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8

Realism, Social Realism, Socialist Realism
New Realism, Surrealism, Hyper-realism(극사실주의, Superrealism, Photorealism)

귀스타브 쿠르베의 신사실주의New Realism는 현실의 인간을 이상화한 이전의 사실주의와는 달리 가공하지 않은 사실적 묘사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쿠르베에게 사실주의란 인도주의 미술humanitarian art이었으며, 새로운 미술의 탄생을 의미했다. 화가의 주관적 느낌을 무시하고 사물을 보이는 대로 재현함으로써 회화 자체가 사실임을 강조했다. 농민의 시적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의 그림을 그린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와 달리 쿠르베는 화가의 감정을 회화에서 배제했으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에 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재현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주제가 추하거나 저속하더라도 장엄함, 혹은 위엄을 불어넣었으므로 오늘날 우리는 그의 회화에서 당대 프랑스의 생생한 현실을 사진 보듯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회화의 목적을 더 이상 이야기를 전하거나, 성서의 내용, 또는 역사적 사건들을 교육적인 목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나 일시적 환경의 변화를 기록하는 것으로 보았다. 아름다움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에 화가가 역사나 전설에서 주제를 찾을 필요가 없고, 바로 눈앞에 전개되는 대상에서 찾아지는 것임을 의미했다. 목적론적 해석을 거부하고 현실을 편견 없이 경험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쿠르베의 회화에서 구현되었다. 이는 이상주의에 대한 반동 및 낭만주의의 인위성을 거부하는 태도였다.

Hyper-realism(극사실주의, Superrealism, Photorealism)은 1960년대 후반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유행한 회화 양식으로 사물을 세부까지 섬세하고 비개성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으로 조각까지 포함된다. 이런 양식으로 작업한 예술가 중에는 사진, 질이 좋은 이미지 원색 인쇄물을 재료로 사용하고 때때로 캔버스에 컬러슬라이드를 비추면서 작업한 사람도 있다. 팝아트와 마찬가지로 슈퍼리얼리즘도 외부에 대한 직접적 관찰이 아니라 사진이나 인쇄물에 의존하는 구상 양식이었다. 의도적으로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과 유사한 효과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세부까지 정확하게 묘사하며 그 규모는 종종 크게 확장된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눈부신 성공을 거둔 극사실주의의 직접적인 선조는 팝아트이지만, 대부분의 극사실주의 회화에는 팝아트에서 볼 수 있는 유머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차갑고 비개성적인 경향을 띤다. 작품의 소재도 다수의 반사광을 갖는 사물처럼 단지 기술적으로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멕시코 회화ㆍ사회적 사실주의ㆍ사회주의적 사실주의
1910년대와 1920년대 독재가 끝날 무렵에 등장한 멕시코 벽화 운동은 1920년대와 1930년대 국가가 지원한 이데올로기 중심의 아방가르드 운동이었으며, 그 주요 목표는 스페인의 식민지 이전의 과거를 토대로 멕시코의 정체성을 재창조하고 재천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멕시코 벽화는 사회적·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데올로기적이며 교훈적이고 의도적으로 혁명정부의 이상과 염원에 대한 선전을 도운 것이었다.

