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4

기원전 6세기는 인류가 사춘기에 접어든 시기였다.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를 의식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Zoroaster(차라투스트라, BC 630?-553?), 탈레스Thales(?-?), 그리스 최초의 철학학파 Miletos학파(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BC 610-546, 만물의 근원은 eternal, 水地火風), 아낙시메네스Anaximenes(BC 585?-525, 만물의 근원은 air, 영혼은 공기)), 피타고라스Pythagoras(BC 582?-497?), 이사야Isaiah(?-?), 석가모니(BC 563?-483?), 노자(?-?), 공자(BC 551-479) 소크라테스Socrates(BC 469-399), 플라톤Platon(BC 428-348),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BC 384-322) philosopher와 sophist의 차이

서양 사상의 양대 산맥
동양에서 도교와 유교, 즉 노자와 공자의 사상이 두 개의 산맥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이 서양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산맥이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보다 41살 어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만이 진정한 철학자로 칭송했다. 기원전 387년경 41살 때에 아테네 근교에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설립하고 교육에 이바지했는데, 아카데메이아는 대학의 효시이다. 두 번이나 시칠리아 섬을 방문하여 시라쿠사의 참주tyrant(tyranny전제정치)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 이상정치를 실현시키려고 했으나 좌절되었다. 공자도 같은 경험을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였다.

플라톤의 생애는 아테네의 쇠퇴기와 함께 하는데, 기원전 431-404년에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은 민주정치를 대표하는 아테네과두정치oligarchy(소수지배)를 대표하는 스파르타의 정치체제의 싸움이기도 했다. 아테네가 패해 스파르타의 조종을 받은 30인의 참주(대게 귀족) 독재체제를 맞이했다. 그 후 민주주의가 부활되었지만, 이 체제 하에서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에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501명의 시민 재판관이 1차 재판에서 280:221로 2차 재판에서 360:140으로 사형을 결정지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실망을 느낀 플라톤은 아테네를 떠나 메가라, 이집트, 남이탈리아, 시칠리아 선 등을 13년에 걸쳐 여행했다. 이 여행에서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학파에 유입된 신비주의 사상인 오르페우스교의 영혼윤회설, 영혼의 정화, 해탈 등이었다. 에게해 사모스 섬 태생으로 탈레스의 주선으로 이집트로 유학을 떠나 23년 동안 수학하고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이집트가 함락되자 포로로 바빌론으로 이송되어 12년을 보낸 피타고라스는 56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크로톤 섬에 학술연구단체이면서 수도원 성격을 띤 최초의 철학공동체를 설립했다. 그는 영혼의 윤회사상을 가르쳤으며, 채식주의를 추구했고, 백색의 옷과 담요를 사용했다. 그의 종교적 교의는 윤회와 사후의 응보로서 동시에 인간과 동물과의 유사성을 강조하여 육식을 금했다. 이론에 있어서는 음악과 수학을 중시했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사상을 기록하는 것을 금했으므로 그의 업적이 그 자신의 것인지 초기 제자들의 것인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로 보았으며, 그가 말한 자연수는 기하학에서의 점과를 대응시켰다.

플라톤의 철학에는 영혼이 동경하고 추구해야 할 실재로서 선험적인 이데아의 세계가 전제된다. 그의 이데아론은 종교적이다. 그는 만물이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하여 존재하는 것을 보고 인간의 인식활동이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를 관조하는 것으로 보았다. 영혼윤회설과 관련하여 하인이 기하의 문제를 푸는 것을 예로 들었다.

이데아 세계, 동굴 속의 인간, 철학자의 역할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ahnes(BC 450?-388?)가 『구름 Nephelai』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을 조롱하자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적인 공화국에서 사람들을 오도하는 예술가를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마케도니아의 작은 도시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필리포스Philippos 대왕의 아버지 아민타스 2세Amyntas II의 주치의였다. 기원전 368년 아리스토텔레스는 17살의 나이로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44살 많음)이 타계할 때까지 아카데메이아에서 공부하고 플라톤이 타계한 뒤에는 소아시아와 레스보스 섬으로 가서 5년 동안 지냈다.

기원전 343년 41살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의 초청을 받아 13살 된 그의 아들 알렉산더(356-323)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는 알렉산더가 16살 될 때까지 가르쳤다. 49세에 아테네로 돌아온 그는 리케이온Lykeion 학원을 설립하고 연구 및 교육활동을 전개하면서 자신의 재산 외에도 알렉산더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도서관을 설립하고 또한 세계 각처의 식물, 동물로 박물관도 설립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정원사, 사냥꾼, 낚시꾼으로 하여금 모든 종류의 식물, 동물 표본을 스승에게 보내도록 했다. 그뿐 아니라 스승을 위해 158종에 달하는 각국의 헌법도 수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알렉산더 대왕이 6월에 열병으로 타계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질 것을 우려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이때 그는 아테네 시민이 두 번 다시 철학에 죄를 짓는 일을 되풀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피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 322년에 에우보이아의 칼키스에서 지병으로 62해의 생을 마감했다.

주로 시문학을 다룬 『시학 Poetica』은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플라톤에게 예술의 존재 의의는 윤리적인 삶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므로 그에게 심미적 비평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윤리적 척도는 미적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는 예술을 인간 활동으로 보고 예술과 인간의 정신활동 관계를 중시했으며, 예술의 토대로서의 삶을 중시하고 모방이 인간의 고유한 본성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인간의 능력을 신장시키는 삶의 기능임을 강조했다. 현실을 모방하는 예술가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있어야 할 이상을 표현하므로 예술가의 모방은 결코 복사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예술 창작에서 지적 요소를 강조하고 규칙이 없는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창작과정은 이해할 수 있으며, 통제가 가능하므로 플라톤과 달리 신비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예술과 자연의 밀접한 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자주 인용되었다. 그는 『시학』에서 “모방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것이며,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도 그가 가장 모방을 잘 하고, 그의 지식도 모방에 의해 획득되는 데 있다. 모방된 것에 대해 인간이 희열을 느끼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고 했다. 그는 불쾌감을 주는 대상이더라도 매우 정확하게 묘사해놓은 데서 사람들은 쾌감을 느낀다면서 그 이유는 배움이 최상의 즐거움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림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것은 봄으로써 배우기 때문인데, 그림을 통해 사물을 추론해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예술의 소재가 현실이고, 현실을 모방하기 위해 예술은 재현, 혹은 재생산한다고 보았다. 예술의 기원을 그리스의 희비극 드라마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은 현실의 모방이었다.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더라도 현실 그 자체가 될 수 없는 까닭은 예술가가 자신의 개성과 감정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주관이 표출된다는 점에서 예술의 특징은 표현에 있으며, 사람들이 작품에서 특별한 감동을 맛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를 미적 체험aesthetic experience라고 하며, 이런 감동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katharsis라고 하며 감정을 정화시켜 인간성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에서 얻어지는 효과로 말한 카타르시스는 미적 체험을 일컫는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시인 릴케는 고대의 아폴로 토르소가 감상자에게 “당신은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을 걸며 새로운 삶에 대한 결단을 촉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사람은 미적 체험을 통해 일상을 풍요롭게 가꾸어나간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이 자연을 모방한다”고 한 말에 대해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1854-1900)는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말하여 예술이 오히려 영향력이 있음을 강조했다.

예술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테크네techne이며 기술이란 뜻이다. 테크네는 숙련된 모든 제작을 의미했으며, 건축가뿐 아니라 목수와 직조공의 작업까지도 포함되었다. 그리스인은 테크네를 인지가 아니라 제작이며, 영감보다는 기술에 의존하고 일반 규칙을 따를 경우 자연과 대립되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재주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예술에서 기술을 우선적인 것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도 예술을 자유로운 예술과 신체적 노역을 요하는 예술로 구분하고 노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유로운 예술을 더욱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예술이 자연물의 모방, 혹은 사물의 재현이어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인의 사고는 서양 사람들에 의해 계속 존중되어 왔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실험정신을 가진 피카소조차도 완전 추상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모방으로 번역되는 미메시스mimesis는 또한 ‘재현’, ‘묘사’, ‘표현’ 등의 의미를 지닌다. 미메시스의 개념이 음악과 무용을 지칭한 동사에서 유래했으므로 ‘음악과 무용에 의한 재현과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메시스는 첫째, 사람이나 동물의 행위에 대한 흉내내기miming, 둘째, 흉내내지 않고 모방하기imitation, 셋째, 물질로 사람이나 사물을 복제replication하기이다. 소크라테스는 미메시스를 사물의 외관을 복제하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회화와 조형물에 적용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진정한 미메시스란 단순한 외관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 그 자체, 즉 이데아idea를 모방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를 사람의 본능이며, 현상 혹은 보편성을 아는knowing 즐거움을 얻는 주요 수단으로 보았다. 실재를 모방한다는 플라톤의 예술론은 개념과 정신을 중시한 현대 추상과 맥이 닿아있고, 이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은 외적 모방을 거부하고 내적 표현을 중시한다. 이는 추상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 카지미르 말레비치, 피트 몬드리안의 추상 모두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현상 혹은 보편성을 모방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론은 재현을 중시하는 예술가들의 작업과 맥이 닿아있다. 19세기에 예술과 실재의 관계가 사실주의에 대한 논의로 다시금 재연되었다.

아름다움은 추상적인 개념이며, 예술이 구체적이며 명확하게 아름다움을 규정한다. 자연을 통해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있고, 예술을 통해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있다. 예술을 통해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것이 미학의 과제이다. 아폴로 선장은 달 가까이서 지구를 바라보며 “신의 눈으로 지구를 바라보았다”고 했는데, 태초에 신이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고 보기에 좋았더라”는 성경의 구절을 상기하게 한다.

예술을 기술에서 분리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의미로 순수예술fine art(beaux arts)이란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1880년대에 시작된 자연주의에 반동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내용을 강조하느냐 형태를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미술품은 두 가지 범주로 분류되는데, 정신적인 의미를 강조한 상징주의자들이 내용을 강조한 데 반해 정신적인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회화적 언어를 새롭게 하는 것을 우선시한 후기인상주의자들은 형태를 중시했다. 두 경향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19세기 말의 10여 년과 20세기 초 10여 년에 미술은 급속히 추상화되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 추상 화가들은 선언문, 성명서, 카탈로그 서문, 소책자, 혹은 내용이 풍부한 저작들을 통해 자신들의 목표를 널리 알리고 이해시키려고 했다. 다양한 담화 형식의 방대한 생산량은 단지 전술적이거나 교훈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해명하려는 욕구와 조형창작에 따른 개념적 실험의 요구가 섞인 노력의 증거였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시작해 10여 년 동안 그 정체성을 확립한 추상을 허버트 리드는 『아트 나우 Art Now』(개정판 1948)에서 “관례적으로 미술품이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예술가의 지각에서 출발했더라도 더 이상 대상에 기반을 두지 않고 독자적·일관적·미학적 총체를 만들어 나가는 모든 미술품을 우리는 추상이라 칭한다”고 규정했다.

앨프레드 H. 바는 『입체주의와 추상 미술』(1936)에서 추상 미술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바실리 칸딘스키를 꼽았다. 완전 추상을 거부한 피카소가 창조한 입체주의에서 추상의 두 주요 경향이 발생한 것이 흥미롭다. 특기할 점은 피카소와 브라크의 많은 입체주의 회화가 실제 모델을 사용해서 제작된 것들이 아니란 점이다. 소재에 대한 피카소와 브라크의 태도는 열정적이라기보다는 유희적이었고, 두 사람의 관심은 자신들의 회화적 언어에 집중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쇠라와 세잔을 본받아 작품이 회화로서의 속성과 힘을 지니려면 사물과 배경이 화면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의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재현과 추상의 문제가 처음 부각되었다. 입체주의가 젊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창작의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현실세계를 모방해야 한다는 의무를 버려도 되는 자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 위한 새로운 조형언어와 이의 구성을 모색할 수 있는 자유였다.

특기할 점은 기하학적 추상과 칸딘스키의 비정형 추상을 적대적 양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레비치의 추상은 기본형에 의거하므로 비개성적이며 근대적으로 보이더라도 몬드리안과 마찬가지로 그는 신비적 사색에 이끌렸으며, 물질을 찬양하기보다는 그에 대한 해답을 주고자 했다. 그는 물질세계를 상상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심층세계를 가리는 겉모습에 불과하다고 보았는데, 이는 자연의 한계를 초월하여 완전을 지향해야 한다는 그리스인의 사고와 같다. 칸딘스키의 미학은 표면적으로는 말레비치와 몬드리안의 것과 상이해 보이지만 상당히 유사한 기반에서 이루어졌다. 세 사람 모두 신지학에 심취했으며 칸딘스키는 말레비치와 마찬가지로 미술을 형태와 색을 통한 감각의 소통으로 보았다.

신지학theosophy은 보통의 신앙이나 추론으로는 알 수 없는 신의 심오한 본질이나 행위에 관한 지식을, 신비적 체험이나 특별한 게시에 의해 알게 되는 철학적ㆍ종교적 지혜 및 지식을 말하는데, 동서양의 여러 종교와 철학을 결합한 초자연적이면서 혼합적 사조로 20세기 초에 성행했다. 신지학은 1875년 뉴욕에서 신지학협회의 창립을 계기로 근대적 제의가 되었다. 우주가 본질적으로 정신적이라고 믿은 신지학자들은 겉으로 보이는 세계의 혼돈의 근저에 깊은 조화가 내재하고 있다는 자신들의 사상이 유물주의적 서양 세계에 정신의 부흥을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믿었다. 훗날 신지학은 병든 이성주의로 비판을 받았다.

칸딘스키의 회화가 자유롭게 흐르고 감성적인 추상인 데 반해 몬드리안의 회화는 엄격하게 기하학적 추상이었다.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서 추상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설명을 공식화하면서 예술가가 외관이라는 바깥 껍질을 넘어설 수 있다면 “보는 자의 영혼을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색을 꼽으면서 색에는 정신적 울림이 있으며,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울림과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1913년 오페라 「태양에의 승리」를 위한 의상과 무대디자인에서 입체주의의 특성을 보였는데, 배경 중 하나가 대각선으로 분할되어 검은색과 흰색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사각형으로 말레비치는 절대주의suprematism라 명명했다. 사각형에 대한 말레비치의 집착은 사각형과 틀 모두를 의미하는 라틴어 쿼드럼quadrum이 입증하는 것처럼 경계를 만드는 가장 단순한 기하학적 행위에서 나온 결과였다. 또한 그의 작업은 사각형의 형상과 회화의 배경을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절대주의 회화는 그에게 순수 회화에 대한 절대적인 진술이며 동시에 정신적인 것에 대한 도약이었다.

말레비치는 선언문에 “회화에서 자연의 일부, 마돈나, 누드의 부끄러움을 의식하면서 보려는 습관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순수한 회화 구성을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예술가와 자연의 형태를 묶어놓은 사물들의 지평선으로부터, 또 사물들의 집단으로부터 나 자신을 끌어내 형태를 무가치한 것으로 변형시켰다. 우둔하고 창조력이 부족한 예술가들만이 미술을 성실함으로 보호한다. 미술에는 진실이 필요한 것이지 성실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물들은 새로운 미술문화 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진다. 미술은 창조의 자기 목적적 방향으로, 즉 자연의 형태를 지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대중과 평론가들이 그의 절대주의 회화를 조롱하고 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레비치는 즉각적으로 많은 추종자들을 얻기 시작했다. 일 년 후 절대주의는 이들 예술가들 사이에서 가장 유력한 미술운동으로 부상했다. 1918년경에 다음과 같은 보고가 있었다. “절대주의는 모스크바 전역에서 꽃을 피웠다. 간판, 전시회, 카페 모든 것이 절대주의다. 우리는 확신을 갖고 절대주의가 도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절대주의 영향이 칸딘스키의 회화에 나타난 것은 기하학적 형태를 사용하기 시작한 1920년이었다.

말레비치는 논문 「비대상 세계」(1926)에서 “절대주의자는 가면을 쓰지 않은 진정한 미술에 도달하기 위해, 또 이런 우월한 관점에서 순수 예술적 감각을 통해 삶을 조망하기 위해 주변 환경의 사실적인 재현을 의도적으로 포기했다”고 밝혔다. 절대주의 회화를 구성한 기본 요소는 직사각형, 원, 삼각형, 십자가형이다. 말레비치는 ‘가장 순수한’ 형태가 정사각형이라고 믿었다. ‘순수 감성’을 표현한 회화는 <흰색 바탕에 흰색 정사각형 White Square on a White Ground>(1918) 연작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사각형이 약간 기울어져서 관람자가 그 적나라한 단순성을 인지하고 기하학적 형상보다는 유일무이하고 총체적인 유일자로 해석하기를 바랐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한 말레비치는 십자가의 형태와 동정녀의 순수성을 나타내는 흰색을 추앙했다. 그는 1918년에 <흰색 바탕에 흰색 십자가>를 그린 뒤 더 이상 그릴 것이 없어 회화를 그만 두었다. 말레비치가 1935년에 타계한 후 그의 시신은 레닌그라드의 예술가연맹에 공식적으로 안치되었으며, 그의 머리 위 벽에는 단순한 형태의 <검은 사각형>이 걸렸다. 며칠 후 그의 유해는 정면에 검은 사각형이 그려진 흰색 사각형의 묘석이 있는 무덤에 묻혔다. 말레비치와 그의 동료들에게 이 회화는 성상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다.

영성의 체험을 추구한 바실리 칸딘스키의 추상
1910-13년, 칸딘스키의 회화는 색이 매우 화려하고 풍경의 재현은 점점 희미해지며, 인물, 건물, 산 등의 형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재현의 형태라기보다는 기호의 기능을 한다. 그는 연작을 통해 선명치 않은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완전 추상으로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회화가 단순히 장식물에 지나지 않을 위험을 알고 추상 속에서 영성을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화가의 임무는 형식을 다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내용에 맞추는 데 있으며, 이를 통해 정신을 단련하는 것으로 보았다.

<인상 3-콘서트 Impression III-Concert>(1911)는 칸딘스키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콘서트를 다녀와서 음악회에서 얻은 청각적 체험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것으로 콘서트홀의 분위기와 음악에 대한 상징을 형태와 색으로 나타내면서 청각적ㆍ시각적 인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검은색 면은 무대 위에 있는 그랜드피아노이고 왼편 여러 개의 작은 검은 곡선들은 무대 가까이서 음악을 듣는 청중이다. 파리의 퐁피두센터에 소장되어 있는 두 점의 연필 스케치 습작을 보면 무대 가까이에 사람들이 앉아 있고 왼편 벽에 사람들이 서 있다. 스케치에 피아노가 흰 기둥 옆에 있지만, 여기서는 피아노가 중앙에 있고 기둥은 양편에 있다. 두 흰 기둥은 실제 기둥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소리를 기둥으로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즉흥>ㆍ<구성>ㆍ<인상>
칸딘스키의 <즉흥> 연작에서 인물, 건물, 산 등은 불분명하더라도 그 형태가 발견되며, <구성> 연작은 <즉흥>에 기반을 두고 계획적으로 확장시킨 작품들이다. <인상> 연작은 “외부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제목이다. 칸딘스키는 1913년 『슈투름』지에 기고한 글에서 ‘인상’, ‘즉흥’, ‘구성’을 규정했다.

1. ‘인상’은 외부 자연으로부터의 즉각적인 느낌이다.

