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4
기원전 6세기는 인류가 사춘기에 접어든 시기였다.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를 의식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Zoroaster(차라투스트라, BC 630?-553?), 탈레스Thales(?-?), 그리스 최초의 철학학파 Miletos학파(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BC 610-546, 만물의 근원은 eternal, 水地火風), 아낙시메네스Anaximenes(BC 585?-525, 만물의 근원은 air, 영혼은 공기)), 피타고라스Pythagoras(BC 582?-497?), 이사야Isaiah(?-?), 석가모니(BC 563?-483?), 노자(?-?), 공자(BC 551-479) 소크라테스Socrates(BC 469-399), 플라톤Platon(BC 428-348),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BC 384-322) philosopher와 sophist의 차이
서양 사상의 양대 산맥
동양에서 도교와 유교, 즉 노자와 공자의 사상이 두 개의 산맥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이 서양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산맥이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보다 41살 어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만이 진정한 철학자로 칭송했다. 기원전 387년경 41살 때에 아테네 근교에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설립하고 교육에 이바지했는데, 아카데메이아는 대학의 효시이다. 두 번이나 시칠리아 섬을 방문하여 시라쿠사의 참주tyrant(tyranny전제정치)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 이상정치를 실현시키려고 했으나 좌절되었다. 공자도 같은 경험을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였다.
플라톤의 생애는 아테네의 쇠퇴기와 함께 하는데, 기원전 431-404년에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은 민주정치를 대표하는 아테네와 과두정치oligarchy(소수지배)를 대표하는 스파르타의 정치체제의 싸움이기도 했다. 아테네가 패해 스파르타의 조종을 받은 30인의 참주(대게 귀족) 독재체제를 맞이했다. 그 후 민주주의가 부활되었지만, 이 체제 하에서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에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501명의 시민 재판관이 1차 재판에서 280:221로 2차 재판에서 360:140으로 사형을 결정지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실망을 느낀 플라톤은 아테네를 떠나 메가라, 이집트, 남이탈리아, 시칠리아 선 등을 13년에 걸쳐 여행했다. 이 여행에서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학파에 유입된 신비주의 사상인 오르페우스교의 영혼윤회설, 영혼의 정화, 해탈 등이었다. 에게해 사모스 섬 태생으로 탈레스의 주선으로 이집트로 유학을 떠나 23년 동안 수학하고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이집트가 함락되자 포로로 바빌론으로 이송되어 12년을 보낸 피타고라스는 56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크로톤 섬에 학술연구단체이면서 수도원 성격을 띤 최초의 철학공동체를 설립했다. 그는 영혼의 윤회사상을 가르쳤으며, 채식주의를 추구했고, 백색의 옷과 담요를 사용했다. 그의 종교적 교의는 윤회와 사후의 응보로서 동시에 인간과 동물과의 유사성을 강조하여 육식을 금했다. 이론에 있어서는 음악과 수학을 중시했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사상을 기록하는 것을 금했으므로 그의 업적이 그 자신의 것인지 초기 제자들의 것인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로 보았으며, 그가 말한 자연수는 기하학에서의 점과를 대응시켰다.
플라톤의 철학에는 영혼이 동경하고 추구해야 할 실재로서 선험적인 이데아의 세계가 전제된다. 그의 이데아론은 종교적이다. 그는 만물이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하여 존재하는 것을 보고 인간의 인식활동이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를 관조하는 것으로 보았다. 영혼윤회설과 관련하여 하인이 기하의 문제를 푸는 것을 예로 들었다.
이데아 세계, 동굴 속의 인간, 철학자의 역할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ahnes(BC 450?-388?)가 『구름 Nephelai』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을 조롱하자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적인 공화국에서 사람들을 오도하는 예술가를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마케도니아의 작은 도시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필리포스Philippos 대왕의 아버지 아민타스 2세Amyntas II의 주치의였다. 기원전 368년 아리스토텔레스는 17살의 나이로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44살 많음)이 타계할 때까지 아카데메이아에서 공부하고 플라톤이 타계한 뒤에는 소아시아와 레스보스 섬으로 가서 5년 동안 지냈다.
기원전 343년 41살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의 초청을 받아 13살 된 그의 아들 알렉산더(356-323)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는 알렉산더가 16살 될 때까지 가르쳤다. 49세에 아테네로 돌아온 그는 리케이온Lykeion 학원을 설립하고 연구 및 교육활동을 전개하면서 자신의 재산 외에도 알렉산더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도서관을 설립하고 또한 세계 각처의 식물, 동물로 박물관도 설립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정원사, 사냥꾼, 낚시꾼으로 하여금 모든 종류의 식물, 동물 표본을 스승에게 보내도록 했다. 그뿐 아니라 스승을 위해 158종에 달하는 각국의 헌법도 수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알렉산더 대왕이 6월에 열병으로 타계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질 것을 우려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이때 그는 아테네 시민이 두 번 다시 철학에 죄를 짓는 일을 되풀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피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 322년에 에우보이아의 칼키스에서 지병으로 62해의 생을 마감했다.