호세 클레멘테 오로즈코, 디에고 마리아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처럼 국경을 초월해 명성을 얻은 가장 뛰어나고 독자적 화가들조차도 혁명의 이상을 추진하고 멕시코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둔 새 문화 이념을 제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재능을 바쳤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식민지 이전의 미술 형식을 기초로 멕시코의 영웅과 민중을 다룬 민족주의적ㆍ사회적 사실주의 방식을 채택했다. 토착 전통과 민중의 역사에 대한 존경심이 그들의 회화에 생기를 불어넣었지만, 민중적이면서도 전위적인 새로운 민족 회화를 창조하기를 바랐으므로 유럽의 모더니즘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대다수의 문맹자들과 회화를 통해 혁명의 이상을 나누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멕시코에서 벽화는 혁명을 문화적으로 표현하는 주요 수단이었으며 이에 따라 도상과 장르가 결정되었다. 2차 세계대전까지는 벽화와 그래픽이 압도적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미국에 머물던 호세 클레멘테 오로즈코가 1917~19년에 멕시코로 돌아오고 디에고 리베라는 1921년에,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는 1922년에 유럽에서 귀국함으로써 멕시코 회화는 절정기를 맞았다. 시케이로스는 1921년에 이젤화를 버리고 벽화를 채택해야 하며, 회화에서 주제와 사조가 양식과 제작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원칙을 내세운 유명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시케이로스는 파리에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당시 멕시코의 상황을 반영할 새로운 기념비적인 미술의 필요성에 대해 토론했다. 1922년 멕시코로 돌아온 뒤 공산당에 가입하고 ‘기술자·화가·조각가 연합’을 조직하는 한편 벽화 운동을 창시한 화가들의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규정하는 새로운 벽화가 선언문을 1924년 잡지에 게재했다. 이 선언문은 벽화가 대부분의 서명을 받은 것으로 소비에트 구성주의자들이 사용한 사회적ㆍ정치적ㆍ미학적 원칙을 혁명적 이념의 기틀로 삼았다. 선언문은 벽화 운동의 원칙을 구체화하고 이를 공적ㆍ이데올로기적이고 교훈적인 회화로 규정했다. 벽화가들은 대체로 구상적이며 사회적 사실주의 양식으로 작업했지만, 개인적인 표현형식을 발전시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리베라는 1915년에 진보주의자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독재자 프로피리오 디아즈에 대한 반란을 이끌면서 1910년에 시작된 멕시코 농민혁명을 자신의 회화 주제로 삼았다. 멕시코 혁명은 대토지 소유자와 외국자본의 이익을 대변한 디아즈의 독재체제를 타도하고 반식민지적 사회구조의 변혁을 목표로 각지에서 농민반란, 노동자의 파업, 급진파 지식인의 무장투쟁으로 일어났다. 마데로는 디아즈를 권좌에서 끌어내고 대통령이 되었다. 리베라는 멕시코 남부에서 산적 출신의  북부농민군의 지도자 판초 비야와 멕시코의 국민적 영웅 에밀리아노 사파타 살라사르를 모델로 일련의 회화를 제작했다.

판초 비야는 북부에서 군대를 끌어 모아 정부군 요새들을 습격했고, 남부에서는 사파타 살라사르가 지방의 카시크cacique(농촌지역의 정계 거물)들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리하여 1911년 봄 마침내 혁명군이 시우다드후아레스를 함락했으며, 디아즈를 축출하고 마데로를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마데로 정부는 처음부터 불안했다. 사파타 살라사르는 마데로가 토지를 빼앗긴 인디언들에게 땅을 즉시 되돌려주지 않자 분개해 그에게 등을 돌렸다. 오로즈코도 처음에는 마데로를 지지했으나, 느린 개혁에 불만을 품고 북부에서 혁명을 이끌었다. 미국 정부까지도 새로운 대통령이 반란집단에게 너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우려하고 멕시코에서 벌어진 내란으로 인해 미국이 지니고 있던 사업적 이익이 위협받고 있는 것을 염려해 마데로에게 등을 돌렸다. 그 후 멕시코에서는 일련의 유혈이 난무하는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다.

리베라는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의 회화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창시한 평면적이고 단순하며 장식적인 형태를 띤 양식으로 멕시코의 사회사와 정치사를 묘사한 것으로 미국 화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인물과 사건이 빽빽하게 들어찬 구도로 전통 주제와 근대의 주제 모두를 다룸으로써 관람자가 멕시코의 유산에 긍지를 갖게 만들었으며, 사회주의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것을 주창했다. 그는 단순화된 형태를 보여주는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양식으로 작업했으며, 양식화된 인물뿐 아니라 사실적이며 알아볼 수 있는 등장인물을 이용해 내러티브를 전달했다.

