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9

미국의 고유한 양식 추상표현주의
미국의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역할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한스 호프만Hans Hofmann(1880-1966)의 역할도 중요하다. 1915년에 뮌헨에 처음 미술학교를 세운 그는 1932년에 미국으로 와 캘리포니아대학과 뉴욕의 아트 스투던츠 리그에서 가르쳤고, 그리니치빌리지에 한스 호프만 미술학교를 세웠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은 순수추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면에 물감을 붓는 기법을 최초로 실험한 것도 호프만이었다. 자유로운 붓놀림과 색채들의 반발과 흡인작용(밀고 당기기)을 통해 모호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형태는 색채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색채는 형태를 통해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모마The Museum of Modern Art가 1929년 11월 7일에 문을 열었다. 모마는 세 명의 미술품 여성 콜렉터들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부인인 애비 올드리치 록펠러, 내무부장관의 여동생 릴리 P. 블리스, 코넬리어스 J. 설리번에 의해 건립되었다. 미국 미술전용 휘트니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이 1931년에 개관했다. 휘트니미술관은 역시 여성이며 부호이자 조각가 거트루드 반더빌트 휘트니가 1914년에 설립한 자신의 휘트니 스튜디오를 발전시켜 미술관으로 건립한 것이다. 1936년에는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에서 비롯한 기하학적 추상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화가들이 AAA(American Abstract Artists)라는 단체로 모였고, 이어서 페기 구겐하임이 1942년 10월 20일에 비구상의 요람인 금세기 갤러리Art of This Century Gallery을 열었다. 이러한 토양이 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그리고 유럽 근대 미술의 기수들이 대대적으로 이민해 오기 전에 마련되었다.

앨프레드 H. 바 주니어Alfred Hamilton Barr, Jr.(1902~81)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1923년에 학사학위를 받고 이듬해에는 석사학위를 받았다. 바는 1924년에 하바드대학 박사코스에 들어갔고, 1926년 웨슬리대학에서 미술사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1946년이었다. 바는 1929년에 카네기 장학금을 받고 뉴욕대학에서 모던 아트와 입체주의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서른 살도 체 안 되어 개관한 모마의 초대 관장이 된 바는 후기인상주의 예술가들 고갱, 반 고흐, 폴 세잔, 조르주 쇠라의 전시회를 개최했고, 1935년에는 반 고흐의 회고전을 열었으며, 1939~40년에는 피카소의 회고전을 여는 등 유럽 모더니즘을 미국에 소개하는 일에 앞장섰다. 모마의 이사장 넬슨 록펠러는 1943년에 바를 관장직에서 해임했으나, 고문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미술사학자 마이어 셔피로는 1957년에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취한 독립성은 해방적 성격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늘날 어떤 다른 미술도 최종 결과에서 개인의 존재, 개인의 즉흥성 그리고 그 구체적 과정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와 로젠버그 같은 몇몇 평론가들은 뿌리고 흘리고 칠한 물감을 실존적 행위, 즉 미국 문화에서 살아 있는 개인의 정체성의 마지막 호흡으로 간주했다.

마이어 셔피로Meyer Schapiro(1904~96)는 가족과 함께 1907년에 라투아니아로부터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컬럼비아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26년부터 컬럼비아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하고 1952년에 정교수가 되었다. 근대 미술의 지지자인 셔피로는 반 고흐와 세잔에 관한 책을 썼고, 그 밖에도 근대 미술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셔피로는 1966~67년에 하바드대학의 명예교수Norton professor를 지냈다. 양식에 관한 그의 논문은 미술사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셔피로에게 양식은 미술품의 형식상의 특색이며 시각적 특징이다. 그에게 양식은 특정한 시기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진단적 연장이기도 하다. 양식은 작게는 한 예술가를 크게는 문화를 암시하는 지표이며, 또한 예술가로 하여금 문화적 가설과 규범적 가치를 드러내게 해주는 경제적ㆍ사회적 상황을 반영한다. 말하자면 형태와 양식에 대한 우리의 묘사는 우리의 시기, 우리의 관심, 우리의 편견을 가리키며, 특정한 시대에 미술사학자들의 양식에 관한 담론은 그들의 문화적 정황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전후 미국의 이미지는 전 세계에 경제적·정치적 그리고 예술에서 강국으로 부상되었고, 많은 나라가 미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유럽은 전후 세계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했으며 파리는 더 이상 미술의 중심이 못되었다. 러시아와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창조적 미술이 억압받고 있었다. 전후 추상표현주의가 미국의 고유한 양식으로 등장하자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렇지만 1940년대에 출현한 추상표현주의는 유럽의 경향과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들이 새롭게 종합되고 인식된 것이다. 완전 추상도 아니고 전적으로 표현적이지도 않았지만 추상표현주의라는 명칭을 얻게 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미국 미술운동이 되었다. 추상표현주의는 1950년대 등장한 유럽의 추상표현주의 경향인 타시즘이나 앵포르멜과는 약간 다른 양상이었으며, 초현실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구상적 요소가 두드러지며 미국인의 자의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추상표현주의라는 명칭을 모마의 초대 관장이자 미술사학자 앨프레드 H. 바 주니어가 1929년 미국에서 전시 중이던 칸딘스키의 초기 유동적 작품에 대해서 형식적으로는 추상이나 내용에 있어서는 표현주의라는 의미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바의 견해에는 타당성이 있었는데, 칸딘스키는 색채 대비에 대한, 그리고 추상에 여러 해 동안 자취가 남아 있던 유동적 몸짓에 대한 취향을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과 공유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칸딘스키의 취향과 미국 화가들의 취향을 근본적으로 묶어주는 점이 있었는데, 모두 의미 있는 추상화를 그리고 싶어 했다. 폴록의 경우 중요한 것은 오로지 결과이며, 기법이 아무리 독특하더라도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뉴먼에게는 회화를 통해 소통하려는 그 사실이 중요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주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공통의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예비적 스케치를 거부하고 로스코의 말대로 회화가 “영원히 친숙한 요구에 대한 예기치 못하고 유례가 없는 응답인 폭로”가 되도록 창작의 행위에서 모험을 감행했다.

추상표현주의: 추상표현주의자들은 동일한 취지하에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한 적이 없었으며 개성 있는 그들은 각기 상이한 회화를 추구했다. 활동시기와 장소가 우연히 일치한 것을 제외하면 하나의 사조로 묶을 근거는 없다. 게다가 그들의 작품이 모두 추상적이거나 표현적이지도 아니었기 때문에 추상표현주의란 명칭은 적절하지 않았지만, 추상표현주의라고 묶을 만한 근거는 계획되지 않은 자발성을 통해 무의식 상태에서 창작하는 방법을 실행한 것으로 이는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주의 기법을 받아들인 것이다.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미술사에 기여한 중요한 점은 전체론적all over 구성, 자동주의 기법으로 푸마주, 프로타주, 데칼코마니아를 활용한 것이다. 자동주의 기법 중 하나인 푸마주fumage는 빈 태생의 오스트라아계 유대인 화가 볼프강 팔렌Wolfgang Paalen(1905~59)이 1930년대 말에 발견한 것으로 파렌은 종이 밑에 촛불을 대고 움직여 그을린 자국으로 기이하고 꿈과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이는 무의식에 의한 자유로운 형상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의 우연에 관한 이론의 좋은 예가 되었다. 파렌은 자신이 고안한 푸마주 기법을 ‘암울한 왕자’라고 명명했다. 그는 그림 속에 유성과 같은 줄무늬를 그려 넣었으며, 이를 훗날 ‘숨겨진 신의 얼굴’이라고 설명했다.

프로타주frottage(문지르기)는 울퉁불퉁한 무늬 결에 종이를 대고 부드러운 화필로 문지르는 기법으로 막스 에른스트가 1925년 8월 10일에 숙소의 마룻바닥을 보다가 마루의 광택에 비치는 나뭇결을 주목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불규칙한 패턴을 좇다가 이를 종이 위에 옮겼다. 그 후 나뭇잎의 잎맥, 마포의 결, 붓자국 등으로 동일한 작업을 했으며, 이런 우연적 패턴을 회화적 디자인의 기초로 활용했다. 이 기법은 나중에 유화에도 사용되었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기법을 잠재의식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 채택했다. 에른스트는 프로타주 기법을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연결시켜 “침대 앞에 놓인 옷장의 인조 마호가니 문양이 반쯤 졸고 있던 나의 시각적 연상을 자극했다”고 했다.

에른스트는 1937년에 유화에 데칼코마니아decalcomania(옮긴 그림) 기법을 도입했는데, 자동주의 회화에 사용된 것으로 1936년경 스페인 화가, 조각가 오스카르 도밍게스Oscar Dominguez(1906~58)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를 에른스트가 유화에 적용했다. 흰색의 얇은 종이 위에 넓은 붓으로 물감을 바른 다음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른 종이로 덮고 가볍게 문질러 물감이 아무렇게나 우연적으로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이 격찬한 이 기법의 핵심은 미리 주제나 형태를 구성하지 않고 회화를 만든다는 데 있다.

자동주의는 1939년부터 초현실주의와 결별하고 1948년까지 뉴욕에 거주한 로베르토 마타를 통해 특히 고르키와 머더웰의 회화로 알려졌다. 비교적 늦은 1937년에 브르통과 초현실주의자들을 만난 마타는 스스로 심리학적 형태학, 혹은 내면의 정경이라고 칭한 자신의 초기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자동주의를 이용해 무의식의 심상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는데, 가끔은 필적 같은 것으로 구성된 기묘하게 움직이는 아메바나 곤충 같은 형태가 나타났다. 그의 화면은 격렬하고 혼란스러운 운동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모든 것들은 우주 안에서 일체를 이룬다는 그의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는 뉴욕의 젊은 화가들에게 자동주의를 통한 자유로운 공간의 창출을 보여주었다.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부분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하나의 전체로 통일시키는 전통 구성과는 대조적인 전체론적 구성에는 분리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고, 일정한 체계가 없는 회화 공간 속에 단일한 이미지만 있다. 잭슨 폴록은 물론 모노크롬에 가까운 바넷 뉴먼, 애드 라인하르트, 마크 로스코의 회화나 좀 더 표현적인 아슐리 고르키, 클리퍼드 스틸, 프란츠 클라인, 윌렘 데 쿠닝, 애돌프 고틀리브, 로버트 머더웰, 필립 거스턴의 추상화가 전체론적 구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일정한 체계가 없는 회화 공간이란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이 전체론적 구성이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이젤화의 위기 The Crisis of the Easel Picture」(1948)에서 ‘전체론적’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특정 추상표현주의 회화, 특히 폴록의 회화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촘촘한 그물망과도 같은 반복을 통해 만들어지는 표면의 균일함을 설명했다. 그는 이 개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이젤화’ 개념과 대비시켰다. 이젤화가 캔버스 너머로 극적인 서사가 펼쳐지는 무대와 같은 삼차원의 환영을 만들어서 관람자의 관심을 거기에 집중시킨다면, 이와 대조적으로 전면적인 표면은 평면성, 정면성 그리고 서사의 부재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절망과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대량학살과 악명 높은 나치의 강제수용소는 유럽의 선도적인 건축가, 예술가, 이론가들을 포함하여 막대한 유럽인을 미국으로 도피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미국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으며, 여기에 힘입어 미국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역량을 세계 최고의 경제력을 갖춘 토양에서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미국으로 피신한 유럽 모더니즘의 기수들: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 앙드레 마송, 막스 에른스트, 이브 탕기, 쿠르트 젤리히만, 마르크 샤갈, 일래노 캐링턴, 살바도르 달리, 호앙 미로, 로베르토 마타 등이었다.

미국 예술가들이 받은 영향: 초현실주의, 기하학적 추상, 혹은 구성주의, 신조형주의, 그리고 절대주의였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건 초현실주의였으며 구성주의의 영향은 서서히 드러났다. 기하학적 추상 분야에서는 피트 몬드리안의 영향이 두드러졌고, 라슬로 모홀리 나기, 나움 가보, 요제프 알베르스, 리오넬 파이닝거, 요하네스 이텐 등도 영향을 끼쳤다. 마송이 뉴욕 그룹의 피신해 온 초현실주의자 중에서 아슐리 고르키와 함께 추상표현주의의 초기단계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마송의 모래회화에 나타난 자동주의와 잭슨 폴록이 실행한 액션페인팅 사이의 유사성은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미국 예술가들은 유럽에서 피신해 온 예술가들과 지식인의 도움을 받아 유럽이 몇 십 년에 걸쳐 이룩한 성과를 짧은 기간에 알게 되고 그 기반 위에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시켰다. 여기에 문필가, 평론가, 시인들이 가세하여 미술에 대한 논의를 더욱 진전시켰다.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의 회화를 염두에 두고 평론가 해럴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1906~78)는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이란 새로운 용어를 사용했다. 뉴욕화단에서 유일하게 그린버그를 대적할 만한 로젠버그는 1952년 12월호 『아트 뉴스 ARTnews』(1902년에 창간)지에 기고한 시각예술에 관한 첫 중요한 글 「미국 액션페인팅 화가들 The American Action Painters」에서 처음 이 용어를 사용했으며, 그가 회화에 대한 해석으로 중요하게 다룬 것은 화가의 창조행위였다. 그는 뉴욕화단에 대해 “요즘 더 이상 추구되지 않던 개인주의가 강화되고 있다. ... 예술가의 상상력을 위축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미술운동은 예술가의 외부세계와 무의식에서 나오는 통찰력 그리고 느낌을 예술가의 손아래 결집시킨다. 생기 있는 미술운동은 일련의 개념이기보다는 공통된 에너지의 방향이다. 그리고 미술운동에 대한 정의는 제한된 범위의 개별 예술가들, 특히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에게만 적용될 것이다”라고 적절하게 적었다.

화가의 충동적 창조력에 자유로운 표현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액션페인팅을 정의한 로젠버그는 그리는 행위를 완성된 작품보다 더 중시했다. 그는 일부 화가들, 특히 폴록이 캔버스를 표현의 장이 아니라 창조행위를 위한 투기의 장으로 삼은 데서 화면에서 발생하는 것이 회화가 아니라 이벤트임을 발견했다. 그가 폴록의 회화를 이벤트로 해석한 것은 적중했는데, 그 밖에 달리 설명할 만한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액션페인팅은 예비적 데생 없이 곧장 화폭 위에서 작업하는 화가의 자유와 전적인 개입을 전제로 한다. 이런 조건에서 삶과 회화는 구별이 없이 밀접해져서 로젠버그의 말대로 “회화 그 자체가 삶의 불순한 복잡성 속에 있는 한 순간이다. ... 회화의 행위가 화가라는 존재와 같은 형이상학적 실체”가 된다. 폴록은 1950년에 “나는 데생이나 채색 밑그림 없이 작업한다. 곧바로 그린다. 습관대로 바닥에 깔아놓고 그린다. 커다란 화폭에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거대한 공간이 편하고 기분이 좋다. 화폭을 바닥에 깔아놓음으로써 나는 한 점의 회화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느끼고, 그래서 주로 그 방침을 따른다. 이런 식으로 네 귀퉁이에서 시작해 주위를 빙빙 돌아다닐 수 있으며, 서부 인디언이 모래에 그림을 그리듯 회화 한복판으로 들어가서 작업할 수 있다. 때로는 붓을 사용하지만 막대를 더 빈번히 사용하는 편이다. 깡통에서 직접 물감을 쏟아 붓기도 한다. 나는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묽은 물감을 좋아한다. 또한 모래, 깨진 유리, 조약돌, 끈, 못, 그리고 회화에 낯선 여러 요소들을 사용한다. 회화적 방법은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듬어진다. 나는 나의 감정을 도해로 설명하기보다는 표현하고자 한다. 기법은 단지 거기에 이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했다.

‘뿌리고 튀기는’ 기법으로 폴록은 ‘전체론적’ 구성 회화를 창안해낸 화가로 알려졌다. 그의 회화는 캔버스의 형태와 크기에 좌우되지 않으며, 실제로 완성작을 보면 이미지에 맞게 캔버스의 일부가 깎여 있거나 잘라져 있다. 이후 이런 양식에 반발하고 나온 후기회화적 화가들이 캔버스의 형태를 회화의 이미지와 일치시키는 데 역점을 둔 것도 부분적으로는 폴록의 전체론적 구성 양식의 영향이다.

로젠버그와 달리 그린버그는 입체주의가 쇠퇴하고 미국의 미술이 미국의 새로운 힘과 함께 부상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고르키, 폴록, 스미스 등이 유럽 미술을 압도할 만큼 독특하고 독자적인 작품을 제작한다면서 “애석하게도 피카소, 브라크, 레제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쇠퇴한 것은 그들의 활동을 보장했던 전반적 사회조건이 유럽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면 지난 5년 동안 아슐리 고르키, 잭슨 폴록, 데이비드 스미스와 같이 에너지와 자신감으로 충만한 새로운 예술가들의 출현으로 미국 미술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 ... 따라서 놀랍게도 서양미술의 주요한 전제들이 산업생산과 정치권력의 중심과 더불어 마침내 미국으로 이동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근대 회화가 가로 12m나 15m이면 크다고 여겨지던 때에 폴록의 벽화는 가로가 38.9m에 달했다. 구겐하임은 막스 에른스트와의 결혼을 종료하고 새로운 남편과의 보금자리를 위해 얻은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해 폴록에게 벽화를 의뢰했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폴록은 빈 캔버스를 6개월 동안 응시한 후 단 하룻밤의 작업으로 전 영역을 순식간에 채웠다. 전시의 목적을 위해 미술을 조정하는 자유가 폴록의 벽화를 거는 일로 시작되었다. 뒤샹이 구겐하임의 아파트에 그 설치를 감독하기로 부탁을 받고 있었는데, 폴록의 벽화가 아파트 실제 공간에 비해 약 3m 더 길었다. 뒤샹은 그 초과된 분량을 절단하자고 제안했고 폴록은 그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폴록은 서예적 글쓰기로 자동주의 기법들에 능가했는데, 유럽 화가들의 기법은 의도적으로 사용된 데 반해 폴록의 것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우연에 전적으로 의존한 방식이었다. 이런 효과를 그는 붓을 사용하지 않고 깡통에 구멍을 내 흘리거나 붓에 물감을 묻혀 붓을 흔들어 물감이 캔버스에 떨어지게 하는 ‘뿌리고 튀기는drip and splash’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이 기법은 1947년 무렵 다소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폴록은 이젤을 사용하는 전통 방법 대신 캔버스를 바닥이나 벽에 고정시키고 통에 든 물감을 붓고 뿌렸다. 그런 뒤 붓이 아니라 막대기, 흙손, 나이프로 물감을 다뤘고, 때로는 모래, 유리조형물, 혹은 이물질을 혼합해 임파스토impasto(물감을 두텁게 칠하기) 효과를 내기도 했다. 이런 방법은 화가의 무의식을 드러내거나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와 공통점이 있다.

폴록의 회화에 대한 그린버그의 해석
폴록 내면에 구상과 추상의 가치가 갈등했다면, 그의 회화를 해석하는 데도 구상과 추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이 존재하게 된다. 그의 회화가 모더니즘 역사에서 중심의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해석의 갈등은 자연히 치열할 수밖에 없다. 1940년대 초부터 폴록의 회화에 호의를 나타낸 그린버그는 폴록의 회화가 그 표면을 공간적으로 압축했다고 호평했다. 그에 따르면 폴록의 회화는 어두침침한 평면성fuliginous flatness을 창조했고, 표면을 따라 뻗어나간 이 평면성은 환영적 공간을 지닌 이젤화를 거대한 벽화처럼 변형시켰으며, 이것을 관찰 가능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연구하는 근대 과학과 연결된다. 1940년대 말에 과학적 모델이 아니라 반영적 모델을 채택해 모더니즘을 다시 독해하기 시작한 그린버그는 추상의 필연성을 재검토했다. 그는 시각작용이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행위를 하는 주체의 상황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알았다. 시각작용은 보는 행위가 투사하는 행위이며, 보는 행위는 시야를 순차적이 아니라 동시에 포착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므로 모더니즘의 가장 원대한 야심은 보는 행위에 관련된 고유한 의식의 형태를 그리는 것이다. 그린버그는 “실체를 완전히 광학적인 것으로 만들어 대기의 공간을 구성하는 필수 적인요소로 만드는 것, 이를 통해 반환영주의가 완성된다. 사물들의 환영 대신에 양상들의 환영이 나타난다. 즉 물체는 형태도 없고 무게도 없이 오로지 신기루처럼 광학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폴록의 회화는 추상이 단지 메커니즘이나 기하학의 작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격정적ㆍ감동적인 것임을 입증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유부단하게도 그가 1951년 “내게 엄습하는 초창기 이미지”가 담긴 구상화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그의 회화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1951년 폴록은 그를 엄습한 초기의 이미지를 담은 흑백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구상화로 되돌아갔다. 그는 멕시코 벽화와 스승 토머스 하트 벤턴의 지방주의 양식이 혼합된 양식으로 회귀했으며, 알코올중독도 재발했다. 1955년 시드니 제니스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그의 방향전환으로 인해 근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 없는 전시는 회고전과도 같았다. 폴록은 1956년 여름 술에 취한 채 운전하다가 자동차가 전복되어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의도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1960년대 말 로버트 모리스는 “추상표현주의자 중에서 폴록만이 과정을 회복시켰고, 과정이 최종 작품을 구성하는 부분임을 주장했다. 폴록이 과정을 회복시키면서 미술 제작의 재료와 도구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모리스는 이런 새로운 착상을 ‘반형태Anti-form’로 명명했다. 폴록의 작업이 중력이라는 조건에 의존한 것에 주목한 모리스는 폴록이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깡통에 담긴 물감에 막대기를 담갔다가 꺼내서 캔버스에 흩뿌린 작업은 중력에 내맡긴 것으로 그렇게 해서 반형태가 되게 했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함축된 의미는 반형태는 어떤 형상의 창조와도 구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폴록 회화의 반형태적 충동을 확신한 다수의 화가들이 모리스와 같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폴록의 캔버스가 미술관의 벽에 걸림으로써 형태적인 장식으로 돌아갔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접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에는 타당성이 있었는데, 폴록 외의 모든 추상표현주의 화가가 이젤을 사용하거나 캔버스를 벽에 고정시키고 작업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데 쿠닝이나 고르키의 회화에서 보듯 물감이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형태를 띠면서 흩뿌린 자국이 그 자체 형태가 된다는 점이다. 오직 폴록만이 이에 저항했으며, 그의 저항은 작품을 어느 위치에서 보아도 그 자체로 유지된다. 즉 그의 작품은 하나의 수평적 반형태이며, 수직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는 추상이다.

화면 전체가 구조적으로 거의 구별하기 불가능하게 균일한 방식으로 처리되는 양식인 폴록의 ‘전체론적’ 구성을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1928~)가 받아들였다. 트웜블리의 회화는 데 쿠닝보다는 폴록의 드립페인팅을 드로잉하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 그 후에도 그는 수년에 걸쳐 연필과 같이 끝이 뾰족한 도구로 캔버스 물감에 흠집을 내서 폴록의 엉킨 실타래를 날카롭게 패인 선으로 바꾸어놓았다. 그의 전략은 추상표현주의 화가의 흔적을 자발적인 붓질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국 자체를 낙서의 형태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 자국을 오염되지 않은 화면을 난도질한 익명의 흔적으로 기록하는 것으로 이는 ‘아무개가 이곳을 다녀가다’라고 사실을 선언하는 무수한 낙서와 다를 것이 없었다. 형태상 낙서는 드리워진 그림자나 타이어 자국보다는 덜 지표적이더라도 이전에 침투된 적이 없는 공간에 침입한 외부 존재의 흔적이란 점에서는 숲속의 나뭇가지나 범죄현장에 남겨진 단서와 유사하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낙서는 액션페인팅 화가의 신조의 근거가 되는 기본 전제를 깨는 것이다. 그 신조란 회화는 화가의 정체성을 비추는 거울이며 화가는 이런 자아인식의 행위를 통해 회화의 진실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울이 존재의 모델로 작용한다면, 낙서는 부재의 기록이자 사건이 일어난 후에 남는 흔적이다. 구조상 낙서는 제작자의 부재를 입증함으로써 그것이 더럽힌 표면을 공격할 뿐 아니라 거울에서 으레 기대되는 화가의 반사이미지를 깨뜨리며 화가마저 공격한다.

서예적 글쓰기에 한해서 말하면 이를 먼저 회화적 양식으로 실행에 옮긴 사람은 마크 토비Mark Tobey(1890~1976)였다. 1925~27년에 유럽과 근동 지역을 여행하고 상하이에서 중국 서예를 배운 뒤 ‘화이트 라이팅 white writing’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확산된 비개성주의를 과도한 산업화와 물질주의의 산물로 본 토비는 ‘화이트 라이팅’ 기법을 통해 근대 도시의 광기 어린 리듬을 그릴 수 있었는데, 전통 방법으로는 가능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서예를 연상시키는 선과 형태로 전체론적 구성 회화가 되게 했다.

피카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 추상화를 주로 그린 아슐리 고르키Arshile Gorky(1905~48)는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났고, 열다섯 살 때 뉴욕으로 와 디자인 및 공예를 배우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주로 독학으로 회화를 익힌 그는 기하학적 추상에 안주하지 않고 입체주의를 보다 회화적이고 표현적인 의도에 적합하게 만들려고 했다. 마이어 셔피로에 따르면 고르키는 그의 최초 실습 대상인 마타의 표현방법에 통달했고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터운 임파스토 때문에 딱딱한 껍질 같았던 그의 회화가 좀 더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는 확신을 준 것은 로베르토 마타였다. 마타의 영향을 받고 비로소 추상표현주의 양식에 도달할 수 있었던 고르키의 초기 작품은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솜씨 좋게 뒤섞어 모방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말년의 작품에서는 초현실주의와 호앙 미로의 생물 형태적 추상을 매우 독창적으로 융합함으로써 훌륭한 최후의 초현실주의자이자 최초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인식되었다.

1940년대 말 뉴욕파New York School는 두 그룹으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는데, 하나는 네덜란드계 미국 화가 윌렘 데 쿠닝Willem De Kooning(1904~97)과 폴록을 주축으로 한 그룹으로 액션페인팅, 혹은 제스처 회화에 해당되는 태도를 표명하면서 회화를 완성작이라기보다는 점차 드러나는 과정의 기록, 즉 창조과정 중에 있는 화가의 내적 정신 상태가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것으로 보았다.

데 쿠닝은 1930년대에 여러 기법으로 그렸고 초상화와 인물 스케치는 자코메티의 후기 작품을 연상시켰는데, 이는 1970년대까지 그의 회화의 주조를 이룬 인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동시대 화가 중 유일하게 인물을 주제로 삼은 그는 처음에는 남성을 후에는 여성을 그렸다. 고르키와 그 밖의 화가들처럼 초현실주의의 환상적 측면에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그는 유기적이고 생물 형태적 형태를 들쭉날쭉한 선으로 표현한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추상화를 그렸다. 폴록과 더불어 자발성과 액션페인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추상표현주의 비공식적 리더가 된 그는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여성 주제를 발전시키면서 에로틱한 상징, 흡혈귀, 출산의 여신으로 바꾸어갔다. 인물의 모델링을 생략하고 울퉁불퉁한 윤곽선만을 사용해 인물과 환경이 뒤섞여 흐르도록 표현함으로써 인물과 환경의 혼합체인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공간을 만들어냈다. 
 

데 쿠닝의 연작 <여인>은 그린버그에게 미학적 문제를 제기했다. 그가 이전에 옹호해온 대상, 즉 뉴욕 화파의 회화가 거둔 그 성공에 의해 야기된 특정한 문제에 직면했다. 데 쿠닝의 사례로 인해 점점 더 그 윤곽이 드러난 문제는 새로운 표현을 발견할 형식적 어휘의 부재였다. 더욱이 추상적 개개의 붓질로 환영의 평면을 확립하고 평면들을 서로 포개는 데 쿠닝 특유의 방식은 구상의 암시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는 더 큰 문제였다. 또한 회화적 제스처를 끌어들인 재스퍼 존스의 작업에 함축되어 있는 아이러니도 그린버그의 가치 체계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데 쿠닝과 존스 두 사람을 ‘정처 없는 재현’이란 경멸적인 범주 아래 두었다. 심지어 폴록마저도 1956년에 타계하기 몇 해 전부터 구상화를 그렸는데, 폴록을 그 세대의 주도적인 예술가로 옹호했던 그린버그는 이를 후퇴로 보았다.

그린버그의 첫 대응은 그동안 간과했던 바넷 뉴먼Barnett Newman(1905~70)의 회화를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뉴먼이 몰두해온 개성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연주의적 지시작용을 철저하게 거부한 면모가 데 쿠닝과 존스 양쪽으로 기운 무게중심을 바로 잡는 평형추가 필요한 상황에 답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았다. 데 쿠닝, 폴록과 달리 표현적이지 않은 그림을 그린 뉴먼은 원시미술에서 인간의 공포심에 일정한 형태를 부과하는 중재가자 되는 바로 그 미적 기능에서 또 다른 세계를 발견했다. 태초 미술의 기원을 확립하고, 창조성을 선사문화의 지배적 양식으로 부각시키려는 그의 바람은 유럽이 미술의 원천이라는 지배적인 믿음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이 같은 그의 견해는 그린버그의 사상과도 맥이 닿은 것으로 근대 미술의 권좌에서 파리를 축출하고 미국 미술을 재평가할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뉴먼은 회화에 있어 미국의 지방주의와 사회적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입체주의, 구성주의, 초현실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과정은 끝났으므로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1948년 1월 단색조의 어두운 카드뮴 빛 빨강 캔버스에 밝은 카드뮴 빛 선 하나가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일체감 Oneness>을 제작하여 비약적 결과를 성취했다. <일체감>은 하나의 표의문자이다.

