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 3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툴루즈 로트레크 포스터의 그래픽 양식에서 영향을 받았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회화를 전시하는 것으로 프랑스에 대한 동경이 현실화되었고, 전시된 자신의 작품을 보기 위해 1900년 10월에 때맞추어 친구 카를르 카사헤마스와 함께 파리로 갔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그는 카사헤마스와 함께 12월에 바르셀로나로 돌아갔다. 제르맹 가르갈로와 병적인 사랑에 빠진 카사헤마스는 즉시 파리로 갔고, 1901년 2월에 몽마르트르의 한 식당에서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피카소는 그 해 5월에 파리로 가서 라피트 가 6번지에 있는 앙브루아주 볼라르 소유의 갤러리에서 열릴 첫 개인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898년에 세잔에게 중요한 전시회를 마련해주었던 볼라르는 파리 아방가르드 무대의 유명 인사였다. 피카소는 1904년 4월까지 파리와 스페인을 오가며 여행했고 그때 막대한 양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1904년 파리에 정착하기로 하고 몽마르트르의 값싸고 자유분방한 구역에 작업실을 빌렸다. 몽마르트르는 1880년대에 새로운 카페와 카바레로 자유분방한 생활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물랭 루즈 댄스홀이 1889년에 문을 열었고, 그곳보다 유명하지 않은 여러 카페들이 1900년경에 등장했으며, 유럽 전역에서 야심찬 예술가들이 작업실 임대료가 싼 그곳으로 점점 이주해왔다.
피카소는 로트레크의 영향을 받아 빈곤이나 약자를 주제로 한 감상적이며 우수에 찬 그림을 그리면서 청색시대(1900~04)를 보냈고, 1905년부터 2, 3년 동안은 분홍색과 회색을 주로 사용하여 장밋빛시대를 맞아 부드러운 화풍으로 달라졌다. 장밋빛시대에 주로 다룬 소재는 곡예사, 댄서, 어릿광대 등이었다. 피카소가 마티스를 만난 것은 1906년이었다. 그는 야수주의자들의 회화에서 감명을 받았지만 그들의 장식적ㆍ표현적 색 사용을 따르지 않았다. 니그로시기로 불리는 1907~09년에는 세잔과 아프리카 조형물에 대한 연구를 통해 형태의 분석과 단순화를 축으로 하는 독자적 노선을 추구했다.
피카소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리기 전 앙드레 드랭과 함께 트로카데로 민속박물관을 방문하고 아프리카 가면에서 강한 인상을 받아 “그 가면들을 보고 꼼짝할 수 없었다. 인간이 그 자신과 그를 둘러싼 미지의 적대세력을 중재하도록, 그것들에 색과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공포심을 이겨내게 하는 임무를 띤, 신성하고 마술적인 의도로 제작된 그 모든 물건들. 이는 미적 과정이 아니라 마술의 일종으로, 적대적 세계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우리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공포에 일정한 형태를 부과함으로써 권력을 잡는 방식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던 날, 나는 내가 갈 길을 찾았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날의 인상은 피카소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그가 드랭, 마티스, 브라크에게 아프리카 가면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조형물”이라고 말했을 때 그에게 조형물의 전통 개념은 무너진 것이다. 그는 가면으로부터 미술품을 위한 형식적 해법을 발견했다. 그는 가면이 사람들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의 기하학적 구조를 찬양한 입체주의
루이 보셀이 1908년 9월에 살롱 도톤의 심사위원 중 하나인 마티스와 이야기를 나눌 때 마티스가 브라크가 “작은 입방체가 있는” 작품을 제출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브라크가 그해 여름 프랑스 남부 레스타크(마르세유)에서 그린 풍경화 <레스타크의 집들>을 특징화한 것이었다. 황토색과 녹색 계열의 몇 가지 색으로 축소하고 형태도 훨씬 단순화된 나무가 우거진 언덕 위의 농가는 입체주의의 묘사에 적합한 것이었다. 브라크는 세부를 생략하고 오직 농가의 기하학적 동체만을 각진 모서리와 입방체로 이뤄진 화면의 구성요소로 삼았다. 보셀은 1908년 11월 14일자 신문 『질 블라스』에 실은 브라크 전시회에 관한 평문에서 ‘입방체’란 단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그때부터 피카소와 브라크의 후기 회화는 새롭게 창조된 양식인 입체주의로 분류되었다.
입체주의 출현에 가장 중요하고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아프리카 조형물과 세잔의 후기 작품이다. 피카소는 마티스의 집에서 그가 소장한 세잔의 <일광욕하는 사람들>을 처음 보았다. 세잔은 공간의 환영을 생략했으며, 공간의 깊이를 강조하지 않은 채 풍경을 평편한 면들의 배열로 묘사했다. 브라크는 세잔의 후기 작품에서 나타난 평편한 회화 공간과 분석적 각도의 치밀한 평면 구성에서 주로 영향을 받았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1906~07)과 브라크의 <큰 누드>(1907~08)에서 입체주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때부터 대략 1912년 가을까지 분석적 입체주의, 그 이후를 종합적 입체주의라고 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1912년경 소재를 화면에 풀로 붙이는 파피에 콜레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그들 회화의 기본이 되는 현실주의를 강조함과 동시에 기법에서 유래한 환영의 요소나 감각적 매력을 극단적으로 배제하려는 것이 주된 동기가 되었다. 피카소는 훗날 여섯 번째 연인으로 40살 어린 프랑수아 질로에게 자신이 파피에 콜레를 사용한 목적은 서로 다른 질감이 자연의 실재와 경쟁하는 회화에서의 실재가 되도록, 하나의 구성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화가 질로는 피카소의 두 아이를 낳은 여인으로 그와 이혼 후 백신vaccine의 선구자인 미국인과 결혼했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피카소 개인의 획기적인 성과일 뿐만 아니라 근대 회화사상 가장 중요한 이정표이자 입체주의의 탄생을 예고한 작품이다. 피카소가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열여섯 권의 스케치북과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수많은 습작을 남긴 데서 그가 얼마나 공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에 대해 20세기 후반 25년 동안에 책 한 권 분량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심지어 이 작품만을 위해 두 권의 도록을 발간한 전시회도 있었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에서의 힘찬 표현이 즉흥적으로 그린 느낌을 주지만, 무수히 많은 습작과 스케치를 통해 얻은 결과물이다. 왼편의 세 인물은 한 해 전에 그린 누드와 명백히 유사성을 보이며 이베리아 조형물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중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는 오른편의 두 인물은 프랑스령 콩고의 아프리카 가면과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거친 얼굴에서 대담한 빗금 처리로 인한 부조의 효과가 나타나며 야만적인 격렬한 호소력이 느껴진다.
