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리히텐슈타인의 유머스런 그림에는


리히텐슈타인은 1958년 캐프로와 함께 해프닝을 벌였지만 캐프로와 그의 친구 예술가들에게 전적으로 동조하지는 않았다.
짐 다인이 유난히 해프닝에 관심을 나타내면서 아내와 함께 여러 차례 해프닝을 벌였으며 무대에 선 배우처럼 의상을 갖추고 분장한 후 행위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친구 예술가들이 양계장 근처에 있는 시걸의 집으로 가서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며 예술에 관하여 떠들썩하게 대화했다.
리히텐슈타인은 그들과 교통하면서 팝 이미지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그는 일부 예술가들이 소비주의 문화를 찬양하면서 예술이 대중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공감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직접적 자극을 준 사람은 친구 예술가들이 아니라 집에서 동화책을 읽던 아들이었다.
어느 날 리히텐슈타인의 아들은 미키 마우스 동화를 읽다가 “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데 아빠는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릴 수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아들의 말에 자극받은 리히텐슈타인은 곧 만화 여섯 점을 그렸는데 원래 만화의 형태와 색들을 조금만 달리한 것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이봐 미키〉(그림 71)는 커다란 물고기를 낚았다고 낚시줄을 끌어올리는 미키 마우스에게 도날드덕이 자신의 옷이 낚시에 걸린 것이라고 말하는 익살스러운 장면이다.
이때부터 그의 그림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일관되었다.

리히텐슈타인의 유머스런 그림에는 글자가 있고 말풍선 안에는 대화내용이 들어 있다.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이 만화그림들이 소개되자 당시 카스텔리 화랑에 소속되어 있던 라우센버그와 존스는 형편없는 수준 이하의 것들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라우센버그는 곧 그의 그림을 이해하게 되었고 존스가 그의 그림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수개월이 걸렸다.
1962년 2월 카스텔리 화랑에서 리히텐슈타인의 전람회가 다시 열렸을 때에는 평론가들의 호평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성공적이었다.
평론가 존 코플런스는 그가 “본래의 형태와 색을 조금만 변경시켰다”고 적었다.
그의 작품은 비싸게 팔렸는데 〈Blam〉이 1,000달러에, 〈약혼반지〉가 1,200달러에, 〈냉장고〉가 800달러에 팔렸다.
리히텐슈타인은 1963년 〈와암!〉(그림 73) 외에도 〈토페도 … 로스!〉와 〈O. K. Hot-Shot〉을 그렸다.
그의 그림들은 우리가 보는 것은 많은 장면들 가운데 단지 한 장면뿐임을 강조했다.

1961년 이후로는 더 이상 팝아이(Popeye)나 미키 마우스를 그리지 않고 연속극의 로맨틱한 장면이나 액션 장면들을 주제로 그리면서 만화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언어를 삽입했다.
그는 주로 신문과 TV에서 주제를 구했는데 한 가지 주제의 장면을 1961년부터 63년까지 그리기도 했으며 만화는 65년까지 그렸다.

1963년부터 그의 그림에 세잔느, 마티스, 몬드리안, 피카소가 그린 대작들의 일부분이 재현되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값이 치솟기 시작해 한 점이 3만 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그는 부유한 예술가 동네 롱아일랜드의 이스트 햄프톤으로 이사했는데 1965년 이혼한 것 외에 사생활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리히텐슈타인의 비속하고 괴짜스러운 그림에서 재스퍼 존스의 아이러니컬한 초연함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요소는 워홀의 그림에도 나타났다.
워홀은 그러한 점을 예술가 자신이나 이미지에 귀결시키는 위험한 방법으로 사용했다.
그 때문에 워홀의 그림은 주제가 늘 개인적이고 모호했는데 그는 1968년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당신이 만일 앤디 워홀에 관해 자세히 알기를 바란다면 내 그림과 영화 그리고 나의 겉모습을 보면 된다.
그것들에서 나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면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작품에는 겉보기와 달리 궤변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