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2
천 개의 얼굴을 가진 표현주의
표현은 ‘강조하다pressing’라는 뜻이지만 미술에서의 표현은 발랄한 은유를 의미한다. 발랄한 은유가 미적 판단의 척도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15세기 이탈리아의 건축가이며 인문주의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훌륭한 작품이 관람자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작품에 묘사된 인물의 감정이 관람자에게 반응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 빈치도 서술적인 회화가 고상하고 고귀한 회화라는 데 알베르티와 의견을 같이 하여 사람의 감정과 관념을 제스처와 얼굴표정으로 표현하는 중요성을 반복해 강조했다. 그리고 그 결론을 향해 갖가지 표현이론을 전개했는데, 카메라로 스냅사진을 찍듯이 사람의 진솔한 모습을 신속한 스케치로 관찰, 기록하기를 권유했다. 다 빈치는 특히 벙어리를 연구할 것을 조언했는데, 몸짓으로 말하는 벙어리의 동작이 매우 표현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직접적인 관찰을 통한 정, 동적 표정의 회화 목록을 작성하려고 했다. 이는 다음 수세기 동안 이루어진 얼굴표정 체계화 작업을 예고한 것이었다.)
앙리 마티스는 1908년 선언문 형식의 에세이 「화가의 노트 A Painter's Notes」에서 회화를 궁극적으로 표현으로 규정하면서 “나의 가장 큰 목적은 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 내게 있어 표현은 회화의 총체적 배열이다. 신체가 차지할 공간, 그 주변 공간, 그 비율 등의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구성은 화가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장식적으로 배열하는 기술이다. 한 회화 속에서 모든 부분이 보일 것이며, 부분들은 그것들에 부여된 역할을 일차적이건 이차적이건 수행할 것이다. 회화에서 유용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방해가 될 뿐이다. 미술품은 전체적으로 조화로워야 하는데, 과다한 세부는 관람자의 마음속에서 본질적 요소들을 잠식하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표현주의의 개념은 정확하게 규정될 수 있는 양식이 아니라 국적을 초월한 하나의 거대한 운동이었다. 우선 표현주의는 매우 주관적이었으며, 예술가들 대부분 개인적인 기교를 통해 아카데미의 규범을 거부했다. 공통적인 특징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감정과 내적 체험을 작품의 제작 동기로 삼은 것이다. 표현주의는 회화뿐 아니라 조형물, 건축, 댄스, 영화 등 그 밖의 많은 장르에도 적용되었다.
풍자와 유머를 화면에 담은 제임스 앙소르
플랑드르에 표현주의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초현실주의자들이 선구적인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칭송한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의 가장 큰 특징으로 간주되는 죽음과 관련된 요소들이 1880년대 후반에 도입되기 시작했으며, 그의 이름은 주로 이와 관련해 알려졌다. 그는 카니발 가면, 그로테스크한 형상, 해골, 기묘하며 괴상한 상상을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와 피테르 브뢰겔을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하면서도 아이러니한 유머로 처리했다. 그의 작품과 판화는 사회적ㆍ종교적 비판을 담아 교훈적이면서 풍자적인 색채를 띠었다.
초기단계인 1878~85년은 이른바 어두운 시기로 <성난 가면>(1883), 지방 부르주아의 집 내부, 해변 풍경, 마을 풍경 등을 어두운 색조로 그리면서 팔레트나이프로 물감을 두텁게 칠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동시대 프랑스의 인상주의와는 강한 대조를 보였다. 그의 회화에서 군중은 모티프와 무관하게 등장한다. 그리스도의 일화, 거리풍경, 해변 등 어떤 모티프를 그리더라도 늘 일군의 그로테스크한 형상들이 결부되었으며, 군중은 모티프와 관련된 것도 아니고 모티프에서 파생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사용한 가면은 고향의 전통 카니발에서 유래했다. 그는 “가면이 지배하는 고독한 세계, 온갖 폭력과 빛의 위엄의 세계를 되도록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했다”면서 “가면은 내게 신선한 색, 과장된 표현, 화려한 장식, 예기치 않은 제스처, 자유로운 동작, 격렬한 소란을 의미한다”고 했다.
부친의 사망(1887)으로 자신의 회화를 이해해준 유일한 가족을 잃은 앙소르는 죽음을 사적인 체험으로 각인했으며, 그때부터 죽음의 모티프가 그의 회화에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죽음은 늘 그에게 위협적 존재였다. 알레고리와 패러디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죽음을 다각적으로 묘사한 그가 1897년에 그린 <죽음의 신과 가면>은 한 무리의 인물을 묘사한 것으로 죽음의 신을 중앙에 배치하고 신이 카니발 연회에서 술에 취해 흥청거리는 가면들에 에워싸여 위협받는 장면으로 구성되었다. 죽음의 신은 생명을 상징하는 초를 왼손에 들고 있으며, 촛불은 곧 꺼질 듯하다. 기구에 탄 사람이 상단에 낫을 들고 위협하는 죽음의 신들로부터 도망치면서 모래주머니를 내던지는 모습이 보인다. 이 작품의 특색은 붉은색, 흰색, 파란색이 두드러진 점이다. 하단 왼편 의상에 칠해진 붉은색은 오른편 모자의 주름장식에서 반복되고, 하단 오른편 의상에 칠해진 파란색은 상단 왼편의 하늘과 호응한다. 색들이 대각선으로 조응하며 중앙의 죽음의 신이 입고 있는 하얀 수의를 에워싼다. 그리고 죽음의 신에서 후광처럼 부풀어 오른 흰 구름이 관람자의 시선을 기구로 유도한다.
