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이브의 후손이 최후의 날에 받아야 할 심판
 

  인간의 죽을 죄와 어리석음에 대해 비판한 보스는 <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ement>이라는 중세의 가장 큰 테마를 통해 이를 더욱 더 조명했다.
빈 소재의 이 작품은 1504년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스페인의 왕 스물여섯 살의 필리프가 36파운드를 선불로 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빈의 것이 아닌 동일한 제목의 다른 작품일 것으로 추측된다.
두 종류의 작품 외에도 동일한 제목의 작품 일부분이 현존한다.
빈 소재의 작품은 보스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밖의 것들은 보스의 추종자들이 보스의 작품을 모사 혹은 인용하여 제작한 것들로 보인다.
빈 소재의 작품은 보존상태가 나쁘고 수차례에 걸쳐서 색을 덧칠한 상태인 데다 맨 윗부분 일부가 질려나갔다.

<최후의 심판>은 아담과 이브가 금기로 된 선악과를 간교한 뱀의 유혹을 받아 따 먹고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 최후의 날에 받아야 할 심판이 되었다.
그리스도가 구주로 입회하는 가운데 죄를 범하지 않은 인간들은 이 날 무덤에서라도 부활하게 되지만 죽을 죄를 지었거나 어리석은 인간은 벌을 받아 영원한 고통의 세계로 보내진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는 최후의 심판을 예고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 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주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마태복음 25:31~46)

최후의 심판에서 벌 받는 사람이 없도록 예비하는 것이 중세 교회의 목적이었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 일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심판을 면치 못하고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쳤다.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고 죄를 범하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지 않을 경우 최후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고 가르쳤다.
14세기 네덜란드 신비주의자 얀 반 로이스브로크Jan van Ruysbroeck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올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최선의 방법이 되지 못함을 지적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의견이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1380~1471)에 의해 『그리스도의 모방 Imitation of Christ』을 통해 나타났다.
그는 적었다.

"신에 대한 사랑이 죄를 금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지옥의 두려움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이는 좋은 일이다."

대다수의 믿음에 부응하여 저주받은 자가 겪게 될 영원한 고통에 관해 내용이 수많은 책과 설교를 통해 상세하게 묘사되었다.
새로운 신앙생활을 포함하여 갖가지 정신적인 운동을 통해 최후의 심판과 지옥에 대한 경종이 사람들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최후의 심판은 기독교 미술이 생긴 이래 중요한 주제가 되었으며 교회와 수도원에는 이를 주제로 제작된 벽화 조각 등이 장식되었다.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북유럽에서는 시청 건물에도 최후의 심판이 장식되어 위정자와 법관들에게 심판의 준엄함을 상기시켰다.
교회가 최후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보다 경건한 크리스천이 될 것을 종용했으며 심판의 대한 사람들의 공포를 고조시켰다.
세계가 종말에 이르렀다고 주장한 예언자들은 그리스도 출현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런 예언과 주장이 15세기 말에 더욱 성행했으므로 사람들은 불안해 했다.
종말론을 편 사람들은 한결같이 역병, 홍수, 그 밖의 자연적인 재해를 들어 신의 진노의 증표로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적·정치적·사회적 사건들이 생길 때마다 그리스도 출현의 징후를 발견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1499년 독일의 점성술사는 1524년 2월 25일에 제2의 노아의 홍수가 발생하며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고 주장해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예술가들의 작품에서도 종말에 대한 테마가 종종 나타났으며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벽에 그린 <최후의 심판>은 유명하다.
정치적·사회적 불안이 더욱 더 종말론에 대한 믿음을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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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미국의 팝아트


미국에서의 팝아트는 빌렘 드 쿠닝으로부터 약간의 영향을 받았으나 대체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의 하나로 1950년대 중반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이다.
두 사람은 일상적인 이미지와 통속적인 키치를 사용했으나, 월등하면서도 두드러지지 않는 훌륭한 기술로 작품 속에서 키치적인 성격을 완전히 제거했다.
미국의 팝아트는 다다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네오-다다로 불리기도 했다.