일곱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게 된 프리다 칼로는 열네 살 때 명문 국립 예비학교에 입학해 서클활동을 하면서 독서를 즐겨 했고, 서클 활동을 통해 남자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정을 실현해나가는 동지적 성실함을 배우게 되었다. 이 서클에서 그녀의 첫사랑이자 오랜 친구가 되는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를 만났으며, 1925년 열여덟 살 때 그와 함께 탄 버스가 건널목에서 열차와 충돌해 고메스 아리아스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으나, 칼로는 척추,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는 등 이 사고는 그녀의 삶뿐만 아니라 회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요양기간 동안에 자화상과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교통사고로 인한 정신적ㆍ육체적 고통과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모델로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주제로 선호하게 했으므로 회화는 그녀에게 자서전이나 다름없었다.

사회적 의미를 지닌 상황 사회적 사실주의
미국에서 일어난 사회적 사실주의 운동은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보다는 사회에 우월적인 의의를 부여하는 것으로 사회적 의미를 지닌 상황, 사건, 혹은 사물을 자연주의 방식으로 묘사하는 화파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사실주의는 주로 도시생활을 다룬 미국의 애시캔파Ash Can School와 도시생활 외에도 산업의 현장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미국 정경회화American Scene Painting에 적용된다. 애시캔파는 1900년부터 10년 동안 번성한 미국 사실주의 화파로 로버트 헨라이가 화파 결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가 결성한 디 에이트 멤버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디 에이트The Eight란 1907년 로버트 헨라이가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와 결별한 뒤 독자 전시회를 가질 목적으로 일단의 미국 화가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그룹으로 중심인물은 헨라이 외에 ‘뉴욕 사실주의’ 그룹에 속하는 화가들로 그들은 헨라이가 필라델피아에서 활동할 때부터 그를 따랐다. 
 

그들 가운데 네 명은 1857년에 간행된『필라델피아 프레스 Philadelphia Press』지의 미술부 기자로 활동했다. 인쇄물에 사진이 거의 사용되지 않던 당시에 현장을 재빨리 스케치하는 작업이 필요했는데, 이는 날카로운 시각과 신속한 소묘능력 및 세부에 대한 정확한 기억력을 요구하고 그 결과 일상적 생활풍경에 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이런 것들이 훗날 애시캔파로 알려지게 된 ‘뉴욕 사실주의’의 기본 특징이 되었다. 디 에이트는 화풍이나 기법에서 공통된 특징이 거의 없고 당대의 아카데믹한 회화 경향과도 그들 자신들이 믿고 있던 것만큼이나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을 결속시킨 공통된 특성은 일상생활에서 포착한 장면과 세부, 그리고 평범한 사람의 하루하루를 보여주는 진부한 물건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디 에이트 멤버들이 주로 다룬 주제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가들이 다룬 주제와 많은 부분 일치했다.

지방주의Regionalism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지역적 특성을 강조하며 미국의 고유 전통과 문화를 추구한 문학 및 그러한 경향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 미국의 정경회화 중 특히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두드러지게 활동한 화가들의 회화 경향을 말한다. 이들은 미국 중서부와 서남부 지방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앨프레드 스티글리츠 주변의 화단과 아모리쇼를 통해 미국에 도입된 유럽의 혁신적인 양식들을 거부함으로써 순수 미국 회화를 확립하려는 애국주의적인 욕구에서 출발했다. 국가주의적 충동을 드러낸 지방주의는 급진적이라기보다는 보수적이었다.

