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 미술관 강의 1

귀스타브 쿠르베와 에두아르 마네의 공통점과 차이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77)의 <화가의 화실 The Painter's Studio>은 쿠르베의 작업실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는 한때 그의 작업실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모인 사실을 기록한 회화가 아니다.

<화가의 화실>은 회화적 증언으로 그가 역설하고자 하는 바는 예술가란 오로지 자신의 경험만을 그릴 뿐이고, 모델, 친구, 후원자 등 모든 사람은 예술가의 창조적 충동에 비하면 부차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역사화의 위상을 노동계층에 기반을 둔 저항세력인 새로운 대중으로 전이시킨 이 작품은 젊은 화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83)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마네의 초기 작품 <늙은 음악가 The Old Musician>(1862년경)와 <튈르리공원의 음악회 La Musique aux Tuileries>(1862)는 <화가의 화실>의 왼편 절반, 오른편 절반과 관련이 있다.
<늙은 음악가>는 마네가 자신의 모델들을 무작위로 그린 것이다.
집시소녀, 주정뱅이, 벨라스케스의 회화에 등장하는 현인 모습으로서의 걸인, 장 앙투안 와토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아이의 현존은 심리적으로 잘 엮이지 않는 모델들이지만 마네의 회화적 목적에 따라 한데 모였다.
이는 쿠르베가 <화가의 화실>의 왼편에 모델들을 잡다하게 뒤섞어놓고 타인들로 처리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중요하지 않게 다룬 것과 같다.
반면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에서는 1860년대 초 호화로운 파리를 배경으로 왼편 끝 부분에 친구들과 함께 서 있는 마네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일견 실재를 충실히 묘사한 것으로 보이나, 전체의 구도가 인위적이라는 것을 이내 알게 된다.
<돌 깨는 사람들 Stonebreakers>(1849)에서 보듯 쿠르베에게 사실주의란 인도주의 미술이었으며, 새로운 미술의 탄생을 의미했다. 화가의 주관적 느낌을 무시하고 사물을 보이는 대로 재현함으로써 회화 자체가 사실임을 강조했다. 농민의 시적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의 그림을 그린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와 달리 쿠르베는 화가의 감정을 회화에서 배제했으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에 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재현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주제가 추하거나 저속하더라도 장엄함, 혹은 위엄을 불어넣었으므로 오늘날 우리는 그의 회화에서 당대 프랑스의 생생한 현실을 사진 보듯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회화의 목적을 더 이상 이야기를 전하거나, 성서의 내용, 또는 역사적 사건들을 교육적인 목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나 일시적 환경의 변화를 기록하는 것으로 보았다.
화가의 감정을 전달하지 않은 점에서 마네도 사실주의자로 불리지만 그는 쿠르베와 달리 유지 안료를 캔버스에 직접 칠해 밝은 부분을 얻고 마르기 전에 중간 색조나 어두운 안료를 그 위에 덧칠하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긴장과 동적인 요소를 조장함으로써 쿠르베와 거리를 두었다. 마네는 자의식을 중시하면서 배경을 단색으로 평편하게 했고, 회화를 위해서라면 상상 가능한 것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마네의 <그리스도와 천사 Les Anges au Tombeau du Christ>를 보고 한 번도 천사를 본 적이 없으면서 어떻게 확신에 차서 천사를 자세히 묘사할 수 있느냐고 쿠르베가 비난 한 것이 두 사람 회화의 본질적 차이를 말해준다.
사실주의는 오랫동안 미술의 덕목이었으며 어떻게 재현하는가가 회화의 의제였다. 모더니즘은 재현의 의제로부터 어떻게 회화가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응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재현의 조건이 핵심이 되고 회화가 회화 자체의 주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린버그는 논문 「모더니스트 회화」에서 재현의 의제로부터 재현의 수단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아 새로운 의제로 제기했다는 측면에서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마네를 꼽았다.
마네의 자의식self-awareness은 모더니즘의 근간이 되었다. 그가 살롱에 마지막으로 출품한 <폴리 베르제르의 주점 The Bar at the Folies-Bergere>(1882)은 자의식이 심화되어 나타난 작품이다.
폴리 베르제르 주점은 카페, 카바레, 서커스 공연장이었으며, 입장하는 데 2프랑만 내면 되었다. 1869년에 영업을 시작해 브루주아들이 매춘 장소, 혹은 불륜의 한 쌍이 만나서 즐기는 곳으로 알려진 이곳은 상점점원, 가수, 배우, 댄서, 한량에서 예술가, 작가, 사업가, 은행가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출입했으며, 창녀들의 연령도 다양했다.
마네는 화면 중앙에 선 웨이트리스 쉬종으로 하여금 유니폼을 입은 채 자신의 작업실로 오게 했다. 그는 대리석으로 카운터를 만들고 그녀에게 카운터 뒤에 서서 포즈를 취하게 했다. 꽃과 술병들은 그에 의해 연출되었다. 마네는 쉬종의 가슴에 작은 꽃다발을 달게 하고 관람자를 향해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보게 했다.
<풀밭에서의 오찬(피크닉)>에서처럼 여기서도 모델 쉬종이 관람자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쉬종 뒤 둥글게 구부러진 거울 때문에 오른편에 손님의 모습이 보임으로써 관람자는 자신의 위치가 어정쩡해지고 불확실해짐을 느끼게 된다.
마네가 회화를 시지각적 자아반영으로 파악한 데서 미술품을 순수하게 자아충족적이고 자아반영적인 체험으로 파악하는 미술지상주의가 이후 형식주의 평론가와 미술사학자에게 회화적 자아반영이란 믿음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모더니스트 회화 Modernist Painting」(1960)에서 모더니즘의 역사가 마네로부터 인상주의자들을 거쳐, “자신의 소묘와 디자인이 캔버스의 직사각형에 더 명쾌하게 일치되도록 하려고 정확함을 포기한” 폴 세잔에 이르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평면성이 다른 어떤 미술과도 공유되지 않는 회화의 유일한 조건이기 때문에 모더니즘 회화는 평면성 자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그렇지만 모티프에 집중하고 회화의 고유한 구조를 끈기 있게 현실화시킴으로써 자신이 지각하는 이미지에 견실한 내용을 부여하는 재현의 방법을 발견한 점에서 세잔을 새로운 미술의 근원적 존재로 인식하는 미술사학자들은 근대 회화의 출발을 세잔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이 모더니즘에 대한 합의가 미술사에서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포스트모던의 담론도 모더니즘의 담론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이론에 의해 명확하지 않다.