2. ‘즉흥’은 무의식적이며 자연발생적이고 내재적이며 비물질적인 전체의 특성을 지닌 표현이다.

3. ‘구성’은 장기간의 작업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며 현학적인 면모마저 지니는 내재된 느낌의 표현이다. 여기서는 이성, 의식, 확실한 목표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이 역시 계산이 아닌 느낌에 의해서 이뤄진다.

칸딘스키는 풍경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수평선을 절제했다. 산이 있는 경관이 그로 하여금 수평선을 깨고 사선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이는 화면 전체 공간에 영향을 미쳤다. 수평적 구도를 버린 것이 흥미로운 혁신을 가져다주었다. 선과 색이 독립적 존재로 선택되기 시작했다. 선이 분절되어 역동성을 창조하거나 화면에서 리듬으로 나타났고, 색이 독립적 형태가 되어 불확정적 공간에 떠 있게 되었다. 사물과 풍경은 더 이상 외부의 빛을 받지 않으며 색 자체에서 발광했다. 구성은 모든 부분들을 결합하는 힘으로서 중요해졌다. 그가 1913~14년에 제작한 많은 회화에서 특정한 대상의 모습들이 배제되고 있음을 본다. 이런 회화는 기하학적 추상화와는 구분되며 추상에 이르는 또 다른 과정을 보여준다. 그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여 진전시켰는지 그의 체험에서 알 수 있다.

스케치하다가 돌아와, 생각에 빠진 상태로 작업실 문을 여는 순간, 예기치 않게 묘사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운 회화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리둥절해서 멈춘 채 그것을 보았다. 회화에는 주제가 없었으며 알아볼 만한 사물도 없었고, 전적으로 밝은 색의 자국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마침내 나는 가까이 다가가 보고 그때서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내 회화의 공간을 구상성, 즉 사물을 묘사하는 것으로 채울 필요가 없다. 오히려 내 회화에 해로울 뿐이다.

<무제 (첫 추상 수채화) Untitled (First Abstract Watercolor)>는 미술사에서 최초로 완전 추상에 도달한 작품이다. 제작년도가 1910년으로 적혀 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191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1913년 이전에 그가 제작한 회화에서 추상의 과정이 나타나는데, 유추할 만한 자연의 잔상들이 어렴풋이 남아있어 1913년 이전에 그가 완전 추상을 성취했다는 것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제작년도를 속인 사례를 들로네와 레제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누가 먼저 완전 추상에 도달하느냐에 대한 지나친 경쟁심에서 그런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무제>는 회화를 자연의 재현으로 본 서양의 오랜 관념을 깨뜨린 작품이다. 이는 인간의 눈과 이성으로 대상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새로운 시각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비재현적 방법, 즉 추상만으로 가능하다는 새로운 회화적 제안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칸딘스키는 회화의 의미를 심리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으로 고찰했다. 그는 색이 관람자에게 미치는 효과로서 파란색은 천상의 색이고, 녹색은 기쁨, 슬픔, 열정 가운데 어느 것도 지니지 않은 평온한 색이며, 노란색은 저돌적이고 활동적 색이란 점을 들었다. 조르주 쇠라와 마찬가지로 그는 색을 선적인 방향과 연관시키며 색이 형태를 가진다고 말했다. 그는 형태와 색의 조합이 내적 표현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오르피즘 혹은 오르페우스적 입체주의
1910년까지 추상은 무르익어 갔고 여러 나라에서 동시적으로 진전되었다. 개별 선구자에 이어서 곧 추상 미술 그룹과 운동이 뒤따라 등장했다. 그 최초의 것들 가운데 프랑스에서 일어난 오르피즘Orphism(동시대비)과 싱크로미즘Synchromism(동시발생주의)이 있다. 오르피즘은 1911년 말부터 1914년 초까지 파리에서 일어난 순수 회화를 추구한 경향으로 비재현적 색채 추상을 의미했다. 아폴리네르는 순수 회화와 오르피즘을 동의어로 사용했다.

오르피즘에 먼저 도달한 사람은 들로네와 레제보다 연장자인 프란티셰크 쿠프카(1871~1957)였다. 1895년 이후부터 파리에 거주한 쿠프카는 빈 아르 누보의 경로를 거쳐 추상에 도달했다. 그는 1911년 말 순색이 빚어내는 대비와 율동의 힘을 보여주는 <뉴턴의 원판들 Discs of Newton> 연작에서 완전히 비자연주의적 구성을 이룩했다. 여기서 구심점인 색의 형태들이 빛의 에너지처럼 파동의 형상으로 퍼져나가 삼투하고 있음을 본다. 그는 자연주의 영상과 추상적 형상, 선, 혹은 색의 특정한 상징들을 통해 신비적 직관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는 일정량의 주제를 갖고 연속적으로 탐구함으로써 독자적인 형태를 발견했다. 운동을 영상화하는 데 관심이 많은 그는 공간에서 회전하는 물체의 운동과 잇달아 일어나는 지상에 기반을 둔 운동들을 탐구했다.

들로네는 분석적 입체주의의 자유로운 기하학적 형태들을 차용하여 이를 역동적인 색 표현에 중점을 둔 회화에 힘과 극적인 요소를 부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에펠탑 Eiffel Tower>(1910~11) 연작은 색과 형태가 어떻게 개인적인 열정을 표현하면서도 주제를 충실하게 재현하는지 보여준다. <창문 Window>(1912) 연작을 계기로 그의 회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 연작은 스물세 점의 회화와 드로잉으로 구성되었고, 그중 열세 점이 1913년 1월 베를린에서 소개되어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이 시기에 클레가 번역한 들로네의 에세이 「광선」에는 색, 광선, 눈, 뇌, 영혼의 방정식이 제시되어 있었다. 들로네는 1912~13년경에 오로지 색과, 색의 대비로만 이루어지면서도 동시에 어느 순간 갑자기 지각되는 회화적 형태를 생각해내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미셀 외젠 슈브뢸의 과학 용어인 ‘동시대비’를 사용했다.

들로네의 이론과 실제 작품은 색이 단순히 드로잉을 보조하는 장식적 종속물이 아니라 형태를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가 창안해낸 용어인 동시주의Simultanism는 색을 사용하여 화면에 형태를 만들어내고 공간을 암시하는 것이다. 들로네는 쿠프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추상에 도달했는데, “나는 수학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고 영혼의 문제로 고심한 적도 없다”고 했으며, 색을 통해 회화의 모든 측면을 구현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색은 깊이감과 형태 그리고 운동을 부여한다”고 했다.

순수하게 색만으로 회화의 형태와 내용 모두를 전달하려고 한 운동이 싱크로미즘이다. 파리에서 작업하던 두 명의 미국 화가들 스탠턴 맥도널드 라이트와 모건 러셀이 들로네의 오르피즘에서 영향을 받아 진전시켰다. 모건 러셀이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06년이었고, 잠시 동안 마티스의 지도를 받았다. 맥도널드 라이트는 러셀과 함께 색채론을 연구했으며, 1912년경 과학적 색 배치에 바탕을 둔 회화론을 전개했다. 이들이 싱크로미즘이라고 명명한 이론은 들로네의 오르피즘과 유사한 것이다.

새로운 미학의 표출을 위한 데 스테일
추상 미술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소명 내지는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시인으로 나중에 화가이며 건축가가 된 테오 반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1883~1931)는 미술이론에 조예가 깊었고, 칸트와 헤겔 이후 독일 철학의 전통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헤겔(1770~1831)에 의하면 역사는 모순을 통한 점진적인 정반합의 변증법적 단계에 따라 정신Geist의 자의식으로 나아간다. 헤겔에게 사회와 문화의 모든 단계는 이렇듯 자유를 향해 전개되는 정신과 보조를 맞추며 정신의 전개에 기여한 바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도식 안에는 가장 물질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정신적인 것에 이르는 예술의 본성적 위계가 존재한다. 즉 건축부터 시작해 그와 동일한 정도로 탄탄하고 성숙한 단계인 조형물과 회화를 지나 시와 음악에 이르고, 마침내 철학의 순수한 성찰 속에서 절정에 달하는 위계가 존재한다.

반 두스뷔르흐는 1915년에 몬드리안을 알고부터 그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회화에 관한 중요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몬드리안이 1911년부터 1914년에 걸쳐 서서히 추상에 도달한 반면 반 두스뷔르흐는 1916년과 1917년에 추상으로 급속히 전환했다. 1917년 이후의 반 두스뷔르흐의 회화는 몬드리안의 회화와 양식 및 구성 면에서 매우 흡사하여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두 사람은 네덜란드 최고의 젊은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들의 모임 데 스테일De Stijl을 결성했으며, 반 두스뷔르흐는 1917년에 동명의 잡지를 창간했다.

몬드리안의 생각을 좇아서 반 두스뷔르흐는 미술에서 자연과 지성, 혹은 여성적 원리와 남성적 원리,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수평적인 것과 수직적인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데 스테일 그룹의 예술가들은 순수 조형작품을 만들고 이를 대중에게 홍보했다. 그들이 선언한 미적 신조와 양식은 새로운 조형주의, 혹은 신조형주의Néoplaticisme로 알려졌다. 신조형주의에는 두 가지 주요 요소가 있는데, 첫째, 수직선, 수평선에 대한 강조이고, 둘째, 빨강, 노랑, 파랑이라는 근원적인 색이다. 수직선과 수평선은 세계를 형성하는 두 개의 축으로 수평선의 힘은 태양을 도는 지구의 운동경로이고, 수직선은 태양의 중심으로부터 발생하는 광선의 운동이다. 삼원색에 있어서 노랑은 빛의 색이고, 파랑은 하늘이며, 노랑은 빛을 발산하고, 파랑은 후퇴하며 빨강은 떠다닌다. 
 

신조형주의에서 완벽한 정확함에 대한 추상적 이상을 지닌 기계기술은 장인의 솜씨보다 높은 위치에 서게 되고, 주관적 표현은 미술로부터 제거되어야만 했다. 윤리적 면에서 몬드리안은 주관적 개인주의는 모든 단계에서 보편적 조화에 대한 추상적 이상에 종속되어야 한다면서 이러한 보편적 조화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각예술이 미래의 이상향으로 나아가는 길을 마련해줄 수 있다고 보았다.

반 두스뷔르흐는 1924년부터 초기의 신조형주의 원리를 수정하기 시작하면서 요소주의가 조형주의의 지나치게 독단적인 적용에 대한 수정이며 그것의 논리적 발전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직선과 직각으로 엄격하게 제한시키기는 했으나 그는 이제 수직, 수평을 거부하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면을 허용함으로써 더욱 위대한 역동성을 지향하게 되었다.

서양의 위대한 정신을 부활시키려고 한 피트 몬드리안
피트 몬드리안(1872~1944)의 생애는 칸딘스키의 것과 유사하며, 그가 칸딘스키의 뒤를 좇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두드러졌던 두 경향인 자연주의와 상징주의에 이끌렸고, 그 뒤 자연을 자신의 감정으로 충전시켜 구름, 나무, 건초더미, 모래 둔덕 등의 색과 형상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표현주의의 단계를 거쳤다. 그는 종교적 위기를 겪으면서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1861~1925) 및 신지학자들theosophists과 접촉했다. 독일의 신지학협회 회장을 지낸 슈타이너는 후에 인지학협회를 창설하고 예술, 교육, 의학에 이르는 광범한 문화운동을 지도했다. 인지학anthrosophy은 인간의 지혜를 바탕으로 인간의 정신, 육체, 영혼을 인식하고 통찰하여 여러 분야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데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몬드리안은 칸딘스키 못지않게 동양 종교에도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것만이 서양의 위대한 정신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보통사람은 물질적 생명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지만, 예술가는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 ... 그의 창조 작업은 무형의 수준에 자리 잡아야 한다. 즉 지성의 수준에서”라고 했다.

네덜란드의 지방 도시 아메르스포르트는 몬드리안의 고향으로 그가 태어났을 때 빈곤이 만연하고 사람들은 일상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적 광신이 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지역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몬드리안의 아버지도 그런 광신도 가운데 하나였다. 몬드리안은 1892년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급진적인 신교도 모임인 네덜란드 개혁교회에 참여했으며, 종교적 삽화 시리즈를 그렸다. 그는 파리로 가기 얼마 전에 조르주 브라크의 회화를 보고 세부적인 면에서 자신의 작업과 유사한 데 대해 감동을 받았다. 1911년 10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근대미술전 Kunstkring’에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회화를 본 몬드리안은 1911년 말 마흔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바로 전에 파리로 가서 입체주의에 관심을 기울였다. 파리에서 제작한 그의 초기 작품들에 나타난 색은 피카소와 브라크가 사용한 색에 상응하는 회색, 갈색, 검정색으로 한정되었다.

<회색 나무 The Gray Tree>(1911)에서 몬드리안은 사과나무 밭의 무성한 잎과 안개 낀 회색의 대기를 표현했다. 선적 구조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실제 과수원의 풍경과 향기를 상기시킨다. <꽃 핀 사과나무 Flowering Appletree>(1912)에서 색은 더욱 투명해지고 나무의 배치는 부차적이 되었다. 작품의 구성은 중심에서 전개되었다. 그는 <꽃 핀 나무들 Flowering Trees>(1912)에서 더욱 추상화했다. 검은 곡선으로 사과나무 꽃의 흰색과 바탕의 흰색을 구분하기 어렵다. 자연의 형태가 그에 의해서 선의 그물이 되었다. <꽃 핀 나무들>에는 실제 나무의 인상이 일부 남아있어 과수원을 거닐 때 흰 빛이 감도는 분홍색 꽃이 가득한 가지에 시야가 막혀 전제의 조망을 잃는 느낌을 준다.

1912년 이후 몬드리안은 검은 선으로 형태들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나무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Trees>(1912)을 예로 들면 구체적인 대상에서 출발하지만, 이것을 몇 개의 기본선으로 축약하고 축약한 선들을 대상이 놓인 주변의 여러 공간적 요소들과 연결하면서 각각의 형태가 납으로 고정된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틀 지워지게 했다. 이런 사례를 <생강단지가 있는 정물 I Still Life with Gingerpot I>(1911)와 <생강단지가 있는 정물 II Still Life with Gingerpot II>(1912)를 비교함으로써 그의 선들이 어떻게 축약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회화에서 선이 기본 틀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1914년경에 입체주의 원리를 이용해 입체주의자들보다도 앞서 추상으로 나아갔다. 그는 “입체주의는 그 자체의 발견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논리적 결론을 수용하지 않았다. 즉 입체주의는 고유의 목표, 즉 순수 조형 표현을 향해 전진하지 않았다”고 했다. 회화에 대한 그의 개념과 목표는 입체주의자들과 달랐는데, 미학적 금욕주의와 추상 자체를 선호했다.

몬드리안은 그가 추구하는 것이 피카소와 브라크가 가장 두려워하는 추상과 평면성이란 사실을 알았다. 추상과 평면성은 그의 신념 체계의 핵심인 보편성의 범주와 일치했다. 그는 정면 시점을 적용하여 그가 즐겨 사용하는 모티프를 입체주의의 그리드보다 더 엄밀한 직각 형태로 변형하는 방식을 찾아냈다. 그는 모든 것이 공통분모로 환원될 수 있고, 모든 형상은 수평 대 수직의 단위로 이뤄진 패턴으로 디지털화되어 표면 전체에 널리 퍼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회화의 기능은 세계의 기저에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 되며 이항대립으로 이뤄진 것으로 이해된다. 문제는 이런 대립항들이 어떻게 서로를 중립화시켜서 영원한 평정 상태를 이루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몬드리안은 1914년 여름 고향으로 가서 몇 년 동안 지내면서 반 두스뷔르흐와 함께 데 스테일을 결성하고 활동하다가 1919년 여름에 파리로 돌아갔고, 1938년에 런던으로 이주했다. 이듬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공습으로 런던 작업실이 파괴되자 몬드리안은 뉴욕으로 가서 도시의 분절적인 리듬을 표현한 ‘부기우기’ 연작을 제작했는데, 이전의 구성보다 색이 화려하고 끊임없이 활동하는 리듬으로 이루어졌다. 뉴욕이란 도시가 그로 하여금 일관성을 거의 무시하게 만들었다. 그는 늘 자신의 환경에 영향을 받아왔지만 뉴욕은 거리의 형태와 생기발랄한 대중음악을 통해, 특히 이 노화가를 뒤흔들어놓았다. 몬드리안은 오래 전부터 방에 측음기를 기본적으로 설치해놓고 있었다.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Broadway Boogie-Woogie>(1942/43)는 원리상으로는 아닐지라도 양식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의 기준에 의하면 이것은 커다란 그림이며 그때까지 그려온 것들에 비하면 매우 동적이다. 여기서는 다수의 작은 색면들이 신조형주의적 구조로 배열되어 있으나 그 정적인 특성에는 역행하고 있다. 그의 모든 신조형주의 회화는 횡적으로 전개되는 경향이지만, 여기서는 이런 속성이 특히 강해 운동이 왼편과 오른편에 몰려 있으며 중앙 부분은 상대적으로 고요하다.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는 뉴욕의 생기발랄함과 그곳의 음악 박자 감각과 더불어 미국의 크기를 반영한 듯 보인다.

결국 그는 구조주의의 실천가로 출발해 구조주의의 공격자로 변신한 셈이다. 그의 작품은 회화 분야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오른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추상과 비구상화의 여러 부문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또한 외관상으로 그의 회화는 1930년 이후 나타난 대부분의 산업미술과 장식미술, 광고미술의 양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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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강의 3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툴루즈 로트레크 포스터의 그래픽 양식에서 영향을 받았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회화를 전시하는 것으로 프랑스에 대한 동경이 현실화되었고, 전시된 자신의 작품을 보기 위해 1900년 10월에 때맞추어 친구 카를르 카사헤마스와 함께 파리로 갔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그는 카사헤마스와 함께 12월에 바르셀로나로 돌아갔다. 제르맹 가르갈로와 병적인 사랑에 빠진 카사헤마스는 즉시 파리로 갔고, 1901년 2월에 몽마르트르의 한 식당에서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피카소는 그 해 5월에 파리로 가서 라피트 가 6번지에 있는 앙브루아주 볼라르 소유의 갤러리에서 열릴 첫 개인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898년에 세잔에게 중요한 전시회를 마련해주었던 볼라르는 파리 아방가르드 무대의 유명 인사였다. 피카소는 1904년 4월까지 파리와 스페인을 오가며 여행했고 그때 막대한 양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1904년 파리에 정착하기로 하고 몽마르트르의 값싸고 자유분방한 구역에 작업실을 빌렸다. 몽마르트르는 1880년대에 새로운 카페와 카바레로 자유분방한 생활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물랭 루즈 댄스홀이 1889년에 문을 열었고, 그곳보다 유명하지 않은 여러 카페들이 1900년경에 등장했으며, 유럽 전역에서 야심찬 예술가들이 작업실 임대료가 싼 그곳으로 점점 이주해왔다.

피카소는 로트레크의 영향을 받아 빈곤이나 약자를 주제로 한 감상적이며 우수에 찬 그림을 그리면서 청색시대(1900~04)를 보냈고, 1905년부터 2, 3년 동안은 분홍색과 회색을 주로 사용하여 장밋빛시대를 맞아 부드러운 화풍으로 달라졌다. 장밋빛시대에 주로 다룬 소재는 곡예사, 댄서, 어릿광대 등이었다. 피카소가 마티스를 만난 것은 1906년이었다. 그는 야수주의자들의 회화에서 감명을 받았지만 그들의 장식적ㆍ표현적 색 사용을 따르지 않았다. 니그로시기로 불리는 1907~09년에는 세잔과 아프리카 조형물에 대한 연구를 통해 형태의 분석과 단순화를 축으로 하는 독자적 노선을 추구했다.

