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미국의 팝아트


미국에서의 팝아트는 빌렘 드 쿠닝으로부터 약간의 영향을 받았으나 대체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의 하나로 1950년대 중반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이다.
두 사람은 일상적인 이미지와 통속적인 키치를 사용했으나, 월등하면서도 두드러지지 않는 훌륭한 기술로 작품 속에서 키치적인 성격을 완전히 제거했다.
미국의 팝아트는 다다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네오-다다로 불리기도 했다.

미국 팝아트 예술가 중 두드러진 인물로는 훌륭한 소묘 솜씨로 보잘것없는 주제만을 그린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클래스 올덴버그, 톰 웨설만, 제임스 로젠퀴스트, 로버트 인디애나, 마리솔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중매체와 대량생산된 소비상품이 지배하는 현대 거대 도시문화에 대한 관심과 상업 광고와 포장에 마비된 현대인에게 즉각적인 충격을 주기 위한 눈에 거슬리는 표현양식이다.
팝아트에서 파생된 것들 중에 아상블라주와 해프닝이 있다.

추상표현주의에 가장 먼저 도전한 사람은 라우센버그였다.
그는 드 쿠닝의 그림을 한 점 산 후 자신이 작품을 고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드 쿠닝은 당혹스러웠지만 허락했다.
라우센버그는 드 쿠닝의 작품을 가능한 한 지울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지운 후 그것을 자신의 창조적인 제스처로 소개하면서 어떤 추상표현주의 화가도 공격할 수 있는 채비가 되어 있음을 알렸다.
라우센버그와 함께 작업하던 존스는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붓놀림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납화법encaustic을 통해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색을 사용했다.
이런 색조로 그린 미국국기, 알파벳, 숫자, 과녁판, 지도 등은 대중적인 이미지이면서 또한 사물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독특한 미학을 시위했다.
두 사람은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리히텐슈타인과 워홀은 1960년 이전부터 미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만화를 그렸다.
대중적인 이미지를 순수미술로 끌어온 것이다.
리히텐슈타인이 개인전을 통해 먼저 만화작품을 소개하자 그와의 충돌을 피해 워홀이 그린 것이 캠벨 수프 캔이다.당시 수프 캔 시장점유율이 약 80%에 달해 캠벨사를 선택한 것은 캠벨 수프가 가장 대중적이었기 때문이다.
워홀은 첫 개인전을 로스앤젤레스의 페러스 화랑에서 열면서 32점의 수프 캔 그림을 소개했다.

이때 팝아트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으므로 언론이 관심을 갖고 팝아트 예술가들의 행위를 주시했다.
1962년 5월 11일자 <타임>은 ‘케이크 한 조각 화파’란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일군의 화가들은 현대문명의 가장 진부하고 저속하기조차 한 장식물도 캔버스로 운반하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은 리히텐슈타인, 워홀, 로젠퀴스트 등의 작품에 관해 언급하면서 워홀의 사진도 게재했다.
캔오프너로 켐벨 수프 캔을 막 따려는 자신의 그림 앞에서 워홀이 한 손에는 캔을 다른 손에는 숟가락을 들고 먹으려는 시늉을 하는 사진이었다.
<타임>이 워홀의 사진을 소개한 것은 그가 팝아트의 대표주자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시사했다.
버몬트의 베닝턴 대학에 재직하고 있던 영국 평론가 로렌스 앨러웨이는 1962년 봄학기에 학생들에게 워홀의 수프 캔, 코카콜라 병, 하인즈 케첩 그림에 관해 강의하면서 워홀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했다.
또한 슬라이드로 워홀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토론을 제안했으므로 팝아트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커졌다.

페러스 화랑에서 개인전이 끝난 다음날인 1962년 8월 5일 미국 남자들의 ‘성의 우상’ 매를린 먼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대적으로 보도된 그녀의 자살기사는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가장 인기 있는 스타로 헐리우드의 공주였던 매를린이 무엇이 부족하여 세상을 버렸는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언론은 몇 주에 걸쳐 매를린의 파란만장했던 인생과 배우로서의 활약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그녀의 사생활을 파헤쳤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자살한 그녀를 동정했다.
워홀은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매를린을 자신의 예술을 위한 전리품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는 1950년대에 매를린 사진이 수록된 책을 사서 그녀의 초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매를린의 목 아래 부분은 삭제하고 얼굴만 크게 실크스크린하거나 커다란 캔버스에 실크스크린한 작은 캔버스를 2개, 4개, 6개, 또는 20개씩 병렬하기도 했다.
매를린의 초상도 수프 캔이나 우표처럼 연속적으로 병렬하거나 하나씩 독립적으로 제작했다.