주로 시문학을 다룬 『시학 Poetica』은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플라톤에게 예술의 존재 의의는 윤리적인 삶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므로 그에게 심미적 비평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윤리적 척도는 미적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는 예술을 인간 활동으로 보고 예술과 인간의 정신활동 관계를 중시했으며, 예술의 토대로서의 삶을 중시하고 모방이 인간의 고유한 본성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인간의 능력을 신장시키는 삶의 기능임을 강조했다. 현실을 모방하는 예술가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있어야 할 이상을 표현하므로 예술가의 모방은 결코 복사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예술 창작에서 지적 요소를 강조하고 규칙이 없는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창작과정은 이해할 수 있으며, 통제가 가능하므로 플라톤과 달리 신비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예술과 자연의 밀접한 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자주 인용되었다. 그는 『시학』에서 “모방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것이며,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도 그가 가장 모방을 잘 하고, 그의 지식도 모방에 의해 획득되는 데 있다. 모방된 것에 대해 인간이 희열을 느끼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고 했다. 그는 불쾌감을 주는 대상이더라도 매우 정확하게 묘사해놓은 데서 사람들은 쾌감을 느낀다면서 그 이유는 배움이 최상의 즐거움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림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것은 봄으로써 배우기 때문인데, 그림을 통해 사물을 추론해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예술의 소재가 현실이고, 현실을 모방하기 위해 예술은 재현, 혹은 재생산한다고 보았다. 예술의 기원을 그리스의 희비극 드라마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은 현실의 모방이었다.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더라도 현실 그 자체가 될 수 없는 까닭은 예술가가 자신의 개성과 감정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주관이 표출된다는 점에서 예술의 특징은 표현에 있으며, 사람들이 작품에서 특별한 감동을 맛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를 미적 체험aesthetic experience라고 하며, 이런 감동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katharsis라고 하며 감정을 정화시켜 인간성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에서 얻어지는 효과로 말한 카타르시스는 미적 체험을 일컫는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시인 릴케는 고대의 아폴로 토르소가 감상자에게 “당신은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을 걸며 새로운 삶에 대한 결단을 촉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사람은 미적 체험을 통해 일상을 풍요롭게 가꾸어나간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이 자연을 모방한다”고 한 말에 대해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1854-1900)는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말하여 예술이 오히려 영향력이 있음을 강조했다.
예술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테크네techne이며 기술이란 뜻이다. 테크네는 숙련된 모든 제작을 의미했으며, 건축가뿐 아니라 목수와 직조공의 작업까지도 포함되었다. 그리스인은 테크네를 인지가 아니라 제작이며, 영감보다는 기술에 의존하고 일반 규칙을 따를 경우 자연과 대립되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재주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예술에서 기술을 우선적인 것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도 예술을 자유로운 예술과 신체적 노역을 요하는 예술로 구분하고 노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유로운 예술을 더욱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예술이 자연물의 모방, 혹은 사물의 재현이어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인의 사고는 서양 사람들에 의해 계속 존중되어 왔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실험정신을 가진 피카소조차도 완전 추상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모방으로 번역되는 미메시스mimesis는 또한 ‘재현’, ‘묘사’, ‘표현’ 등의 의미를 지닌다. 미메시스의 개념이 음악과 무용을 지칭한 동사에서 유래했으므로 ‘음악과 무용에 의한 재현과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메시스는 첫째, 사람이나 동물의 행위에 대한 흉내내기miming, 둘째, 흉내내지 않고 모방하기imitation, 셋째, 물질로 사람이나 사물을 복제replication하기이다. 소크라테스는 미메시스를 사물의 외관을 복제하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회화와 조형물에 적용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진정한 미메시스란 단순한 외관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 그 자체, 즉 이데아idea를 모방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를 사람의 본능이며, 현상 혹은 보편성을 아는knowing 즐거움을 얻는 주요 수단으로 보았다. 실재를 모방한다는 플라톤의 예술론은 개념과 정신을 중시한 현대 추상과 맥이 닿아있고, 이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은 외적 모방을 거부하고 내적 표현을 중시한다. 이는 추상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 카지미르 말레비치, 피트 몬드리안의 추상 모두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현상 혹은 보편성을 모방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론은 재현을 중시하는 예술가들의 작업과 맥이 닿아있다. 19세기에 예술과 실재의 관계가 사실주의에 대한 논의로 다시금 재연되었다.