미국 팝아트 예술가 중 두드러진 인물로는 훌륭한 소묘 솜씨로 보잘것없는 주제만을 그린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클래스 올덴버그, 톰 웨설만, 제임스 로젠퀴스트, 로버트 인디애나, 마리솔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중매체와 대량생산된 소비상품이 지배하는 현대 거대 도시문화에 대한 관심과 상업 광고와 포장에 마비된 현대인에게 즉각적인 충격을 주기 위한 눈에 거슬리는 표현양식이다.
팝아트에서 파생된 것들 중에 아상블라주와 해프닝이 있다.

추상표현주의에 가장 먼저 도전한 사람은 라우센버그였다.
그는 드 쿠닝의 그림을 한 점 산 후 자신이 작품을 고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드 쿠닝은 당혹스러웠지만 허락했다.
라우센버그는 드 쿠닝의 작품을 가능한 한 지울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지운 후 그것을 자신의 창조적인 제스처로 소개하면서 어떤 추상표현주의 화가도 공격할 수 있는 채비가 되어 있음을 알렸다.
라우센버그와 함께 작업하던 존스는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붓놀림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납화법encaustic을 통해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색을 사용했다.
이런 색조로 그린 미국국기, 알파벳, 숫자, 과녁판, 지도 등은 대중적인 이미지이면서 또한 사물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독특한 미학을 시위했다.
두 사람은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리히텐슈타인과 워홀은 1960년 이전부터 미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만화를 그렸다.
대중적인 이미지를 순수미술로 끌어온 것이다.
리히텐슈타인이 개인전을 통해 먼저 만화작품을 소개하자 그와의 충돌을 피해 워홀이 그린 것이 캠벨 수프 캔이다.당시 수프 캔 시장점유율이 약 80%에 달해 캠벨사를 선택한 것은 캠벨 수프가 가장 대중적이었기 때문이다.
워홀은 첫 개인전을 로스앤젤레스의 페러스 화랑에서 열면서 32점의 수프 캔 그림을 소개했다.

이때 팝아트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으므로 언론이 관심을 갖고 팝아트 예술가들의 행위를 주시했다.
1962년 5월 11일자 <타임>은 ‘케이크 한 조각 화파’란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일군의 화가들은 현대문명의 가장 진부하고 저속하기조차 한 장식물도 캔버스로 운반하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은 리히텐슈타인, 워홀, 로젠퀴스트 등의 작품에 관해 언급하면서 워홀의 사진도 게재했다.
캔오프너로 켐벨 수프 캔을 막 따려는 자신의 그림 앞에서 워홀이 한 손에는 캔을 다른 손에는 숟가락을 들고 먹으려는 시늉을 하는 사진이었다.
<타임>이 워홀의 사진을 소개한 것은 그가 팝아트의 대표주자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시사했다.
버몬트의 베닝턴 대학에 재직하고 있던 영국 평론가 로렌스 앨러웨이는 1962년 봄학기에 학생들에게 워홀의 수프 캔, 코카콜라 병, 하인즈 케첩 그림에 관해 강의하면서 워홀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했다.
또한 슬라이드로 워홀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토론을 제안했으므로 팝아트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커졌다.

페러스 화랑에서 개인전이 끝난 다음날인 1962년 8월 5일 미국 남자들의 ‘성의 우상’ 매를린 먼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대적으로 보도된 그녀의 자살기사는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가장 인기 있는 스타로 헐리우드의 공주였던 매를린이 무엇이 부족하여 세상을 버렸는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언론은 몇 주에 걸쳐 매를린의 파란만장했던 인생과 배우로서의 활약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그녀의 사생활을 파헤쳤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자살한 그녀를 동정했다.
워홀은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매를린을 자신의 예술을 위한 전리품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는 1950년대에 매를린 사진이 수록된 책을 사서 그녀의 초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매를린의 목 아래 부분은 삭제하고 얼굴만 크게 실크스크린하거나 커다란 캔버스에 실크스크린한 작은 캔버스를 2개, 4개, 6개, 또는 20개씩 병렬하기도 했다.
매를린의 초상도 수프 캔이나 우표처럼 연속적으로 병렬하거나 하나씩 독립적으로 제작했다.

회화에서 워홀의 위상이 높아질 무렵 조각에서 클래스 올덴버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심취해 있던 그의 조각은 잠재의식을 구현한 것이었다.
그는 “자연의 형태가 기하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면 내용은 에로틱하게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올덴버그는 손목시계, 파이 한 조각, 모자, 바지, 치마, 깃발, 음료수 등을 실제처럼 단순한 형태로 제작한 후 색을 칠했다.
사람들은 그의 조각을 좋아했지만 막상 돈을 주고 사는 것을 꺼려했다.