에드워드 호퍼는 1900~06년에 뉴욕 체이스 미술학교에서 로버트 헨라이의 가르침을 받았고, 1906~10년 세 차례에 걸쳐 유럽을 여행했지만, 그의 사실주의 양식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스티글리츠 서클이나 아모리쇼 같은 근대 운동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1962년에는 애시캔파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애시캔파는 그가 흥미를 갖지 않았던 사회적 경향을 띤 반면 자신의 회화에는 전혀 그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이후 그의 회화는 도시생활의 고독, 공허함, 정체감을 표현하는 미국 정경회화의 중요한 예로 간주되었다. 그의 회화에 나타나는 모호성은 미학적 개방성을 드러내지만, 그의 회화는 미국 근대 미술의 절정기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미국적 풍경에 기조를 두려는 태도는 호퍼에게서만 관찰되는 현상은 아니다. 그의 회화에서 종종 나타나는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이나 자연을 포착하는 방식은 유럽 모더니즘과 미국 모더니즘 사이에 간격만이 존재할 뿐 유럽 낭만주의 화가들이 문명화 과정의 정체나 인간이 자연에 대해 느끼는 소외감을 표현하려고 창문 너머의 풍경을 자주 재현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정밀주의Precisionism는 1915년경 미국에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뚜렷하고 명확한 처리방식을 채택하며, 분명한 윤곽선과 견고한 음영, 매끄럽고 비개성인 표면 등을 선호했기 때문에 ‘흠 없는Immaculate’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미국의 화가들은 산업화와 미국의 현대화 풍경을 날카로운 기하학적 구성으로 정밀하게 묘사했다. 그들은 평범하고 산업적 주제에 서사적, 혹은 영웅적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 상당히 세련된 양식으로 비인간화를 추구했다. 정밀주의자들은 결코 순수추상을 제안한 적이 없으며 심지어는 세계를 보다 정밀하게 재현하기 위해 순수추상의 단순한 형태를 사용했다. 이런 이유에서 정밀주의는 종종 ‘입체파의 사실주의Cubist Realism’로 불리었다. 정밀주의자들의 목표는 주제를 식별할 수 있게 유지하면서 입체주의에 근거한 통일된 추상디자인을 성취하는 것이었고, 그 배후에 근대적 기법을 이용하여 동시대 미국의 산업현장과 과학기술적 풍경에 서사시적 장엄함을 부여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사회주의적 상황을 찬양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소비에트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세계적으로 강세를 보이던 다양한 반모더니즘 경향에서 하나의 특수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런 반모더니즘의 경향으로 프랑스의 고전적인 질서로의 복귀rappel à l'orde, 독일의 신즉물주의, 제3국의 나치미술, 무솔리니의 파시즘적 신고전주의, 그리고 다양한 형식의 미국의 사회적 사실주의 등이 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를 통해 대규모 선전선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틀뿐만 아니라 실용적 요구까지 제공했다. 스탈린은 “예술가가 삶을 정확히 묘사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그는 무엇이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관찰하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사회주의 미술이 될 것이며,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될 것이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선전선동의 유산과 1920년대의 기록화 프로젝트를 합치고 여기에 영웅적 서사를 전근대적인 19세기 장르화의 형식으로 혼합하려고 했다. 프랑스의 화가들 자크 루이 다비드와 외젠 들라크루아, 오노레 도미에, 프랑수아 밀레, 귀스타브 쿠르베,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아돌프 멘젤의 회화는 혁명적 열기의 회화, 인민의 회화로 추앙되었으며,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특히 세잔의 회화는 논쟁의 주제가 되었는데, 그것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기만적인 도상학과 엉터리 양식적 동일성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아반영적인 비판 프로젝트로서의 회화 개념은 사라져야 만했다.