아름다움은 추상적인 개념이며, 예술이 구체적이며 명확하게 아름다움을 규정한다. 자연을 통해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있고, 예술을 통해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있다. 예술을 통해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것이 미학의 과제이다. 아폴로 선장은 달 가까이서 지구를 바라보며 “신의 눈으로 지구를 바라보았다”고 했는데, 태초에 신이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고 보기에 좋았더라”는 성경의 구절을 상기하게 한다.
예술을 기술에서 분리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의미로 순수예술fine art(beaux arts)이란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1880년대에 시작된 자연주의에 반동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내용을 강조하느냐 형태를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미술품은 두 가지 범주로 분류되는데, 정신적인 의미를 강조한 상징주의자들이 내용을 강조한 데 반해 정신적인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회화적 언어를 새롭게 하는 것을 우선시한 후기인상주의자들은 형태를 중시했다. 두 경향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19세기 말의 10여 년과 20세기 초 10여 년에 미술은 급속히 추상화되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 추상 화가들은 선언문, 성명서, 카탈로그 서문, 소책자, 혹은 내용이 풍부한 저작들을 통해 자신들의 목표를 널리 알리고 이해시키려고 했다. 다양한 담화 형식의 방대한 생산량은 단지 전술적이거나 교훈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해명하려는 욕구와 조형창작에 따른 개념적 실험의 요구가 섞인 노력의 증거였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시작해 10여 년 동안 그 정체성을 확립한 추상을 허버트 리드는 『아트 나우 Art Now』(개정판 1948)에서 “관례적으로 미술품이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예술가의 지각에서 출발했더라도 더 이상 대상에 기반을 두지 않고 독자적·일관적·미학적 총체를 만들어 나가는 모든 미술품을 우리는 추상이라 칭한다”고 규정했다.
앨프레드 H. 바는 『입체주의와 추상 미술』(1936)에서 추상 미술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바실리 칸딘스키를 꼽았다. 완전 추상을 거부한 피카소가 창조한 입체주의에서 추상의 두 주요 경향이 발생한 것이 흥미롭다. 특기할 점은 피카소와 브라크의 많은 입체주의 회화가 실제 모델을 사용해서 제작된 것들이 아니란 점이다. 소재에 대한 피카소와 브라크의 태도는 열정적이라기보다는 유희적이었고, 두 사람의 관심은 자신들의 회화적 언어에 집중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쇠라와 세잔을 본받아 작품이 회화로서의 속성과 힘을 지니려면 사물과 배경이 화면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의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재현과 추상의 문제가 처음 부각되었다. 입체주의가 젊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창작의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현실세계를 모방해야 한다는 의무를 버려도 되는 자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 위한 새로운 조형언어와 이의 구성을 모색할 수 있는 자유였다.
특기할 점은 기하학적 추상과 칸딘스키의 비정형 추상을 적대적 양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레비치의 추상은 기본형에 의거하므로 비개성적이며 근대적으로 보이더라도 몬드리안과 마찬가지로 그는 신비적 사색에 이끌렸으며, 물질을 찬양하기보다는 그에 대한 해답을 주고자 했다. 그는 물질세계를 상상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심층세계를 가리는 겉모습에 불과하다고 보았는데, 이는 자연의 한계를 초월하여 완전을 지향해야 한다는 그리스인의 사고와 같다. 칸딘스키의 미학은 표면적으로는 말레비치와 몬드리안의 것과 상이해 보이지만 상당히 유사한 기반에서 이루어졌다. 세 사람 모두 신지학에 심취했으며 칸딘스키는 말레비치와 마찬가지로 미술을 형태와 색을 통한 감각의 소통으로 보았다.
신지학theosophy은 보통의 신앙이나 추론으로는 알 수 없는 신의 심오한 본질이나 행위에 관한 지식을, 신비적 체험이나 특별한 게시에 의해 알게 되는 철학적ㆍ종교적 지혜 및 지식을 말하는데, 동서양의 여러 종교와 철학을 결합한 초자연적이면서 혼합적 사조로 20세기 초에 성행했다. 신지학은 1875년 뉴욕에서 신지학협회의 창립을 계기로 근대적 제의가 되었다. 우주가 본질적으로 정신적이라고 믿은 신지학자들은 겉으로 보이는 세계의 혼돈의 근저에 깊은 조화가 내재하고 있다는 자신들의 사상이 유물주의적 서양 세계에 정신의 부흥을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믿었다. 훗날 신지학은 병든 이성주의로 비판을 받았다.