뉴먼은 1947년에 표의문자ideograph 개념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뿐만 아니라 마크 로스코와 클리퍼드 스틸 같은 동료 화가들도 도입하기를 원했던 의미작용 방식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초현실주의가 제공한 모델과 프로이트로부터 파생된 초현실주의 상징론을 거부했으며, 추상화가 제공한 모델도 형식주의적 실천이라며 반대했다. 대신 그는 ‘표의문자 회화’라고 명명한 북서부 해안 인디언들의 회화에 주목했다. 뉴먼의 기록에 따르면 북아메리카 북서부 연안 문화영역에 속하는 콰키우틀족Kwakiutl에게 “하나의 형체는 하나의 생명체이며, 추상적인 사유-복합체의 전달체이고, 미지의 공포 앞에서 느끼는 두려운 감정의 운반체”이다. 여러 평론가들이 195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뉴먼의 친구 애돌프 고틀리브의 캔버스를 가득 채운 사이비-상형문자의 흔적에 관련하여 표의문자 개념을 계속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뉴먼은 이 어휘를 공식화한 것과 거의 동시에 이 개념을 폐기시켰다. 뉴먼은 순수하게 표의문자적인 소통 방식조차도 메시지의 생산자와 수용자가 공유하는 정련된 코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1948년 무렵부터 그는 더 이상 그의 회화에서 순수 관념을 재현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가능하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뉴먼은 1960년대에 와서야 자신의 이론이 직관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몬드리안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미니멀아트 예술가들과의 토론 덕분에 자신의 일체성 개념이 관계적 구성이라는 전통 방식에 의존한 몬드리안의 회화와 전적으로 상반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뉴먼은 과거처럼 몬드리안의 형식주의와 내용의 부재를 비난하기보다는 그의 추상에 내재된 사회적 기획에 반감을 갖는 자신의 무정부주의 정치학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이런 재평가의 결과 연작 <누가 적색, 황색, 청색을 두려워하랴? 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1966~68)가 탄생했다. 이 연작을 구성하는 네 점의 회화 중 첫 번째 작품과 세 번째 작품은 비대칭적이지만 나머지 두 작품은 대칭적이다. 그는 대칭을 통해 대칭을 금기시했던 몬드리안을 직접 겨냥했다. 뉴먼은 중앙의 적색 평면을 양편으로 늘려 너비를 거의 5.5m에 가깝게 만들면서 색상의 채도를 최고조로 높였다. 황색과 청색은 가장자리에 겨우 걸린 것처럼 보인다.

뉴먼은 1960년 초부터 10여 년 동안 <십자가의 길 Stations of the Cross>이란 제목으로 몇 개의 수직선zip만을 그은 일련의 캔버스 작업을 했다. 명암의 상호작용을 극도로 최소화한 14점의 작품은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예수의 절규에 대한 시각적 등가물로 구상된 것이었다. 뉴먼은 예수가 불확실성과 의심에 빠지는 순간을 선택했으며, 복음서에서 따온 이 순간은 구약성서의 신이라는 얼굴 없는 인물이 자신을 즉시 재주장하는 순간이었다. 이 작품의 개념은 하느님과 닮은 형상의 제작을 금하는 유대교의 성상 파괴적 명령 그리고 자연적 닮음을 넘어서는 심오한 소재의 추구라는 추상표현주의의 근본 명령을 혼합한 것이었다.

뉴먼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로 라인하르트 외에 드코와 스틸이 있고, 래리 푼스와 프랭크 스텔라 같은 젊은 화가들도 영향을 받았다. 뉴먼은 추상표현주의 이후에 나타난 여러 새로운 양식의 선구자로, 모노크롬의 색면 회화, 전체론적 회화, 혹은 비관계적 회화, 그리고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의 등장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1903~70)는 1903년에 러시아 비테프스크의 드빈스크에서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대인 아버지는 약사였으며, 가족은 1913년에 미국으로 이민 와서 오레곤 주의 포트랜드에 정착했다. 그해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은 백만 명이 넘었고, 동유럽에서 난민들이 왔으며 유대인이 많았다. 로스코는 1921년에 명문대학 예일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일어난 반유대인 감정으로 장학금을 지불받지 못하자 1923년에 자퇴하고 뉴욕으로 향했다.

로스코는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캔버스를 두 개 또는 세 개의 직사각형으로 분할하고 강렬한 색을 엷게 칠한 뒤 그 위에 좀 더 크기가 작고 윤곽선이 모호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불명료한 모서리를 지닌 직사각형의 색채 덩어리들을 그린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구름과 같은 이런 형태는 점차 단순해지고 분리된 색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좀 더 큰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졌다.

로스코는 회화 안에서의 형태들을 “당황하지 않고 극적으로 움직이며 부끄럼 없이 동작을 연출하는 배우들 단체를 위한 필요에서 만들어진 ... 연기자들”에 비유하며, 1958년에 “친밀한 상태를 원하기 때문에 대형화를 그린다. 대형화는 즉각적인 거래인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을 그 속으로 끌어들인다”고 했다. 그의 회화는 뉴먼의 것에 비해 신비성에 대한 감각을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냈는데, 화면에 나타난 투명과 반투명의 환상이 더 컸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말로 “초월적인 영역에 관련된 것으로 인정되는 의식”의 한 양상이었다. 1957년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로스코는 점차 어두운 색상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빨강, 노랑, 오렌지 계열보다는 갈색, 회색, 짙은 파란색, 검은색을 즐겨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회화는 다가가기 어렵고 우울하며 더욱 신비로운 색을 띠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를 거치면서 색은 심리적 우울을 반영하는 듯 더 흐려지고, 변화나 활발한 상호작용이 감소되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로스코는 1970년 2월 25일에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클리퍼드 스틸Clifford Still(1904~80)는 “어떤 바보라도 캔버스에 색을 칠할 수 있다”면서 “진정한 회화는 양심의 문제다”라고 했고, “진정한 예술가는 진실로부터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가 로스코를 만난 것은 1943년이었고, 두 사람에게는 공통된 미학이 있었는데, 색에 바탕을 두고 순수하게 시각적 공간을 창조하는 색면이었다. 여기에는 공간적 깊이에 대한 환영이 없다. 로스코가 흐릿한 테두리에, 때로는 어두운 빛을 방사하는 기법으로 몇 개의 색면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방식으로 배치한 데 비해 스틸은 잘려진 넓은 면으로 화면을 덮었다.

스틸은 1945년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뉴욕으로 가서 로스코를 통해 페기 구겐하임을 만났다. 금세기 미술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은 그가 뉴욕을 대표하는 소수의 예술가 중 하나임을 고지하는 중요한 전시회였다. 그는 장사꾼들에 의해 미술계가 조작되고 있다면서 장사꾼들은 예술가들의 존엄성이나 번영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며, “평론가들은 백정이다. 그들은 우리를 대중의 창자를 위해 햄버거로 만든다. 미술사학자들은 단순히 마비되었다”고 불평했다.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1906~65)는 회화와 조형물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고, 조형물의 전통 기법에서 벗어나 기법상의 자유를 얻은 데 스페인의 조각가 훌리오 곤잘레즈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는 금속을 용접하는 기교에서 그러한 것이고 미학적으로는 칸딘스키, 몬드리안, 그리고 입체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30년대에 강철, ‘발견된’ 폐물, 농기구 부품 등을 사용해 1950년대 리처드 스탕키에비치의 아상블라주를 예견한 듯한 방식으로 구성물을 만들면서 독창적인 조형물을 선보였다. 오브제를 용접한 후 채색하는 것은 스미스가 1930년대 중반에 작업할 당시 통용되던 기법의 특징이었다. 그런 기법은 1910년대 중반 피카소의 콜라주에서 발전하여 1920년대 후반 곤잘레스의 작품에서 절정에 달한 입체주의 조형물, 혹은 구성주의 조형물의 맥락 속에 있다. 금세공사 아버지에게 금속공예를 배운 곤잘레스는 스페인 전통 기법인 쇠의 제련과 용접을 이용하여 작업했다. 스미스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개방적이고, 선적이며, 금속으로 된 삼차원의 서예처럼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조형물을 제작했다.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1913~67)는 컬럼비아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유럽 근대 미술의 몇몇 특징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체주의와 입체주의에서 파생된 양식을 받아들인 그의 회화는 해를 거듭할수록 양식상 급격하게 변화하기는 했으나 처음부터 추상이었다. 1930년대에는 입체주의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양쪽으로부터 다소 영향을 받아 뚜렷하고 윤곽선이 분명한 기하 양식을 사용했다. 그의 회화는 행위적이기보다는 기하학적이었고 점차 단색조가 되었다. 그는 액션페인팅과 그것의 허세에 비판을 가하면서 1952년부터 쓴 글에서 미술과 생활이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신념을 주장했다. 그는 “미술은 미술로서의 미술이며, 그 밖의 것은 그 밖의 것이다 Art is art as art, everything else is everything else”라고 했다. 훗날 개념주의 예술가 조셉 코수스가 “미술은 개념으로서의 개념이다 Art as Idea as Idea”라고 말한 것은 라인하르트에 경의를 표하는 행위였다.

라인하르트는 미술계의 위선을 꼬집는 만화를 그리는 풍자화가로도 유명했다. 그는 사회주의 잡지에 만화를 실으면서 미술세계를 풍자했다. 그 중 하나를 보면 중절모자를 쓰고 있는 한 남자가 추상화를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을 나타내겠어?’라며 비아냥거리고 있다. 그 밑에는 발이 달리 그림이 깜짝 놀란 남자에게 삿대질하며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나타내는데?’라고 소리치고 있다.

라인하르트는 빈 형태, 공허, 반복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추구함으로써 다가올 1960년대의 미니멀아트를 예견했다. 1950년대에는 색을 어둡게 하고 색채 대비를 억제하기 시작하여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를 배경 색과 약간의 명도 차이만 있는 색으로 칠하여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한 모노크롬에 가까운 회화를 제작했다. 모노크롬은 부재 상태의 언어, 즉 침묵하는 미술이다. 그의 회화는 일견에 뉴먼의 숭고를 연상시키지만, 그가 ‘무시간성’, ‘불변의 순수 상태’라고 말한 것에 가깝다. 그는 미술이 보편적이라는 뉴먼의 말에 동조하면서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미술을 그 외의 어떤 것도 아닌 미술로 제시하는 것, 그것을 점점 더 분리하고, 규정하며, 보다 순수하고 비어있게 하고, 보다 절대적이며 배타적으로 만들어 오로지 그 자체이게 하는 것, 즉 비대상적ㆍ비재현적ㆍ비구상적ㆍ비형상적ㆍ비표현적ㆍ비주관적으로 만드는 것”임을 강조했다.

로버트 머더웰Robert Motherwell(1915~91)은 스탠퍼드대학으로 진학하여 철학을 전공하고 졸업논문으로 정신분석 이론에 관한 것을 썼으며, 평생 이 주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하버드대학 대학원과 프랑스의 그르노블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40년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며 마이어 셔피로의 지도를 받고 그때부터 입체주의자들의 자동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머더웰은 1958년에는 헬렌 프랭컨탤러와 결혼하고 1962년부터 『파티잰 리뷰 Partisan Review』지의 미술 편집장을 지냈다.

작품
901 폴록 85 환영에 대항하여 오로지 빛만을 창조할 수 있는 신기루 같은 즉자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 폴록의 얽히고설킨 드립페인팅은 새로운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드로잉의 주요 요소인 순수한 선으로만 이뤄진 그의 그물망은 드로잉의 목표, 즉 대상의 윤곽선을 묘사하여 그 대상을 드러내려는 목표를 좌절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린버그와 그의 동료 마이클 프리드에 따르면 선과 색의 구별을 없애거나 중지시킨 폴록의 선으로 이뤄진 그물망은 현실의 조건을 초월해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추상의 종착지에 도달했다. 프리드에 따르면 폴록의 선은 “어떤 의미에서 오로지 보는 행위만을” 드러내고 경계를 짓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폴록의 회화는 추상이 단지 메커니즘이나 기하학의 작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격정적ㆍ감동적인 것임을 입증한 것처럼 보였다.

903 모마 370 <무제 Untitled>(1970): 1957년에 북아프리카, 프랑스, 스페인을 여행하고 로마로 정착한 사이 트웜블리는 폴록처럼 자유로운 제스처가 빚어내는 흔적에 새로운 방향을 부여했으며, 그렇게 해서 제작된 화면은 준비된 대규모의 표면 위에 연필과 크레용으로 갈겨쓴 난잡한 서체 같은 것이었다. 그는 ‘쓰인 이미지들written image’이라는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는데, 여기서 보듯 끄적거림이나 낙서와 외형상 유사했다. 납심, 색연필, 분필, 펠트펜, 유성물감을 선호한 그는 우연의 효과를 격렬한 형태로 표현하면서 절제된 리듬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격렬한 욕망의 흔적을 남겼다. 그는 조잡하고 창피한 모티프들, 예를 들면 나폴리 만의 고대적 광휘 위로 대소변을 갈기면서 풍선처럼 둥둥 떠 있는 경쾌한 엉덩이 같은 모티프를 그의 필적에 섞어 넣음으로써 자신의 기법이 낙서처럼 외관을 손상시키는 제스처와 유사함을 명백하게 강조했다. 1962년 서베를린에서 열린 트웜블리의 전시회는 뒤셀도르프에서 리히터와 나란히 작업하고 있던 젊은 화가 지그마르 폴게Sigmar Polke(1941~)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904 폴록 68 <세계 먼지 World Dust>(1957): 이것은 개별 부분들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전통 구성을 탈피한 것이다. 그는 “회화에서 중심을 제거하고 모든 부분을 서로 침투하게 함으로써 동등한 가치를 갖도록 했다. 심지어 나는 원근법을 관통하여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가져오고자 했다”라고 했다.

905 폴록 99재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Man Looking at Woman>(1949): 애돌프 고틀리브Adolph Gottlieb(1903~74)는 1937~39년에 애리조나주의 사막에 살면서 그곳 환경의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41년부터 ‘상형문자pictographs’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상형문자로서의 이 작품에서 시각적 요소를 본질적으로 평면적이며 고르게 배치했다. 그는 원시인들의 감정 표현과 동시대인들의 감정 표현이 유사하다면서 “모든 원시적 표현은 강력한 힘에 대한 끊임없는 자각, 공포, 근심에의 직면 및 삶의 영원한 불안정뿐 아니라 자연세계의 야만성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와 로스코는 “오로지 비극적이고 영원한 주제만이 가치가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원시적이고 고대적인 미술과 정신적인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이유”라고 믿었다. 그의 상형문자 회화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초현실주의뿐만 아니라 클레와 몬드리안으로부터 비롯된 개성적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규칙적인 격자를 즐겨 사용하여 교란적으로 불확정한 회화 공간을 만들었다.

907 폴록 7-1재 아슐리 고르키는 기법에서 혁신을 시도했는데, 형태를 만들어내는 구불구불한 선들로 그것이 둘러싸고 있는 색의 영역으로부터 약간 이탈되는 것을 허용했다. 그 결과 그의 회화는 유럽의 초현실주의 회화보다 더 자유로우며 자동주의의 산물이 되었다. 고르키는 1944년에 이사무 노구치를 통해 1941년 5월 뉴욕으로 온 앙드레 브르통을 만났고, 브르통은 이듬해 줄리앙 레비 갤러리에서 열린 고르키의 첫 번째 개인전을 위해 서문을 써주었다. 브르통은 자연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감을 끌어내는 유일한 초현실주의자로 고르키를 꼽았다. 고르키는 초현실주의 그룹의 충실한 회원으로 활동해달라는 브르통의 제안을 완강히 거부했다. 브르통의 권유가 도를 지나치자 그는 1947년에 그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의 탈퇴는 초현실주의의 종말을 의미했다. 고르키의 아내는 고르키와 마타와의 동성애에 대해 비난하고 그와 이혼했다. 1947년에 고르키의 작업실에 화재가 발생해 중요한 작품들이 불태워졌고, 그가 암에 걸렸다는 진단이 내려졌으며, 뒤따라 일어난 자동차사고로 인해 그림을 그리는 팔에 마비가 왔다. 이러한 재난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1948년에 자살로서 생을 마감했다.

908 폴록 92재 <여인 I Woman I>: 데 쿠닝은 1950~51년에 강렬하지만 천박한 여성상을 보여주는 연작의 첫 작품인 이것을 선보였다. 여성상은 창조와 동시에 파괴의 행위자로 나타났는데, 파괴적인 요소는 그 형상들을 구현해나가는 격렬한 붓놀림에 의해 강조되었다. 그의 여성상은 일상문화의 프리즘을 통해서 관찰된 것이다. 이 연작은 추상표현주의에 속하면서 동시에 팝아트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는 여성 누드화를 선호하면서 누드화를 모든 면에서 공격하며 부수고, 형태와 비형태가 격렬한 상관관계가 되도록 회화와 데생을 뒤섞음으로써 회화를 미완성으로 보이게 했다.

909 폴록 81재 <영웅적이고 숭고한 사람 Vir Heroicus Sublimis>(1950~51): 바넷 뉴먼은 에세이 「숭고는 지금이다 The Sublime is Now」(1948)에서 “우리는 유럽 회화의 수단이었던 기억, 연상, 향수, 전설, 신화 등의 장애물로부터 해방되고 있다. 그리스도, 인간, 혹은 삶에서 성당을 만들어내는 대신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감정으로부터 그것들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에서 깊이를 자아내는 가식적 표현이 모두 사라졌다. 그림은 단지 대조적인 색조의 다섯 줄무늬, 혹은 집으로 생기를 띠는 색면일 뿐이지만 화면이 커서 관람자의 지각을 압도한다. 색채만이 뉴먼이 제공하는 경험인 것이다. 미술사학자 로버트 로젠블럼은 뉴먼의 회화를 '낭만적 고상함'으로 묘사했으며, 붉은색은 '바다'로서 우리를 이기심의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움직여 나오게 한다고 했다. <영웅적이고 숭고한 사람>은 1960년대의 미니멀아트를 예고했다.

뉴먼에게 숭고는 기억, 연상, 향수, 전설, 신화 등에 기대지 않고 홀로 혼돈과 마주하여 용감하게 운명과 대면하는 누군가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무엇이다. 즉 숭고는 그런 누군가에게 ‘여기’ 그리고 ‘지금’에 대한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1948년부터 뉴먼은 관람자에게 장소에 대한 감각, 즉 그 자신의 규모에 대한 감각을 주고 싶다고 말해왔다.

910 폴록 107 <존재 I Be I>: 뉴먼은 1960년대 초 처음으로 조형물을 세 점 제작하면서 제목을 <여기 I Here I>, <여기 II>, <여기 III>라고 붙였다. 그는 회화에 <저기가 아니라 여기 Not over There, Here>, <지금 Now>, <존재 I Be I>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뉴먼은 우리가 말하는 현재로서의 시간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감지 이전에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 발생occurence을 의미했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1924~98)는 뉴먼이 말하는 발생을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단순한 발생으로서의 사건ein ereignis과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을 실행하는 정신활동으로서의 극도의 긴장, 혹은 동요agitation와 같은 의미로 보았다.

911 폴록 78재 <무제>(1953): 마크 로스코의 색은 내부의 빛으로 충만한 듯한 특별한 광휘를 지니는데, 그 효과의 대부분은 인접한 색조의 면들이 만나도록 되어 있는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민감한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광휘를 띠는 채색과 재료의 부드러운 접합으로 자유로운 회화를 구현했다. 밀도와 표면, 그리고 가장자리는 관람자의 명상에 순수한 대상을 이루는 두드러진 구성요소가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이미지를 거부하는 정신성을 창출하고 미술과 성스러움의 결합을 되살려냈다. 한낱 화가의 도구에 불과했던 색이 초월적인 실체의 경험에 이르는 매개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색의 공간, 즉 색면이 신화적 힘을 지니고 그 힘이 관람자에게 전달된다고 보았다.

912 폴록 80재 <무제>(1950): 이 작품은 사물을 묘사하거나 암시하거나 상징할 필요가 없는 회화로서 회화 그 자체가 권리를 가진다는 클리퍼드 스틸의 신념을 드러낸 작품이다. 그는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여기에 있다. 이것이 나의 현존이며 느낌이고 나 자신인 것이다. 나는 색이 색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질이 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이미지가 형태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 모두 살아 있는 정신 속으로 융합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스틸은 초현실주의적인 모호한 형태로부터 출발해 거의 모노크롬(단색화)에 가까운 대형 회화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로스코와 뉴먼이 얇고 조절되지 않은 물감을 사용한 것과 달리 그는 두텁고 표현적인 임파스토 기법을 보여주었으며, 캔버스를 가로질러 뻗어나가는 날카롭고 불꽃같은 추상 형태를 그렸다. 그는 생애 후반 20년 동안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에서 은둔생활로 보냈으며, 그곳에서 1980년에 타계했다.

913 마스터 255 <무제>(1957): 프란츠 클라인은 붓놀림의 독립적 의미를 지닌 표의문자로 변화시키고, 기원은 다르지만 동양의 서예를 상기시키는 흰색 바탕 위에 넓은 검정색 패턴을 대담하게 사용하여 매우 독창적인 표현적 추상 양식을 발전시켰다. 클라인의 회화는 종종 동양의 서예에 비유되지만, 그의 회화가 제작된 동기는 이국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1940년대 말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의자를 그린 소묘를 집어 들고 호기심에서 그것을 프로젝터를 사용하여 캔버스 틀 가장자리까지 포개질 정도의 크기로 빈 캔버스에 투사해 보았다. 그 결과 강렬한 추상의 이미지로 나타났다. 이 작품에서 보듯 작은 것을 확대한 듯한 추상 이미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그는 종종 회화를 상황에 비유했으며, 캔버스에 첫 번째로 가해지는 붓질을 ‘상황의 시작’이라고 했다. 폴록과 마찬가지로 회화를 활동무대, 즉 사건이 발생하는 장으로 여겼으므로 폴록의 회화와 마찬가지로 그의 회화에서 가시화된 행위가 읽혀질 수 있었다. 또한 클라인은 로스코와 마찬가지로 구속받지 않는 감정에 역점을 두었다.

914 모마 356 데이비드 스미스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개방적이고, 선적이며, 금속으로 된 삼차원의 서예처럼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조형물을 제작했다. 이런 조형물들은 크기가 거대하고 야외에 전시하는 것으로 기획되었으나 무거워 보이지 않고 그것의 비중과는 모순되게 불안정하며 역동적 특성을 띠었다. 채색을 하거나 광택을 낸 금속을 사용하며, 때때로 형태를 겉보기에 일시적이고 우연적으로 배열함으로써 후기회화적 추상의 특징인 일종의 사물성을 부여했다.

915 폴록 100 애드 라인하르트는 1952년경에 화면을 대칭적으로 삼등분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각 부분을 거의 분간할 수 없는 ‘완전한 검은색’ 양식으로 그렸다. 그는 1960년에 자신이 궁극적인 회화라고 생각한 것에 도달했다. 그의 캔버스는 전체가 획일적으로 검게 칠해진 것으로 보이지만, 충분히 오랫동안 바라보면 십자가 구성이 드러난다. 각 회화는 거의 검정에 가까운 아홉 개의 사각형으로 이뤄졌다. 그의 회화는 추상의 두 가지 주요한 틀paradigm을 결합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20세기 초에 완성된 그리드와 모노크롬이었다. 라인하르트의 검은 회화는 그리드의 경계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모노크롬 회화 표면과 비슷한 효과를 냈으며, 이를 통해 배경에서부터 형상이 드러나는 것을 차단했다. 그 결과 자기지시는 그리드와 모노크롬 모두가 보증하는 것, 즉 그 자체로 시작해서 그 자체로 끝나 버리고 미술 이외의 다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916 폴록 36 로버트 머더웰은 1949년에는 유명한 연작 <스페인 공화국에 부치는 애가 Elegy to the Spanish Republic>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1976년까지 150점에 달하는 회화 연작을 내놓았다. 1936년에 일어난 스페인 동란에서 받은 감정적 충격이 계기가 되었다. 스페인 동란은 3년 동안 지속되면서 약 70만 명이 죽었고, 역사상 최초로 일반시민을 전투기로 공중 공습한 무자비한 전쟁이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스페인 동란의 비극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는데,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는 유명하며, 같은 나라 예술가들 호앙 미로와 훌리오 곤잘레스로 회화와 조형물을 제작했다.

917 모마 360 <무당벌레 Ladybug>(1957): 조앤 미첼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와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뉴욕의 한스 호프만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녀는 반 고흐, 세잔, 칸딘스키의 영향을 받았다. 미첼은 데 쿠닝, 폴록, 클라인 등과 교류했다. 그녀는 1955년에 캐나다의 화가 장 폴 리오펠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고 1959년 이후부터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활동했다. 스케일에 있어 남성 추상표현주의 화가들과 비교할 만한 미첼의 회화는 말년에야 인정을 받았다. 흰색 바탕에 다양한 색의 얼룩으로 중첩된 <무당벌레>는 행위적 추상의 즉흥적 특성을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추상은 양식이 아니다. 나는 단지 표면이 작동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추상은 단지 공간과 형태를 사용하는 것이다. 즉 공간과 형태의 모호함이다. 젊었을 때 내게 혁신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리는 것뿐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추상화가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풍경과 동등하게 될 수 있다는 폴록이나 클라인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사례를 확장시키고 거기에 변화를 주었다. 그녀의 주제는 풍경과 색채, 그리고 빛이며 자연에 대한 정감이 넘치는 기억과 감성을 회화적 선과 동력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녀의 커다란 화면은 거침없는 붓질로 에너지가 넘치고, 강렬한 색채는 자연의 변화무쌍한 동력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녀는 캔버스를 이미지가 탄생하는 장으로 보았으며, 그곳에 회화를 완성해가면서 끊임없이 요구되는 행위 그 자체로부터 영감을 얻어 움직였다. 그녀는 1992년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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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강의8

Realism, Social Realism, Socialist Realism
New Realism, Surrealism, Hyper-realism(극사실주의, Superrealism, Photorealism)

귀스타브 쿠르베의 신사실주의New Realism는 현실의 인간을 이상화한 이전의 사실주의와는 달리 가공하지 않은 사실적 묘사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쿠르베에게 사실주의란 인도주의 미술humanitarian art이었으며, 새로운 미술의 탄생을 의미했다. 화가의 주관적 느낌을 무시하고 사물을 보이는 대로 재현함으로써 회화 자체가 사실임을 강조했다. 농민의 시적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의 그림을 그린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와 달리 쿠르베는 화가의 감정을 회화에서 배제했으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에 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재현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주제가 추하거나 저속하더라도 장엄함, 혹은 위엄을 불어넣었으므로 오늘날 우리는 그의 회화에서 당대 프랑스의 생생한 현실을 사진 보듯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회화의 목적을 더 이상 이야기를 전하거나, 성서의 내용, 또는 역사적 사건들을 교육적인 목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나 일시적 환경의 변화를 기록하는 것으로 보았다. 아름다움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에 화가가 역사나 전설에서 주제를 찾을 필요가 없고, 바로 눈앞에 전개되는 대상에서 찾아지는 것임을 의미했다. 목적론적 해석을 거부하고 현실을 편견 없이 경험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쿠르베의 회화에서 구현되었다. 이는 이상주의에 대한 반동 및 낭만주의의 인위성을 거부하는 태도였다.

Hyper-realism(극사실주의, Superrealism, Photorealism)은 1960년대 후반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유행한 회화 양식으로 사물을 세부까지 섬세하고 비개성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으로 조각까지 포함된다. 이런 양식으로 작업한 예술가 중에는 사진, 질이 좋은 이미지 원색 인쇄물을 재료로 사용하고 때때로 캔버스에 컬러슬라이드를 비추면서 작업한 사람도 있다. 팝아트와 마찬가지로 슈퍼리얼리즘도 외부에 대한 직접적 관찰이 아니라 사진이나 인쇄물에 의존하는 구상 양식이었다. 의도적으로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과 유사한 효과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세부까지 정확하게 묘사하며 그 규모는 종종 크게 확장된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눈부신 성공을 거둔 극사실주의의 직접적인 선조는 팝아트이지만, 대부분의 극사실주의 회화에는 팝아트에서 볼 수 있는 유머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차갑고 비개성적인 경향을 띤다. 작품의 소재도 다수의 반사광을 갖는 사물처럼 단지 기술적으로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멕시코 회화ㆍ사회적 사실주의ㆍ사회주의적 사실주의
1910년대와 1920년대 독재가 끝날 무렵에 등장한 멕시코 벽화 운동은 1920년대와 1930년대 국가가 지원한 이데올로기 중심의 아방가르드 운동이었으며, 그 주요 목표는 스페인의 식민지 이전의 과거를 토대로 멕시코의 정체성을 재창조하고 재천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멕시코 벽화는 사회적·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데올로기적이며 교훈적이고 의도적으로 혁명정부의 이상과 염원에 대한 선전을 도운 것이었다.