이것과 세잔의 <일광욕하는 사람들>(1899)을 비교하면 놀라운 점이 발견되는데, <일광욕하는 사람들>에서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텐트 같은 천이 여기서 휘장의 배경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일광욕하는 사람들>에서 두 명의 포즈는 이 작품에서 왼편으로부터 두 번째 서 있는 인물과 오른편 하단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인물을 닮았다. 얕은 공간 구성과 함께 인물들이 배경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세잔의 방법을 차용한 것이다. 이는 피카소가 세잔의 위대함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임을 말해준다. 현재 파리의 피카소미술관에 있는 에드몽 포티에가 1906년에 찍은 서아프리카의 말린케 여인의 사진과 피카소가 1906~07년 겨울에 그린 <여인의 옆모습>을 비교하면, 사진-우편엽서가 회화의 직접적인 모델이었음이 명확해진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대한 평가가 늦어진 데는 다음 상황들도 한몫을 했다. 우선 이 작품은 약 30년 동안 일반에게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 1924년 두세가 피카소에게서 헐값에 구입하기 전까지 이 작품이 피카소의 작업실 밖으로 나간 것은 1차 세계대전 동안 고작 두 번이었다. 시인이자 입체주의의 옹호자인 앙드레 살몽이 1916년 7월에 두 주 동안 살롱 당탱에서 열린 거의 사적인 수준의 전시회에서 선보였고, 1918년 1-2월 화상 폴 기욤이 기획하고 아폴리네르가 카탈로그 서문을 쓴 마티스와 피카소 2인전에서 공개되었으며, 초현실주의의 기관지 『초현실주의 혁명』의 1925년판에 실린 뒤 1937년까지 주요 대중 전시회에도 등장하지 않다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 이 작품을 뉴욕의 모마가 사들였다. 두세가 죽자 미망인이 1937년 가을에 한 화상에게 이 작품을 팔았고, 2년 후 그 화상이 모마에 팔았다.
<마 졸리>(1911~12)
피카소는 더 이상 올리비에를 사랑하지 않고 그가 에바라고 부른 마르셀 윙베르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에바에 대한 은밀한 사랑을 표현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마 졸리Ma Jolie와 졸리 에바Jolie Eva는 그가 즐겨 부른 에바의 애칭으로 그림에 애칭을 적어 넣었다. 작품의 제목은 <치터 혹은 키타를 든 여인>이지만 <마 졸리>로 더욱 알려진 이 작품에 적어 넣은 졸리는 ‘예쁜’, 혹은 ‘사랑스런’이란 뜻이며, 당시 유행하던 작곡가 해리 프라그손의 「마지막 노래」에서 차용한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노래」의 내용은 자신의 연인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 까닭에 새로 찾아온 로맨스의 기쁨에서 좌절로 옮겨가는 슬픈 이야기였으므로 피카소가 당시 자신의 감정에 일치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마MA를 졸리JOLIE보다 한 단계 높게 배열했는데, 음악에서 한 음을 다른 음으로 바꾸는 것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조르주 브라크(1882~1963)는 1906년 10월에 세잔의 회화 10점을 보았고, 세잔이 종종 가서 그림을 그렸던 프랑스 남부 레스타크로 가서 이듬해 봄까지 지내면서 작업했다. 그는 1907년 살롱 도톤에서 열린 세잔의 회고전에서 큰 충격을 받고 분석적 입체주의를 예고하는 좀 더 논리적인 기하학적 분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브라크는 초기에 동료 미술 학생이던 마리 로랑생과 긴밀한 우정을 맺었는데, 그녀는 아폴리네르의 연인이 되었다. 폴란드와 이탈리아 계통의 혼합 가계에서 태어난 아폴리네르는 1911년 루브르에 소장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 리자>가 도난당했을 때 체포 구금되기도 했다. 브라크를 처음 피카소의 작업실로 데려간 사람은 아폴리네르였다. 1907년 11월 말이거나 12월 초 브라크가 아폴리네르를 따라 피카소의 작업실로 갔을 때 피카소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막 완성한 뒤 <세 여인>을 그리고 있었다. 브라크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압도되었으며 처음으로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부터 브라크의 회화에서 피카소의 최근 회화에 대한 심원한 이해와 지식이 생겼으며, 그의 회화에 나타나는 새로운 주제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
브라크는 몇 점의 여성 누드를 그리면서 1908년에 붉은색 바탕에 한 명의 여성 누드를 그린 <큰 누드>를 그렸는데,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버금가는 브라크의 대형화 중 하나였다. 그는 피카소가 제시한 방향을 좇아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를 가지고 습작을 거듭한 결과 대작을 그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프리카의 영향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큰 누드>는 피카소의 회화와는 다르며 오직 세잔에 바탕을 두고 있다. 브라크는 세잔의 회화를 잘 이해했으며, 대상에서 기하학적 형태를 찾으려고 했다. <큰 누드>에서 관람자는 근육이 비례에 맞지 않는 일그러진 여성의 몸을 대하게 되며 각각에 대한 극한의 상호관계가 허구적으로 묘사되었음을 본다. 근육조직과 몸체가 엉덩이와 장딴지에서 보듯 몇몇 명료한 선들로 강조되었다. 모나고 단단하게 늘어진 천 배경에 그려진 누드가 약간 어색해 보인다. 배경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는 여인 그리고 붉은색에서 황토색과 노란색으로 파도치는 천 가장자리 색 모두 <일광욕하는 사람들>과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연상시킨다. 피카소의 초기 입체주의 회화에 필적할 만하게 브라크도 명암을 구성하고 만드는 데 색을 보조물로 사용했다.
브라크가 형태를 해체한 것은 피카소보다 더 극적이었는데, 정물이 인물에 비해 생명력이 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인물화보다 정물화를 선호했다. 그의 정물화에서 빛은 분산되고, 부서진 작은 면들은 빛이 분산되는 방향에 따라 끝을 향해 화면을 가로질러 울려 퍼졌다. 그에게 정물화는 회화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사물에 더욱 다가가는 수단이었다. 그는 회화에 추상적 구조를 부여한 뒤 사물의 형태들을 구조에 적절하게 만들었다. 형태들은 색면으로 이루어지고, 색면들은 서로 섞이기도 겹치기도 한다.