작품
호세 클레멘테 오로즈코는 1936~39년 과달라하라에 위치한 과달라하라대학, 정부 공관, 호스피시오 카바나스 교회에 그의 벽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을 그렸다. 그는 선과 악에 대한 개인적인 심판보다 인류가 겪는 물질적ㆍ신비적 갈등을 표현했다. 소용돌이치는 불길에 휩싸여 불을 통해 정화되는 인간을 소재로 한 프레스코화 <인간의 네 양상>(1936)에 그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호스피시오 카바나스Hospicio Cabañas 교회는 건축가이자 조각가 마누엘 톨사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한 것으로 고아, 노인, 심신장애자, 만성병자들을 돌보고 쉼터를 제공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791년 과달라하라 주교의 명령에 따라 병원과 유아원, 사무소로 쓰일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1796년 과달라하라의 파견관으로 지명된 후앙 루이즈 데 카바나스의 이름을 따서 교회의 명칭이 만들어졌으며, 그녀는 후에 마누엘 톨사와 결혼했다. 이 교회는 사각형으로 크기가 가로세로 164-145m이고, 높이는 7.5m이다. 카바나스가 1823년 타계한 후에도 건축은 1829년까지 계속되었다. 내부의 공간은 순수 기하학적 형태였고, 그 공간을 오로즈코가 1936~39년에 격렬한 장면들로 장식했다. 이 교회는 19세가 중반 이후부터 병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오로즈코는 1930~31년에 뉴욕의 뉴스쿨를 위해, 1932~34년에는 그가 프레스코 기법을 가르친 적이 있는 뉴햄프셔의 하노버 소재 다트머스대학을 위해, 1939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 소재 포모나대학을 위해 벽화 작업을 했다.

시케이로스는 1925~30년에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조합 활동과 위원회 활동에 전념하며, 1930년에는 정치 활동으로 투옥되었고, 그 뒤에도 수차례 투옥되었으며, 1931년에는 가택연금 되었다. 그는 다양한 기법과 재료를 실험하면서 여러 각도를 고려하여 개선한 복합 원근법과 왜곡을 이용해 환영의 장치들을 만들고 이를 포토몽타주 기법과 함께 벽화에 응용함으로써 노동자 투쟁의 가공되지 않은 힘을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가운데 메시지가 주는 충격을 확대시킬 수 있었다. 이런 기법은 멕시코시티에 있는 전력공사 빌딩에 그린 <부르주아지의 초상화>(세부, 1939)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것은 중상층 계급에 반대하는 노골적인 정치선전으로 자유·평등·박애에 바쳐진 그들의 신전이 화염에 휩싸인 장면이다.

리베라는 멕시코시티 국립 예비학교의 볼리바르 원형극장에 주문받은 그의 첫 납화 벽화 <창조>(1922~23)를 그렸다.

프리다 칼로는 1928년에 자신보다 나이가 두 배 많고 체구가 두 배나 되는 디에고 마리아 리베라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종종 긴장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여러 차례의 별거, 이혼과 재혼, 그리고 양쪽 모두의 간통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칼로의 연인 중 하나는 트로츠키로 그는 1940년 멕시코시티의 코요아칸에 있는 칼로의 집에 머무는 동안 암살당했다.

칼로는 거의 독학으로 화가가 되었다. 리베라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멕시코의 민속미술로부터 받은 영향이 더 컸고, 그녀의 회화는 풍부한 색과 나이브한 열정을 지녔으며, 초현실주의의 환상이 가미되어 있다. 1939년 르누와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하여 칸딘스키, 피카소, 뒤샹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았지만, 그녀 자신은 자신의 회화가 유럽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멕시코 전통 회화에 뿌리를 둔 것이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밝혔다. 앙드레 브르통은 1939년 파리에서 칼로의 전시회를 개최했지만, 자신을 초현실주의자로 여기지 않고 “나는 결코 나의 꿈을 그린 적이 없다. 나는 나의 현실을 그릴 뿐이다”라고 했다.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고통에 대한 칼로의 회화는 자아도취적이면서도 악몽 같지만 또한 자신의 성격처럼 격렬하며 화려하다. 리베라는 그녀의 회화를 “강철처럼 신랄하고 부드러우며 단단하고, 나비의 날개처럼 섬세하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미소처럼 사랑스럽고, 인생의 쓴맛처럼 심오하면서 잔인하다”고 했다.