앙소르는 평생 비주류 화가였으며, 대중의 찬사가 그에게 주어진 것은 일흔 살이 되었을 때였다. 1929년 알베르 1세가 그에게 남작의 작위를 수여했다. 말년에 앙소르는 초기에 사용한 밝은 서정적 색들을 즐겨 사용했으며, <가면이 있는 자화상>(1937)에서 보듯 색들이 점차 완화되어 갔으며 강렬한 표현주의 경향은 수그러들었다. <가면이 있는 자화상>은 장난스러운 음모에 휘말린 선량한 노인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작품으로 그가 말년에 편안해졌음을 알게 해준다. 말년의 작품에서 열정적이고 비타협적인 요소들이 사라졌다. 그는 아흔 살이 가까운 1949년 11월 19일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혼의 고백을 묘사한 에드바르트 뭉크
문학에 관심이 많은 뭉크는 자연히 인간 본질에 대한 불안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넋의 리얼리즘’으로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한 세계적인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와 대중의 비자주성과 위선적 신앙을 심하게 비판한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저서를 탐독했다. 그가 소장한 책 중에는 키르케고르와 더불어 실존주의의 선구자 니체의 전집과 14권의 키르케고르의 전집이 있었다. 키르케고르는 파스칼에 의해 사유된 불안이 인간을 사로잡는 까닭에 관해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등을 통해 깊이 분석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와는 달리 불안은 무nothing에서 비롯되는 인간 본성을 위협하는 근원적인 의식, 혹은 정서이므로 불안은 파악하기 어렵고 이에 집착하면 할수록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뭉크가 키르케고르 전집 제4권 『불안의 개념』을 여러 번 읽은 흔적이 있어, 불안이라는 인간의 근원적·감성적 잠재의식에 집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실존적ㆍ근원적 상태로서의 불안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개념은 곧 뭉크의 개념이기도 했다. 불안에서 절망에 이르게 되고 절망은 곧 파멸을 부른다. 불안은 <절규>외에도 <칼 요한 거리의 봄날>, <불안> 등에서도 나타났다. 뭉크는 보행하는 도시인들의 얼굴을 가면처럼 상징적으로 묘사하면서 현대인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절규>를 변형한 작품이 무려 50종이나 되어 이 모티프에 대한 뭉크의 애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절규>는 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그의 회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상징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절규>를 충분히 이해하면 나머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동적인 색의 사용, 자연의 꿈틀거리는 속성에 대한 이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충동과 변화에 대한 강렬한 표현이 <절규>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 세 가지는 그의 회화를 특징짓는 요소이다.
미국의 미술사학자이자 뉴욕대학 교수로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큐레이터를 역임한 로버트 로젠블럼은 파리의 인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페루의 미라가 <절규>에서의 해골과 같은 머리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결박당한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미라는 분명 <절규>에서의 뭉크와 흡사하다.
배경의 줄무늬 채색은 음파를 가시화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나타난 자연의 힘과 에너지가 물성화한 하늘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보다는 그의 정신을 지배하는 영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배가 물 위에 떠 있어 자연의 풍경으로 보이지만 이는 실제의 풍경이 아니라 그를 괴롭히는 불안, 공포, 사랑과 증오의 이중성을 나타내기 위한 은유적인 풍경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을 가시화한 내면의 자연인 것이다. <절규>에서 두려움에 치를 떠는 해골 같은 모습의 남자는 뭉크 자신이다. 그의 절규가 대지를 진동하고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일 정도로 절박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이해가 바람직한 이유는 그가 1891년 류머티즘에 의한 열병으로 니스에서 투병할 때 쓴 일기가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 두 친구와 함께 걷고 있었고, 해는 막 서산에 지고 있었는데 약간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돌연히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으며 탈진된 듯 느껴져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검정색에 가까운 진한 파란색 협만과 도시 위에 피의 불길이 넘실거렸으며, 친구들은 계속 걷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서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뭉크에게 있어 구현의 방식은 심리적ㆍ감정적 모티프를 강렬하게 다룸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동일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그가 독일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회화는 자연히 독일 표현주의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표현주의의 선구자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아버지 알퐁스 드 툴루즈 로트레크 몽파 백작은 이종사촌인 아델 타피에 드 셀레랑과 결혼하여 툴루즈 로트레크를 낳았다. 두 사람은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정략적인 결혼을 했기 때문에 곧 형식적인 부부관계만을 유지한 채 각자의 삶을 살았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13살 때 사고로 다리가 부러졌고, 다음해에는 다른 쪽 다리마저 골절되었다. 그렇지만 가문의 오랜 전통의 근친결혼으로 유전적으로 뼈에 이상 증세가 나타났고 10살 때 이미 그러한 증세가 두드러졌다. 그의 다리는 사고 후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았고, 성인이 된 후 그의 키는 152cm밖에 되지 않았다. 아델 백작부인이 그를 돌보았는데, 그는 어머니의 독점욕과 보호에 반항하게 되었고, 마침내 엘리트적 귀족생활에서 벗어나 몽마르트르의 카바레와 클럽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툴루즈 로트레크의 고유한 양식은 1890년 클럽 물랭 루주에서 그린 <물랭 루주에서 댄스>(1890)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인물들의 배치를 통해 공간의 깊이를 나타냈으며, 사람들에 둘러싸인 카바레의 배우 라 굴뤼와 발랑탱 한 쌍의 춤추는 장면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그는 2년 전에 개점한 카바레 물랭 루주의 커다란 홀에서 노란 램프의 빛을 받으며 환락을 좇는 사람들이 인기 절정에 이른 라 굴뤼와 발랑탱의 댄스에 매료된 장면을 묘사했다. 발랑탱의 반신상이 회색과 녹색이 섞인 실루엣으로 빛난다.