브라크는 <바이올린과 팔레트>(1909)를 그리면서 상단 벽에 박혀 있는 착각을 일으키는 못을 그려 넣었다. 그래서 팔레트가 수평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못에 걸린 것으로 보인다. 그 아래에는 이러한 질량과 중력의 법칙에 대한 암시와는 대조적으로 악보는 왼편의 인접 공간으로 빠져들 듯 향한다. 그는 점점 추상화되어가는 것을 우려해 못 외에도 17세기 네덜란드 대가들과 18세기 프랑스 대가들이 장난스럽게 사용한 눈속임을 일으키는 모조문자, 나뭇결벽지 등 새로운 보충 요소들의 장치를 통해 사물을 지칭하는 다른 종류의 지시물을 그림에 끼워 착각의 의미를 강화시켰다. 브라크의 못은 입체주의의 새로운 공간적 착각현상에 혼란을 야기했다. 그는 눈속임 회화를 통해 착각의 의미를 더욱 심화시켜 그것이 보이는 것이 아닌 상상되어지는 것임을 말하려고 했다.
갤러리 입체주의자들이란 말은 ‘진정한 입체주의자들’에 대한 대안으로 사용된 용어이다. 피카소와 브라크를 추종한 갤러리 입체주의자들의 회화가 1910년에 전시회를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입체주의 추종자들은 1911년의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입체주의로 작업하는 예술가들 그룹’이란 명칭으로 일반인에게 명성을 얻었는데, 그들 중에 로베르 들로네, 페르낭 레제, 알베르 글레즈, 장 메챙제 등이 포함되었다. 들로네의 에펠탑 그림은 높이가 1, 2m였고, 레제의 <숲속의 누드>도 마찬가지로 장대했다. 평론가는 들로네의 에펠탑 회화를 새로운 이탈리아 사조인 미래주의와 연결시켰다. 들로네가 에펠탑을 주제로 선택하기 바로 직전인 1910년 4월에 다섯 명의 예술가들이 밀라노와 파리에서 「미래주의 회화의 기술적 선언문」을 선포했다. 들로네의 에펠탑 연작은 입체주의자들이 중시한 이동하는 시점과 역동적 흔들림이라는 측면에서 미래주의자들이 표현한 이상에 매우 근접했다.
페르낭 레제가 주목받은 작품은 <숲속의 누드>(1909~10)였다. 이것은 일견에 제목을 잘못붙인 것으로 보이는데, 한가하고 목가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레제는 “나는 1910년에 완성한 <숲속의 누드>의 조형성과 2년 동안 씨름했다. 나는 부피를 극단적으로 나타내기를 바랐다”고 했다. 이 작품은 그가 세잔의 영향을 받아 회화의 구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정을 기울인 세잔의 회화적 공간에 대한 그의 촉각적 연구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 후에도 원통형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형태 사이의 대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정적이며 장대한 양식을 계속 유지했다. 그는 명확히 묘사된 일상 사물 속의 시적 가치와 근대 기계류와 기계에 의해 대량생산된 물건들이 지닌 고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프롤레타리아적인 주제를 선호하여 이를 기계문명과 관련된 주제를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명확하고 정밀하게 묘사했다.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한 후앙 그리스
“입체주의가 처음부터 세계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말한 후앙 그리스(1887~1927)가 파리로 온 것은 1906년이었고, 싸구려 가옥 바토 라부아(‘세탁선’이란 뜻)에 있는 피카소의 집이 있는 건물에 살면서 시인들 아폴리네르,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 등을 만났다. 그는 파피에 콜레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으며, 갤러리 입체주의를 철저히 이해했다. 그는 몇 년 동안 종합적 입체주의를 나름대로 소화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나갔으며, 이는 동일한 양식으로 제작된 브라크와 피카소의 작품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스는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입체 형태를 기하학적 면으로 분해하는 것으로부터 구성하는 것으로 관심을 돌려 단편적인 추상 형태를 회화의 구조 속으로 합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얕은 회화 공간은 유지하면서 더 이상 중간색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면의 차이를 이용해 형태를 규정하고 양감을 나타내기 위해 단색조의 명암을 사용했다. 때때로 회화의 평면은 배경의 효과를 내고 묘사된 대상은 평면 앞의 실제 공간에 있는 관람자를 향해 나오도록 표현되었다. 더욱 밝아진 색, 강렬한 색들의 대비가 시도되었으나 감각적이고 표현력이 강렬한 색의 사용은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리스는 <기타>에서 기타의 줄들이 관람자로 하여금 거듭 회화의 주제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게 만들었다. 억제된 색의 가늘고 긴 모양, 삼각형, 사각형은 기타를 파편화하고 변화시켜 마침내 울림통의 윤곽선이 배경의 대비로 나타나게 해주었다. 화면 하단 오른편에 있는 색면과 왼편 상단에 부착한 19세기 금속판화의 부분만이 그림 제목에 어울리지 않아 혼란을 준다. 화면 상단 왼편에 액자가 걸려 있고 액자의 양편이 구조적으로 재구성된 가운데 아이를 양어깨에 올린 어머니가 시골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분석에서 회화적 구성으로의 전환에 관해 1921년 『에스프리 누보』 제5호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보편의 차원에서 특수의 차원으로 작업해간다. 즉 구체적 현실에 이르기 위해서 추상의 차원에서 출발한다. ... 세잔은 병을 원통으로 만들었지만, 나는 원통에서 출발하여 특별한 유형의 개체를 만든다. 원통으로부터 병, 특정한 병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른바 연역적이라고 지칭되는 이런 방법은 그리스의 많은 작품에서 감지된다.
비천한 폴란드계 러시아 가문 출신의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는 불굴의 노력과 타고난 지력으로 광범위한 지식을 습득했다. 그러나 거의 설교조로 되어 있는 그의 많은 글의 혼동된 사상과 언어는 체계적이지 못했던 교육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는 국제적 교육을 받은 칸딘스키와 비교되는데 생전에 두 사람은 아무런 접촉을 하지 않았으나, 사상이 많이 공통되며 모두 근본적으로 상징주의와 관련이 있다.