세 번에 걸친 유산과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고통이 칼로로 하여금 그녀의 모습을 탯줄과 줄, 혹은 뿌리 같은 오브제와 연결되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다친 사슴>(1946)에서의 그녀의 모습은 비록 여러 개의 화살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매우 투명하며 강렬한 빛을 발하는데, 이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의 고통이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보여준다.

1940년 1월부터 2월까지 멕시코시티에서 ‘초현실주의 국제 전시회’가 열렸으며, 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초현실주의 운동으로 조직된 최초의 전시회였다. 전시회에는 달리, 델보, 아르프, 에른스트, 마송, 미로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었고, 칼로는 <두 명의 프리다>(1939)를 출품했다. 칼로는 뉴욕에서도 성공적인 전시회를 열었으나 생전에는 남편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타계한 후 점차 유명해져 페미니즘의 영웅으로 부각되었으며, 엄청난 신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정신력으로 작품 활동과 좌익정치 활동을 계속해나간 점 등이 추앙받고 있다.

로버트 헨라이는 토머스 에이킨스의 사실적 사실주의 회화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헨라이는 1888~91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했고, 네덜란드의 뛰어난 초상화가 프란스 할스의 철저한 신봉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미술이 아카데미즘이라는 상아탑을 버리고 민중의 보편적 관심이 있는 일상생활을 담은 주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에 대한 열정을 갖고 1891년 필라델피아로 돌아갔다. 헨라이는 1908년 지금의 링컨센터 근처 브로드웨이에 헨라이미술학교를 세우고 에드워드 호퍼를 포함한 뉴욕 미술학교 제자들 몇몇을 합류시켰다. 그는 1915-28년에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저서 『미술 정신 The Art Spirit』(1923)에서 자신의 미학을 집대성하여 미국과 유럽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존 슬론은 헨라이의 절친한 친구이자 제자였다. 헨라이는 몇 년 동안 화화를 부업으로, 삽화를 본업으로 여겨온 슬론에게 회화를 정식으로 시작하도록 권유했다. <남쪽 해변의 일광욕하는 사람들>(1907~08)에서와 같이 슬론은 거리에서, 혹은 유흥지에서 바라본 일상의 장면을 주로 그렸다. 코니아일랜드, 유니언 스퀘어, 바워리 가의 전형적인 일상장면에 관심이 많았으며, 또한 헨라이처럼 강변의 풍경을 음울하고 단조롭게,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극적이고 역동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슬론의 사회적 사실주의는 늘 객관적 묘사일 뿐 비판적이거나 선동적이지 않았다. 1931년에 미국 정경회화의 본거지인 아트 스튜던츠 리그의 교장에 선출되어 애시캔파의 원칙을 계속 추진해나갔다. 그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화가로, 미학적으로는 뛰어나지만 때때로 깊이가 없이 많은 기교를 부린 헨라이의 화려함에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리투아니아의 카프나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벤 샨Ben Shahn(1898~1969)은 1930년에 아프리카를 주제로 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당시 경제공황의 시기로 실업과 사회불안 속에서 사회비판을 주제로 하는 경향이 표현되었다. 1931년에 그때까지 관심을 기울여온 심미적 회화를 거부하고 사회비판의 주제를 다룬 <드레퓌스 사건>,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1931~32) 등의 시리즈를 과슈나 수채로 그려 자신의 고유한 양식을 확립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10월 프랑스에서 유대인 드레퓌스의 간첩 혐의를 둘러싸고 정치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다.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포병대위 드레퓌스A. Dreyfus가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종신유형의 판결을 받았다.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정보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으나, 그가 유대인이란 사실이 혐의를 받게 한 것이다. 