회화에서 워홀의 위상이 높아질 무렵 조각에서 클래스 올덴버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심취해 있던 그의 조각은 잠재의식을 구현한 것이었다.
그는 “자연의 형태가 기하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면 내용은 에로틱하게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올덴버그는 손목시계, 파이 한 조각, 모자, 바지, 치마, 깃발, 음료수 등을 실제처럼 단순한 형태로 제작한 후 색을 칠했다.
사람들은 그의 조각을 좋아했지만 막상 돈을 주고 사는 것을 꺼려했다.

올덴버그는 107 이스트 2번가에 있는 상점을 세내어 작업장으로 사용했는데 그곳에는 석고로 제작한 옷, 음식물, 구두, 바지, 케이크와 파이 등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백화점 같았다.
1961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열린 그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팝이미지 조각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고 평론가들이 반겼다.
워홀보다 한 살 많은 올덴버그는 우리가 매일 대하는 물질을 확대하여 새삼스럽게 그것을 볼 수 있도록 한 예술가였으며 사람들은 그런 관람을 즐거워했다.
그는 앨런 캐프로를 만난 후 그의 해프닝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즉흥적인 표현주의 방법으로 액션 페인팅을 하기도 했다.
1960년부터 석고를 사용하여 음식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회반죽에 흠뻑 적신 모슬린이나 올 굵은 삼베로 여러 가지 사물을 만들어 에나멜로 채색하기도 하고, 캔버스천으로 만든 거대한 사물을 기포고무로 채우기도 하면서 자동차만한 크기로 274cm가 넘는 <대형 햄버그>(1962)를 만들었고 <대형 아이스크림 콘>(1962)의 길이는 304cm가 넘었다.
이런 작품들은 비닐을 꿰맨 부드러운 형태의 조각들이었는데 바느질은 그의 첫 번째 아내 팻이 도왔다.
이처럼 일상적인 물질을 크게 확대한 그의 작품은 동화의 한 장면처럼 환상적으로 보였으며 거대하게 확대된 낯익은 물체는 관람자를 시각적으로 유쾌하게 했다.
또한 비닐을 이용하여 전화기, 빵굽는 기계, 변기, 선풍기, 타자기 등을 부드러운 형태로 재현했는데 유머는 그의 작품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였다.
그는 “크기에 수반되는 가치에 늘 매료되었다”면서 1961년에 발표한 선언문에 적었다.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예술은 정치적, 호색적, 신비적이며 뮤지엄 꽁무니에 앉아 있는 것 그 이상이다. ...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사람을 모방하고 필요하다면 코믹하고 과격하며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예술로 행위한다. ...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마치 담배연기와 신발냄새와도 같다.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입었다 벗은 바지와 같고 구멍 날 양말과 같으며 먹어치울 파이 한 조각과도 같다."

올덴버그는 자신의 작품에 관해 총체적으로 요약했다.
“나의 예술의 원천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파이나 햄버그이다.
접시 닦기의 경험은 내가 재생하고자 했던 감각적 효과를 알게 해주었다.
나는 음식을 먹기보다 만지기를 더 좋아한다.
다시 경험해 보고 싶은 요소를 과장한다. 캐리커처처럼 단순화하고 특정한 효과를 강조하는 것이 내 구미에 맞지만, 캐리커처는 아니다.
결과를 합리화시키는 작업이다.
자기 현시욕이 강한 나로서는 솟아나오는 기쁨을 감추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설명해야만 한다.
동물적인 욕구는 아름다움에 앞선다. 동물적인 욕구에 근거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나약하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러한 자책감이 나를 이성으로 이끈다.”

워홀의 친구 로버트 인디애나도 대중적인 이미지로 작업하면서 팝아트 운동에 가세했다.
워홀보다 열 살 어린 인디애나는 사실주의 방법으로 사물을 묘사하는 기교가 매우 뛰어나 미국의 정밀주의 예술가들의 후예라는 말을 들었다.
1950년대 중반 은행 나뭇잎과 아보카도를 바탕으로 한 기하적 패턴을 사용하면서 하드에지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1950년대 말 풍화된 강철과 쓰다 남은 목재로 구성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다른 팝아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생활의 진부한 사물을 주제로 선택했으며, 특히 인쇄활자와 광고 간판을 전문으로 다뤘다.
생생한 색채는 막연하게나마 옵아트를 연상시키는 시각적 모호함을 창조한다.
그는 단어를 초보적인 상징으로 사용했다. 어릴 때 기차를 타고 가다가 거리에 걸린 ‘식사 Eat’라는 간판을 본 기억을 되살려 제작한 <식사>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우리 기억 속의 많은 것들과 연계되어 있음을 알리려고 한 작품이다.그는 1964년에 워홀과 함께 영화 <식사>를 공동 제작했으며 만국박람회의 뉴욕관을 위해 6m 높이의 ‘EAT’ 간판을 제작했다.