칸딘스키의 회화가 자유롭게 흐르고 감성적인 추상인 데 반해 몬드리안의 회화는 엄격하게 기하학적 추상이었다.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서 추상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설명을 공식화하면서 예술가가 외관이라는 바깥 껍질을 넘어설 수 있다면 “보는 자의 영혼을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색을 꼽으면서 색에는 정신적 울림이 있으며,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울림과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1913년 오페라 「태양에의 승리」를 위한 의상과 무대디자인에서 입체주의의 특성을 보였는데, 배경 중 하나가 대각선으로 분할되어 검은색과 흰색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사각형으로 말레비치는 절대주의suprematism라 명명했다. 사각형에 대한 말레비치의 집착은 사각형과 틀 모두를 의미하는 라틴어 쿼드럼quadrum이 입증하는 것처럼 경계를 만드는 가장 단순한 기하학적 행위에서 나온 결과였다. 또한 그의 작업은 사각형의 형상과 회화의 배경을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절대주의 회화는 그에게 순수 회화에 대한 절대적인 진술이며 동시에 정신적인 것에 대한 도약이었다.
말레비치는 선언문에 “회화에서 자연의 일부, 마돈나, 누드의 부끄러움을 의식하면서 보려는 습관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순수한 회화 구성을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예술가와 자연의 형태를 묶어놓은 사물들의 지평선으로부터, 또 사물들의 집단으로부터 나 자신을 끌어내 형태를 무가치한 것으로 변형시켰다. 우둔하고 창조력이 부족한 예술가들만이 미술을 성실함으로 보호한다. 미술에는 진실이 필요한 것이지 성실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물들은 새로운 미술문화 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진다. 미술은 창조의 자기 목적적 방향으로, 즉 자연의 형태를 지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대중과 평론가들이 그의 절대주의 회화를 조롱하고 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레비치는 즉각적으로 많은 추종자들을 얻기 시작했다. 일 년 후 절대주의는 이들 예술가들 사이에서 가장 유력한 미술운동으로 부상했다. 1918년경에 다음과 같은 보고가 있었다. “절대주의는 모스크바 전역에서 꽃을 피웠다. 간판, 전시회, 카페 모든 것이 절대주의다. 우리는 확신을 갖고 절대주의가 도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절대주의 영향이 칸딘스키의 회화에 나타난 것은 기하학적 형태를 사용하기 시작한 1920년이었다.
말레비치는 논문 「비대상 세계」(1926)에서 “절대주의자는 가면을 쓰지 않은 진정한 미술에 도달하기 위해, 또 이런 우월한 관점에서 순수 예술적 감각을 통해 삶을 조망하기 위해 주변 환경의 사실적인 재현을 의도적으로 포기했다”고 밝혔다. 절대주의 회화를 구성한 기본 요소는 직사각형, 원, 삼각형, 십자가형이다. 말레비치는 ‘가장 순수한’ 형태가 정사각형이라고 믿었다. ‘순수 감성’을 표현한 회화는 <흰색 바탕에 흰색 정사각형 White Square on a White Ground>(1918) 연작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사각형이 약간 기울어져서 관람자가 그 적나라한 단순성을 인지하고 기하학적 형상보다는 유일무이하고 총체적인 유일자로 해석하기를 바랐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한 말레비치는 십자가의 형태와 동정녀의 순수성을 나타내는 흰색을 추앙했다. 그는 1918년에 <흰색 바탕에 흰색 십자가>를 그린 뒤 더 이상 그릴 것이 없어 회화를 그만 두었다. 말레비치가 1935년에 타계한 후 그의 시신은 레닌그라드의 예술가연맹에 공식적으로 안치되었으며, 그의 머리 위 벽에는 단순한 형태의 <검은 사각형>이 걸렸다. 며칠 후 그의 유해는 정면에 검은 사각형이 그려진 흰색 사각형의 묘석이 있는 무덤에 묻혔다. 말레비치와 그의 동료들에게 이 회화는 성상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다.
영성의 체험을 추구한 바실리 칸딘스키의 추상
1910-13년, 칸딘스키의 회화는 색이 매우 화려하고 풍경의 재현은 점점 희미해지며, 인물, 건물, 산 등의 형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재현의 형태라기보다는 기호의 기능을 한다. 그는 연작을 통해 선명치 않은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완전 추상으로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회화가 단순히 장식물에 지나지 않을 위험을 알고 추상 속에서 영성을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화가의 임무는 형식을 다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내용에 맞추는 데 있으며, 이를 통해 정신을 단련하는 것으로 보았다.