피카소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리기 전 앙드레 드랭과 함께 트로카데로 민속박물관을 방문하고 아프리카 가면에서 강한 인상을 받아 “그 가면들을 보고 꼼짝할 수 없었다. 인간이 그 자신과 그를 둘러싼 미지의 적대세력을 중재하도록, 그것들에 색과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공포심을 이겨내게 하는 임무를 띤, 신성하고 마술적인 의도로 제작된 그 모든 물건들. 이는 미적 과정이 아니라 마술의 일종으로, 적대적 세계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우리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공포에 일정한 형태를 부과함으로써 권력을 잡는 방식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던 날, 나는 내가 갈 길을 찾았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날의 인상은 피카소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그가 드랭, 마티스, 브라크에게 아프리카 가면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조형물”이라고 말했을 때 그에게 조형물의 전통 개념은 무너진 것이다. 그는 가면으로부터 미술품을 위한 형식적 해법을 발견했다. 그는 가면이 사람들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의 기하학적 구조를 찬양한 입체주의
루이 보셀이 1908년 9월에 살롱 도톤의 심사위원 중 하나인 마티스와 이야기를 나눌 때 마티스가 브라크가 “작은 입방체가 있는” 작품을 제출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브라크가 그해 여름 프랑스 남부 레스타크(마르세유)에서 그린 풍경화 <레스타크의 집들>을 특징화한 것이었다. 황토색과 녹색 계열의 몇 가지 색으로 축소하고 형태도 훨씬 단순화된 나무가 우거진 언덕 위의 농가는 입체주의의 묘사에 적합한 것이었다. 브라크는 세부를 생략하고 오직 농가의 기하학적 동체만을 각진 모서리와 입방체로 이뤄진 화면의 구성요소로 삼았다. 보셀은 1908년 11월 14일자 신문 『질 블라스』에 실은 브라크 전시회에 관한 평문에서 ‘입방체’란 단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그때부터 피카소와 브라크의 후기 회화는 새롭게 창조된 양식인 입체주의로 분류되었다.

입체주의 출현에 가장 중요하고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아프리카 조형물과 세잔의 후기 작품이다. 피카소는 마티스의 집에서 그가 소장한 세잔의 <일광욕하는 사람들>을 처음 보았다. 세잔은 공간의 환영을 생략했으며, 공간의 깊이를 강조하지 않은 채 풍경을 평편한 면들의 배열로 묘사했다. 브라크는 세잔의 후기 작품에서 나타난 평편한 회화 공간과 분석적 각도의 치밀한 평면 구성에서 주로 영향을 받았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1906~07)과 브라크의 <큰 누드>(1907~08)에서 입체주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때부터 대략 1912년 가을까지 분석적 입체주의, 그 이후를 종합적 입체주의라고 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1912년경 소재를 화면에 풀로 붙이는 파피에 콜레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그들 회화의 기본이 되는 현실주의를 강조함과 동시에 기법에서 유래한 환영의 요소나 감각적 매력을 극단적으로 배제하려는 것이 주된 동기가 되었다. 피카소는 훗날 여섯 번째 연인으로 40살 어린 프랑수아 질로에게 자신이 파피에 콜레를 사용한 목적은 서로 다른 질감이 자연의 실재와 경쟁하는 회화에서의 실재가 되도록, 하나의 구성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화가 질로는 피카소의 두 아이를 낳은 여인으로 그와 이혼 후 백신vaccine의 선구자인 미국인과 결혼했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피카소 개인의 획기적인 성과일 뿐만 아니라 근대 회화사상 가장 중요한 이정표이자 입체주의의 탄생을 예고한 작품이다. 피카소가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열여섯 권의 스케치북과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수많은 습작을 남긴 데서 그가 얼마나 공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에 대해 20세기 후반 25년 동안에 책 한 권 분량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심지어 이 작품만을 위해 두 권의 도록을 발간한 전시회도 있었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에서의 힘찬 표현이 즉흥적으로 그린 느낌을 주지만, 무수히 많은 습작과 스케치를 통해 얻은 결과물이다. 왼편의 세 인물은 한 해 전에 그린 누드와 명백히 유사성을 보이며 이베리아 조형물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중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는 오른편의 두 인물은 프랑스령 콩고의 아프리카 가면과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거친 얼굴에서 대담한 빗금 처리로 인한 부조의 효과가 나타나며 야만적인 격렬한 호소력이 느껴진다.

이것과 세잔의 <일광욕하는 사람들>(1899)을 비교하면 놀라운 점이 발견되는데, <일광욕하는 사람들>에서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텐트 같은 천이 여기서 휘장의 배경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일광욕하는 사람들>에서 두 명의 포즈는 이 작품에서 왼편으로부터 두 번째 서 있는 인물과 오른편 하단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인물을 닮았다. 얕은 공간 구성과 함께 인물들이 배경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세잔의 방법을 차용한 것이다. 이는 피카소가 세잔의 위대함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임을 말해준다. 현재 파리의 피카소미술관에 있는 에드몽 포티에가 1906년에 찍은 서아프리카의 말린케 여인의 사진과 피카소가 1906~07년 겨울에 그린 <여인의 옆모습>을 비교하면, 사진-우편엽서가 회화의 직접적인 모델이었음이 명확해진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대한 평가가 늦어진 데는 다음 상황들도 한몫을 했다. 우선 이 작품은 약 30년 동안 일반에게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 1924년 두세가 피카소에게서 헐값에 구입하기 전까지 이 작품이 피카소의 작업실 밖으로 나간 것은 1차 세계대전 동안 고작 두 번이었다. 시인이자 입체주의의 옹호자인 앙드레 살몽이 1916년 7월에 두 주 동안 살롱 당탱에서 열린 거의 사적인 수준의 전시회에서 선보였고, 1918년 1-2월 화상 폴 기욤이 기획하고 아폴리네르가 카탈로그 서문을 쓴 마티스와 피카소 2인전에서 공개되었으며, 초현실주의의 기관지 『초현실주의 혁명』의 1925년판에 실린 뒤 1937년까지 주요 대중 전시회에도 등장하지 않다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 이 작품을 뉴욕의 모마가 사들였다. 두세가 죽자 미망인이 1937년 가을에 한 화상에게 이 작품을 팔았고, 2년 후 그 화상이 모마에 팔았다.

<마 졸리>(1911~12)
피카소는 더 이상 올리비에를 사랑하지 않고 그가 에바라고 부른 마르셀 윙베르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에바에 대한 은밀한 사랑을 표현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마 졸리Ma Jolie와 졸리 에바Jolie Eva는 그가 즐겨 부른 에바의 애칭으로 그림에 애칭을 적어 넣었다. 작품의 제목은 <치터 혹은 키타를 든 여인>이지만 <마 졸리>로 더욱 알려진 이 작품에 적어 넣은 졸리는 ‘예쁜’, 혹은 ‘사랑스런’이란 뜻이며, 당시 유행하던 작곡가 해리 프라그손의 「마지막 노래」에서 차용한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노래」의 내용은 자신의 연인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 까닭에 새로 찾아온 로맨스의 기쁨에서 좌절로 옮겨가는 슬픈 이야기였으므로 피카소가 당시 자신의 감정에 일치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마MA를 졸리JOLIE보다 한 단계 높게 배열했는데, 음악에서 한 음을 다른 음으로 바꾸는 것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조르주 브라크(1882~1963)는 1906년 10월에 세잔의 회화 10점을 보았고, 세잔이 종종 가서 그림을 그렸던 프랑스 남부 레스타크로 가서 이듬해 봄까지 지내면서 작업했다. 그는 1907년 살롱 도톤에서 열린 세잔의 회고전에서 큰 충격을 받고 분석적 입체주의를 예고하는 좀 더 논리적인 기하학적 분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브라크는 초기에 동료 미술 학생이던 마리 로랑생과 긴밀한 우정을 맺었는데, 그녀는 아폴리네르의 연인이 되었다. 폴란드와 이탈리아 계통의 혼합 가계에서 태어난 아폴리네르는 1911년 루브르에 소장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 리자>가 도난당했을 때 체포 구금되기도 했다. 브라크를 처음 피카소의 작업실로 데려간 사람은 아폴리네르였다. 1907년 11월 말이거나 12월 초 브라크가 아폴리네르를 따라 피카소의 작업실로 갔을 때 피카소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막 완성한 뒤 <세 여인>을 그리고 있었다. 브라크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압도되었으며 처음으로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부터 브라크의 회화에서 피카소의 최근 회화에 대한 심원한 이해와 지식이 생겼으며, 그의 회화에 나타나는 새로운 주제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

브라크는 몇 점의 여성 누드를 그리면서 1908년에 붉은색 바탕에 한 명의 여성 누드를 그린 <큰 누드>를 그렸는데,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버금가는 브라크의 대형화 중 하나였다. 그는 피카소가 제시한 방향을 좇아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를 가지고 습작을 거듭한 결과 대작을 그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프리카의 영향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큰 누드>는 피카소의 회화와는 다르며 오직 세잔에 바탕을 두고 있다. 브라크는 세잔의 회화를 잘 이해했으며, 대상에서 기하학적 형태를 찾으려고 했다. <큰 누드>에서 관람자는 근육이 비례에 맞지 않는 일그러진 여성의 몸을 대하게 되며 각각에 대한 극한의 상호관계가 허구적으로 묘사되었음을 본다. 근육조직과 몸체가 엉덩이와 장딴지에서 보듯 몇몇 명료한 선들로 강조되었다. 모나고 단단하게 늘어진 천 배경에 그려진 누드가 약간 어색해 보인다. 배경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는 여인 그리고 붉은색에서 황토색과 노란색으로 파도치는 천 가장자리 색 모두 <일광욕하는 사람들>과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연상시킨다. 피카소의 초기 입체주의 회화에 필적할 만하게 브라크도 명암을 구성하고 만드는 데 색을 보조물로 사용했다.

브라크가 형태를 해체한 것은 피카소보다 더 극적이었는데, 정물이 인물에 비해 생명력이 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인물화보다 정물화를 선호했다. 그의 정물화에서 빛은 분산되고, 부서진 작은 면들은 빛이 분산되는 방향에 따라 끝을 향해 화면을 가로질러 울려 퍼졌다. 그에게 정물화는 회화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사물에 더욱 다가가는 수단이었다. 그는 회화에 추상적 구조를 부여한 뒤 사물의 형태들을 구조에 적절하게 만들었다. 형태들은 색면으로 이루어지고, 색면들은 서로 섞이기도 겹치기도 한다.

브라크는 <바이올린과 팔레트>(1909)를 그리면서 상단 벽에 박혀 있는 착각을 일으키는 못을 그려 넣었다. 그래서 팔레트가 수평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못에 걸린 것으로 보인다. 그 아래에는 이러한 질량과 중력의 법칙에 대한 암시와는 대조적으로 악보는 왼편의 인접 공간으로 빠져들 듯 향한다. 그는 점점 추상화되어가는 것을 우려해 못 외에도 17세기 네덜란드 대가들과 18세기 프랑스 대가들이 장난스럽게 사용한 눈속임을 일으키는 모조문자, 나뭇결벽지 등 새로운 보충 요소들의 장치를 통해 사물을 지칭하는 다른 종류의 지시물을 그림에 끼워 착각의 의미를 강화시켰다. 브라크의 못은 입체주의의 새로운 공간적 착각현상에 혼란을 야기했다. 그는 눈속임 회화를 통해 착각의 의미를 더욱 심화시켜 그것이 보이는 것이 아닌 상상되어지는 것임을 말하려고 했다.

갤러리 입체주의자들이란 말은 ‘진정한 입체주의자들’에 대한 대안으로 사용된 용어이다. 피카소와 브라크를 추종한 갤러리 입체주의자들의 회화가 1910년에 전시회를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입체주의 추종자들은 1911년의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입체주의로 작업하는 예술가들 그룹’이란 명칭으로 일반인에게 명성을 얻었는데, 그들 중에 로베르 들로네, 페르낭 레제, 알베르 글레즈, 장 메챙제 등이 포함되었다. 들로네의 에펠탑 그림은 높이가 1, 2m였고, 레제의 <숲속의 누드>도 마찬가지로 장대했다. 평론가는 들로네의 에펠탑 회화를 새로운 이탈리아 사조인 미래주의와 연결시켰다. 들로네가 에펠탑을 주제로 선택하기 바로 직전인 1910년 4월에 다섯 명의 예술가들이 밀라노와 파리에서 「미래주의 회화의 기술적 선언문」을 선포했다. 들로네의 에펠탑 연작은 입체주의자들이 중시한 이동하는 시점과 역동적 흔들림이라는 측면에서 미래주의자들이 표현한 이상에 매우 근접했다.

페르낭 레제가 주목받은 작품은 <숲속의 누드>(1909~10)였다. 이것은 일견에 제목을 잘못붙인 것으로 보이는데, 한가하고 목가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레제는 “나는 1910년에 완성한 <숲속의 누드>의 조형성과 2년 동안 씨름했다. 나는 부피를 극단적으로 나타내기를 바랐다”고 했다. 이 작품은 그가 세잔의 영향을 받아 회화의 구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정을 기울인 세잔의 회화적 공간에 대한 그의 촉각적 연구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 후에도 원통형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형태 사이의 대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정적이며 장대한 양식을 계속 유지했다. 그는 명확히 묘사된 일상 사물 속의 시적 가치와 근대 기계류와 기계에 의해 대량생산된 물건들이 지닌 고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프롤레타리아적인 주제를 선호하여 이를 기계문명과 관련된 주제를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명확하고 정밀하게 묘사했다.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한 후앙 그리스
입체주의가 처음부터 세계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말한 후앙 그리스(1887~1927)가 파리로 온 것은 1906년이었고, 싸구려 가옥 바토 라부아(‘세탁선’이란 뜻)에 있는 피카소의 집이 있는 건물에 살면서 시인들 아폴리네르,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 등을 만났다. 그는 파피에 콜레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으며, 갤러리 입체주의를 철저히 이해했다. 그는 몇 년 동안 종합적 입체주의를 나름대로 소화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나갔으며, 이는 동일한 양식으로 제작된 브라크와 피카소의 작품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스는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입체 형태를 기하학적 면으로 분해하는 것으로부터 구성하는 것으로 관심을 돌려 단편적인 추상 형태를 회화의 구조 속으로 합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얕은 회화 공간은 유지하면서 더 이상 중간색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면의 차이를 이용해 형태를 규정하고 양감을 나타내기 위해 단색조의 명암을 사용했다. 때때로 회화의 평면은 배경의 효과를 내고 묘사된 대상은 평면 앞의 실제 공간에 있는 관람자를 향해 나오도록 표현되었다. 더욱 밝아진 색, 강렬한 색들의 대비가 시도되었으나 감각적이고 표현력이 강렬한 색의 사용은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리스는 <기타>에서 기타의 줄들이 관람자로 하여금 거듭 회화의 주제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게 만들었다. 억제된 색의 가늘고 긴 모양, 삼각형, 사각형은 기타를 파편화하고 변화시켜 마침내 울림통의 윤곽선이 배경의 대비로 나타나게 해주었다. 화면 하단 오른편에 있는 색면과 왼편 상단에 부착한 19세기 금속판화의 부분만이 그림 제목에 어울리지 않아 혼란을 준다. 화면 상단 왼편에 액자가 걸려 있고 액자의 양편이 구조적으로 재구성된 가운데 아이를 양어깨에 올린 어머니가 시골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분석에서 회화적 구성으로의 전환에 관해 1921년 『에스프리 누보』 제5호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보편의 차원에서 특수의 차원으로 작업해간다. 즉 구체적 현실에 이르기 위해서 추상의 차원에서 출발한다.  ... 세잔은 병을 원통으로 만들었지만, 나는 원통에서 출발하여 특별한 유형의 개체를 만든다. 원통으로부터 병, 특정한 병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른바 연역적이라고 지칭되는 이런 방법은 그리스의 많은 작품에서 감지된다.

비천한 폴란드계 러시아 가문 출신의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는 불굴의 노력과 타고난 지력으로 광범위한 지식을 습득했다. 그러나 거의 설교조로 되어 있는 그의 많은 글의 혼동된 사상과 언어는 체계적이지 못했던 교육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는 국제적 교육을 받은 칸딘스키와 비교되는데 생전에 두 사람은 아무런 접촉을 하지 않았으나, 사상이 많이 공통되며 모두 근본적으로 상징주의와 관련이 있다.

말레비치의 독창적인 회화는 1908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가 좋아했던 회화는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었다. 복제된 그 그림을 벽에 붙여놓고 늘 바라보았다. 그는 1912년부터 형태를 해체하는 입체주의의 양식과 미래주의 회화의 역동성을 결합하는 작업을 하면서 단순히 운동과 과정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형적인 형태들을 자유분방하게 연결했다. 1913년에 전시회를 통해 이러한 회화를 소개하면서 ‘입체-미래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가 농부들을 주제로 그린 많은 작품들에서 인물은 레제를 연상시키는 원통 같은 형태로 형식화되어 나타났으며, 형태와 배경은 깊이감이 거의 없이 대조를 이루는 평면적 색면들로 체계적으로 분할되어 표현되었다. 이런 경향을 추구하면서 회화에서 주제의 중요성은 감소된 반면 평면과 양감의 구성은 더 중요해지는 동시에 체계적으로 되었으며, 어느 정도 미래주의의 요소를 지닌 독자적인 분석적 입체주의에 도달했다.

말레비치와 레제가 회화 요소들을 분석적 입방체들로 나타내는 구성방식을 공유했더라도 말레비치에게 있어 매우 중요했던 색의 관점에서 보면 둘 사이에 별로 관련이 없다. 레제의 색은 입체주의의 단색조를 따랐고, 그 후 기계 같은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흰색으로 강조하면서 원색과 밝은 초록색을 사용했다. 가볍고 성긴 붓 작업과 전형적인 프랑스의 우아함을 갖춘 레제의 색 사용 방식은 1909~14년에 사용된 말레비치의 색 사용과 다르다. 말레비치의 회화에는 우아함이 없으며, 그의 충만하고 강도 높은 색은 화면을 통틀어 밀도 있고 규칙적인 리듬으로 채색되었다. 말레비치는 1913년 말경부터 입체-미래주의를 버리고 피카소와 브라크의 종합적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작은 부분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곧 절대주의 체계로 비구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절대주의 회화를 선보인 것은 1915년 1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전시회 ‘0-10: 최후의 미래주의 회화’에서였다.

입체주의와 미래주의를 결합해낸 최초의 작품이 <나무를 베는 사람>(1912)으로 페트로그라드에서 1912~13년에 열린 청년동맹의 전시회에서 처음 선보였다. 이 작품에서 인물이 강하게 명시되는 일련의 원통 같은 형태들로 이뤄진 배경에 통합되었다. 이렇게 융합된 전체론적 구성에서 삼차원적 깊이 대신 단단한 형태를 암시하는 색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인물은 전체적 리듬에 종속되고 도끼를 잡고 있는 팔은 부자연스러운 부동성에 갇혀 있다. 이와 유사하게 피스톤처럼 생긴 많은 통나무의 움직임도 일련의 대립 속에 머물러있다. <나무를 베는 사람>과 같은 단순화한 인물로부터 <칼 가는 사람>(1912~13)과 같은 기계적인 인물이 점차적으로 발전되었으며, 기계적인 리듬에 종속된 자연에 대한 시각에서 더 나아가 <물동이를 든 여인: 동력적 배열>(1912~13)에서는 역동적인 기계의 힘에 의해 창조된 세계가 표현되었다.