파리 태생 미국 조각가 마리솔(1930~)은 1949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와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수학했다.
1950년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와 한스 호프만의 학교에서 수학했다.
1955년경부터 나무로 등신대의 인물상을 조각하기 시작한 그녀는 작품의 주제로 가족, 사교계와 중산층에 대한 풍자를 다루었는데, 전자의 예로는 <가족>, 후자의 예로는 <여인과 개>, <파티> 등이 있다.
마리솔의 인물은 상자 모양으로 된 나무 몸통에, 종종 마리솔 자신의 얼굴이나 팔다리를 석고로 형을 떠서 제작한 얼굴이나 팔다리 등이 결합된 것이었다.
또한 인물상에 목걸이, TV 수상기, 거울, 꽃병, 우산 등 다양한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여 거의 아상블라주와 유사하게 제작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뉴욕에서 그녀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이때는 팝아트 전성기였고, 마리솔의 작품에도 팝아트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그녀의 작품은 유머와 사회 풍자, 캐리커처를 결합하는 독창적인 방식을 보여주었다.

워홀보다 세 살 어린 톰 웨설만은 만화를 그리다가 여인의 몸을 주로 그리기 시작했다.
신시내티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군대에 있는 동안 만화를 그렸고, 그후 신시내티 미술 아카데미와 뉴욕의 쿠퍼 유니언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웨설만은 콜라주와 혼합매체를 사용한 구성을 위해 추상표현주의를 포기했고, 실제 세계와 미술 세계 사이의 긴장이나 모호함을 만들어내기 위해 재현과 실재를 함께 도입했다.
1961년부터 이미 <위대한 미국인의 누드> 연작을 그리기 시작해 에로틱한 느낌을 주면서 미국 국기의 색이기도 한 빨강색과 파란색을 주로 사용했다.웨설만은 앙리 마티스의 유명한 <핑크 누드>로부터 영감을 받아 <핑트 누드>와 비교가 되는 순진한 모델을 <핑크 누드>의 자세를 취하도록 한 후 에어브러시를 사용하여 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도록 했다.
여인의 몸 부분을 확대하여 그리거나 콜라주를 사용한 그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와 관련이 있으며 팝아트 예술가들에게 일반적인 환상주의의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누드는 사실적으로 묘사된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몰개성화된 색스 심벌이 되었다.

제임스 로젠퀴스트도 워홀과 마찬가지로 상업미술에서 순수미술로 전향한 예술가이다.
1950년대 말부터 로젠퀴스트는 상업 회화에서 파생된 기법을 작품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대 산업문화와 포스터 광고의 가벼운 이미지로부터 도상을 끌어냈다.
그의 작품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파편화된 이미지들과 규모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이미지는 사진 확대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확대되고 부드럽게 마무리되었다.
다른 팝아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조각내고 이것들을 원래의 환경으로부터 이탈시켰다.
그의 작품은 워홀과 라우센버그의 신랄함이 결여된 부드러운 불명료성을 지니고 있다.

1960년부터 주로 잡지에서 주제를 구하여 커다란 그림을 그린 그는 말했다.

“우리는 라디오와 TV 그리고 시각 매체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
그것들은 힘 있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그것들을 바라볼 때 나는 놀라고 흥분하며 그것들에 매료된다.”

“나는 그림에서 낭만적인 요소를 피하여고 한다”고 말한 그의 그림에는 자전적인 개인 상징이 있다.
1962년에 그린 <모세관 현상>은 나무가 한 그루 있는 풍경화로 영화 포스터처럼 커다란 그림에 여러 개의 작은 캔버스를 부착했다.
<머스 커닝햄의 무도회>(워홀 101)는 커닝햄의 구두를 신은 발을 확대한 캔버스를 따로 삽입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환각을 일으키게 했다.

로젠퀴스트의 작품에 정치적인 요소가 등장했는데 특히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부통령이든 린던 존슨이 대통령 직을 계승했다가 이듬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당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것은 대학생들의 시위를 자초했으며 로젠퀴스트도 반전운동에 동참하여 정치적인 주제를 그림으로 시위했다.
그의 대작 <F-111>은 이런 작품 중 하나이다. 26m가 넘는 이 벽화는 레오 카스텔리 화랑 벽을 꽉 채웠다.
그는 그림에 파이어스톤 타이어와 케이트를 집어넣고 스파게티를 확대하여 캔버스 바닥에 깔고 비치파라솔 아래 원자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그려넣어 전쟁이 인간의 소박한 삶을 파괴함을 시위했다.
소녀의 머리를 말리는 헤어드라이어는 미사일의 윗부분처럼 보인다.
로젠퀴스트는 미국 전투기가 북베트남을 공격한 것을 비난하면서 벽화로 항의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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