호세 클레멘테 오로즈코, 디에고 마리아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처럼 국경을 초월해 명성을 얻은 가장 뛰어나고 독자적 화가들조차도 혁명의 이상을 추진하고 멕시코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둔 새 문화 이념을 제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재능을 바쳤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식민지 이전의 미술 형식을 기초로 멕시코의 영웅과 민중을 다룬 민족주의적ㆍ사회적 사실주의 방식을 채택했다. 토착 전통과 민중의 역사에 대한 존경심이 그들의 회화에 생기를 불어넣었지만, 민중적이면서도 전위적인 새로운 민족 회화를 창조하기를 바랐으므로 유럽의 모더니즘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대다수의 문맹자들과 회화를 통해 혁명의 이상을 나누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멕시코에서 벽화는 혁명을 문화적으로 표현하는 주요 수단이었으며 이에 따라 도상과 장르가 결정되었다. 2차 세계대전까지는 벽화와 그래픽이 압도적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미국에 머물던 호세 클레멘테 오로즈코가 1917~19년에 멕시코로 돌아오고 디에고 리베라는 1921년에,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는 1922년에 유럽에서 귀국함으로써 멕시코 회화는 절정기를 맞았다. 시케이로스는 1921년에 이젤화를 버리고 벽화를 채택해야 하며, 회화에서 주제와 사조가 양식과 제작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원칙을 내세운 유명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시케이로스는 파리에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당시 멕시코의 상황을 반영할 새로운 기념비적인 미술의 필요성에 대해 토론했다. 1922년 멕시코로 돌아온 뒤 공산당에 가입하고 ‘기술자·화가·조각가 연합’을 조직하는 한편 벽화 운동을 창시한 화가들의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규정하는 새로운 벽화가 선언문을 1924년 잡지에 게재했다. 이 선언문은 벽화가 대부분의 서명을 받은 것으로 소비에트 구성주의자들이 사용한 사회적ㆍ정치적ㆍ미학적 원칙을 혁명적 이념의 기틀로 삼았다. 선언문은 벽화 운동의 원칙을 구체화하고 이를 공적ㆍ이데올로기적이고 교훈적인 회화로 규정했다. 벽화가들은 대체로 구상적이며 사회적 사실주의 양식으로 작업했지만, 개인적인 표현형식을 발전시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리베라는 1915년에 진보주의자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독재자 프로피리오 디아즈에 대한 반란을 이끌면서 1910년에 시작된 멕시코 농민혁명을 자신의 회화 주제로 삼았다. 멕시코 혁명은 대토지 소유자와 외국자본의 이익을 대변한 디아즈의 독재체제를 타도하고 반식민지적 사회구조의 변혁을 목표로 각지에서 농민반란, 노동자의 파업, 급진파 지식인의 무장투쟁으로 일어났다. 마데로는 디아즈를 권좌에서 끌어내고 대통령이 되었다. 리베라는 멕시코 남부에서 산적 출신의  북부농민군의 지도자 판초 비야와 멕시코의 국민적 영웅 에밀리아노 사파타 살라사르를 모델로 일련의 회화를 제작했다.

판초 비야는 북부에서 군대를 끌어 모아 정부군 요새들을 습격했고, 남부에서는 사파타 살라사르가 지방의 카시크cacique(농촌지역의 정계 거물)들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리하여 1911년 봄 마침내 혁명군이 시우다드후아레스를 함락했으며, 디아즈를 축출하고 마데로를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마데로 정부는 처음부터 불안했다. 사파타 살라사르는 마데로가 토지를 빼앗긴 인디언들에게 땅을 즉시 되돌려주지 않자 분개해 그에게 등을 돌렸다. 오로즈코도 처음에는 마데로를 지지했으나, 느린 개혁에 불만을 품고 북부에서 혁명을 이끌었다. 미국 정부까지도 새로운 대통령이 반란집단에게 너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우려하고 멕시코에서 벌어진 내란으로 인해 미국이 지니고 있던 사업적 이익이 위협받고 있는 것을 염려해 마데로에게 등을 돌렸다. 그 후 멕시코에서는 일련의 유혈이 난무하는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다.

리베라는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의 회화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창시한 평면적이고 단순하며 장식적인 형태를 띤 양식으로 멕시코의 사회사와 정치사를 묘사한 것으로 미국 화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인물과 사건이 빽빽하게 들어찬 구도로 전통 주제와 근대의 주제 모두를 다룸으로써 관람자가 멕시코의 유산에 긍지를 갖게 만들었으며, 사회주의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것을 주창했다. 그는 단순화된 형태를 보여주는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양식으로 작업했으며, 양식화된 인물뿐 아니라 사실적이며 알아볼 수 있는 등장인물을 이용해 내러티브를 전달했다.

일곱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게 된 프리다 칼로는 열네 살 때 명문 국립 예비학교에 입학해 서클활동을 하면서 독서를 즐겨 했고, 서클 활동을 통해 남자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정을 실현해나가는 동지적 성실함을 배우게 되었다. 이 서클에서 그녀의 첫사랑이자 오랜 친구가 되는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를 만났으며, 1925년 열여덟 살 때 그와 함께 탄 버스가 건널목에서 열차와 충돌해 고메스 아리아스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으나, 칼로는 척추,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는 등 이 사고는 그녀의 삶뿐만 아니라 회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요양기간 동안에 자화상과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교통사고로 인한 정신적ㆍ육체적 고통과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모델로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주제로 선호하게 했으므로 회화는 그녀에게 자서전이나 다름없었다.

사회적 의미를 지닌 상황 사회적 사실주의
미국에서 일어난 사회적 사실주의 운동은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보다는 사회에 우월적인 의의를 부여하는 것으로 사회적 의미를 지닌 상황, 사건, 혹은 사물을 자연주의 방식으로 묘사하는 화파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사실주의는 주로 도시생활을 다룬 미국의 애시캔파Ash Can School와 도시생활 외에도 산업의 현장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미국 정경회화American Scene Painting에 적용된다. 애시캔파는 1900년부터 10년 동안 번성한 미국 사실주의 화파로 로버트 헨라이가 화파 결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가 결성한 디 에이트 멤버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디 에이트The Eight란 1907년 로버트 헨라이가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와 결별한 뒤 독자 전시회를 가질 목적으로 일단의 미국 화가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그룹으로 중심인물은 헨라이 외에 ‘뉴욕 사실주의’ 그룹에 속하는 화가들로 그들은 헨라이가 필라델피아에서 활동할 때부터 그를 따랐다. 
 

그들 가운데 네 명은 1857년에 간행된『필라델피아 프레스 Philadelphia Press』지의 미술부 기자로 활동했다. 인쇄물에 사진이 거의 사용되지 않던 당시에 현장을 재빨리 스케치하는 작업이 필요했는데, 이는 날카로운 시각과 신속한 소묘능력 및 세부에 대한 정확한 기억력을 요구하고 그 결과 일상적 생활풍경에 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이런 것들이 훗날 애시캔파로 알려지게 된 ‘뉴욕 사실주의’의 기본 특징이 되었다. 디 에이트는 화풍이나 기법에서 공통된 특징이 거의 없고 당대의 아카데믹한 회화 경향과도 그들 자신들이 믿고 있던 것만큼이나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을 결속시킨 공통된 특성은 일상생활에서 포착한 장면과 세부, 그리고 평범한 사람의 하루하루를 보여주는 진부한 물건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디 에이트 멤버들이 주로 다룬 주제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가들이 다룬 주제와 많은 부분 일치했다.

지방주의Regionalism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지역적 특성을 강조하며 미국의 고유 전통과 문화를 추구한 문학 및 그러한 경향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 미국의 정경회화 중 특히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두드러지게 활동한 화가들의 회화 경향을 말한다. 이들은 미국 중서부와 서남부 지방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앨프레드 스티글리츠 주변의 화단과 아모리쇼를 통해 미국에 도입된 유럽의 혁신적인 양식들을 거부함으로써 순수 미국 회화를 확립하려는 애국주의적인 욕구에서 출발했다. 국가주의적 충동을 드러낸 지방주의는 급진적이라기보다는 보수적이었다.

에드워드 호퍼는 1900~06년에 뉴욕 체이스 미술학교에서 로버트 헨라이의 가르침을 받았고, 1906~10년 세 차례에 걸쳐 유럽을 여행했지만, 그의 사실주의 양식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스티글리츠 서클이나 아모리쇼 같은 근대 운동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1962년에는 애시캔파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애시캔파는 그가 흥미를 갖지 않았던 사회적 경향을 띤 반면 자신의 회화에는 전혀 그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이후 그의 회화는 도시생활의 고독, 공허함, 정체감을 표현하는 미국 정경회화의 중요한 예로 간주되었다. 그의 회화에 나타나는 모호성은 미학적 개방성을 드러내지만, 그의 회화는 미국 근대 미술의 절정기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미국적 풍경에 기조를 두려는 태도는 호퍼에게서만 관찰되는 현상은 아니다. 그의 회화에서 종종 나타나는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이나 자연을 포착하는 방식은 유럽 모더니즘과 미국 모더니즘 사이에 간격만이 존재할 뿐 유럽 낭만주의 화가들이 문명화 과정의 정체나 인간이 자연에 대해 느끼는 소외감을 표현하려고 창문 너머의 풍경을 자주 재현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정밀주의Precisionism는 1915년경 미국에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뚜렷하고 명확한 처리방식을 채택하며, 분명한 윤곽선과 견고한 음영, 매끄럽고 비개성인 표면 등을 선호했기 때문에 ‘흠 없는Immaculate’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미국의 화가들은 산업화와 미국의 현대화 풍경을 날카로운 기하학적 구성으로 정밀하게 묘사했다. 그들은 평범하고 산업적 주제에 서사적, 혹은 영웅적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 상당히 세련된 양식으로 비인간화를 추구했다. 정밀주의자들은 결코 순수추상을 제안한 적이 없으며 심지어는 세계를 보다 정밀하게 재현하기 위해 순수추상의 단순한 형태를 사용했다. 이런 이유에서 정밀주의는 종종 ‘입체파의 사실주의Cubist Realism’로 불리었다. 정밀주의자들의 목표는 주제를 식별할 수 있게 유지하면서 입체주의에 근거한 통일된 추상디자인을 성취하는 것이었고, 그 배후에 근대적 기법을 이용하여 동시대 미국의 산업현장과 과학기술적 풍경에 서사시적 장엄함을 부여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사회주의적 상황을 찬양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소비에트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세계적으로 강세를 보이던 다양한 반모더니즘 경향에서 하나의 특수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런 반모더니즘의 경향으로 프랑스의 고전적인 질서로의 복귀rappel à l'orde, 독일의 신즉물주의, 제3국의 나치미술, 무솔리니의 파시즘적 신고전주의, 그리고 다양한 형식의 미국의 사회적 사실주의 등이 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를 통해 대규모 선전선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틀뿐만 아니라 실용적 요구까지 제공했다. 스탈린은 “예술가가 삶을 정확히 묘사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그는 무엇이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관찰하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사회주의 미술이 될 것이며,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될 것이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선전선동의 유산과 1920년대의 기록화 프로젝트를 합치고 여기에 영웅적 서사를 전근대적인 19세기 장르화의 형식으로 혼합하려고 했다. 프랑스의 화가들 자크 루이 다비드와 외젠 들라크루아, 오노레 도미에, 프랑수아 밀레, 귀스타브 쿠르베,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아돌프 멘젤의 회화는 혁명적 열기의 회화, 인민의 회화로 추앙되었으며,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특히 세잔의 회화는 논쟁의 주제가 되었는데, 그것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기만적인 도상학과 엉터리 양식적 동일성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아반영적인 비판 프로젝트로서의 회화 개념은 사라져야 만했다.

작품
호세 클레멘테 오로즈코는 1936~39년 과달라하라에 위치한 과달라하라대학, 정부 공관, 호스피시오 카바나스 교회에 그의 벽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을 그렸다. 그는 선과 악에 대한 개인적인 심판보다 인류가 겪는 물질적ㆍ신비적 갈등을 표현했다. 소용돌이치는 불길에 휩싸여 불을 통해 정화되는 인간을 소재로 한 프레스코화 <인간의 네 양상>(1936)에 그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호스피시오 카바나스Hospicio Cabañas 교회는 건축가이자 조각가 마누엘 톨사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한 것으로 고아, 노인, 심신장애자, 만성병자들을 돌보고 쉼터를 제공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791년 과달라하라 주교의 명령에 따라 병원과 유아원, 사무소로 쓰일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1796년 과달라하라의 파견관으로 지명된 후앙 루이즈 데 카바나스의 이름을 따서 교회의 명칭이 만들어졌으며, 그녀는 후에 마누엘 톨사와 결혼했다. 이 교회는 사각형으로 크기가 가로세로 164-145m이고, 높이는 7.5m이다. 카바나스가 1823년 타계한 후에도 건축은 1829년까지 계속되었다. 내부의 공간은 순수 기하학적 형태였고, 그 공간을 오로즈코가 1936~39년에 격렬한 장면들로 장식했다. 이 교회는 19세가 중반 이후부터 병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오로즈코는 1930~31년에 뉴욕의 뉴스쿨를 위해, 1932~34년에는 그가 프레스코 기법을 가르친 적이 있는 뉴햄프셔의 하노버 소재 다트머스대학을 위해, 1939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 소재 포모나대학을 위해 벽화 작업을 했다.

시케이로스는 1925~30년에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조합 활동과 위원회 활동에 전념하며, 1930년에는 정치 활동으로 투옥되었고, 그 뒤에도 수차례 투옥되었으며, 1931년에는 가택연금 되었다. 그는 다양한 기법과 재료를 실험하면서 여러 각도를 고려하여 개선한 복합 원근법과 왜곡을 이용해 환영의 장치들을 만들고 이를 포토몽타주 기법과 함께 벽화에 응용함으로써 노동자 투쟁의 가공되지 않은 힘을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가운데 메시지가 주는 충격을 확대시킬 수 있었다. 이런 기법은 멕시코시티에 있는 전력공사 빌딩에 그린 <부르주아지의 초상화>(세부, 1939)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것은 중상층 계급에 반대하는 노골적인 정치선전으로 자유·평등·박애에 바쳐진 그들의 신전이 화염에 휩싸인 장면이다.

리베라는 멕시코시티 국립 예비학교의 볼리바르 원형극장에 주문받은 그의 첫 납화 벽화 <창조>(1922~23)를 그렸다.

프리다 칼로는 1928년에 자신보다 나이가 두 배 많고 체구가 두 배나 되는 디에고 마리아 리베라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종종 긴장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여러 차례의 별거, 이혼과 재혼, 그리고 양쪽 모두의 간통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칼로의 연인 중 하나는 트로츠키로 그는 1940년 멕시코시티의 코요아칸에 있는 칼로의 집에 머무는 동안 암살당했다.

칼로는 거의 독학으로 화가가 되었다. 리베라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멕시코의 민속미술로부터 받은 영향이 더 컸고, 그녀의 회화는 풍부한 색과 나이브한 열정을 지녔으며, 초현실주의의 환상이 가미되어 있다. 1939년 르누와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하여 칸딘스키, 피카소, 뒤샹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았지만, 그녀 자신은 자신의 회화가 유럽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멕시코 전통 회화에 뿌리를 둔 것이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밝혔다. 앙드레 브르통은 1939년 파리에서 칼로의 전시회를 개최했지만, 자신을 초현실주의자로 여기지 않고 “나는 결코 나의 꿈을 그린 적이 없다. 나는 나의 현실을 그릴 뿐이다”라고 했다.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고통에 대한 칼로의 회화는 자아도취적이면서도 악몽 같지만 또한 자신의 성격처럼 격렬하며 화려하다. 리베라는 그녀의 회화를 “강철처럼 신랄하고 부드러우며 단단하고, 나비의 날개처럼 섬세하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미소처럼 사랑스럽고, 인생의 쓴맛처럼 심오하면서 잔인하다”고 했다.

세 번에 걸친 유산과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고통이 칼로로 하여금 그녀의 모습을 탯줄과 줄, 혹은 뿌리 같은 오브제와 연결되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다친 사슴>(1946)에서의 그녀의 모습은 비록 여러 개의 화살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매우 투명하며 강렬한 빛을 발하는데, 이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의 고통이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보여준다.

1940년 1월부터 2월까지 멕시코시티에서 ‘초현실주의 국제 전시회’가 열렸으며, 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초현실주의 운동으로 조직된 최초의 전시회였다. 전시회에는 달리, 델보, 아르프, 에른스트, 마송, 미로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었고, 칼로는 <두 명의 프리다>(1939)를 출품했다. 칼로는 뉴욕에서도 성공적인 전시회를 열었으나 생전에는 남편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타계한 후 점차 유명해져 페미니즘의 영웅으로 부각되었으며, 엄청난 신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정신력으로 작품 활동과 좌익정치 활동을 계속해나간 점 등이 추앙받고 있다.

로버트 헨라이는 토머스 에이킨스의 사실적 사실주의 회화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헨라이는 1888~91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했고, 네덜란드의 뛰어난 초상화가 프란스 할스의 철저한 신봉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미술이 아카데미즘이라는 상아탑을 버리고 민중의 보편적 관심이 있는 일상생활을 담은 주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에 대한 열정을 갖고 1891년 필라델피아로 돌아갔다. 헨라이는 1908년 지금의 링컨센터 근처 브로드웨이에 헨라이미술학교를 세우고 에드워드 호퍼를 포함한 뉴욕 미술학교 제자들 몇몇을 합류시켰다. 그는 1915-28년에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저서 『미술 정신 The Art Spirit』(1923)에서 자신의 미학을 집대성하여 미국과 유럽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존 슬론은 헨라이의 절친한 친구이자 제자였다. 헨라이는 몇 년 동안 화화를 부업으로, 삽화를 본업으로 여겨온 슬론에게 회화를 정식으로 시작하도록 권유했다. <남쪽 해변의 일광욕하는 사람들>(1907~08)에서와 같이 슬론은 거리에서, 혹은 유흥지에서 바라본 일상의 장면을 주로 그렸다. 코니아일랜드, 유니언 스퀘어, 바워리 가의 전형적인 일상장면에 관심이 많았으며, 또한 헨라이처럼 강변의 풍경을 음울하고 단조롭게,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극적이고 역동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슬론의 사회적 사실주의는 늘 객관적 묘사일 뿐 비판적이거나 선동적이지 않았다. 1931년에 미국 정경회화의 본거지인 아트 스튜던츠 리그의 교장에 선출되어 애시캔파의 원칙을 계속 추진해나갔다. 그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화가로, 미학적으로는 뛰어나지만 때때로 깊이가 없이 많은 기교를 부린 헨라이의 화려함에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리투아니아의 카프나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벤 샨Ben Shahn(1898~1969)은 1930년에 아프리카를 주제로 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당시 경제공황의 시기로 실업과 사회불안 속에서 사회비판을 주제로 하는 경향이 표현되었다. 1931년에 그때까지 관심을 기울여온 심미적 회화를 거부하고 사회비판의 주제를 다룬 <드레퓌스 사건>,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1931~32) 등의 시리즈를 과슈나 수채로 그려 자신의 고유한 양식을 확립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10월 프랑스에서 유대인 드레퓌스의 간첩 혐의를 둘러싸고 정치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다.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포병대위 드레퓌스A. Dreyfus가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종신유형의 판결을 받았다.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정보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으나, 그가 유대인이란 사실이 혐의를 받게 한 것이다. 그 후 군부에서는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확증을 얻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가 진상발표를 거부하고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 드레퓌스의 가족이 1897년 11월 진범인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했지만, 군부는 형식적인 신문과 재판을 거쳐 그를 무죄 석방했다. 그 후 진실과 정의를 사랑하고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소설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논설로 사건이 재연되었다. 졸라는 드레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부의 의혹을 신랄하게 공박하는 논설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으로 1898년 1월 13일자 『오롤』지에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프랑스 전체가 정의, 진실, 인권옹호를 부르짖는 드레퓌스파, 혹은 재심파와 군의 명예와 국가질서를 내세운 반재심파로 분열되었다. 마침내 이 사건은 한 개인의 석방문제라는 차원을 넘어 정치적 쟁점으로 확대되면서 제3공화정을 위기에 빠뜨렸다. 군부는 1898년 여름 그리고 1899년 9월에 열린 재심 군법회의에서 드레퓌스에게 거듭 유죄를 선고했으나, 대통령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무죄 확인을 위한 법적 투쟁을 계속한 끝에 드레퓌스는 1906년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복직 후 승진도 했다.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에서 있었던 유명한 살인사건 재판인 사코와 반제티 사건는 1920년부터 7년 이상 끌어오다가 피고인인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의 사형으로 끝났다. 1920년 4월 15일 매사추세츠 주의 사우스브레인트리에서 살해된 자는 구두제조회사의 경리직원 F.A. 파민터와 종업원 급료를 지키기 위해 파민터와 함께 있던 경비원 알렉산드로 베라르델리였다. 그해 5월 5일 이탈리아인 사코와 반제티가 범인으로 체포되었는데, 두 사람은 1908년 미국에 이민 온 구두제조공과 생선행상인이었다. 두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자 사회주의자와 급진주의자들이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하며 항의했다. 증인이 사람을 잘못 알아보았음을 이유로 재심을 요구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925년 11월 18일 살인죄 판결을 받은 첼레스티노 미데이로스라는 사람이 모렐리 갱단과 함께 위의 범죄사건에 관여했다고 자백했다. 당시 심리담당 판사가 추가의 증거를 들어 재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대법원은 판단의 번복을 거부했다. 사코와 반제티는 1927년 4월 9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후 전 세계적으로 대중 집회에서 이 사건에 대한 거센 항의가 빗발치자 A.T. 풀러 주지사는 독립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927년 8월 3일 풀러 주지사는 사면권 행사를 거부했고, 자문위원회도 그의 입장을 지지했다. 세계 주요도시에서 항의데모가 계속되었고,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는 폭발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던 사코와 반제티에게 1927년 8월 23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 후 모렐리와 그 갱단의 유죄가 입증되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초기 작품은 칙칙한 사무실, 반쯤 빈 레스토랑, 쓸쓸한 모텔 방, 고립된 주유소 등 가장 평범한 장소에 시적인 통찰력을 불어넣으며 조국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기록했다. 어두운 색으로 그려졌으며, 따뜻한 느낌의 갈색, 짙은 회색, 검은색이 주조를 이룬다. 기법에서는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와 같은 네덜란드 바로크 화가들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에두아르 마네의 영향도 적잖다. 호퍼가 파리에서 그린 그림들은 일견 이후의 시기에 그린 것들과 달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초기 작품에는 그가 평생에 걸쳐 추구하게 될 면면이 담겨 있으며, 몇몇 요소는 후기 작품에서 거의 편집광적으로 구현된다. 주로 풍경과 도시의 장면을 그렸지만 평생 여성 누드를 병행했다. 누드화는 오로지 아내 조세핀 호퍼만을 대상으로 하는 편집광적으로 추구되었으며, 관음성이 농후하다. 이후 여성에 대한 관음적 시선은 보다 너그러운 전망으로 변모한다. 이중적 심리 기제를 담는 수법으로 충만한 욕망과 무의식적 성의 맥락을 병행했다.

<도시의 아침>(1944)은 엷은 빛만 침투할 뿐 어두운 방이 여성을 구름 한 점 없는 환한 바깥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동굴 속에 가둔 듯이 보인다. 누드는 명암 효과로 부각되지만 여성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혹적 자태는 보이지 않는다.

호퍼는 늘 개인주의자로 남아 있었으며, 1962년의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미국 정경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리려고 노력했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는 그의 회화에서 느낄 수 있는 고독과 향수에 대해 “관람자가 그런 걸 느낀다고 하더라도 이는 결코 의도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는 미국 정경의 한 측면을 그린 화가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회화에는 사회적 사실주의자들의 공공연한 사회적인 주장이 없고, 독일 표현주의자들의 떠들썩함도 없다. 그의 회화는 정적과 침묵으로 종종 강렬한 존재감을 주며 심리적 반향을 일으키는데, 데 키리코의 회화에서 받는 것과 유사한 충격이다. 데 키리코가 현실처럼 보이는 비현실을 만듦으로써 그런 효과를 얻은 데 반해 호퍼는 친숙하고 현실적인 것을 보여줌으로써 동일한 효과를 얻었다.

아이오와주 애너모서 태생의 그랜트 우드는 1920-28년에 몇 차례에 걸쳐서 유럽을 방문했으며, 뮌헨에서 독일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에서 감동을 받았다. 귀국 후 <개척자 터너>와 자기 어머니를 모델로 한 <화분을 든 여인>에 이어 <미국의 고딕>(1930)을 그려 유명해졌다. 미국의 시골 분위기를 청교도적 이미지로 만든 <미국의 고딕>은 고딕 양식의 집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우드는 “그들(그림 속의 앉아 있는 인물들, 즉 우드의 여동생과 치과의사)의 성격을 진솔하게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들이 실제 생활 속에 있을 때보다도 더 그들처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1930년 여름 우드는 아이오와주 시골을 여행하던 중 이 그림의 배경이 된 고딕 양식의 집을 발견했다. 그는 집과 두 모델을 따로 그린 뒤 합성했다. 우드가 지방주의 회화를 주목할 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찰스 R. 실러는 인적이 없는 산업화 현장의 기하학적 형태들에 매료된 실러는 정밀주의에서 가장 유명한 <상갑판 Upper Deck>(1929)을 그렸는데, 그것은 정기선 머제스틱 호의 갑판에서 찍은 사진을 기초로 통풍장치와 여러 기계들을 그린 복잡한 구성의 작품이다. 독일 선박회사의 광고지에서 발췌한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다.

정밀주의 화가들이 산업에만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지아 오키프는 뉴욕의 번쩍거리는 마천루들뿐만 아니라 뉴멕시코 주와 관련이 있는 풍경과 오브제들을 그렸다. 사진 확대의 미적 장점을 이용해 꽃, 식물, 골반 뼈 같은 생물형태적인 사물들을 가까이서 관찰하면서 형식적 특성과 눈부신 색채를 표현했다. 꽃을 확대한 형상으로 크기와 비례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그녀의 수법은 사진의 방식과 같았다. 그녀가 확대한 꽃은 종종 성적 은유로 이해되기도 했다. <접시꽃과 양의 머리>(1935)는 뉴멕시코주 사막 지역을 경외하는 의미로 그린 것이다. 메마른 이 지역에 매료된 그녀는 매년 일정 기간을 그곳에서 작업하다가 1946년 스티글리치가 타계하자 그곳에 정착하여 은둔생활을 했다. 그녀의 주제는 두개골, 짐승의 뼈, 식물의 기관, 조개껍데기, 산 등의 자연을 확대한 것이었다. 윤곽선이 율동적이며 자연에 대한 탐미적 경향이 나타났다. 선명한 색을 사용하면서 엷은 색조의 물감으로 원근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대상에 강약을 부여했다. 그녀는 “뼈들은 내가 아는 어떤 것보다 아름답다. 그것들은 살아 돌아다니는 동물들보다 더 살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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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강의7

Luminism(1967), Optical art, Kinetic art
루미니즘은 선의 리듬과 색의 구성을 통해 음악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낸 프란티셰크 쿠프카(1871-1957)를 선구자로 꼽을 수 있고, 그 후 빛에 대한 예술가들의 관심이 빛의 패턴을 음악작품의 울림이나 해석으로 여기는 데 더 나아가서 빛 자체를 하나의 독립된 미술의 매체로 간주하게 했다. 루미니즘과 옵아트 그리고 키네틱 아트는 구성주의를 기반으로 창안된 장르들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오르피즘에서 이런 가능성들이 예고되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1912년에 로베르 들로네와 쿠프카의 작품을 비재현적 색채 추상으로서의 새로운 구조 회화로 이해하고 오르피즘Orphism(혹은 동시주의)이란 명칭으로 부르면서 입체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운동으로 간주했다. 그렇지만 들로네는 오르피즘의 기원을 입체주의보다는 오히려 인상주의와 조르주 쇠라의 신인상주의로 파악했다. 색의 구성으로 음악적 소리와 같이 공명하는 비구상화를 그릴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표현적 추상을 이끌어낸 19세기 말의 주요 개념 중 하나였으며, 이런 경향이 쿠프카의 회화에서 결실을 맺었다. 운동의 묘사와 에티엔 쥘 마레의 고속연속촬영법에 관심을 기울인 쿠프카는 비재현적 추상 형태로 운동을 암시하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회화에 주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선의 리듬과 색의 구성을 통해 음악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회화를 창조했다. 그는 일찍이 1909년 음악의 법칙에 따른 운동과 연속운동을 묘사한 파스텔화와 소묘 연작을 내놓았다. 
 

Optical art
광학, 혹은 망막에 기반을 두는 옵아트는 옵티컬 아트Optical art를 줄인 용어로 1965년 뉴욕의 모마에서 열린 ‘감응하는 눈 Responsive Eye’ 전시회에 관한 『타임』지의 비평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평행선이나 바둑판무늬, 동심원 같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형태의 화면을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명도가 같은 보색을 병렬시켜 색채의 긴장상태를 유발했다. 그 결과 관람자는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고 한 부분을 오래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옵아트는 지각적 모호함과 최소한의 시각적 장치를 이용해 시각에 충격과 혼란을 줌으로써 작품이 진동하거나 점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환각적 운동을 창출하는 기하학적 추상의 한 갈래를 가리킨다. 시각적 변칙에 관한 예술적 탐구와 지각심리학에 관한 과학적 탐구 사이의 경계는 매우 미미하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옵아트의 목적은 망막에 매우 강력한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관람자의 생리적 시각반응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팝아트의 상업주의와 지나친 상징성에 대한 반동적 성격으로 등장한 옵아트 대부분의 작품은 지각 심리학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잘 알려진 착시현상이나 시각적 놀이에 바탕을 둔 것들이다. 옵아트 예술가들은 화면이 진동하거나 뒤틀리는 듯한 착시현상을 유발하기 위해 크기, 형태, 방향, 명암, 많은 연속 단위들 등을 체계적으로 변형시키기도 하고, 화면의 팽창과 확대 등과 같은 착시현상을 야기하기 위해 주기적 패턴 체계 속에서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확대, 혹은 축소시키기도 한다. 이런 것들과 그 밖의 또 다른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게 조작된 패턴들은 움직이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켜 모호하고 대립적인 착시를 유발하는 걸 목적으로 개발된 것들이다. 패턴이 전면에 걸쳐 그려진 화면에서 형태들은 흔들리거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무한히 후퇴하는 듯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종종 가상의 비현실적 공간을 창출하기도 한다.