<인상 3-콘서트 Impression III-Concert>(1911)는 칸딘스키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콘서트를 다녀와서 음악회에서 얻은 청각적 체험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것으로 콘서트홀의 분위기와 음악에 대한 상징을 형태와 색으로 나타내면서 청각적ㆍ시각적 인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검은색 면은 무대 위에 있는 그랜드피아노이고 왼편 여러 개의 작은 검은 곡선들은 무대 가까이서 음악을 듣는 청중이다. 파리의 퐁피두센터에 소장되어 있는 두 점의 연필 스케치 습작을 보면 무대 가까이에 사람들이 앉아 있고 왼편 벽에 사람들이 서 있다. 스케치에 피아노가 흰 기둥 옆에 있지만, 여기서는 피아노가 중앙에 있고 기둥은 양편에 있다. 두 흰 기둥은 실제 기둥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소리를 기둥으로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즉흥>ㆍ<구성>ㆍ<인상>
칸딘스키의 <즉흥> 연작에서 인물, 건물, 산 등은 불분명하더라도 그 형태가 발견되며, <구성> 연작은 <즉흥>에 기반을 두고 계획적으로 확장시킨 작품들이다. <인상> 연작은 “외부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제목이다. 칸딘스키는 1913년 『슈투름』지에 기고한 글에서 ‘인상’, ‘즉흥’, ‘구성’을 규정했다.
1. ‘인상’은 외부 자연으로부터의 즉각적인 느낌이다.
2. ‘즉흥’은 무의식적이며 자연발생적이고 내재적이며 비물질적인 전체의 특성을 지닌 표현이다.
3. ‘구성’은 장기간의 작업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며 현학적인 면모마저 지니는 내재된 느낌의 표현이다. 여기서는 이성, 의식, 확실한 목표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이 역시 계산이 아닌 느낌에 의해서 이뤄진다.
칸딘스키는 풍경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수평선을 절제했다. 산이 있는 경관이 그로 하여금 수평선을 깨고 사선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이는 화면 전체 공간에 영향을 미쳤다. 수평적 구도를 버린 것이 흥미로운 혁신을 가져다주었다. 선과 색이 독립적 존재로 선택되기 시작했다. 선이 분절되어 역동성을 창조하거나 화면에서 리듬으로 나타났고, 색이 독립적 형태가 되어 불확정적 공간에 떠 있게 되었다. 사물과 풍경은 더 이상 외부의 빛을 받지 않으며 색 자체에서 발광했다. 구성은 모든 부분들을 결합하는 힘으로서 중요해졌다. 그가 1913~14년에 제작한 많은 회화에서 특정한 대상의 모습들이 배제되고 있음을 본다. 이런 회화는 기하학적 추상화와는 구분되며 추상에 이르는 또 다른 과정을 보여준다. 그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여 진전시켰는지 그의 체험에서 알 수 있다.
“스케치하다가 돌아와, 생각에 빠진 상태로 작업실 문을 여는 순간, 예기치 않게 묘사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운 회화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리둥절해서 멈춘 채 그것을 보았다. 회화에는 주제가 없었으며 알아볼 만한 사물도 없었고, 전적으로 밝은 색의 자국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마침내 나는 가까이 다가가 보고 그때서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내 회화의 공간을 구상성, 즉 사물을 묘사하는 것으로 채울 필요가 없다. 오히려 내 회화에 해로울 뿐이다.”
<무제 (첫 추상 수채화) Untitled (First Abstract Watercolor)>는 미술사에서 최초로 완전 추상에 도달한 작품이다. 제작년도가 1910년으로 적혀 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191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1913년 이전에 그가 제작한 회화에서 추상의 과정이 나타나는데, 유추할 만한 자연의 잔상들이 어렴풋이 남아있어 1913년 이전에 그가 완전 추상을 성취했다는 것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제작년도를 속인 사례를 들로네와 레제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누가 먼저 완전 추상에 도달하느냐에 대한 지나친 경쟁심에서 그런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무제>는 회화를 자연의 재현으로 본 서양의 오랜 관념을 깨뜨린 작품이다. 이는 인간의 눈과 이성으로 대상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새로운 시각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비재현적 방법, 즉 추상만으로 가능하다는 새로운 회화적 제안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칸딘스키는 회화의 의미를 심리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으로 고찰했다. 그는 색이 관람자에게 미치는 효과로서 파란색은 천상의 색이고, 녹색은 기쁨, 슬픔, 열정 가운데 어느 것도 지니지 않은 평온한 색이며, 노란색은 저돌적이고 활동적 색이란 점을 들었다. 조르주 쇠라와 마찬가지로 그는 색을 선적인 방향과 연관시키며 색이 형태를 가진다고 말했다. 그는 형태와 색의 조합이 내적 표현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오르피즘 혹은 오르페우스적 입체주의
1910년까지 추상은 무르익어 갔고 여러 나라에서 동시적으로 진전되었다. 개별 선구자에 이어서 곧 추상 미술 그룹과 운동이 뒤따라 등장했다. 그 최초의 것들 가운데 프랑스에서 일어난 오르피즘Orphism(동시대비)과 싱크로미즘Synchromism(동시발생주의)이 있다. 오르피즘은 1911년 말부터 1914년 초까지 파리에서 일어난 순수 회화를 추구한 경향으로 비재현적 색채 추상을 의미했다. 아폴리네르는 순수 회화와 오르피즘을 동의어로 사용했다.