동시대비를 창안한 로베르 들로네(1885~1941)는 쇠라의 순색과 보색을 배합하거나 병치하는 분할주의를 채택하는 대신 대비되는 인접한 색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며, 특히 색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과 운동의 상호연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906년에 신인상주의와 프랑스의 화학자 미셀 외젠 슈브뢸의 『색의 동시대비 법칙』(1839)에 관심이 많았다. 슈브뢸에게 있어 동시대비는 인접한 두 가지 색이 대비를 이루면서 각각의 특성을 상호 고취시키는 시각적 효과를 설명한 것으로 순전히 과학적인 성격의 용어였던 반면 들로네는 동시대비를 부정확하고 다소 모호하게 사용하면서 색이 추상화 안에서 회화적 형태는 물론 운동의 환영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며,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동시대비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다.

들로네는 1910년부터 에펠탑을 그리기 시작했다. 구스타브 에펠이 1889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약 300m 높이로 건설한 에펠탑은 1910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프로이트가 말한 남근숭배와 함께 근대 세계의 빼어난 공학을 보여주었다. 들로네는 뒤틀리고 각이 진 형태로 휘어진 채 다채로운 색상으로 구성된 회화를 통해 에펠탑의 존재물에 대한 파편화된 지각작용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때 이탈리아의 미래주의자들의 첫 전시회가 파리에서 있었고, 그들의 영향은 즉각적이고 선풍적이었다. 들로네는 미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운동의 재현 문제를 위해 철 구조물의 탑을 선택했다. 그가 제작한 에펠탑 회화는 서른 점이 넘으며, 여기에는 유화와 종이에 작업한 것도 포함된다. 그는 같은 주제를 1920년부터 1930년까지 다시 작업하기도 했다. <커튼 뒤의 타워>(1910)에서 파리의 지붕과 탑이 모두 창문을 통해 바라본 에펠탑을 입체주의 방법으로 묘사한 것이다. 커튼은 양옆으로 쳐진 채 화면의 절반을 차지한다. 원근법으로 일그러진 에펠탑의 배경은 구름으로 구성되었다. 구름은 위로 상승하는 비누거품을 닮았고, 탑 위로 치솟는 뾰족한 부분과는 눈에 띄게 명확히 형식적 대조를 이룬다. 시각적 경험을 재현하기 위해 그는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본 광경들을 한 화면에 취합했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모티프는 서로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 장면들을 한데 뭉뚱그리는 방법을 통해 규격화된 면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에펠탑을 낮은 시점, 높은 시점, 보통 시점 등으로 바꿔 보여주는 여러 시점들을 수직으로 이어붙이는 방법으로 탑의 철골구조가 구성되었다. 에펠탑 경관은 창문이 회화가 되고 회화가 창문이 되는 창문 틀 속에 묘사되었으며, 이는 후기 작품에서 그를 사로잡은 광범위한 시리즈의 서곡이 되었다.

색에 대한 관심이 커진 후 들로네는 색을 형태에 대한 문제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에게 중요해진 것은 기하학적 추상화가 아니라 그 자신 세계의 우주적 리듬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색채대비의 생생한 유희였다. 모티프가 될 색채론의 미적 응용에 대한 연구에 전념한 그는 1912~13년에 <창문> 연작을 선보였는데, 이는 <동시대조: 태양과 달>(1913)에서 시작한 색의 동시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키면서도 구체적인 시각 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추상이었다. <창문> 연작에 자연을 상기시키는 암시들이 있더라도 과거 입체주의 회화와 같은 분석적이거나 묘사적인 회화가 아니다. 들로네의 회화는 색이 단순히 드로잉을 보조하는 장식적인 종속물이 아니라 형태를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는 점을 보여주었으며, 1900년경부터 유럽 회화에 널리 퍼져있던 이런 경향이 들로네의 회화에서 절정에 달했다. 들로네의 회화는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고 명명한 ‘색채 입체주의’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오르피즘Orphism(혹은 동시주의)은 아폴리네르가 1912년 ‘섹시옹 도르 Section d'Or’ 전시회와 1913년 베를린의 슈투름 갤러리에서 전시된 들로네의 회화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명칭이다. 섹시옹 도르는 프랑스어로 ‘황금 분할’을 의미한다. 황금 분할이란 수학에서 직선을 둘로 나눌 때 짧은 쪽과 긴 쪽의 관계가 긴 쪽과 전체 관계와 비례하도록 나누는 것을 말한다. 이 원리는 고대 이후 조화로운 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해 미술과 건축에 적용되어왔다. 아폴리네르는 오르피즘을 비재현적 색채 추상으로 이해하며 저서 『입체주의 화가들』(1913)에서 이를 가시적인 영역으로부터 빌려온 요소가 아닌 전적으로 화가 자신이 창조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구조를 그리는 회화로 설명했다. 그는 오르피즘을 입체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운동으로 간주하고 들로네 외에 들로네의 아내이자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화가 소니아 들로네-테르크, 프란시스 피카비아, 마르셀 뒤샹, 레제, 1896년에 파리에 정착한 구체코슬로바키아 화가 프란티셰크 쿠프카 등을 여기에 포함시켰다. 그렇지만 들로네는 후기의 저서 『입체주의에서 추상 미술까지』(1957)에서 오르피즘이란 용어를 비재현적 색채 추상의 추구를 목표로 삼은 쿠프카의 회화와 유사한 작업, 미국의 화가 스탠턴 맥도널드 라이트와 모건 러셀의 회화 등에 한정하여 사용하면서 오르피즘의 기원을 입체주의보다는 오히려 인상주의와 조르주 쇠라의 신인상주의로 파악했다.

독특한 회화를 창조한 마르셀 뒤샹(1887~1968)은 훗날 “입체주의 이론은 지성적인 점에서 나를 매료시켰다. ... 나는 입체주의 이론을 단지 설명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독특한 회화를 찾거나 창조하려고 했다”고 술회했다. 그의 초기 입체주의 회화는 피카소와 브라크에 것들에 비해 과격하지 않았고, 기교면에서 두 사람의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그가 입체주의에 대해 구체적인 이해가 생긴 것은 레제, 들로네, 글레즈, 메챙제 등을 형들 자크와 레이몽과 함께 퓌토에 있는 자크의 집에서 자주 만나기 시작한 1911년 가을이었다. 뒤샹은 입체주의가 개념미술이란 사실을 발견했으며, 피카소가 말한 대로 사물은 “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물이 있음을 아는 것”이란 점을 깨달았다. 그는 20세기에 들어와 미술이 지성적으로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룹의 예술가들이 만나면 미학적 주제를 두고 열띤 토론을 거듭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사차원이란 말이 20세기의 첫 10년 동안에 자주 사용되었으며,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작가들이 이 말을 즐겨 사용했다. 우주에는 시공space-time의 한계를 넘는 사차원의 세계가 반드시 있다고 지성인들이 믿었고, 신문, 잡지, 소설, 만화 등에서 사차원이란 말이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뒤샹은 『라 나투르』지를 통해 프랑스의 생리학자 에티엔 쥘 마레가 1882년에 카메라 셔터를 발명한 뒤 움직이는 물체를 찍은 사진을 보고 운동의 효과를 알았다. 미국인 에드위드 마이브리지도 배터리를 카메라에 연결시켜 인체의 운동을 정지한 장면으로 찍어 『운동하는 사람의 모습』이란 제목으로 1885년에 출간했는데, 책에는 누드 여인이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이 24점의 이미지들로 나열되어 있었다. 뒤샹이 이 책을 보았을 성 싶은데, 그는 마이브리지의 책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뒤샹은 1912년 2월 베르넹 죈 갤러리에서 열린 미래주의자들의 전시회에 갔지만, 그때는 이미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1911)를 완성하고 있었다. 뒤샹은 “미래주의자들은 시골보다는 도시의 인상적 요소들을 그리는 도시의 인상주의자들”이었다면서 그와 같은 것은 낡은 망막적 미술retinal art에 빠지게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망막적’이란 정신의 ‘지적 능력’을 연루시키지 않은 미술에 부여한 뒤샹의 용어이다. 그는 망막적 미술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나의 목적은 정지한 운동을 재현하는 것으로 정지한 구성으로 다양한 운동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영화에서의 효과를 회화로 나타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 나는 사람의 운동을 뼈다귀의 모습이 아닌 선으로 제한하려고 했다. 제한하고, 제한하며, 또 제한하는 것이 나의 의도였으며, 동시에 나의 목적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었다. 이 그림을 그리고 난 후 나는 예술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점, 선, 혹은 매우 전통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어떤 것들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뒤샹은 재담가였다. 그에게는 지성적인 익살이 있었고, 삽화를 그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해학적 요소를 회화에 보탤 줄 알았다.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에서는 이런 요소가 내재해있다. 그는 훗날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에서 이미 유머를 회화에 삽입하려는 나의 의도가 드러났다. 아폴리네르가 그것을 ‘기차에 있는 우울함’이라고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이가 슬픈 이유는 기차가 뒤를 따라오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곧이어 판지에 유채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1>(1911)를 그렸는데, 마찬가지로 유머가 삽입된 회화였다. 과거 화가들은 누드를 그릴 때 모델에게 선정적 동작을 취하도록 요구했지만, 누드를 운동의 모습으로 묘사한 적은 없었다. 누드가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은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지 순수 미술에서는 가당치 않은 발상이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해 “그것은 (습작 드로잉을 말한) 그저 모호하게 연필로 계단을 오르는 누드를 그린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다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리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뮤지컬 코미디를 보면 많은 계단이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뒤샹이 1911년 12월에 처음 그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1>에 보이는 계단은 어린 시절을 보낸 블랭빌의 집 계단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가 이듬해 1월에 그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는 먼저 것에 비해 사람과 계단이 더욱 생략되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는 아모리쇼로 불린 국제 모던아트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었다. 미국인은 입체주의에 관해 거의 알지 못했으며 아모리쇼는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연일 사람들이 이 작품 앞에 운집할 정도로 뒤샹의 작품은 미국인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작품을 보고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나바조Navajo 담요 같다고 말했다. 언론은 이 작품을 익살스럽게 표현했는데, 『이브닝 선』지에서는 “출퇴근 시간에 전철역의 계단을 내려가는 교양 없는 사람들”이라고 적었다. 이 작품은 입체주의만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이 아니라 모던아트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처럼 평론가들에게 비쳐졌다.

파괴 후의 건설 분석에서 종합으로Analysis to Synthesis
1912년경 이후 입체주의자들의 기법이 상당히 달라졌는데, 회화가 다시금 좀 더 가독성을 지니게 되었다. 1912년경부터 1914년까지의 소위 말하는 종합적 입체주의 국면에서 브라크, 피카소, 후앙 그리스, 레제 등과 같은 화가들을 예로 들면 추상적 회화 요소들로 새로운 모티프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파피에 콜레가 기성품으로 이어지는 모든 콜라주 기교들의 기초로 등장했다. 브라크의 <과일접시와 유리잔>을 통해 최초로 파피에 콜레가 선보였다. 이 작품은 브라크가 프랑스 남부 아비뇽 근처 론 강 하구에 위치한 소르그에서 1912년 9월 초 여름을 보낼 때 제작되었다. 그는 아비뇽의 거리를 산책하다가 벽지 상점 윈도우에 진열된 참나무 패턴을 모방한 두루마리 종이를 우연히 발견했다고 훗날 말했다. 상점에 진열된 재료를 보고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작품에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겼다고 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우연히 찾아낸 복제물의 직접적 사용으로 회화적 솜씨를 대신하려는 것이었다.

종합적 입체주의는 회화가 자연이 아닌 인공물에서 유래한 요소들의 조합으로 창조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피카소는 최초의 진정한 콜라주로 간주되는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1912)에서 전통 틀을 환기시키는 굵은 끈으로 두른 캔버스 화면의 삼분의 일에 인쇄된 유포를 사용했다. 왼편에 ‘JOU’란 글자는 신문 ‘주르날JOURNAL’의 일부분으로 보인다. 화면의 상당 부분은 그린 것이 아니라 풀로 붙인 것이다. 하단 절반을 채우는 것은 등나무 의자 한 조각을 인쇄한 유포이다. 가짜등나무가 순수 사실주의 기능을 하는 모순을 나타낸다. 파피에 콜레가 새로운 회화의 세계를 연 것이다.

회화에서 그린다는 말은 더 이상 정확한 용어가 아닌데,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의 상당 부분이 그려진 것이 아니라 풀로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입체주의는 무엇이 재현되는가 하는 문제와 무엇이 제시되는가 하는 문제, 즉 회화가 보여주는 허구적 실재와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실질적 실재를 함께 해결하려는 회화에서의 위기가 절정에 다다른 양식이다.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은 환영과 실재 모두를 보여준다. 캔버스를 두른 굵은 끈과 유포는 실재이다. 여기에 주목해야 할 것은 ‘JOU’란 글자로 글자는 물리적 실재는 아니지만, 실재 신문과 명백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점이다. 입체주의 회화가 제시한 세 가지 점은 미술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 첫째, 콜라주의 도입이 레디메이드의 사용을 예시한 점이고, 둘째, 재현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에 대한 탐구를 요구한 점이며, 셋째, 예술과 일상을 융합시킨 점이다.

입체주의 조형물
피카소는 1906년부터 목재를 거칠게 깎아 만든, 형태가 매우 단순한 인물상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목재 인물상들을 보면 그가 아프리카의 가면과 인물상에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작업실을 아프리카 부족미술품들로 장식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가 분석적 입체주의 조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909년으로 <여인의 머리(페르낭드)>였고, 동거녀 페르낭드 올리비에의 머리를 많은 칼집을 새겨 넣어 이국적인 느낌이 나도록 제작하는 데 10개월이 소요되었다. 코, 입, 볼, 이마 두 눈이 마주 배치된 가운데 생성되는 얼굴의 부분들은 빛과 그늘의 지대들로 나타나며, 이러한 부분들이 상호 충돌하는 면들의 구성으로 변전된다. 가장 중요한 눈, 코, 입술은 자연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플라스터로 제작한 이것을 청동으로 주조한 것은 1931년이었다. 피카소는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15점 이상을 그렸고, 조형물은 드로잉과 회화를 생산한 뒤에 제작되었다. 이제는 현존하지 않는 찰흙 모델을 먼저 만들고 두 개를 플라스터로 떴다. 그가 <페르낭드의 초상>(1909)과 드로잉들에서 이미 강렬하게 기하학적으로 구성한 페르낭드의 머리 자체는 그런 구성들을 통해 공간으로 열려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회화에서 실험한 형식적인 문제들을 삼차원으로 변형시킬 수 있었다.

피카소는 1912년 10월에 그의 첫 열린 형태의 구성물 <기타>를 제작하면서 판지, 끈, 철사로 모델을 만들었다. 빈 공간과 표면을 병치시킨 이 조형물은 종합적 입체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이었다. 종합적 입체주의가 고안한 주요 형식은 콜라주였다. 이 조형물에서 피카소는 빈 공간을 기호로 변형시켜 기타의 외피를 대신하고, 돌출한 원통을 기호로 변형시켜 기타의 향공響孔을 대신했다. 말하자면 공간이란 비실체를 조형물의 재료로 변형시킨 것이다.

앙리 로랑스와 자크 립시츠, 레이몽 뒤샹 비용 등이 공간 및 조형의 문제를 탐구한 유사한 양식의 조형물을 제작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태어난 로랑스는 어릴 때부터 조형물 제작을 배웠고, 1902년 초에 몽마르트르로 이주해 파리 남서쪽에 있는 자유분방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벌집’이란 뜻의 라뤼슈La Ruche에서 몇 달 동안 머무르면서 레제, 아르키펭코 등의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1911년 말 브라크와 가까워지면서 입체주의를 경험하고 1912~13년 브라크의 작업실에서 본 파피에 콜레와 구성물에 대해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회화 양식과 조형물 양식의 상호관계를 의식적으로 구체화한 로랑스의 <여인의 머리>(1915)는 피카소의 동일한 제목의 작품과 비교되는데, 피카소의 작품은 구성적이지만 로랑스는 추상화했다. 로랑스의 작품도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피카소의 구성작품과 같이 여러 차원이 중첩되어 공간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가 1915~18년에 제작한 일련의 작품들은 가장 순수한 입체주의 정물 주제인 유리잔과 병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의 구성에서 채색한 면은, 빛이 표면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고 작품 전체에 고유한 빛을 부여하는 기능을 갖는다. 결핵으로 1909년에 한쪽 다리를 절단한 로랑스는 1919년부터 입체주의 주제와 형상화 방식을 차용한 완전 입체의 작품을 제작했다. 이는 다른 시점들에서 본 작품의 개개 요소들을 조합해 빛과 그늘이 번갈아 분포되어 리듬감을 형성하도록 처리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데르 아르키펭코는 1912년 말에 물체와 공간의 관계를 뒤집는 실험적 특징을 지닌 몇 점의 혼합매체 구성물을 제작했다. 서커스의 던지기 곡예사를 표현한 <메드라노 I(궤변가)>은 현존하지 않고 사진으로만 전하는데, 나무, 유리, 판금, 철사에 색을 입혀 회전하는 형태와 운동을 연상하게 하는 곡예사를 만든 것이다. 1912년경 피카소와 브라크는 종이조형물과 혼합매체 구성물을 제작했고, 아르키펭코가 사용한 재료들은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에 관한 이해를 반영했다.

아르키펭코는 1914년경부터 스스로 ‘조각-회화’라 명명한 다색부조에 관심을 기울였다. 다양한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이전 조형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투명성이나 반사와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입체주의 조형물 작업과 함께 조형물이 에워싼 공간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문제를 탐구한 선구자에 속하며 이런 실험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는 구상적 주제를 종합적 입체주의 방법으로 제작하면서 다소 양식화된 아라베스크풍의 인물상들을 통해 이런 실험을 했는데, <머리를 빗는 여인>이 그 예이다. 그의 채색조형물이 보여주는 빼어난 장식성은 입체주의 형식에 대한 진지한 관심으로 직결되며, 특히 후에 나온 완전 입체 형태의 인물상, 목재와 금속조각, 철사와 유리 등을 이용한 거친 아상블라주에서 이런 점이 발견된다. 이런 작업과 병행해 그는 기하학적 형태를 이용한 추상 작업도 계속했다.

<앉아 있는 여인>(1920)에서 보듯 아르키펭코는 좀 더 직선적인 인물상에서는 구멍을 내고 공간을 포함시킴으로써 내부 공간에 실재성을 부여했다. 이는 립시츠의 실험 작품과 같은 노선을 취한 것으로 20세기 조형물 역사에 매우 중요한 결과를 초래한 선구적인 통찰력으로 미국에서는 나움 가보, 영국에서는 헨리 무어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아르키펭코는 형태의 범위를 외부로 명시하면서 이에 상응하는 부피를 암시하기 위해 오목한 형태를 사용하고 볼록한 면과 오목한 면 및 그 두 외곽선을 대비시키는 선구적인 실험도 했다.