27살의 툴루즈 로트레크는 1891년에 포스터 <물랭 루주의 라 굴뤼>를 채색석판화로 그려 유명해졌다. 남은 인생 10년을 그는 판화를 제작하는 데 보내게 되었다. 그는 1892년에 수년 전에 만난 샹송 스타 아리스티드 브뤼앙을 홍보하는 포스터를 제작하면서 특수 글씨를 사용해 포스트 장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공간을 축소하고 세 가지 원색인 적색, 황색, 청색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으며, 자신이 직접 쓴 글씨로 더욱 예술적 느낌을 가미했다.
샹송 가수이자 작곡가 아리스티드 브뤼앙은 몽마르트르에 자신의 카바레를 운영하면서 매일 밤 그곳에서 손님들을 향해 옥설을 퍼부었지만, 그것마저 인기를 끌었다. 그가 인기를 끈 것은 노동자층의 삶에 관한 샹송을 불렀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디자인한 의상을 했는데, 예를 들면 까만 벨벳 양복에 길게 올라오는 부츠, 까만 망토와 진홍색 스카프를 맸으며, 테가 넓은 까만 모자를 착용했다. 그는 종종 테이블로 뛰어올라 노래를 부르면서 손님들을 꾸짖었고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지팡이를 사용했다.
1892년 브뤼앙이 툴루즈 로트레크에게 포스터 연작 중 첫 번째의 것을 의뢰했을 때에 브뤼앙은 스타로 이미 명성이 나 있었고 종종 더 큰 무대에도 출연하고 있었다. 첫 번째 포스터는 그가 앙바사되르에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의 것이다. 브뤼앙이 쓴 모자가 글씨 앙바사되르의 일부를 가리고 있는데, 이런 방법은 현재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툴루즈 로트레크의 표현주의 회화는 그가 1898년에 매춘부가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을 묘사한 <화장하는 푸풀 부인>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드가와 르누아르가 머리를 손질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회화와 비교하면 그의 회화가 매우 표현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울 앞에서 일상사를 한숨짓는 모습은 지속되는 허무의 감정이다. 이 작품은 그의 몸이 쇠약해지기 전에 완성된 것으로 인간의 모든 노력이 덧없음을 표현한 데서 그의 자화상과도 같다. 선천적으로 허약한 그는 하룻밤에도 여러 카바레를 전전하며 과음하는 등 몸을 쉬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남자에게 붙어 돈을 뜯어내려는 여자들과 술친구로 만난 평판 남자들이 많았다. 그는 의심이 깊어졌고, 친구에게조차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으며 자신을 점점 고독으로 몰아갔다. 게다가 불치병 매독에 걸려 죽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매독에 걸렸는데, 프란츠 슈베르트, 니체, 마네, 고갱, 반 고흐 등이 있다. 그는 1899년 거리에서 쓰러진 뒤 파리 근교의 정신병원에 보내졌다. 1901년 8월 중순 발작을 일으켰고 몸의 일부가 마비되었다. 그는 9월 9일 오전 2시 15분에 서른일곱 해의 생을 마감했다.
인상주의의 반동으로 일어난 야수주의 운동
패션모델과 같은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앉아 있는 마티스의 아내는 모자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당시 가장 유행하는 모자를 착용했다. 마티스가 <모자를 쓴 여인>(1905)에 사용한 색은 실재와는 동떨어져 관람자에게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였다. 모자 아래 보이는 머리카락은 붉은색이며, 얼굴은 연보라색, 녹색, 파란색 등 붓자국이 아무렇게나 성급하게 칠해진 것으로 보였다. 마티스는 실재를 묘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시각적 자극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그가 의도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며, 그의 말대로 감정에 질서를 부여한 것이다.
<열린 창: 콜리우르>에서 마티스는 고갱과 반 고흐로부터 주관적인 색으로 이뤄진 평면과 리듬감 있는 두터운 윤곽선을 도입했으며, 선의 두께와 간격을 조정하여 선의 효과에 미세한 차이를 주는 방법은 반 고흐의 드로잉에서 가져왔다. 세잔에게서는 총체화되는 장으로서의 회화적 표면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채색되지 않고 희게 남는 부분을 포함해 화면의 모든 것이 회화의 에너지를 증대시키는 구조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마티스는 자신의 의도를 명료하게 표현하며, 자신의 감정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작업했다. 이는 1905년 이후에 그린 회화는 물론 조형물에도 해당된다.
마티스는 1909년에 “회화는 평안, 집중, 마음의 평화를 호소하는 하나의 기도”라고 했다. 드로잉을 단순화하고 묘사의 기능에서 색을 해방시킨 특징이 현저하게 나타난 것이 <댄스>(1910)로 마티스의 장식적 취향에 원색, 율동적 힘이 결합된 양식의 완벽한 통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댄스>는 <생의 기쁨>(1906)의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가장 아카데믹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신중함을 보인 마티스는 콜리우르에서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배경을 구상한 뒤 개별적으로 습작하던 인물상을 홀로 또는 무리지어 배치하여 <생의 기쁨>을 완성했다. 그러나 결과는 아카데믹한 것이 아니었다. 조정되지 않은 순색의 색면들이 전례 없는 규모로 적용되어 화면에서 원색 사이의 과격한 충돌이 불가피하게 드러났다. 밝은 색의 두터운 윤곽선이 그처럼 경쾌한 아라베스크 리듬을 형성하거나 인체가 수은처럼 녹아내리는 듯 왜곡된 전례가 없었다.