새로운 회화의 지평 후기인상주의
폴 세잔
<생트빅투아르 산 Mont Sainte-Victoire>에서 보듯이 세잔은 생트빅투아르 산을 그리면서 개개의 집과 불필요한 세부묘사를 생략하고 자연 속에 내재된 기하학적 구조를 각진 색면으로 만들어 화면 전체에 안정적 분위기의 요소가 되게 만들었다. 집과 들판의 기하 형태들을 어두운 색으로 스케치하듯 개략적으로 묘사하면서 뒤편 시골을 수직적 붓질로 청색 나무, 울타리와 함께 녹색과 황토색으로 구분이 되게 했다. 오른편 산 앞에 아치교가 보이지만 이런 눈에 띄는 지형물이 연작에서 점차 생략되었다. 그는 타계하기 전 프랑스의 화가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1868~1941)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연을 원통형, 구형, 원뿔모양으로 다뤄야 하고 모든 것을 원근법 속에 넣어야 한다. 즉 물체와 평면의 각 측면이 한 중심점을 향해 모이도록 해야 한다”는 말로 자신의 목표를 밝혔다.

폴 고갱
<설교 후의 영상: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은 고갱의 최초 걸작이다. 그는 반 고흐에게 이 작품에 관해 “실제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임을 강조했다. 이것은 그가 인간의 생태를 자연현상으로 보는 자연주의로부터 극적으로 떠났음을 고지하며 어느 화가의 것보다 더 과격하게 왜곡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의도적 왜곡은 훗날 출현할 표현주의의 앞선 실험이기도 하다.
자의적으로 사용한 색이 감성적으로 힘 있는 회화가 되게 했음을 본다. 고상한 관점은 시골뜨기 무리 앞에 전개되는 환상적인 장면으로 환상을 통해 은유적인 방법으로 진실에 도달하려는 그의 의도가 읽힌다.
당시 내면의 세계를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가에 관해 화가들마다 접근방법이 다 달랐는데, 그의 방법은 정확하고 완벽했다. 여기서 사용한 밝은 붉은색은 관람자로 하여금 감성적으로 느끼게 해줄 뿐만 아니라 천사와 야곱이 씨름하는 장면을 전면으로 내밀어 그들의 위치가 어딘지 분명하게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사과나무를 대각선으로 구성했으므로 이런 효과가 증폭되었으며 공간이 앞으로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고갱의 작업은 절충적이었는데, 다양한 문화에 출처를 둔 모티프들을 이상한 방식으로 조합했다. <오늘은 장에 가지 않을 거야 Ta Matete>(1892)에 등장하는 매춘부로서의 타히티 여성들의 포즈는 이집트 18왕조 무덤벽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타히티 체류가 그의 양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그가 일본 판화에서 발전시킨 강렬한 색과 브르타뉴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돌 조형물에서 유래한 대담한 윤곽선이 그대로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에 즐겨 그리던 모티프 상당수가 지속되었다.
고갱의 절충주의는 전통을 참조하면서 아카데미 누드화 전통뿐만 아니라 그것의 아방가르드적 전복이라는 전통도 함께 참조한 것이다. 또한 그는 <저승사자>(1892)를 통해 대가들에게 경의를 표했는데, 여기에는 티치아노와 앵그르뿐만 아니라 마네도 포함된다.