Kinetic art
조화를 이룬 색은 느린 운동을, 조화되지 않는 색은 급격한 운동을 암시하는 것을 비롯해 색채 대조를 통한 운동의 표현에 대한 들로네의 생각은 키네틱아트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이런 성향은 프랑수아 모를레(1926~)의 작품에서 더욱 심화되었는데, 추상화를 그리는 데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한 그는 1952년에 <회화>라는 단순한 제목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은 흰색 바탕에 녹색 줄무늬 수평-수직 지그재그가 전면적으로 가득 채워진 것이었다.

희랍어 키네시스kinesis(운동성), 키네티코스kinetikos(움직임)에서 유래한 키네틱아트Kinetic art란 운동을 수반하는 미술을 말한다. 키네틱아트는 운동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 그 자체, 즉 작품에 필요불가결한 요소로서의 운동을 나타내는 미술로 미술품 자체가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키네틱아트 특유의 효과는 작품 앞에서 움직이는 관람자에 의해서, 혹은 작품에 손을 대거나 조작하는 관람자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도 있다. 키네틱아트라는 명칭이 비평적 분류 기준으로서 첨가되고 승인된 것은 1950년대였다. 그때부터 이 명칭은 광범위한 양식과 기법을 망라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운동을 처음 사용한 작품은 마르셀 뒤샹의 등받이 없는 걸상에 자전거 바퀴를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자전거 바퀴>는 반미술의 원칙을 보여주기 위한 레디메이드 중 하나였다. 뒤샹은 또한 1920년대 초 뉴욕에서 <회전 부조>와 <회전 반구>를 제작했으며, 그것들은 회전할 때 양감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그는 동심원들이 그려진 평편한 원반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입체적 외형을 띤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움직이는 물체가 급격한 변화 속에 전혀 다른 물체로 보이는 걸 입증한 것이다.

광선회화를 창조한 라슬로 모홀리 나기
콜라주와 포토몽타주(콜라주의 변형) 작품을 제작하여 추상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한 헝가리계 미국 예술가 라슬로 모홀리 나기(1895~1946)는 광선변조기를 제작하는 데 기술자와 공학가의 도움을 받아 1930년에야 가동이 가능했다. 그는 “그 장치는 운동과 내가 거의 마술이라고 생각한 빛과 그림자놀이의 질서정연함에서 너무도 놀라웠다”고 했다. 이후 예술가들은 기술자와 공학가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모홀리 나기는 바우하우스에서 요제프 알베르스와 더불어서 기초과정을 이끌면서 회화와 조형물뿐 아니라 실험영화, 연극, 산업디자인, 사진, 도서와 전시를 위한 타이포그래피에서도 다재다능함을 발휘했다. 그는 구성주의에서 가장 실험성이 강했으며, 특히 미술에 광선, 운동, 사진, 플라스틱 재료 등을 사용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영화, 연극, 오페라 제작에도 참여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폐교되고, 나치를 피해 1935년에 런던으로 가서 「서클 선언문」으로 대표되는 구성주의 그룹에 합류한 그는 광선회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며 미술품에 광선, 운동, 사진, 영화, 플라스틱 재료 등을 사용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937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막 설립된 시카고 뉴바우하우스의 학장이 되었다. 학장직을 그로피우스에게 요청했으나 그가 하버드대학의 건축학 과장으로 가는 바람에 모홀리 나기가 학장이 된 것이다. 그는 이전의 바우하우스에서처럼 기초과정에서 재료, 도구, 구성, 재현을 분석하는 한편 새롭게 과학, 사진, 영화, 디스플레이, 광고를 강조하면서 “우리의 관심은 새로운 유형의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예술가나 장인이 아니라 디자이너라고 말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새로운 유형의 디자이너란 과학기술 분야와 전문교육을 인간의 근본적인 수요와 결합시킬 수 있는 사람을 의미했다. 1944년에 인스티튜트 오브 디자인으로 다시 명칭을 바꾼 이 학교는 현재 일리노이즈 공과대학에 소속되어 있다.

새로운 재료와 과학기술을 차용한 훌리오 레 파르크
2차 세계대전 후 광선투사기는 더욱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아르헨티나 실험예술가 훌리오 레 파르크(1928~)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광선을 투사하기 위해 회전하거나 곡면을 지닌 거울과 반사기, 편광, 렌즈와 프리즘을 이용한 굴절 조절, 막힌 부조 표면 등을 이용한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다. 레 파르크는 1958년에 파리로 가서 한동안 빅토르 바자렐리 밑에서 작업한 후 1960년 시각예술연구회 창립에 참여했다.

프랑수아 모를레, 장 피에르 바자렐리 이바랄 등이 구성원으로 참여한 시각예술연구회(GRAV)의 목적은 빛과 운동을 미적으로 다룬 것에 대한 연구로서 근대 산업재료를 미술의 용도로 이용하는 것에 관해 연구했다. 구성원들의 표현양식은 달랐지만, 미술품의 비개성화, 새로운 재료와 과학기술의 차용, 그룹 활동과 익명성 예찬, 빛, 소리, 실제 운동과 같은 직접적인 자극 이용, 전통 미적 기준에 대한 성상 파괴적 태도 등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앵포르멜, 타시즘,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표현적 추상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레 파르크는 옵아트, 키네틱아트, 광선을 이용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예술가의 창조성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과학의 원칙에 따라 작업하면서 작품에 대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시각예술연구회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공동 제작을 선호했다. 그는 관람자의 주관적 반응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된 자극에 따라 발생하는 객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지각반응을 모색했다. 1960년경에 색과 광선에 관심을 갖게 되어 프리즘과 입방체를 사용해 모빌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했는데, 이런 재료를 선택한 것은 투명성과 반사광 측면에서 계산된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가지 재료들이 각기 다른 속도로 회전하는 부조도 제작했으며, 재료들의 다양한 표면 질감을 이용해 반사광을 얻었다.

광선 스펙터클로서의 광선 환경
광선을 미적으로 사용한 또 다른 방식은 광선 스펙터클로 이는 광선 환경에 포함된다. 광선 스펙터클의 원형은 베를린의 건축물에 조명을 비추는 것을 내용으로 한 나움 가보의 <광선 축제>(1929)였다. 가보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나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1905~81)가 1938년에 <빛의 대성당>을 제작하면서 가보의 아이디어를 이용했다. 이 작품은 근대의 ‘소리와 광선’ 퍼포먼스의 효시가 된다. 2차 세계대전 후 광선 환경과 광선 스펙터클은 일본, 유럽,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실험예술가들에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펼치는 분야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루초 폰타나와 브루노 무나리가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고, 독일에서는 제로 그룹으로, 특히 오토 피네, 하인츠 마크, 귄터 위케르 등이 광선 연구에 전념했다.

제로Zero Group은 1957년 뒤셀도르프에서 오토 피네와 하인츠 마크가 결성한 것으로 두 사람 모두 키네틱아트와 루미니즘에 관심이 많았으며, 뒤에 귄터 위케르가 가세했다. 제로 그룹은 새로운 소리를 발생시키는 침묵의 영역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며, 이런 의미는 시각예술에서 순수 색과 빛의 효과를 위해 구체적 형상과 형태를 포기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제로 그룹의 주장은 그룹의 명칭과 동일한 이름의 정기간행물 『제로』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미술에 광선을 이용한 실험예술가의 수가 너무 많고 그들이 사용한 기법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그들을 각각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광선을 미술의 재료로 사용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일어난 새로운 현상으로, 광선이 매우 환상적이고 독창적으로 사용되었으므로 한마디로 규정해서 설명할 수 없다.

고밀도의 강력한 광선 빔을 산출하는 레이저LASER를 사용함으로써 광선 환경은 더욱 발달할 수 있었다. 레이저라는 말은 방사의 유도방출에 의한 빛의 증폭Light Amplification by Stimulated Emission of Radiation의 머릿글자의 집합에 의한 합성어이다. 레이저의 중요한 성질은 간섭성을 가지며 단색성을 나타내고, 강력한 가는 빛을 방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이저빔은 처음에는 군대에서 사용되었으나, 농축된 가는 빛으로 흩어지지 않고 곧게 나가는 특성 때문에 예술가들이 재료로 선호하게 되었다. 레이저빔이 처음 사용된 때는 1965년이었고, 그때부터 설치, 거대한 규모의 환경미술, 그리고 홀로그래피holography라는 특수한 영역에서 사용되었다. 홀로그래피라는 용어는 전자현미경의 분해 능력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헝가리 태생의 영국 물리학자 데니스 가보르(1900~79)가 고안해낸 영상방법이다. 가보르는 홀로그래피의 발견과 이론적 연구로 1971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종래의 사진이 물체의 밝고 어두운 면의 분포만을 기록한 데 반해 홀로그래피는 파동으로 빛이 지닌 모든 정보, 즉 진폭과 위상을 동시에 축적하고 재생한다.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독특한 영상을 생성하는 기술로서의 홀로그래피는 레이저 입체영상으로 불리며, 사물을 깊이, 관점, 시차적 영상의 재현, 모양, 크기 컬러 안에서 실물과 똑같이 그려내는 첨단 영상매체로서 레이저 개발과 더불어서 실물을 재생산하는 실제적인 방법으로 발명되었다. 레이저를 포함한 입체영상의 발명은 현대의 테크놀로지 분야에 그 사용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의 표현방식을 넓혀주는, 표현 가능성을 무한정 확장시켜주는 적극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과학을 바탕으로 하는 첨단 영상매체의 멀티미디어 시스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정보전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이차원 평면 미디어에서 삼차원 입체 미디어로의 이행은 보다 필요한 많은 정보전달을 가능하게 한다.

키네틱 광선-구를 실험한 오토 피네
뮌헨과 뒤셀도르프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1948~53)한 후 뒤셀도르프의 패션 인스티튜트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쾰른대학에서 철학을 공부(1952~57)한 오토 피네(1928~)는 주로 모노크롬 회화를 제작했지만 차폐장치를 사용해 광선을 조절함으로써 화면 위에 보플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는 모든 작품에서 반사경, 일광 반사 신호기 등을 이용하여 광선을 연구했다. 피네는 야외에 기념비적인 빛의 투사물을 만드는 것을 야망으로 삼았다. “나의 가장 큰 꿈은 광막한 밤하늘에 빛을 투사해 빛과 우주가 만남에 따라 우주를 탐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에게 빛은 리듬과 운동의 양식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것은 예술가의 재량에 맡겨진 모든 요소 가운데 가장 비물질화된 것이다. 빛은 그 자체 비물질화된 것일 뿐만 아니라 물질을 비물질화시키는 효과도 가진다. 피네는 1964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학에 교환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했고, 1972년에 MIT공과대학 환경미술부 교수가 되었다.

레이저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폴 얼스
미국의 작곡가이면서 실험예술가 폴 얼스(1934~)는 레이저빔이 흩어지지 않고 공간을 가로지르며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동일한 힘으로 뻗어나갈 뿐만 아니라 빛으로 에너지와 열을 생성하며, 생생하고 진동하는 레이저의 특성을 십분 활용했다.

20세기 후반에 레이저를 통한 아름다움의 창조가 예술가들의 분별력 있는 최상의 도전 목표가 되었다. 홀로그램을 제작한다는 것은 매우 섬세한 도구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가 창출해낸 것들 중에서 가장 섬세한 도구이다. 레이저는 정제되고 명료한 빛을 발하는 기술과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간섭성과 직접성을 가지도록 만들어졌다. 홀로그래피는 예술 작업에 있어서 더 많은 기술이 요구된다. 예술가들은 공간구성의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이론과 기술적 이해는 물론 직접 제작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섬세히 다룰 수 있는 장인적 기능이 요구된다. 홀로그래피는 미래의 창window of the future으로 불린다. 그것은 화가의 캔버스와 같은 역할 속에서 창을 통해 들여다보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옵아트의 선구자 요제프 알베르스
요제프 알베르스(1888~1976)는 색이 얼마나 착각하기 쉬운지, 어떻게 다른 색들과 같아 보이는지, 어떻게 세 가지 색이 두 가지 색으로, 혹은 반대로 네 가지 색으로 보이는지를 실험했다. 1920년에 바우하우스에 입학해 특히 유리회화와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에 몰두했으며, 1925년에는 바우하우스 교사가 된 그는 미술교육 과정에서 미술이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했다. 그는 형태의 요소와 구도의 본질적 특성을 체계적으로 탐구했으며, 미술은 이성적으로 통제된 직관에 기초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초기 작품을 제외하고 재현적 묘사를 피했으며 “회화는 재현이 아니라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절제된 형식을 꾀하고 회화의 수단과 효과 사이의 균형을 추구했다. 즉흥적 경향이나 개성적 표현을 기계와 같은 개성 없는 정밀함으로 대체시킨 그의 회화는 기하학적 추상이나 구성주의로 분류된다.

바우하우스가 폐교하자 알베르스는 193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그해부터 블랙마운틴 칼리지에 가르쳤다. 그는 드로잉 수업에서 시각화의 기법을 강조하고 디자인 수업에서는 비례, 등차수열, 등비수열, 황금비율, 공간연구에 초점을 두었다. 그 유명한 색채 수업에서는 물감이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된 종이를 가지고 색채를 분석했다. 그는 색채 심화과정으로서만 회화를 가르쳤으며, 그것도 대부분 수채화만 가르쳤다. 모홀리 나기를 연상하게 하는 이론을 통해 알베르스가 주장한 것은 “추상화는 인간 정신의 본질적 기능”이며, 이를 위해서는 “눈과 손을 단련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모홀리 나기와는 달리 그는 모든 사물에는 형태가 있고, 모든 형태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미술은 형태의 근본 법칙에 대한 지식과 응용에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형태, 즉 조형Gestaltung(게슈탈퉁)에 관한 오랜 관심을 통해 새롭게 시작된 시각에 관한 연구를 완성했다. 알베르스는 1949년까지 블랙마운틴 칼리지에 재직하고 1960년대에는 예일대학에서 가르쳤다.

복수 제작을 추구한 빅토르 바자렐리
부다페스트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1929년에 ‘부다페스트의 바우하우스’로 불린 알렉산데르 보르트니크의 뮈헤이아카데미에서 모홀리 나기로부터 바우하우스의 전통 교육을 받은 헝가리계 프랑스 화가 빅토르 바자렐리(1908~97)는 수공적, 혹은 산업적 제작원리에 따라 동등한 중복제작을 허용했다. 이런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모홀리 나기가 1925년에 산업적 가능성을 고려해 미술 보급 방식을 제안하면서 “최근의 기술은 원작을 대량으로 유포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했다.

바자렐리는 1930년에 파리로 가서 정착하고 처음에는 생계를 위해 상업예술가로 활동했으나, 곧 자신의 작업에 전념했다. 1930년대에 그는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1940년대에 이르러 기하학적 형태와 그에 상호작용하는 생기 넘치는 색으로 특징지어지는 그의 독창적인 양식, 즉 옵아트로 발전하게 될 시각적 모호함을 점차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의 양식은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에 이르러 더욱 성숙해졌다. 이때 그는 더 밝고, 더 역동적인 색을 사용하여 시각적 환각을 통한 움직임의 형태를 표현했다.

바자렐리는 망막에 자극을 주는 중요성에 관해 “이제는 더 이상 심장이 아니라 망막에 모든 것이 달렸다. 재담꾼이 임상심리학의 주인공이 된다. 흑백의 예리한 대조, 보색의 견디기 힘든 떨림, 율동적 망상과 교대하는 구조의 반짝임, 조형적 구성요소의 시각적 이동효과. 이러한 것들은 더 이상 놀라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극하고 또 우리에게서 야만적 즐거움을 끌어내려는, 우리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물리적 현상이다”라고 했다.

파리의 응용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바자렐리의 아들 장 피에르 바자렐리 이바랄(1934~)은 신경향의 일원이었으며, 시각예술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했다. 그는 허상적인 운동의 느낌이나 엄격하게 제한된 깊이 내에서 다가오고 물러나는 형태들의 모호한 패턴을 창출하기 위해 주로 무아레 패턴에서 흑백의 사용에 집중했다.

신경향Nouvelle Tendance은 1960년대 초반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과 일본,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에서 표면화되고 있던 매우 다양한 구성주의적 경향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된 명칭으로 표현 양식은 다를지라도 공통적으로 미술품의 비개성화,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과학의 기술의 차용, 그룹 활동과 익명성 예찬, 빛, 소리, 실제 운동과 같은 직접적 자극 이용, 전통적인 미학적 기준에 대한 성상 파괴적 태도 등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운동은 앵포르멜, 타시즘,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표현적 추상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시각예술연구회가 신경향의 이념과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신경향의 이념을 활발하게 전개시킨 아르테 프로그라마타Arte Programmata란 명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키네틱아트에 대해 붙여졌고, 프로그램 중에 무작위적 요소가 개입될 수도 있으나 대체로 모터로 작동되는 일련의 일정한 운동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일컬었다.

물질을 에너지로 변형시킨 헤수스 라파엘 소토
베네수엘라의 예술가 헤수스 라파엘 소토Jesus Rafael Soto(1923~)는 1950년에 파리로 가기 전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회화를 도판으로 접하고 영향을 받았으나 피트 몬드리안과 구성주의자들의 작품을 본 뒤에는 시각적 현상과 옵아트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0년대 초에 수열, 반복, 연속과 같은 연작을 통해 단순하고 획일적인 공업재료들을 엄격한 모듈체계를 좇아 조립하는 시리얼아트Serial Art를 실험했다. 미니멀아트에 속하는 시리얼아트는 산업재료를 단순하고 획일적인 구성요소로 모듈module 체계에 따라 조립하는 것을 말한다. 재료의 부분들이 방해받지 않고 연속적으로 배열되는 시리얼아트의 양식을 헤수스 라파엘 소토, 칼 안드레 등이 사용했다. 
 

소토는 이전부터 플렉시글라스 위에 이미지를 중첩시켜 부유하면서 진동하는 형태를 만들려고 시도했는데, ‘운동’ 전시회 직후에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간단한 방식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규칙적인 줄무늬 배경만 있으면 관람자가 좌우로 움직일 때 배경에 투사되는 형태의 윤곽을 광학적으로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소토는 1957년에 그때까지 사용하던 기하학적 형식들을 거의 버리고 제스처적인 추상을 모방한 진동하는 와이어 드로잉을 시작했으며, 이것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전체적 패턴을 만드는 데 능통한 브리짓 루이즈 라일리
미래주의 회화를 보고 감동을 받은 런던 태생의 영국 화가 브리짓 루이즈 라일리(1931~)는 1960년에 과학자들이 지각작용의 연구를 위해 사용하는 도표를 개작하는 작업을 통해 강렬한 흑백회화로 옵아트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품은 거의 동일한 단위들이 반복되는 격자에 바탕을 둔다. 그녀는 구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후기모더니즘의 신조, 즉 구성 내의 부분들이 크게 구분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형태가 바탕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치밀한 계산 하에 그녀가 다양하게 제작한 형태와 색의 총합은 관람자를 포위하는 착시를 일으켰는데, 이는 관람자의 지각능력을 사로잡지만 결국에는 흐트러뜨리는 것으로 어느 모로 보나 심리적 변형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과학적 도형과 같은 정확함과 필연성을 지녔으며, 이런 것은 실제로 과학적 도표와 같은 정확함과 정밀함을 요하는 세밀한 밑그림이나 지시사항에 따라 조수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시각적 자극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작품 패턴이 관람자의 눈을 현혹시키고 흔들리게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정확함 때문이다.

모빌을 도입한 알렉산더 캘더
키네틱아트의 선구자 알렉산더 스터링 캘더Alexander Stirling Calder(1898~1976)는 1923년에 뉴욕의 아트스튜던츠리그에서 회화를 공부했고, 1926~36년에는 주로 파리에 체류하면서 몬드리안, 미로, 아르프, 뒤샹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그는 1927년에 작업실에서 철사, 나무 조각, 종이, 가죽 등 여러 가지 재료들로 제작한 서커스로 매주 사흘 동안 공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매우 즐거워했다. 그들 가운데는 레제, 르 코르뷔지에, 몬드리안도 있었다.

실제 운동을 끌어들여 만드는 구조물 중 가장 단순한 유형은 동력을 가하지 않은 모빌Mobile인데 이는 1930년대 초 캘더에 의해 도입되었다. 뒤샹은 1932년 파리의 비뇽 갤러리에서 캘더가 전시한 손이나 동력을 이용한 키네틱 구조물을 지칭해 처음으로 모빌이란 말을 사용했다. 캘더는 1934년부터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동력에 의하지 않는 모빌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그것들은 대체로 여러 모양의 채색된 금속판들을 가는 철사나 끈에 매달아 놓은 것들로 자체의 중력에 의해 미미한 대기의 흐름에도 흔들리며 운동에 의해 야기되는 다변적인 빛의 효과를 활용하도록 고안된 것들이었다. 그의 모빌은 검정색, 흰색,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으로 칠해진 금속판으로 이뤄졌다.

모터를 동력원으로 사용한 폴 뷔리
코브라 그룹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적이 있는 벨기에의 화가 폴 뷔리(1922~)는 1953년에 움직이는 조형물을 제작하기 위해 회화를 포기했다. 그는 모터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면서 그것을 감추는 방법을 사용했다. 대부분의 키네틱 구조물들이 빠르게 움직이도록 제작된 반면 뷔리의 것은 매우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익살스럽고도 시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 규모가 작으며 실내 조형물의 성격을 띤다.

복잡한 키네틱 구조물을 제작한 장 탱글리
스위스의 예술가 장 탱글리(1925~91)의 사용 불가능한 기계를 소재로 한 그의 작품은 우스꽝스럽고 활기에 넘쳤다. 1939년에 음향효과를 내는 메타-기계 수력 터빈을 제작하면서부터 운동에 관한 실험을 시작한 탱글리는 뷔리와는 달리 동력원을 작품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그는 모터에 의한 운동에 의도적으로 우연의 요소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냄비나 술잔 등과 같은 물체를 때림으로써 음향효과를 내는 움직이는 구조물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기계시대와 미술 그 자체를 조롱하는 다다의 전통에 속했다.

작품
모홀리 나기는 기술자와 공학가의 도움을 받아 <빛-공간 변조기>(1930)를 제작했는데, 그것은 움직이는 하나의 판, 그 위에 막대와 틀,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금속판과 금속격자로 구성되었으며, 모든 요소가 톱니바퀴로 연결되어 작동했다. 조명하는 환등기 불빛은 연마된 금속면에 반사되고, 또한 그것이 설치된 실내 벽면에 움직이는 그림자를 투영했다.

시각예술연구회의 두드러진 활동은 1966년 파리 시내의 길거리에서 펼쳐졌으며, 관람자들은 오브제와 더불어 즐기면서 당황스런 행보에 연루되도록 초대받았다.

제로 그룹의 일원인 귄터 위케르의 <빛과 어둠 사이>(1983)는 뒤샹의 <회전부조>(1935)를 상기시킨다.

오토 피네는 1960년대 말부터 전기 광선과 플렉시글라스로 오브제를 만들어 그것을 헬륨 조형물이라고 부르고 키네틱 광선-구를 실험했다. 피네는 루미니즘과 다감각적인 환경미술의 가능성을 실험한 선구자이다.

폴 얼스는 오토 피네와 함께 스카이 오페라 <이카루스>(1983)를 제작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홀로그래피를 접한 네덜란드의 디자이너이면서 무대조명 전문가 루디 버카우트(~2008)는 커다란 크기의 시각 시스템을 이용하여 흰빛으로 보이는 단순한 흑백 전송 홀로그램, 보조적인 특별한 빔으로 흰빛을 분해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색들과 함께 놓이는 홀로그래피의 시각적 요소를 새롭게 사용하는 등 다양한 기술을 사용하면서 추상으로부터 유기적 형태를 띤 구성으로 나아갔다. 그는 1982년 판 위에 색의 배치와 이미지 구성을 용이하게 해주는 홀로그래피 뷰파인더를 만들었다. 제작자의 공간-이미지 안에서 전송 상태를 보여주는 이 장치는 움직이는 점이 찍힌 사각판의 형태로 되어있으며, 상호 반응하는 구부러진 표면의 점으로 이루어진 윤곽선을 이용한 <델타웍>, <델타>, <델타 IV> 등과 같은 작품에 영감을 제공했다.

요제프 알베르스는 1950년에 시작해 오랫동안 연작으로 그린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연작은 치밀하게 계산된 크기의 정사각형 안에 극히 비슷한 색채 범위 내에서 미묘하게 변화시킨 색조들로 채색한 정사각형의 닮은꼴들을 중첩시킨 것이다. 앞서 칸딘스키가 보여준 것처럼 그는 인접한 색들이 서로 반응하여 팽창하거나 수축하고, 또 후퇴하거나 전진하는 경향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그는 매우 유사한 색조의 색들이 병치되었을 때 제3의 색으로 보이게 된다는 시각현상을 활용했다.

바자렐리는 ‘시네티즘cinetisme’(혹은 아르 시네티크art cinetique)이란 용어를 적용한 작품들을 통해 시각적 모호함으로 움직이는 듯한 환영의 인상을 창출해내는 방법과 수단을 탐구하며, 이런 목적을 위해 나오고 들어가는 형태들을 서로 교차시키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형태가 나타나도록 했다. 이런 작품은 통상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이나 미적 경험이 아니라 지각의 불안을 통해 야기된 시각적 경험을 목적으로 한다.

소토는 늘 요소들의 변형, 고형 물질의 비물질화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변형의 과정을 작품에 합성했다. <무제>(1959~60)에서 그는 관람자로 하여금 착시에 의해 순수한 선이 순수한 진동으로, 물질이 에너지로 변형되는 것을 보도록 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이 단순하고 평범하더라도 그것들이 결합될 때 산출하는 효과는 매우 신비롭고 복합적이라는 것이다.

브리짓 루이즈 라일리는 옵아트 예술가들이 사용한 대부분의 기법에 정통했으며, 특히 크기나 형태를 미묘하게 변화시키거나 <흐름 Current>(1967)에서 보듯 연속적 단위를 배치하여 전체적 패턴을 만드는 데에도 능통했다. 또한 옵아트의 특징인 망막 효과를 추구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운동에 대한 환각적 환영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망막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시각적 모호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일시적 안정감과 질서감을 가진 비교적 작은 영역에 눈을 고정시킴으로써 유발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각적 피로감이 빠르게 일어나면서 서로 충돌하는 패턴과 이차적 형태들이 나타나며, 이것들이 겹쳐져서 안정되고 판단 가능한 지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캘더의 모빌은 검정색, 흰색,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으로 칠해진 금속판으로 이뤄졌다. 이런 금속판들은 막대에 매달려 있어 어느 방향으로든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작품들을 ‘사차원의 드로잉’이라고 부르면서 1932년 뒤샹에게 보낸 편지에서 “몬드리안의 회화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몬드리안을 만나 크게 감화되었으며, 자신이 몬드리안식의 기하학적 추상에 운동을 도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품성과 미학에 대한 견해는 매우 달랐는데, 희극적이며 환상적인 것을 즐긴 캘더의 익살스러움은 그의 대작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런 품성은 신지학에 심취한 몬드리안의 구원자 같은 진지함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폴 뷔리는 1959년경 표현적 목적 하에 운동을 도입한 복잡한 삼차원 구조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못 뭉치나 철사, 혹은 작은 나무못의 예기치 않는 운동에 부여한 신비로운 생명감이다.

장 탱글리는 1955년의 ‘운동’ 전시회에 참가하여 일련의 ‘메타-기계’의 선구적인 작품인 두 점의 <그림 그리는 기계>를 소개했다. 이 기계들은 계속해서 추상드로잉 패턴을 그려내며 미술품이란 고정되거나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작품에 부여된 가능성 내에서 그 자체로 창조적이고 지속되는 것이라는 원리를 설명한 것이었다.

탱글리의 제작 의도를 가장 멋지게 반영한 작품은 1960년 뉴욕의 모마 정원에서 전시된 엄청난 자기파멸장치인 <뉴욕에 대한 경의 Hommage to New York>였다. 설치하는 데만 3주가 걸린 이 작품은 그의 예상과는 달리 완전히 파괴되지 못했지만, 소방당국이 출동해 소화기와 도끼로 진화할 때까지 전대미문의 구경거리를 보여주었다. 탱글리는 늘 자신이 고안해낸 괴상한 장치가 보여주는 묘기를 보면서 즐거워하며 그 속에서 자유를 누렸다. 그는 미술품을 예술가와 관람자가 함께 참여하는 눈높이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종종 자신의 작품을 중국의 불꽃놀이에 비유했다. 그는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전시회 개막일 밤 축제행사에서 실제로 불꽃놀이를 펼치기도 했다.