말레비치의 독창적인 회화는 1908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가 좋아했던 회화는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었다. 복제된 그 그림을 벽에 붙여놓고 늘 바라보았다. 그는 1912년부터 형태를 해체하는 입체주의의 양식과 미래주의 회화의 역동성을 결합하는 작업을 하면서 단순히 운동과 과정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형적인 형태들을 자유분방하게 연결했다. 1913년에 전시회를 통해 이러한 회화를 소개하면서 ‘입체-미래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가 농부들을 주제로 그린 많은 작품들에서 인물은 레제를 연상시키는 원통 같은 형태로 형식화되어 나타났으며, 형태와 배경은 깊이감이 거의 없이 대조를 이루는 평면적 색면들로 체계적으로 분할되어 표현되었다. 이런 경향을 추구하면서 회화에서 주제의 중요성은 감소된 반면 평면과 양감의 구성은 더 중요해지는 동시에 체계적으로 되었으며, 어느 정도 미래주의의 요소를 지닌 독자적인 분석적 입체주의에 도달했다.
말레비치와 레제가 회화 요소들을 분석적 입방체들로 나타내는 구성방식을 공유했더라도 말레비치에게 있어 매우 중요했던 색의 관점에서 보면 둘 사이에 별로 관련이 없다. 레제의 색은 입체주의의 단색조를 따랐고, 그 후 기계 같은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흰색으로 강조하면서 원색과 밝은 초록색을 사용했다. 가볍고 성긴 붓 작업과 전형적인 프랑스의 우아함을 갖춘 레제의 색 사용 방식은 1909~14년에 사용된 말레비치의 색 사용과 다르다. 말레비치의 회화에는 우아함이 없으며, 그의 충만하고 강도 높은 색은 화면을 통틀어 밀도 있고 규칙적인 리듬으로 채색되었다. 말레비치는 1913년 말경부터 입체-미래주의를 버리고 피카소와 브라크의 종합적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작은 부분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곧 절대주의 체계로 비구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절대주의 회화를 선보인 것은 1915년 1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전시회 ‘0-10: 최후의 미래주의 회화’에서였다.
입체주의와 미래주의를 결합해낸 최초의 작품이 <나무를 베는 사람>(1912)으로 페트로그라드에서 1912~13년에 열린 청년동맹의 전시회에서 처음 선보였다. 이 작품에서 인물이 강하게 명시되는 일련의 원통 같은 형태들로 이뤄진 배경에 통합되었다. 이렇게 융합된 전체론적 구성에서 삼차원적 깊이 대신 단단한 형태를 암시하는 색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인물은 전체적 리듬에 종속되고 도끼를 잡고 있는 팔은 부자연스러운 부동성에 갇혀 있다. 이와 유사하게 피스톤처럼 생긴 많은 통나무의 움직임도 일련의 대립 속에 머물러있다. <나무를 베는 사람>과 같은 단순화한 인물로부터 <칼 가는 사람>(1912~13)과 같은 기계적인 인물이 점차적으로 발전되었으며, 기계적인 리듬에 종속된 자연에 대한 시각에서 더 나아가 <물동이를 든 여인: 동력적 배열>(1912~13)에서는 역동적인 기계의 힘에 의해 창조된 세계가 표현되었다.
동시대비를 창안한 로베르 들로네(1885~1941)는 쇠라의 순색과 보색을 배합하거나 병치하는 분할주의를 채택하는 대신 대비되는 인접한 색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며, 특히 색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과 운동의 상호연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906년에 신인상주의와 프랑스의 화학자 미셀 외젠 슈브뢸의 『색의 동시대비 법칙』(1839)에 관심이 많았다. 슈브뢸에게 있어 동시대비는 인접한 두 가지 색이 대비를 이루면서 각각의 특성을 상호 고취시키는 시각적 효과를 설명한 것으로 순전히 과학적인 성격의 용어였던 반면 들로네는 동시대비를 부정확하고 다소 모호하게 사용하면서 색이 추상화 안에서 회화적 형태는 물론 운동의 환영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며,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동시대비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다.
들로네는 1910년부터 에펠탑을 그리기 시작했다. 구스타브 에펠이 1889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약 300m 높이로 건설한 에펠탑은 1910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프로이트가 말한 남근숭배와 함께 근대 세계의 빼어난 공학을 보여주었다. 들로네는 뒤틀리고 각이 진 형태로 휘어진 채 다채로운 색상으로 구성된 회화를 통해 에펠탑의 존재물에 대한 파편화된 지각작용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때 이탈리아의 미래주의자들의 첫 전시회가 파리에서 있었고, 그들의 영향은 즉각적이고 선풍적이었다. 들로네는 미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운동의 재현 문제를 위해 철 구조물의 탑을 선택했다. 그가 제작한 에펠탑 회화는 서른 점이 넘으며, 여기에는 유화와 종이에 작업한 것도 포함된다. 그는 같은 주제를 1920년부터 1930년까지 다시 작업하기도 했다. <커튼 뒤의 타워>(1910)에서 파리의 지붕과 탑이 모두 창문을 통해 바라본 에펠탑을 입체주의 방법으로 묘사한 것이다. 커튼은 양옆으로 쳐진 채 화면의 절반을 차지한다. 원근법으로 일그러진 에펠탑의 배경은 구름으로 구성되었다. 구름은 위로 상승하는 비누거품을 닮았고, 탑 위로 치솟는 뾰족한 부분과는 눈에 띄게 명확히 형식적 대조를 이룬다. 시각적 경험을 재현하기 위해 그는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본 광경들을 한 화면에 취합했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모티프는 서로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 장면들을 한데 뭉뚱그리는 방법을 통해 규격화된 면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에펠탑을 낮은 시점, 높은 시점, 보통 시점 등으로 바꿔 보여주는 여러 시점들을 수직으로 이어붙이는 방법으로 탑의 철골구조가 구성되었다. 에펠탑 경관은 창문이 회화가 되고 회화가 창문이 되는 창문 틀 속에 묘사되었으며, 이는 후기 작품에서 그를 사로잡은 광범위한 시리즈의 서곡이 되었다.