올덴버그는 107 이스트 2번가에 있는 상점을 세내어 작업장으로 사용했는데 그곳에는 석고로 제작한 옷, 음식물, 구두, 바지, 케이크와 파이 등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백화점 같았다.
1961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열린 그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팝이미지 조각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고 평론가들이 반겼다.
워홀보다 한 살 많은 올덴버그는 우리가 매일 대하는 물질을 확대하여 새삼스럽게 그것을 볼 수 있도록 한 예술가였으며 사람들은 그런 관람을 즐거워했다.
그는 앨런 캐프로를 만난 후 그의 해프닝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즉흥적인 표현주의 방법으로 액션 페인팅을 하기도 했다.
1960년부터 석고를 사용하여 음식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회반죽에 흠뻑 적신 모슬린이나 올 굵은 삼베로 여러 가지 사물을 만들어 에나멜로 채색하기도 하고, 캔버스천으로 만든 거대한 사물을 기포고무로 채우기도 하면서 자동차만한 크기로 274cm가 넘는 <대형 햄버그>(1962)를 만들었고 <대형 아이스크림 콘>(1962)의 길이는 304cm가 넘었다.
이런 작품들은 비닐을 꿰맨 부드러운 형태의 조각들이었는데 바느질은 그의 첫 번째 아내 팻이 도왔다.
이처럼 일상적인 물질을 크게 확대한 그의 작품은 동화의 한 장면처럼 환상적으로 보였으며 거대하게 확대된 낯익은 물체는 관람자를 시각적으로 유쾌하게 했다.
또한 비닐을 이용하여 전화기, 빵굽는 기계, 변기, 선풍기, 타자기 등을 부드러운 형태로 재현했는데 유머는 그의 작품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였다.
그는 “크기에 수반되는 가치에 늘 매료되었다”면서 1961년에 발표한 선언문에 적었다.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예술은 정치적, 호색적, 신비적이며 뮤지엄 꽁무니에 앉아 있는 것 그 이상이다. ...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사람을 모방하고 필요하다면 코믹하고 과격하며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예술로 행위한다. ...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마치 담배연기와 신발냄새와도 같다.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입었다 벗은 바지와 같고 구멍 날 양말과 같으며 먹어치울 파이 한 조각과도 같다."

올덴버그는 자신의 작품에 관해 총체적으로 요약했다.
“나의 예술의 원천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파이나 햄버그이다.
접시 닦기의 경험은 내가 재생하고자 했던 감각적 효과를 알게 해주었다.
나는 음식을 먹기보다 만지기를 더 좋아한다.
다시 경험해 보고 싶은 요소를 과장한다. 캐리커처처럼 단순화하고 특정한 효과를 강조하는 것이 내 구미에 맞지만, 캐리커처는 아니다.
결과를 합리화시키는 작업이다.
자기 현시욕이 강한 나로서는 솟아나오는 기쁨을 감추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설명해야만 한다.
동물적인 욕구는 아름다움에 앞선다. 동물적인 욕구에 근거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나약하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러한 자책감이 나를 이성으로 이끈다.”

워홀의 친구 로버트 인디애나도 대중적인 이미지로 작업하면서 팝아트 운동에 가세했다.
워홀보다 열 살 어린 인디애나는 사실주의 방법으로 사물을 묘사하는 기교가 매우 뛰어나 미국의 정밀주의 예술가들의 후예라는 말을 들었다.
1950년대 중반 은행 나뭇잎과 아보카도를 바탕으로 한 기하적 패턴을 사용하면서 하드에지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1950년대 말 풍화된 강철과 쓰다 남은 목재로 구성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다른 팝아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생활의 진부한 사물을 주제로 선택했으며, 특히 인쇄활자와 광고 간판을 전문으로 다뤘다.
생생한 색채는 막연하게나마 옵아트를 연상시키는 시각적 모호함을 창조한다.
그는 단어를 초보적인 상징으로 사용했다. 어릴 때 기차를 타고 가다가 거리에 걸린 ‘식사 Eat’라는 간판을 본 기억을 되살려 제작한 <식사>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우리 기억 속의 많은 것들과 연계되어 있음을 알리려고 한 작품이다.그는 1964년에 워홀과 함께 영화 <식사>를 공동 제작했으며 만국박람회의 뉴욕관을 위해 6m 높이의 ‘EAT’ 간판을 제작했다.