탱글리는 또한 움직이는 여러 개의 막대기를 층층이 쌓아 구성한 부조를 제작했으며 1960년대에는 보다 복잡한 키네틱 구조물을 제작했는데, 이런 구조물들 가운데 몇몇은 기계에 대한 역설적인 풍자를 위한 것들이었다. 그의 구조물 대부분 키네틱아트의 원리와 캘리포니아 주의 정크아트 화파, 특히 스탕키에비치 조형물의 영향을 결합시킨 폐품 구성물이었다. 그는 떠들썩한 유머를 조형물에 통합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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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강의 6

지난 강의, 다다와 초현실주의
다다는 이전의 아방가르드를 포함하여 모든 전통을 부인했고, 진지함을 인위적인 것이라며 배척했다. 다다는 논리적으로 스스로도 부인해야 했으므로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1924년 시인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 「초현실주의 선언」이 발표되면서 다다는 종료된 것으로 보였으나, 시인 차라가 말한 다다의 ‘새로운 정신’은 1950년대에 네오다다에 의해서 그리고 1960년대에 플럭서스 운동을 통해서 삶과 예술이 하나라는 정신으로 다시 재생되었으며, 이런 정신은 20세기 후반에 지속되었다. 한편 초현실주의는 다다의 정신을 계승했더라도 1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재건하려는 당대의 정신과 일치하면서 새로운 긍정적인 미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우연과 자동주의를 예술에 도입한 것이다. 우연을 창조의 동력으로 간주하고 자동주의를 통해 잠재의식을 의식의 흐름으로 표현했다. 2차 세계대전 후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뉴욕으로 도피하면서 초현실주의, 즉 우연과 자동주의를 뉴욕의 젊은 예술가들이 받아들였으며, 특히 추상표현주의를 통해 초현실주의가 지속되었다. 돌이켜보면 다다는 해프닝과 퍼포먼스를 방법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두 장르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고, 본질에 대한 회의는 개념미술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미술 혹은 미술품 혹은 예술가에 대한 정의를 요구한 것은 모더니즘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리고 초현실주의의 우연과 자동주의는 오늘날에도 예술가들에 의해 창조에 사용되면서 그 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두 가지 유형의 구성주의
구성주의는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용어로 1920년대에 목적과 관념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 구성주의 다른 하나는 국제 구성주의International Constructivism이다. 1921년 1월 1일부터 4월 말까지 예술가들은 구축과 구성의 개념을 두고 오랜 토론을 거듭했으며, 그들이 도달한 합의는 구축이란 어떤 ‘물질이나 요소의 과잉’도 수반하지 않는 ‘과학적’ 방식이나 조직화에 근거를 둔다는 것으로 기호학적 용어로 말하면 ‘동기를 부여받은’ 기호인 것이다. 구성이 자의적인 것에 반해 구축은 동기를 부여받은 기호인 것이다. 구성주의자들은 다다이스트와 초현실주의자들과는 달리 보편적·객관적 미적 원리와 일치하는 의식적이고 신중한 구성을 지지했다. 그들은 순수주의자들과 달리 단순성ㆍ명료성ㆍ간결성에서 더 나아가 비재현적ㆍ비표현적ㆍ기하학적이거나 기하와 유사한 요소로 구성된 추상 구성을 지지했다. 그렇지만 구성주의가 비개성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보, 페프스너, 몬드리안, 조르주 반통게를로 등의 작품은 개인적이고 독특하다.

유럽 구성주의 단체의 최초 공식 선언은 1922년 5월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국제 진보예술가대회International Congree of Progressive Art에서 이뤄졌으며, 그때 반 두스뷔르흐, 리시츠키, 리히터는 국제 구성주의 분파의 이름으로 연합시위를 벌였다. 이 대회는 세계대전으로 인해 흩어진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의 통일을 다시 건립하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함을 증명하게 되었다. 반 두스뷔르흐, 리시츠키, 리히터는 대회의 조직운영자들이 금전적인 문제에 주로 관심을 두는 것에 반대하면서 ‘진보예술가’라는 용어를 규정하는 데 오류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래서 결성된 것이 국제 구성주의 분파라는 독립적 단체였다. 1920년대에 공식적인 조직은 형성되지 않았으나 구성주의 원리를 문학, 건축, 영화에 확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구성주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지만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의 파리는 러시아를 떠난 구성주의자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했다.

1930년대 후반 많은 구성주의자들이 영국으로 이주해 런던에 정착했다. 나움 가보, 가보의 형 앙투안 페프스너, 모홀리 나기, 그로피우스, 몬드리안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데임 바버라 헵워스, 벤 니컬슨, 헨리 무어, 평론가 허버트 리드와 교류했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 미국으로 이주했으므로 1950년대까지 영국에서는 독자적인 구성주의는 생기지 않았다.

모터로 움직이는 최초의 키네틱 조형물을 제작한 것으로 유명한 가보와 페프스너 형제는 러시아의 생산주의자들로부터 비난받은 자신들의 독자적 구성주의를 유럽에 전파했다. 가보는 1922년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갔고, 페프스너는 이듬해 파리로 향했다. 가보는 베를린에서 10년 동안 체류했다. 가보는 1920년대 초에 플라스틱과 유리를 사용하여 순수 기하학적 평면들로 조형물을 구성했으며, 그 형태들은 서로 가로지르며 개방되고 외관상 가볍게 보였다. 그는 플라스틱을 최초로 사용한 조각가로도 알려졌다.

가보는 입체주의 이후 미술에서의 회생이 어렵다고 보고 구성주의를 미술 회생의 초석으로 삼았다. 그에게 구성주의는 선, 색, 형태와 같은 시각예술 요소가 외부세계와 무관한 독자적 표현력을 지니는 것이었다. 구성주의는 표현적 추상을 비롯한 모든 비재현적 추상 미술을 아우르는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조형물이 추상으로 불리는 데 찬성하지 않았다.

공리적 목적을 추구한 블라디미르 타틀린
블라디미르 타틀린(1885~1953)이 병적으로 사람을 싫어하고 작업에 자신감이 부족했던 것은 불행한 그의 유년시절의 결과였다. 그는 18세에 선원이 되기 위해 가출했다. 많은 초기 드로잉이 항구와 어부들이었고, 그는 바다를 좋아했다. 타틀린과 말레비치 두 사람의 계속되는 경쟁은 여러 차례 몸싸움으로 끝난 적도 있었지만, 말레비치는 타틀린이 진정으로 존경하는 유일한 러시아인 동료였다. 비록 그를 불행에 빠뜨린 질투심이 극단까지 이르러 말레비치와 한 동네에 사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었지만, 그는 비밀리에 말레비치의 회화와 개념에 접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편지와 글이 그가 타계한 후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타틀린은 자신의 작품에 관한 글 외에 말레비치에 관한 모든 참조할 만한 것에 푸른색 밑줄을 그어놓았다. 타틀린은 오랫동안 말리비치를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35년 페트로그라드에서 있었던 말레비치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타틀린은 “나의 기계는 생명의 원리와 유기적 형태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형태를 관찰함으로써 가장 미적인 형태가 가장 경제적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재료를 구성하는 작업이 바로 미술인 것이다”라고 했다.

최초의 키네틱 조형물을 제작한 나움 가보
러시아계 미국 조각가 나움 가보(1890~1977)는 뮌헨대학에서 의학 및 자연과학, 공과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하며 하인리히 뵐플린의 미술사 수업을 수강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코펜하겐, 스톡홀름, 오슬로로 갔으며, 오슬로에서 가보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입체주의 특성과 후에 유럽 구성주의의 전조가 되는 기하학적 추상을 결합해 첫 번째 구조물을 제작했다. 가보는 1917년에 형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왔으며 1920년에 공동으로 ‘사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이 선언문은 타틀린이 이끄는 생산주의자 그룹에 대립하는 유럽 구성주의의 기초 원리를 제시했다. 그는 ‘사실주의 선언문’을 포스터 형식으로 만들어 거리에 뿌렸다. 가보가 쓴 글에는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에 대한 조소가 담겨 있었는데, 가보는 미래주의자들의 보수적 애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질주하는 자동차, 덜컹거리는 기차역, 뒤엉킨 전신줄, 분주한 거리의 소음, 금속성의 음향” 따위를 근대적 삶의 역동성인양 착각해 이에 열광하는 것에도 조소했다.

러시아에서 가보는 모터로 움직이는 진동하는 철제막대를 제작했으며, 최초의 키네틱 조형물이 되었다. 그의 의도대로 관람자가 경험하는 것이 필수이므로 조형물에는 앞뒤가 없고 관람자는 주위를 돌면서 감상할 수 있다. 조형물이 투명하므로 관람자는 그것을 통과해 바라볼 수 있다. 그는 공간에 대한 입체주의의 관심과 운동에 대한 미래주의의 관심을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미술이 공간과 시간에서 구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조형물이 부피에 얽매여있으며, 이는 거부되어야 할 고정관념이다. 그는 기계시대를 맞아 새로운 물질로 작업할 것을 주장했다. 미술 활동에 대한 통제가 분명해지자 그는 1922년에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10년 동안 머물렀다. 1946년 이후 가보는 미국에서 살았으며, 1952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공간을 통제한 엘 리시츠키
엘 리시츠키(1890~1941)는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건축과 공학을 전공하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가 모스크바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그는 1917년에 샤갈 및 다른 유대인 그래픽 화가들과 함께 책의 삽화를 그리는 데 참여했다. 그들의 작품은 유대인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였던 키예프에서 주로 출간되었다. 샤갈이 비테프스크의 대중예술연구소 소장에 임명되었을 때(1918) 리시츠키도 건축 및 그래픽 아트 교수로 동행했으며, 농민 목판화 전통이 융합된 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입체-미래주의 양식의 삽화가 든 책을 계속 만들었다. 그의 전성기 작품에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블라디미르 타틀린과 로트첸코의 구성주의,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가 결합되어 있다.

구성주의 추상을 예견한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로트첸코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로트첸코는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물>을 외로운 예술가가 전통적인 수공예의 도구를 사용하여 정교하게 만든 낭만적인 물건으로 치부했다. 로트첸코는 극장의 소품을 만드는 수공업자 아버지와 세탁하는 일을 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상이 농노였으므로 그의 가족은 도시민으로서는 제1세대였다. 로트첸코는 극장의 분위기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재능을 키울 수 있었다. 미래주의와 말레비치 양식을 섞은 듯한 독창적 모방은 추상적인 디자인으로 나타났다.

로트첸코가 1916년 타틀린의 ‘상점’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은 그러한 것들이었다. 그중 드로잉 다섯 점은 자와 컴퍼스로 제작한 것이다. 로트첸코의 삼차원 구조물은 매우 독창적인 새로운 고안물로서 타틀린의 부조의 전통을 훌륭하게 완성시킨 것이다. ‘상점’ 전시회를 통해 그는 처음으로 타틀린과 전시회에 참여한 말레비치를 만났다. 그의 다음 2년 동안의 작업은 말레비치의 초기 작품에 대한 매력과 타틀린의 개념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처음에는 이차원의 구성으로, 후에는 삼차원의 구조물로, 1920년에는 모빌로 작업했다. 타틀린과 함께 그는 재료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다. 이렇게 말레비치와 타틀린의 영향을 결합시킨 로트첸코는 구성주의 디자인의 체계를 발전시켜 선구자가 되었다.

로트첸코는 1921년 9월에 열린 전시회 ‘5☓5=25’에서 모노크롬 세쪽화를 전시한 것을 끝으로 회화에 이별을 고하고 “나는 회화를 그것의 논리적 귀결로 환원시켜 세 점의 캔버스를 전시했다. 즉 빨강, 파랑, 노랑이다. ... 단언하건대 모든 것이 끝났다. 원색이다. 모든 평면은 하나의 평면이다. 그리고 더 이상 재현은 없을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그의 우상파괴적인 세쪽화는 하나의 전설적인 이정표가 되었으며, <마지막 회화>로 불리었다.

조형물에 색을 입힌 바버라 헵워스
헨리 무어와 함께 동시대 영국을 대표한 조각가 바버라 헵워스는 무어와 마찬가지로 깎는 것으로 조형물을 제작했고, 모두 영국적인 풍경의 은유를 종종 사용했다. 그녀는 완전 추상조형물을 제작한 최초의 조각가 중 하나였다. 브랑쿠시의 영향을 말하면 그녀가 무어보다 더 많이 받았다. 헵워스가 제작한 1930년대 중반의 작품들은 인간화된 기하학으로 브랑쿠시가 강조한 본질과 관련 있지만, 브랑쿠시와는 달리 구상적 형태에서 비롯된 것들이 아니었다. 그녀의 조형물에서 인물을 은유한 것으로 보이는 요소가 발견되더라도 인물을 추상화한 것이 아니며, 아르프의 인간 응결물이나 무어의 유기적 형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녀의 조형물은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결과물이다. 헵워스에게는 브랑쿠시가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신화 같은 유산은 부족하지만, 대신 곧장 자연, 광물과 조개, 바위, 파도치는 바다와 같은 형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의 특성이 가장 잘 담긴 조형물에서는 형태와 리듬이 억제되어 있으며, 아름다움은 절대적 평형이라는 브랑쿠시의 신념을 확인하는 듯 보인다. 후기 작품 다수는 1939년 이래 줄곧 살았던 웨스트 콘월의 경치에 반응해 제작된 것이다.

잠재의식에 호소하는 조형물을 제작한 헨리 무어
헨리 무어는 1920년대 초에 둥그스름한 작은 돌, 매끄러운 도식적 두상, 모자상을 암시하는 풍만한 인체 등과 같은 선사시대의 목조와 석조 모델을 모사하고 1930년대에 들어서는 반추상의 어머니상과 와상을 주로 제작했다. 다음단계는 추상화된 신체를 확장하고 심지어 각각 다른 크기로 부숴 긴 좌대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피카소, 브랑쿠시, 아르프로부터 유기적 형태를 영향을 받은 무어는 혁신적인 작업을 하지는 않았더라도 예술가에게 열려 있던 모든 가능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브랑쿠시가 자신으로 하여금 형태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해주었다고 말했는데, 표면에 있는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은유를 배워 이를 자신의 조형물에 적용했다. 그의 주된 모티프는 여인상으로 일반적으로 비스듬히 누운 자세를 취하지만 때로는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며, 또는 어린이를 안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원형의 모습, 즉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특정화되지 않으면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도한 것이다. 그는 인체의 이해에서 출발해 한 부분을 과장했는데, 뿌리와 뼈의 형상을 끌어와 유기적 성장을 암시하거나 풍경의 모양으로 여성이 자연에 속한 일부분임을 보여주었다.

무어의 다섯 가지 창조원리
무어는 『조각가의 목표』에서 자신의 조형물을 다섯 가지 관점으로 요약했다. 첫째, 재료에 대한 충실성을 꼽으면서 재료가 아이디어를 형상화하는 데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직접 깎는다고 했다. 둘째, 완전한 삼차원의 구현을 위해 부분들 사이의 역동적 긴장과 다양한 시점을 보여줄 수 있는 환조를 높이 평가했다. 셋째, 자연물에 대한 관찰로 형태와 리듬의 원칙이 자갈, 뼈, 나무, 조개 같은 것에서 나온다고 했다. 넷째, 비전과 표현으로 디자인의 추상적 특질과 인간의 심리적 요소에 전념한다고 했다. 마지막은 생동감으로 조형물이 재현할 수 있는 대상으로부터 독립적인, 강렬한 생명감 그 자체를 높이 평가했다.

무어의 조형물이 겪는 과정을 두 가지 측면, 즉 기법과 양식에서 살펴보면 그는 처음에 직접 깎는 기법을 선호해 몇 점의 테라코타(양질의 점토) 작품을 제외하고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제작한 거의 모든 작품이 돌과 나무였고, 콘크리트 작품을 몇 점 제작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작품도 대부분 깎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지만, 테라코타로 된 습작 모델이 점차 늘었다. 테라코타 습작은 나중에 동일한 주제로 대작을 제작할 재료를 구입할 수 있을 때 사용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임시 재료에 기록해두려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무어의 조형물은 청동이 주조를 이룬다. 그에게 청동이 작품의 최종 재료로 떠올랐고 그에 따라 모형들을 수정해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양식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1929~30년에 제작된 비스듬히 누운 사람과 가장 나중에 제작된 1961~63년의 비스듬히 누운 사람 사이에 형태의 변형이 거의 없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비스듬히 누운 사람이라는 동일한 소재를 계속 사용한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양자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차이는 덩어리가 아닌 표면의 차이, 즉 단단한 뼈와 살을 감싸는 피부의 주름이며, 리듬이 아닌 강조의 차이다. 이는 그가 조형물의 독특한 성질인 부피와 표면을 지속적으로 연구했음을 말해준다.

무어는 “비록 내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체이지만, 뼈, 조개, 자갈 등과 같은 갖가지 자연의 형태들에도 늘 많은 주의를 기울여왔다. 나는 같은 해변을 여러 해 동안 거닐곤 했다. 그러나 매년 새로운 모양의 자갈이 내 눈길을 끌었다. 비록 그것이 그 자리에 수백 년 동안 있었겠지만 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해변을 따라 거닐 때 스쳐 지나가는 수백만 개의 자갈 중에서 나는 내가 관심을 둔 형태에 맞는 자갈들만을 설레는 마음으로 고른다. 앉아서 자갈을 한 움큼 집어서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른 일이 벌어진다. 새로운 형태에 적응할 시간을 갖는다면 나의 형태 경험은 더욱 확장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자연에서 형태를 발견하고 그것이 암시하는 점을 조형물의 기초로 삼았다. 그의 창조원리는 고대 그리스, 고대 멕시코, 고대 이집트, 고대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 메소포타미아, 로마네스크, 초기 고딕조형물 등에서 활성화된 것이었으며, 아프리카, 폴리네시아의 원시부족 조형물에서도 발견되는 것이었다.

허상의 공간을 거부한 루초 폰타나
루초 폰타나는 아버지를 통해 키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19세기 아카데미의 절충주의 조형물을 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르헨티나로 건너온 이탈리아 출신으로 장례기념물을 전문으로 제작한 상업조각가였다.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될 무렵 밀라노 미술학교에 입학한 폰타나는 1922년에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모던 키치라고 말할 수 있는 아르 데코, 마욜, 아르키펭코의 작품을 모방했다. 6년 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간 그는 무솔리니 정권이 후원하는 노베첸토 이탈리아노 운동, 즉 반모더니즘적 수정주의에 한동안 매료되었다.

노베첸토 이탈리아노Novecento Italiano는 밀라노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그들은 유럽식 아방가르드 운동을 거부하고 고전적인 이탈리아 전통에 바탕을 둔 자연주의 미술로 복귀하고자 했다. 그들의 운동은 이탈리아 정부의 편협하고 국수적인 예술관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폰타나의 키치적 경향은 1930년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나쁜 취향으로 불릴 만한 길을 따라가다가 이후 갑자기 과격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탈리아 정부가 요구한 단정함과는 상반되는 것이었으므로 자연히 관료들은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새로운 경향을 즉각 비판했다. 그는 1930년에 원시주의적인 다채로운 대리석 조형물 <흑인>를 선보였고, 이듬해에는 무늬를 새겨 넣은 채색 시멘트 널판, 에나멜을 칠한 테라코타, 색을 입힌 청동, 금박을 입힌 석고, 세라믹 작업 등을 진행했다. 채색은 모더니스트들이 저주해 마지않던 조형물의 속성이었다.

폰타나 이전에 채색 조형물을 제작한 예술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고갱, 피카소, 알렉산더 캘더 등이 채색 조형물을 제작했고, 그 후 많은 예술가들이 조형물에 색을 입혔다. 그러나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회화와 조각의 한계를 서로에 대한 관계 속에서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폰타나가 시도한 것은 공간에 그리기보다는 여러 재료들을 동시에 사용하는 은밀한 방식으로 다채색을 재도입한 프랑스 제2제정기(1852~71)의 네오바로크 조형물이나 반추상의 장식적 오브제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급진적인 물성을 드러내기 위해 색을 사용한 것이다. 그에 의해 조형물의 영역으로 침입한 색은 미학적 담론에 의해 옹호되던 균질의 조화를 교란시키고 성가시게 만든 일종의 소음이 되었다.

폰타나는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4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체류하며 그곳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이끌었다. 그는 1946년에 「백색 선언문 Manifesto Blanco」을 발표하면서 추상과 구상 모두에서 벗어나 미학, 합리주의, 형식주의를 공격하고 공간주의spazialismo라 불릴 그의 개념을 공표했다. 또한 네온 및 TV와 같은 첨단기술을 사용해 전후의 새로운 정신을 표현한다는 새로운 미학을 표명했다. 예술가는 전통 이젤화의 환영, 혹은 허상의 공간을 거부하고 대신 색과 형식을 실제 공간에서 자유로이 전개하여 캔버스의 틀이나 조형물의 부피에서 벗어나는 미술품을 창조해야 하며, 새로운 과학기술을 사용해 미술품을 건축과 주변 공간에 완전히 통합시켜야 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선언문은 이후에 대두될 공간주의 이론의 발판이 되었다.

폰타나는 미술을 지속적인 작품의 창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제스처나 퍼포먼스의 개념으로 파악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하나였으며, 또한 환경미술의 선구자였다. 전후 재건의 시기에 그는 쇼 비즈니스의 화려함에 매혹되어 문화 사업에 참여하는 데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영화관이나 상점 천장부터 성당의 거대한 문에 이르기까지 장식적 작품을 주문받는 일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1947년 방을 검게 칠해 소개한 <검은 공간 환경>은 환경미술의 선구적인 작품이 되었다.

에콜 드 파리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는 인상주의 이후 세계 각지로부터 온 예술가들에 의해 파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술 사조들, 즉 후기인상주의, 나비파, 야수주의, 입체주의, 순수주의(퓨리즘), 초현실주의, 표현적이고 시적인 사실주의를 포괄적으로 지칭한 말이다. 이 명칭은 평론가, 화상, 미술품 감식가들에 의해 널리 통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파리는 20세기 초 약 40년 동안 혁신적인 미술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좁은 의미에서 에콜 드 파리는 프랑스의 표현주의를 말하며 외국 태생의 표현적 사실주의자들, 즉 ‘저주받은 화가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들이 파리로 온 이유는 파리가 먹고 살기에 그리고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토론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파리의 미술은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고 외국인 예술가들이 이 동네에 모여 살았다.

일화가 아닌 회화적 상징주의를 담은 마르크 샤갈
러시아 비테프스크에서 하시디즘 계열의 유태교 가정에서 태어난 마르크 샤갈은 정규 교육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의 회화는 교육에 의하지 않은 민속미술의 자발성이나 야수주의의 세련된 천진난만함을 연상시킨다. 그는 1914년에 후원자 비나베르의 도움으로 파리를 방문할 수 있었고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므로 낡은 건물 라 뤼슈La Ruche에 살았으며, 그곳에는 수틴, 모딜리아니, 레제, 아르키펭코의 작업실이 있었다. 라 뤼슈는 박애주의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포도주관으로 사용했던 건물을 주최 측으로부터 넘겨받아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개축한 곳이다. 라 뤼슈에는 약 140개의 작업실이 있었고, 전 세계에서 온 떠돌이 예술가들이 우글거렸다. 그렇지만 파리는 샤갈에게 빛, 색, 자유, 태양, 삶의 즐거움을 의미했다. 샤갈은 야수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전보다 강렬하고 밝은 색을 사용하게 되었다.

샤갈의 회화는 시인 블레즈 상드라르,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앙드레 살몽 등과 같은 아방가르드 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아폴리네르는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대변인이었지만, 자신이 말하는 이른바 초현실sur-réalisme이라는 상위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일상을 넘어서는 방법을 발견할 만한 예술가들을 찾고 있었다. 아폴리네르는 샤갈의 <나와 마을>(1911)을 매우 좋아했다. 샤갈은 양차대전 사이 파리에서 꽃피운 에콜 드 파리의 유파로 막연하게 분류되지만, 그는 당대의 가장 독창적인 화가들 가운데 하나로 인정을 받았다.

샤갈은 자신에게 유용한 여러 교훈을 받아들였지만 20세기 초에 널리 확산된 많은 운동이나 사조 중 어느 것도 추종하지는 않았다. 아폴리네르는 그의 회화를 초자연주의로 분류하면서 초현실주의를 예고했고, 앙드레 브르통은 샤갈로 인해 은유가 근대 회화에 당당하게 진출했음을 환호했다. 그러나 샤갈은 초현실주의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무의식적 상상력을 시각적으로 발산하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교리를 부인했다. 입체주의에 대한 관심은 다수 작품에서 나타나더라도 그는 입체주의자가 아니었다. 색에 있어서는 입체주의의 한 부분인 오르피즘 화가들의 발견을 도입했으며, 로베르 들로네의 ‘동시성’ 개념도 받아들였다. 그는 외부의 영향을 받았으나 작품 모두 독창적이었다. 독일 표현주의자들이 그의 회화를 반겼지만, 그는 브뤼케 화가들의 대담한 왜곡보다는 프랑스 회화의 고전적 자제와 고갱의 장식적 서정주의에 더 가까웠다. 
 

낭만적 천재로 알려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쇠락한 유대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조각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학창시절이던 1895년에 늑막염을 심하게 앓았고, 후에 결핵으로 진행되어 요절했다. 1906년 파리로 간 그는 피카소가 거주하는 바토 라부아와 그 밖의 지역에 있는 여러 작업실에서 열린 예술가들의 모임에 참석하면서 그들이 모이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극도로 빈곤한 생활을 했다. ‘세탁선’이란 뜻의 바토 라부아는 시인 막스 자코브가 파리 북부 몽마르트르 라비냥 가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든 지역에 붙인 명칭이다. 모딜리아니는 다락방에서 굶주린 채 마약과 술, 그리고 결핵에 시달리면서도 회화와 조각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전형적인 낭만주의 천재로 묘사된 이런 이야기에 대한 신뢰할 만한 증거는 없다. 모딜리아니 신화는 그가 1920년 1월에 요절한 뒤 시작되었으며, 짧은 생애가 자멸한 천재의 극적인 이야기로 전래되면서부터 그의 작품을 평가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모딜리아니의 작품에는 간혹 고뇌가 담겨 있는 까닭은 그가 주제에 대해 느끼는 연민에 직접 호소하기 때문이며, 또한 스스로를 드러내는 암시 때문이다. 이러한 주정주의는 뭉크와 반 고흐의 회화에 나타나는 특성이기도 하다. 모딜리아니가 1917년에 제작한 일련의 누드화와 풍경화 몇 점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인물화였으며, 크게 둘로 나누면 친구와 친지를 모델로 그린 것과 무명 모델을 그린 것이다. 친구와 친지를 모델로 한 것들은 조형물 시기 이후에 제작한 것들로 최초로 ‘모딜리아니식’ 회화라고 말할 수 있다.

모딜리아니는 20세기 초 20년 동안 파리 미술계에 속해 있었지만, 당대의 미술운동이 그에게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그의 작품은 양식화되었고 일정한 경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뛰어난 독창성을 지닌 당대의 예술가 중 하나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길게 늘어나 양식화된 그의 인체 표현은 회화와 조각 모두에서 특징이 되었으며 매너리즘에 빠지기는 했으나, 모델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 빼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재능은 충분히 성숙되지 못했으나 양식화된 독특함을 통해 발휘되었다.

극렬한 감정 표현한 샤임 수틴
민스크 근교 스밀로비치 태생의 러시아 화가 샤임 수틴은 에콜 드 파리의 표현주의 화가들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며 뛰어난 영감을 지닌 인물이었다. 가난한 유대인 가문의 열 번째 자식으로 태어난 수틴은 구두제작자의 견습공이 되기를 거부하고 회화를 배우기 위해 가출했다. 1910년 사진관에서 일하면서 빌나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고, 1913년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파리로 가서 라 뤼슈에 있는 페르낭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했다. 1900년경 보기라르 도살장에 인접한 둥근 원형 건물로 물과 가스 같은 편의시설도 없이 조악하게 만들어진 라 뤼슈의 작업실을 싼값에 얻었는데, 그곳에는 수틴 외에도 모딜리아니, 샤갈, 아르키펭코, 립시츠 등이 있었으며, 프랑스 화가들로는 레제, 들로네, 로랑스 등이 잠시 이곳에 작업실을 얻고 작업했다.

수틴의 회화에 나타난 주정주의는 친구 화가 모딜리아니의 것에 비하면 거의 신경과민에 가까운 강렬한 것이었다.

작품
타틀린의 초기 작품은 세잔의 영향을 받은 정물화, 바다 풍경, 선원 등이었다.