여성의 신체를 두고 대가의 지위를 탐하는 경쟁은 20세기에 들어서도 지속되었으며, 마티스, 피카소, 키르히너 등은 <올랭피아>와 <저승사자>라는 이중의 선례와 경쟁해야 만했다. 마티스의 <청색 누드: 비스크라의 기념품 The Blue Nude: Souvenir of Biskra>(1906),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1906~07), 키르히너의 <일본 우산 아래의 소녀 Girl under a Japanese Parasol>(1909년경) 등이 경쟁했다. 그들 모두 부족미술이나 원시적 신체에 대한 환상을 취해 서양 전통 밖으로 나가는 것이 서양 전통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보았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이 타자가 근대 미술의 형식적 변증법에 속해 있었다. 고갱은 회화뿐만 아니라 삶의 영위에 있어서도 새로운 방식을 찾기 위해 타히티로 떠났다. 그러나 자신의 터전과 가까운 장소, 즉 출생지의 전통, 민속미술, 농경문화 등에서도 타자성은 추구될 수 있다. 타자성alterity이란 자기 자신의 관점을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고갱이 타계하기 2년 전인 1901년부터 피카소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이 그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마티스도 <사치, 고요, 쾌락>(1904~05)과 <생의 기쁨>(1905~06)에서 이런 낙원을 표현했지만, 그의 회화는 원시적이라기보다는 목가적으로 나타났다. 마티스도 피카소처럼 1906년에 부족미술을 접했으나 그의 관심사는 주제가 아닌 형식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형식적 관심이 고갱의 회고전이 열린 해에 마티스와 피카소 모두를 고갱에게서 멀어지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회화의 구조적 기초를 다지고자 한 두 사람은 고갱과 오세아니아의 모티프에서 벗어나 세잔과 아프리카 조형물로 관심을 돌렸다.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가 그가 가장 추한 회화로 꼽은 <밤의 카페>는 1888년 9월 아를에서 수채와 유채로 그린 것으로 실재의 장소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표현적인 회화이다. 고갱이 자신이 있는 곳에 도착하기를 고대하면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그린 것으로 그의 정신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 회화이다. 내면의 충동을 고스란히 표현하기 위해 그는 처음으로 과장법을 사용했다. 그는 카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어둠의 힘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감정적 유발을 카페의 “핏빛 붉은색”과 “부드럽고 약한 푸른색”의 대조로 표현하려고 했다. “붉은색과 푸른색을 통해 지독한 인간의 열정”을 나타내려고 했으므로 상징주의 회화가 되었다.
반 고흐가 20세기 미술에 기여한 것은 자유로운 감정을 폭발시키는 표현주의 회화를 창조한 것이다. 그의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1889년 6월 17~18일)은 높은 데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이지만 실재한 장면이 아니라 상상의 풍경이다. 그의 삶 마지막 1년을 남겨놓고 간질과 싸우며 그린 것이다. 자유로운 감정이 아무런 억제 없이 폭발된 것으로 표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그의 소신이 강렬하게 드러난 회화이다. 그는 이 작품에 관해 조금밖에 언급하지 않았고 또 언제 그렸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회화에서 보는 장소는 생레미의 어느 곳일 수도 있지만 네덜란드의 그의 고향 누에넨의 풍경일 수도 있는 것이 네덜란드의 뾰족한 교회 지붕이 보이기 때문이다. 북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고딕 건물이 프랑스 풍경화에 삽입된 것이다. 이처럼 강렬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는 이전에 그린 적이 없었다. 세잔은 입체주의의 선구자로, 고갱은 아르 누보의 선구자로, 반 고흐는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각각 20세기 미술에 원동력이 되었다.

