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명단에 빠져 있었다
 

  1481년에 변화가 일어났다.
로렌초 데 메디치에 대한 살해 음모가 있었고 사전에 이를 안 그는 음모의 손에서 벗어났다.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비아 델라 프레스탄자의 집으로부터 비아 기벨리나의 보다 큰 아파트로 가차를 옮겼다.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를 동행하여 베네치아와 로마에 가기를 바랐는데, 베로키오는 말 탄 콜레오니Colleoni의 조상을 베네치아에 건립할 것을 의뢰받았고 또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부름을 받았다.
교황은 로렌초에게 화해의 제스처로 이제 막 완공한 자신의 이름을 딴 시스티나 예배당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기 위해 피렌체의 최고 화가 몇 명을 보내줄 것을 청했다.

로렌초는 일종의 문화적 프로파간다cultural propaganda 정책을 펴고 있었으며 나폴리 왕에게 건축가 줄리아노 다 마이아노Giuliano da Maiano를 보냈고 또 베로키오로 하여금 피스토이아로 보내 추기경 니콜로 포르테구에리를 기념하는 대리석 조상을 제작하게 했다.
교황이 시스티나 예배당 장식을 위해 로렌초에게 예술가들을 보내달라고 청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피렌체 예술가들은 열광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바티칸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건물이기 때문이다.
피렌체에서는 그만한 큰 작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역시 매우 들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감을 맛보았는데, 보티첼리, 시그노렐리, 기를란다요, 페루지노는 선발되어 로마로 향했지만 그의 이름은 명단에 빠져 있었다.

레오나르도의 이름이 제외된 것은 로렌초가 그를 피렌체 최고 화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 다른 일감을 주기 위해 뺀 것일 수 있다.
로렌초와 레오나르도는 거의 동갑내기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가 로렌초와 연관된 일을 한 것이 없으므로 로렌초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로렌초는 아버지 코시모에 비해 예술가들의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이 부족했다.
코시모는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마사초, 브루넬레스키, 필립포 리피 등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적극 후원했지만 그 밖의 예술가들에게는 적극적이지 못했으며 의뢰한 작품의 수도 얼마 안 되었다.
그는 주로 청동 장식, 치장 벽토 장식가, 메달 잉그레이버, 상감 세공가들에게 주문했다.
그가 선호한 것들은 서적, 골동품, 값비싼 화병, 호기심을 갖게 하는 물건 예를 들면 카메오와 음각한 보석 등으로 음각한 보석의 경우 무려 5, 6천 점이나 수집했다.
그는 별장도 몇 채 안 지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도 말년에 지었다.
그는 화가들을 고용하기보다는 대사처럼 외교적 수단으로 국외로 보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예술가는 피에로의 형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였다.
안토니오는 로렌초의 명을 받고 보티첼리와 함께 로마로 갔는데, 두 사람 모두 인문주의자들이었으며 신화에 관심이 많아 모두 신화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다.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Antonio Pollaiuolo(1432년경~98)는 동생 피에로와 함께 피렌체에 작업장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화가, 조각가, 금세공가들이지만 특별한 양식은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했다.
안토니오는 주로 금세공에 재주가 있었고 피에로는 회화에 재능이 있었다.
피에로가 그린 몇 점의 그림은 보통 수준의 작품들로 평가받지만 안토니오의 그림은 전무하고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작품 역시 피에로의 작품 그 이상은 못된다.
형제가 그린 것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런던 국립화랑에 소장되어 있는 <성 세바스천의 순교 Martyrdom of St. Sebastian>로 1475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 앞 활을 들고 있는 누드들은 안토니오가 1475~80년경 청동으로 제작한 <헤라클레스와 안태우스 Hercules and Antaeus>와 유일하게 현존하는 잉그레이빙 <누드 남자들의 전투 The Battle of the Nude Men>를 매우 닮았다.
안토니오가 피렌체 회화에 기여한 점은 수많은 펜 드로잉에서 보듯 활기차고 표현적인 사람의 운동을 분석한 것으로서 뒤틀린 근육을 해부학적으로 묘사한 것들이다.
그리고 풍경화에 대한 관심이다.
그로 인해 레오나르도가 인체 해부학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안토니오의 두 주요 공공작품은 1493년에 청동으로 제작한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묘비와 1492~8년경에 제작한 교황 이노켄티우스 8세의 묘비로 모두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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