그 후 군부에서는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확증을 얻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가 진상발표를 거부하고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 드레퓌스의 가족이 1897년 11월 진범인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했지만, 군부는 형식적인 신문과 재판을 거쳐 그를 무죄 석방했다. 그 후 진실과 정의를 사랑하고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소설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논설로 사건이 재연되었다. 졸라는 드레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부의 의혹을 신랄하게 공박하는 논설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으로 1898년 1월 13일자 『오롤』지에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프랑스 전체가 정의, 진실, 인권옹호를 부르짖는 드레퓌스파, 혹은 재심파와 군의 명예와 국가질서를 내세운 반재심파로 분열되었다. 마침내 이 사건은 한 개인의 석방문제라는 차원을 넘어 정치적 쟁점으로 확대되면서 제3공화정을 위기에 빠뜨렸다. 군부는 1898년 여름 그리고 1899년 9월에 열린 재심 군법회의에서 드레퓌스에게 거듭 유죄를 선고했으나, 대통령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무죄 확인을 위한 법적 투쟁을 계속한 끝에 드레퓌스는 1906년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복직 후 승진도 했다.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에서 있었던 유명한 살인사건 재판인 사코와 반제티 사건는 1920년부터 7년 이상 끌어오다가 피고인인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의 사형으로 끝났다. 1920년 4월 15일 매사추세츠 주의 사우스브레인트리에서 살해된 자는 구두제조회사의 경리직원 F.A. 파민터와 종업원 급료를 지키기 위해 파민터와 함께 있던 경비원 알렉산드로 베라르델리였다. 그해 5월 5일 이탈리아인 사코와 반제티가 범인으로 체포되었는데, 두 사람은 1908년 미국에 이민 온 구두제조공과 생선행상인이었다. 두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자 사회주의자와 급진주의자들이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하며 항의했다. 증인이 사람을 잘못 알아보았음을 이유로 재심을 요구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925년 11월 18일 살인죄 판결을 받은 첼레스티노 미데이로스라는 사람이 모렐리 갱단과 함께 위의 범죄사건에 관여했다고 자백했다. 당시 심리담당 판사가 추가의 증거를 들어 재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대법원은 판단의 번복을 거부했다. 사코와 반제티는 1927년 4월 9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후 전 세계적으로 대중 집회에서 이 사건에 대한 거센 항의가 빗발치자 A.T. 풀러 주지사는 독립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927년 8월 3일 풀러 주지사는 사면권 행사를 거부했고, 자문위원회도 그의 입장을 지지했다. 세계 주요도시에서 항의데모가 계속되었고,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는 폭발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던 사코와 반제티에게 1927년 8월 23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 후 모렐리와 그 갱단의 유죄가 입증되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초기 작품은 칙칙한 사무실, 반쯤 빈 레스토랑, 쓸쓸한 모텔 방, 고립된 주유소 등 가장 평범한 장소에 시적인 통찰력을 불어넣으며 조국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기록했다. 어두운 색으로 그려졌으며, 따뜻한 느낌의 갈색, 짙은 회색, 검은색이 주조를 이룬다. 기법에서는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와 같은 네덜란드 바로크 화가들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에두아르 마네의 영향도 적잖다. 호퍼가 파리에서 그린 그림들은 일견 이후의 시기에 그린 것들과 달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초기 작품에는 그가 평생에 걸쳐 추구하게 될 면면이 담겨 있으며, 몇몇 요소는 후기 작품에서 거의 편집광적으로 구현된다. 주로 풍경과 도시의 장면을 그렸지만 평생 여성 누드를 병행했다. 누드화는 오로지 아내 조세핀 호퍼만을 대상으로 하는 편집광적으로 추구되었으며, 관음성이 농후하다. 이후 여성에 대한 관음적 시선은 보다 너그러운 전망으로 변모한다. 이중적 심리 기제를 담는 수법으로 충만한 욕망과 무의식적 성의 맥락을 병행했다.