근대 조형물의 출발
<지옥의 문>(캐터린 81)과 관련된 작품들
<지옥의 문>의 일부로서 제작된 186점의 인물상 가운데 많은 작품들이 13세기 피사의 귀족으로 왕권을 노렸으나 적들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아들들과 함께 탑에 갇혀 굶어죽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 33번째의 노래의 소재가 된 인물 우골리노Ugolino Gherardesca 백작을 묘사한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 Ugolino and His Sons>(1881~82)를 포함하여 <생각하는 사람 The Thinker>(1880~81, 1902~04년에 확대), <추락하는 남자 The Falling Man>(1882),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Paolo and Francesca>(1881~84년경), <탐욕과 정욕 Avarice and Lust>(1881~84년경) 등 유명한 단독상의 기초가 되었다.
로댕의 조형물에 나타난 근대성은 시각적 느낌을 묘사한 사실주의이다. 로댕 이전에도 조형물 분야에서 사실주의자들이 있었지만, 로댕은 그가 늘 보여주려고 했던 기술에서 완벽했다. 그는 조형물의 합당한 요소로 부피와 양감, 빈 공간과 융기의 상호작용, 면과 윤곽선의 율동적 표현, 개념의 통일성을 꼽았다. 후대의 많은 조각가들은 조형적 가치 기준에 적합한 감각을 조형물에 도입한 사람으로 로댕을 꼽는다.

빛과 운동에 매우 민감한 메다르도 로소
로댕의 시대에 그의 진정한 경쟁자는 이탈리아 조각가 메다르도 로소Medardo Rosso(1858~1928)였다. 생애 대부분을 파리에서 작업한 로소는 로댕에 비해 인상주의에 가까웠으며, 사회적 사실주의자였다. 그는 일상의 모습을 포착하면서 인상주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일견에 본 것 같은 장면을 재현하면서 사실적 묘사에서 벗어나 오로지 형상화된 표면만을 처리했다. 그가 진흙 모델을 석회로 형을 뜬 후 왁스를 입혔으므로 인상주의 회화에 비해 더욱 적극적으로 표면의 감촉에 반응할 수 있었다. 1884~85년 파리의 달루에 있는 작업실에서 작업하면서 그는 종종 로댕을 만났고 그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로댕의 <발자크의 머리 Head of Balzac>(1897)와 로소의 <아파트 관리인 The Concierge>(1883~84)을 비교하면 로댕에 비해 로소가 빛과 운동에 매우 민감했음을 알 수 있다.
<황금기 The Golden Age>(1886)는 부드러운 왁스에 잠긴 것 같은 특성을 지닌 조형물로 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행복한 순간을 보여준다. 사실적 재현에서 벗어나면 얼마나 표현을 강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좋은 예이다. 그는 인상주의와 고전주의 사이에서 절충주의를 선택했다. 절충주의eclecticism란 자유로운 선택과 자신의 양식 이외의 다른 양식들을 혼합하는 장식을 의미한다. 양식을 먼 시대에서 빌려오는 것과 동시대에서 빌려오는 것은 윤리적으로 표절의 의미에서 차이가 있지만, 차용한 양식을 완전히 소화했다면 그 근원은 미학적 측면에서 별 무리가 없다.

아라베스크에 힘을 실은 앙리 마티스
마티스가 조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899년부터였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서 조형물을 제작했다”고 했지만, 조형물을 매우 진지하게 다뤘다. 아라베스크는 채색한 플라스터 조형물 <마들렌 I Madeleine I>(1901)(내서 83)에서 과장되게 나타났다. 이런 표현주의 경향은 그의 회화 <파란색 누드 습작 Nude Study in Blue>(1899~1900)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그가 평생 추구한 점이다.
아라베스크는 1909년과 1929년 사이에 제작한 ‘등 The Backs’ 연작(1909~29)에서 절정을 이뤘다. 이 연작은 릴리프이지만 그의 조형물 양식의 발전을 요약해준다. <등 I>의 벽에 기댄 여인의 누드 형상은 조형물 장르의 일반적 규범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낯선 자세로 사실주의적이다. <등 II>에서는 등에 살을 붙이는 방식과 배경처리방식 사이의 구별이 모호해지다가 <등 III>에 가는 형상이 지지체support의 경계 부분에서 합쳐지다시피 하여 극적으로 단순화된다. 팔다리가 경직된 몸체로 바뀌고, 머리카락의 기다란 꼬리 모양은 머리에서 내려와 위를 향해 거꾸로 뻗은 다리와 조화를 이룬다.