마티스는 <댄스>에서 표현이 더욱 강한 회화의 언어를 창조하기 위해 회화적 수단을 극도로 단순화했다. 그는 우선 댄서들의 배경을 햇살 가득한 지중해 연안에서 신성한 언덕으로 바꾸었다. 또한 댄서의 숫자를 여섯 명에서 다섯 명으로 줄이고 속도와 운동감에 대한 표현을 강화했다. <댄스>가 프랑스 남부 연안의 작은 마을 콜리우르에서 본 민속춤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그는 부정하면서 댄스에 대한 영감을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본 프로방스 지방의 시골 댄스에서 얻었다고 했다. <댄스>와 <음악>에 사용된 색이 준 충격은 1940년대 후반 마크 로드코와 바넷 뉴먼의 거대한 캔버스화가 출현하기 전까지 근대 미술에서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이런 색의 사용은 “1평방센티미터의 파란색은 1평방미터의 파란색만큼 파랗지 않다”는 마티스의 원칙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댄스>는 <음악>(1910)과 함께 1910년 파리의 살롱 도톤에서 선보였고, 두 점이 물의를 일으키자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파리에 온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슈추킨조차 <댄스>를 자신의 집에 거는 것이 지나치게 경박해 보일 것을 염려하여 한동안 구입을 망설였다. 슈추킨은 마티스의 작품을 37점 소장하면서 가장 충실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피카소의 작품도 40점이나 구입했다.
<음악>은 서로 쳐다보는 한 명의 여성이 포함된 다섯 명의 악사로 구성된 장르화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완성작에 등장한 인물은 모두 남성이다. 모든 것이 부동 상태에 놓인 <음악>은 휘감아 도는 <댄스>의 운동과는 대조적이다. 악사 세 명의 입을 나타내는 검은 구멍은 너무도 음울하며, 바이올린 주자가 활을 그어 내리는 순간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당대의 러시아 최고 평론가 중 하나로 슈추킨이 늘 경청한 야코프 투겐홀트는 살롱 비평문에서 <음악>의 인물들을 “여태껏 없었던 최초의 악기, 그 소리에 최면이 걸린 늑대 소년”으로 묘사했다.
마티스는 1916년 말까지 실험적인 작업을 줄곧 했으나 니스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 작업에 변화가 일어났다. 남부의 나른한 분위기에 젖어 진솔하고 쾌락적인 회화, 특히 화려한 실내에서 여성 누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1940년대에 파피에 데쿠페papiers découpés, 즉 종이 오려붙이기를 대대적으로 활용했다. 입체주의의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와는 반대로 마티스가 오린 종이들은 그의 의도에 따라 불투명 수채로 미리 채색된 색지였다. 형태의 밑그림을 그리고 평편하게 채색하는 것이 아니라 색을 집적 재단하여 붙인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난 1954년 직전까지 중후하고 위엄 있는 느낌을 주는 파피에 데쿠페 작업을 했지만, 1905년부터 1916년까지 작업한 경쾌한 흥분과 강렬함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대양의 기억>(1953)은 그가 1930년에 타히티를 방문했을 때를 회상한 작품으로 색, 형태, 구도의 추상적 언어로 표현했으므로 비개인적인 것이 되었다. 이는 회화의 언어로만 내용을 전달하려고 한 것으로 초기의 작품과는 대비가 된다.
모든 혁명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들을 끌어당기는 브뤼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가 1906년에 작성하여 고딕문자로 목판화에 새긴 브뤼케 강령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진보에 대한 믿음, 신세대 관람자와 창조자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모든 젊은이를 부른다. 그리고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로서 기존의 제도권에 대항해 행동의 자유, 삶의 자유를 성취하고자 한다. 내면의 창조적 충동의 원천을 왜곡하지 않고 직접 표현하는 사람은 누구든 우리의 일원인 것이다.”
키르히너는 대도시의 존재, 특히 어두운 측면인 행인, 주점 주인, 댄서, 서커스단 등에 관심이 많았다. <드레스덴 거리>(1908)에서 그는 드레스덴을 활기차지만 신경이 곤두서는 만남의 장소로 표현했다. 가장자리에서 밀치락달치락하는 군중 때문에 화면은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고 가면 같은 얼굴을 한 여인들은 관람자를 압박한다. 특히 중앙의 작은 소녀는 기이한 모습이다. 인물들의 길게 늘어진 몸과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은 쇠락한 사회 분위기를 대변한다. 왜곡된 공간과 선정적인 주홍색이 불안을 야기하는 이 작품은 뭉크의 회화를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는 주황색, 녹색, 청색으로 표현된 대로를 관통하여 인물들을 감싸고 흐르는 전선의 전류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이런 느낌은 그가 1911년 브뤼케 멤버들과 함께 베를린에 정착한 뒤 그린 ‘거리’ 연작에서 극대화되었다.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자극적인 색과 왜곡된 원근법이 심화된 연작에 등장하는 매춘부와 그 고객인 인물들의 무감각한 태도는 불안을 더욱 가중시킨다.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키르히너의 양식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인물들이 뾰족하고 길어지며 색은 강렬하면서도 병들어 탁해졌으며, 얼굴은 신경질적이다. 그는 반항적이고 날카로운 양식으로 도시의 세속적인 화류계를 음울한 모티프로 선택했다.
직관을 중시한 에밀 놀데는 개인적인 깊은 경험에서 동기를 찾으면서 1909년부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황홀경을 담은 대형 종교화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회화 중 가장 훌륭한 것들은 1909년과 1912년 사이 그리스도 생애를 그린 연작이다. <그리스도와 어린이들>(1910)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어린이들을 독일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의 원시적 시각은 원시적 방식의 회화와 조화를 이뤘다. 그는 혼합하지 않은 색들을 직접 캔버스에 칠했으며, 투박한 구도를 사용했고, 두터워진 표면을 다듬지 않았다. 색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은 <오순절>(1909)에서 쉽게 발견된다. 물감을 두텁게 바르고 인물들을 깎아서 만든 것처럼 높은 밀도로 화면을 구성한 <오순절>에서 비좁게 밀집되어 있는 인물들이 자주색과 노란색의 강한 색들로 신비하게 보이며, 이런 효과는 훨훨 타오르는 불꽃형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왼편의 청록색 외투를 걸친 인물이 오른편에 있는 검은 의상을 한 인물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오른손을 잡음으로써 전경에 시선의 장벽이 만들어지어 그 뒤로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그리스도를 보호하는 구역이 된다.