입체주의 조형물의 전형을 창조한 레이몽 뒤샹 비용은 의학을 공부하고 나서 1898년부터 조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10년경부터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고 1914년까지 소수 입체주의 조각가 중 탁월한 인물로 꼽혔다. 양식의 급격한 변화는 세 개의 두상 조형물을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입체주의에 몰두한 동안 조형물의 영역과 모델링의 영역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고 초기 작업에서 추구하던 모델링의 정교성을 배제했다. 1914년에 파리 근교의 병원 노무원으로 징집되었으므로 계속해서 조형물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가 처음에 계획했던 탈 수 있는 말보다 작지만 큰 변형판의 말 조형물은 그가 타계한 지 오랜 후 그의 동생 마르셀 뒤샹의 감독 하에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뒤샹 비용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입체주의 조형물의 전형이며 모범으로 간주되는 작품은 <커다란 말>(1914)이다. 기계적ㆍ유기적 형태들의 놀라운 혼합물인 이 작품에서 자연주의적 재현은 찾아볼 수 없고 여러 덩어리와 평면들이 균형을 유지하면서 빈틈없이 결합되어 도약하는 말의 리듬과 긴장을 추상적 도표처럼 표현하고 있다. 이는 상호 연결된 형태가 재현하는 바에 의존하지 않고 형태 자체에 내재된 에너지를 억제하고 제어함으로써 탄생한 걸작이며, 미래주의의 힘 있는 선들의 역동적 뒤틀림 안에서 통합되었다. <커다란 말>은 정적인 형태들을 통해 근육의 운동으로 생겨난 긴장된 에너지를 성공적으로 표현했고, 이는 분명 미래주의자들이 표현하려고 한 운동의 역동성을 부분적으로나마 이룩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많은 인명의 손실을 가져다주었는데, 뒤샹 비용은 발진티푸스에 걸려 신장질환으로 1918년에 마흔두 해의 생애를 마감했다. 아폴리네르는 부상을 당하고 쇠약해지면서 같은 해에 독감으로 죽었다. 프란츠 마르크, 움베르토 보초니 등이 죽었고, 들로네와 가까웠던 시인 블레즈 상드라르는 한쪽 팔을 잃었다. 브라크는 1915년에 심한 머리 부상을 당했다.

독특한 방식으로 입체주의 조형물을 제작한 자크 립시츠는 입체주의 작업을 시작할 때인 1914년 봄에 피카소를 만났다. 그의 작품은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진 듯 보이나 <기타를 든 남자>(1915)에서 보듯이 개방된 형태의 효과적 사용, 날카로운 선으로 구성된 면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면의 역동적인 대비를 보여준다. 그는 순전히 형식적인 이유로 구멍을 뚫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조형물 내부에 공간감을 형성하는 이런 기법은 1930년대에 헨리 무어와 바버라 헵워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이탈리아의 문학개혁운동으로 시작된 미래주의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는 첫 「미래주의 창립 선언문」을 1909년 2월 20일 파리의 일간지 『르 피가로』지에 기고했으며 이탈리아에 급속도로 퍼졌다. 미래주의의 공식적인 출범을 알린 이 사건은 미래주의의 특성을 복합적으로 암시하는 것이었다. 격렬한 무정부주의적 어조의 선언문에는 “사모트라케의 니케(파리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기원전 190년경에 제작된 헬레니즘 시대의 대리석 조형물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보다 ... 경주용 자동차나 소리 요란한 자동차가 더 아름답다”고 적혀 있으며, 매우 선동적인 언어로 새로운 문학 및 사회운동의 탄생을 알리면서 젊은이들에게 미래주의의 기치 아래 모일 것을 호소했다. 폭력과 투쟁이 만연한 마리네티 미래주의 선언문의 전반적 어조 “아름다움은 오로지 투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니체의 영향을 크게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그 영향은 단절되지만 움베르토 보초니와 다른 젊은 미래주의자들은 니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리네티는 사상의 지휘자였으며, 근대성에 대한 그의 찬미는 이탈리아에서 즉각적인 지지를 얻었다. 베네치아의 상 마르코 성당 종탑에서 뿌려진 선언문을 통해 미래주의자들은 베네치아의 운하를 메워버리자고 제안했다. 이는 상류사회의 부패에 대한 항의인 동시에 자동차와 같이 새롭게 등장한 문화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기도 했다.

미래주의는 두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단계는 1909년의 발단에서부터 1916년 보초니의 사망으로 인해 사실상 그룹이 해체될 때까지이며, 두 번째 단계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의 창시자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 정권 아래서 마리네티가 시도한 재건의 시기이다. 20세기 미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첫 번째 시기에서 예술가들은 선언문에서 제안한 과장된 공식 표명을 합리화할 수 있는 회화 언어를 성취하고자 했다.

운동을 표현한 자코모 발라는 1912년에 고속연속촬영법의 특징인 반복적인 윤곽선으로 대상을 재현하여 자신의 회화세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가죽 끈의 운동>(1912)은 <가죽 끈에 매인 개의 역동성>으로도 불리는데, 흐릿해진 윤곽선과 수많은 다리, 가죽 끈의 반복적인 곡선으로 말미암아 회화 속의 개가 정지해 있는 관람자 앞을 지나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운동을 지각할 때의 동시성을 묘사한 이 작품은 그가 1912~13년 뒤셀도르프에 머물면서 날아가는 제비, 질주하는 자동차 등과 같은 주제를 통해 속력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데 몰두하던 시기에 그린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말 마이브리지와 그 밖의 몇 사람의 운동에 관한 사진연구를 모방한 미래주의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기억-이미지를 동시에 그린 움베르토 보초니는 파리와 상트페테부르크를 여행한 뒤 1907년 밀라노에 정착했으며, 그곳에서 마리네티와 교류했다. 1910년 미래주의 선언문에 서명하고 그 후 미래주의 그룹에서 가장 활동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그는 <일어나는 도시>(1910~11)에서 운동의 격렬함을 표현했다. 보초니 자신의 말에 의하면 이 작품은 “노동자 군중의 운명적인 투쟁”을 구체화하고 “노동, 빛 그리고 운동의 위대한 종합”을 창조하고자 한 그의 바람을 나타낸 것이다.

조각가로서도 재능을 발휘한 보초니는 1912년에 작성한 「미래주의 조형물 기법 선언문」에서 미래주의 조형물의 구성은 수학과 기하학의 요소들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요소들은 부연 설명하는 장식적 요소들이 아니라 새로운 조화 개념이 규정해주는 법칙에 따라 인체의 근육이 묘사하는 선속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재료의 무한한 선택 가능성과 예기치 못한 접합의 권리를 예찬하면서 “완전히 문학적ㆍ전통적 대리석과 청동으로 된, 소위 고상하다는 것을 파괴해야 한다. 또한 조형물의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 한 가지 재료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확실히 부정해야 한다. 조각가는 한 점의 조형물에서도 조형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도록 스무 가지도 더 되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할 수 있다. 유리, 나무, 판지, 접착제, 콘크리트, 말총, 피륙, 거울, 전깃불 등은 그런 재료의 일부일 뿐이다”라고 했다.

보초니는 자신이 권한 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지만, 그의 권고는 20세기 조각가들에 의해 큰 성과를 거뒀다. 뒤샹 비용과 아르키펭코로부터 영향을 받은 보초니가 중시한 에너지 작용선으로서의 추상의 개념은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에너지와 운동, 광선,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주변에 있는 사물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서로 삼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공간에서의 병의 전개>(1912)에서 보듯이 다양한 모형으로 투입된 그의 모티프들이 주물로 뜬 청동 소재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하나의 통일적인 종합단계에 이른다. 그는 <공간속에서의 연속성의 특이한 형태들>(1913)에서 공간 에너지와 인체의 운동을 유려하고도 우아한 형태로 옮겨놓았다. 로봇 같기도 하고 양서류 같기도 한 모호한 형태의 이 조형물은 프랑스 과학자 에티엔 쥘 마레의 고속연속촬영법에서 가시화된 운동의 자취를 조형적 신체에 결합한 것으로 미래주의의 이념을 가장 잘 표현된 것이다. 이 작품에 내재된, 앞으로 걸어가는 동작을 통해 방출되는 에너지가 힘차게 움직이는 이 초인의 근육질 몸을 훑고 지나간다. 이 작품에서 보초니가 모티프로 삼은 것은 단순한 운동의 과정이 아니라, 인간을 지루한 걸음걸이에서 떼어내 추진력을 가한, 현대인의 삶에 편재하는 역학이다. 모델링과 청동이라는 전통 조형방식을 유지한 이 작품은 현대인의 전투적인 삶이 갖는 존재에 초점을 모은 것이다. 또한 입체주의 조각가들 피카소, 뒤샹 비용, 아르키펭코 등의 선례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식을 중시한 지노 세베리니는 1909년경 피카소, 막스 자코브, 아폴리네르를 만났고 그들을 통해 입체주의 이론에 매료되었다. 이듬해 4월에 「미래주의 회화의 기술적 선언문」에 서명했으며 보초니, 카르라, 루솔로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그들을 아폴리네르 및 입체주의자들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세베리니의 <블루 댄서>(1912)는 미래주의 전시회에서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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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강2                                                                  

천 개의 얼굴을 가진 표현주의
표현은 ‘강조하다pressing’라는 뜻이지만 미술에서의 표현은 발랄한 은유를 의미한다. 발랄한 은유가 미적 판단의 척도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15세기 이탈리아의 건축가이며 인문주의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훌륭한 작품이 관람자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작품에 묘사된 인물의 감정이 관람자에게 반응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 빈치도 서술적인 회화가 고상하고 고귀한 회화라는 데 알베르티와 의견을 같이 하여 사람의 감정과 관념을 제스처와 얼굴표정으로 표현하는 중요성을 반복해 강조했다. 그리고 그 결론을 향해 갖가지 표현이론을 전개했는데, 카메라로 스냅사진을 찍듯이 사람의 진솔한 모습을 신속한 스케치로 관찰, 기록하기를 권유했다. 다 빈치는 특히 벙어리를 연구할 것을 조언했는데, 몸짓으로 말하는 벙어리의 동작이 매우 표현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직접적인 관찰을 통한 정, 동적 표정의 회화 목록을 작성하려고 했다. 이는 다음 수세기 동안 이루어진 얼굴표정 체계화 작업을 예고한 것이었다.)

앙리 마티스는 1908년 선언문 형식의 에세이 「화가의 노트 A Painter's Notes」에서 회화를 궁극적으로 표현으로 규정하면서 “나의 가장 큰 목적은 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 내게 있어 표현은 회화의 총체적 배열이다. 신체가 차지할 공간, 그 주변 공간, 그 비율 등의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구성은 화가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장식적으로 배열하는 기술이다. 한 회화 속에서 모든 부분이 보일 것이며, 부분들은 그것들에 부여된 역할을 일차적이건 이차적이건 수행할 것이다. 회화에서 유용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방해가 될 뿐이다. 미술품은 전체적으로 조화로워야 하는데, 과다한 세부는 관람자의 마음속에서 본질적 요소들을 잠식하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표현주의의 개념은 정확하게 규정될 수 있는 양식이 아니라 국적을 초월한 하나의 거대한 운동이었다. 우선 표현주의는 매우 주관적이었으며, 예술가들 대부분 개인적인 기교를 통해 아카데미의 규범을 거부했다. 공통적인 특징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감정과 내적 체험을 작품의 제작 동기로 삼은 것이다. 표현주의는 회화뿐 아니라 조형물, 건축, 댄스, 영화 등 그 밖의 많은 장르에도 적용되었다.

풍자와 유머를 화면에 담은 제임스 앙소르
플랑드르에 표현주의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초현실주의자들이 선구적인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칭송한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의 가장 큰 특징으로 간주되는 죽음과 관련된 요소들이 1880년대 후반에 도입되기 시작했으며, 그의 이름은 주로 이와 관련해 알려졌다. 그는 카니발 가면, 그로테스크한 형상, 해골, 기묘하며 괴상한 상상을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와 피테르 브뢰겔을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하면서도 아이러니한 유머로 처리했다. 그의 작품과 판화는 사회적ㆍ종교적 비판을 담아 교훈적이면서 풍자적인 색채를 띠었다.

초기단계인 1878~85년은 이른바 어두운 시기로 <성난 가면>(1883), 지방 부르주아의 집 내부, 해변 풍경, 마을 풍경 등을 어두운 색조로 그리면서 팔레트나이프로 물감을 두텁게 칠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동시대 프랑스의 인상주의와는 강한 대조를 보였다. 그의 회화에서 군중은 모티프와 무관하게 등장한다. 그리스도의 일화, 거리풍경, 해변 등 어떤 모티프를 그리더라도 늘 일군의 그로테스크한 형상들이 결부되었으며, 군중은 모티프와 관련된 것도 아니고 모티프에서 파생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사용한 가면은 고향의 전통 카니발에서 유래했다. 그는 “가면이 지배하는 고독한 세계, 온갖 폭력과 빛의 위엄의 세계를 되도록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했다”면서 “가면은 내게 신선한 색, 과장된 표현, 화려한 장식, 예기치 않은 제스처, 자유로운 동작, 격렬한 소란을 의미한다”고 했다.

부친의 사망(1887)으로 자신의 회화를 이해해준 유일한 가족을 잃은 앙소르는 죽음을 사적인 체험으로 각인했으며, 그때부터 죽음의 모티프가 그의 회화에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죽음은 늘 그에게 위협적 존재였다. 알레고리와 패러디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죽음을 다각적으로 묘사한 그가 1897년에 그린 <죽음의 신과 가면>은 한 무리의 인물을 묘사한 것으로 죽음의 신을 중앙에 배치하고 신이 카니발 연회에서 술에 취해 흥청거리는 가면들에 에워싸여 위협받는 장면으로 구성되었다. 죽음의 신은 생명을 상징하는 초를 왼손에 들고 있으며, 촛불은 곧 꺼질 듯하다. 기구에 탄 사람이 상단에 낫을 들고 위협하는 죽음의 신들로부터 도망치면서 모래주머니를 내던지는 모습이 보인다. 이 작품의 특색은 붉은색, 흰색, 파란색이 두드러진 점이다. 하단 왼편 의상에 칠해진 붉은색은 오른편 모자의 주름장식에서 반복되고, 하단 오른편 의상에 칠해진 파란색은 상단 왼편의 하늘과 호응한다. 색들이 대각선으로 조응하며 중앙의 죽음의 신이 입고 있는 하얀 수의를 에워싼다. 그리고 죽음의 신에서 후광처럼 부풀어 오른 흰 구름이 관람자의 시선을 기구로 유도한다.

앙소르는 평생 비주류 화가였으며, 대중의 찬사가 그에게 주어진 것은 일흔 살이 되었을 때였다. 1929년 알베르 1세가 그에게 남작의 작위를 수여했다. 말년에 앙소르는 초기에 사용한 밝은 서정적 색들을 즐겨 사용했으며, <가면이 있는 자화상>(1937)에서 보듯 색들이 점차 완화되어 갔으며 강렬한 표현주의 경향은 수그러들었다. <가면이 있는 자화상>은 장난스러운 음모에 휘말린 선량한 노인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작품으로 그가 말년에 편안해졌음을 알게 해준다. 말년의 작품에서 열정적이고 비타협적인 요소들이 사라졌다. 그는 아흔 살이 가까운 1949년 11월 19일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혼의 고백을 묘사한 에드바르트 뭉크
문학에 관심이 많은 뭉크는 자연히 인간 본질에 대한 불안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넋의 리얼리즘’으로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한 세계적인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와 대중의 비자주성과 위선적 신앙을 심하게 비판한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저서를 탐독했다. 그가 소장한 책 중에는 키르케고르와 더불어 실존주의의 선구자 니체의 전집과 14권의 키르케고르의 전집이 있었다. 키르케고르는 파스칼에 의해 사유된 불안이 인간을 사로잡는 까닭에 관해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등을 통해 깊이 분석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와는 달리 불안은 무nothing에서 비롯되는 인간 본성을 위협하는 근원적인 의식, 혹은 정서이므로 불안은 파악하기 어렵고 이에 집착하면 할수록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뭉크가 키르케고르 전집 제4권 『불안의 개념』을 여러 번 읽은 흔적이 있어, 불안이라는 인간의 근원적·감성적 잠재의식에 집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실존적ㆍ근원적 상태로서의 불안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개념은 곧 뭉크의 개념이기도 했다. 불안에서 절망에 이르게 되고 절망은 곧 파멸을 부른다. 불안은 <절규>외에도 <칼 요한 거리의 봄날>, <불안> 등에서도 나타났다. 뭉크는 보행하는 도시인들의 얼굴을 가면처럼 상징적으로 묘사하면서 현대인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절규>를 변형한 작품이 무려 50종이나 되어 이 모티프에 대한 뭉크의 애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절규>는 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그의 회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상징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절규>를 충분히 이해하면 나머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동적인 색의 사용, 자연의 꿈틀거리는 속성에 대한 이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충동과 변화에 대한 강렬한 표현이 <절규>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 세 가지는 그의 회화를 특징짓는 요소이다.

미국의 미술사학자이자 뉴욕대학 교수로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큐레이터를 역임한 로버트 로젠블럼은 파리의 인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페루의 미라가 <절규>에서의 해골과 같은 머리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결박당한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미라는 분명 <절규>에서의 뭉크와 흡사하다.

배경의 줄무늬 채색은 음파를 가시화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나타난 자연의 힘과 에너지가 물성화한 하늘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보다는 그의 정신을 지배하는 영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배가 물 위에 떠 있어 자연의 풍경으로 보이지만 이는 실제의 풍경이 아니라 그를 괴롭히는 불안, 공포, 사랑과 증오의 이중성을 나타내기 위한 은유적인 풍경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을 가시화한 내면의 자연인 것이다. <절규>에서 두려움에 치를 떠는 해골 같은 모습의 남자는 뭉크 자신이다. 그의 절규가 대지를 진동하고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일 정도로 절박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이해가 바람직한 이유는 그가 1891년 류머티즘에 의한 열병으로 니스에서 투병할 때 쓴 일기가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 두 친구와 함께 걷고 있었고, 해는 막 서산에 지고 있었는데 약간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돌연히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으며 탈진된 듯 느껴져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검정색에 가까운 진한 파란색 협만과 도시 위에 피의 불길이 넘실거렸으며, 친구들은 계속 걷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서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뭉크에게 있어 구현의 방식은 심리적ㆍ감정적 모티프를 강렬하게 다룸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동일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그가 독일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회화는 자연히 독일 표현주의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표현주의의 선구자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아버지 알퐁스 드 툴루즈 로트레크 몽파 백작은 이종사촌인 아델 타피에 드 셀레랑과 결혼하여 툴루즈 로트레크를 낳았다. 두 사람은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정략적인 결혼을 했기 때문에 곧 형식적인 부부관계만을 유지한 채 각자의 삶을 살았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13살 때 사고로 다리가 부러졌고, 다음해에는 다른 쪽 다리마저 골절되었다. 그렇지만 가문의 오랜 전통의 근친결혼으로 유전적으로 뼈에 이상 증세가 나타났고 10살 때 이미 그러한 증세가 두드러졌다. 그의 다리는 사고 후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았고, 성인이 된 후 그의 키는 152cm밖에 되지 않았다. 아델 백작부인이 그를 돌보았는데, 그는 어머니의 독점욕과 보호에 반항하게 되었고, 마침내 엘리트적 귀족생활에서 벗어나 몽마르트르의 카바레와 클럽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툴루즈 로트레크의 고유한 양식은 1890년 클럽 물랭 루주에서 그린 <물랭 루주에서 댄스>(1890)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인물들의 배치를 통해 공간의 깊이를 나타냈으며, 사람들에 둘러싸인 카바레의 배우 라 굴뤼와 발랑탱 한 쌍의 춤추는 장면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그는 2년 전에 개점한 카바레 물랭 루주의 커다란 홀에서 노란 램프의 빛을 받으며 환락을 좇는 사람들이 인기 절정에 이른 라 굴뤼와 발랑탱의 댄스에 매료된 장면을 묘사했다. 발랑탱의 반신상이 회색과 녹색이 섞인 실루엣으로 빛난다.