격정적인 낭만주의를 고전적 절제와 감성으로 조절한 아리스티드 마욜
<밤 Night>(1902~09년경)과 <지중해 연안 주민 The Mediterranean>(1902~05)은 그의 대표작으로 미동하지 않은 채 생각에 빠진 여인의 모습으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교된다. 마욜의 누드는 자족적이고 닫힌 형태로 나타나며, 대부분의 조형물이 <지중해 연안 주민>의 변형이다. 그의 누드는 다른 포즈를 취하지만 본질적은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누드는 아무런 심리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고, 쉬는 자세가 암시하는 것은 고요한 생각 외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고딕 미술의 정신을 내면화한 빌헬름 렘브루크
<올라가는 젊은이 Emporsteigender Juengling>(1913)는 20세기 조형미술에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극도로 길게 만들어진 사지는 정신적 큰 걸음을 의미하며 주변 공간을 걸음 폭 안으로 끌어들인다. 조형물 표면의 처리를 통해 표현이 강렬한 작품이 되게 했다. <올라가는 젊은이>는 자화상과도 같은 미술에서의 구도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렘브루크는 물성에 영혼을 삽입했다. 로댕의 인물상이 욕망을 갈구하는 데 반해 그의 인물상은 정신을 구현한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로 돌아온 렘브루크는 전쟁에서 충격을 받아 <엎드린 사람 Der Gestürzte>(1915~16)을 제작했다. 절망과 인생의 권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 조형물에서 그는 극적 추락이 아닌 쓰러지기 직전의 고요한 순간을 모티프로 전쟁에 대한 절망을 표현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쟁 이전부터 우려한 연합군의 적대적 포위상황이 현실로 다가오자 전쟁이 불리한 상황에 처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낭패감이 이 조형물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마티스로부터 마욜과 렘브루크로 이어지면서 예술가들은 단순화와 왜곡을 통해 표현적인 조형물들을 제작했다. 단순화한다는 것은 추상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왜곡은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20세기 조형물은 이들 선구자들로부터 출발하여 더욱 더 단순화되며 표현 또한 더욱 심화된다.

극단적 단순성으로 20세기 최고 거장이 된 콘스탄틴 브랑쿠시
아프리카 조형물을 미술품으로 진지하게 논의한 최초의 책 『니그로 미술 Negerplastik』이 출간된 것은 1915년으로 독일 미술사학자 카를 아인슈타인Carl Einstein(1885~1940)에 의해서였다. 아인슈타인은 아프리카 조형물을 민족지학적ethnographic 인공품이 아닌 미학적 측면에서 다룬 최초의 인물로 알려졌다. 방대한 도판과 함께 새로운 견해를 개진한 『니그로 미술』은 당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으며, 최초로 20세기 미술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제공했다.
브랑쿠시는 원시적인 힘과 정신적인 질서를 연결시키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뛰어났으며, 이를 정확한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한 것이 <키스 The Kiss>(1907~08)이다. 그가 1910년에 제작한 <마이아스트라 Maiastra>는 유사한 유형의 조형물 중 최초의 작품이다.
<포가니 양 Mademoiselle Pogany>(1913)과 같은 초기 작품들은 정형화되어 있으며 아르 누보의 영향도 엿보인다. 그의 형태에 나타나는 특징은 물질의 속성으로서의 보편적 조화로 이는 형태가 성장의 과정에서 물리적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매끈한 마감처리는 <공간의 새 Bird in Space>(1928) 연작에서도 발견되며, 이런 유형의 조형물들은 처음에는 1923년에 대리석으로 제작되었고, 1924년에는 광택을 많이 낸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섬세하게 길게 늘인, 깃털 같은 형상은 새의 몸체이기도 하고, 넓게 펼친 날개이기도 하며, 가벼운 비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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