파리 태생 미국 조각가 마리솔(1930~)은 1949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와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수학했다.
1950년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와 한스 호프만의 학교에서 수학했다.
1955년경부터 나무로 등신대의 인물상을 조각하기 시작한 그녀는 작품의 주제로 가족, 사교계와 중산층에 대한 풍자를 다루었는데, 전자의 예로는 <가족>, 후자의 예로는 <여인과 개>, <파티> 등이 있다.
마리솔의 인물은 상자 모양으로 된 나무 몸통에, 종종 마리솔 자신의 얼굴이나 팔다리를 석고로 형을 떠서 제작한 얼굴이나 팔다리 등이 결합된 것이었다.
또한 인물상에 목걸이, TV 수상기, 거울, 꽃병, 우산 등 다양한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여 거의 아상블라주와 유사하게 제작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뉴욕에서 그녀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이때는 팝아트 전성기였고, 마리솔의 작품에도 팝아트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그녀의 작품은 유머와 사회 풍자, 캐리커처를 결합하는 독창적인 방식을 보여주었다.

워홀보다 세 살 어린 톰 웨설만은 만화를 그리다가 여인의 몸을 주로 그리기 시작했다.
신시내티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군대에 있는 동안 만화를 그렸고, 그후 신시내티 미술 아카데미와 뉴욕의 쿠퍼 유니언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웨설만은 콜라주와 혼합매체를 사용한 구성을 위해 추상표현주의를 포기했고, 실제 세계와 미술 세계 사이의 긴장이나 모호함을 만들어내기 위해 재현과 실재를 함께 도입했다.
1961년부터 이미 <위대한 미국인의 누드> 연작을 그리기 시작해 에로틱한 느낌을 주면서 미국 국기의 색이기도 한 빨강색과 파란색을 주로 사용했다.웨설만은 앙리 마티스의 유명한 <핑크 누드>로부터 영감을 받아 <핑트 누드>와 비교가 되는 순진한 모델을 <핑크 누드>의 자세를 취하도록 한 후 에어브러시를 사용하여 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도록 했다.
여인의 몸 부분을 확대하여 그리거나 콜라주를 사용한 그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와 관련이 있으며 팝아트 예술가들에게 일반적인 환상주의의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누드는 사실적으로 묘사된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몰개성화된 색스 심벌이 되었다.

제임스 로젠퀴스트도 워홀과 마찬가지로 상업미술에서 순수미술로 전향한 예술가이다.
1950년대 말부터 로젠퀴스트는 상업 회화에서 파생된 기법을 작품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대 산업문화와 포스터 광고의 가벼운 이미지로부터 도상을 끌어냈다.
그의 작품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파편화된 이미지들과 규모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이미지는 사진 확대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확대되고 부드럽게 마무리되었다.
다른 팝아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조각내고 이것들을 원래의 환경으로부터 이탈시켰다.
그의 작품은 워홀과 라우센버그의 신랄함이 결여된 부드러운 불명료성을 지니고 있다.

1960년부터 주로 잡지에서 주제를 구하여 커다란 그림을 그린 그는 말했다.

“우리는 라디오와 TV 그리고 시각 매체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
그것들은 힘 있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그것들을 바라볼 때 나는 놀라고 흥분하며 그것들에 매료된다.”

“나는 그림에서 낭만적인 요소를 피하여고 한다”고 말한 그의 그림에는 자전적인 개인 상징이 있다.
1962년에 그린 <모세관 현상>은 나무가 한 그루 있는 풍경화로 영화 포스터처럼 커다란 그림에 여러 개의 작은 캔버스를 부착했다.
<머스 커닝햄의 무도회>(워홀 101)는 커닝햄의 구두를 신은 발을 확대한 캔버스를 따로 삽입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환각을 일으키게 했다.