전시회의 기획을 주요 활동으로 삼은 블라우에 라이터
바실리 칸딘스키는 1909년부터 작품에 ‘즉흥improvisation’이란 제목을 붙이기 시작했다. <즉흥 21a>(1911)에서 보듯 즉흥에 인물, 건물, 산 등의 형태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것들은 재현의 형태라기보다는 기호의 기능을 한다. ‘즉흥’이란 제목은 그가 가능한 한 자발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의식적인 제어작용을 극소화한 상태에서 형태들을 창조했음을 시사한다. ‘구성’이라고 붙인 제목의 작품들은 ‘즉흥’에 기반을 두고 계획적으로 확장시킨 것들이다. 그는 1913년에 완전추상에 도달했는데, 그의 추상은 물리학, 특히 원자가 궁극적으로 물질의 최소 단위가 아니라 그 자체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전자, 양자, 중성자의 덩어리라는 사실 그리고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및 질량과 에너지를 동일시하는 이론과 관련이 있다. 물리학에 관심이 많은 그는 『회고록』에 “원자의 분열은 내게 있어 세계의 붕괴와도 같았다”고 적었다.
프란츠 마르크는 1912년 10월 파리에서 로베르 들로네를 만났고, 색을 추상적으로 사용하려는 그의 오르피즘Orphism(혹은 동시주의)의 시도에 고무되어 형태를 해체하는 자신의 양식을 한층 더 발전시켜나갔다. 들로네의 영향을 받아 수정처럼 각진 면이 생기는 선을 주로 사용한 마르크는 <붉은 말과 파란 말>(1912)에서 말들을 각이 지게 그림과 동시에 자연의 풍경도 면으로 묘사했다. 기하학적 구조를 이루어 생기가 없어 보이는 이 작품에서 물질적인 붉은색이 정신적인 파란색과 대립한다. 두 색은 체념과 관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마르크는 말을 묘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말의 형상을 통해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는 동물이 사람보다 아름답고 정신적인 존재라고 믿었으며, 동물의 영적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색을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형태를 단순화하면서 리드미컬하게 구성했다.
그는 작은 단면의 리듬을 나타내기 위해 동물 본래의 형태와 운동을 이용했다. 동물의 눈 속에서 인간에게 상실된 천진함과 인간이 멀리하게 된 자연의 리듬 그리고 일체감을 발견한 그는 그것들을 상징적 이미지로서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는 명상의 대상으로 표현했다. 1914년을 지나면서 부분적으로는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구상적인 내용이 작품에서 거의 사라지고 더욱 추상화되었다. 말기 작품들은 사회적ㆍ교훈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표현적 추상으로 나아가는 독일 표현주의의 흐름이 절정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영국의 사회사상가이자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1819~1900)은 1853년에 이런 투사를 “감상적 허위”라고 비판했는데, 마르크의 회화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러스킨은 “동물의 눈에 자연이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를 상상하는 것만큼 예술가에게 신비로운 착상이 있을까? 말이나 독수리, 암사슴과 개는 어떻게 세계를 바라볼까? 누가 감히 암사슴의 눈에 비친 세계가 입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마르크가 추구한 것은 주어진 표현이 아니라 자신과 타자를 회화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감정이입의 추상이었다. 이런 생각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의 회화에는 인간과 동물의 공통적인 고통과 고뇌가 보인다. 그에게 자연의 고통은 모든 피조물을 결합시키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실제로 그는 캔버스 뒷면에 ‘모든 존재는 고통으로 불타오른다’고 적었다.
칸딘스키와 평생 우정을 나눈 스위스의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1879~1940)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바이올린 연주에서 급속한 발전을 보여 곧 시립오케스트라의 특별주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앞두고 화가가 될 것인가, 음악가가 될 것인가 하는 물음에 그는 화가를 선택했다.
클레는 정신병자의 미술에도 주목하여 같은 전시회 평에서 아동화에 대해 옹호한 뒤 “이와 거의 비슷한 현상이 정신병자에게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표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데 우리가 유치하거나 광기에 찬 언어를 고의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고 적었다.
정신병자의 미술에 대한 20세기 예술가들의 재평가는 원시미술에 대한 재평가 이후에 진행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정신병자의 미술과 아동미술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정신병자의 미술이 내면을 표현한다거나 관습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무의식을 직접 드러낸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이해는 실제와는 거리가 있었다. 과거 낭만주의자들도 미개인, 아이, 정신병자를 문명의 구속에서 벗어난 창조적 재능을 지닌 사람들로 간주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들을 다루는 매체는, 말하는 것에서 시각적인 것으로 이동했고 낭만주의 이후 진행된 정신병자의 미술에 대한 폄하로 인해 이런 관심은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폄하란 이 같은 미술이 시적 영감을 주는 모델보다는 심신 퇴보의 기호로 간주된 것을 말한다.