색에 대한 관심이 커진 후 들로네는 색을 형태에 대한 문제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에게 중요해진 것은 기하학적 추상화가 아니라 그 자신 세계의 우주적 리듬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색채대비의 생생한 유희였다. 모티프가 될 색채론의 미적 응용에 대한 연구에 전념한 그는 1912~13년에 <창문> 연작을 선보였는데, 이는 <동시대조: 태양과 달>(1913)에서 시작한 색의 동시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키면서도 구체적인 시각 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추상이었다. <창문> 연작에 자연을 상기시키는 암시들이 있더라도 과거 입체주의 회화와 같은 분석적이거나 묘사적인 회화가 아니다. 들로네의 회화는 색이 단순히 드로잉을 보조하는 장식적인 종속물이 아니라 형태를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는 점을 보여주었으며, 1900년경부터 유럽 회화에 널리 퍼져있던 이런 경향이 들로네의 회화에서 절정에 달했다. 들로네의 회화는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고 명명한 ‘색채 입체주의’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오르피즘Orphism(혹은 동시주의)은 아폴리네르가 1912년 ‘섹시옹 도르 Section d'Or’ 전시회와 1913년 베를린의 슈투름 갤러리에서 전시된 들로네의 회화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명칭이다. 섹시옹 도르는 프랑스어로 ‘황금 분할’을 의미한다. 황금 분할이란 수학에서 직선을 둘로 나눌 때 짧은 쪽과 긴 쪽의 관계가 긴 쪽과 전체 관계와 비례하도록 나누는 것을 말한다. 이 원리는 고대 이후 조화로운 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해 미술과 건축에 적용되어왔다. 아폴리네르는 오르피즘을 비재현적 색채 추상으로 이해하며 저서 『입체주의 화가들』(1913)에서 이를 가시적인 영역으로부터 빌려온 요소가 아닌 전적으로 화가 자신이 창조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구조를 그리는 회화로 설명했다. 그는 오르피즘을 입체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운동으로 간주하고 들로네 외에 들로네의 아내이자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화가 소니아 들로네-테르크, 프란시스 피카비아, 마르셀 뒤샹, 레제, 1896년에 파리에 정착한 구체코슬로바키아 화가 프란티셰크 쿠프카 등을 여기에 포함시켰다. 그렇지만 들로네는 후기의 저서 『입체주의에서 추상 미술까지』(1957)에서 오르피즘이란 용어를 비재현적 색채 추상의 추구를 목표로 삼은 쿠프카의 회화와 유사한 작업, 미국의 화가 스탠턴 맥도널드 라이트와 모건 러셀의 회화 등에 한정하여 사용하면서 오르피즘의 기원을 입체주의보다는 오히려 인상주의와 조르주 쇠라의 신인상주의로 파악했다.
독특한 회화를 창조한 마르셀 뒤샹(1887~1968)은 훗날 “입체주의 이론은 지성적인 점에서 나를 매료시켰다. ... 나는 입체주의 이론을 단지 설명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독특한 회화를 찾거나 창조하려고 했다”고 술회했다. 그의 초기 입체주의 회화는 피카소와 브라크에 것들에 비해 과격하지 않았고, 기교면에서 두 사람의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그가 입체주의에 대해 구체적인 이해가 생긴 것은 레제, 들로네, 글레즈, 메챙제 등을 형들 자크와 레이몽과 함께 퓌토에 있는 자크의 집에서 자주 만나기 시작한 1911년 가을이었다. 뒤샹은 입체주의가 개념미술이란 사실을 발견했으며, 피카소가 말한 대로 사물은 “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물이 있음을 아는 것”이란 점을 깨달았다. 그는 20세기에 들어와 미술이 지성적으로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룹의 예술가들이 만나면 미학적 주제를 두고 열띤 토론을 거듭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사차원이란 말이 20세기의 첫 10년 동안에 자주 사용되었으며,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작가들이 이 말을 즐겨 사용했다. 우주에는 시공space-time의 한계를 넘는 사차원의 세계가 반드시 있다고 지성인들이 믿었고, 신문, 잡지, 소설, 만화 등에서 사차원이란 말이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뒤샹은 『라 나투르』지를 통해 프랑스의 생리학자 에티엔 쥘 마레가 1882년에 카메라 셔터를 발명한 뒤 움직이는 물체를 찍은 사진을 보고 운동의 효과를 알았다. 미국인 에드위드 마이브리지도 배터리를 카메라에 연결시켜 인체의 운동을 정지한 장면으로 찍어 『운동하는 사람의 모습』이란 제목으로 1885년에 출간했는데, 책에는 누드 여인이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이 24점의 이미지들로 나열되어 있었다. 뒤샹이 이 책을 보았을 성 싶은데, 그는 마이브리지의 책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뒤샹은 1912년 2월 베르넹 죈 갤러리에서 열린 미래주의자들의 전시회에 갔지만, 그때는 이미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1911)를 완성하고 있었다. 뒤샹은 “미래주의자들은 시골보다는 도시의 인상적 요소들을 그리는 도시의 인상주의자들”이었다면서 그와 같은 것은 낡은 망막적 미술retinal art에 빠지게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망막적’이란 정신의 ‘지적 능력’을 연루시키지 않은 미술에 부여한 뒤샹의 용어이다. 그는 망막적 미술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나의 목적은 정지한 운동을 재현하는 것으로 정지한 구성으로 다양한 운동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영화에서의 효과를 회화로 나타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 나는 사람의 운동을 뼈다귀의 모습이 아닌 선으로 제한하려고 했다. 제한하고, 제한하며, 또 제한하는 것이 나의 의도였으며, 동시에 나의 목적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었다. 이 그림을 그리고 난 후 나는 예술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점, 선, 혹은 매우 전통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어떤 것들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뒤샹은 재담가였다. 그에게는 지성적인 익살이 있었고, 삽화를 그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해학적 요소를 회화에 보탤 줄 알았다.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에서는 이런 요소가 내재해있다. 그는 훗날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에서 이미 유머를 회화에 삽입하려는 나의 의도가 드러났다. 아폴리네르가 그것을 ‘기차에 있는 우울함’이라고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이가 슬픈 이유는 기차가 뒤를 따라오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곧이어 판지에 유채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1>(1911)를 그렸는데, 마찬가지로 유머가 삽입된 회화였다. 과거 화가들은 누드를 그릴 때 모델에게 선정적 동작을 취하도록 요구했지만, 누드를 운동의 모습으로 묘사한 적은 없었다. 누드가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은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지 순수 미술에서는 가당치 않은 발상이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해 “그것은 (습작 드로잉을 말한) 그저 모호하게 연필로 계단을 오르는 누드를 그린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다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리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뮤지컬 코미디를 보면 많은 계단이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뒤샹이 1911년 12월에 처음 그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1>에 보이는 계단은 어린 시절을 보낸 블랭빌의 집 계단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가 이듬해 1월에 그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는 먼저 것에 비해 사람과 계단이 더욱 생략되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는 아모리쇼로 불린 국제 모던아트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었다. 미국인은 입체주의에 관해 거의 알지 못했으며 아모리쇼는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연일 사람들이 이 작품 앞에 운집할 정도로 뒤샹의 작품은 미국인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작품을 보고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나바조Navajo 담요 같다고 말했다. 언론은 이 작품을 익살스럽게 표현했는데, 『이브닝 선』지에서는 “출퇴근 시간에 전철역의 계단을 내려가는 교양 없는 사람들”이라고 적었다. 이 작품은 입체주의만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이 아니라 모던아트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처럼 평론가들에게 비쳐졌다.