로젠퀴스트의 작품에 정치적인 요소가 등장했는데 특히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부통령이든 린던 존슨이 대통령 직을 계승했다가 이듬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당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것은 대학생들의 시위를 자초했으며 로젠퀴스트도 반전운동에 동참하여 정치적인 주제를 그림으로 시위했다.
그의 대작 <F-111>은 이런 작품 중 하나이다. 26m가 넘는 이 벽화는 레오 카스텔리 화랑 벽을 꽉 채웠다.
그는 그림에 파이어스톤 타이어와 케이트를 집어넣고 스파게티를 확대하여 캔버스 바닥에 깔고 비치파라솔 아래 원자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그려넣어 전쟁이 인간의 소박한 삶을 파괴함을 시위했다.
소녀의 머리를 말리는 헤어드라이어는 미사일의 윗부분처럼 보인다.
로젠퀴스트는 미국 전투기가 북베트남을 공격한 것을 비난하면서 벽화로 항의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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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현대 정물화 캠벨 수프 통조림


1960년부터 워홀은 잉크, 템페라, 크레용, 유화물감을 혼용하여 아주 새로운 현대의 정물화 캠벨 수프 통조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샤르댕의 정물화를 본 적이 있으며, 세잔느가 포도주병과 사과가 놓인 식탁을 그린 정물화를 보았다.
대중적인 물질들이 다양하게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워홀은 미국 중산층 사람들이 즐겨 먹는 캠벨 수프를 정물화의 소재로 선택했던 것이다.
당시 수프 통조림 시장점유율이 약 80%에 달한 켐벨사를 선택한 것은 캠벨 수프가 가장 대중적이었기 때문이다.
워홀은 1960년 캠벨 토마토 수프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어렸을 적에 토마토 수프를 수없이 먹었다고 했다.

만화그림을 그리던 워홀은 리히텐슈타인의 만화그림을 보고는 그와 충돌하지 않으려면 어떤 그림을 그려야 되겠느냐고 친구들에게 묻곤 했지만 누구도 그가 통조림을 그릴 줄은 몰랐다.
1962년 2월 카스텔리 화랑에서 전람회를 가질 예정이었던 리히텐슈타인을 의식한 워홀은 그를 능가할 그림으로 캠벨 수프 통조림을 선택한 것이다.
워홀은 수프 통조림을 그리면서 캠벨사가 사전에 알지 못하도록 비밀로 했다.
어떤 식으로라도 상업적 요소가 개입되면 순수회화를 추구하려는 자신의 의도가 퇴색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1961년 말 예술품 중개상 앨런 스톤이 워홀을 방문했다.
추상표현주의 회화에 관심이 많았던 스톤은 워홀의 그림을 보고 추상표현주의 그림처럼 싱싱하게 우거진 색조가 없고 밋밋하기만 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던 그가 수프 통조림 그림을 보고는 “수프 통조림을 잔뜩 쌓아놓은 훌륭한 그림에 반했다”고 말했다.
스톤이 위탁판매 형식으로 가져간 그림들 가운데는 100개의 캠벨 수프 통조림으로 캔버스를 채운 그림과 통조림 하나를 크게 확대하여 그린 그림도 포함되었다.

워홀의 작품들을 자신의 화랑 창고에 넣어두고 살 만한 구매자들에게 보여주곤 하던 스톤은 워홀에게 인디애나, 제임스 로젠퀴스트와 함께 그룹전을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워홀은 자신이 바라는 것은 그룹전이 아니라 개인전이라고 하면서 거절했고 인디애나와 로젠퀴스트도 그룹전이라면 흥미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 무렵 팝아트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해 세 예술가들은 팝아트의 선구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저마다 두드러진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어 했지 그룹전으로 한꺼번에 소개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스톤은 “그들은 나의 제의에 모두 격노했다”고 말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57번가에 있는 화랑도 아니고 82번가면 후미진 곳인 데다가 개인전도 아니고 세 사람을 한데 묶어 그룹전을 열겠다는 스톤의 아이디어는 그들에게 재고의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세 사람은 각자 개인전을 열 수 있는 화랑을 물색했다.
스톤은 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워홀의 개인전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전화를 여러 번 받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워홀은 자신이 바라는 제대로 된 화랑에서 전람회를 가질 수 없어 아주 풀이 죽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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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음폭식과 색욕의 알레고리> 그리고 <수전노의 죽음>
 