오르피즘에 먼저 도달한 사람은 들로네와 레제보다 연장자인 프란티셰크 쿠프카(1871~1957)였다. 1895년 이후부터 파리에 거주한 쿠프카는 빈 아르 누보의 경로를 거쳐 추상에 도달했다. 그는 1911년 말 순색이 빚어내는 대비와 율동의 힘을 보여주는 <뉴턴의 원판들 Discs of Newton> 연작에서 완전히 비자연주의적 구성을 이룩했다. 여기서 구심점인 색의 형태들이 빛의 에너지처럼 파동의 형상으로 퍼져나가 삼투하고 있음을 본다. 그는 자연주의 영상과 추상적 형상, 선, 혹은 색의 특정한 상징들을 통해 신비적 직관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는 일정량의 주제를 갖고 연속적으로 탐구함으로써 독자적인 형태를 발견했다. 운동을 영상화하는 데 관심이 많은 그는 공간에서 회전하는 물체의 운동과 잇달아 일어나는 지상에 기반을 둔 운동들을 탐구했다.
들로네는 분석적 입체주의의 자유로운 기하학적 형태들을 차용하여 이를 역동적인 색 표현에 중점을 둔 회화에 힘과 극적인 요소를 부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에펠탑 Eiffel Tower>(1910~11) 연작은 색과 형태가 어떻게 개인적인 열정을 표현하면서도 주제를 충실하게 재현하는지 보여준다. <창문 Window>(1912) 연작을 계기로 그의 회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 연작은 스물세 점의 회화와 드로잉으로 구성되었고, 그중 열세 점이 1913년 1월 베를린에서 소개되어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이 시기에 클레가 번역한 들로네의 에세이 「광선」에는 색, 광선, 눈, 뇌, 영혼의 방정식이 제시되어 있었다. 들로네는 1912~13년경에 오로지 색과, 색의 대비로만 이루어지면서도 동시에 어느 순간 갑자기 지각되는 회화적 형태를 생각해내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미셀 외젠 슈브뢸의 과학 용어인 ‘동시대비’를 사용했다.
들로네의 이론과 실제 작품은 색이 단순히 드로잉을 보조하는 장식적 종속물이 아니라 형태를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가 창안해낸 용어인 동시주의Simultanism는 색을 사용하여 화면에 형태를 만들어내고 공간을 암시하는 것이다. 들로네는 쿠프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추상에 도달했는데, “나는 수학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고 영혼의 문제로 고심한 적도 없다”고 했으며, 색을 통해 회화의 모든 측면을 구현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색은 깊이감과 형태 그리고 운동을 부여한다”고 했다.
순수하게 색만으로 회화의 형태와 내용 모두를 전달하려고 한 운동이 싱크로미즘이다. 파리에서 작업하던 두 명의 미국 화가들 스탠턴 맥도널드 라이트와 모건 러셀이 들로네의 오르피즘에서 영향을 받아 진전시켰다. 모건 러셀이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06년이었고, 잠시 동안 마티스의 지도를 받았다. 맥도널드 라이트는 러셀과 함께 색채론을 연구했으며, 1912년경 과학적 색 배치에 바탕을 둔 회화론을 전개했다. 이들이 싱크로미즘이라고 명명한 이론은 들로네의 오르피즘과 유사한 것이다.
새로운 미학의 표출을 위한 데 스테일
추상 미술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소명 내지는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시인으로 나중에 화가이며 건축가가 된 테오 반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1883~1931)는 미술이론에 조예가 깊었고, 칸트와 헤겔 이후 독일 철학의 전통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헤겔(1770~1831)에 의하면 역사는 모순을 통한 점진적인 정반합의 변증법적 단계에 따라 정신Geist의 자의식으로 나아간다. 헤겔에게 사회와 문화의 모든 단계는 이렇듯 자유를 향해 전개되는 정신과 보조를 맞추며 정신의 전개에 기여한 바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도식 안에는 가장 물질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정신적인 것에 이르는 예술의 본성적 위계가 존재한다. 즉 건축부터 시작해 그와 동일한 정도로 탄탄하고 성숙한 단계인 조형물과 회화를 지나 시와 음악에 이르고, 마침내 철학의 순수한 성찰 속에서 절정에 달하는 위계가 존재한다.