타틀린은 1914년부터 1917년까지 평면에서 끌어낸 역부조counter reliefs와 코너 역부조corner counter reliefs 등의 구조물을 제작하여 재료의 특성을 탐구하던 러시아 구성주의의 한 맥락을 형성했다. 코너 역부조는 실재의 깊이와 회화로 나타낸 표현 사이의 입체주의 관계를 버리고 부분적으로 나무뿐만 아니라 쇠, 유리 등을 사용하여 재료들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췄다. 사진과 훌륭한 복제품들로만 알려진 그의 구조물은 끈이나 줄로 벽에 매달린 채 공간 속에 전개되었다. 이것은 폐쇄된 조각덩어리로부터 공간을 조각한다는 개방적ㆍ역동적인 구성으로 발전하는 삼차원적 형태의 첫 단계였다. 그는 알루미늄, 구리, 유리, 석고, 아연, 나사못, 철판, 목재 등의 재료를 사용했으며, 선명하고 눈부신 재료들은 타고난 에너지를 찬란하게 발산했다. 재료와 솜씨의 결합이 새로운 전망을 낳았다. 코너 역부조가 처음 선보인 것은 타틀린이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주도권을 두고 말레비치와 다툰 페트로그라드에서 1915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열린 ‘0-10: 최후의 미래주의 회화’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이 전시에서 코너 역부조는 젊은 예술가들을 구성주의의 실험단계로 진입하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제3인터내셔널 기념물>(1919~20)(은 나움 가보의 신조와는 매우 동떨어진 공리주의 원리를 구체화한 조형물로 구성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게 했다. 이 기념물은 1919년 초 러시아 미술부가 모스크바 중심 네바 강 위에 세울 396m 높이의 구조물로 타틀린에게 디자인을 의뢰한 것이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인 에펠탑보다 삼분의 일이 더 높은 이것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3주년이 되는 1920년 11월 8일에 레닌그라드에서 제막일을 거행했고, 그 후 모스크바로 이송되어 레닌이 러시아 전력화 계획을 논의한 소비에트 제8차 전당대회장에 다시 세워졌다. 작품이 공개될 때 발행된 카탈로그에 실린 평론가이자 미술사학자 니콜라이 푸닌의 글과 타틀린이 발표한 다수의 선언문을 통해 그 내용이 알려졌다. 타틀린의 디자인에서 가장 뛰어난 요소는 기울어진 구조였다. 나선형 강철로 된 틀이 원통형, 원추형, 입방체형 유리로 된 방의 몸체를 지탱한다. 몸체가 비대칭적인 축에 매달리게 됨으로써 나선형의 리듬을 공간 너머로 확장시킨다. 원통형은 그 축을 따라 일 년에 한 번 회전하며, 이 부분은 강연, 회의, 대회 모임 등으로 사용되도록 계획되었다. 원추 부분은 한 달에 한 번 완전한 공전을 하도록 되어 있으며, 행정 활동에 할당된다. 최고급의 입방체 형태는 하루에 한 번 돌게 되어 있고, 다른 나라로 ‘혁명을 퍼뜨릴’ 임무를 띤 소비에트 조직인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제3국제당), 레닌에 의해 1919년 3월에 창설되어 1943년 5월 15일에 해체된 마르크스-레닌당의 국제적 조직체)이 들어와 뉴스, 선언문 발표 등을 전보, 전화, 라디오, 확성기를 통해 내보내게 된다. 또 다른 특징은 밤에 불이 켜지는 야외 스크린으로, 최근 뉴스를 계속 중계할 것이다. 또한 특수영사기를 설치해 흐린 날에 하늘에 문장을 쏘아 올려 예를 들면 ‘사나운 북풍을 위한 유용한 제안’과 같은 그 날의 모토를 알린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뒤늦게 첨가된 최상층의 작은 반구형은 한 시간마다 회전할 계획이었다. 이렇듯 <제3 인터내셔널 기념물>은 혁명의 위대한 신호인 동시에 사회운동과 화해한 전위의 상징이었다. 타틀린은 이 기념물을 “공리적 목적을 위해 회화, 조형물, 건축과 같은 순수 조형적 형태들을 결합한 것”이라고 밝혔다.

타틀린이 1919년과 1920년 모스크바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세 명의 조수들과 함께 금속과 나무로 제작한 모형의 높이는 5.5-6.5m였다. 모형물은 1920년 12월 소비에트 제8차 전당대회 전시장에서 전시되었다. 소비에트 엔지니어 팀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했지만, 가보는 기념물의 구도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비난했으며 사실상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실험적 디자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강력한 영향을 주었고, 이후 러시아 구성주의의 대표적 상징이 되었다.

가보가 제작한 첫 조형물들은 <여인의 머리>(1917~20)처럼 추상적 두상들로서 철판이나 셀룰로이드 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들은 머릿속을 열어놓은 것으로 외부의 피부로 머리의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표면을 직각으로 자른 평면들을 교차함으로써 공간에서 머리의 형태를 한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입체주의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의 조형물은 사물과 그 주변 공간 사이의 뚜렷한 구분을 무너뜨리려는 야심을 지닌 점에서 입체주의의 영역에 속한다. 이 조형물을 피카소의 <여인의 머리>와 비교하면, 피카소의 조형물은 엄격한 자연주의적 목표, 즉 형태를 정리하고 애매한 명암 대조를 제기하면서 대상의 사실주의를 강화하려는 목표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비해 가보는 타틀린처럼 공간적 실재성을 창조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여인의 머리>는 모티프의 원래 형태를 일깨워주는 착각을 제공하며, 우울함이나 명상 같은 느낌까지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끌면서 다른 모든 감각을 압도하는 것은 정확하게 다듬어진 면의 배치, 끼워 맞추기, 공간의 율동적 배열이다.

1920년대 이후에 제작된 가보 특유의 조형물들은 투명한 구조물로 되어있다. 투명한 재료를 사용하여 형태상의 핵심으로부터 밖으로 확장되거나 나무나 분수처럼 위로 솟는 것처럼 보이도록 제작된 경우가 많다. 그것들 대부분이 섬세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물질적 존재로서보다는 빛을 흡수함으로써 형태를 드러낸다. 그의 조형물은 거시적 우주와 이를 지배하는 힘에 대한 미시적 우주에 대한 은유이다. 가보는 자신의 조형물에서 그 이상의 특수한 상징적 의미를 발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리시츠키는 1919년부터 1924년경까지 제작한 일련의 이차원적 실험물에 프로운Proun,이란 명칭을 부여했는데, 이는 새로운 것을 주장하려는 계획을 뜻하는 러시아어의 축약어이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프로운은 “새로운 가치가 부여된 재료로 된 경제적 구조물을 가지고 형태를 창조하는 (공간을 통제하는) 것”이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의 영향을 받아 리시츠키가 처음 비테프스크에서 작업하면서 프로운은 크기, 힘, 구성적 배열이라는 것을 알았다. <프로운 19D>(1922?)에서 보듯 프로운은 어느 정도 절대주의와 구성주의 원칙을 종합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동적인 축과 절대주의의 특징인 비대칭을 이용했으며, 구성주의의 규칙적인 기계 리듬을 도입한 포토몽타주를 이용했다.

로트첸코의 매달린 조형물은 알루미늄 페인트를 칠한 원이나 오각형, 직사각형, 혹은 타원형 모양의 동판 한 장을 중심으로 점점 커지는 동심원처럼 절단한 것으로 연작 중에 타원형이 유일하게 현존한다. 그의 작품은 중심점을 기준으로 회전하면서 삼차원의 다양한 기하학적 입체를 만들어냈다. 이 조형물은 쉽게 접어 원래의 평면 상태로 되돌릴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작품의 생산과정을 드러낼 수 있다. <매달린 구조물>(1920)(은 구성주의 추상을 예견한 것이다. 로트첸코가 이 전시회 직후에 내놓은 동일한 크기의 나무 블록으로 제작된 각각의 모듈 구조물에서 평면도와 입면도가 동일하다. 그의 구조물을 지배하는 형식논리는 연역적 구조로 40년 뒤 미니멀아트 예술가들에게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칼 안드레는 로트첸코의 모듈 구조물이 서양에 소개되었을 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브제가 없는 회화 No. 80(검은색 위의 검은색)>(1918)의 정사각형은 말레비치의 <흰색 위의 흰색>(1915)의 정사각형에 대한 빈정대는 화답이었다.

로트첸코는 1920년대에 주로 산업 디자인과 지형학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영화와 산업 디자인, 선전 포스터와 사진 등에 주력했다. ‘로트첸코 원근법’과 ‘로트첸코 단축법’은 1920년대에 유행어가 되었다. 그는 광선과 그림자를 혁신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벤 니컬슨은 1930년경 두 번째 아내가 된 조각가 데임 바버라 헵워스와 작업실을 함께 쓰기 시작하고 기하학적 추상으로 관심을 돌려 특히 마분지를 잘라 저부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니컬슨과 헵워스 부부는 1932년에 파리로 가서 피카소, 브라크, 브랑쿠시, 아르프를 만났다. 니컬슨은 1939~58년 콘월의 예술가 마을 세인트아이브스에 머물면서 눈부신 활동을 했으며, 2차 세계대전 후 그의 명성이 급속히 높아져 국제적 수준에 도달했다.

헵워스는 형태들 간의 긴장뿐 아니라 공간, 크기와 질감, 중량감과의 관계에 천착했다. 이 긴장에서 그녀는 조형물 고유의 절대적인 본질을 발견하기를 바랐으며, 그 절대적인 본질은 인간관계의 특징을 전달해야 만한다고 보았다. 이 마지막 조건이 특히 중요했는데, 그녀의 조형물이 추상이 되었을 때조차 그 형태들의 관계 속에 구상성이 함축되었기 때문이다.

헨리 무어는 아르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조형물이 야외 공간에 놓이기를 바랐으며, 일부 조형물을 광야나 공원에 자연스럽게 배치했다. 그러나 그의 조형물은 브랑쿠시나 아르프의 조형물보다 훨씬 더 복잡한데, 이런 복잡성은 인간의 운명과 관련된 인간성에서 비롯했다. 그는 처음부터 두세 가지 기본 주제인 비스듬히 누운 사람, 엄마와 아기, 가족 등에 빠져들었다. 그는 신화적 동기와 브랑쿠시와 아르프가 보여준 자연의 비밀스런 방식을 결합시켰다. 신화적 동기란 바빌론과 수메르, 이집트와 에게, 멕시코와 페루,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조형물과 같은 과거의 주술적ㆍ종교적 이미지의 영향을 말한다.

무어가 1945~46년에 제작한 <비스듬히 누운 사람>은 연작 중 하나로 모든 연관성을 제시한 조형물이다. 관람자는 여인상의 자연주의의 재현뿐만 아니라 땅의 여신을 나타낸 것 같은 재현과 마주하게 된다. 조형물의 비어 있는 부분과 구멍은 보금자리인 동굴이나 인체의 움푹 팬 곳인 자궁에 둘러싸인 따스함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관람자는 피카소와 아르프의 조형물과 같이 잠재의식에 호소하는 또 다른 예를 발견하게 된다. 무어는 때때로 추상조형물을 제작했지만, 인체의 형상을 보여주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 개념은 1950년경부터 단색, 혹은 거의 단색의 구멍 뚫린 캔버스였다. 그는 1949년 나비글리오 갤러리에서 자외선을 사용하고 관람자에게 의도적으로 왜곡된 공간을 제공하는 일종의 예측 가능한 작품 <공간 개념, 65 T 46(예측 가능한 것)>을 선보였다. ‘아테세 Attese’로 불린 구멍 뚫린 캔버스를 제작하게 된 동기는 캔버스 뒤에 펼쳐지는 무한한 공간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캔버스의 앞, 혹은 뒤에 착시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전통 방법을 버리고 캔버스 표면을 파열시킴으로써 관람자에게 실제 공간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었다. 1958년부터 단색의 가늘게 찢긴 캔버스의 양식으로 진전했다. 가늘게 찢긴 캔버스는 또한 미술을 행위와 제스처의 기록으로 규정하는 개념을 가장 극대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샤갈의 <나와 마을>(1911)은 샤갈이 어린 시절에 본 것들, 즉 행상인, 수염을 기른 유대교의 율법교사,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괴짜 삼촌, 농가, 농장의 동물들로 채운 향수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노스탤지어의 감정이 듬뿍 담긴 여기서는 위와 아래가 거꾸로 뒤집혔고, 인물이 잘리기도 했으며, 이상하게 관련된 사물들이 병치되어 있고, 크기와 공간의 심각한 불균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이 자유롭게 어우러졌으므로 시인 아폴리네르를 매료시켰다.

<푸른 바이올리니스트>(1920)에서 보듯 기억나는 고향 유대인 마을의 이미지들을 풍부하게 사용하여 비현실적 신화의 세계를 창조했는데,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상들을 비자연주의 구성 속에 배치하며 단편적 장면에 일화가 아닌 회화적 상징주의를 담았다. 그의 회화는 문학적 해석 가능성을 배제하는데, 1946년 자신의 회화에 관해 언급하면서 “나는 나의 회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나의 회화는 문학이 아니다. 나를 사로잡은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배열한 것일 뿐이다”라고 했다.

모딜리아니의 조형물 제작 시기는 새로이 파리 교외로 떠오른 몽파르나스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작업실을 갖고 있던 브랑쿠시를 만났다. 모딜리아니는 조형물 제작에 사용할 석재를 주변 공사장에서 가져왔으며, 지하철 철로의 침목을 가져와 두상을 제작하는 데 사용했다. <머리>(1912)에서 보듯 그의 조형물은 시적이며 극도로 양식화된 형태였고, 목이 길고 코가 창처럼 아래로 길고 뾰족했으며, 눈은 윤곽선으로만 표현되었다. 형태를 극도로 단순화함으로써 우아한 느낌을 주는 그의 조형물은 원시미술을 재해석한 것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자크 립시츠와 그의 부인 베르트, 막스 자코브, 디에고 리베라, 장 콕토, 샤임 수틴 등을 모델로 인물화를 그렸다. 수틴은 모딜리아니와 가장 가까이 지낸 예술가 중 하나였으며, 수틴은 모딜리아니를 존경했다.

혼란스러웠던 1919년 전후 몇 달 동안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회화에 몰두했다. 이때에 제작한 회화 가운데 건장한 소년 농부, 야윈 하녀, 사랑스런 어린이, 노인, 사교계 여인, 말쑥하게 차려 입은 신사 등 다양한 인물들을 모델로 한 것들이 있다. 그는 타계하기 전 2년 동안 열네 살 어린 잔 에뷔테른을 모델로 무려 25점의 인물화를 그렸다. 그녀는 모딜리아니가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숨을 거두자 다음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틴은 반 고흐의 말기 작품보다도 더 극렬한 감정 표현을 담은 환상적인 풍경화를 연속적으로 제작했다.

수틴은 카뉴에 잠시 머물다가 네덜란드를 방문한 후 렘브란트의 말기 회화에서 감동받았으며 1925년에 파리로 돌아와 가죽을 벗긴 소의 시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전에 가죽을 벗긴 말의 시체를 그린 적이 있었다. 1920년대에 그는 심리적으로 비정상임을 나타내는 기이하고 과장되게 왜곡시킨 인물뿐 아니라 성가대 소년, 성찬 배수자(, 시중드는 소년, 과자 제조인과 같은 세심하고 온화한 일련의 회화를 제작했다. 매우 극단적이기는 했으나 그의 표현주의는 독일 표현주의의 주요 관심사와는 거의 공통점이 없으며, 그의 회화를 오스카르 코코슈카 및 에밀 놀데의 회화와 유사하게 보는 것은 과장된 시각이다. 그의 표현주의는 추방된 많은 그의 동포들과 공유하던 비극적ㆍ묵시록적 기질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표출이었다. 그는 주기적인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신의 회화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늘 불안해하며 고통을 겪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 만족해하지 못하고 과거에 그린 것들을 파기하곤 했으며, 전시회 개최도 꺼려해서 생존에는 대중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수틴은 1929년에 자신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하고 있던 카스탱 부부와 함께 샤텔기용에 은거했다.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투렌의 샹피니쉬르뵈드라는 마을에서 방해받지 않고 풍경화를 그리는 데 전념하다가 궤양 수술을 받은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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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강의5

Dada and Surrealism
다다는 이 운동을 정신적으로 이끈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시인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189~1963)의 말처럼 새로운 정신의 상태였다. 해프닝, 퍼포먼스가 다다의 공식 표현이었다. 다다주의자들은 세계대전(1914-18 11월 11일 독일의 항복) 이전의 아방가르드 경향까지도 공격하면서 반예술anti-art의 풍자적 패러디를 통해 예술의 개념 자체를 타도하려고 했으므로 다다의 허무주의적 분규 이면에 감춰진 긍정적 목적을 명확히 규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광기insanity, 비도덕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한 도덕적 고찰. 허무주의의 배경으로서의 진화론

어떤 행성에서 지적 생물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물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 알아냈을 때이다. 기원전 6세기는 동양과 서양이 동시에 자기의 존재 이유를 고찰한 시기였다. 인간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설명한 사람은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82)이었다.

동물은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가 진화의 산물로 이기적으로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자기의 존재 이유를 물리적 DNA 분자의 생명은 수개월 정도이다. 그러나 DNA 분자는 이론적으로 자신의 사본 형태로 1억 년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유전자는 사본 형태의 잠재적 불멸의 성질을 갖는다. 자연선택은 유전자의 수준에서 이뤄지고, 같은 유전자들의 복제를 공유할 것 같은 혈연자에게 먹이를 공급하고 보호함으로써 ‘유전자들의 이익을 위해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생물 개체들이 있다. 이타적 기부행위는 자기우위 과시 신호인 것이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자’ 의미로서의 단위이고, 개체는 ‘운반자’ 의미로서의 단위이며, 이 둘은 완전히 종류가 별개인 단위이다. 다른 유전자들은 각 유전자가 살아가는 환경의 일부분이다. 각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배경’ 유전자들은 자신이 수많은 세대를 따라 이어온 시간여행 중 몸체를 공유하는 길동무이다. 침팬지와 인간은 진화역사 중 대략 99.5%를 공유하고 있으나, 여전히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인간 스스로를 전지전능자로 가는 디딤돌로 여긴다. 반면 침팬지는 꼴이 흉하고 엉뚱하며 괴상한 짐승으로 여긴다. 진화론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의 종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 자연선택의 결과가 현재 우리가 있게 만든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자연선택의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동물은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가 진화의 산물로 이기적으로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유전자의 특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한 이기주의’이다. 이기주의egoism는 이기적 개체 행동의 원인이 된다. 유전자가 한정된 이타주의altruism를 육성함으로써 자신의 이기적 목표를 가장 잘 수행하는 특별한 경우가 있다. 보편적 사랑이든 종 전체의 번영이든 이러한 것은 진화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세히 보면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실제로는 모양을 바꾼 이기주의인 경우가 많다.

남극의 황제펭귄은 바다표범에게 잡아먹힐 위험이 있으므로 물가에 서서 물에 뛰어들기를 주저한다. 그중 하나가 뛰어들면 나머지 펭귄은 바다표범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어느 펭귄도 자기가 희생물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누군가가 뛰어들기만 기다린다. 때로는 서로 밀치다가 무리 중의 하나를 떠밀어 버리기도 한다. 더욱 일반적인 이기적 행동은 먹이나 영역, 교미의 상대와 같은 가치 있는 자원을 서로 나누기를 거부하는 행위이다.

이타적 행위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이 새끼에 대한 어미의 행위이다. 어미는 새끼에게 먹이를 주며 큰 위험에 몸을 던져 포식자로부터 새끼를 지킨다. 그렇지만 생물이 종의 이익을 위해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도록 진화한다고 말하면 오류이다. 동물의 생활은 대부분 번식에 이바지하고 있으며,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이타적 자기희생적 행위는 어미가 새끼에게 하는 것이다. 이는 종의 존속 혹은 종의 번식을 위한 행동이다.

그러나 동일한 종족에 대한 이타주의도 있다. 국가는 이타적 자기희생의 주요한 수익자이며,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국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한다. 그들은 타국인이라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는 타인을 살상하도록 훈련받는다. 최근 인종차별주의자나 애국심에 반대하여 동지의식의 대상을 인류의 종 전체로 대치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잔인무도한 범인에 대해서조차 사형집행을 꺼려하는 데 반해 별로 해로운 야수도 아닌 동물을 쏴 죽이는 데 기꺼이 동의한다. 태아는 성숙한 침팬지보다 경의와 법적 보호를 받는다. 침팬지는 풍부한 감정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각도 하고 인간의 언어를 배울 수도 있다. 태아는 우리 종에 속하므로 특혜와 특권이 부여되는 것이다. 어떤 수준의 이타주의가 바람직한가? 가족인가, 국가인가, 인종인가, 종인가, 아니면 전체 생물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윤리의 혼란은 진화론적인 면에서 볼 때 어느 수준에서의 이타주의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생물학에서의 문제와 혼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마르셀 뒤샹은 레디메이드와 ‘발견된 오브제objet trouvé(found object)’를 구별했다. 뒤샹이 처음 제시한 레디메이드는 자전거 바퀴, 병 건조대, 소변기 등 공장에서 생산된 일상적인 상품이었다. 레디메이드는 익명성을 띠며, 개성 없이 밋밋하고, 인간의 노동이 가해진 느낌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발견된 오브제는 낯설고 오래된 사물들로 대개 구석진 가판대나 벼룩시장에서 발견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예술가의 억압된 욕망을 보여주거나 사회의 낙오된 생산양식을 보여준다. 이 아리송한 두 가지를 보여주는 오브제로 브르통이 파리 외곽의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구두-숟가락’을 예로 수 있다. 손잡이 밑을 조그만 구두가 받치고 있는 이 시골풍의 목공예 숟가락은 낙오된 사물이었으며, 브르통은 이것을 과거의 욕망과 미래의 사랑이 담긴 것으로 바라보았다. 뒤샹은 발견된 오브제가 미적 특질이나 아름다움, 독특함으로 인해 선택되거나 발견된 데 비해 레디메이드는 개성이나 독특함이 없는 대량생산물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따라서 발견된 오브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는 예술가의 취향이 개입되지만 레디메이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레디메이드와 발견된 오브제는 하나의 사물이 미술품의 위치로 승격된 것을 말하며 초현실주의자들은 발견된 오브제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병치를 탐구했다.

레디메이드는 몇몇 미국의 팝아티스트들과 유럽의 누보 레알리스트들이 아상블라주에 사용한 기계 생산물과 폐기된 기계의 일부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지만, 숭배가치나 자율적 능력을 지닌 물신으로 변모시킨 그들의 레디메이드와 뒤샹의 것은 본질적으로 그 의미가 다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갖는 충격효과는 그것이 격리되었다는 점 그리고 기능적으로 만들어진 오브제에서 완벽하게 그 기능을 박탈했다는 점에서 비롯한 것이다.

레디메이드와 관련해 지적할 점은 조형물과의 관계인데, 전통 조형물에 대한 20세기 예술가들의 도전은 원시주의 예술가들의 부족 물건과 뒤샹이 사용한 레디메이드의 두 형태로 진행된 것이다. 둘 다 일종의 물신적 힘을 소유하거나 이를 유희 대상으로 삼은 듯이 보였다. 부족의 물건이 그 자체 특별한 생명력이나 주술적 힘을 지닌 제의적 대상으로서의 물신을 연상시킨 데 비해 레디메이드는 상업적 생산물로서의 물신, 즉 상품 물신을 연상시켰다. 상업적 생산물이 인간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우리는 이 사물에 자율적인 삶과 힘을 부여하는 가운데 그것을 물신화시킬 수 있다. 부족의 물건이 상품교환이라는 자본주의 경제 밖에 있었기 때문에 매혹적이었던 데 반해 레디메이드가 도발적이었던 이유는 미술품도 생산품처럼 전시와 판매를 주요 목적으로 하는 상품 경제에 구속되는 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의 오브제 만들기에서 이 같은 부분적인 유형학은 성sex이라는 세 번째 물신을 끌어들인 초현실주의 오브제의 출현에 의해서 확장되었다.

뉴욕 다다
1915~23년 사이에 행해진 뉴욕 다다가 남긴 긍정적인 결과는 반예술 개념으로 이 개념은 1950년대 말에 등장한 네오다다이즘, 특히 플럭서스 운동 덕분에 국제적 무대에 올라 실질적으로 소생했으며, 20세기 후반 내내 끊임없이 나타났고, 이런 생명력이야말로 다다가 단순히 전통 예술 개념을 희화, 패러디, 조롱하며 거부한 것만이 아니라 기존의 전통 미술의 전당이던 갤러리, 미술관 등을 대신할 새로운 것을 창출한 증거였다. 반예술의 목표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물고 통합시키려는 데 있었다. 다다이스트들은 작품을 구성하는 데 있어 우연의 원리를 처음 사용하고 작품의 제작에 있어 문학에서 시작된 자동주의Automatism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실험했다. 이후 자동주의는 초현실주의자와 뉴욕의 추상표현주의자들에 의해 진전되었다.

뉴욕 다다의 중심인물은 뒤샹이었고, 취리히 다다와는 달리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조직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대량생산품인 레디메이드를 미술품이라고 주장한 뒤샹의 행위에서 다다의 요소가 이미 표출되었다. 레디메이드는 기성품을 임의로 선택해 미술품으로 전시한 데서 비롯된 명칭으로 이 경우 그 사물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격리되고 동일한 종류의 대량생산품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그 기능을 박탈당함으로써 일종의 실존적 개성과 물신숭배fetishism의 특질, 그리고 혼란스러운 위엄을 얻게 된다. 종종 마술적이거나 신적인 힘으로 해석되는 물신fetish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무역업자들이 아프리카 부족들이 무역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사물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말이었다. 그 후 물신은 최하등급의 정신성을 의미하게 되었다.

1917년 4월 10일 독립예술가협회가 주최한 전시회 개막일 일주일 전 뒤샹은 배관에 필요한 기구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모트J.L. Mott 철공소 전시장에서 소변기 하나를 구입했다. 그것을 작업실로 가지고 가서 거꾸로 세우고 검정물감으로 ‘R. Mutt 1917'라고 변기제조자의 이름을 서명하듯 적고 <샘 Fountain>이란 제목을 붙였다. 뒤샹은 <샘>이 배척당한 데 대한 글을 써 자신이 관여한 잡지 『장님』에 기고했다. 뒤샹은 미술품이 직접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냐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면서 사물을 발견하여 전시함으로써 새로운 제목과 견해 아래 그 본래 사물의 용도는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미술에 대한 그의 재정의는 미술을 규정하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술이란 단지 눈을 만족시키기보다는 지성을 활용해야 만한다고 했다. 그에 의해서 미술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은 사라지고 어떤 것이 미술품이냐 하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샘>이 제기한 비도덕성과 유용성 그리고 독창성과 의도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술가라는 권위에 의해 미술이 선택되는가 하는 질문도 마찬가지이다.

뒤샹은 자신의 업적만큼이나 삶을 통해서도 다른 어느 예술가보다 미술의 개념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그는 심미안의 신화를 깨뜨리고 미적 아름다움의 개념을 무너뜨리고자 노력했다. 발견된 오브제를 사용해 미술품을 제작하는 것이 유행하자 뒤샹은 1962년 네오다다에 “레디메이드를 발견했을 때 나는 미학을 타파하려고 했다. 반면 네오다다이스트들은 나의 레디메이드를 취하면서 거기서 미적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 병 건조대와 소변기를 던졌으나, 지금 그들은 그것들의 미적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다”는 말로 공격을 가했다.

프란시스 피카비아도 미술에 있어서 진지함을 배척하면서 “내게 진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진지하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 나는 진지함을 알프스 사냥꾼이 입고 있는 제복처럼 사람들이 지어낸 제안이나 관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취리히 다다
취리히 다다를 결성한 예술가들 가운데 하나인 후고 발은 1916년에 어린이들의 자연발생적이고 무책임한 요소를 환영하면서 이런 요소가 새로운 미술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일기에 적었다. 명칭 다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리히터는 1917년 그룹에 가입했을 때 트리스탄 차라와 마르셀 얀코가 슬라브어로 대화하면서 다-다(예, 예)하는 걸 보고, 다다란 명칭이 슬라브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휠젠베크는 1916년 4월 18일쯤 자신과 발이 독불 사전을 보다가 우연히 다다라는 단어를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어에서 다다dada는 ‘장난감 목마’를 의미한다.

취리히에 모인 예술가들은 인간의 이성이 야만적인 행위와 부조리를 조장한다고 자소하면서 이성 자체에 거세게 반발했는데, 이런 자연발생적 혁명은 따지고 보면 앙리 루소Henri Rousseau(1844~1910)의 회화에서 그리고 조르조 데 키리코와 마르크 샤갈의 잠재의식 세계에서 시각적 환상들로 분출된 적이 있었다. 파리에 체류하던 시절 데 키리코가 그린 그림들은 샤갈의 회화와는 달리 순진한 것이 아니라 화가의 의도가 잔뜩 실린 매우 감성적인 회화였다. 그는 외적 세계 이면에 감추어진 내적 모습을 묘사하려고 했다. 앙드레 브르통은 데 키리코의 회화가 인간에게만 있는 피할 수 없는 외로움과 치유할 수 없는 두려움의 상태를 놀라울 만큼 잘 표현했다고 말했다. 환상주의, 혹은 형이상학파 화가들로 알려진 샤갈과 데 키리코는 인간이 바라고 이루고자 하는 사고와 꿈을 이성이 실현시키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욕망과 꿈을 성취하기를 바랐다. 이런 경향이 파리의 미술계에 널리 알려질 무렵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데 키리코는 자신의 회화를 형이상학적이라고 했다. 형이상학 회화에는 이미지가 물리적 세계를 넘어, 마네킹이 인간을 대체하고 평범하게 입체주의 방법으로 그린 사물들, 즉 성냥갑, 물고기, 고무장갑, 비스킷, 빵 등이 화면에 예측할 수 없게 자리 잡은 세계, 따라서 환영과 실재의 구분을 흐리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다. 데 키리코는 오브제들을 비이성적으로 병치해 당황스러움을 야기하는 시각적 은유를 통해 그 효과를 확대시켰으며, 아폴리네르는 “새로운 의도로 가득 차 있으며 강렬한 건축적 요소와 감성으로 채워진 이상한 풍경화”라고 했다.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1896~1963)가 1915년 가을 취리히로 온 것은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사미 로젠스톡이란 본명 대신 ‘고향에서 슬픈’이란 뜻의 트리스탄 차라를 가명으로 사용했는데, 루마니아에서 벌어진 유대인 차별행위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다다는 1916년 2월 5일 발이 약간 소문 나쁜 구역에 있는 주점 마이어라이를 예술 활동의 중심이 될 카바레 볼테르로 개점하면서 시작되었다. 구소비에트의 혁명가 레닌이 한동안 카바레 볼테르 맞은편 슈피겔가스 21번지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떠들썩한 다다의 동향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기록으로 전하지 않는다. 카바레 볼테르는 나이트클럽과 예술가들의 사교클럽 중간 역할로서 젊은 예술가와 시인들이 그들의 사상과 원고를 가지고 와 큰 소리로 낭독하거나 회화를 소개하거나 노래와 댄스, 음악을 연주하는 예술적 오락센터가 되었다. 카바레 볼테르는 1916년 6월 23일 입체주의 가면을 쓴 발의 전설적인 퍼포먼스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정기간행물 『다다』의 창간호가 발간된 것은 1919년 7월이었다. 차라는 『다다』 3호에 발표한 「1918년 다다 선언문」에서 예술적 논의라는 핑계 하에 모든 원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쟁의 조건 하에 그 원칙들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는지 다음과 같이 밝혔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원칙은 위선이다. ‘네 자신을 알라’는 유토피아적이지만, 그 뜻에 악의가 있으므로 좀 더 수용할 만하다. 동정이란 없다. 대량학살 이후 우리는 순화된 인간성을 바라게 되었다. ... 회화란 우리 눈앞 캔버스 위에서 기학적 평행으로 보이는 두 개의 선이 만나도록 만드는 미술이며, 그 만남은 새로운 조건들과 가능성에 따라서 위치가 달라지는 세계의 실재에 따라 이뤄진다. 세계는 작품 속에서 구체화되거나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변화를 통해 관람자에게 속하는 것이다. 세계의 창조자에게는 어떤 원인이나 이론도 없다. 질서=무질서, 자아=비자아, 긍정=부정 이는 절대적인 미술의 숭고한 광채이다.