  <폭음폭식과 색욕의 알레고리 Allegory of Gluttony and Lust>도 성직자들에 대한 비난의 수위를 높인 작품이다.
당시 도덕적 타락이 이런 것들과 관련이 있었다.
보스는 폭음폭식이란 죽을 죄를 왼편 상단 배가 볼록 튀어나온 농부가 걸터앉은 술통 주변으로 수영해 몰려든 벌거벗은 사람들로 의인화했다.
앞에 있는 사람은 구멍난 술통으로 분수처럼 나오는 술을 잔에 받고 있고 물가로 헤엄쳐 가는 사람의 머리는 접시에 담겨진 고기파이로 가려져 있다.
한편 텐트 속에서는 또다른 죽을 죄에 해당하는 ‘색욕’이 벌어지고 있다.
도덕주의자들은 폭음폭식이 색욕이란 또다른 죄를 짓게 된다고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중세의 도덕에서 타락한 성직자의 ‘폭음폭식’과 ‘색욕’은 매우 비난받을 죄였다.
<폭음폭식과 색욕의 알레고리>와 <바보들의 배>는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들로 추정된다.
두 작품의 양식이 유사한 데다 장미색, 황토색, 밝은 녹색 등 채색에서도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수전노의 죽음>
보스가 즐겨 사용한 장미색과 황토색은 <수전노의 죽음 Death of the Miser>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은 네쪽 세트의 왼쪽 날개이며, <바보들의 배>와 <폭음폭식과 색욕의 알레고리> 두 점은 오른쪽 날개였고, 네쪽 세트를 닫은 면에는 <여행자 The Wayfarer>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침대 발치에 허리를 구부린 인물의 녹색 가운에 의해 핑크색과 황갈색이 두드러진다.
천국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하는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작품이다.
당시 임종에 관한 삽화들이 있었고 보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1440년경에 제작된 <클레베스의 카터린의 임종에 관한 책 The Book of Hours of Catherine of Cleves>은 보스도 알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것은 보스가 소속되어 있는 형제회 의 신분 높은 집안에서 의뢰해 제작된 것이다.
이 작품의 침대 위 아래의 공간 활용과 돈을 보관하는 나무상자가 보스에게 영감을 준 것 같다.
이 작품은 당시 부유층의 일반적인 임종 장면으로 친구, 가족, 성직자가 모두 와서 죽어가는 영혼을 위로하고 기도해준다.
오늘날 크리스천 가정에서의 임종도 이러 할 것이다.

보스는 높고 둥근 천장을 한 침실을 배경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켜 커다란 벼게에 몸을 의지하고 왼편에는 방문을 열고 죽음의 사자가 들어오는 장면을 묘사했다.
천사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그를 부축하는 가운데 오른손을 들어 작은 창문에 장식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바라보게 하지만, 수전노는 그동안 쌓아놓은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다.
커튼 아래 악마가 몸을 드러내보이며 돈주머니를 건네자 수전노는 천사가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바라보면서도 오른손은 돈주머니를 잡기 위해 그곳으로 향한다.
화면 하단에 날개를 단 악마가 선반 가까이 있으며 선반에 놓여진 화려한 의상과 기사 장비도 수전노가 포기해야 할 속세의 지위와 권력을 상징한다.
죽음을 맞이한 인간의 영혼을 두고 천사와 악마의 싸움은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에서도 볼 수 있는데, 상단 왼쪽 원형화에는 죽음의 사자가 활을 들고 출현한다.
이런 장면들은 15세기에 널리 알려진 『죽음의 기술 Ars Moriendi』을 반영한 것이다.
이 책은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 책은 임종을 맞은 인간이 침상을 에워싸고 있는 악마들의 일련의 유혹에 어떻게 노출되어 있으며 그때마다 천사가 어떻게 위로해주고 힘을 주는지에 관해 설명한다.
천사가 결국 승리하게 되고 악마들은 절망하여 울부짖게 됨을 서술하고 있으며 그때 인간의 영혼이 천국으로 가게 된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수전노의 죽음>에서 천사와 악마의 싸움은 보이지 않는다.
침대 발치에 허리를 구부린 노인의 모습이 있고 이는 수전노의 이중적인 태도를 표현한 것이다.
이 노인은 악마가 열어놓은 푸대 속에 금화를 넣고 있다.
허리띠에는 열쇄와 함께 묵주가 매달려 있지만 기독교를 형식적으로 받아들인 듯 하다.
재물에 대한 집착을 죽음의 순간에도 버리지 못한다.
어리석음과 죽음은 쇠락하는 중세의 관심사였고 이 둘은 관련이 있다.
시인들은 육체와 지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소멸한다고 노래했으며 죽음을 도덕적 교훈에 종종 사용했다.
예수도 재물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부자를 비난했다.
영혼은 영원하고 물질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사람들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형벌을 자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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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리히텐슈타인의 유머스런 그림에는