심신 발달 초기단계로의 퇴보에 대한 담론
퇴보에 대한 담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이탈리아 정신의학자이자 법의학자로 범죄인류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체사레 롬브로소(1835~1909)였다. 그는 범죄자의 두뇌 383개를 해부하고, 5,907명의 체격을 조사한 뒤 범죄자에게 두뇌나 그 밖의 일정한 신체적 특징이 있음을 밝혀내고 범죄자의 인류학적 특징에 착안했다. 이런 신체적 특징은 원시인에게 있었던 것이 격세유전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이런 특징을 지닌 사람은 선천적으로 범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격세유전은 ‘증조부모’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어떤 특정한 생김새가 부모보다는 그보다 더 앞선 조상을 닮는 경향을 말한다.
19세기에 팽배했던 인종생물학의 영향 아래 격세유전은 병리학적 의미를 덧입게 되어 이런 대물림이 한두 세대 이후에 재발되는 질병의 격세유전을 의미하게 되었다. 롬브로소는 범죄자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선천적 범죄자는 그 범죄적인 소질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지울 수는 없으나, 사회적으로 위험한 존재이므로 국가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7명의 정신병자들에 대한 연구서인 『천재와 광기』(1877)에는 책의 절반이 드로잉과 회화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여기서 롬브로소는 부조리하고 음란한 재현 형식들에서 퇴보를 찾아내고 정신병을 심신 발달 초기단계로의 퇴보로 보았다. 이것이 미개인, 아이, 정신병자를 혐오스런 것과 연관 짓는 하나의 모델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 모델이 그들을 때 묻지 않은 창조성과 연관 짓는 목가적인 이해 방식과 함께 20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퇴보라는 담론은 정신의학을 거쳐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정신분석학에서 정신병자의 미술에 대한 진단적 독해 방식과 함께 계속되었다. 이런 접근법을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역으로 적용해 담론을 확장시켰다. 그는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와 같은 제정신을 지닌 대가들의 작품에서 신경증이나 정신이상의 징후를 찾으려고 했다.
20세기에 들어서 독일의 정신의학자로 근대 정신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밀 그레펠린(1856~1926)과 스위스의 심리학자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도입해 연구그룹을 만든 오이겐 브로일러(1857~1939)가 임상실험을 통해 정신분열증에 대한 연구를 확대했다. 자아와의 관계가 파괴된 것으로 이해되는 정신분열증은 사고의 분열이나 감정의 상실로 나타나는데, 이 같은 주체성의 분열이 파괴적인 회화를 통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런 진단적 접근법은 미술 행위 자체의 본성을 알아내기 위해 정신병자의 미술을 연구한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폴 뫼니에의 『정신병자의 미술 』(1907)이나 20세기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독일의 정신의학자이자 미술사학자 한스 프린츠호른(1866~1933)의 『정신병자의 조형 표현: 형태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을 위하여』(1922)의 도전에 직면했다. 정신병리학을 연구하기 전 빈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그는 하이델베르크 정신의학진료소에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인 정신병자 435명의 작품 4,500여 점을 수집한 뒤 그중 187점의 이미지를 『정신병자의 조형 표현: 형태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을 위하여』에 실었다. 「이론편」, 열 명의 「분열증세의 대가」에 대한 사례연구, 「결과와 문제」라는 일종의 결론을 담고 있는 이 책에서 그는 여섯 개의 충동, 즉 표현, 유희, 장식적 정교함, 일정한 패턴을 갖는 배열, 강박적인 모사, 상징체계 세우기의 상호작용이 분열증 환자들의 각각의 이미지를 결정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런 충동들은 모든 미술에서도 발견되는 것이었다. 프린츠호른은 표현, 유희의 두 충동을 나머지 네 충동에 대한 교정수단으로 삼을 때조차 예술가와 정신분열증 환자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아무리 고독한 예술가라도 현실과의 접촉을 유지한다. ... 반면 정신분열증 환자는 인간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리고 그는 인간과의 관계를 재설정할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수도 없다. ... 이 회화들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자폐적인 철저한 고립 그리고 정신병적 소외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섬뜩한 유아론이다. 우리는 이 회화들로부터 정신분열증적 형태의 본질을 발견했다”고 적었다.
클레는 한스 프린츠호른의 『정신병자의 조형 표현: 형태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을 위하여』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책에 실린 작품들에 공감했다. 그는 때로 글쓰기와 드로잉을 뒤섞어 놓은 환상적인 방식을 사용했다. 그런 회화는 “말과 회화의 샐러드”란 비판을 자초했지만, 클레의 실험은 형식적이기보다는 심리적인 혼돈을 연상시키는 신체의 왜곡을 통해 주로 진행되었다. 때로 그는 아동화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인 인물의 눈이나 머리를 크게 확대했으며, 신체의 다른 부위들을 확대해 프린츠호른이 정신분열증 환자의 재현에 나타나는 경향으로 지적한 장식적으로 반복되는 문양을 만들었다. 이런 점은 <두 음악가의 만남>(1922), <늙은 비너스>(, <의상을 입은 꼭두각시> 등에서 드러난다. 그는 때로 얼굴 같은 신체의 특정한 부분을 다른 부분에서 반복했는데, 이는 정신분열증의 한 증상인 자아방향상실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양상은 훗날 장 뒤뷔페의 회화에서도 나타난다. 신체 이미지에 대한 이런 관심이 클레로 하여금 정신병자의 미술에서처럼 경계선을 역설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게 해주었다. 경계선은 지워지거나 과장되고, 때로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다시 지워져버리는 수준에 이르렀다.