파괴 후의 건설 분석에서 종합으로Analysis to Synthesis
1912년경 이후 입체주의자들의 기법이 상당히 달라졌는데, 회화가 다시금 좀 더 가독성을 지니게 되었다. 1912년경부터 1914년까지의 소위 말하는 종합적 입체주의 국면에서 브라크, 피카소, 후앙 그리스, 레제 등과 같은 화가들을 예로 들면 추상적 회화 요소들로 새로운 모티프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파피에 콜레가 기성품으로 이어지는 모든 콜라주 기교들의 기초로 등장했다. 브라크의 <과일접시와 유리잔>을 통해 최초로 파피에 콜레가 선보였다. 이 작품은 브라크가 프랑스 남부 아비뇽 근처 론 강 하구에 위치한 소르그에서 1912년 9월 초 여름을 보낼 때 제작되었다. 그는 아비뇽의 거리를 산책하다가 벽지 상점 윈도우에 진열된 참나무 패턴을 모방한 두루마리 종이를 우연히 발견했다고 훗날 말했다. 상점에 진열된 재료를 보고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작품에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겼다고 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우연히 찾아낸 복제물의 직접적 사용으로 회화적 솜씨를 대신하려는 것이었다.
종합적 입체주의는 회화가 자연이 아닌 인공물에서 유래한 요소들의 조합으로 창조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피카소는 최초의 진정한 콜라주로 간주되는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1912)에서 전통 틀을 환기시키는 굵은 끈으로 두른 캔버스 화면의 삼분의 일에 인쇄된 유포를 사용했다. 왼편에 ‘JOU’란 글자는 신문 ‘주르날JOURNAL’의 일부분으로 보인다. 화면의 상당 부분은 그린 것이 아니라 풀로 붙인 것이다. 하단 절반을 채우는 것은 등나무 의자 한 조각을 인쇄한 유포이다. 가짜등나무가 순수 사실주의 기능을 하는 모순을 나타낸다. 파피에 콜레가 새로운 회화의 세계를 연 것이다.
회화에서 그린다는 말은 더 이상 정확한 용어가 아닌데,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의 상당 부분이 그려진 것이 아니라 풀로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입체주의는 무엇이 재현되는가 하는 문제와 무엇이 제시되는가 하는 문제, 즉 회화가 보여주는 허구적 실재와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실질적 실재를 함께 해결하려는 회화에서의 위기가 절정에 다다른 양식이다.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은 환영과 실재 모두를 보여준다. 캔버스를 두른 굵은 끈과 유포는 실재이다. 여기에 주목해야 할 것은 ‘JOU’란 글자로 글자는 물리적 실재는 아니지만, 실재 신문과 명백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점이다. 입체주의 회화가 제시한 세 가지 점은 미술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 첫째, 콜라주의 도입이 레디메이드의 사용을 예시한 점이고, 둘째, 재현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에 대한 탐구를 요구한 점이며, 셋째, 예술과 일상을 융합시킨 점이다.
입체주의 조형물
피카소는 1906년부터 목재를 거칠게 깎아 만든, 형태가 매우 단순한 인물상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목재 인물상들을 보면 그가 아프리카의 가면과 인물상에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작업실을 아프리카 부족미술품들로 장식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가 분석적 입체주의 조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909년으로 <여인의 머리(페르낭드)>였고, 동거녀 페르낭드 올리비에의 머리를 많은 칼집을 새겨 넣어 이국적인 느낌이 나도록 제작하는 데 10개월이 소요되었다. 코, 입, 볼, 이마 두 눈이 마주 배치된 가운데 생성되는 얼굴의 부분들은 빛과 그늘의 지대들로 나타나며, 이러한 부분들이 상호 충돌하는 면들의 구성으로 변전된다. 가장 중요한 눈, 코, 입술은 자연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플라스터로 제작한 이것을 청동으로 주조한 것은 1931년이었다. 피카소는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15점 이상을 그렸고, 조형물은 드로잉과 회화를 생산한 뒤에 제작되었다. 이제는 현존하지 않는 찰흙 모델을 먼저 만들고 두 개를 플라스터로 떴다. 그가 <페르낭드의 초상>(1909)과 드로잉들에서 이미 강렬하게 기하학적으로 구성한 페르낭드의 머리 자체는 그런 구성들을 통해 공간으로 열려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회화에서 실험한 형식적인 문제들을 삼차원으로 변형시킬 수 있었다.
피카소는 1912년 10월에 그의 첫 열린 형태의 구성물 <기타>를 제작하면서 판지, 끈, 철사로 모델을 만들었다. 빈 공간과 표면을 병치시킨 이 조형물은 종합적 입체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이었다. 종합적 입체주의가 고안한 주요 형식은 콜라주였다. 이 조형물에서 피카소는 빈 공간을 기호로 변형시켜 기타의 외피를 대신하고, 돌출한 원통을 기호로 변형시켜 기타의 향공響孔을 대신했다. 말하자면 공간이란 비실체를 조형물의 재료로 변형시킨 것이다.