반 두스뷔르흐는 1915년에 몬드리안을 알고부터 그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회화에 관한 중요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몬드리안이 1911년부터 1914년에 걸쳐 서서히 추상에 도달한 반면 반 두스뷔르흐는 1916년과 1917년에 추상으로 급속히 전환했다. 1917년 이후의 반 두스뷔르흐의 회화는 몬드리안의 회화와 양식 및 구성 면에서 매우 흡사하여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두 사람은 네덜란드 최고의 젊은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들의 모임 데 스테일De Stijl을 결성했으며, 반 두스뷔르흐는 1917년에 동명의 잡지를 창간했다.
몬드리안의 생각을 좇아서 반 두스뷔르흐는 미술에서 자연과 지성, 혹은 여성적 원리와 남성적 원리,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수평적인 것과 수직적인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데 스테일 그룹의 예술가들은 순수 조형작품을 만들고 이를 대중에게 홍보했다. 그들이 선언한 미적 신조와 양식은 새로운 조형주의, 혹은 신조형주의Néoplaticisme로 알려졌다. 신조형주의에는 두 가지 주요 요소가 있는데, 첫째, 수직선, 수평선에 대한 강조이고, 둘째, 빨강, 노랑, 파랑이라는 근원적인 색이다. 수직선과 수평선은 세계를 형성하는 두 개의 축으로 수평선의 힘은 태양을 도는 지구의 운동경로이고, 수직선은 태양의 중심으로부터 발생하는 광선의 운동이다. 삼원색에 있어서 노랑은 빛의 색이고, 파랑은 하늘이며, 노랑은 빛을 발산하고, 파랑은 후퇴하며 빨강은 떠다닌다.
신조형주의에서 완벽한 정확함에 대한 추상적 이상을 지닌 기계기술은 장인의 솜씨보다 높은 위치에 서게 되고, 주관적 표현은 미술로부터 제거되어야만 했다. 윤리적 면에서 몬드리안은 주관적 개인주의는 모든 단계에서 보편적 조화에 대한 추상적 이상에 종속되어야 한다면서 이러한 보편적 조화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각예술이 미래의 이상향으로 나아가는 길을 마련해줄 수 있다고 보았다.
반 두스뷔르흐는 1924년부터 초기의 신조형주의 원리를 수정하기 시작하면서 요소주의가 조형주의의 지나치게 독단적인 적용에 대한 수정이며 그것의 논리적 발전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직선과 직각으로 엄격하게 제한시키기는 했으나 그는 이제 수직, 수평을 거부하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면을 허용함으로써 더욱 위대한 역동성을 지향하게 되었다.
서양의 위대한 정신을 부활시키려고 한 피트 몬드리안
피트 몬드리안(1872~1944)의 생애는 칸딘스키의 것과 유사하며, 그가 칸딘스키의 뒤를 좇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두드러졌던 두 경향인 자연주의와 상징주의에 이끌렸고, 그 뒤 자연을 자신의 감정으로 충전시켜 구름, 나무, 건초더미, 모래 둔덕 등의 색과 형상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표현주의의 단계를 거쳤다. 그는 종교적 위기를 겪으면서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1861~1925) 및 신지학자들theosophists과 접촉했다. 독일의 신지학협회 회장을 지낸 슈타이너는 후에 인지학협회를 창설하고 예술, 교육, 의학에 이르는 광범한 문화운동을 지도했다. 인지학anthrosophy은 인간의 지혜를 바탕으로 인간의 정신, 육체, 영혼을 인식하고 통찰하여 여러 분야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데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몬드리안은 칸딘스키 못지않게 동양 종교에도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것만이 서양의 위대한 정신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보통사람은 물질적 생명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지만, 예술가는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 ... 그의 창조 작업은 무형의 수준에 자리 잡아야 한다. 즉 지성의 수준에서”라고 했다.
네덜란드의 지방 도시 아메르스포르트는 몬드리안의 고향으로 그가 태어났을 때 빈곤이 만연하고 사람들은 일상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적 광신이 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지역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몬드리안의 아버지도 그런 광신도 가운데 하나였다. 몬드리안은 1892년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급진적인 신교도 모임인 네덜란드 개혁교회에 참여했으며, 종교적 삽화 시리즈를 그렸다. 그는 파리로 가기 얼마 전에 조르주 브라크의 회화를 보고 세부적인 면에서 자신의 작업과 유사한 데 대해 감동을 받았다. 1911년 10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근대미술전 Kunstkring’에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회화를 본 몬드리안은 1911년 말 마흔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바로 전에 파리로 가서 입체주의에 관심을 기울였다. 파리에서 제작한 그의 초기 작품들에 나타난 색은 피카소와 브라크가 사용한 색에 상응하는 회색, 갈색, 검정색으로 한정되었다.