차라는 다다를 “뒤틀리는 고통의 고함소리, 반대적인 것들, 모든 모순, 변덕, 무관계의 얽힘을 의미하는 삶”으로 규정했다. 1918년 여름에 전쟁은 종국을 치닫고 있었다. 아직 살인행각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종전에 대한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1917년 11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과 독일에서의 시민동요 징후의 뒤를 이어 전반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다가올 분위기가 퍼졌다. 사회의 전반적인 분야들은 갑자기 기존 정설들에 대한 다다의 혐오와 보조를 맞추는 것처럼 보였다.

다다에 참여하기 전에 파리 아방가르드 진영에서 활동한 취리히 다다의 주요 인물 장 아르프는 입체주의 콜라주를 다다 방식으로 바꿔 사용했다. 그의 콜라주는 기호학적 분석의 매체라기보다 우연적인 구성의 매체가 되었다. 아르프는 자동주의 구성과 무작위로 취한 우연의 요소 및 총체적 구성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인 말라르메가 제기한 우연의 허용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색종이를 찢어 그 조각들을 떨어뜨려 <우연의 법칙에 따라 배열한 정사각형 콜라주>(1916~17)를 제작했다. 정사각형들을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단정하게 질서를 이루게 하여 우연이 구성을 결정하는 전부가 아니란 점을 그는 시위했다. 그가 주장하고자 한 점은 우연의 법칙이 창조의 본질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연에 대한 그의 탐색은 무의식을 미술과 연관시키는 생생하고 실질적인 방법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나는 화면 구성에서 의도대로, 자동적 제작과정에 따라 파피에 콜레 기법을 발전시켜나갔다. 이것을 나는 ‘우연의 법칙에 따라 작업하기’라고 불렀다. 그 법칙은 다른 모든 법칙을 안고 있으며, 또 우리를 벗어나 있다. 모든 생명력을 분출시키고 완전히 무의식에 맡김으로써만 체험될 수 있는 최우선적 원인이지만, 나는 이런 법칙에 따르는 것이 삶을 순수하게 만든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쾰른 다다
쾰른 다다는 막스 에른스트의 특이한 콜라주를 낳았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그는 삽화를 잘라 암시성을 띠도록 이를 다시 배치함으로써 평범한 삽화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이 기법은 후에 초현실주의에서 사용되었다. 에른스트는 또한 회화적 목적으로 프로타주frottage 기법을 개발했다. 프로타주(문지르기)는 울퉁불퉁한 무늬 결에 종이를 대고 부드러운 화필로 문지르는 기법으로 그가 1925년 8월 10일에 숙소의 마룻바닥을 보다가 마루의 광택에 비치는 나뭇결을 주목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불규칙한 패턴을 좇다가 이를 종이 위에 옮겼다. 그 후 나뭇잎의 잎맥, 마포의 결, 붓자국 등으로 동일한 작업을 했으며, 이런 우연적 패턴을 회화적 디자인의 기초로 활용했다. 이 기법은 나중에 유화에도 사용되었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기법을 잠재의식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 채택했다.

에른스트는 1920년대에 새로운 기법을 개발했다. 그는 유화물감이 마르지 않은 화면을 빗으로 긁어서 물감이 묻어 있는 층 밑의 캔버스 면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물감이 칠해진 면과 긁어낸 면이 대조되게 했다. 그는 일련의 작품들에서 나이프로 물감을 덧바르는 방식을 사용하면서 실험을 거듭한 끝에 그라타주grattage(긁어내기) 기법이 만들어졌다. 프로타주와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라타주 기법은 물감이 마르지 않은 캔버스 위를 울퉁불퉁한 표면에 대고 누르면서 불규칙하게 물감을 긁어내는 방법이다.

에른스트는 1937년에 유화에 데칼코마니아decalcomania(옮긴 그림) 기법을 도입했는데, 자동주의 회화에 사용된 것으로 1936년경 스페인 화가, 조각가 오스카르 도밍게스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를 에른스트가 유화에 적용했다. 흰색의 얇은 종이 위에 넓은 붓으로 물감을 바른 다음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른 종이로 덮고 가볍게 문질러 물감이 아무렇게나 우연적으로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이 격찬한 이 기법의 핵심은 미리 주제나 형태를 구성하지 않고 회화를 만든다는 데 있다. 에른스트의 명성은 프랑스 문단에 빠르게 퍼졌고, 그는 1922년 독일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고 초현실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심리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관심이 많았던 에른스트는 미술을 탈숭고desublimation, 즉 미술을 성 심리적 충동과 불안을 드러내는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는 성충동인 리비도libido의 욕구를 숭고화했다. 에른스트는 1938년에 폴 엘뤼아르와 함께 브르통이 이끌던 초현실주의 운동과 결별했지만 이로 인한 회화 양식상의 변화는 없었다.

베를린 다다
베를린 다다는 시인 리하르트 휠젠베크가 1917년 초 취리히로부터 베를린으로 돌아오면  시작되었다. 독일 군대는 프러시아식 훈련을 유지하면서 막대한 인명 손실을 국민에게 속이고 있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그러한 모순을 19세기가 제시했던 이상들에 대한 배신으로 느꼈다. 1917년의 상황은 더욱 격렬해지고 이전보다 대립적 충돌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전쟁이 쉽게 종료될 것 같지 않았다. 미국이 1917년 참전함으로써 전쟁이 연장될 우려를 불러일으킨 반면,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시킨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지배체제가 서양 산업사회에 유입될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이런 상황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의견들이 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휠젠베크는 1917년 5월 23일 좌익 정기간행물 『신청년』에 기고한 「새로운 인간」에서 기존체제를 일소할 수 있는 전후의 희망적 존재에 기대를 걸었다. 그는 계급도 권력도 민족주의도 모두 화해하게 되며, “모든 것이 살아남되 확실히 한 가지만 사라질 것이다. 배부른 속물, 살찐 돼지, 지적인 돼지이자 모든 비참함의 양치기인 시민계급burgher, 즉 부르주아는 사라지고 말 것”으로 믿었다. 그는 잔존하는 모든 위계질서에 대한 공격만이 수도 베를린에서 할 수 있는 문화적 활동으로 새삼 인식했다.

휠젠베크는 「다다 선언문」에서 다시금 표현주의를 공격하면서 표현주의자들에게 특징 지워지는 자아성찰의 고뇌에 대항해 거리의 현실로부터 직접적으로 얻는 경험을 강조했다. 독일의 상황은 베를린 다다이스트들로 하여금 정치에 관심을 갖게 했으며, 이는 취리히 다다이스트들로부터 그들이 멀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휠젠베크가 말한 대로 “스위스에서와 같이 조용하게 앉아 있는 것과 베를린의 우리들처럼 화산 위에 누워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베를린 다다는 혁명에 대한 전망으로부터 에너지를 끄집어냈으며, 사회의 상황에 지쳐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반응을 얻어냈다. 더러 부조리해 보이는 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적 언어와 예술적 형식의 재창조를 이뤄내고자 한 그들의 활동은 몰락한 사회의 전 체제를 개혁하려는 서막으로 보일 수 있었다.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에게 나타난 공통점은 포토몽타주의 사용이다. 시기적으로 게오르그 그로츠와 하트필드가 먼저 이 기법을 사용했다. 두 사람은 1919년 독일에서 창립된 공산당 당원이었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왜곡하는 방법은 이미지의 창조에 있어 매우 효과적이었다. 하트필드와 그로츠는 1919년에 “예술가라는 명칭은 모욕이다.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동등함을 파괴하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인플레이션과 혁명을 겪은 베를린에서 다다는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다. 다다이스트들은 “다다는 독일의 볼셰비즘이다”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몇몇 다다이스트들은 좌파로서 공산당과 목표를 같이 했다. 그들은 소비에트 체제의 예술적 재현에 즉각 반응하고 베를린이 서쪽의 러시아가 될 수 있도록 협조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베를린 다다는 독일에서 전례 없던, 명백하게 정치화된 아방가르드 기획이었다. 이 점은 베를린 다다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기획은 고급미술의 부르주아적 개념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더 이른 시기에 나타난 프랑스의 다다의 수용, 바이마르 출판 산업이라는 신흥 대중문화 권력을 뒤흔들고자 했던 몽타주 기법의 체계적 전개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광범위했다.

베를린 다다와 관련된 대부분의 화가들은 사실주의 양식만이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양 사회적 비판을 위해 회화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실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다다의 긍정적인 관심은 주로 정치적인 사회풍자 면에서 그로츠의 작품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다. 그로츠와 더불어 베를린 다다의 대표적인 화가 오토 딕스는 국제다다박람회에만 작품을 출품했다.

1918년 11월 독일의 패배는 황제의 하야를 동반했고, 승전국 프랑스와 벨기에는 패전국 독일을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제재를 가하며 앙갚음했다. 국내의 정치적 분쟁은 긴장을 더욱 심화시켰다. 사업가와 장군들이 일반 군인들의 희생을 통해 이익을 얻고 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상이군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거리에서 구걸을 했다. 체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들끓었다.

베를린 다다의 영향을 받은 신즉물주의(신객관주의)
게오르그 그로츠와 오토 딕스는 신즉물주의를 주도한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새로운 객관성New Objectivity’, 혹은 ‘새로운 합리성New Sobriety’으로 다소 부적절하게 번역되는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는 1920년대 초 독일 회화에서 발전한 풍자적ㆍ사회적 사실주의 운동으로 당시 유행하던 표현주의의 특징인 사회 비판적 요소를 수용했으나 브뤼케의 추상 경향을 거부했다. 신즉물주의는 “명백히 실재하는 현실에의 충실함”을 기조로 하는 회화였다. 신즉물주의는 초기에 다다의 냉소적 파괴성과 전통 가치에 대한 경멸, 그리고 여러 시점에서 본 것을 동시에 결합하는 것과 같은 미래주의 기법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로츠와 딕스는 격렬한 사회풍자를 목적으로 진실주의 기법을 이용하여 사회의 추악한 면모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베를린과 드레스덴에서 공부한 게오르그 그로츠는 1915년에 군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고 제대했으나 1917년에 다시 징집되었고, 그 후 상사를 폭행해 정신병동에서 군복무를 마감했다. 그로츠는 공공 공간에서 허가받지 않은 낙서에 관심이 많았다. 예술가의 진정한 사고의 변화를 끌어내주는 조작적 사례로서의 낙서는 진솔한 표현에 접근하기 위해 사색하고 따라야 할 사례로 모사될 수 있는 대상으로 예술가들의 관심거리였다. 그의 큰 공헌은 광범위한 수준에서 재생산된 풍자적 드로잉이다. 그로츠는 1924년에 “나는 대상의 비인간성과 기발하고 일관성을 빚어낼 수 있는 양식을 얻으려고 거칠게 표현되는 예술적 본능을 연구했다. 가장 즉각적인 표현이고 가장 강렬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옮기는 것으로 보인 민속적 데생을 다시 베껴 그리려고 화장실을 찾아다녔다. 어린이 회화의 그 총명한 의미도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렇게 나는 인간에 대한 나의 절대적 혐오에서 비롯된 관찰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무쇠 같은 단단한 데생 양식에 이르게 되었다”고 했다.

많은 다다이스트들이 유화물감을 기피했지만 그로츠와 딕스는 유화물감을 사용했는데, 중상계층이 선호하는 유화의 전통 가치에다 계급체계를 부수려는 목적을 가진 작품의 공격성을 결합시키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츠는 신문에서 잘라낸 표제나 기사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콜라주를 만들었으며, 재료가 지닌 본래의 의미를 파괴하는 방식을 즐겼다. 정치적ㆍ풍자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포토몽타주는 유효했으며, 사회적 문제를 널리 알리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한편 다다의 정기간행물들은 포토몽타주를 통해 당대의 모든 양상을 잘 이용했고, 공식 간행물에 등장하는 정치지도자들의 사진이나 그와 비슷한 광고들을 이용해 존재의 위선과 멍청함이 드러나게 했으며, 이는 이미지들이 전복되는 효과를 창출했다. 다다이스트들은 여기에 자신들의 각종 사진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들은 미래주의자와 취리히 다다이스트들의 선전 방식을 취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표명했다. 몇 년이 지난 뒤 포토몽타주를 누가 발명했는가에 대한 문제로 베를린 다다이스트들 사이에 신랄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로츠는 정치적 검열을 피할 계책으로 자신과 하트필드가 그 기법을 발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설명에서 그로츠는 발명시기를 조금 이르게 계산하면서 1915년이나 1916년 군인들이 전선에서 만들어 보낸 우편엽서에서 이 기법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그의 설명은 결과적으로 이름 모를 군인들에 의해 참호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1933년 1월에 히틀러가 권좌에 올랐고, 9월경 선전국 장관이던 요제프 괴벨스는 제국문화부를 신설해 모든 예술은 나치의 기준에 따라 제작할 것을 공표했다. 노골적으로 나치즘을 비난한 그로츠와 하트필드는 일찌감치 독일을 떠났다. 하트필드는 프라하로 갔다가 런던에 정착했다. 미국에 정착한 그로츠는 풍자 양식을 대부분 포기하고 암울한 미래를 묵시론적 시각으로 표현하는 낭만적 풍경화와 정물화를 그렸다.

그로츠와 더불어 신즉물주의 화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화가 오토 딕스의 회화에서는 사회적 사실주의가 뚜렷했다. 표현주의의 신랄한 캐리커처 전통을 부활시킨 그의 회화에서 모델은 모든 허식을 벗고 사회구성체의 희생자나 지지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딕스는 종종 의도적으로 반예술, 혹은 독일어로 ‘값싸게 하다’, ‘감상적으로 만들다’라는 의미의 동사 ‘verkitschen’에서 비롯한 것으로 ‘천박한 쓰레기’를 의미하는 키치에 해당하는 작품이나 추한 재료를 사용하는 진실주의 몽타주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매우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타락한 사회의 부패와 전쟁의 추악한 본질을 심리학적 진실에 근거해 묘사했다.

파리 다다
파리는 전쟁의 직접적인 위협 속에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 1914년 가을에 독일군은 파리 외곽 20마일 안으로 공격해왔고, 파리 시민들은 포성을 들을 수 있을 만큼 대포들의 사정권 안에 있었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은 문명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보였다. 다다가 긴장된 상황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1917년 후반이었고, 그해 가을 아폴리네르는 차라로부터 여러 편의 시를 받아 절충주의 잡지에 실었으며, 동시에 피카비아의 『391』지를 바로셀로나에서 전해 받아 읽고 있었다. 그는 시인 아드리엔 모니에가 운영하던 서점 ‘책의 친구들’에서 가졌던 정기 독서모임에 참석했는데, 이 모임은 장 콕토,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필리프 수포, 그리고 훗날 파리 다다의 간사가 된 조르주 리브몽 데세뉴의 관심을 끌었으며, 시인이자 화가 리브몽 데세뉴는 취리히에서 발간되는 『다다』지에 글을 싣고 있었다.

차라는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의 평론지 『노르-쉬드 Nord-sud』와 브르통, 아라공, 수포가 편집한 『문학 Littérature(레타라튀르)』지에 기고했다. 이들 젊은 문인들이 아직 다다라는 명칭을 내세우지는 않았으나 기존의 사회적·문학적 관행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다다의 부정적·파괴적 측면에 상당히 가까운 경향을 나타냈다. 프랑스의 시각예술 부문에서는 다다가 자생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다는 1919년 피카비아가 자신의 『391』지 9호를 프랑스에서 발간함으로써 파리에 도입되었으며, 그는 『391』지에서 최후의 심판이 임박했고 다다의 반메시아 트리스탄 차라가 곧 도착할 것임을 알렸고, 차라가 그해 파리에 도착했다. 피카비아가 파리로 돌아온 것은 1919년 3월 10일이었다.

파리 다다의 절정은 1920년 5월 26일 근대적인 가보회관Salle Gaveau에서 열린 다다 축제였다. 다다이스트들은 5월에 발생한 총파업에 공감을 표명하면서 파업의 정당함을 그들의 퍼포먼스에 포함시켰다. 파리 다다는 브르통과 차라의 분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브르통이 1922년 2월에 멋대로 기획한 파리 대회가 분열의 촉진제가 되었다. 대회의 목적은 다다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의욕과 함께 근대 문화를 보호하는 아방가르드의 가능성에 관해 논의하기로 되어 있었다. 참여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차라는 그 대회가 본질적으로 반다다anti-dada를 전제하고 있으며 성격이 명확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코미디 Comoedia(코모에디아)』지를 통해 격한 논쟁이 오갔는데, 브르통이 어리석게도 차라를 ‘취리히로부터 수입한 운동의 주동자’로 규정지었다. 브르통이 민족주의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므로 엘뤼아르, 리브몽 데세뉴, 사티는 차라의 편에 섰다. 그리고 2월 17일의 카페 클로즈리 데 릴라에서 잇달아 벌어진 논쟁에서 브르통은 루이 아라공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무시당했다. 파리 대회는 열리지 못하고, 그에 대한 중상모략이 지속되자 브르통은 마침내 『문학』지에 4월호에 기고한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라」라는 글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라. 다다로부터 떠나라. 아내로부터 떠나라. 애인으로부터 떠나라. 희망과 두려움으로부터 떠나라. 아이들을 숲속에 버려라. 그림자의 실체에서 떠나라. 편안한 삶으로부터 떠나라. 미래를 위한 것을 버려라. 그런 길에서부터 출발하라.

이러한 난잡한 공개논쟁들이 파리 다다를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브르통은 피카비아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피카비아는 『솔방울』지 2월호에서 차라에 반대하며 브르통을 지지했다. 이에 대해 차라와 그를 지지하는 동료들이 『털 난 가슴』지 4월호에서 반론을 펼쳤지만, 결과는 브르통의 우세로 나타났다. 파리 다다의 분열은 미술계 전체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다다의 표적이 되어왔던 예술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입체주의자와 순수주의자와 같이 다다이스트들이 아니었던 예술가들은 잇달아 벌어지는 급박한 변화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찾으려고 애썼다. 브르통은 1922년 『문학』지의 편집을 혼자 맡게 되었고, 1924년 초현실주의의 계획과 방향을 제시한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다다에 치명타를 가했다.

파리 다다가 지속되지 못한 또 다른 요인은 종전 후의 정치적 현실이었다. 침략전쟁을 반대했던 대부분의 독일 아방가르드들은 패전과 더불어 혁명적 사회변화를 추구한 반면 애국적ㆍ방어적이었던 대다수의 프랑스 아방가르드들은 전승과 함께 보수주의 문화를 옹호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보수주의의 승리는 1919년 후반에 있었던 국민총선거에서 확인되었는데, 재향군인의 군복 색깔을 따서 이름 지은 ‘청색평의회’라는 우익 다수당의 승리로 돌아갔다. 회화에서는 앵그르, 쇠라, 세잔, 그리고 그 밖의 19세기 화가들의 명성이 지중해적 고전주의라는 프랑스 전통에 비추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특히 앵그리슴Ingrism이 유행했는데, 이는 피카소가 입체주의 회화를 계속하면서 고전회화에도 관심을 기울인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문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은 마리네티와 마찬가지로 시인이라기보다는 출판을 주로 했으며, 전쟁 기간에 파리의 발 드 그라스  병원에서 전쟁의 충격으로 신경증을 앓던 환자들을 감호하는 간호병으로 복무하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다른 어떤 이론보다 인간의 심리를 잘 설명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브르통이 무의식, 쾌락, 꿈의 표현 가능성, 거세 공포, 심지어는 죽음 충동 같은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을 열렬히 수용하게 된 것은 외상성 신경증 환자들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삶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충격의 연속이라는 생각은 브르통에게 있어 일종의 영화구경 같은 것이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몇 년 뒤 브르통의 시집 『자기장 Les Champs magnétiques』(1920)에서 형상화되었다. 필리프 수포와 함께 쓴 이 시집에서 브르통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시도했고, 그에 걸맞게 글의 구성 또한 자동기술을 따랐다.

「자장」은 브르통과 수포가 자동주의로 쓴 첫 번째 습작이었다. 자동주의는 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 상상력을 검열 없이 분출시킴으로써 새로운 시적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그들은 10시간 동안 계속되는 집필행위를 유지함으로써 당시 거트루드 스타인과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에 관련된 소설들에 비교할 만한 자유로운 흐름을 획득했다. 그 결과 문법이나 이론상으로 틀린 문장이 나오게 되었으며, 이는 정통 글쓰기 형식에 대한 불신을 과장한 것이었다. 「자장」은 관습에 대한 어떤 공격도 거부하는 문학의 위선을 뒤흔든 결과를 초래했다.

작품
피카비아의 기계주의 드로잉 <경외 Reverence>(1915)는 미술에 대한 허무주의를 시위한 것이었다. 피카비아가 스티글리치의 정기간행물 『291』지에 게재한 <누드 상태의 미국 소녀의 초상 Portrait of a Young American Girl in the State of Nudity>(1915)은 일종의 삽화적 레디메이드로 뒤샹의 <샘>과 평행을 이루는 작품이다. 피카비아는 기계에 성을 부여했으며, 스파크 플러그는 여성을 은유하며 성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녀의 생의 목적은 욕망, 혹은 오르가슴과 동의어인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다. 기계는 피카비아뿐만 아니라 뒤샹과 만 레이의 작품에서 사람에 대한 반복적인 은유로 작용했다.

피카비아의 <카코딜과 같은 눈 The Cacodylic Eye>(1921)은 회화의 해체이자 회화라는 역설적인 작품으로 그는 작업실에 커다란 캔버스를 놓고 방문자들로 하여금 서명하거나 무엇인가를 쓰게 했다. 결국 50개가 넘는 서명, 말장난, 낙서, 경구들이 가득 찼고 눈 하나가 관람자를 빤히 바라본다. 이 작품이 1921년의 살롱 도톤에 선보였을 때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공중화장실 벽”으로 묘사한 평론가도 있었다. 이 작품으로 피카비아는 회화가 화가의 독창적이고 일관된 시각 및 정체성의 표현이라고 사칭하는 데 대해 공격을 가했다.

만 레이가 해부대 위의 재봉틀을 담요와 노끈으로 포장한 <이시도르 뒤카스의 수수께끼 The Enigma of Isidore Ducasse>(1920)는 뒤샹의 존재론적 모순과는 다른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레이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알고 있었으며, 프로이트는 「기괴한 것」이란 글에서 왜 오브제가 낯설고 불안함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를 설명했다. 앙드레 브르통이 언급했듯이 프로이트가 사용한 독일어 ‘기괴한’ 것, 혹은 ‘익숙하지 않은’ 것은 관람자를 과거와 환상으로 데리고 감으로써 성적인 것이 되면서 동시에 낯설어지는 오브제의 위기인 것이다. 브르통은 <이시도르 뒤카스의 수수께끼>를 가장 순수한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꼽았다. 이시도르 뒤카스는 24살에 요절한 우루과이 태생의 프랑스 극작가, 시인, 배우였다.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 혁명』지 창간호에 실린 첫 작품이 되었다.

<셀레베스 섬의 코끼리>(1921)는 환각적 힘을 지닌 작품이다. 화가 교습을 받은 적이 없는 그는 기계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면서 신화를 회화로 표현하기 위해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구사했다. 하늘에 물고기와 가상의 구멍들이 있고, 중앙에 있는 아프리카인이 사용하는 옥수수 저장통 같은 위협적인 형태는 유기적이면서도 기계적 이미지로 보이고 그 옆의 목이 없는 인물에는 어두운 분위기가 드리운다. 사적인 강박증보다는 집단 무의식에 호소한 에른스트의 회화는 그룹의 구성원들에게 원동력을 제공해주었다.

에른스트는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꿈을 단순히 형상화하기보다는 꿈의 상황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나이팅겔로부터 위협받는 두 아이>(1924)에서 불안한 분위기가 창출되었고, 제목은 수동적 오브제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뒤집는 효과를 초래했다. 그의 도발적인 이미지들은 주체가 아니라 형식적 측면에서 파열을 만들어냈다.

<커다란 도시 The Big City>(1916~17)에서 보듯 일찍이 사회 풍자의 경향이 강한 풍자화로 시작하여 소묘를 통해 삶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표현했으며, 폭력과 잔인함, 그리고 격하시킨 성을 암시하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프로이센 지배층이었던 군 장교, 자본가와 성직자의 부패를 비난했다.

<사회의 기둥 The Pillars of Society>(1926)에서 보듯 그로츠는 폭력과 잔인함, 그리고 격하시킨 성을 암시하는 회화를 제작함으로써 프로이센 지배층이었던 군 장교, 자본가와 성직자를 웃음거리로 만든 극단적으로 비판적인 풍자 화가였다.

<실비아 폰 하르덴 기자 The Journalist, Sylvia von Harden>(1926)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전형적인 인물의 잊을 수 없는 초상으로 남녀 구별이 모호한 상태로 그의 퇴폐적인 밤 생활과 함께 그려놓은 것이다. 이 작품에는 전후 베를린에서 부상한 새로운 지식인 사회의 대담성과 퇴폐성이 집약되어 있다.

고도의 조직과 통제 하에 전개된 미술운동 초현실주의
다다가 남긴 폐허에서 건설을 시작하려는 긍정적인 행동의 열망에서 비롯한 초현실주의는 20세기 사조들 가운데 가장 고도로 조직화되고 엄격하게 통제된 운동이었다. 초현실주의의 도덕적·실천적 지도자는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린 앙드레 브르통이었다. 브르통은 정신장애를 공부하기 위해 낭트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그때 경험한 정신이상자에 대한 연구가 훗날 비이성적 행위에 대한 관심의 근원이 되었다. 상상력과 감정적 힘이 늘 과학과 이성주의의 실추를 상쇄해왔다고 믿었으므로 1차 세계대전 중 육군병원에서 근무하며 목격한 고통과 괴로움에 큰 충격을 받고 글을 쓰게 되었다. 군복무 후 파리에 정착하고 재능 있는 새로운 예술가들, 특히 다다운동을 지원하고 장려하던 『문학』지의 편집인이 되었다.

다다는 일상의 모든 걸 부정했으므로 결국 스스로를 부정해야 했으며, 이는 악순환으로 빠져 거기로부터 탈피가 필요했다. 이는 브르통 주위에 모인 젊은 프랑스 예술가들이 가장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브르통은 다다 운동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했지만 초현실주의와 다다의 관계는 복잡한데, 여러 면에서 닮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초현실주의는 유산계급을 그들의 적으로 계승했고, 최소한 이론상으로 전통 형태의 미술에 대한 공격도 멈추지 않았다. 다다와 관계가 있던 예술가들이 초현실주의로 적을 옮겼으므로 더욱 구분이 쉽지 않았다. 그들에게 초현실주의는 다다의 대용물이었기 때문이다. 자발적 창조행위의 힘을 인정함으로써 초현실주의는 다다가 미술에 걸었던 거부권과 역설적인 다다 입장의 필연성을 제거했다.

‘초현실surrealiste’이란 용어를 아폴리네르가 1917년에 처음 사용했으며, 1924년 10월 15일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문 Manifeste du surréalisme」에서 규정되었다. 브르통은 1920년에 이미 현실주의의 상위, 혹은 현실주의를 초월하는 의미의 초현실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지만, 선언문을 통해서 그 의미를 강조하고자 했다. 초현실주의란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아폴리네르에게 헌정한 「초현실주의 선언문」은 브르통의 말대로 장황하면서 산만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초현실주의의 정의는 선언문의 중반 이후에야 나타나는데, 그 의미를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는 순수한 정신을 자동 기술하는 것으로 그로 인해 사람이 입으로 말하든, 붓으로 쓰든, 혹은 어떤 방법으로든 사고의 참된 운동이 표현된다. 사고는 이성에 의한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심미적이거나 도덕적인 모든 관심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기록된다”는 말로 규정했다.