리히텐슈타인은 1958년 캐프로와 함께 해프닝을 벌였지만 캐프로와 그의 친구 예술가들에게 전적으로 동조하지는 않았다.
짐 다인이 유난히 해프닝에 관심을 나타내면서 아내와 함께 여러 차례 해프닝을 벌였으며 무대에 선 배우처럼 의상을 갖추고 분장한 후 행위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친구 예술가들이 양계장 근처에 있는 시걸의 집으로 가서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며 예술에 관하여 떠들썩하게 대화했다.
리히텐슈타인은 그들과 교통하면서 팝 이미지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그는 일부 예술가들이 소비주의 문화를 찬양하면서 예술이 대중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공감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직접적 자극을 준 사람은 친구 예술가들이 아니라 집에서 동화책을 읽던 아들이었다.
어느 날 리히텐슈타인의 아들은 미키 마우스 동화를 읽다가 “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데 아빠는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릴 수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아들의 말에 자극받은 리히텐슈타인은 곧 만화 여섯 점을 그렸는데 원래 만화의 형태와 색들을 조금만 달리한 것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이봐 미키〉(그림 71)는 커다란 물고기를 낚았다고 낚시줄을 끌어올리는 미키 마우스에게 도날드덕이 자신의 옷이 낚시에 걸린 것이라고 말하는 익살스러운 장면이다.
이때부터 그의 그림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일관되었다.

리히텐슈타인의 유머스런 그림에는 글자가 있고 말풍선 안에는 대화내용이 들어 있다.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이 만화그림들이 소개되자 당시 카스텔리 화랑에 소속되어 있던 라우센버그와 존스는 형편없는 수준 이하의 것들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라우센버그는 곧 그의 그림을 이해하게 되었고 존스가 그의 그림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수개월이 걸렸다.
1962년 2월 카스텔리 화랑에서 리히텐슈타인의 전람회가 다시 열렸을 때에는 평론가들의 호평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성공적이었다.
평론가 존 코플런스는 그가 “본래의 형태와 색을 조금만 변경시켰다”고 적었다.
그의 작품은 비싸게 팔렸는데 〈Blam〉이 1,000달러에, 〈약혼반지〉가 1,200달러에, 〈냉장고〉가 800달러에 팔렸다.
리히텐슈타인은 1963년 〈와암!〉(그림 73) 외에도 〈토페도 … 로스!〉와 〈O. K. Hot-Shot〉을 그렸다.
그의 그림들은 우리가 보는 것은 많은 장면들 가운데 단지 한 장면뿐임을 강조했다.

1961년 이후로는 더 이상 팝아이(Popeye)나 미키 마우스를 그리지 않고 연속극의 로맨틱한 장면이나 액션 장면들을 주제로 그리면서 만화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언어를 삽입했다.
그는 주로 신문과 TV에서 주제를 구했는데 한 가지 주제의 장면을 1961년부터 63년까지 그리기도 했으며 만화는 65년까지 그렸다.

1963년부터 그의 그림에 세잔느, 마티스, 몬드리안, 피카소가 그린 대작들의 일부분이 재현되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값이 치솟기 시작해 한 점이 3만 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그는 부유한 예술가 동네 롱아일랜드의 이스트 햄프톤으로 이사했는데 1965년 이혼한 것 외에 사생활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리히텐슈타인의 비속하고 괴짜스러운 그림에서 재스퍼 존스의 아이러니컬한 초연함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요소는 워홀의 그림에도 나타났다.
워홀은 그러한 점을 예술가 자신이나 이미지에 귀결시키는 위험한 방법으로 사용했다.
그 때문에 워홀의 그림은 주제가 늘 개인적이고 모호했는데 그는 1968년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당신이 만일 앤디 워홀에 관해 자세히 알기를 바란다면 내 그림과 영화 그리고 나의 겉모습을 보면 된다.
그것들에서 나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면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작품에는 겉보기와 달리 궤변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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