<회색 나무 The Gray Tree>(1911)에서 몬드리안은 사과나무 밭의 무성한 잎과 안개 낀 회색의 대기를 표현했다. 선적 구조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실제 과수원의 풍경과 향기를 상기시킨다. <꽃 핀 사과나무 Flowering Appletree>(1912)에서 색은 더욱 투명해지고 나무의 배치는 부차적이 되었다. 작품의 구성은 중심에서 전개되었다. 그는 <꽃 핀 나무들 Flowering Trees>(1912)에서 더욱 추상화했다. 검은 곡선으로 사과나무 꽃의 흰색과 바탕의 흰색을 구분하기 어렵다. 자연의 형태가 그에 의해서 선의 그물이 되었다. <꽃 핀 나무들>에는 실제 나무의 인상이 일부 남아있어 과수원을 거닐 때 흰 빛이 감도는 분홍색 꽃이 가득한 가지에 시야가 막혀 전제의 조망을 잃는 느낌을 준다.
1912년 이후 몬드리안은 검은 선으로 형태들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나무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Trees>(1912)을 예로 들면 구체적인 대상에서 출발하지만, 이것을 몇 개의 기본선으로 축약하고 축약한 선들을 대상이 놓인 주변의 여러 공간적 요소들과 연결하면서 각각의 형태가 납으로 고정된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틀 지워지게 했다. 이런 사례를 <생강단지가 있는 정물 I Still Life with Gingerpot I>(1911)와 <생강단지가 있는 정물 II Still Life with Gingerpot II>(1912)를 비교함으로써 그의 선들이 어떻게 축약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회화에서 선이 기본 틀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1914년경에 입체주의 원리를 이용해 입체주의자들보다도 앞서 추상으로 나아갔다. 그는 “입체주의는 그 자체의 발견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논리적 결론을 수용하지 않았다. 즉 입체주의는 고유의 목표, 즉 순수 조형 표현을 향해 전진하지 않았다”고 했다. 회화에 대한 그의 개념과 목표는 입체주의자들과 달랐는데, 미학적 금욕주의와 추상 자체를 선호했다.
몬드리안은 그가 추구하는 것이 피카소와 브라크가 가장 두려워하는 추상과 평면성이란 사실을 알았다. 추상과 평면성은 그의 신념 체계의 핵심인 보편성의 범주와 일치했다. 그는 정면 시점을 적용하여 그가 즐겨 사용하는 모티프를 입체주의의 그리드보다 더 엄밀한 직각 형태로 변형하는 방식을 찾아냈다. 그는 모든 것이 공통분모로 환원될 수 있고, 모든 형상은 수평 대 수직의 단위로 이뤄진 패턴으로 디지털화되어 표면 전체에 널리 퍼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회화의 기능은 세계의 기저에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 되며 이항대립으로 이뤄진 것으로 이해된다. 문제는 이런 대립항들이 어떻게 서로를 중립화시켜서 영원한 평정 상태를 이루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몬드리안은 1914년 여름 고향으로 가서 몇 년 동안 지내면서 반 두스뷔르흐와 함께 데 스테일을 결성하고 활동하다가 1919년 여름에 파리로 돌아갔고, 1938년에 런던으로 이주했다. 이듬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공습으로 런던 작업실이 파괴되자 몬드리안은 뉴욕으로 가서 도시의 분절적인 리듬을 표현한 ‘부기우기’ 연작을 제작했는데, 이전의 구성보다 색이 화려하고 끊임없이 활동하는 리듬으로 이루어졌다. 뉴욕이란 도시가 그로 하여금 일관성을 거의 무시하게 만들었다. 그는 늘 자신의 환경에 영향을 받아왔지만 뉴욕은 거리의 형태와 생기발랄한 대중음악을 통해, 특히 이 노화가를 뒤흔들어놓았다. 몬드리안은 오래 전부터 방에 측음기를 기본적으로 설치해놓고 있었다.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Broadway Boogie-Woogie>(1942/43)는 원리상으로는 아닐지라도 양식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의 기준에 의하면 이것은 커다란 그림이며 그때까지 그려온 것들에 비하면 매우 동적이다. 여기서는 다수의 작은 색면들이 신조형주의적 구조로 배열되어 있으나 그 정적인 특성에는 역행하고 있다. 그의 모든 신조형주의 회화는 횡적으로 전개되는 경향이지만, 여기서는 이런 속성이 특히 강해 운동이 왼편과 오른편에 몰려 있으며 중앙 부분은 상대적으로 고요하다.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는 뉴욕의 생기발랄함과 그곳의 음악 박자 감각과 더불어 미국의 크기를 반영한 듯 보인다.
결국 그는 구조주의의 실천가로 출발해 구조주의의 공격자로 변신한 셈이다. 그의 작품은 회화 분야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오른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추상과 비구상화의 여러 부문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또한 외관상으로 그의 회화는 1930년 이후 나타난 대부분의 산업미술과 장식미술, 광고미술의 양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