들이지만 특별한 양식은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했다.
안토니오는 주로 금세공에 재주가 있었고 피에로는 회화에 재능이 있었다.
피에로가 그린 몇 점의 그림은 보통 수준의 작품들로 평가받지만 안토니오의 그림은 전무하고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작품 역시 피에로의 작품 그 이상은 못된다.
형제가 그린 것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런던 국립화랑에 소장되어 있는 <성 세바스천의 순교 Martyrdom of St. Sebastian>로 1475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 앞 활을 들고 있는 누드들은 안토니오가 1475~80년경 청동으로 제작한 <헤라클레스와 안태우스 Hercules and Antaeus>와 유일하게 현존하는 잉그레이빙 <누드 남자들의 전투 The Battle of the Nude Men>를 매우 닮았다.
안토니오가 피렌체 회화에 기여한 점은 수많은 펜 드로잉에서 보듯 활기차고 표현적인 사람의 운동을 분석한 것으로서 뒤틀린 근육을 해부학적으로 묘사한 것들이다.
그리고 풍경화에 대한 관심이다.
그로 인해 레오나르도가 인체 해부학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안토니오의 두 주요 공공작품은 1493년에 청동으로 제작한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묘비와 1492~8년경에 제작한 교황 이노켄티우스 8세의 묘비로 모두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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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또 봐도 마음에 드는 그림
 

  지난 토요일 손장섭 화백의 집에 가서 그분의 작품 두 점을 구입했습니다.
울릉도 풍경 두 점인데 보고 또 봐도 마음에 드는 그림입니다.
120호 <울산바위>를 이미 소장하고 있지만 가서 보니 또 욕심이 나더군요.
물감을 다루는 데 있어 뛰어난 재능을 가지신 분이라
그분의 그림을 보느라면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물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울릉도를 가본 적이 없어 그곳 풍경은 모르지만, 같은 크기의 시리즈 두 점 북한산보다는 울릉도를 선택했습니다.
물감을 다룬 솜씨에 반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형편만 된다면,
그분의 작품을 좀더 구입하고 싶습니다.
돈이 생기면 꼭 갖고 싶은 작품이 그곳에 있었는데 120호라서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월부로라도 샀으면 싶었지만 예산을 세운 후에 다시 오기로 하고 그날 두 점을 차에 싣고 오니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동시대 미술에 관해 어쩌구저쩌구 말하면서도 정작 마음에 들고 집에 걸어놓고 싶은 작품은 은은하게 퍼지는 모네 스타일의 작품입니다.
모네의 그림이야 복권에 당첨되더라도 사기 어려울 것 같고 손장섭 화백의 그림이라면 모네를 포기해도 그리 섭섭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재에 그분의 작품 세 점을 갖다 놓으니 그곳으로 발길이 잦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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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는 분석, 상기, 재생, 변형의 과정을 뜻한다



패러다임보다는 덜하지만 아직도 포스트모던이란 말이 논문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 말이 마치 모던 이후를 가리키는, 즉 모던과는 별개의 뜻으로 사용되는 예를 자주 본다.
이런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미술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한 개념의 이해를 넘어서 미술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이해도 가능하므로 나는 이 말을 하나의 장으로 충분히 정리하고 싶었다.
이 말을 철학에서 처음 사용한 사람은 리오타르인데 그는 1979년 『거대한 이야기들 Grands Recits』에서 이 말을 사용하여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파리 8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국제 철학원 원장으로 활동하는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유럽의 지성을 대표할 만한 그가 처음 이 말을 사용했고, 그 밖의 저술에서도 이 개념에 관해 서술했으므로 그를 통해 포스트모던의 의미를 알아보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리오타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포스트’는 단순한 연속이란 의미에서 각각의 시대가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는 통시적인 계열을 뜻하며, ‘포스트’는 이전의 것 다음의 새로운 방향, 즉 전향과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12)으로 이해한다면서 이런 직선적 연대순의 사고는 진부한 것임을 지적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자 하기 때문에 시계바늘을 원점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면서 그는 모던이란 “개념 자체가 전통과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과 사유방식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고 필연적이라는 원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오늘날 ‘단절’이 과거를 망각하는 방식 혹은 억누르는 방식이 아닌지, 즉 과거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복하는 방식이 아닌지 불분명한데 그는 “이전 시대의 건축에서 새로운 건축으로 넘어온 요소들의 인용은 -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 Traumdeutung』에서 설명하듯 - 꿈의 활동에 있어 과거의 삶에서 유래한 낮 찌꺼기의 활용과 유사한 방식으로 행해진다고 생각”13)했다.