브르통에게 초현실주의란 파열적인 방식으로 “두 개의 다소 어긋나는 현실을 병치”하는 것이었다. 초현실주의에 대한 브르통의 규정은 문학작품의 창작에 관한 것이지만,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가 손의 운동에 대한 의식적 통제를 억제하는 방법으로서의 자동주의는 회화와 드로잉 그리고 저술과 그 밖의 여러 작품에 사용되었다.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은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미지를 일종의 꿈으로 파악했으며, 프로이트는 꿈을 전치displacement된 소망의 왜곡된 상형문자로 이해했고, 초현실주의자들은 대상을 일종의 증상으로 파악했으며, 프로이트는 증상을 갈등상태의 욕망이 신체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이해했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꿈을 해석하면서 발전시킨 응축condensation의 보완 개념인 전치는 꿈에서 작동하는 또 하나의 본질적인 과정으로 프로이트에 따르면 또 하나의 본질적인 꿈-작업이다.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계기로 초현실주의 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1924년 12월 새로운 정기간행물 『초현실주의 혁명』지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했다. 이 잡지는 10년 동안 발행되었다. 1929년 12호가 발간된 후 이 잡지는 『혁명을 위한 초현실주의』지에 밀려났으며, 미학적으로 훨씬 과감했던 『미노토르』지에 의해 퇴색되었다. 초기의 『초현실주의 혁명』지는 브르통과 이 간행물의 초대 편집장 피에르 나빌 사이의 내부 논쟁으로 분열되었다. 나빌은 1927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손을 떼고 레온 트로츠키의 비서가 되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으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때 무장봉기에 공헌하고, 외무인민위원, 군사인민위원, 정치국원 등을 지냈고, 레닌이 사망한 뒤 당의 노선을 놓고 스탈린과 대립하여 추방되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유럽이 전통적 도덕에서만 파산한 것이 아니라 예술, 문화, 과학, 철학, 그리고 정치에서까지도 파산한 것으로 인식했으므로 그들의 행위는 광적이었고, 어린이들처럼 무책임했으며,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사람들처럼 새로운 것을 찾았다. 이브 탕기와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세한 것은 1925년 말이었으며, 스물네 살의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28년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그룹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브르통은 회화 자체의 미적 목적보다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시만큼이나 회화를 늘 염두에 두었다. 그는 양식에 대한 다다의 불신을 계승했다. 그래서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몇몇 초현실주의자들의 성공으로 인해 대중이 초현실주의를 양식상의 문제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자 몹시 당황해했다. 브르통은 달리가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미술에 의도를 가지고 결합시켜 초현실주의 미술의 효과를 약화시켰다고 비난했다. 그가 보기에 달리의 조작은 이중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욕망의 흐름을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달리를 교의상의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추방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자동주의 원리를 중요하게 받아들였지만 단일한 초현실주의 양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초현실주의자들의 행위를 크게 둘로 나누면 자동주의와 환상적 꿈의 세계를 추구하는 부류로 이러한 두 경향이 바로 정신분석학과 미술의 관계를 괴롭혀온 문제로 등장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꿈에 관한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의견을 직접 청취했는데, 프로이트는 “단지 수집만 한 꿈들은 아무것도 암시하는 바가 없으며, 그런 것을 묘사한 회화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는지 나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고 경고했다.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이 배제된 정신분석학적 작품들이 대부분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한 점이었으므로 그들 대부분의 작품에는 일정한 경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정신과 미술품을 너무 직접적이거나 즉각적으로 연결시킨 결과, 작품의 고유성이 상실되거나 둘 사이의 관계가 지나치게 의식적ㆍ계산적으로 설정되어 정신이 작품을 통해 단순하게 그려질 수 있는 것처럼 여긴 데 대해 프로이트는 의문을 제기했다. 프로이트는 근대 미술에 관해 잘 알지 못하고 고대와 아시아의 소형 입상을 수집할 정도의 보수적 취향을 가졌지만, 정신과 미술품의 관계를 파악하는 두 경향에 의문을 제기할 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무의식은 자유로울 수 없고 오히려 그 반대이므로 억압에서 자유로운, 적어도 관습에서 자유로운 미술을 제안한다는 것은 정신병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정신분석학적 미술이란 이름 아래 그것을 제안하는 척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자들을 ‘못 말리는 괴짜들’이라고 불렀다.

초현실주의는 다행스럽게도 정치에 무관한 화가들에 의해서 확산되었으며, 빠르게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38년 파리의 전시회에는 14개국이 참가했다. 세계 각지에서 개최된 국제전들은 초현실주의의 국제적 확장을 말해준다. 영국에서는 낭만주의의 재출현으로 인식되어 즉각적인 환영을 받았다. 미국의 초현실주의는 2차 세계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피신한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발생했다. 그들은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갤러리와 줄리앙 레비 갤러리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표현적 추상의 선구자 호앙 미로
바르셀로나 태생의 스페인 화가 호앙 미로는 1912년부터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와 아카데미 갈리에서 공부하며 눈으로 보지 않고 촉감으로만 사물을 그리는 법을 배웠다. 1918년 달마우 갤러리에서 연 첫 개인전에서 카탈루냐 민속을 연상시키는 주제와 야수주의 기법을 결합한 회화를 선보였다. 미로는 1919년에 파리를 방문해 같은 나라 예술가 피카소를 만났고 잠시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와 세련된 원시주의를 혼합한 그림을 그렸다.

미로는 바로셀로나에 있을 때부터 그들의 작품세계에 대해 알고 있던 피카비아와 브르통 중에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에 대해 앙드레 마송의 충고를 구했다. 마송의 작업실은 미로의 작업실 바로 옆에 있었다. 마송은 미로에게 “브르통이 ... 곧 미래다”라고 말해주었다. 미로는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문」에 서명하고 이듬해 이 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카다브르 엑스키’라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집단 놀이 방식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절묘한 송장’이란 뜻의 이 놀이는 아이들의 놀이를 흉내 낸 것으로 각각의 참여자가 다른 사람이 무엇을 그렸는지 알지 못한 채 그려 보탤 수 있도록 연속해서 포개 접은 여러 장의 종이에 그린 드로잉을 일컬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교묘하게 왜곡된 이미지들을 만들었으며, 평생 순수추상과 구상적 요소가 남아 있는 회화에서 논리와 이성의 통제에서 해방된 무의식적인 사고로부터 발생하는 창조력을 중시하는 초현실주의의 기본 원칙에 충실했다.

미로는 1926년 5월에 에른스트와 함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발레단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를 장식해주었는데, 이 일로 두 사람은 브르통에 의해 공식적으로 징계를 받았다. 그 이유는 초현실주의자들에게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부르주아 상업주의와 타협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미로는 평생 순수추상과 구상적 요소가 남아 있는 작품에서 논리와 이성의 통제에서 해방된 무의식적인 사고로부터 발생하는 창조력을 중시하는 초현실주의의 기본 원칙에 충실했다. 또한 전통적인 회화적 묘사와 구성 방식을 거부했고 비논리적인 환상을 즉흥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 사실적인 경험을 덧붙임으로써 더 높은 차원의 사실성을 구현하는 회화를 창조했다. 완숙기의 작품에서는 초현실주의에서 선호했던 피상적인 표현 방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초현실주의의 여러 양식 범주와는 동떨어진 경향을 보여주었다.

선들을 뒤섞어 사용한 앙드레 마송
프랑스 화가 앙드레 마송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전쟁 중의 경험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쳐 인간의 본질과 운명에 대한 심오하고 난해한 호기심, 모든 사물의 상징적 통일에 대한 모호한 신념을 갖게 했다. 그는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로트레아몽 그리고 그 외의 작가들의 저술을 읽었지만, 자신의 신념을 철학으로 발전시킬 만한 지적 훈련이 부족했으므로 회화를 통해 자신의 사고를 통찰하고 표현하는 데 전념했다. 모호한 신념이 인간의 사고와 행위에 일관성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래서 앞뒤가 맞지 않고 전혀 관계가 없는 회화를 말한다면 그런 회화는 두 가지 수준에서 해석이 가능한데, 마송의 회화는 그가 사용한 질감이 감정, 기분 그리고 특별한 분위기를 전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추상화로 보이지만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인물과 대상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이러한 조형적 요소들이 화가의 의식적 통제가 없는 가운데 선으로 이미지를 통해 전달된다.

마송은 초현실주의 시인들이 즐겨 사용한 자동기술에 의한 글쓰기와 대등한 것을 회화에 적용하는 일을 사명처럼 여겼다. 마송의 자동주의 선은 시인들이 행했던 실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의식적인 결정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다시 손질할 수 없도록 몽환상태를 유지하면서 더욱 빠르게 연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초현실주의 혁명』의 첫 호부터 모습을 드러낸 그의 드로잉들은 대부분 반복되는 주제들을 담고 있다. 거기에는 비밀스런 분위기 속에서 신체부위들이 레몬, 석류, 건축물 따위의 다른 요소들과 나란히 등장했다. 시인들이 단어나 구문들을 가지고 그랬던 것처럼 마송은 이것들을 예기치 않은 형태로 조합했다.

마송은 1929~32년 독일과 네덜란드를 여행하고 1933년 뉴욕에서 미로와 공동으로 전시회를 열었으며, 1940년 다시 뉴욕으로 가서 그곳으로 피신한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미국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특히 아슐리 고르키와 함께 추상표현주의의 초기단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마송의 모래회화의 자동주의와 잭슨 폴록이 실행한 액션페인팅 사이의 유사성은 여러 차례 지적되어 왔다. 마송의 회화에 영향을 끼친 것은 자동주의 외에도 그가 받은 초기의 교육과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 고전문학, 신화 등이었다. 이런 영향 하에서 그는 전쟁, 대량학살, 영웅주의와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알지 못한 채 본능에 의지하여 무방비한 상태로 삶의 조수에 휩쓸리는 모티프를 다뤘다.

존재 방식의 문제를 제기한 르네 마그리트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1910년 가족과 함께 샤틀레로 이사한 뒤 그 지방 어린이들과 더불어서 회화와 소묘를 배웠다. 어머니가 자살한 이듬해인 1913년 아버지, 형제 두 명과 함께 샤를루아로 이주했다. 1916년 브뤼셀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여 1918년 가족이 브뤼셀에 정착할 때까지 비정기적으로 아카데미에 재학했다.

마그리트는 브뤼셀에 있을 때 집 뒷마당 창고에서 상업미술 전문 스튜디오를 운영했으며, 파리에서도 때때로 의뢰받은 책 디자인과 광고 업무를 병행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일부 평론가들에게 그의 냉담한 재현 양식은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재현을 구성하는 시각적ㆍ언어적 요소들 간의 관계와 이런 요소들이 대상이나 관념을 환기시키는 상호작용에 대한 마그리트의 지속적인 관심 그리고 이후 그가 그의 주요작품들을 다수로 복제했던 의도 등은 이 같은 상업미술 경력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또한 그가 왜 그의 중요한 회화들을 여러 차례 복제품으로 제작하기를 원했는지도 설명해준다. <이미지의 배반>은 다섯 차례 복제되었고, 한 번은 대형 간판으로 제작되었다. <빛의 제국>(1952)은 열여섯 점의 유화와 일곱 점의 과슈 작품으로 복제되었으며, 1965년에 마그리트는 사베나 항공사의 광고 ‘하늘-새’를 위해 그의 <대가족>(1963)을 표절하기도 했다.

마그리트는 1925년에 관람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특유의 이미지에 도달했다. 데 키리코로부터 받은 영향 가운데 각각의 이미지들이 서술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 같은 감각에 대한 그의 반응이었다. 그는 양식과 이미지, 형태와 내용, 감각과 의미에 있어서 본능적으로 핵심적인 문제에 도달했는데, 이는 미적 문제나 양식의 문제가 아닌 존재 방식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점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느냐는 것이지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아니었다. 그래서 가장 비현실적인 이야기, 수수께끼 같은 상황, 예기치 못한 만남 등과 같은 주제를 단순하면서도 직접적인 대중적 양식으로 표현했다. 그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을 한 화면에 배치하여 자주 머리에 떠오르지만 명학하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으며, 순수한 시각적 충격을 자아내는 솜씨로 원근법에 혼란을 일으키도록 조작하면서 초현실주의자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또한 그는 비현실적인 꿈의 공간에 그럴 듯한 현실감을 부여할 수 있었다. 도상에 있어서도 그가 집착한 일련의 이미지들은 일상적이나 부조리한 배경 속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는 실재 풍경, 실내와 실외, 낮과 밤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주제를 반복해서 사용했다.

마그리트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초현실주의자들조차 그의 회화 양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그의 사실주의 양식이 자동주의에 의한 초현실주의자 회화 양식과는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다. 마그리트가 1927년 파리에 도착했을 때 자동주의를 선호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브르통이 마그리트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그의 능력을 인정한 것은 1930년에서였다.

마그리트의 목적은 논리와 회화가 보여주는 것과의 대립을 만드는 것이다. 그의 회화는 구상이지만, 미술에 있어서의 재현의 법칙을 끊임없이 공격한다. 관람자는 심사숙고하는 태도를 통해서만 그의 불가사의한 수수께끼 게임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접근한다고 해서 수수께끼를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성이 단지 그 수수께끼를 감지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그의 이미지는 철저하게 시적이다.

마그리트는 1932년과 1936년 두 번에 걸쳐 공산당에 입당했지만, 그의 사회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브뤼셀에서 지내면서 언제 있을지 모르는 공습과 자신의 ‘퇴폐한’ 작품에 대한 공격을 끊임없이 두려워했다. 이것이 1945년 이후 그의 회화 양식을 바꾸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는 르누아르 양식의 밝고 아이러니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의 회화가 거칠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세련되지 못하다고 비난했다.

실존주의 인생관을 표현한 알베르토 자코메티
스위스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초현실주의자들과 어울리면서 초현실주의에 대해 “무엇인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유일한 운동”이라고 했다. 그는 브르통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1934년경부터 상상적인 초현실주의적 구성물을 제작함으로써 현실세계로부터 너무 동떨어지게 되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35년에는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관계를 극적으로 끊고 모델과 실재의 재현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10년 가까이 실용적인 지각 현상학에 매달렸는데, 이는 매우 다른 맥락이지만 인상주의자들이 한 세기 전에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각에 대한 전통적이고 익숙한 관습과 상관없이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실재를 재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특히 멀리서 볼 때처럼 머리와 인물상을 작게 만듦으로써 절대적 크기와 관련해 조형물에 ‘거리’ 개념을 도입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을 때 사물의 모습에 변화를 일으키는 시각법칙에 대한 실제적 탐구는 1940년대를 거쳐 1947년경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관람자가 그의 조형물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서든 상관없이 5m나 10m, 또는 그 이상으로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글에 따르면 “자코메티는 조각상에 어떤 상상의 불가분한 공간을 돌려주었다. 그는 멀리 떨어진 인간을 보이는 대로 조형화하려 한 최초의 인물이 되고자 했다.” 사르트르의 주장에 따르면 자코메티의 각각의 형상은 “하나의 상호 주관적 환경 속에서 인간적인 거리를 유지한 채 나타나는 인간을 보여준다. 인간은 미리 존재해서 나중에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실존하는 본질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코메티의 형상이 지닌 고립성과 부동성은 상호주관성 자체가 숨쉬기 힘든 분리나 고독, 심지어 공포로 보였다.

자코메티는 1947~51년경에 길게 늘어지고 해골같이 앙상한 인물상 양식을 전개했으며 실존주의 인생관을 표현한 이런 조형물로 유명해졌다. 이런 인물상들에서 조형물은 하나의 미적 현존, 즉 지각된 실재와 동일한 미적 실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한 이 성숙된 양식은 그가 입체주의, 구성주의, 초현실주의의 시기를 거치고 난 이후 현상계를 지각하는 보다 새롭고 직접적인 방법을 탐구한 결과였다.

망상의 그림을 그린 살바도르 달리
데 키리코와 카르라의 형이상학 회화의 영향을 받은 살바도르 달리는 라파엘로전파와 18세기 이탈리아계 프랑스 화가 메소니에와 같은 19세기 화가들의 섬세한 사실주의를 동시에 추종했다. 자서전 『살바도르 달리의 숨겨진 삶』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격렬한 히스테리 발작으로 점철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마드리드 미술학교에서 정학을 받았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잠시 감옥에 보내졌으며, 1926년 기이한 행동으로 인해 결국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달리는 전 생애에 걸쳐서 기괴함을 추구했고 과대 망상적인 과시욕을 보여주었으며, 이 모든 것이 바로 자신의 창조력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달리는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 기교를 받아들여 보다 긍정적인 방법으로 변형시켰으며 이를 ‘편집증적 비평 방법’으로 불렀다. 그에 따르면 예술가는 편집증 증상의 일종인 망상을 개발해야 하며 동시에 이성과 의지의 조절이 의도적으로 중지되었음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미술이나 시의 창작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어야 한다. 그는 종종 라파엘로전파와 연결되는 섬세한 방법을 사용하여 환각적 현실감을 창출해냈는데, 이것은 때때로 마술적 사실주의Magic Realism로 불리었으며 그가 묘사한 비현실적인 꿈의 공간, 이미지의 기이하고 환각적인 측면과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반쯤 열린 서랍이 달려 있는 사람의 형상, 왁스로 만들어져 햇빛에 녹은 것처럼 구부러지고 늘어진 시계와 같은 이미지들을 선호하여 반복했다. 이런 회화는 카탈루냐 지방의 황량한 풍경을 배경으로 섬세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었다. 이런 환각적 이미지와 미술적 사실주의가 이루는 대조를 통해 그의 회화는 미술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자동주의의 주된 방식으로 사진을 제안하면서 자신의 유화의 목표를 손으로 그려낸 사진으로 설명했다.

달리는 1940년에 미국으로 가서 15년 동안 체류하다가 1955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있는 동안에는 작품 활동보다는 주로 자신을 널리 알리는 데 주력했다.

비현실적인 꿈의 풍경을 그린 이브 탕기
이브 탕기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23년 폴 기욤의 갤러리에서 조르조 데 키리코의 회화를 본 후 깊은 감동을 받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초기 작품들에서는 데 키리코의 공간 표현기법에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1927년부터 꿈과 같은 이미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브르통과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참가하고 선언문에도 서명했다.

탕기의 회화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수중공간 속에서 형상, 손, 그리고 구성물들은 전혀 예기치 않은 관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들은 호앙 미로의 회화에 등장하는 것들과 유사한 선 그리고 형상들이 주를 이룬다. 마송과 마찬가지로 탕기 또한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를 통해 혼돈스럽거나 꿈처럼 보이는 개인적 이미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그의 드로잉에서 뚜렷하게 나타났으나 캔버스 작업에서는 서서히 진행되었다.

인형과 마네킹을 사용한 한스 벨머
폴란드 예술가 한스 벨머는 인형과 마네킹을 사용하면서 일대 변화를 겪었다. 그는 자신의 강박관념에 초점을 맞춘 인형의 다양한 변형에 몰두했다. 그의 인형 대부분은 프로이트가 묘사한 ‘두려운 낯설음’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들로 다양한 무대를 배경으로 그가 찍은 사진으로 소개되었다. 이는 그가 그의 작품을 다양한 자세로 조작하여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대수롭지 않은 일들은 비의도적으로 반복됨으로써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런 반복으로 인해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면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을 그 무엇을 숙명적이고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벨머의 작품은 성욕과 사진조작의 결합을 보여주었다. 작품 속의 모델이 확실히 사춘기 이전의 소녀이며 작품의 구조상 그 소녀가 성적인 것과 관련 있다는 점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도착적인 인성과 물신적인 도착 사이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는 동시에 남성적 잣대와 여성 신체의 대상화에 대한 문제를 일으켰다. 인형 자체로도 이런 경험과 연계될 수밖에 없었지만 벨머 자신 또한 관람자 앞에 인형이 등장하는 방식이 꿈이나 브르통이 말한 객관적 우연 작용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최대한 활용했다. 뿐만 아니라 사진에서 그는 광학적으로 중복하기를 통해 인형을 거세 공포의 표상으로 제시했다. 발기한 여성의 형상은 남근 모습으로 다시 중복 재연되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신경증 환자는 객관적 우연에서 통상적으로 실현되어버리고 말 불길한 예감을 갖는다.

벨머는 베를린의 카이저 프리드리히미술관에서 알브레히트 뒤러 시대에 만들어진 관절인형을 보고 영감을 받아 인형에 관절을 갖추어주었다. 벨머의 주요 아이디어는 신체를 에로틱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독특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몸은 그 부조리한 왜곡 속에서도 늘 기본적인 성적 패턴을 반영한다. 그의 작품은 기존의 여성 이미지에 대한 풍자도 아니었으며, 페미니즘적 비평도 아니었다.

작품
<농장 The Farm>(1921~22)은 미로가 가장 관심을 보인 사물과 생물을 목록화한 것으로 후기 작품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상징의 원형이다. 새가 앉아 있는 횃대의 역할을 하는 사다리는 그의 강박적인 기호 중 하나인 탈출의 사다리로 진전된다. <탈출의 사다리 The Ladder of Escape>에서 보듯 사다리는 촉각과 비촉각을 연결하는 수단이 된다. 그는 별과 동물, 카탈루냐 지방 농부의 모자, 파이프, 남성을 상징하는 관 모양의 형태와 여성의 성적 상징인 아몬드 형태 등의 기호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그의 기호들은 극단적으로 간결해지고 제스처가 화면의 전체적인 구성을 결정했다. 그는 얇게 펴 바른 물감 위에 장대한 서체의 우아함을 지닌 최소의 기호들을 그려 넣었다.

<카탈루냐 풍경(사냥꾼) Catalan Landscape(The Hunter)>(1923~24)은 독창적인 유머를 보여준 것으로 수수께끼 같은 몇몇 기호는 이해가 가능하지만 비밀에 싸인 것들도 있다. 특히 생각을 환상적인 형태로 나타낸 경우는 비교적 이해가 수월하다. 짙은 수염, 날카로운 눈, 주의 깊게 기울이고 있는 큰 귀는 사냥꾼의 수염 난 얼굴임을 알 수 있다. 오른팔은 죽은 새를 들고 있고 왼팔은 기다란 원추형을 들고 있는데, 끝에서 화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총인 듯하다. 삼각형 물고기에 꼬리지느러미가 달려 있으며, 오른편 토끼가 내민 혀는 날개 달린 곤충을 향해 뻗어 있다. 오른편 하단에는 카탈루냐 전통 민속무용인 사르다나Sardana의 첫 네 글자가 적혀 있다. 이 모든 것을 햇빛 가득한 겨울 하늘과 따뜻한 적도 사이에 살고 있는 카탈루냐 농민의 목가적 즐거움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작품은 미로가 독자적인 기호언어를 창조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준 예라 하겠다. 전체의 구성을 보완하는 것이 배경의 통일성이다.

<물고기들의 전투>(1926)에서 우리는 자동주의 선에 의한 물고기들이 마주한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열정을 동물적 폭력으로 은유한 회화이다. 마송의 회화에는 선들이 뒤섞이는 것이 보통이어서 일견에 우연에 의해 그려진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서도 통제가 없는 임의적인 창작과정으로 인해 관람자의 눈앞에서 구성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화면의 질감은 모래 뿌리기로 인해 더욱 고조되었다. 물감 대신 풀을 이용하여 캔버스 위에 자동주의 그림을 그린 후 채색된 모래를 뿌려 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방식은 지속되었다. 마송은 1929년에 브르통과 말다툼한 뒤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추방되었다.

마그리트는 장난기 있는 해학성으로 관람자의 눈을 사로잡았는데, <이미지의 배반>(1929)에서의 파이프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는 처음에 부조리해보이지만 틀린 문장이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의 환영인 회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보는 것과 읽는 것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동요는 관례상 분리된 이 두 가지 작용이 동시 발생한 결과이다. 파이프 연작은 마그리트의 언어-회화word-picture 중 하나다.

마그리트의 회화 대부분에는 파이프 연작에서처럼 동일한 종류의 재치문답이 등장한다. 어떤 사물이나 상황이 반드시 물리적 법칙에 따라 묘사되어야 할 이유가 없으며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사물은 사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믿었다. 때때로 그는 생물체와 무생물체의 경계를 흐리게 함으로써 관람자를 놀라게 한다. <붉은 모델 II>(1937)에서 보듯 한 쌍의 장화가 사람의 발로 바뀐다. <투시도: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인>(1949)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회화를 모사하면서 원래 인물이 있던 자리에 관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는 당시 회화 속에 있던 모델이 지금은 죽었기 때문이다

달리와 브르통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낸 <매달린 공 Suspended Ball>(1930~31)은 새장처럼 생긴 사각형 틀 안에 모로 누운 쐐기와, 사각형 틀에 매달린 공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의도적으로 불만족스럽고 불안정한 운동을 만들어냈다. 공은 아래의 초승달 모양의 쐐기 위에서 애무하듯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며, 이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암암리에 사용한 성적 표현과 일치했다. 쐐기와 공에 대한 성적 정체성은 불확정적인데 여성의 외음부처럼 생긴 쐐기는 남근 모양의 칼과 같으며, 남성의 역할을 담당하는 공의 쪼개진 자국은 보기에 따라서 여성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형태를 흩트리기보다는 범주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경계를 제거한 무정형은 범주를 없앤다는 점에서 매우 구조적이다.

<새벽 4시의 궁전>(1932~33)은 가장 문학적이고 복잡한 조형물로 작은 규모의 구성물이다. 이것은 나무 자투리 및 천사와 현을 조립한 것으로 자코메티가 사랑에 빠진 여인과 몇 달을 지낸 경험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파편들을 섬뜩하게 조합하기도 했는데, <목이 잘린 여인>(1932), <허공을 붙잡은 손, 혹은 보이지 않는 오브제>(1934) 등이 있다. 그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육체적 욕망으로 축소하면서 남성과 여성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각자의 성기를 의인화했다. 폭력적 표현으로 나타난 <목이 잘린 여인>에서 커다란 곤충 같은 여성은 죽어서 바닥에 방치되어 있다. 지나치게 길고 가는 팔다리는 거미 같으며, 커다란 척추와 흉곽은 딱정벌레의 껍질을 상기하게 하며, 작은 머리는 벌레를 연상시킨다. 가는 허리 위로 곡선을 그리는 젖가슴만이 여성의 몸이다.

달리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기억의 영속성>(1931)에서도 환영적인 사물들이 황량한 해변을 가로질러 배치되어 있다. 배경의 길게 뻗은 해안은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축 늘어진 시계는 훗날 달리를 대표하는 특징적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데 키리코의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상자 위의 시계는 개미들로 뒤덮였는데, 달리는 개미를 죽음의 상징으로 보았다. 이는 죽은 도마뱀의 부패한 몸을 소멸시키는 개미떼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단 중앙의 성적 연관성이 짙은 얼굴 형상은 앞서 그린 <위대한 수음자>(1929)에서 기인하며, 바위 위에 걸쳐진 이것은 달리의 자화상이자 바위 무더기의 윤곽에 기초하고 있다. 달리의 회화에 등장하는 구성물은 물리적 특성뿐만 아니라 색과 일관성도 파괴되어 있다.

달리는 <기억의 영속성>의 기원에 관해 설명했다. 스페인 북부의 리가트 항구 마을 근처의 연안 풍경을 그리던 시절에 그는 그 풍경이 “어떤 놀라운 이미지와 아이디어의 배경이 될 것”임을 간파했으나 좀처럼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오후 아내 갈라가 친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고, 그는 두통에 시달리며 집안에 남아 있었다. 갈라는 엘뤼아르의 아내였으나 달리와 사랑에 빠져 그의 아내가 되었다. 달리는 잘 숙성된 까망베르 치즈로 식사를 마치고 혼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편두통으로 인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급히 팔레트를 준비하고 미친놈처럼 그림을 그려댔지. 두 시간 뒤 갈라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회화는 이미 완성된 상태였어!”라고 회상했다.

작품의 원제는 <부드러운 시계>였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 달리는 ‘극도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그려낼 방법에 몰두해 있었다. 이에 대한 집착은 성적 문제와 관련이 있고, 많은 평론가들은 발기불능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석했다. 남성 성기 모양의 죽은 올리브나무 그루터기에서 튀어나온 가지 위에 걸려 축 늘어진 시계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게다가 또 다른 시계는 땅 위에 떨어진, 입도 없이 해괴하게 생긴 머리 위에 걸쳐져 있다. 그는 극도의 부드러움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심리 상태와 관련시켰다.

탕기의 회화는 매우 개성적이다. 반은 유기적이고 반은 기계적인 모습이지만 관람자의 눈에는 결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정형의 사물이나 존재가 사는 기괴한 추상풍경을 그렸다. <숙녀의 부재>(1942)에서 보듯 그는 바다괴물과 선사 시대의 유물, 혹은 암석 등 명확하지 않은 물체의 모습을 비현실적인 꿈의 풍경 같은 해변 위에 흩어놓았다. 그리고 다른 초현실주의자들보다 성공적으로 꿈의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불어넣어 현실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충격을 표현했다. 상징주의나 심리학적 장식이 없는 고요하고 시간을 초월한 꿈의 풍경화에서 그는 초현실주의의 몽상적인 면을 자연발생적으로 가장 잘 나타냈다. 그가 묘사하는 세계는 달리의 세계와 유사하지만, 달리가 정밀한 환상을 통해 개인적 강박관념을 표현하는 데 반해 탕기는 마술적인 냉랭한 분위기와 잠재적인 위협을 통해 초연하고 냉정한 면을 보여준다. 관람자는 악몽 같은 환상으로 나타나는 그의 회화에서 막연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의 회화의 특징은 우아한 것과 추한 것을 별난 아름다움으로 전환시키는 점이다.

<인형>(1932/45)은 목재에 그림을 그리고, 머리카락을 씌우고 양말과 신발을 신긴 작품으로 초현실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에 속하는 가학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분위기의 성적 망상에 대한 기록이다. 뒤틀린 토르소들이 외설스럽게 노출된 채 삼위일체를 이룬다. 성폭력의 환상을 여과 없이 드러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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