분리파 결성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독보적인 사건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특징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영향이다. 억압된 본능적 충동의 분투를 그려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1900)에 따르면 용납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은 무의식 속에서 억제된 채 보존되고 욕망은 비이성적 행동을 통해 일부 사람들에게 분출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꿈으로 표현된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의 예술가들은 억압된 본능과 무의식적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을 표현하기 위해 꿈과 환상, 원시성, 어린이나 정신병자에 대한 관심, 주체성과 성욕의 작용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프로이트의 연구에 따르면 꿈은 수수께끼로, 표현되고자 안간힘을 쓰는 비밀스런 소망과 이를 억누르려는 내부 검열자가 만들어낸 토막 난 내러티브 이미지들이다.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의 도발적인 인물화에서 주로 나타난 이러한 갈등은 그림 속 모델과 화가 모두에게 내재해 있는 표현과 억압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들의 회화는 다른 어떤 모더니즘 양식보다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내리기에 적합했다.
프로이트의 영향이 폭넓게 절정을 이룬 때는 1920년대 초현실주의가 유럽의 가장 강력한 운동으로 전개될 때였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모더니즘 미술과 교차했다. 1979년대와 1980년대의 페미니즘이 정신분석학 이념을 이론적ㆍ정치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문화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에서 비롯된 욕망의 갈등이 빚어낸 결과로 보는 프로이트의 시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게 되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기초 개념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심리적 삶을 사로잡고 있는 갈망, 공포, 금지의 복합체이다.
구스타브 클림트는 1894년에 신설된 빈대학에서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라는 계몽주의적인 주제로 천장화 세 점 <철학>, <의학>, <법학>을 의뢰받았다. 그것들은 1945년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규정되어 임멘도르프 궁전에서 불태워졌지만, 그것들이 장식될 때만 해도 큰 논란에 휩싸였다. 10년 동안 이 작업에 매달린 그는 189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첫 작품 <철학>을 선보였고, 금메달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지만, 빈은 파리와 달리 근대 미술이 성장할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해 그가 1901년 교수의 물망에 올랐더라도 보수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선임되지 못할 정도였다.
<철학>은 클림트의 세계관과 그의 고유한 양식이 빚어낸 작품이다. 여기에는 철학자들로 가득 찬 판테온 대신 뒤얽힌 육체들이 비정형의 공간 속에서 행렬을 이루며, 중앙에는 애매하게 표현된 스핑크스가 이들을 내려다보는 장면이고, 하단에 아테나라기보다는 메두사를 연상시키는 밝게 빛나는 두상이 배치되어 있다. 그는 <철학>에 관해 “왼편의 인물들은 생성, 결실, 소멸을 표현한 것이다. 오른편은 수수께끼 같은 지구, 아래쪽에서 떠오르는 것은 빛의 형상, 즉 지식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는 모든 세력에 대한 어둠의 승리를 표현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형이상학적 수수께끼를 자신의 방식대로 해명하면서 현대인이 겪는 질병, 늙어감, 빈곤 등을 추한 모습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그는 <철학>을 “이 작품은 대학 교수들이 보고 사랑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는 나의 것과 다르므로 그들이 헌납한 홀에 그들이 묘사하기를 바랐던 관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로 옹호했다.
1901년에 공개된 <의학>도 대학 교수들이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여기서는 <철학>보다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몇몇은 관능적인 혼수상태에 빠져있고, 몇몇은 시체와 해골 그리고 한 덩어리가 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클림트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건강의 여신 히기에이아가 뱀에게 망각의 강물을 마시게 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망각의 강은 저승에 있는 강으로 이 강물을 마시면 생전의 모든 것을 망각하게 된다. 클림트는 그리스 신화를 통해 삶과 죽음, 인간의 생기에 넘치는 본능적 에너지 그리고 개인의 붕괴의 조화를 표현하려고 했다. 화면에 홀로 있는 외로운 인간이 집단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으며, 해골로 상징되는 죽음이 인간들의 목표 없는 행동 속에 있다. 누드 여인의 뻗친 왼팔과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누드 남자의 뻗친 왼팔이 삶과 죽음을 연결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은유적인 메시지를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냈는데, 화면 상단 오른편 구석에 임산부가 생명의 잉태로 상징되어 있고, 맞은편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생명의 성장으로 상징되어 있으며, 히기에이아 머리 위에 태아의 모습을 한 아이와 해골 왼편의 늙은이의 모습이 삶의 과정으로 상징되어 있다. 의학으로 상징되는 히기에이아는 유일하게 옷을 걸쳤는데, 인류를 향해 냉담하게 등을 돌리고 선 채 남성을 유혹해 죽음이나 고통 등 극한 상황으로 치닫게 만드는 ‘숙명의 여인’을 의미하는 팜 파탈에 가까운 존재이다. 빈대학은 모욕적인 이 작품을 거듭 거부했고, 클림트는 이런 처사를 비난했다.
클림트는 <법학>을 형 집행의 광경을 지옥으로 묘사하여 대학의 처사에 응수했다. 화면에는 문어처럼 생긴 동물이 벌거벗은 늙은이로 묘사된 죄인을 포획하고, 늙은이는 머리를 떨어뜨린 채 벌을 받기 위해 서 있다. 진실, 정의, 법이 세 여신의 모습으로 상징되었다. 상단의 세 여인은 진실, 정의, 법의 은총이고, 하단의 세 누드는 상징화된 여신들이다. 클림트는 그리스의 비극시인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 「공양하는 여자들」, 「자비의 여신들」의 3부작 『오레스테이아』에서 영감을 받아 그리면서 아가멤논이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귀국하던 날 그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살해되자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이아가 귀국하여 누이 엘렉트라와 협력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를 살해한 죄로 여신들에게 쫓기는 이야기를 근대적으로 해석했다. 앙심을 품은 여신들 앞에 오레스테이아가 벌을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서 있다. 이 작품을 거세당하는 데 대해 공포에 질린 남자가 무기력한 모습으로 올가미에 걸려 있고, 이 남자를 포획하고 있는 여자의 자궁처럼 생긴 문어 같은 기괴한 동물은 고르곤 자매 중 하나인 머리가 뱀처럼 생긴 메두사처럼 보인다고 말한 미술사학자가 있고, 예술가와 사회의 충돌이 정신을 혼란시키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올가미에 걸린 남자를 클림트 자신으로 보는 미술사학자도 있다. 사회의 에토스ethos(도덕적 특질)를 개인적인 파토스pathos(정념, 비애감)로 바꾼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법에 대한 클림트의 개념이 죄와 벌임을 의미한다.