<도시의 아침>(1944)은 엷은 빛만 침투할 뿐 어두운 방이 여성을 구름 한 점 없는 환한 바깥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동굴 속에 가둔 듯이 보인다. 누드는 명암 효과로 부각되지만 여성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혹적 자태는 보이지 않는다.

호퍼는 늘 개인주의자로 남아 있었으며, 1962년의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미국 정경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리려고 노력했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는 그의 회화에서 느낄 수 있는 고독과 향수에 대해 “관람자가 그런 걸 느낀다고 하더라도 이는 결코 의도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는 미국 정경의 한 측면을 그린 화가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회화에는 사회적 사실주의자들의 공공연한 사회적인 주장이 없고, 독일 표현주의자들의 떠들썩함도 없다. 그의 회화는 정적과 침묵으로 종종 강렬한 존재감을 주며 심리적 반향을 일으키는데, 데 키리코의 회화에서 받는 것과 유사한 충격이다. 데 키리코가 현실처럼 보이는 비현실을 만듦으로써 그런 효과를 얻은 데 반해 호퍼는 친숙하고 현실적인 것을 보여줌으로써 동일한 효과를 얻었다.

아이오와주 애너모서 태생의 그랜트 우드는 1920-28년에 몇 차례에 걸쳐서 유럽을 방문했으며, 뮌헨에서 독일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에서 감동을 받았다. 귀국 후 <개척자 터너>와 자기 어머니를 모델로 한 <화분을 든 여인>에 이어 <미국의 고딕>(1930)을 그려 유명해졌다. 미국의 시골 분위기를 청교도적 이미지로 만든 <미국의 고딕>은 고딕 양식의 집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우드는 “그들(그림 속의 앉아 있는 인물들, 즉 우드의 여동생과 치과의사)의 성격을 진솔하게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들이 실제 생활 속에 있을 때보다도 더 그들처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1930년 여름 우드는 아이오와주 시골을 여행하던 중 이 그림의 배경이 된 고딕 양식의 집을 발견했다. 그는 집과 두 모델을 따로 그린 뒤 합성했다. 우드가 지방주의 회화를 주목할 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찰스 R. 실러는 인적이 없는 산업화 현장의 기하학적 형태들에 매료된 실러는 정밀주의에서 가장 유명한 <상갑판 Upper Deck>(1929)을 그렸는데, 그것은 정기선 머제스틱 호의 갑판에서 찍은 사진을 기초로 통풍장치와 여러 기계들을 그린 복잡한 구성의 작품이다. 독일 선박회사의 광고지에서 발췌한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다.

정밀주의 화가들이 산업에만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지아 오키프는 뉴욕의 번쩍거리는 마천루들뿐만 아니라 뉴멕시코 주와 관련이 있는 풍경과 오브제들을 그렸다. 사진 확대의 미적 장점을 이용해 꽃, 식물, 골반 뼈 같은 생물형태적인 사물들을 가까이서 관찰하면서 형식적 특성과 눈부신 색채를 표현했다. 꽃을 확대한 형상으로 크기와 비례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그녀의 수법은 사진의 방식과 같았다. 그녀가 확대한 꽃은 종종 성적 은유로 이해되기도 했다. <접시꽃과 양의 머리>(1935)는 뉴멕시코주 사막 지역을 경외하는 의미로 그린 것이다. 메마른 이 지역에 매료된 그녀는 매년 일정 기간을 그곳에서 작업하다가 1946년 스티글리치가 타계하자 그곳에 정착하여 은둔생활을 했다. 그녀의 주제는 두개골, 짐승의 뼈, 식물의 기관, 조개껍데기, 산 등의 자연을 확대한 것이었다. 윤곽선이 율동적이며 자연에 대한 탐미적 경향이 나타났다. 선명한 색을 사용하면서 엷은 색조의 물감으로 원근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대상에 강약을 부여했다. 그녀는 “뼈들은 내가 아는 어떤 것보다 아름답다. 그것들은 살아 돌아다니는 동물들보다 더 살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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