앙리 로랑스와 자크 립시츠, 레이몽 뒤샹 비용 등이 공간 및 조형의 문제를 탐구한 유사한 양식의 조형물을 제작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태어난 로랑스는 어릴 때부터 조형물 제작을 배웠고, 1902년 초에 몽마르트르로 이주해 파리 남서쪽에 있는 자유분방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벌집’이란 뜻의 라뤼슈La Ruche에서 몇 달 동안 머무르면서 레제, 아르키펭코 등의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1911년 말 브라크와 가까워지면서 입체주의를 경험하고 1912~13년 브라크의 작업실에서 본 파피에 콜레와 구성물에 대해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회화 양식과 조형물 양식의 상호관계를 의식적으로 구체화한 로랑스의 <여인의 머리>(1915)는 피카소의 동일한 제목의 작품과 비교되는데, 피카소의 작품은 구성적이지만 로랑스는 추상화했다. 로랑스의 작품도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피카소의 구성작품과 같이 여러 차원이 중첩되어 공간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가 1915~18년에 제작한 일련의 작품들은 가장 순수한 입체주의 정물 주제인 유리잔과 병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의 구성에서 채색한 면은, 빛이 표면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고 작품 전체에 고유한 빛을 부여하는 기능을 갖는다. 결핵으로 1909년에 한쪽 다리를 절단한 로랑스는 1919년부터 입체주의 주제와 형상화 방식을 차용한 완전 입체의 작품을 제작했다. 이는 다른 시점들에서 본 작품의 개개 요소들을 조합해 빛과 그늘이 번갈아 분포되어 리듬감을 형성하도록 처리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데르 아르키펭코는 1912년 말에 물체와 공간의 관계를 뒤집는 실험적 특징을 지닌 몇 점의 혼합매체 구성물을 제작했다. 서커스의 던지기 곡예사를 표현한 <메드라노 I(궤변가)>은 현존하지 않고 사진으로만 전하는데, 나무, 유리, 판금, 철사에 색을 입혀 회전하는 형태와 운동을 연상하게 하는 곡예사를 만든 것이다. 1912년경 피카소와 브라크는 종이조형물과 혼합매체 구성물을 제작했고, 아르키펭코가 사용한 재료들은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에 관한 이해를 반영했다.
아르키펭코는 1914년경부터 스스로 ‘조각-회화’라 명명한 다색부조에 관심을 기울였다. 다양한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이전 조형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투명성이나 반사와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입체주의 조형물 작업과 함께 조형물이 에워싼 공간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문제를 탐구한 선구자에 속하며 이런 실험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는 구상적 주제를 종합적 입체주의 방법으로 제작하면서 다소 양식화된 아라베스크풍의 인물상들을 통해 이런 실험을 했는데, <머리를 빗는 여인>이 그 예이다. 그의 채색조형물이 보여주는 빼어난 장식성은 입체주의 형식에 대한 진지한 관심으로 직결되며, 특히 후에 나온 완전 입체 형태의 인물상, 목재와 금속조각, 철사와 유리 등을 이용한 거친 아상블라주에서 이런 점이 발견된다. 이런 작업과 병행해 그는 기하학적 형태를 이용한 추상 작업도 계속했다.
<앉아 있는 여인>(1920)에서 보듯 아르키펭코는 좀 더 직선적인 인물상에서는 구멍을 내고 공간을 포함시킴으로써 내부 공간에 실재성을 부여했다. 이는 립시츠의 실험 작품과 같은 노선을 취한 것으로 20세기 조형물 역사에 매우 중요한 결과를 초래한 선구적인 통찰력으로 미국에서는 나움 가보, 영국에서는 헨리 무어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아르키펭코는 형태의 범위를 외부로 명시하면서 이에 상응하는 부피를 암시하기 위해 오목한 형태를 사용하고 볼록한 면과 오목한 면 및 그 두 외곽선을 대비시키는 선구적인 실험도 했다.
입체주의 조형물의 전형을 창조한 레이몽 뒤샹 비용은 의학을 공부하고 나서 1898년부터 조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10년경부터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고 1914년까지 소수 입체주의 조각가 중 탁월한 인물로 꼽혔다. 양식의 급격한 변화는 세 개의 두상 조형물을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입체주의에 몰두한 동안 조형물의 영역과 모델링의 영역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고 초기 작업에서 추구하던 모델링의 정교성을 배제했다. 1914년에 파리 근교의 병원 노무원으로 징집되었으므로 계속해서 조형물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가 처음에 계획했던 탈 수 있는 말보다 작지만 큰 변형판의 말 조형물은 그가 타계한 지 오랜 후 그의 동생 마르셀 뒤샹의 감독 하에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뒤샹 비용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입체주의 조형물의 전형이며 모범으로 간주되는 작품은 <커다란 말>(1914)이다. 기계적ㆍ유기적 형태들의 놀라운 혼합물인 이 작품에서 자연주의적 재현은 찾아볼 수 없고 여러 덩어리와 평면들이 균형을 유지하면서 빈틈없이 결합되어 도약하는 말의 리듬과 긴장을 추상적 도표처럼 표현하고 있다. 이는 상호 연결된 형태가 재현하는 바에 의존하지 않고 형태 자체에 내재된 에너지를 억제하고 제어함으로써 탄생한 걸작이며, 미래주의의 힘 있는 선들의 역동적 뒤틀림 안에서 통합되었다. <커다란 말>은 정적인 형태들을 통해 근육의 운동으로 생겨난 긴장된 에너지를 성공적으로 표현했고, 이는 분명 미래주의자들이 표현하려고 한 운동의 역동성을 부분적으로나마 이룩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많은 인명의 손실을 가져다주었는데, 뒤샹 비용은 발진티푸스에 걸려 신장질환으로 1918년에 마흔두 해의 생애를 마감했다. 아폴리네르는 부상을 당하고 쇠약해지면서 같은 해에 독감으로 죽었다. 프란츠 마르크, 움베르토 보초니 등이 죽었고, 들로네와 가까웠던 시인 블레즈 상드라르는 한쪽 팔을 잃었다. 브라크는 1915년에 심한 머리 부상을 당했다.