클림트가 신화를 근대적으로 해석했으므로 그의 회화에는 고대와 근대를 연결하는 고리가 있다. 이는 본질에 대한 사고로서 신화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 신화에 대한 그의 사고는 애욕주의와 맞물려 있는데 그는 여성을, 남성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육체를 가진 아름다운 이성으로 보았으며, 처녀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꿈과 환상에 도취된 감성적으로 민감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요염한 제스처로 남성의 정신에 깊이 파고드는 동물적 감각이 농후한 존재로 나타났다. 그는 성적 충동을 스스로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는 여인을 묘사했으며, 자위행위로 노골적인 성의 제스처를 취하는 여인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몰래 훔쳐보는 호기심에 대한 만족과 성적 자극을 제공한다.
여성의 자위행위 장면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이 <다나에>(1907~08)이다. 클림트는 다나에에 대한 제우스의 사랑을 금빛 소나기로 묘사했는데, 다나에는 자신의 행위에 도취되어 희열을 느끼고 있다. 많은 화가들이 다나에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지만, 클림트는 신화의 내용을 모두 제거하고 다나에가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를 임신하는 장면만을 묘사했다.
인간을 혐오스러운 이미지로 바꾼 에곤 실레
에곤 실레가 1907년에 그린 <물의 영 I>은 클림트의 <물뱀 II>의 모티프와 기법을 따르고 있음을 본다. 클림트가 쿤스트샤우에 발표한 <다나에>를 보고 대가의 장식적 요소, 애욕주의, 신화적 모티프에 매료된 실레는 1909년에 비슷한 형태의 <다나에>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클림트의 물결 모양의 감각적인 선의 사용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날카롭고 불안을 야기하는 드로잉 양식으로 변형시켰다.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타계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그는 유화 3백여 점, 드로잉과 수채화, 판화 3천여 점을 제작했다. 그는 핏빛을 띤 붉은색과 흙빛을 띤 갈색, 옅은 노란색과 음침한 검은색을 사용하여 앙상한 나무들이 서 있는 우울한 풍경과 고통 받는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절망적인 회화를 통해 비애감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더 악명 높은 것은 성적으로 표현된 사춘기 소녀들을 묘사한 드로잉과 역시 노골적인 자세로 그린 자화상이었다. 클림트와 코코슈카가 사디즘과 마조히즘 충동 사이의 상호관계를 탐구했다면, 실레는 도착적인 쾌락에 대한 프로이트의 또 다른 개념인 관음증과 노출증을 탐구했다. 거울이나 관람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모습이 등장하는 그의 자화상에서는 그의 응시와 관람자의 시선 간의 차이가 용해되어 뒤섞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일한 관람자, 스스로 내보인 모습을 은밀하게 엿보는 외로운 관음증 환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실레는 자신의 이미지를 거만하게 자랑하기보다는 오히려 상처로 인해 애처롭게 표현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실레의 초상화에 나타난 병적 제스처는 잠재의식의 표현이다. 1910년부터 이런 그림을 그렸는데 모델은 정상적인 사람들이지만 그런 제스처를 취하게 했으며, 모델들 가운데 일부는 거의 미친 사람의 제스처를 취했다. 그는 주로 배경을 여백으로 열어놓고 모델의 표정, 손짓, 몸짓으로 표현을 두드러지게 했다. <서 있는 누드 소녀>는 여동생 게르티를 모델로 한 것들이고, <에로스>은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다.
표현주의를 지극히 개인적으로 변형시킨 오스카르 코코슈카
코코슈카는 1906년부터 정물화와 초상화 연작을 그렸으며 초상화들은 심리적 통찰과 그가 모델의 '긴장감으로 가득 찬 폐쇄적인 개성'이라고 일컬은 것을 드러낸 표현으로 유명하다. <한스 티체와 에리카 티체>(1909)는 오스트리아 미술사학자 한스 티체 부부를 그린 것으로 두 사람의 심리적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코코슈카 자신이 해독한 개성의 가능성으로 그 자신의 성찰에 대한 결과이다.
그는 1914년에 그와 알마 말러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대형 알레고리화 중 첫 번째 작품인 <폭풍>을 제작했는데, 이 작품은 <바람의 신부>로도 불린다. 알마가 코코슈카의 왼팔에 머리를 대고 쉬는 장면으로 코코슈카는 알마의 몸을 진주처럼 매끄럽게 묘사한 데 반해 자신의 몸은 거친 붓질로 대조가 되게 했다. 오스트리아 여류 작곡가 알마 말러는 미술 공부를 했고 구스타프 클림트와 가까웠으며, 클림트는 그녀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로부터 작곡을 배운 그녀는 1902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한 뒤 계속해서 작곡했다. 남편 구스타프는 「교향곡 제6번」에서 알마를 음악적으로 묘사했고, 「교향곡 제8번」을 그녀에게 헌정했다. 구스타프가 1911년에 심장병으로 사망한 뒤 알마는 코코슈카와 사랑에 빠졌고, 1915년에는 발터 그로피우스와 결혼했지만, 1차 세계대전 후 이혼했다. 1929년에는 50세의 나이로 유대계 독일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1890~1945)과 결혼했으며, 1930년대에 베르펠 부부는 독일을 떠나 전전하다가 미국에 정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