27살의 툴루즈 로트레크는 1891년에 포스터 <물랭 루주의 라 굴뤼>를 채색석판화로 그려 유명해졌다. 남은 인생 10년을 그는 판화를 제작하는 데 보내게 되었다. 그는 1892년에 수년 전에 만난 샹송 스타 아리스티드 브뤼앙을 홍보하는 포스터를 제작하면서 특수 글씨를 사용해 포스트 장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공간을 축소하고 세 가지 원색인 적색, 황색, 청색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으며, 자신이 직접 쓴 글씨로 더욱 예술적 느낌을 가미했다.

샹송 가수이자 작곡가 아리스티드 브뤼앙은 몽마르트르에 자신의 카바레를 운영하면서 매일 밤 그곳에서 손님들을 향해 옥설을 퍼부었지만, 그것마저 인기를 끌었다. 그가 인기를 끈 것은 노동자층의 삶에 관한 샹송을 불렀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디자인한 의상을 했는데, 예를 들면 까만 벨벳 양복에 길게 올라오는 부츠, 까만 망토와 진홍색 스카프를 맸으며, 테가 넓은 까만 모자를 착용했다. 그는 종종 테이블로 뛰어올라 노래를 부르면서 손님들을 꾸짖었고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지팡이를 사용했다.

1892년 브뤼앙이 툴루즈 로트레크에게 포스터 연작 중 첫 번째의 것을 의뢰했을 때에 브뤼앙은 스타로 이미 명성이 나 있었고 종종 더 큰 무대에도 출연하고 있었다. 첫 번째 포스터는 그가 앙바사되르에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의 것이다. 브뤼앙이 쓴 모자가 글씨 앙바사되르의 일부를 가리고 있는데, 이런 방법은 현재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툴루즈 로트레크의 표현주의 회화는 그가 1898년에 매춘부가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을 묘사한 <화장하는 푸풀 부인>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드가와 르누아르가 머리를 손질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회화와 비교하면 그의 회화가 매우 표현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울 앞에서 일상사를 한숨짓는 모습은 지속되는 허무의 감정이다. 이 작품은 그의 몸이 쇠약해지기 전에 완성된 것으로 인간의 모든 노력이 덧없음을 표현한 데서 그의 자화상과도 같다. 선천적으로 허약한 그는 하룻밤에도 여러 카바레를 전전하며 과음하는 등 몸을 쉬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남자에게 붙어 돈을 뜯어내려는 여자들과 술친구로 만난 평판 남자들이 많았다. 그는 의심이 깊어졌고, 친구에게조차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으며 자신을 점점 고독으로 몰아갔다. 게다가 불치병 매독에 걸려 죽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매독에 걸렸는데, 프란츠 슈베르트, 니체, 마네, 고갱, 반 고흐 등이 있다. 그는 1899년 거리에서 쓰러진 뒤 파리 근교의 정신병원에 보내졌다. 1901년 8월 중순 발작을 일으켰고 몸의 일부가 마비되었다. 그는 9월 9일 오전 2시 15분에 서른일곱 해의 생을 마감했다.

인상주의의 반동으로 일어난 야수주의 운동
패션모델과 같은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앉아 있는 마티스의 아내는 모자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당시 가장 유행하는 모자를 착용했다. 마티스가 <모자를 쓴 여인>(1905)에 사용한 색은 실재와는 동떨어져 관람자에게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였다. 모자 아래 보이는 머리카락은 붉은색이며, 얼굴은 연보라색, 녹색, 파란색 등 붓자국이 아무렇게나 성급하게 칠해진 것으로 보였다. 마티스는 실재를 묘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시각적 자극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그가 의도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며, 그의 말대로 감정에 질서를 부여한 것이다.

<열린 창: 콜리우르>에서 마티스는 고갱과 반 고흐로부터 주관적인 색으로 이뤄진 평면과 리듬감 있는 두터운 윤곽선을 도입했으며, 선의 두께와 간격을 조정하여 선의 효과에 미세한 차이를 주는 방법은 반 고흐의 드로잉에서 가져왔다. 세잔에게서는 총체화되는 장으로서의 회화적 표면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채색되지 않고 희게 남는 부분을 포함해 화면의 모든 것이 회화의 에너지를 증대시키는 구조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마티스는 자신의 의도를 명료하게 표현하며, 자신의 감정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작업했다. 이는 1905년 이후에 그린 회화는 물론 조형물에도 해당된다.

마티스는 1909년에 “회화는 평안, 집중, 마음의 평화를 호소하는 하나의 기도”라고 했다. 드로잉을 단순화하고 묘사의 기능에서 색을 해방시킨 특징이 현저하게 나타난 것이 <댄스>(1910)로 마티스의 장식적 취향에 원색, 율동적 힘이 결합된 양식의 완벽한 통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댄스>는 <생의 기쁨>(1906)의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가장 아카데믹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신중함을 보인 마티스는 콜리우르에서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배경을 구상한 뒤 개별적으로 습작하던 인물상을 홀로 또는 무리지어 배치하여 <생의 기쁨>을 완성했다. 그러나 결과는 아카데믹한 것이 아니었다. 조정되지 않은 순색의 색면들이 전례 없는 규모로 적용되어 화면에서 원색 사이의 과격한 충돌이 불가피하게 드러났다. 밝은 색의 두터운 윤곽선이 그처럼 경쾌한 아라베스크 리듬을 형성하거나 인체가 수은처럼 녹아내리는 듯 왜곡된 전례가 없었다.

마티스는 <댄스>에서 표현이 더욱 강한 회화의 언어를 창조하기 위해 회화적 수단을 극도로 단순화했다. 그는 우선 댄서들의 배경을 햇살 가득한 지중해 연안에서 신성한 언덕으로 바꾸었다. 또한 댄서의 숫자를 여섯 명에서 다섯 명으로 줄이고 속도와 운동감에 대한 표현을 강화했다. <댄스>가 프랑스 남부 연안의 작은 마을 콜리우르에서 본 민속춤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그는 부정하면서 댄스에 대한 영감을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본 프로방스 지방의 시골 댄스에서 얻었다고 했다. <댄스>와 <음악>에 사용된 색이 준 충격은 1940년대 후반 마크 로드코와 바넷 뉴먼의 거대한 캔버스화가 출현하기 전까지 근대 미술에서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이런 색의 사용은 “1평방센티미터의 파란색은 1평방미터의 파란색만큼 파랗지 않다”는 마티스의 원칙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댄스>는 <음악>(1910)과 함께 1910년 파리의 살롱 도톤에서 선보였고, 두 점이 물의를 일으키자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파리에 온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슈추킨조차 <댄스>를 자신의 집에 거는 것이 지나치게 경박해 보일 것을 염려하여 한동안 구입을 망설였다. 슈추킨은 마티스의 작품을 37점 소장하면서 가장 충실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피카소의 작품도 40점이나 구입했다.

<음악>은 서로 쳐다보는 한 명의 여성이 포함된 다섯 명의 악사로 구성된 장르화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완성작에 등장한 인물은 모두 남성이다. 모든 것이 부동 상태에 놓인 <음악>은 휘감아 도는 <댄스>의 운동과는 대조적이다. 악사 세 명의 입을 나타내는 검은 구멍은 너무도 음울하며, 바이올린 주자가 활을 그어 내리는 순간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당대의 러시아 최고 평론가 중 하나로 슈추킨이 늘 경청한 야코프 투겐홀트는 살롱 비평문에서 <음악>의 인물들을 “여태껏 없었던 최초의 악기, 그 소리에 최면이 걸린 늑대 소년”으로 묘사했다.

마티스는 1916년 말까지 실험적인 작업을 줄곧 했으나 니스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 작업에 변화가 일어났다. 남부의 나른한 분위기에 젖어 진솔하고 쾌락적인 회화, 특히 화려한 실내에서 여성 누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1940년대에 파피에 데쿠페papiers découpés, 즉 종이 오려붙이기를 대대적으로 활용했다. 입체주의의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와는 반대로 마티스가 오린 종이들은 그의 의도에 따라 불투명 수채로 미리 채색된 색지였다. 형태의 밑그림을 그리고 평편하게 채색하는 것이 아니라 색을 집적 재단하여 붙인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난 1954년 직전까지 중후하고 위엄 있는 느낌을 주는 파피에 데쿠페 작업을 했지만, 1905년부터 1916년까지 작업한 경쾌한 흥분과 강렬함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대양의 기억>(1953)은 그가 1930년에 타히티를 방문했을 때를 회상한 작품으로 색, 형태, 구도의 추상적 언어로 표현했으므로 비개인적인 것이 되었다. 이는 회화의 언어로만 내용을 전달하려고 한 것으로 초기의 작품과는 대비가 된다.

모든 혁명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들을 끌어당기는 브뤼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가 1906년에 작성하여 고딕문자로 목판화에 새긴 브뤼케 강령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진보에 대한 믿음, 신세대 관람자와 창조자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모든 젊은이를 부른다. 그리고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로서 기존의 제도권에 대항해 행동의 자유, 삶의 자유를 성취하고자 한다. 내면의 창조적 충동의 원천을 왜곡하지 않고 직접 표현하는 사람은 누구든 우리의 일원인 것이다.

키르히너는 대도시의 존재, 특히 어두운 측면인 행인, 주점 주인, 댄서, 서커스단 등에 관심이 많았다. <드레스덴 거리>(1908)에서 그는 드레스덴을 활기차지만 신경이 곤두서는 만남의 장소로 표현했다. 가장자리에서 밀치락달치락하는 군중 때문에 화면은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고 가면 같은 얼굴을 한 여인들은 관람자를 압박한다. 특히 중앙의 작은 소녀는 기이한 모습이다. 인물들의 길게 늘어진 몸과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은 쇠락한 사회 분위기를 대변한다. 왜곡된 공간과 선정적인 주홍색이 불안을 야기하는 이 작품은 뭉크의 회화를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는 주황색, 녹색, 청색으로 표현된 대로를 관통하여 인물들을 감싸고 흐르는 전선의 전류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이런 느낌은 그가 1911년 브뤼케 멤버들과 함께 베를린에 정착한 뒤 그린 ‘거리’ 연작에서 극대화되었다.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자극적인 색과 왜곡된 원근법이 심화된 연작에 등장하는 매춘부와 그 고객인 인물들의 무감각한 태도는 불안을 더욱 가중시킨다.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키르히너의 양식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인물들이 뾰족하고 길어지며 색은 강렬하면서도 병들어 탁해졌으며, 얼굴은 신경질적이다. 그는 반항적이고 날카로운 양식으로 도시의 세속적인 화류계를 음울한 모티프로 선택했다.

직관을 중시한 에밀 놀데는 개인적인 깊은 경험에서 동기를 찾으면서 1909년부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황홀경을 담은 대형 종교화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회화 중 가장 훌륭한 것들은 1909년과 1912년 사이 그리스도 생애를 그린 연작이다. <그리스도와 어린이들>(1910)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어린이들을 독일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의 원시적 시각은 원시적 방식의 회화와 조화를 이뤘다. 그는 혼합하지 않은 색들을 직접 캔버스에 칠했으며, 투박한 구도를 사용했고, 두터워진 표면을 다듬지 않았다. 색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은 <오순절>(1909)에서 쉽게 발견된다. 물감을 두텁게 바르고 인물들을 깎아서 만든 것처럼 높은 밀도로 화면을 구성한 <오순절>에서 비좁게 밀집되어 있는 인물들이 자주색과 노란색의 강한 색들로 신비하게 보이며, 이런 효과는 훨훨 타오르는 불꽃형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왼편의 청록색 외투를 걸친 인물이 오른편에 있는 검은 의상을 한 인물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오른손을 잡음으로써 전경에 시선의 장벽이 만들어지어 그 뒤로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그리스도를 보호하는 구역이 된다.

전시회의 기획을 주요 활동으로 삼은 블라우에 라이터
바실리 칸딘스키는 1909년부터 작품에 ‘즉흥improvisation’이란 제목을 붙이기 시작했다. <즉흥 21a>(1911)에서 보듯 즉흥에 인물, 건물, 산 등의 형태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것들은 재현의 형태라기보다는 기호의 기능을 한다. ‘즉흥’이란 제목은 그가 가능한 한 자발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의식적인 제어작용을 극소화한 상태에서 형태들을 창조했음을 시사한다. ‘구성’이라고 붙인 제목의 작품들은 ‘즉흥’에 기반을 두고 계획적으로 확장시킨 것들이다. 그는 1913년에 완전추상에 도달했는데, 그의 추상은 물리학, 특히 원자가 궁극적으로 물질의 최소 단위가 아니라 그 자체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전자, 양자, 중성자의 덩어리라는 사실 그리고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및 질량과 에너지를 동일시하는 이론과 관련이 있다. 물리학에 관심이 많은 그는 『회고록』에 “원자의 분열은 내게 있어 세계의 붕괴와도 같았다”고 적었다.

프란츠 마르크는 1912년 10월 파리에서 로베르 들로네를 만났고, 색을 추상적으로 사용하려는 그의 오르피즘Orphism(혹은 동시주의)의 시도에 고무되어 형태를 해체하는 자신의 양식을 한층 더 발전시켜나갔다. 들로네의 영향을 받아 수정처럼 각진 면이 생기는 선을 주로 사용한 마르크는 <붉은 말과 파란 말>(1912)에서 말들을 각이 지게 그림과 동시에 자연의 풍경도 면으로 묘사했다. 기하학적 구조를 이루어 생기가 없어 보이는 이 작품에서 물질적인 붉은색이 정신적인 파란색과 대립한다. 두 색은 체념과 관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마르크는 말을 묘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말의 형상을 통해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는 동물이 사람보다 아름답고 정신적인 존재라고 믿었으며, 동물의 영적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색을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형태를 단순화하면서 리드미컬하게 구성했다.

그는 작은 단면의 리듬을 나타내기 위해 동물 본래의 형태와 운동을 이용했다. 동물의 눈 속에서 인간에게 상실된 천진함과 인간이 멀리하게 된 자연의 리듬 그리고 일체감을 발견한 그는 그것들을 상징적 이미지로서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는 명상의 대상으로 표현했다. 1914년을 지나면서 부분적으로는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구상적인 내용이 작품에서 거의 사라지고 더욱 추상화되었다. 말기 작품들은 사회적ㆍ교훈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표현적 추상으로 나아가는 독일 표현주의의 흐름이 절정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영국의 사회사상가이자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1819~1900)은 1853년에 이런 투사를 “감상적 허위”라고 비판했는데, 마르크의 회화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러스킨은 “동물의 눈에 자연이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를 상상하는 것만큼 예술가에게 신비로운 착상이 있을까? 말이나 독수리, 암사슴과 개는 어떻게 세계를 바라볼까? 누가 감히 암사슴의 눈에 비친 세계가 입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마르크가 추구한 것은 주어진 표현이 아니라 자신과 타자를 회화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감정이입의 추상이었다. 이런 생각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의 회화에는 인간과 동물의 공통적인 고통과 고뇌가 보인다. 그에게 자연의 고통은 모든 피조물을 결합시키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실제로 그는 캔버스 뒷면에 ‘모든 존재는 고통으로 불타오른다’고 적었다.

칸딘스키와 평생 우정을 나눈 스위스의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1879~1940)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바이올린 연주에서 급속한 발전을 보여 곧 시립오케스트라의 특별주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앞두고 화가가 될 것인가, 음악가가 될 것인가 하는 물음에 그는 화가를 선택했다.

클레는 정신병자의 미술에도 주목하여 같은 전시회 평에서 아동화에 대해 옹호한 뒤 “이와 거의 비슷한 현상이 정신병자에게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표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데 우리가 유치하거나 광기에 찬 언어를 고의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고 적었다.

정신병자의 미술에 대한 20세기 예술가들의 재평가는 원시미술에 대한 재평가 이후에 진행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정신병자의 미술과 아동미술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정신병자의 미술이 내면을 표현한다거나 관습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무의식을 직접 드러낸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이해는 실제와는 거리가 있었다. 과거 낭만주의자들도 미개인, 아이, 정신병자를 문명의 구속에서 벗어난 창조적 재능을 지닌 사람들로 간주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들을 다루는 매체는, 말하는 것에서 시각적인 것으로 이동했고 낭만주의 이후 진행된 정신병자의 미술에 대한 폄하로 인해 이런 관심은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폄하란 이 같은 미술이 시적 영감을 주는 모델보다는 심신 퇴보의 기호로 간주된 것을 말한다.

심신 발달 초기단계로의 퇴보에 대한 담론
퇴보에 대한 담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이탈리아 정신의학자이자 법의학자로 범죄인류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체사레 롬브로소(1835~1909)였다. 그는 범죄자의 두뇌 383개를 해부하고, 5,907명의 체격을 조사한 뒤 범죄자에게 두뇌나 그 밖의 일정한 신체적 특징이 있음을 밝혀내고 범죄자의 인류학적 특징에 착안했다. 이런 신체적 특징은 원시인에게 있었던 것이 격세유전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이런 특징을 지닌 사람은 선천적으로 범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격세유전은 ‘증조부모’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어떤 특정한 생김새가 부모보다는 그보다 더 앞선 조상을 닮는 경향을 말한다.

19세기에 팽배했던 인종생물학의 영향 아래 격세유전은 병리학적 의미를 덧입게 되어 이런 대물림이 한두 세대 이후에 재발되는 질병의 격세유전을 의미하게 되었다. 롬브로소는 범죄자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선천적 범죄자는 그 범죄적인 소질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지울 수는 없으나, 사회적으로 위험한 존재이므로 국가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7명의 정신병자들에 대한 연구서인 『천재와 광기』(1877)에는 책의 절반이 드로잉과 회화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여기서 롬브로소는 부조리하고 음란한 재현 형식들에서 퇴보를 찾아내고 정신병을 심신 발달 초기단계로의 퇴보로 보았다. 이것이 미개인, 아이, 정신병자를 혐오스런 것과 연관 짓는 하나의 모델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 모델이 그들을 때 묻지 않은 창조성과 연관 짓는 목가적인 이해 방식과 함께 20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퇴보라는 담론은 정신의학을 거쳐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정신분석학에서 정신병자의 미술에 대한 진단적 독해 방식과 함께 계속되었다. 이런 접근법을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역으로 적용해 담론을 확장시켰다. 그는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와 같은 제정신을 지닌 대가들의 작품에서 신경증이나 정신이상의 징후를 찾으려고 했다.