독특한 방식으로 입체주의 조형물을 제작한 자크 립시츠는 입체주의 작업을 시작할 때인 1914년 봄에 피카소를 만났다. 그의 작품은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진 듯 보이나 <기타를 든 남자>(1915)에서 보듯이 개방된 형태의 효과적 사용, 날카로운 선으로 구성된 면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면의 역동적인 대비를 보여준다. 그는 순전히 형식적인 이유로 구멍을 뚫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조형물 내부에 공간감을 형성하는 이런 기법은 1930년대에 헨리 무어와 바버라 헵워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이탈리아의 문학개혁운동으로 시작된 미래주의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는 첫 「미래주의 창립 선언문」을 1909년 2월 20일 파리의 일간지 『르 피가로』지에 기고했으며 이탈리아에 급속도로 퍼졌다. 미래주의의 공식적인 출범을 알린 이 사건은 미래주의의 특성을 복합적으로 암시하는 것이었다. 격렬한 무정부주의적 어조의 선언문에는 “사모트라케의 니케(파리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기원전 190년경에 제작된 헬레니즘 시대의 대리석 조형물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보다 ... 경주용 자동차나 소리 요란한 자동차가 더 아름답다”고 적혀 있으며, 매우 선동적인 언어로 새로운 문학 및 사회운동의 탄생을 알리면서 젊은이들에게 미래주의의 기치 아래 모일 것을 호소했다. 폭력과 투쟁이 만연한 마리네티 미래주의 선언문의 전반적 어조 “아름다움은 오로지 투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니체의 영향을 크게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그 영향은 단절되지만 움베르토 보초니와 다른 젊은 미래주의자들은 니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리네티는 사상의 지휘자였으며, 근대성에 대한 그의 찬미는 이탈리아에서 즉각적인 지지를 얻었다. 베네치아의 상 마르코 성당 종탑에서 뿌려진 선언문을 통해 미래주의자들은 베네치아의 운하를 메워버리자고 제안했다. 이는 상류사회의 부패에 대한 항의인 동시에 자동차와 같이 새롭게 등장한 문화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기도 했다.
미래주의는 두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단계는 1909년의 발단에서부터 1916년 보초니의 사망으로 인해 사실상 그룹이 해체될 때까지이며, 두 번째 단계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의 창시자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 정권 아래서 마리네티가 시도한 재건의 시기이다. 20세기 미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첫 번째 시기에서 예술가들은 선언문에서 제안한 과장된 공식 표명을 합리화할 수 있는 회화 언어를 성취하고자 했다.
운동을 표현한 자코모 발라는 1912년에 고속연속촬영법의 특징인 반복적인 윤곽선으로 대상을 재현하여 자신의 회화세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가죽 끈의 운동>(1912)은 <가죽 끈에 매인 개의 역동성>으로도 불리는데, 흐릿해진 윤곽선과 수많은 다리, 가죽 끈의 반복적인 곡선으로 말미암아 회화 속의 개가 정지해 있는 관람자 앞을 지나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운동을 지각할 때의 동시성을 묘사한 이 작품은 그가 1912~13년 뒤셀도르프에 머물면서 날아가는 제비, 질주하는 자동차 등과 같은 주제를 통해 속력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데 몰두하던 시기에 그린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말 마이브리지와 그 밖의 몇 사람의 운동에 관한 사진연구를 모방한 미래주의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기억-이미지를 동시에 그린 움베르토 보초니는 파리와 상트페테부르크를 여행한 뒤 1907년 밀라노에 정착했으며, 그곳에서 마리네티와 교류했다. 1910년 미래주의 선언문에 서명하고 그 후 미래주의 그룹에서 가장 활동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그는 <일어나는 도시>(1910~11)에서 운동의 격렬함을 표현했다. 보초니 자신의 말에 의하면 이 작품은 “노동자 군중의 운명적인 투쟁”을 구체화하고 “노동, 빛 그리고 운동의 위대한 종합”을 창조하고자 한 그의 바람을 나타낸 것이다.
조각가로서도 재능을 발휘한 보초니는 1912년에 작성한 「미래주의 조형물 기법 선언문」에서 미래주의 조형물의 구성은 수학과 기하학의 요소들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요소들은 부연 설명하는 장식적 요소들이 아니라 새로운 조화 개념이 규정해주는 법칙에 따라 인체의 근육이 묘사하는 선속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재료의 무한한 선택 가능성과 예기치 못한 접합의 권리를 예찬하면서 “완전히 문학적ㆍ전통적 대리석과 청동으로 된, 소위 고상하다는 것을 파괴해야 한다. 또한 조형물의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 한 가지 재료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확실히 부정해야 한다. 조각가는 한 점의 조형물에서도 조형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도록 스무 가지도 더 되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할 수 있다. 유리, 나무, 판지, 접착제, 콘크리트, 말총, 피륙, 거울, 전깃불 등은 그런 재료의 일부일 뿐이다”라고 했다.
보초니는 자신이 권한 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지만, 그의 권고는 20세기 조각가들에 의해 큰 성과를 거뒀다. 뒤샹 비용과 아르키펭코로부터 영향을 받은 보초니가 중시한 에너지 작용선으로서의 추상의 개념은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에너지와 운동, 광선,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주변에 있는 사물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서로 삼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공간에서의 병의 전개>(1912)에서 보듯이 다양한 모형으로 투입된 그의 모티프들이 주물로 뜬 청동 소재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하나의 통일적인 종합단계에 이른다. 그는 <공간속에서의 연속성의 특이한 형태들>(1913)에서 공간 에너지와 인체의 운동을 유려하고도 우아한 형태로 옮겨놓았다. 로봇 같기도 하고 양서류 같기도 한 모호한 형태의 이 조형물은 프랑스 과학자 에티엔 쥘 마레의 고속연속촬영법에서 가시화된 운동의 자취를 조형적 신체에 결합한 것으로 미래주의의 이념을 가장 잘 표현된 것이다. 이 작품에 내재된, 앞으로 걸어가는 동작을 통해 방출되는 에너지가 힘차게 움직이는 이 초인의 근육질 몸을 훑고 지나간다. 이 작품에서 보초니가 모티프로 삼은 것은 단순한 운동의 과정이 아니라, 인간을 지루한 걸음걸이에서 떼어내 추진력을 가한, 현대인의 삶에 편재하는 역학이다. 모델링과 청동이라는 전통 조형방식을 유지한 이 작품은 현대인의 전투적인 삶이 갖는 존재에 초점을 모은 것이다. 또한 입체주의 조각가들 피카소, 뒤샹 비용, 아르키펭코 등의 선례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식을 중시한 지노 세베리니는 1909년경 피카소, 막스 자코브, 아폴리네르를 만났고 그들을 통해 입체주의 이론에 매료되었다. 이듬해 4월에 「미래주의 회화의 기술적 선언문」에 서명했으며 보초니, 카르라, 루솔로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그들을 아폴리네르 및 입체주의자들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세베리니의 <블루 댄서>(1912)는 미래주의 전시회에서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