그는 포토게시Portoghesi가 건축에 있어서 유클리드 기하학에 부여된 헤게모니가 폐기된 데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립이 있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였고, 그레고티Gregotti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를 모던적 건축 기획과 사회적·개인적 인류 해방의 점진적 실현이라는 이념 사이의 밀착관계가 소멸된 데서 찾은 것에 의미를 부여했는데, 즉 포스트모던 건축이 모던으로부터 물려받은 공간에 일련의 미세한 변형을 가하고, 인류가 거주하는 공간에 대한 전반적인 재구축을 포기한 것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보편성이 건축가의 눈에 제공될 수 있는 지평을 형성해 주지 않음을 뜻한다.
그레고티는 합리성과 해방이라는 자유에서의 진보이념이 사라짐에 따라 포스트모던 건축의 독특한 기질과 양식이 설명된다고 했는데 리오타르는 이를 일종의 ‘응급수리 bricolage’로 보았고, 이전anterieurs, 고전classiques 혹은 모던의 시대나 양식으로부터 차용해온 요소들의 풍부한 인용들 - 예를 들면 환경에 대한 약간의 고려 - 로 보았다.

인류를 위한 진보를 표방한 이념들을 지난 2세기에 난무했지만 결과적으로 진부해졌음을 지적한 리오타르는 그런 가능적·개연적 혹은 팔연적 진보 이념들은 예술, 기술공학, 인식, 자유의 발전이 전반적으로 인류에게 이익을 줄 것이란 확신에 그 근거를 두었지만 발전되지 못했음으로 해서 희생당한 주체 즉 빈민, 노동자 혹은 무식한 자에 대한 반성이 19세기와 20세기에 늘 있어왔음을 지적했다.14)
그러다 보니 이념의 발의들initiatives, 발견들, 제도들이 인류 해방에 기여할 때만 그 정당성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발전이 곧 진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음을 기술과학의 발전이 더 이상 진보가 아니라 불안감을 확산시킴을 예로 들었다.
기술과학이 우리와는 무관하게 자율적인 신축기능에 의해 발전하고 있다면서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되는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하나의 양식으로 간주했다.15)
보편성의 실현이라는 모더니즘의 기획은 파멸되고 청산되었으며, 오히려 탈정당화delegitimation의 과정을 촉진시켰다고 본 그는 새로운 실천, 사유대상을 축적하는 과정을 추구해야 할 상황에 우리가 봉착했음을 주장했다.16)

모더니티를 사유, 언술행위 및 감수성의 한 형태로 본 그는 19세기와 20세기에 있어 사유와 행위가 해방의 이념17)에 의해 규제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는 반문한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적인 그리고 비인간적인 세계로부터 발생되는 다양한 사건들을 인류 보편사의 이념에 종속시킴으로써 계속해서 체계화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대답은 가능성뿐만 아니라 능력을 암시한다.
모더니즘의 기획을 계속 수행할 만한 능력, 힘 그리고 역량이 있느냐?는 물음에 우리는 아마도 이런 요소들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는 근대적 주체의 소멸에 대한 문제라서 사실들을 통해서나 최소한 징표들을 통해 입증되어야 할 것인데 리오타르에게 이런 사실과 징표는 얼마든지 있다.
“휴머니스트는 보편역사를 전제하고 인류 공동체라는 보편적 과정 속의 한 계기로서 개별 공동체를 보편역사 속에 삽입시킨다.
대략적으로 이는 또한 사변적 거대한 이야기의 공리이며, 이것은 인류 역사에 적용된다.”18)
그러나 문제는 보편적인 인류 역사가 과연 존재하는가?에 있다.
그리고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념이 진부해졌으므로 새로운 실천·사유대상을 축적하는 과정을 추구해야 하는 데 포스트모더니즘의 둔 그는 포스트모더니티의 문제를 예술, 문학, 철학, 정치와 같은 사상의 표현들에 관한 문제로 구체화했다.
진정한 아방가르디즘의 과정은 실제로 일종의 길고, 집요하며, 극도의 책임성 있는 작업이었지만19) 오늘날 일반적으로 말하면 한물간 모더니티의 표현들인 아방가르드 운동은 예술 전반에서, 특히 시각예술과 조형미술에서 조소거리가 되었다고 했다.
마네에서 뒤샹 혹은 바네트 뉴만까지의 아방가르드 운동을 정신분석학적인 치료의 의미에서 ‘상기 anamnese’와 비교되는 데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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