20세기에 들어서 독일의 정신의학자로 근대 정신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밀 그레펠린(1856~1926)과 스위스의 심리학자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도입해 연구그룹을 만든 오이겐 브로일러(1857~1939)가 임상실험을 통해 정신분열증에 대한 연구를 확대했다. 자아와의 관계가 파괴된 것으로 이해되는 정신분열증은 사고의 분열이나 감정의 상실로 나타나는데, 이 같은 주체성의 분열이 파괴적인 회화를 통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런 진단적 접근법은 미술 행위 자체의 본성을 알아내기 위해 정신병자의 미술을 연구한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폴 뫼니에의 『정신병자의 미술 』(1907)이나 20세기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독일의 정신의학자이자 미술사학자 한스 프린츠호른(1866~1933)의 『정신병자의 조형 표현: 형태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을 위하여』(1922)의 도전에 직면했다. 정신병리학을 연구하기 전 빈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그는 하이델베르크 정신의학진료소에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인 정신병자 435명의 작품 4,500여 점을 수집한 뒤 그중 187점의 이미지를 『정신병자의 조형 표현: 형태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을 위하여』에 실었다. 「이론편」, 열 명의 「분열증세의 대가」에 대한 사례연구, 「결과와 문제」라는 일종의 결론을 담고 있는 이 책에서 그는 여섯 개의 충동, 즉 표현, 유희, 장식적 정교함, 일정한 패턴을 갖는 배열, 강박적인 모사, 상징체계 세우기의 상호작용이 분열증 환자들의 각각의 이미지를 결정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런 충동들은 모든 미술에서도 발견되는 것이었다. 프린츠호른은 표현, 유희의 두 충동을 나머지 네 충동에 대한 교정수단으로 삼을 때조차 예술가와 정신분열증 환자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아무리 고독한 예술가라도 현실과의 접촉을 유지한다. ... 반면 정신분열증 환자는 인간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리고 그는 인간과의 관계를 재설정할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수도 없다. ... 이 회화들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자폐적인 철저한 고립 그리고 정신병적 소외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섬뜩한 유아론이다. 우리는 이 회화들로부터 정신분열증적 형태의 본질을 발견했다”고 적었다.

클레는 한스 프린츠호른의 『정신병자의 조형 표현: 형태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을 위하여』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책에 실린 작품들에 공감했다. 그는 때로 글쓰기와 드로잉을 뒤섞어 놓은 환상적인 방식을 사용했다. 그런 회화는 “말과 회화의 샐러드”란 비판을 자초했지만, 클레의 실험은 형식적이기보다는 심리적인 혼돈을 연상시키는 신체의 왜곡을 통해 주로 진행되었다. 때로 그는 아동화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인 인물의 눈이나 머리를 크게 확대했으며, 신체의 다른 부위들을 확대해 프린츠호른이 정신분열증 환자의 재현에 나타나는 경향으로 지적한 장식적으로 반복되는 문양을 만들었다. 이런 점은 <두 음악가의 만남>(1922), <늙은 비너스>(, <의상을 입은 꼭두각시> 등에서 드러난다. 그는 때로 얼굴 같은 신체의 특정한 부분을 다른 부분에서 반복했는데, 이는 정신분열증의 한 증상인 자아방향상실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양상은 훗날 장 뒤뷔페의 회화에서도 나타난다. 신체 이미지에 대한 이런 관심이 클레로 하여금 정신병자의 미술에서처럼 경계선을 역설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게 해주었다. 경계선은 지워지거나 과장되고, 때로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다시 지워져버리는 수준에 이르렀다.

분리파 결성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독보적인 사건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특징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영향이다. 억압된 본능적 충동의 분투를 그려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1900)에 따르면 용납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은 무의식 속에서 억제된 채 보존되고 욕망은 비이성적 행동을 통해 일부 사람들에게 분출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꿈으로 표현된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의 예술가들은 억압된 본능과 무의식적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을 표현하기 위해 꿈과 환상, 원시성, 어린이나 정신병자에 대한 관심, 주체성과 성욕의 작용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프로이트의 연구에 따르면 꿈은 수수께끼로, 표현되고자 안간힘을 쓰는 비밀스런 소망과 이를 억누르려는 내부 검열자가 만들어낸 토막 난 내러티브 이미지들이다.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의 도발적인 인물화에서 주로 나타난 이러한 갈등은 그림 속 모델과 화가 모두에게 내재해 있는 표현과 억압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들의 회화는 다른 어떤 모더니즘 양식보다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내리기에 적합했다.

프로이트의 영향이 폭넓게 절정을 이룬 때는 1920년대 초현실주의가 유럽의 가장 강력한 운동으로 전개될 때였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모더니즘 미술과 교차했다. 1979년대와 1980년대의 페미니즘이 정신분석학 이념을 이론적ㆍ정치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문화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에서 비롯된 욕망의 갈등이 빚어낸 결과로 보는 프로이트의 시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게 되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기초 개념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심리적 삶을 사로잡고 있는 갈망, 공포, 금지의 복합체이다.

구스타브 클림트는 1894년에 신설된 빈대학에서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라는 계몽주의적인 주제로 천장화 세 점 <철학>, <의학>, <법학>을 의뢰받았다. 그것들은 1945년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규정되어 임멘도르프 궁전에서 불태워졌지만, 그것들이 장식될 때만 해도 큰 논란에 휩싸였다. 10년 동안 이 작업에 매달린 그는 189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첫 작품 <철학>을 선보였고, 금메달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지만, 빈은 파리와 달리 근대 미술이 성장할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해 그가 1901년 교수의 물망에 올랐더라도 보수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선임되지 못할 정도였다.

<철학>은 클림트의 세계관과 그의 고유한 양식이 빚어낸 작품이다. 여기에는 철학자들로 가득 찬 판테온 대신 뒤얽힌 육체들이 비정형의 공간 속에서 행렬을 이루며, 중앙에는 애매하게 표현된 스핑크스가 이들을 내려다보는 장면이고, 하단에 아테나라기보다는 메두사를 연상시키는 밝게 빛나는 두상이 배치되어 있다. 그는 <철학>에 관해 “왼편의 인물들은 생성, 결실, 소멸을 표현한 것이다. 오른편은 수수께끼 같은 지구, 아래쪽에서 떠오르는 것은 빛의 형상, 즉 지식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는 모든 세력에 대한 어둠의 승리를 표현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형이상학적 수수께끼를 자신의 방식대로 해명하면서 현대인이 겪는 질병, 늙어감, 빈곤 등을 추한 모습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그는 <철학>을 “이 작품은 대학 교수들이 보고 사랑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는 나의 것과 다르므로 그들이 헌납한 홀에 그들이 묘사하기를 바랐던 관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로 옹호했다.

1901년에 공개된 <의학>도 대학 교수들이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여기서는 <철학>보다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몇몇은 관능적인 혼수상태에 빠져있고, 몇몇은 시체와 해골 그리고 한 덩어리가 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클림트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건강의 여신 히기에이아가 뱀에게 망각의 강물을 마시게 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망각의 강은 저승에 있는 강으로 이 강물을 마시면 생전의 모든 것을 망각하게 된다. 클림트는 그리스 신화를 통해 삶과 죽음, 인간의 생기에 넘치는 본능적 에너지 그리고 개인의 붕괴의 조화를 표현하려고 했다. 화면에 홀로 있는 외로운 인간이 집단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으며, 해골로 상징되는 죽음이 인간들의 목표 없는 행동 속에 있다. 누드 여인의 뻗친 왼팔과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누드 남자의 뻗친 왼팔이 삶과 죽음을 연결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은유적인 메시지를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냈는데, 화면 상단 오른편 구석에 임산부가 생명의 잉태로 상징되어 있고, 맞은편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생명의 성장으로 상징되어 있으며, 히기에이아 머리 위에 태아의 모습을 한 아이와 해골 왼편의 늙은이의 모습이 삶의 과정으로 상징되어 있다. 의학으로 상징되는 히기에이아는 유일하게 옷을 걸쳤는데, 인류를 향해 냉담하게 등을 돌리고 선 채 남성을 유혹해 죽음이나 고통 등 극한 상황으로 치닫게 만드는 ‘숙명의 여인’을 의미하는 팜 파탈에 가까운 존재이다. 빈대학은 모욕적인 이 작품을 거듭 거부했고, 클림트는 이런 처사를 비난했다.

클림트는 <법학>을 형 집행의 광경을 지옥으로 묘사하여 대학의 처사에 응수했다. 화면에는 문어처럼 생긴 동물이 벌거벗은 늙은이로 묘사된 죄인을 포획하고, 늙은이는 머리를 떨어뜨린 채 벌을 받기 위해 서 있다. 진실, 정의, 법이 세 여신의 모습으로 상징되었다. 상단의 세 여인은 진실, 정의, 법의 은총이고, 하단의 세 누드는 상징화된 여신들이다. 클림트는 그리스의 비극시인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 「공양하는 여자들」, 「자비의 여신들」의 3부작 『오레스테이아』에서 영감을 받아 그리면서 아가멤논이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귀국하던 날 그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살해되자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이아가 귀국하여 누이 엘렉트라와 협력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를 살해한 죄로 여신들에게 쫓기는 이야기를 근대적으로 해석했다. 앙심을 품은 여신들 앞에 오레스테이아가 벌을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서 있다. 이 작품을 거세당하는 데 대해 공포에 질린 남자가 무기력한 모습으로 올가미에 걸려 있고, 이 남자를 포획하고 있는 여자의 자궁처럼 생긴 문어 같은 기괴한 동물은 고르곤 자매 중 하나인 머리가 뱀처럼 생긴 메두사처럼 보인다고 말한 미술사학자가 있고, 예술가와 사회의 충돌이 정신을 혼란시키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올가미에 걸린 남자를 클림트 자신으로 보는 미술사학자도 있다. 사회의 에토스ethos(도덕적 특질)를 개인적인 파토스pathos(정념, 비애감)로 바꾼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법에 대한 클림트의 개념이 죄와 벌임을 의미한다.

클림트가 신화를 근대적으로 해석했으므로 그의 회화에는 고대와 근대를 연결하는 고리가 있다. 이는 본질에 대한 사고로서 신화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 신화에 대한 그의 사고는 애욕주의와 맞물려 있는데 그는 여성을, 남성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육체를 가진 아름다운 이성으로 보았으며, 처녀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꿈과 환상에 도취된 감성적으로 민감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요염한 제스처로 남성의 정신에 깊이 파고드는 동물적 감각이 농후한 존재로 나타났다. 그는 성적 충동을 스스로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는 여인을 묘사했으며, 자위행위로 노골적인 성의 제스처를 취하는 여인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몰래 훔쳐보는 호기심에 대한 만족과 성적 자극을 제공한다. 
 

여성의 자위행위 장면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이 <다나에>(1907~08)이다. 클림트는 다나에에 대한 제우스의 사랑을 금빛 소나기로 묘사했는데, 다나에는 자신의 행위에 도취되어 희열을 느끼고 있다. 많은 화가들이 다나에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지만, 클림트는 신화의 내용을 모두 제거하고 다나에가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를 임신하는 장면만을 묘사했다.

인간을 혐오스러운 이미지로 바꾼 에곤 실레
에곤 실레가 1907년에 그린 <물의 영 I>은 클림트의 <물뱀 II>의 모티프와 기법을 따르고 있음을 본다. 클림트가 쿤스트샤우에 발표한 <다나에>를 보고 대가의 장식적 요소, 애욕주의, 신화적 모티프에 매료된 실레는 1909년에 비슷한 형태의 <다나에>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클림트의 물결 모양의 감각적인 선의 사용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날카롭고 불안을 야기하는 드로잉 양식으로 변형시켰다.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타계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그는 유화 3백여 점, 드로잉과 수채화, 판화 3천여 점을 제작했다. 그는 핏빛을 띤 붉은색과 흙빛을 띤 갈색, 옅은 노란색과 음침한 검은색을 사용하여 앙상한 나무들이 서 있는 우울한 풍경과 고통 받는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절망적인 회화를 통해 비애감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더 악명 높은 것은 성적으로 표현된 사춘기 소녀들을 묘사한 드로잉과 역시 노골적인 자세로 그린 자화상이었다. 클림트와 코코슈카가 사디즘과 마조히즘 충동 사이의 상호관계를 탐구했다면, 실레는 도착적인 쾌락에 대한 프로이트의 또 다른 개념인 관음증과 노출증을 탐구했다. 거울이나 관람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모습이 등장하는 그의 자화상에서는 그의 응시와 관람자의 시선 간의 차이가 용해되어 뒤섞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일한 관람자, 스스로 내보인 모습을 은밀하게 엿보는 외로운 관음증 환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실레는 자신의 이미지를 거만하게 자랑하기보다는 오히려 상처로 인해 애처롭게 표현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실레의 초상화에 나타난 병적 제스처는 잠재의식의 표현이다. 1910년부터 이런 그림을 그렸는데 모델은 정상적인 사람들이지만 그런 제스처를 취하게 했으며, 모델들 가운데 일부는 거의 미친 사람의 제스처를 취했다. 그는 주로 배경을 여백으로 열어놓고 모델의 표정, 손짓, 몸짓으로 표현을 두드러지게 했다. <서 있는 누드 소녀>는 여동생 게르티를 모델로 한 것들이고, <에로스>은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다.

표현주의를 지극히 개인적으로 변형시킨 오스카르 코코슈카
코코슈카는 1906년부터 정물화와 초상화 연작을 그렸으며 초상화들은 심리적 통찰과 그가 모델의 '긴장감으로 가득 찬 폐쇄적인 개성'이라고 일컬은 것을 드러낸 표현으로 유명하다. <한스 티체와 에리카 티체>(1909)는 오스트리아 미술사학자 한스 티체 부부를 그린 것으로 두 사람의 심리적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코코슈카 자신이 해독한 개성의 가능성으로 그 자신의 성찰에 대한 결과이다. 
 

그는 1914년에 그와 알마 말러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대형 알레고리화 중 첫 번째 작품인 <폭풍>을 제작했는데, 이 작품은 <바람의 신부>로도 불린다. 알마가 코코슈카의 왼팔에 머리를 대고 쉬는 장면으로 코코슈카는 알마의 몸을 진주처럼 매끄럽게 묘사한 데 반해 자신의 몸은 거친 붓질로 대조가 되게 했다. 오스트리아 여류 작곡가 알마 말러는 미술 공부를 했고 구스타프 클림트와 가까웠으며, 클림트는 그녀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로부터 작곡을 배운 그녀는 1902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한 뒤 계속해서 작곡했다. 남편 구스타프는 「교향곡 제6번」에서 알마를 음악적으로 묘사했고, 「교향곡 제8번」을 그녀에게 헌정했다. 구스타프가 1911년에 심장병으로 사망한 뒤 알마는 코코슈카와 사랑에 빠졌고, 1915년에는 발터 그로피우스와 결혼했지만, 1차 세계대전 후 이혼했다. 1929년에는 50세의 나이로 유대계 독일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1890~1945)과 결혼했으며, 1930년대에 베르펠 부부는 독일을 떠나 전전하다가 미국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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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 미술관 강의 1

귀스타브 쿠르베와 에두아르 마네의 공통점과 차이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77)의 <화가의 화실 The Painter's Studio>은 쿠르베의 작업실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는 한때 그의 작업실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모인 사실을 기록한 회화가 아니다.

<화가의 화실>은 회화적 증언으로 그가 역설하고자 하는 바는 예술가란 오로지 자신의 경험만을 그릴 뿐이고, 모델, 친구, 후원자 등 모든 사람은 예술가의 창조적 충동에 비하면 부차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역사화의 위상을 노동계층에 기반을 둔 저항세력인 새로운 대중으로 전이시킨 이 작품은 젊은 화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83)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마네의 초기 작품 <늙은 음악가 The Old Musician>(1862년경)와 <튈르리공원의 음악회 La Musique aux Tuileries>(1862)는 <화가의 화실>의 왼편 절반, 오른편 절반과 관련이 있다.
<늙은 음악가>는 마네가 자신의 모델들을 무작위로 그린 것이다.
집시소녀, 주정뱅이, 벨라스케스의 회화에 등장하는 현인 모습으로서의 걸인, 장 앙투안 와토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아이의 현존은 심리적으로 잘 엮이지 않는 모델들이지만 마네의 회화적 목적에 따라 한데 모였다.
이는 쿠르베가 <화가의 화실>의 왼편에 모델들을 잡다하게 뒤섞어놓고 타인들로 처리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중요하지 않게 다룬 것과 같다.
반면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에서는 1860년대 초 호화로운 파리를 배경으로 왼편 끝 부분에 친구들과 함께 서 있는 마네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일견 실재를 충실히 묘사한 것으로 보이나, 전체의 구도가 인위적이라는 것을 이내 알게 된다.
<돌 깨는 사람들 Stonebreakers>(1849)에서 보듯 쿠르베에게 사실주의란 인도주의 미술이었으며, 새로운 미술의 탄생을 의미했다. 화가의 주관적 느낌을 무시하고 사물을 보이는 대로 재현함으로써 회화 자체가 사실임을 강조했다. 농민의 시적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의 그림을 그린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와 달리 쿠르베는 화가의 감정을 회화에서 배제했으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에 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재현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주제가 추하거나 저속하더라도 장엄함, 혹은 위엄을 불어넣었으므로 오늘날 우리는 그의 회화에서 당대 프랑스의 생생한 현실을 사진 보듯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회화의 목적을 더 이상 이야기를 전하거나, 성서의 내용, 또는 역사적 사건들을 교육적인 목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나 일시적 환경의 변화를 기록하는 것으로 보았다.
화가의 감정을 전달하지 않은 점에서 마네도 사실주의자로 불리지만 그는 쿠르베와 달리 유지 안료를 캔버스에 직접 칠해 밝은 부분을 얻고 마르기 전에 중간 색조나 어두운 안료를 그 위에 덧칠하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긴장과 동적인 요소를 조장함으로써 쿠르베와 거리를 두었다. 마네는 자의식을 중시하면서 배경을 단색으로 평편하게 했고, 회화를 위해서라면 상상 가능한 것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마네의 <그리스도와 천사 Les Anges au Tombeau du Christ>를 보고 한 번도 천사를 본 적이 없으면서 어떻게 확신에 차서 천사를 자세히 묘사할 수 있느냐고 쿠르베가 비난 한 것이 두 사람 회화의 본질적 차이를 말해준다.
사실주의는 오랫동안 미술의 덕목이었으며 어떻게 재현하는가가 회화의 의제였다. 모더니즘은 재현의 의제로부터 어떻게 회화가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응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재현의 조건이 핵심이 되고 회화가 회화 자체의 주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린버그는 논문 「모더니스트 회화」에서 재현의 의제로부터 재현의 수단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아 새로운 의제로 제기했다는 측면에서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마네를 꼽았다.
마네의 자의식self-awareness은 모더니즘의 근간이 되었다. 그가 살롱에 마지막으로 출품한 <폴리 베르제르의 주점 The Bar at the Folies-Bergere>(1882)은 자의식이 심화되어 나타난 작품이다.
폴리 베르제르 주점은 카페, 카바레, 서커스 공연장이었으며, 입장하는 데 2프랑만 내면 되었다. 1869년에 영업을 시작해 브루주아들이 매춘 장소, 혹은 불륜의 한 쌍이 만나서 즐기는 곳으로 알려진 이곳은 상점점원, 가수, 배우, 댄서, 한량에서 예술가, 작가, 사업가, 은행가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출입했으며, 창녀들의 연령도 다양했다.
마네는 화면 중앙에 선 웨이트리스 쉬종으로 하여금 유니폼을 입은 채 자신의 작업실로 오게 했다. 그는 대리석으로 카운터를 만들고 그녀에게 카운터 뒤에 서서 포즈를 취하게 했다. 꽃과 술병들은 그에 의해 연출되었다. 마네는 쉬종의 가슴에 작은 꽃다발을 달게 하고 관람자를 향해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보게 했다.
<풀밭에서의 오찬(피크닉)>에서처럼 여기서도 모델 쉬종이 관람자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쉬종 뒤 둥글게 구부러진 거울 때문에 오른편에 손님의 모습이 보임으로써 관람자는 자신의 위치가 어정쩡해지고 불확실해짐을 느끼게 된다.
마네가 회화를 시지각적 자아반영으로 파악한 데서 미술품을 순수하게 자아충족적이고 자아반영적인 체험으로 파악하는 미술지상주의가 이후 형식주의 평론가와 미술사학자에게 회화적 자아반영이란 믿음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모더니스트 회화 Modernist Painting」(1960)에서 모더니즘의 역사가 마네로부터 인상주의자들을 거쳐, “자신의 소묘와 디자인이 캔버스의 직사각형에 더 명쾌하게 일치되도록 하려고 정확함을 포기한” 폴 세잔에 이르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평면성이 다른 어떤 미술과도 공유되지 않는 회화의 유일한 조건이기 때문에 모더니즘 회화는 평면성 자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그렇지만 모티프에 집중하고 회화의 고유한 구조를 끈기 있게 현실화시킴으로써 자신이 지각하는 이미지에 견실한 내용을 부여하는 재현의 방법을 발견한 점에서 세잔을 새로운 미술의 근원적 존재로 인식하는 미술사학자들은 근대 회화의 출발을 세잔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이 모더니즘에 대한 합의가 미술사에서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포스트모던의 담론도 모더니즘의 담론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이론에 의해 명확하지 않다.

새로운 회화의 지평 후기인상주의
폴 세잔
<생트빅투아르 산 Mont Sainte-Victoire>에서 보듯이 세잔은 생트빅투아르 산을 그리면서 개개의 집과 불필요한 세부묘사를 생략하고 자연 속에 내재된 기하학적 구조를 각진 색면으로 만들어 화면 전체에 안정적 분위기의 요소가 되게 만들었다. 집과 들판의 기하 형태들을 어두운 색으로 스케치하듯 개략적으로 묘사하면서 뒤편 시골을 수직적 붓질로 청색 나무, 울타리와 함께 녹색과 황토색으로 구분이 되게 했다. 오른편 산 앞에 아치교가 보이지만 이런 눈에 띄는 지형물이 연작에서 점차 생략되었다. 그는 타계하기 전 프랑스의 화가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1868~1941)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연을 원통형, 구형, 원뿔모양으로 다뤄야 하고 모든 것을 원근법 속에 넣어야 한다. 즉 물체와 평면의 각 측면이 한 중심점을 향해 모이도록 해야 한다”는 말로 자신의 목표를 밝혔다.

폴 고갱
<설교 후의 영상: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은 고갱의 최초 걸작이다. 그는 반 고흐에게 이 작품에 관해 “실제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임을 강조했다. 이것은 그가 인간의 생태를 자연현상으로 보는 자연주의로부터 극적으로 떠났음을 고지하며 어느 화가의 것보다 더 과격하게 왜곡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의도적 왜곡은 훗날 출현할 표현주의의 앞선 실험이기도 하다.
자의적으로 사용한 색이 감성적으로 힘 있는 회화가 되게 했음을 본다. 고상한 관점은 시골뜨기 무리 앞에 전개되는 환상적인 장면으로 환상을 통해 은유적인 방법으로 진실에 도달하려는 그의 의도가 읽힌다.
당시 내면의 세계를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가에 관해 화가들마다 접근방법이 다 달랐는데, 그의 방법은 정확하고 완벽했다. 여기서 사용한 밝은 붉은색은 관람자로 하여금 감성적으로 느끼게 해줄 뿐만 아니라 천사와 야곱이 씨름하는 장면을 전면으로 내밀어 그들의 위치가 어딘지 분명하게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사과나무를 대각선으로 구성했으므로 이런 효과가 증폭되었으며 공간이 앞으로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고갱의 작업은 절충적이었는데, 다양한 문화에 출처를 둔 모티프들을 이상한 방식으로 조합했다. <오늘은 장에 가지 않을 거야 Ta Matete>(1892)에 등장하는 매춘부로서의 타히티 여성들의 포즈는 이집트 18왕조 무덤벽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타히티 체류가 그의 양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그가 일본 판화에서 발전시킨 강렬한 색과 브르타뉴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돌 조형물에서 유래한 대담한 윤곽선이 그대로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에 즐겨 그리던 모티프 상당수가 지속되었다.
고갱의 절충주의는 전통을 참조하면서 아카데미 누드화 전통뿐만 아니라 그것의 아방가르드적 전복이라는 전통도 함께 참조한 것이다. 또한 그는 <저승사자>(1892)를 통해 대가들에게 경의를 표했는데, 여기에는 티치아노와 앵그르뿐만 아니라 마네도 포함된다.
여성의 신체를 두고 대가의 지위를 탐하는 경쟁은 20세기에 들어서도 지속되었으며, 마티스, 피카소, 키르히너 등은 <올랭피아>와 <저승사자>라는 이중의 선례와 경쟁해야 만했다. 마티스의 <청색 누드: 비스크라의 기념품 The Blue Nude: Souvenir of Biskra>(1906),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1906~07), 키르히너의 <일본 우산 아래의 소녀 Girl under a Japanese Parasol>(1909년경) 등이 경쟁했다. 그들 모두 부족미술이나 원시적 신체에 대한 환상을 취해 서양 전통 밖으로 나가는 것이 서양 전통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보았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이 타자가 근대 미술의 형식적 변증법에 속해 있었다. 고갱은 회화뿐만 아니라 삶의 영위에 있어서도 새로운 방식을 찾기 위해 타히티로 떠났다. 그러나 자신의 터전과 가까운 장소, 즉 출생지의 전통, 민속미술, 농경문화 등에서도 타자성은 추구될 수 있다. 타자성alterity이란 자기 자신의 관점을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고갱이 타계하기 2년 전인 1901년부터 피카소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이 그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마티스도 <사치, 고요, 쾌락>(1904~05)과 <생의 기쁨>(1905~06)에서 이런 낙원을 표현했지만, 그의 회화는 원시적이라기보다는 목가적으로 나타났다. 마티스도 피카소처럼 1906년에 부족미술을 접했으나 그의 관심사는 주제가 아닌 형식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형식적 관심이 고갱의 회고전이 열린 해에 마티스와 피카소 모두를 고갱에게서 멀어지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회화의 구조적 기초를 다지고자 한 두 사람은 고갱과 오세아니아의 모티프에서 벗어나 세잔과 아프리카 조형물로 관심을 돌렸다.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가 그가 가장 추한 회화로 꼽은 <밤의 카페>는 1888년 9월 아를에서 수채와 유채로 그린 것으로 실재의 장소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표현적인 회화이다. 고갱이 자신이 있는 곳에 도착하기를 고대하면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그린 것으로 그의 정신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 회화이다. 내면의 충동을 고스란히 표현하기 위해 그는 처음으로 과장법을 사용했다. 그는 카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어둠의 힘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감정적 유발을 카페의 “핏빛 붉은색”과 “부드럽고 약한 푸른색”의 대조로 표현하려고 했다. “붉은색과 푸른색을 통해 지독한 인간의 열정”을 나타내려고 했으므로 상징주의 회화가 되었다.
반 고흐가 20세기 미술에 기여한 것은 자유로운 감정을 폭발시키는 표현주의 회화를 창조한 것이다. 그의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1889년 6월 17~18일)은 높은 데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이지만 실재한 장면이 아니라 상상의 풍경이다. 그의 삶 마지막 1년을 남겨놓고 간질과 싸우며 그린 것이다. 자유로운 감정이 아무런 억제 없이 폭발된 것으로 표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그의 소신이 강렬하게 드러난 회화이다. 그는 이 작품에 관해 조금밖에 언급하지 않았고 또 언제 그렸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회화에서 보는 장소는 생레미의 어느 곳일 수도 있지만 네덜란드의 그의 고향 누에넨의 풍경일 수도 있는 것이 네덜란드의 뾰족한 교회 지붕이 보이기 때문이다. 북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고딕 건물이 프랑스 풍경화에 삽입된 것이다. 이처럼 강렬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는 이전에 그린 적이 없었다. 세잔은 입체주의의 선구자로, 고갱은 아르 누보의 선구자로, 반 고흐는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각각 20세기 미술에 원동력이 되었다.

근대 조형물의 출발
<지옥의 문>(캐터린 81)과 관련된 작품들
<지옥의 문>의 일부로서 제작된 186점의 인물상 가운데 많은 작품들이 13세기 피사의 귀족으로 왕권을 노렸으나 적들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아들들과 함께 탑에 갇혀 굶어죽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 33번째의 노래의 소재가 된 인물 우골리노Ugolino Gherardesca 백작을 묘사한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 Ugolino and His Sons>(1881~82)를 포함하여 <생각하는 사람 The Thinker>(1880~81, 1902~04년에 확대), <추락하는 남자 The Falling Man>(1882),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Paolo and Francesca>(1881~84년경), <탐욕과 정욕 Avarice and Lust>(1881~84년경) 등 유명한 단독상의 기초가 되었다.
로댕의 조형물에 나타난 근대성은 시각적 느낌을 묘사한 사실주의이다. 로댕 이전에도 조형물 분야에서 사실주의자들이 있었지만, 로댕은 그가 늘 보여주려고 했던 기술에서 완벽했다. 그는 조형물의 합당한 요소로 부피와 양감, 빈 공간과 융기의 상호작용, 면과 윤곽선의 율동적 표현, 개념의 통일성을 꼽았다. 후대의 많은 조각가들은 조형적 가치 기준에 적합한 감각을 조형물에 도입한 사람으로 로댕을 꼽는다.

빛과 운동에 매우 민감한 메다르도 로소
로댕의 시대에 그의 진정한 경쟁자는 이탈리아 조각가 메다르도 로소Medardo Rosso(1858~1928)였다. 생애 대부분을 파리에서 작업한 로소는 로댕에 비해 인상주의에 가까웠으며, 사회적 사실주의자였다. 그는 일상의 모습을 포착하면서 인상주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일견에 본 것 같은 장면을 재현하면서 사실적 묘사에서 벗어나 오로지 형상화된 표면만을 처리했다. 그가 진흙 모델을 석회로 형을 뜬 후 왁스를 입혔으므로 인상주의 회화에 비해 더욱 적극적으로 표면의 감촉에 반응할 수 있었다. 1884~85년 파리의 달루에 있는 작업실에서 작업하면서 그는 종종 로댕을 만났고 그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로댕의 <발자크의 머리 Head of Balzac>(1897)와 로소의 <아파트 관리인 The Concierge>(1883~84)을 비교하면 로댕에 비해 로소가 빛과 운동에 매우 민감했음을 알 수 있다.
<황금기 The Golden Age>(1886)는 부드러운 왁스에 잠긴 것 같은 특성을 지닌 조형물로 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행복한 순간을 보여준다. 사실적 재현에서 벗어나면 얼마나 표현을 강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좋은 예이다. 그는 인상주의와 고전주의 사이에서 절충주의를 선택했다. 절충주의eclecticism란 자유로운 선택과 자신의 양식 이외의 다른 양식들을 혼합하는 장식을 의미한다. 양식을 먼 시대에서 빌려오는 것과 동시대에서 빌려오는 것은 윤리적으로 표절의 의미에서 차이가 있지만, 차용한 양식을 완전히 소화했다면 그 근원은 미학적 측면에서 별 무리가 없다.

아라베스크에 힘을 실은 앙리 마티스
마티스가 조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899년부터였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서 조형물을 제작했다”고 했지만, 조형물을 매우 진지하게 다뤘다. 아라베스크는 채색한 플라스터 조형물 <마들렌 I Madeleine I>(1901)(내서 83)에서 과장되게 나타났다. 이런 표현주의 경향은 그의 회화 <파란색 누드 습작 Nude Study in Blue>(1899~1900)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그가 평생 추구한 점이다.
아라베스크는 1909년과 1929년 사이에 제작한 ‘등 The Backs’ 연작(1909~29)에서 절정을 이뤘다. 이 연작은 릴리프이지만 그의 조형물 양식의 발전을 요약해준다. <등 I>의 벽에 기댄 여인의 누드 형상은 조형물 장르의 일반적 규범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낯선 자세로 사실주의적이다. <등 II>에서는 등에 살을 붙이는 방식과 배경처리방식 사이의 구별이 모호해지다가 <등 III>에 가는 형상이 지지체support의 경계 부분에서 합쳐지다시피 하여 극적으로 단순화된다. 팔다리가 경직된 몸체로 바뀌고, 머리카락의 기다란 꼬리 모양은 머리에서 내려와 위를 향해 거꾸로 뻗은 다리와 조화를 이룬다.

격정적인 낭만주의를 고전적 절제와 감성으로 조절한 아리스티드 마욜
<밤 Night>(1902~09년경)과 <지중해 연안 주민 The Mediterranean>(1902~05)은 그의 대표작으로 미동하지 않은 채 생각에 빠진 여인의 모습으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교된다. 마욜의 누드는 자족적이고 닫힌 형태로 나타나며, 대부분의 조형물이 <지중해 연안 주민>의 변형이다. 그의 누드는 다른 포즈를 취하지만 본질적은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누드는 아무런 심리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고, 쉬는 자세가 암시하는 것은 고요한 생각 외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고딕 미술의 정신을 내면화한 빌헬름 렘브루크
<올라가는 젊은이 Emporsteigender Juengling>(1913)는 20세기 조형미술에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극도로 길게 만들어진 사지는 정신적 큰 걸음을 의미하며 주변 공간을 걸음 폭 안으로 끌어들인다. 조형물 표면의 처리를 통해 표현이 강렬한 작품이 되게 했다. <올라가는 젊은이>는 자화상과도 같은 미술에서의 구도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렘브루크는 물성에 영혼을 삽입했다. 로댕의 인물상이 욕망을 갈구하는 데 반해 그의 인물상은 정신을 구현한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로 돌아온 렘브루크는 전쟁에서 충격을 받아 <엎드린 사람 Der Gestürzte>(1915~16)을 제작했다. 절망과 인생의 권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 조형물에서 그는 극적 추락이 아닌 쓰러지기 직전의 고요한 순간을 모티프로 전쟁에 대한 절망을 표현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쟁 이전부터 우려한 연합군의 적대적 포위상황이 현실로 다가오자 전쟁이 불리한 상황에 처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낭패감이 이 조형물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마티스로부터 마욜과 렘브루크로 이어지면서 예술가들은 단순화와 왜곡을 통해 표현적인 조형물들을 제작했다. 단순화한다는 것은 추상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왜곡은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20세기 조형물은 이들 선구자들로부터 출발하여 더욱 더 단순화되며 표현 또한 더욱 심화된다.

극단적 단순성으로 20세기 최고 거장이 된 콘스탄틴 브랑쿠시
아프리카 조형물을 미술품으로 진지하게 논의한 최초의 책 『니그로 미술 Negerplastik』이 출간된 것은 1915년으로 독일 미술사학자 카를 아인슈타인Carl Einstein(1885~1940)에 의해서였다. 아인슈타인은 아프리카 조형물을 민족지학적ethnographic 인공품이 아닌 미학적 측면에서 다룬 최초의 인물로 알려졌다. 방대한 도판과 함께 새로운 견해를 개진한 『니그로 미술』은 당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으며, 최초로 20세기 미술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제공했다.
브랑쿠시는 원시적인 힘과 정신적인 질서를 연결시키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뛰어났으며, 이를 정확한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한 것이 <키스 The Kiss>(1907~08)이다. 그가 1910년에 제작한 <마이아스트라 Maiastra>는 유사한 유형의 조형물 중 최초의 작품이다.
<포가니 양 Mademoiselle Pogany>(1913)과 같은 초기 작품들은 정형화되어 있으며 아르 누보의 영향도 엿보인다. 그의 형태에 나타나는 특징은 물질의 속성으로서의 보편적 조화로 이는 형태가 성장의 과정에서 물리적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매끈한 마감처리는 <공간의 새 Bird in Space>(1928) 연작에서도 발견되며, 이런 유형의 조형물들은 처음에는 1923년에 대리석으로 제작되었고, 1924년에는 광택을 많이 낸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섬세하게 길게 늘인, 깃털 같은 형상은 새의 몸체이기도 하고, 넓게 펼친 날개이기도 하며, 가벼운 비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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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m(121~80)는 선량한 황제 안토니무스 피우스Antonimus Pius의 의붓자식으로 황제는 그의 아저씨이면서 장인이었고, 그는 161년에 그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명상록Meditations을 출간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니었는데 명상록에는 시민들을 위한 황제의 짐스러운 의무들이 잔뜩 기록되어 있다.
그의 외아들 콤모두스Commodus는 나중에 못된 황제들 가운데 가장 못된 황제가 되어 아비와 비교가 되었으며, 스토익주의의 간판스타 아우렐리우스는 자식을 교화시키지 못한 과오를 남기고 말았다.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인들을 처벌했는데 그들이 국교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으며, 그는 정치적으로 국교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고, 종교를 이용하면 군인들을 다스리기가 아주 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기독교는 지하세계에서 빠르게 교세를 넓혀나갔으며 교세가 날로 번창하자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누이가 세례를 받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아울레리우스는 조용한 시골로 은퇴하고 싶어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의 명상록 일부는 근무 중에 쓰여진 것인데 지나친 업무가 그의 명을 재촉하고 말았다.

에픽테투스는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땅에 속하는 육체를 가진 죄수들이라고 주장했으며 아울레리우스는 "너는 육체를 가진 작은 혼이다"고 했다.
그는 제우스 신도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없겠지만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신성 일부를 주었다면서 신은 인간의 아버지이고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기 때문에 "나는 아테네의 시민이다"라고 말하든가, "나는 로마의 시민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나는 우주의 시민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제우스 신이 통치하는 우주 정부의 시민임을 자각하라고 가르쳤다.
에픽테투스는 "군인들은 시저Caesar 위로 누구도 있을 수 없다고 맹세하면서 그에게 충성을 표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먼저 존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적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 그들과 마찬가지로 예정론을 펴면서 우리는 인생이란 드라마에서 배역을 맡은 배우처럼 신으로부터 각각 배역을 부여받았으며 배역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각자의 배역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마치 연극 연출가가 배우들에게 하는 상투적인 말처럼 들린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자신은 디오게네투스Diogenetus로부터 마술사들한테 귀를 기울여서는 안된다고 배웠으며, 루스티쿠스Rusticus로부터는 시를 써서는 안된다고 배웠고, 섹스투스Sextus로부터는 꾸밈이 없는 엄숙함을 배웠으며, 문법을 가르친 알렉산더로부터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문법을 교정하는 것을 배웠고, 플라톤을 지지한 알렉산더로부터 언론에 응답하는 것을 지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으며, 그리고 의붓아버지로부터는 소년들과 동성애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혼이 불멸하다는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인들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순간 네가 죽을 수 있는 것이니 너는 너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피도록 하라."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인생을 아울레리우스는 선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조화는 신의 뜻에 우리가 복종할 때 가능하다고 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City of God>에 나타난 내용의 일부를 그가 주장한 것이다.
그는 신이 사람에게 특별한 마귀를 보내 사람들로 하여금 마귀를 따르도록 했다고 했는데 이런 주장은 기독교에서 사람을 인도하는 천사로 나타났으며 예수가 사망한 후에는 성령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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